시민 케인
- 감독
- 오슨 웰스
- 제작년도
- 1941
- 출연
- 오손 웰스, 조셉 코튼, 도로시 커밍고어, 아그네스 무어헤드, 루스 와릭, 레이 콜린스, 어스킨 샌포드, 에버렛 슬로언, 윌리엄 올랜드, 폴 스테워트, 조지 컬러리스, 포투니오 보나노바, 거스 쉴링, 필립 반 잔트, 조지아 배커스, 해리 새논
올해 리스트는 이전과 비교해도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Faces places >(아네스 바르다/JR, 2017)은 내가 올해 보았던 영화 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이 선정했을 것 같아서 넣지 않았다. 그리고 공개된 리스트를 보니 역시나여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 더 포스트The post >(2017), <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2018)과 같은 환상적인 스필버그 영화들이 나왔지만 <더 포스트>에 대해서는 분명 나보다 더 길게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해서는 올해 지나치게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올해는 유달리 넷플릭스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뽑았다. 만약 < 로마Roma >(알폰소 쿠아론, 2018)나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에단코엔/조엘코엔, 2018)을 보았다면 그것들을 추가하느라 애를 먹었을 수도 있다. 이들 영화를 뽑은 건, 극장에서 본 영화들과 경쟁할한 작품들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이 리스트를 통해 이들에게 극장 상영의 가능성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려나. 레이디 버드 우선 나는 < 레이디버드Lady bird >(그레타 거윅, 2017)와 < 패딩턴 2Paddington 2 >(폴 킹, 2017)을 뽑았다. 이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으니 둘 다 놀랄 만큼 영리한데도 불구하고 선량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특히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이 두 특성이 함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영화들은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선의와 품위를 지키면서도 좋은 게 좋다는 흔해빠진 자세 따위는 취하지 않는다. <레이디버드>는 사내아이들의 독백과 불평으로 도배된 영화판에 정면 도전한 여자아이들의 이야기이고, <패딩턴 2>는 현대 영국 사회의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칼날을 꽂는다. 거의 전쟁터에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두 영화는 끝까지 냉소나 경멸 없이 선하다. 이야기꾼들은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사적인 리스트이긴 하지만 < 델마Thelma >(요아킴 트리에, 2017)은 그 중에서도 유달리 사적인 이유로 뽑힌 작품이다. 아, 물론 좋은 영화다. 재미있기도 하고. 하지만 이 영화를 뽑은 건 종교와 초능력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와 그 가차 없는 해법이, 한참 이야기 길이 막혀 고민이었던 나에게 하나 이상의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의 자존심이 있으니 이 영화의 해법들을 그대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Ex libris: New york public library >(프레더릭 와이즈먼, 2017)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이 러닝타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 >(2018, 왕 빙) 대신 넣은 다큐멘터리는 에롤 모리스의 <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Wormwood >(2017)이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애매하다. 상당히 긴 재현 장면이 들어간 다큐멘터리이고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익숙한 에롤 모리스의 스타일에서도 조금 벗어나 있다. 과연 이게 얼마나 도전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텔레비전 세계에서는 꽤 흔한 형식이니까. 하지만 형식이 어떻건, 에롤 모리스는 여전히 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명탐정이며 기가 막힌 이야기꾼이다.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에는 일급 추리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근사한 서스펜스와 발견의 쾌락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의 주제가 그 쾌락에 묻히는 것도 아니다. 소공녀 < 소공녀 >(전고운, 2017)는 이 리스트에 오른 유일한 한국 영화이다. 아마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 장편 중 가장 자기만의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작품일 것이다. <소공녀>는 요새 한국 독립영화계의 분노와 억울함도, 보이지 않는 형님 앞에서 굽신거리는 주류영화의 비굴하고 밋밋한 분위기도 없다. <소공녀>는 그냥 차갑고 정확하게 세상을 보고 말없이 자기 길을 가며 그 때문에 올해의 한국 영화가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아름답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 서던 리치: 소멸의 땅Annihilation >(앨릭스 갈런드, 2018)은 올해 나온 미국 주류 SF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일 것이다. 