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
- 감독
- 고희영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이동우, 임재신, 장필순, 김은숙, 임주현, 김진선, 이명재, 고승재, 유승호, 최재석, 김진희, 이다영, 김다혜, 웅산, 오정택, 성기문, 김윤태, 찰리 정, 김정균, 스즈키 히사츠크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 Archives Korea 1930-1940 >(이하, <AK>)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 영상을 남긴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 1871~1942)의 생애를 중심으로 지난 글 에서 충분히 소개했다. 조악한 화질의 시각자료와 모호한 문헌으로 흐릿하게 전해지던 당시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송두리째 담은 이 필름 릴들을 보면, 이것이 과연 개인적인 취미의 수준이었는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어쩌면 평생 남몰래 하나의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관한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던 헨리 다거 (Henry Darger, 1892~1973)와 같은 ‘이름 없는 예술적 수행자’의 범주로 그를 이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리스씨는 좋은 아키비스트는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 저녁 식사 후에 영사기에 걸고 함께 담소를 나누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커피를 마시며 홀로 감상하는 정도로 필름을 관리하면 됐을 것이다. 모리스 정도 되는 사람이 이따금 필름 앞뒷면이 뒤바뀐 채 스플라이싱(필름 이어붙이기)되는 줄을 설마 몰랐을까? 화면의 좌우가 뒤집혀 영사되는 것 정도가 무슨 큰 대수라고. 한 이벤트에 대한 푸티지들이 여기저기 나뉘어 붙어 있는 것도 다 알고 놔둔 것일 테다. 굳이 푸티지들을 다 자르고 정리하여 다시 이어 놓을 필요까지야 있겠나, 나중에 혹시 재편집할 일 있을 때 제대로 따다 붙이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설렁설렁 하는 것이 푸티지 재사용이 빈번했던 무성영화필름 시대의 흔한 관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컷들 사이에 적당한 메모가 적힌 리더필름이라도 삽입하든지 간략한 개요들을 따로 정리해서 적어놓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배부른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결국, 100년쯤 후에 조선인들의 후예가 이 엄청난 영상자료를 발견하고 기뻐서 흥분할지 답답해서 흥분할지 알 리 없는 이 위대한 은둔의 수행자는 필름 외에 다른 어떠한 단서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AK>에는 아직 식별되지 않은 인물, 장소, 건물, 사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를 알아내기 위한 추리와 발품 팔이 과정 자체는 괴롭지만 뜻밖에도 미묘하게 즐거운 중독성이 있다. 나는 이런 행위를 ‘식별놀이(Identification Game)’라 부르고 있다. 늘 대수롭지 않은 정보 하나를 밝혀내려 아등바등하는 것이 이상한 집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사소한 정보 때문에 장면 전체의 숨겨진 맥락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야기가 입체적인 버전으로 ‘리부트(reboot)’되는 경우가 있다. 식별놀이는 이 맛에 한다. 아는 지식이 많을수록, 아는 문헌이 많을수록 난이도가 쉬워지겠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느긋하게 과정을 즐기면 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영상 속에서 누가 모리스인가?’에 대한 추론들도 이런 과정의 결과이다. 이 글에서 한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겠다. 식별 미션 : 1930년대 탑골공원에 정말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나? 일제의 공원화 사업이 가지는 이중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일제는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을 기점으로 각 지역의 「시가지계획공원안」에 의해 근대식 공원녹지계획을 수립, 추진했고 경성부는 이보다 조금 이른 1930년, 「경성도시계획서」에 ‘아동공원’을 별도 분류 항목으로 처음 언급했다. 탑골공원의 경우 1932년 12월에 관리주체가 총독부로부터 경성부로 넘어가면서, 이듬해 하반기 즈음에는 ‘아동유희구’(놀이터 기구들) 설치 등의 개수공사를 통해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했으리라 추정한다. <AK>에는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장면들을 포함하여 공원 풍경이 심심찮게 포함돼 있다. 이 중, (당시 탑동공원으로 더 많이 불렸던) 탑골공원으로 추정되는 장면은 흑백 시퀀스 두 군데, 컬러 시퀀스 한 군데가 있는데, 모두 아이들이 미끄럼틀, 회전그네, 정글짐, 시소 등을 타고 노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장면 1] <AK> 01:01:25 부근 [장면 2] <AK> 01:01:40 부근 [장면 3] <AK> 01:02:01 부근 [장면 4] <AK> 01:02:57 부근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6] <AK> 05:10:30 부근 * [장면 3], [장면 4]는 과거 컬러 규격 중 하나인 코다컬러(Kodacolor lenticular) 방식으로 촬영했으므로 화면 전체에 미세한 세로줄이 보임. 따라서 기본적으로 흑백 프린트지만 이를 전용 영사 시스템으로 영사하여 컬러를 구현했었음. [장면 6]은 코다크롬(Kodachrome) 촬영본임. 