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도시의 비교
- 감독
- 데이빗 시드니
- 제작년도
- 1959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감독의 투신자살 시퀀스로 담긴 충격적인 영화가 있다. 심지어 연기한 사람은 해당 영화의 감독( 이장호 ) 본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국회의사당에서 기괴한 춤을 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바로 1984년 개봉작, 영화 < 바보선언 >의 도입부와 결말이다. 개봉 연도를 보면 금세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제5공화국 전두환 독재 정권의 악행이 가장 극에 치달을 때 제작되고 개봉된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검색해 보면, 이 영화는 서슬 퍼런 정부의 검열을 피하여 어떻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자포자기한 상태(김동원, 2008)’에서 만들어진 괴작이자 걸작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검열을 피하고자 극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행으로 채워놓고, 촬영조차도 기행 그 자체였던 사실 덕분에 역설적으로 198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초현대적인 함의와 시사점을 주는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신군부 검열 당국이 풍자와 해학에 조예가 깊었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눈(교양)을 더욱 갖췄더라면 이 영화 또한 가위질을 당했을 수 있었겠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러지 못했던 듯 하다. 덕분에 우리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현대사회(혹은 정치 환경)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거니는 한국의 도시공간을 ‘괴상한 시각’으로 2024년 지금 이 시점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는 어떤 공간이 어떤 시각으로 담겨져 있는지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하월곡동 빈민가 영화의 인트로는 주인공인 동칠( 김명곤 )이 하월곡동 빈민촌 주거지를 걸어 내려오는 시퀀스로부터 시작된다. 수 초 동안 마을 주민들이 마치 축제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는 잠시 비추는데, 이 영화에서 ‘인간적인 도시공동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장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리가 불편한 동칠이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오고가는 큰길에는 횡단보도가 없기 때문에 육교를 지나가야만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들에서는 재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영화 속에 담긴 야트막한 서민 주거지의 모습은 머지 않아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하월곡동 빈민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하월곡동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이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일지도 모른다. 명동과 을지로입구 아마 동칠은 영화 속에서도 잠시 비춰진 8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 것일까, 다음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명동과 을지로입구 일대를 비춘다. 깔끔하게 정리된 길가, 산뜻한 중형차(현대 그라나다), 고동빛깔의 미도파 백화점과 갓 개업한 롯데백화점 본점과 누가 봐도 썩 세련되지 못한 모습의 동칠은 내내 부조화를 이룬다. 카메라가 미도파와 롯데백화점을 올려다보는 씬은 영화 < 오발탄 >(유현목, 1961)에서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이 부근을 걷는 씬을 연상케한다. 촬영 각도와 흑백·컬러 여부가 다르긴 하지만, 소외되었거나 불쌍한 시민과 화려한 서울 속 백화점 간의 대비만한 극적인 표현 수단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끊임없는 자동차의 행렬과 미도파 백화점(좌측), 롯데백화점 명동본점(우측)이 추레한 차림의 동칠 뒤편을 장식한다. 당대 최고급 승용차였던 현대 그라나다와, 명동 거리를 정처없이 누비는 동칠의 조우. 이대 앞과 신촌 이윽고 동칠은 청계5가 부근의 어느 빌딩에서 투신한 의문의 영화감독의 옷가지와 장신구 등을 탈취한다. 카메라는 빌딩의 옥상에서 청계고가도로와 그 인근 평화시장을 훑다가, 이화여대 정문 앞 번화가를 타임랩스로 추적한다. 장장 1분 동안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4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감탄을 절로 자아낼 정도로 지극히 현대적이다. 일부러 간판과 옷차림과 자동차만을 옛날 것을 가져다가 요즘 찍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1983년의 이대 앞은 40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건너뛰어 2024년 시청자의 눈동자에 내리꽂힌다. 나아가 이대 앞의 상권은 육교에서 동칠이 한눈에 반한 ‘가짜 여대생’ 혜영( 이보희 )이 도시적인 소비를 마음껏 누리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부족함 없이 해낸다. 실은 매춘부이지만 그림 같은 대학생의 생활을 동경하는 혜영과, 그 뒤를 쫓는 동칠, 그리고 이 둘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1983년의 대학가 상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번화하기 그지 없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풍경. 지금도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 앞 골목을 누비는 여대생들과 차량의 행렬. 40년이 지난 지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이 씬을 재현하면 어떨까. 이런 혜영을 어떻게든 납치하고자 하는 동칠은 우연히 마주친 자동차 정비공인 육덕( 이희성 )의 택시에 올라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포니 택시가 이대 앞과 신촌 기차역 앞을 위험천만하게 종횡무진하며 사실상 카 체이스와 비슷한 활약을 펼치는 점도 볼 만한 부분이다. 16분 언저리에 누가봐도 교통 통제라곤 없이 이대 정문으로 포니 택시가 돌진하는 씬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거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제법 긴박한 느낌을 준다. 