많이들 타르코프스키의 두 영화 < 솔라리스Solaris >(1972), < 잠입자Stalker >(1979)와 비교하는데,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자의식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다. 무심하게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영역을 넓힌 작품인 것이다. 미국 외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고 생각한 배급업자들의 소심함이 아쉬울 뿐이다. 다들 호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절이고, 『보그』지의 모 평론가 의견과는 상관없이 올해의 성취도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두 편을 뽑았다. < 유전Hereditary >(아리 에스터, 2017)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가장 악랄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영화였고, 토니 콜렛이 이 영화로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다면 세상엔 정의는 없다. < 힐 하우스의 유령The huanting of hill house >(마이크 플러너건, 2018)은 스트리밍에서나 가능한 10부작 미니시리즈의 형식을 최대한 살린 작품으로 귀신 들린 집 소재의 온갖 테마를 총동원한 장대한 오라토리오와 같았다. 올해 부천영화제 최고 히트작인 < 호랑이는 겁이 없지Tigers are not afraid >(이사 로페즈, 2017)는 눈높이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멕시코 마약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대신,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아이들의 열망과 상상을 반영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정곡을 찌른다. 마지막으로 다룰 영화가 바로 <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오슨 웰스, 2018)이다. 아마 이 영화는 열성 시네필에게 넘겨주고 나는 보다 장르적인 작품들을 다루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바람의 저편>이다. 독립적인 영화로 보는 건 큰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물론 그렇게 보아도 재미있는 작품이긴 한데, 그래도 결국 영화의 제작과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생각해보라. 내레이터가 현대 디지털 모바일 환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작되는 오슨 웰스의 영화이고, 존 휴스턴, 수잔 스트라스버그, 머시디스 매케임브리지, 릴리 팔머와 같은 고인들이 출연하는 신작이다. 2018년에 완성된 작품이지만 시네필들은 몇십 년 동안 제목을 알고 있었던 영화이다. <바람의 저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SF의 언어를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골라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의 저편>은 암만 봐도 고전적인 20세기 SF 소설의 설정에서 튀어나온 영화처럼 보인다. 초현실적인 정체성 혼란을 겪는 존재가 주인공인 시간여행 이야기인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 유럽에서 돌아온 오슨 웰스는 그의 경력을 마무리 지을 마지막 걸작 <바람의 저편>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만들다 만 수많은 미완성 영화들처럼 이 작품도 수많은 암초를 만나고 결국 웰스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 뒤 수십 년 동안 제목과 클립들만 떠돌다가 그의 후배였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에 의해 완성된다. 월터 머치가 <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 때 그랬던 것처럼 편집자 수준에서 마무리 지은 게 아니라 최첨단 인공지능까지 동원해 의미도, 맥락도 알 수 없는 수백 시간의 푸티지를 가까스로 정리해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 영화의 내용이란 것이 주변 사람들과 제작자를 괴롭히면서 찍던 마지막 영화 <바람의 저편>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죽은 천재 영화감독의 마지막 나날을 모큐멘터리로 보여주며 중간중간에 그 미완성 영화를 끼워 넣는 식이다. 이 영화를 완성한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를 모델로 한 인물로 출연했기 때문에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는 건 더 힘들어진다. 오슨 웰스의 스타일이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이 영화가 촬영되었던 70년대엔 극히 드물었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럽다. <바람의 저편>은 <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지만 놀랄 정도로 21세기스럽다. 21세기 모바일 환경에 대한 대사는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추가한 것이지만 영화의 스타일 자체는 그냥 21세기의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온전한 모습으로 70년대에 개봉되었다면 미국 영화의 흐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바람의 저편 훌륭한 SF 서사가 대부분 그런 것처럼 <바람의 저편>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영화가 21세기 오슨 웰스가 만든 영화처럼 보이는 건 진짜로 오슨 웰스의 개성 때문인가, 아니면 영화를 완성한 사람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담고 있는 오슨 웰스의 스타일을 모방했기 때문인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 영화의 시대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모든 것들이 뛰어난 마술사였던 오슨 웰스 자신의 깜짝쇼일 가능성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겠다.