대략 그럼직하더라도 기본적인 정보부터 맞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큰 억측의 발단이 된다. 영상의 장소가 1930년대 탑골공원인 것, 그리고 이때 탑골공원에 정말 놀이터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빙할 근거를 모을 필요가 있다. 제일 만만해 보이는 [장면 5]부터 추리를 시작해 보자. [장면 5] <AK> 03:37:54 부근 장면 존재와 위치 검증 [장면 5]에는 담장 너머 ‘公園屋(공원옥)’이라는 곳의 간판에서 ‘釀造場(양조장)’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업소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공원 담장 놀이터와의 연관성 등은 그 어떤 활자 기록이나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1925년에 태어나 인사동과 종로 3가 인근에서 살았던 아동문학가 어효선 작가(1925~2004)가 1990년 시점에서 1930년대 생활을 회고하여 남겨 놓은 책 한 권이 큰 도움이 됐다. (...) 그 옆이 공원 뒷문인데 동문과 같다. 지금까지 오른쪽 담을 끼고 돈 셈인데, 뒷문을 보고 서서 왼쪽은, 연못이던 것을 메우고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 미끄럼대, 시소, 뺑뺑이, 정글짐, 철봉틀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다. (...) - 어효선(글), 한영수(사진), “탑골 공원과 뒷문 밖(발췌)”, 『내가 자란 서울 : 1930년대 서울 살림 엿보기』(2판), 대원사, 2003. (...) 공원 담 밑 길에서 인사동 큰길로 나가다가, 오른쪽 끝에 '공원옥'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술을 먹게 된 간단한 술집이다. 저녁 때 이 집에서 고기, 생선 따위를 굽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서 아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드나드는 문에는 세 폭의 천을 위쪽 3분의 1쯤만 이어 박고, 아래쪽은 갈라진 짤막한 휘장을 걸었다. 이 휘장 한 폭에 한 자씩 '公園屋(공원옥)'이라고 써서, 간판으로도 썼는데,실상은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가린 것이다. 사람이 드나들 적에는 이 휘장을 젖히거나 쳐들게 된다. 이 휘장을 차면이라고 한다. (...) - 같은 책, “선술집과 장전(발췌)” 그러니까 이 분의 회고에 따르면 [장면 5]의 장소가 탑골공원인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100% 신뢰도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에만 의지하여 식별놀이를 종결지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이 장면의 오른쪽에 일부만 보이는 벽돌 건물에 주목해 보겠다. 전체 외양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건물이 혹시 북촌 한옥마을 등 조선인을 위한 개량 한옥 단지의 개발자이자 민족사업가였던 ‘건축왕’ 정세권 (1888~1966)이 자비로 건립한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종에 알고보매 그(주: 정세권)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히 깊어서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 장산사(獎産社) 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의 의복,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야 조선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이인 줄을 알았다. - 이광수, “成造記”, 《삼천리》 제8권 제1호, 1936. 1. 1, 242쪽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재점화를 주도했던 정세권의 활약과 그러한 헌신의 상징인 낙원동 회관 건립에 관한 자료는 2017년 발간된 김경민 서울대 환경계획학과 교수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위즈덤하우스, 2017)와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칼럼들에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그 회관은 “ 낙원정 300번지에 위치한 3층짜리(또는 옥탑 층까지 포함하여 4층이라고 말하기도 함) 붉은 벽돌 건물 ”이었고, 당시 신문 보도 내용과도 일치한다. 문제는 이 ‘지번’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의 지번 체계가 광복 이후 얼마간 유지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지만, 최소한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지적원도상의 지번과 현재 지번의 위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대략 영상의 건물 위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의 책에서 추정한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외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번이 표시된 그 어떤 지도에서도 낙원동 300번지를 찾을 수 없었다. 지면상 지번이 생략돼 있거나 디지털 사본 화질이 떨어져 식별이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자료 조회 비교 (좌) "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地番入서울特別市街地圖)", 대한서림(1958)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300번지는 생략되어 있다. (중) “지적원도”, 조선총독부(1917)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제공 :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확인된 300번지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우) 현재(2024) 지적도 등본상의 300번지도 동일한 위치로 추정되며 도로 지목으로 할당돼 있다. 