이대 정문으로 돌진하는 육덕의 택시. 깜짝 놀란 학생들과 달려나온 경비원의 모습이 뚜렷하게 담겼다. 청량리역 앞 광장 40분부터 45분까지 장장 5분 동안, 이번에는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대 앞 시퀀스가 그랬듯이, 제법 멀리서 망원렌즈로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주인공들을 담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든 ‘장사’를 하려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혜영,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칠과 육덕의 씬이 교차되는 와중에,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인파의 모습은 한 편의 역전 광장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 속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지금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롯데백화점과 코앞에 들어선 200미터급 초고층 주상복합, 현대적인 버스 승강장으로 인해 이 시절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당시에 갓 등장했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롯데리아의 광고, 청량리역 맞은편의 미주아파트와 그 상가건물의 모습만이 40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겨진다. 망원으로 담아낸 청량리역 앞 광장 씬. '장사' 대상을 물색하는 화면 정가운데의 혜영 너머로 지하철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고급 유행 식품이었던 롯데리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덕과 동칠의 뒷모습. 태안군 연포해수욕장 동칠과 육덕, 그리고 혜영은 매춘부의 거주지에서 도망쳐 나와 충남 태안군의 연포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마도 이 셋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이 좋게 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54분경, 즐겁게 뛰노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비춰지는 ‘연포해변무대’라는 여섯 글자는 이 곳을 찾지 않았던 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촬영장소를 캐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도 야외 무대는 리뉴얼을 거쳐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부근에는 이 영화의 촬영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다고 하니, <바보선언>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안성맞춤아라 할 수 있겠다. 연포해수욕장의 야외무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세 사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혜영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후, 동칠과 육덕은 대관령의 목장에서 그들의 방법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장례’ 의식을 치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비가 쏟아지는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광장에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웃통까지 벗어 던진다. 이대 앞과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그랬듯이, 이 장면도 사전에 촬영 허가 없이 기습적으로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장면을 찍겠다고 사전에 촬영 허가를 낸다고 해서, 수리될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이 시퀀스는 사전 지식 없이 보더라도, 동칠과 육덕이 작중에서 겪어 온 부조리함과 그에 기인한 울분을 국회의사당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향해서 남김없이 토해내는 의미로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의 제11대 국회에는 야당다운 야당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이 속한 여당 민주정의당과, 국가가 개입한 ‘관제 야당’만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만큼 이 시퀀스는 더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군사정권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제11대 '괴뢰 국회' 앞에서 반라의 광기를 보여주는 동칠과 육덕의 뒷모습. 이상으로 꼭 4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바보선언>의 주요 공간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바보선언>은 감독 스스로가 평했듯이 제대로 ‘각을 잡고’ 찍은 것이 아니라 군부독재와 검열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면서 제작된 덕분에, 당대의 공간적 배경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꾸밈없이 담겨진 영화가 되었다. 40년 전과 비교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도시 곳곳이 말끔하게 새단장을 거친 지금이지만, 영자원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 에 올라온 이 영화의 덧글란에 ‘걸작’이라는 상찬이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분명 이 영화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원, “ 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08. 9. 2. 김성욱, “ [한국영화걸작선]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홈페이지, 2012. 11. 28.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1. “'나의 한국고전영화'(가제)라는 주제로 (…) 한국고전영화 대해 애정을 쏟는 부분이나 관심을 갖게 된 지점 등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KMDb 에 싣고자 합니다. (…) 조금 더 개인적인 에세이 형식의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원고 청탁은 덜컥 받았지만―KMDb에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었다.