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완벽한 마술쇼였던 < 거짓의 F F for fake >(1973)를 본 관객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198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국가의 학살을 시민의 항쟁으로 맞섰지만 그 결과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공수부대원들이 자행한 학살의 이미지는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장과 겹쳐지는, 아니 이를 훨씬 능가하는 잔인함으로 기억되었다. 박정희의 18년 체제가 무너진 그 자리, 다시 쿠데타로 들어선 신군부가 바로 그 배후였다. 곧이어 그들은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날조해 국민을 우롱했다. 한국의 극우 독재체제는 이렇게 연장되었다. 한국사회의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전반 영화계는 1970년대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신 정권이 구축한 통제 정책이 승계되었고, 한국영화는 외화 수입쿼터의 대체물로 취급받았다. 당국은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100편 내외로 설정하고, 등록된 20개의 제작사가 각 4편 이상을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1981년도 영화시책 기준). 그리고 2편 이상의 ‘우수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또는 대종상에서 최우수·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91, 87, 97, 91, 81편으로 100편을 넘기지 못했다. 1980년대는 단관 개봉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영화문화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이다. 1980년 12월부터 방영된 컬러 방송으로 컬러TV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인기가 극장 흥행을 잠식해갔다. 1984년 VTR 보급 대수가 50만 대를 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 1980년대는 ‘안방극장’이 제대로 힘을 받기 시작한 때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그랬듯, 한국의 극장가 역시 대형영화와 저예산영화로 생존책을 모색했다. 전자는 70mm 외화의 리바이벌 상영, 후자는 괴기·무협·코미디 장르였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 임권택은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의 그는, 제작자에게는 우수영화를 안겨주는, 영화진흥공사에는 국책영화를 척척 만들어주는 감독이었다. 여러 영화학자에 의해 한국 ‘분단영화’의 기원으로 평가 받는 < 짝코 > 역시 기획의 외관상으로는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반공영화였다. 이는 1980년 관제 영화제인 19회 대종상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고, 1981년 20회 대종상에서 반공영화부문 특별상을 재차 받은 것으로 증명된다. 제20회 대종상영화제부터 우수반공영화상을 특별부문으로 변경해, 최우수반공영화상에도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하기로 했는데, < 짝코 >는 1981년에야 상영되는 바람에 그 첫 수상작이 되었다. 한국영화의 개봉 여부는 관심도 없던 시기였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한국영화의 불황이 극에 달한 이때,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왜 <짝코>를 만들려고 했을까. 실제 영화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직업 감독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193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 은 어린 시절 부친과 삼촌의 좌익 활동으로 그 역시 고초를 겪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3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했다고 한다. 1956년 정창화 감독의 도제로 영화계에 입문, 20대 후반인 1962년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감독 데뷔해 주로 사극과 액션, 전쟁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많을 때는 한 해 7~8편을 만드는 직업 감독으로 다작의 시기를 거쳤다. 그가 장르영화의 대가로 완성된 시기일 것이다.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은 52번째 연출작 < 잡초 >(1973)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적 자의식을 영화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정성일 평론가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한 말을 옮기면 “< 잡초 >가 내 삶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영화라면, < 왕십리 >(1976)는 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기 시작한 영화”다.