사진과 영상의 비교, 촬영 상황의 재구성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회관 건물의 외양이 포함된 자료일 텐데, ‘이것이 회관 모습이다’라고 밝히는 자료는 사진이 실린 신문기사 1건 과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장산(獎産)》(1931년 2월호) 표지 정도이다. 문제는 [장면 5]의 벽돌집이 일부만 나온 데다가 건물의 측면이라는 점이다. 외양의 특징적 유사성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교차 검증이 되고, 나아가 새로운 정보까지 낚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것을 ‘사실’이라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후의 사진 및 영상자료들도 교차 검증에 도움이 된다. 특히 공중 촬영 사진을 찾는다면 좋을 텐데 지형지물이 잘 구분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아마도 공중 촬영한 사진 중 이 글의 관심 사항인 공원 북서부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연합뉴스의 도광환 기자가 1953년 6월에 촬영한 사진 인 것 같다. ( 오마이뉴스 는 이 소스를 게재를 허가받아 고화질로 공개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장면 5]의 벽돌 건물이 회관이 맞다는 것과 화면에 보이는 부분이 건물의 측면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장면 5]는 공원 서문 쪽에 가까운 담장 근처의 미끄럼틀 장면이 분명해졌다. 또 다른 쓸 만한 자료는 김천길 기자(전 AP통신)가 1956년에 촬영했다는 공중사진 이다. 여기서는 북문 쪽에 더 가까운 공간에 그네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때는 회관 옥상에 1층을 더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북문 쪽 공간과 관련해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 중인 < 조선의 애국일 >(1940) 중 물산장려회관, 공원옥, 공원 내 놀이기구(정글짐)를 동시에 담은 장면이 있다. 팔각정 쪽에서 석탑 뒤의 공원 북서부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제작, <조선의 애국일>(1940) 4분 22초 부근. 가운데 ‘공원옥’이, 탑 오른쪽에 물산장려회관의 측면 일부가 보인다. ‘공원옥’ 간판은 비스듬히 왼쪽 프레임 밖을 바라보고 있다. 즉, 이 화면은 [장면 5]에서 담을 따라 북문에 더 다가간 곳이다. ‘공원옥’ 앞에 정글짐이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항들을 가지고 <AK>의 ‘탑골공원과 인근으로 추정되는 장면들’을 다시 보면 장면들 사이의 공간 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단, [장면 4]의 장소는 탑골공원 외부인 것 같다. 처음에는 이 부근에 3층 이상 벽돌 건물이 흔치 않을 것으로 보아 여태껏 어느 자료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물산장려회관의 뒷마당이 아닐까 추정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AK> 등 영상 속 촬영 장소와 시점의 추정 배경으로 활용한 자료는 “ 탑동공원 각소 수선지(之)도 ”의 일부이다. 공원 내 배치 상황으로 보아,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에 공원 관리사업을 이관하기 전인 1910. 8.~1932. 12. 사이에 제작된 지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식별 놀이는 원래 엔딩을 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와 식별된 정보를 바탕으로 촬영 시기도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다. 위 장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촬영됐다고 가정한다면,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준공된 1931년 9월 이후의 장면이다. 다시, 놀이기구가 보이므로 경성부 관리 이관 후 아동공원으로 재개장한 시기, 즉, 최소한 1933년 하반기는 지난 시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자료들를 찾는 중에 한가지 변수를 발견했다. ‘경성상공협회 회관이 낙원정 300번지 외 1호의 2층 양옥집으로 이전했다’라는 1936년 9월 23일자 기사 가 있다. 물산장려회관의 300번지를 지번분할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물산장려회관과 상공협회관은 거의 붙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에는 회관 건립 의연금을 기부한 사람 명단 중에 ‘정세권’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보다 앞선 6월의 기사에는 상공협회관의 외양을 스케치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납작한 2층짜리 상공협회관 건물 뒤로 보이는 실루엣은 물산장려회관의 탑층 있는 쪽 모습 과 유사하다. 다시, 아까 소개했던 김천길 기자의 탑골공원 공중사진(1956) 을 보자. 물산장려회관 뒤로 방금 본 상공협회관의 일부와 유사한 2층 건물이 그림자가 드리워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물산장려회관이 맞고 [장면 6]에서 상공협회관 왼쪽으로 빼꼼하게 보이는 흰 건물이 물산장려회관의 공개되지 않은 뒷 측면 모습이라면? 