―빈 문서에 주제 적어두니 정말 불안하고 의아해졌다. ‘나의’는 불안하게 만들었고, ‘한국고전영화’는 의아하게 만들었다. 먼저 의아함은 ‘한국고전영화’라는 단어의 모호함과 관련된다. 비슷한 이름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가 특정 역사적 시기나 미학 체계를 지칭하는 것과 달리, 1) ‘한국고전영화’는 용어로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영상자료원 운영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는 많은 영화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이규설, 1920년대 추정), 〈 귀로 〉(이만희, 1967), 〈 미지왕 〉(김용태, 1996)도 있다. 이 세 편 영화를 하나로 묶는 역사적 시기와 미학 체계를 찾는 건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조선영화, 남한영화, K영화… 이런 식이라도 따로 지칭하는 게 더 실재에 가까울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한국고전영화’를 모호하게 사용하는 예는 논문, 기사 어디에서도 비근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고전영화’는 그냥 이렇게 사용되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봤던 영화, 한마디로 옛날영화(김홍준, 2008)” 2) 당연하지만 ‘한국고전영화’를 “한마디로 옛날 영화”라고 해서 의아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의아해진다. 올해 태어난 내 친구의 아들에게는 〈 범죄도시 3 〉이 한국고전영화가 되는 걸까? ‘한국고전영화’를 ‘한국옛날영화’로 넘어간다 해도, ‘나의’라는 수식어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나의 한국옛날영화’ 이 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한마디로 옛날영화”라는 말을 하필 김홍준으로부터 찾았다는 것은 더욱 더. 시간을 조금 돌려보자. 2021년 나는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오래된 미래’에 김홍준의 〈나의 한국영화〉 연작을 초청했다. (아마도 〈나의 한국영화〉에서 따왔지 않을까 하는) ‘나의 한국고전영화’라는 주제를 받자마자, 나는 그 영화와 그때 보낸 추천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고 있었고, 시네마테크 같은 근사한 이름들은 멀게 느꼈던, ‘굿다운로더’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과거. (합법 영역이 욕망을 좌절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웹하드를 통해 한국고전영화-사실 거의 모든 영화-를 다운로드 하고, 봤다. 다른 영화 파일과 달리, 한국고전영화는 구성이 유달리 이상했는데 꼭 어떤 사람의 해설이 영화 앞에 붙어있었고, 때때로 출연진과의 짧은 대담이 이어지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다만 그 파일은 ‘한국영화걸작선’을 녹화한 것이었고, 해설자는 김홍준이라는 사람이었다. / 〈나의 한국영화〉는 김홍준이 한국영화걸작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비디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위치를 활용해 만든, (모든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오디오비쥬얼에세이’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한국영화>를 시네필 1세대-문화원 세대-가 바라본 ‘한국영화’, 또 오디오비쥬얼에세이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고 천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의 한국영화〉가 저작권을 클리어하지 않고 제작되었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한국영화’라는 간단한 이름처럼, 그저 대면하고픈 작은 욕구에서 관점의 순수성이,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이 가능했던 거라 믿는다. /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 4 키노99〉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다.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 배경음악은 제거 되어있는데, 제거 된 노래의 이름은 ‘Je te veux’ 한국어로는 ‘당신을 원해요’다. 〈나의 한국영화〉의 첫 편 〈나의 한국영화1: My 충무로〉에서 김홍준은 〈 개벽 〉(임권택, 1992)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기억, 〈 서편제 〉의 마지막 장면에 자신의 딸이 출연했던 것,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충무로 활동 경력을 내레이션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는 화자가 그 피수식어와 맺고 있는 삶의 관계를 함축하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 한국옛날영화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주제로는 아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한국고전영화 = 불안+의아함 = 포기… 임재철: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대해 냉담하다. 미국을 제외하면 거의 그렇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자국영화가 자국어를 사용해서 그렇다. 그걸 나는 ‘영화는 외국어다’라는 명제를 써서 설명하는데, 그게 문자 그대로 영화가 외국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는 외국어처럼 쉽게 포착이 안 되는 게 본질이라는 거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 보는 경우엔 우리 현실에 안 맞다 거나 연기가 서툰 것을 굉장히 빨리 포착한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 우리가 막연히 몽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데 3) 정성일: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 김홍준: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4) 그렇게 원고를 회피하다가 영화평론가 임재철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정성일·김홍준의 좌담을 떠올리고 포개어보았다. 