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는 이장호 , 하길종 등 ‘영상시대’ 감독들이 새로운 한국영화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제부터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구석에 몰린 느낌”을 받았다던 임권택의 회고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이냐라는 뼈아픈 고민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그는 < 족보 >(1978), < 짝코 >, < 만다라 >(1981), < 안개마을 >(1982), < 길소뜸 >(1985) 등 작가주의 감독 임권택으로 평가되는 일련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의 삶이 반영된 한국적인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한국’영화를 찾아가던 시기인 것이다. < 서편제 >(1993)의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100만 흥행 성공, < 취화선 >(2002)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 2015년 102번째 작품 < 화장 >을 연출했다. ‘반공영화’가 아닌 ‘분단영화’ 작가 송길한 과 임권택 이 < 짝코 >의 영화화를 위해 의기투합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시대적 배경과 자기 성찰에 있었다. 그들이 이 영화의 기획에 착수한 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좌절로 끝나고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시점이다. ‘서울의 봄’의 대학생 시위대들이 그리고 광주의 시민들이 ‘빨갱이’로 둔갑되었다. 임권택에게 1980년은 “혼란기에 빠져든다고 해서 놀라기에는 너무 많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온” 자신을 반추할 수 있었던 때다. 그는 송길한 작가와 기존의 국책 반공영화를 벗어나고자 마음먹고, 좌익 빨치산의 이야기를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다. 둘은 한 달 동안 여관방에 틀어박혀, 종군작가 김중희 의 단편소설을 거의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영화는 전투경찰 송기열( 최윤석 )과 빨치산 부대 대장 짝코( 김희라 )의 30년에 걸친 비극을 세련된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열강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이 어떻게 개인들을 파멸시키는지 보여준다. 송기열은 평생을 바쳐 짝코를 추적하지만 결국 둘은 오갈 데 없는 부랑아들이 모이는 갱생원에서 만나게 된다. 이미 노인이 된 둘의 비극은 갱생원에서도 계속된다. 송기열은 무장공비 이력의 죗값을 받게 하기 위해 짝코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짝코는 수은을 먹여 송기열을 죽이려 한다. 영화 마지막, 결국 송기열은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짝코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한다. 하지만 이미 사회는 경찰들조차 무장공비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임권택은 영화를 통해 송 경사와 짝코가 국가의 꼭두각시였고, 더 나아가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북한은 열강들의 장기알에 불과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시나리오와 영화 본편을 대상으로 한 두 번의 검열을 통해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삭제되었다. 바로 다음의 두 장면이다. 6·25 특집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한 한 미국인 교수가 한국전쟁이 열강들의 국지전 시험장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갱생원을 도망 나온 송기열과 짝코를 만난 경찰이 망실공비가 뭐냐고 물어보는 장면으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에는 검열의 흔적만 남아있다. 전자의 경우 TV에서 6·25 프로그램이 잠깐 나온 후 이를 본 짝코가 송기열에게 “저 사람들 말이 진짜라면 말이시… 나나 거그나 불쌍한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는 장면만 남았고, 후자는 “망실공비?”라는 대사는 지워진 채 경찰의 입 모양만 남았다. 이는 “망실공비도 몰라”라며 송기열이 애처롭게 반응하는 대사에서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권택은 흔적만 남기는 방식으로 검열에 순응했다. 하지만 영화의 본질적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 대목의 아쉬움을 표했지만, 도리어 지금의 우리는 장르영화 그리고 국책영화로 단련된 그의 내공을 짐작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해 연속 반공영화상을 휩쓸며 국책 반공영화로서 인정받았다. 개인의 비극을 쫓아가는 정교한 플래시백 영화는 송기열과 짝코의 장장 30년에 걸친 비극적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정교하게 구축된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어쩌면 < 짝코 >는 태생적으로 서구의 영화 문법인 플래시백이 한국영화만의 그것으로 훌륭하게 수용된 첫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김기영 의 < 이어도 >(1977)에서의 플래시백이, < 시민 케인 > (1941)와 < 라쇼몽 >(1950)의 그것에서 출발해 그만의 스타일로 뒤틀어진 것이라면, <짝코>의 플래시백은 고전적 의미에서 관객을 배려하면서도 임권택 이 하려는 이야기, 그리고 메시지와 훌륭하게 조응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8번 정도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송길한과 임권택이 공들여 배치한 플래시백은, 송기열의 입장에서, 짝코의 입장에서, 때로는 송기열이 짝코를 초대해 함께 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각자의 경험에서 이야기가 반복되며, 플래시백의 대미를 장식한다. 