이 장면의 촬영 시기는 1936년 9월 이후로 늦춰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지쳤으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 사실 <AK>에 사용된 필름의 엣지코드(edge code)로부터 필름 제조 연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실 촬영일과 1~2년 이내의 오차로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만, 아직 모든 장면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한 단계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다만, [장면 6]과 같은 코다크롬 규격은 1935년에 처음 출시됐고 <AK>에서 사용된 제조 연도가 가장 이른 코다크롬 필름은 1936년산이라는 점만 말씀드린다. 식별 정보로 봉인 해제된 영상 다시보기 이제 <AK>의 이 장면들은 더 이상 탑골공원 느낌의 어느 공원에 놀이터가 있고, 조선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 덤덤한 장면일 수만은 없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탄다. 해가 지면 북촌의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들이 담장 너머 선술집에 모여들어 막걸리로 시름을 달랠 것이다. 일제의 견제로 힘을 잃은 지 십 년이 넘은 물산장려운동을 되살려 보겠다고 ‘건축왕’ 정세권이 자비를 털어 만든 물산장려회관이 공원 옆에 우뚝 서 있지만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새로 생긴 놀이터는 내선일체 구호만큼이나 공허하다. 아마도 이 모든 맥락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정동에 거주한 지 40여 년 되어가는 한 이방인 사업가는 화려한 남촌의 풍경이 아닌 쇠락한 북촌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오, 주여. 이들을 보호하소서.’ 탑골공원과 인사동 인근은 어쩌다 보니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장소로서 변화무쌍한 이력을 지니게 됐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테지만 문헌에 남지 않았다면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영상은 그 최후의 보루이다. ‘식별놀이’는 나뉘어 묻혀 있는 기억들을 채굴하고 원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증명’의 대가로 받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가상화폐 같은 것이 아닐까. <덧붙임> 1. 직접 게재하기 어려운 사진 및 기사 자료는 부득이하게 링크로 대신했습니다. 2. 일제강점기 공원 정책과 관련한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 조세호, 김영민, "경성부 도시계획서 상의 공원녹지 개념과 현황의 변화 양상", 『한국조경학회지』 vol.47, no.2, 2019, 117~132쪽. 3. 각종 자료를 무료로 공공에 개방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역사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하길종은 신화화된 감독이라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길종은 그의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감독이기에 이 말은 틀렸고, (그의 영화가 아니라) 하길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양산되면서 신화화 되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맞다. 문제는 후자에 있다. 하길종은 신화화하기 ‘딱’ 좋은 인물이다. (‘딴따라’라며 영화계를 천시하던 시기에) 서울대라는 최고 학부를 졸업했고, (누구도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하지 않던 그때)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UCLA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너무도 엄혹한 현대사의 중심에서) 그 어떤 영화인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다가,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다. ‘4.19세대’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특히 문화 분야의 이름난 이들이 하길종의 친구들이었다. 하길종 사후에도 신화화가 멈추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하길종을 둘러싼 신화가 굳건히 유지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길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길종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간한 『한국영화 100선』에서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세 영화가 있었다. 김기영의 <하녀>(1960), 유현목의 <오발탄>(1961), 그리고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등이 그것인데, 놀라운 것은 언제나 표현주의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하녀>, ‘한국적 리얼리즘’의 정수로 여겨지는 <오발탄>과 함께 <바보들의 행진>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분명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한국영화사에서 <바보들의 행진>만큼 한 시대를 온전히 담고 있거나 그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엔딩 신인 용산역에서의 키스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현실적인 시간으로 1970년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이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유신의 억압에 맞서 고뇌하고 좌절하던 청춘이 선택한 것은 자살과 군 입대였다. 