임재철에게 ‘영화는 외국어’라서, 분명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분명한 점이 있어서 매혹적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냉담하다 5) 정성일·김홍준의 문제의식도 유사하게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공식문화가 된 이후에 영화는 매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물론 임재철, 정성일·김홍준이 겨냥하는 지점에 차이는 있다. 임재철은 스크린 내 요소들의 익숙함이 매력을 저감시키는 점을, 정성일·김홍준은 스크린을 접하기 이전 정보의 과다함이 순수한 체험을 방해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표면적인 연상으로 두 인터뷰를 포개어보자. 영화는 외국어라서 흥미롭다(임재철) 그런데 공식 교육에서 외국어를 너무 가르치곤 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옛 우리말이다(김홍준)? 실로 옛 우리말은 지금의 우리말보다 불분명하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구절을 안다면 들리는 것과 써진 것을 함께 떠올릴 수 있지만, 그냥 음성만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같다. 그러다가도 ‘사람마다’라거나 ‘사람이니라’ 같은 부분에서는 또 익숙하여, 불분명하던 앞뒤의 말을 이어맞춰보곤 한다. 그리고 더 궁금증이 생긴다면 ‘우리말’이므로, 여러 방면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편하다.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나의 한국옛날영화’라며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측면이다. ‘한국옛날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네필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서 희귀한 ‘순수한 감상자’의 자리를 허용한다. 친절한 공급자도 적고, 알고리즘의 되먹임(KMDb가 알고리즘 기반 vod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를…)도 없다. 그런데 영화 혹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 궁금하거나 의아한 점이 생긴다면 그 영화·사람의 주변/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001년 정성일·김홍준이 ‘한국옛날영화’를 모르는 것으로 거명했을 때보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훨씬 많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정전(canon) 이외의 작품은 소위,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도 아직 충분히 감상 되지 않았으며 해명되지 않았다. 한국옛날영화는 우리 영화팬에게 감상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명을 충분히 시도해 봄직한 미개척의 공간이다. 박진희가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에서 거명한 “역사가로서의 강력한 감상자”는, ‘옛 우리말’이라는 부분적인 분명함의 조건에서 비단 영화사 연구자/영상자료원 직원에게 한정되지 않는 모델이 될 수 있다. 6) 2.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하나의 한국옛날영화감독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소개해보고 싶다. 이만희는 연구사의 첫머리부터 ‘숙명적 운명론자’로 논해지곤 했다. 사람들의 삶에는 조건과 한계가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만희의 주제는 반복되는 노동 혹은 일상의 갑갑함이었다. 이만희 또한 자신의 주제를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다. 그는 1973년 08월 「혼자이기 때문에」라는 짧은 글을 썼다. 이 글은 지금껏 인용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이만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 우리 인간이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 중에서 맨 처음의 감정이나 또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며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마지막의 감정은 바로 소외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읍내의 극장에서 화려한 상류(上流) 생활을 그린 영화를 보고 어두운 논뚝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시골처녀, 사방 1미터도 채 안되는 공간 속에 하루종일 앉아서 담배를 피는 아주머니,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 잠깐 한눈 팔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개구장이들을 마치 간수처럼 하루종일 지켜야 하는 어머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기묘하게 폭발하고 말듯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 사이에 끼어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여대생, 장성한 자식들과 출세한 남편은 제 볼일로 각기 바빠 값비싼 장신구와 함께 버려져 있는 중년부인… 등등,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식 수준이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어디선가 남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며 쭉쭉 뻗어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이 아무 변화 없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날로 퇴보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 나로서 가장 관심이 깊은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이 소외감이다. 영화를 통해서 나는 인간들이 그 소외감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처리해 가는가를 그리려고 애써 왔다. 그러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소외감 그 자체는 명백한 인간의 조건일 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자기의 소외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해소시키려 할 때 무리가 생기고 악이 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그래야만 우리는 훼진 운동화를 신고도 남루한 옷을 입고도 아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며 번화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다. 7) 이 글에서 이만희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가까운 소외를 주목한다. 