좌우익의 비극적 대립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하나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현재를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8번의 플래시백은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송기열은 갱생원에서 짝코를 발견했지만 그를 데리고 탈출할 형편이 아니다. 합숙소에서 연속극을 보던 송기열은 첫 번째 플래시백으로 들어간다. 전투경찰로 활약해 마을에서 인정받고 가정도 행복하던 시기다. 그날 밤 송기열은 짝코의 침상으로 가 두 번째 플래시백으로 이끈다. 송 경사가 짝코를 생포하지만 그를 놓치고 마는, 둘의 공통된 기억이다. 세 번째는 송기열을 죽이기 위해 거울 뒷면에서 수은을 긁어내는 짝코의 것이다. 지리산에서 수은 가루를 먹고 자살하려는 점순( 방희 )을 말린 뒤 송 경사에게 체포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네 번째 플래시백은 다시 송기열의 것이다. 짝코의 고향집에서 그를 놓치고 불법 총기 소지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지서장이 된 복만을 때리고 감옥까지 다녀온다. 불운은 연달아 닥친다고, 고향에 돌아오니 아들마저 죽었다. 다섯 번째 플래시백은 송기열이 짝코에게 자신을 파면한 상사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 장면에서 들어간다. 네 번째 회상의 앞 이야기로, 아내까지 자살하게 된 송기열의 비극에 짝코를 동참시킨 것이다. 합숙소의 장기자랑 장면, 짝코의 시점에서 여섯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속초에서 그와 화숙( 김정란 )의 도화경이 마치 판소리 소리꾼의 ‘아니리’처럼 펼쳐진다. 이를 듣던 송기열의 시점에서 그가 화숙을 찾아간 뒷이야기가 일곱 번째 회상으로 펼쳐진다. 계속되는 장기자랑, 송기열은 다리가 부러지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마지막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다. 그는 짝코가 탄 기차를 쫓다가 택시가 전복되어 다리마저 불구가 되었다. 이후 부랑아가 된 송기열은 여인숙에 들어갔다가, 옆방에서 쥐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짝코와 점순을 발견한다. 갱생원의 변소간에서 짝코가 송기열에게 그날 밤 점순의 안부를 물으며, 다시 짝코의 시점에서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점순을 사창가에서 만나 둘이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처럼 30년을 쫓고 도망친 둘의 이야기가 합쳐지며 영화는 마지막을 향한다. 짝코를 생포한 송 경사 “한국 사람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영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에서 정성일 의 평가처럼, < 짝코 >는 198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원형임에 분명하다. 그가 장르영화를 통해 축적한 스타일이 만들려는 주제, 하고 싶은 이야기에 걸맞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간 갈고닦은 전쟁 신의 연출은 잠깐 등장해도 존재감과 만만치 않은 의미를 발산한다. 짝코와 임신한 점순이 토벌대의 총탄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이 그렇다. 화면에 슬로모션이 걸리면서 등장하는 김영동 의 국악은 그 조합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개인의 비극을 더 넓은 차원으로 환기시키는 데 일조한다. 임권택이 “국악을 체계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영화부터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송기열과 짝코는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과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짝코는 숨을 거두고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다. 사실 이 장면은 결국 그들이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육신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송기열은 아주 짧은 회상으로 아내와 아들과의 단란했던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송길한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 장면이 호남선이 아닌 원주행 기차를 타고 아예 반대로 가는 것으로, 심의 대본에는 부산행 기차를 잘못 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시나리오의 정보를 배제한다. 점순과 짝코가 도망가는 장면에서 김영동의 국악이 흐른다. 1980년대 전반의 대표 장르 국풍 ’81을 위시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우민화하는 ‘3S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는 검열이 느슨해졌고 기다렸다는 듯 1980년대를 장식하는 에로티시즘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1981년부터 등장한 소극장 그리고 대여용 비디오의 붐이 에로영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 애마부인 >은 1980년대 에로영화의 어떤 상징이 되었다. 