낭만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병태는 친구 영철이 자살하자 역설적이게도 입대를 한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입대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도피를 늦게 알게 된 영자가 달려와 기차에 매달린다. 둘의 그 슬픈 키스는 1970년대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때 구슬프게 들려오는 “날이 갈수록”을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고래사냥”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1970년대에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암울했을까? 역으로 말해, 이 영화가 존재함으로써 1970년대에도 한국영화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시대를 평가하고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하길종은 이 영화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평가 받아야 할 감독이다. (사진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엔딩 장면 ‘하길종 신화’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김지하와의 인연이다. 중동고 졸업 앨범에는 하길종과 김지하가 나란히 등장한다. 훗날 함께 서울대 인문대에 합격해 ‘인문대 거지그룹’ 멤버가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은 두 사람은 그러나 가는 길이 달랐다. 4.19를 겪은 후 김지하는 민중 시인의 길을 걸었고 하길종은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가는 길이 달랐지만, 아니, 달랐기 때문에 둘은 꾸준히 교류할 수 있었다. 하길종이 귀국하자마자,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연출하려고 했던 영화가 <태인전쟁>이었던 것도 김지하와의 교류 덕분이다. 김지하가 공부하던 동학사상을 하길종은 영화로 만들어 세계 영화계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하길종이 오히려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발굴해 세계 영화계로 진출하려 노력한 것은 김지하와의 관계를 떼면 설명하기 쉽지 않다. (사진2) 중동고 졸업 앨범의 하길종 1964년, 하길종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젊고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이 있다. 우리 나이로 스물넷의 이 청년은 금문교 앞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잔뜩 멋을 부리고 앉아 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기에 그의 기대는 그만큼 컸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이면서 영화에 관한 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 아닌가. 미국에 온 지 일 년만에 마침내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2년 반만에 다큐멘터리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써 졸업을 했다. 그 사이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과 결혼해 득남했다. 이 시기 하길종은 친구 곽광수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꾸준히 했다. 결국 그가 설 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사진3) 유학 시절 금문교 앞에서 (사진4) 유학 시절 영화를 촬영하며 1969년, 하길종은 문제의 실험영화 <병사의 제전>(1969)을 만들었다. 영화사 MGM이 전미 영화과 학생 가운데 4명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하길종이 선발되어 후원을 받은 것이다. 귀국 후 몇 번 상영되다가 필름이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오랜 세월이 지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길종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발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운드는 멸실되어 이미지로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얼마나 고뇌 깊은 영화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하길종은 1960년대 중후반의 혼란스런 미국에서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실험적인 영화 형식 안에 담아냈다. 타나토스적 욕망과 에로스적 욕망, 문명과 인간, 삶과 죽음 등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장면을 알레고리화해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강한 실험성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실험을 귀국 후 충무로에서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순진함이 차라리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사진5) <병사의 제전>(1969)의 한 장면 1970년 가을, 6년의 유학을 마친 하길종은 마침내 귀국했다. <태인전쟁>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이효석의 원작 <화분>(1972)을 연출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하길종이 충무로에서 