성적 스펙터클의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에로 장르는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것뿐만 아니라 ‘토속에로’라는 별칭을 얻으며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에로영화 일변도의 피로감 때문이었을까. 그 반대편에는 다양한 결의 멜로드라마가 관객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우드 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국영화 특유의 ‘신파적’ 멜로드라마를 극복한, 어떤 의미에서는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빌려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배창호 가, 당대 관을 사로잡는 세련된 화법의 멜로드라마로 충무로의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에 태어난 영화 중에 < 젊은 날의 링컨 > < 역마차 >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이 연재의 초기에 다뤄졌다. 남은 세 편의 영화 중에서 < 롱 보이지 홈 >과 < 타바코 로드 >를 이제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모호크족의 북소리 >(1939)는 별도로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직 좋은 점을 찾지 못했다.) <롱 보이지 홈>(1940)은 촬영은 훌륭하지만 캐릭터나 이야기에서 포드적인 복합성이 부족한 영화, <타바코 로드>(1941)는 장점을 찾기 힘든 총체적인 실패작이라는 것이 존 포드 연구자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평가다. 물론 극소수의 지지자도 있다. 나로선 두 영화가 걸작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엔 포드의 영화 이력의 중요한 계기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먼저 <롱 보이지 홈>을 만나보자. 이 영화에서 먼저 떠올려야 할 이름은 그렉 톨랜드Gregg Toland(1904~1948)이다.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44세의 나이에 영면한 전설의 촬영감독 그렉 톨랜드는 존 포드와는 두 영화(< 분노의 포도 > < 롱 보이지 홈 >)에서 함께 작업했고, <롱 보이지 홈> 다음에 오슨 웰스의 < 시민 케인 >(1941)을 찍었다. 천재였지만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25세의 청년 오슨 웰스에게 촬영에 관한 모든 것을 그렉 톨랜드가 개인교습을 통해 가르쳤고, <시민 케인>의 성취가 웰즈의 것인 만큼 톨랜드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웰스는 <시민 케인>의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과 톨랜드의 이름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시민 케인> 촬영장의 오슨 웰스와 그렉 톨랜드 그런데 이미 할리우드의 거목으로 군림하고 있던 존 포드와의 작업은 어땠을까. 이에 대한 자료나 증언이 별로 없어 정확한 사정을 알기는 힘들다. 다만 존 웨인은 < 롱 보이지 홈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영화들의 경우) 촬영감독이 최대한의 효과를 위해 구도를 잡는 일은 대개 존 포드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을 때는 반대로 촬영감독 톨랜드가 존 포드를 돕는 쪽이었다. <롱 보이지 홈>은 아마도 가장 아름답게 촬영된 영화일 것이다.” 이 말이 맞다면, 적어도 화면 구성에선 그렉 톨랜드가 주도적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존 웨인의 말대로 < 롱 보이지 홈 >의 화면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런데 여기엔 서사와 영상의 미묘한 불협화음이 있다. < 분노의 포도 >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이 불협화음이 포드와 톨랜드의 현실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을 근거는 없지만, 당대 최고의 감독과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이 함께 빚어낸 영화가 모종의 불협화음을 낳는다는 것은 얼마간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면에.서는 존 포드와 그렉 톨랜드는 최상의 조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존 포드가 무성영화 시절부터 전경, 중경, 후경을 함께 담는 심도화면에 몰두해왔고, 무르나우에 감화된 뒤로 종종 표현주의적 조명과 화면 구성에 심취했음을 알고 있다.(< 네 아들 > 편 참조) 딥포커스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표현주의적 영상의 대가인 그렉 톨랜드는 포드의 이상적 동반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표현주의적 영상에 종종 이끌리긴 했지만 포드는 그 세대의 다른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사실주의자였다. 적어도 포드의 유성영화에서 카메라는 초월적이거나 자기 과시적인 시각 기계가 아니었다. 카메라의 시선이 인간의 시선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인지되거나 카메라의 존재가 관객에게 의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라이징 오브 더 문 > 3부의 사각촬영은 드문 예외다.) 하지만 젊고 야심적인 톨랜드는 카메라의 비인칭적 시선과 기계적 역량에 몰두함으로써 종종 카메라의 권능을 과시하며 일상적 지각양식에 충격을 가한다. 심도화면을 찍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해 포드가 아서 밀러를 기용해 찍은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의 한 장면(#1)과 톨랜드가 찍은 < 시민 케인 >의 한 장면(#2)을 비교해보자 #1 #2 포드의 심도화면에는 전경의 사물, 중경의 인물, 후경의 또 다른 인물이 극히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이것이 심도화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며, 화면의 다양한 결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놓치기에 십상이다. 반면 딥포커스 기법을 과시하는 톨랜드의 심도화면에는 전경의 인물은 클로즈업으로 후경의 인물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대비되어 있어, 누구나 이 구도의 작위성을 의식하고 인물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시각적 수사학 자체를 감지하게 된다. 이 쇼트는 두 인물을 따로 찍어서 합성한 것인데, 톨랜드는 다른 몇 장면에서도 딥포커스 효과를 위해 합성을 시도했다. 앙드레 바쟁은 < 시민 케인 >의 “바로크적 요소의 과도함”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의 딥포커스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각적 공간의 전체를 동일한 선명도로 포착”함으로써 “지각 가능한 연속성을 회복시켰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 찬사는 오히려 존 포드나 장 르누아르에게 어울릴 것이다. 오슨 웰스는 딥포커스를 즐겨 사용한 이유를 묻자 “인간의 눈이 보는 세상은 딥포커스 화면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웰스 역시 톨랜드의 딥포커스가 지닌 수사학적인 면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렉 톨랜드는 과장된 딥포커스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심도화면에도 뛰어났으며, 윌리엄 와일러와의 작업(< 폭풍의 언덕 > < 작은 여우들 >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에서 특히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와일러의 < 데드 엔드 >(1937)에서 이미 톨랜드는 < 시민 케인 >의 수사학적 딥포커스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로선 톨랜드의 오래된 야심이 또 다른 천재 야심가 오슨 웰스를 만나 만개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 롱 보이지 홈 >으로 돌아오자. 유진 오닐의 네 편의 희곡을 더들리 니콜스가 각색한 이 영화는 2차대전 시 영국 화물선 선원들의 생활을 담고 있으며, 중심인물이 따로 없는 앙상블 드라마이다. 선상이 무대의 거의 전부이며, 나머지 공간도 항구로 제한되어 있다. 선원들은 배라는 폐쇄공간에의 감금을 선택한 존재, 바다에 자신을 유폐한 자들이다. 그들은 서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육지의 기억으로부터 바다와 배로 도피한 것이다. 우울한 현자와도 같은 선원 당키맨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을 가장 잘 다루는 방법은 기억을 잊는 거야. 남자가 바다로 나설 때는 육지에 관한 건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돼. 육지는 당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거든. 내게도 나쁜 기억이 있지. 그건 전부 육지에서 온 거야. 나는 육지를 버렸고, 육지도 나를 버렸어.” 집으로 가는 머나먼 항해. 이 제목은 반어적이다. 올슨을 제외하면 선원 누구도 집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배를 떠난다면 그건 귀가가 아니라 죽음이다. 폭풍우로 부상당해 죽거나(양크), 독일군의 습격으로 죽거나(스미스, 드리스콜). 그러지 않더라도 그들은 소명도 전망도 없이 조금씩 죽어갈 뿐이다. 포드의 서부극을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운동의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웨건 마스터 > 편 참조), 죽음을 향해 바다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서부극의 염세적 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가 유진 오닐과 가까운 친구라 해도 이처럼 염세적인 희곡에 끌린 이유는 불확실하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사건도 없고 운동감을 살릴 여지도 제한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더구나 대사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 포드로서는 촬영에 거의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운명론과 폐소공포증의 공기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그렉 톨랜드라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은 아마도 이 프로젝트의 최상의 동반자였을 것이다. < 롱 보이지 홈 >의 첫 시퀀스는 우리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막이 열리면 밤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섬 남자들의 노래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섬 여인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나무에 기대 유혹하듯 몸을 비튼다.(#3) 그리고 기항하지 않은 채 연안에 정박 중인 배의 거대한 실루엣이 위협적으로 등장한다.(#4) 갑판의 선원들은 노랫소리를 향해 불안과 망설임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서 있다.(#5, #6) 지금이 전시임을 알려주는 라디오방송 외엔 대사 없이 5분간 지속되며, 귀기와 외설과 불안과 망집이 교차하는 이 시퀀스는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다. #3 #4 #5 #6 선원들은 섬에 닿지도 바다로 가지도 못한 채 그사이에 멈춰 있다. 