대중적인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비평에서도 표절 논쟁에 휘말리고 말았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서서히 긴 침체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 실험성이 강한 ‘정치적’ 영화를 당시 대중들은 수용하지 못했고, 보수적인 영화상과 비평계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196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 가령 이만희의 <휴일>(1968), 김수용의 <안개>(1967),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 등의 작품보다 더 강한 정치적 실험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쇼적인 한국 사회에서, 당시 세계영화사적 흐름인 정치적 모더니즘으로 정면승부를 펼치려고 했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로 상징되는 파란 집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추한 욕망을 전시하는 영화를 통해 하길종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적시했지만, 동시에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깨달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분>이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6) <화분>(하길종, 1972)의 한 장면 차기작 <수절>(1974)은 화천공사에서 제작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하길종의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충무로 주류 영화사에서 제작했고, 화천공사에서 연출한 4편 가운데 흥행에 실패한 단 하나의 영화라는 말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하길종의 연출작 7편 가운데 원작이 없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화분>의 실패 이후 하길종은 현대의 푸른 집을 재현하는 대신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음에도 그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여전했다. 특정 마을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군부 독재의 폭정. 특이하게도 <수절>은 공포영화의 컨벤션을 빌려와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딸의 한을 남편이 복수하는 내용이지만, 1970년대 중반이라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 검열하던 상황에서 온전히 통과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특히 강간 장면이 많이 잘려 나갔다. 검열에서 20분 정도 잘린 영화를 본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나의 모습”이라고 당시 심정을 적었다. 데뷔 후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검열에서도 상처를 받은 하길종. 미국에서 꿈꾸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었다. (사진7) <수절>(하길종, 1974) 촬영 현장에서 영화는 산업이다. 이 말은 투자한 돈은 회수할 정도의 흥행을 기록해야 한다는 뜻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하길종은 이번에는 흥행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최인호가 쓴 에피소드식 콩트 『바보들의 행진』을 하길종 식으로 각색해 완성한 것. 이후 최인호와 하길종은 깊은 인연을 맺어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을 함께 했는데,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하길종은 최인호와 작업할 때 자신만의 각인은 약해졌지만 흥행에서는 성공을 거두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하길종은 원작에 없는 영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보수화된 당시 사회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장면들을 넣었으며, 송창식과 강근식의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197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아주머니들인 ‘고무신’ 관객에서 대학생인 ‘하이힐’ 관객으로 관객층이 변화하는 흐름을 만들어내었고, 다시 이것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로 명명되었다. 단언컨대 1970년대의 영화가 탄생했다. (사진8)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을 개봉한 국도극장 풍경 <바보들의 행진>의 흥행 이후 하길종은 이장호, 김호선, 변인식 등과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이 동인을 통해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고 감독을 육성하면서 새로운 흐름, 즉 뉴 웨이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영상시대 결성 이후 만든 <여자를 찾습니다>(1976)는 안타깝게도 다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김주영의 원작은 재미있었지만 영화화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남녀 갈등을 그린 원작은 영화보다는 TV 드라마로 각색되었을 때 그 묘미가 살아날 것 같았지만, 하길종은 하재영을 다시 한 번 주연으로 삼아 청춘의 질주를 그려냈다. 