한쪽에는 초대인지 위협인지 불분명한 북소리와 노랫소리, 누군가를 유혹하려는지 아니면 무엇엔가 이미 취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여인들의 에로틱한 몸놀림이 있다. 반대쪽에는 라디오방송이 암시하는 전쟁 그리고 바다가 내재한 상시적인 재난의 위협이 있다. 말하자면 지금 선원들은 신화적 유혹과 역사적 사건 사이에 놓여 있다. 물론 어느 쪽이나 위험하다. 선원들은 그 경계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다. 경계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거나 정박할 수 없는 곳이며 그들은 이제 곧 하나씩 사라질 것이다. < 롱 보이지 홈 >이 도피를 위해 바다를 택했으나 에로스의 유혹도 역사의 위협도 피하지 못한 사내들의 이야기라면, 이보다 더 멋진 오프닝 시퀀스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성취의 반 이상은 그렉 톨랜드의 것으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전경의 피사체를 극대화한 특유의 딥포커스, 실루엣 효과를 과시하는 빛과 어둠의 능란한 대조, 현란한 앵글 사용은 < 시민 케인 >에서의 만개를 예고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에서 톨랜드의 촬영과 포드의 서사에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있다고 나는 느낀다. 불협화음의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이 오프닝 시퀀스는 과도하게 멋지다. 이후에 이어질 본편보다 5분 동안의 오프닝이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본편이 빈약하다기보다 오프닝과 본편이 이질적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오프닝에서 예기된 모호하고도 매혹적인 대립항들의 긴장이 본편에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오프닝에는 신화적이고 몽환적인 기운이 가득하지만, 본편은 대부분 사실적인 사건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톨랜드의 시각적 수사학이 포드의 배우들의 연기 방식에 맞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다. < 시민 케인 >은 연출과 촬영뿐만 아니라 50년의 세월을 연기한 배우 오슨 웰스의 연기력으로도 칭송받았다. 하지만 웰스의 연기는, 케인이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시적이고 연극적인 제스처로 가득하다. 톨랜드의 시각적으로 과장된 프레임이 웰스의 자기 과시적 몸짓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포드의 배우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포드는 할리우드 고전기 감독 중에서도 양식적 연기, 연극적 연기를 가장 멀리한 사람이며, 배우가 지닌 고유의 존재감을 가장 존중한 사람이다. 또한 그의 영웅들은 앞서 여러 영화에서 보았듯이, 과시하기는커녕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앞서 예로 든 한 장면(#2)에서 웰스의 일그러진 얼굴은 딥포커스 화면의 전경을 가득 채울 때 그는 무언으로 자신의 분노와 인내를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 롱 보이지 홈 >에서 존 웨인의 얼굴은 어떤가?(#7) #7 이 장면 외에도 여러 쇼트에서 웨인은 프레임의 전경을 채우지만, 그의 얼굴은 텅 비어있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연기한 올슨은 이 앙상블 드라마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약한 인물이다. < 롱 보이지 홈 >에는 시각적으로는 강렬하지만 공허한 쇼트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다음은 다른 사례다. #8 #9 #10 인물(스미스)이 프레임의 수직선을 질주하다 소실점 밖으로 사라진다. 이런 부류의 심도화면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톨랜드는 달리는 인물이 점이 될 때까지 찍으면서 화면의 깊이를 과장한다. 문제는 바로 다음 쇼트에서 인물이 쉽게 붙잡힌다는 것이다. 공간의 아득한 깊이와 소실의 운동이 다음 쇼트에서 간단히 부정될 때, 이런 시각적 수사학이 장식적으로 보이지 않기란 힘들다. 몇 가지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 롱 보이지 홈 >을 좋아한다. 사적인 10베스트에 넣기는 망설여지지만 이 영화의 소란과 활력과 어둠을 사랑한다. 하지만 포드의 유성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시각적 수사학의 과잉이 마음에 걸렸다. 존 웨인의 진술이 맞다면 그 과잉은 < 시민 케인 >과 < 작은 여우들 >을 비슷한 시기에 찍으면서 정점에 이른 그렉 톨랜드의 의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물론 톨랜드 역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수사학적 과장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는 누가 뭐래도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촬영감독이었으며, 나는 그가 촬영한 영화 중에서 윌리엄 와일러의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7)를 가장 좋아한다.) 존 포드는 표현주의적 구도와 조명에 심취했지만, 그 한계도 이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을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포드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 고도의 균형을 향해 더 나아가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