눈에 띄는 감각적인 영상은 곳곳에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영화가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이 시대와도 맞지 많았다. 도시의 타락과 대비되는 시골의 순수함으로 귀환한다는 내용은 뭔가 어색했고, <바보들의 행진>과도 한참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사진9) <여자를 찾습니다>(하길종, 1976)의 한 장면 <한네의 승천>(1977)은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이다. 하길종이 가장 좋아하던 하명중 주연, 유영길 촬영의 마지막 영화였고, 영상시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하길종과 영상시대는 침체하던 한국영화를 갱신해 세계영화계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 하나가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하길종의 말을 빌리면, “전생과 내세와 현세가 한 지평 속에서 공존하는 윤회사상을 2대에 걸친 부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향토색 짙은 영상으로 그려 보려”고 한 것으로, 실제 설악산과 공주의 깊은 산에서 촬영한 영화에는 탈춤, 산신제, 남사당, 걸립 등이 등장한다. 윤회 사상을 그리기 위해 여배우 전영선이 1인 3역을 하고 흑백과 칼라가 교차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하길종의 의도대로, 한국의 비극이지만 한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대결하는 서구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영화는 묻히고 말았다. (사진10)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의 포스터 다시 하길종은 흥행 영화로 눈을 돌렸다.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 자격이 정지되었던 이장호를 대신해 그는 <속 별들의 고향>(1978)을 연출했다. 하길종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장호의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만의 하나 흥행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배수지진. 이런 각오로 만든 <속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가운데 손꼽을 만한 영화가 되었다. <별들의 고향>의 속편이지만 호스티스물이 아니라 낭만적이면서 병폐적인 사랑이야기를 아름답고 쓸쓸하게 재현한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볼거리를 남겼고, 또 어떻게 보면 하길종이 좋아하던 서구 감독에게 오마주를 바치면서 지적 이야깃거리를 던졌으며, 한편으로는 병으로 죽어가는 낭만주의자를 형상화하는 방법으로 그의 자의식을 영화 속에 심어 놓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주인공 문오는 감독 하길종과 겹친다. 잠깐 카메오로 등장해 한없이 초조해하던 하길종의 모습은 현실의 그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사진11)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1978) 촬영장에서 <병태와 영자>(1979)가 개봉해서 한창 흥행을 할 때 하길종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유작이 되어버린 것.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가 유작인 것은 아마 치욕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속 별들의 고향>도 속편이었고 <병태와 영자>도 속편이었다. 자신을 ‘속편 감독’이라고 자위하면서, <병태와 영자>의 흥행을 보며 이제는 진정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는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영화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병태와 영자>는 그리 좋은 영화는 아니다. 속편의 연결성도 떨어지고 극적 재미도 덜하다. 그럼에도 가난한 청년이 시대의 권위와 부에 맞서 싸워나가는 에너지는 어떤 영화보다도 강하게 살아있다.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을 연상시키는 엔딩이 더욱 그렇다. 가진 자가 자동차로 거리를 달릴 때 병태는 뛰어서 간다. 이때 감독은 둘을 교차로 편집하는데 기묘하게도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당연히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길종은 젊음의 싱그러움, 그 무한한 힘이 이기도록 설정해 놓았다. 미처 마흔도 되지 않은 하길종이 그 시절 젊었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진12) <병태와 영자>(하길종, 1979) 포스터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한다. 하길종은 영화감독만 한 것이 아니다. 귀국해 국내에서 활동한 시간 내내 그는 감독생활을 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감독이 평론을 겸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지만, 하길종은 미국에서 배운 이론과 새로운 영화 사조를 국내에 빠르게 전파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엑소시소트』, 『스타워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중앙대, 서라벌예대 등에서 강의를 하다 서울예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것도 인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생전 하길종의 이 모든 활동은 한국영화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으며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았다. 하길종은 동료 감독의 영화를 매우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평하는 것으로 유명해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신랄하게 평가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하길종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13) 유현목 감독과 (사진14) 서울예대 제자들과 한국영화사의 숱한 감독들은 시대와 싸워야만 했다. 나운규의 일제강점기, 유현목과 임권택의 반공영화 시기를 보면 시대가 영화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하길종도 마찬가지이다. 하길종을 평가하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그가 충무로에서 활동한 시기이다. 박정희의 유신이라는 폭압적인 정치 체제 시기에 하길종이 활동했다. 더 세밀히 말하면, 데뷔작 <화분>을 만든 1972년은 유신이 시작된 때이고, 하길종이 세상을 떠난 1979년은 유신이 종말을 고한 때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가장 가혹한 시기에 바로 이 땅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8년 동안 하길종은 영화감독으로서, 영화평론가로서, 영화학과 교수로서, 번역가로서, 영화운동가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은 여기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서른여덟이라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그. 지금 그는 경기도 광주의 한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 땅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각형의 돌로 된 그의 무덤에는 생전 그의 필체로 각인된 “河吉鐘”이라는 이름과 생몰연도만 기록되어 있다. (사진 15) 하길종의 무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빈 공간의 작은 판 위에 다섯 명의 남자가 서 있다. 남자들은 똑같이 생긴 기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있고, 등에는 서로 다른 숫자가 적혀 있다. 허공 속의 판 위에서 한 사람이 움직이면 균형이 깨져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또 다른 사람은 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편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윽고 남자들은 품에서 낚싯대를 꺼내 허공에 던지고, 한 사람이 나무상자를 낚아 올리는데, 이로 인하여 판에는 새로운 균형 관계가 생긴다. 태엽장치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 나무상자는 남자들이 위치를 옮길 때마다 균형의 원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남자들은 판의 균형을 깨뜨리고 또 다시 맞추면서 이동하는 나무상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하고, 결국 한 사람과 나무상자 만이 판 위에 남게 된다. 단편애니메이션 < 밸런스 Ballance >는 독일의 쌍둥이 형제 애니메이터 크리스토프 라우엔슈타인(Christoph Lauenstein)과 볼프강 라우엔슈타인(Wolfgang Lauenstein)의 1989년 작품으로 그 해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단편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1962년 독일의 작은 도시 힐데스하임에서 출생하여 1985년 함부르크 예술학교에 입학한 라우엔슈타인 형제는 당시 27세의 신예 감독으로 16미리 카메라를 사용하여 학생 작품으로 이 의미심장한 주제를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소유와 정복을 향한 전쟁의 허망함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캐나다 NFB의 애니메이션 감독 노만 맥라렌(Norman McLaren)의 단편애니메이션 <이웃 Neighbours>(1952)을 연상하게 하는 <밸런스 Ballance>는 불길하고 우울한 유머를 담고 있는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소유욕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정치적 우화(寓話)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놉시스에 ‘floating platform’으로 표기되어 있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시소처럼 떠 있는 작은 ‘판’ 위에서 밖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또 나무상자를 차지하기 위해 균형을 맞추면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여전히 분쟁과 대립이 멈추지 않고 있는 지구촌 인간 군상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국은 아무도 갖지 못하는 음악이 나오는 나무상자는 어떤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에 대한 공유와 공존의 중요성을 새삼 묵직한 울림으로 제기한다. 라우엔슈타인 형제는 < 밸런스 Ballance > 이후 MTV, 나이키, Zeit TV, 코카 콜라 등과 같은 상업 광고와 TV 스팟 제작을 통해 그들만의 독특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구축해나간다. <밸런스 Ballance>에 대한 비평적 분석과 제작 뒷이야기는 감독이자 저술가인 올리비에 코트(Olivier Cotte)의 (국내에서는 <오스카 애니메이션>으로 출간됨)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 보기 : http://www.youtube.com/watch?v=vZiEt5RUY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