이만희는 이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을 제시하지만, 마지막 문단의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이라는 반복은 소외의 극복이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강조―기실 이만희는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과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소외를 찾고 있다―한다. “훼진 운동화”, “남루한 옷”이 풍기는 쓸쓸한 정서는 극복 불가능한 소외를 강화하는 전략 같이 느껴진다. 이런 글과 그의 영화에서 나는 우거지상 혹은 무표정한 사람으로 이만희를 떠올렸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이 2015년 04월 29일에 facebook에 올린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https://www.facebook.com/koreanfilmarchive/photos/%EC%B5%9C%EA%B7%BC%EC%97%90-%EC%98%81%ED%99%94%EB%B0%B0%EC%9A%B0-%EB%AC%B8%EC%88%99%EB%8B%98%EC%9D%B4-%EC%83%88%EC%82%BC-%EC%A3%BC%EB%AA%A9%EF%BF%BD/797165160399351/) 이 포스트에는 멋진 사진이 있었다. (사진에는 1974년 여름 〈 삼포 가는 길 〉 촬영장이라 적혀 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문숙과 이만희가 처음으로 작업을 함께 한 〈 태양 닮은 소녀 〉의 촬영장이 분명하다.) 급하게 촬영한 것처럼 초점은 흔들려 있고, 초점이 맞지는 않지만 사진 속의 이만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웃음이 낯설었고, 좋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고 궁금했다. 혹시 이만희는 일상의 갑갑함이나 소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랑을 찾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았다. 비록 앞서 길게 인용한 「혼자이기 때문에」처럼 이만희가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이만희의 경력에서 사랑은 하나의 주제를 이뤘다. 먼저 14년의 짧은 경력 동안 이만희는 무려 5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을 실천하듯 이만희의 영화 제작 소식은 그의 활동 기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만희는 사랑을 했다. 감독 데뷔 시점부터 사실혼 상태였던 이만희는 1966년 〈 만추 〉의 배우 문정숙과 연애를 했고, 1974년의 시점에서는 배우 문숙과 연애를 했다. 1975년 4월 13일 이만희의 사망 이후에도 신문·잡지에는 이만희의 연인들의 말이 널리 보도되었다. 영화배우인 이혜영이 그의 아버지 이만희를 추억하는 글에 붙인 제목처럼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인용자-이만희),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8) 그런데 이만희의 이 편력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여성 편력이 (특히 당사자 여성에게) 통념상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희와 시간을 함께 보낸 여성들은 그와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만희의 두 번째 아내 9) 인 오흥순은 이만희와 결별 후에도 “그이와의 7년간의 결혼생활이 내게는 너무 아름다운 추억”이었기에 오랜 기간 재혼을 하지 않았다. 10) 문정숙 또한 이만희가 죽은 후에도 “「만추」(이만희와 함께 촬영한 영화의 제목-인용자)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매해 가을 “낙엽속에서 그의 숨소리와 뜨거운 「영상의 혼」을 발견”하곤 했다. 11) 그의 마지막 연인인 문숙 또한 2007년 한 권의 책 마지막 한해를 통해 이만희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12) 이만희는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랑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학부 때였나?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사랑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대학생이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 교수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목맬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복된 일이다. 사랑이 끝난다고 해서 그 복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준다. 소외를 말한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 옆에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사료/정보로부터 우리는 이만희 영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영달과 정은 백화를 떠나 삼포로 향한다. 이만희는 떠나는 영달과 정의 얼굴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일상적 삶의 프로젝트에서 상상되지 않는 백화라는 존재를 담을 수 없는 그들을 이만희는 화면에서 추방시켜 버린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개발의 증표로 ‘삼포’라는 가짜-외부가 영화에 삽입된 것이 나는 참 슬프다.) 이미 정해진 원고 매수는 넘었고, 나는 무엇보다 당신이 이러한 정보들을 참조하며 (아마 그의 가장 언급되지 않은 영화 중 한 편인) 〈태양 닮은 소녀〉(이만희, 1974)를 보길 바란다. 이 영화에는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어떤 의미로 배치된 걸까? 나는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을 만나 활짝 웃는 걸 떠올린다. 그리고 찰칵!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이 남은 것에 대해서도. *** 1) 임재철,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세계영화사 강의: 초기영화에서 아시아 뉴웨이브까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23-151쪽 참조. 2) 김홍준, 「한국의 고전영화 읽기―사실적 재현, 장르, 스타일, 공간의 구축」, (영화감독 10인의) 연출 수업 1,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2012, 98-99쪽. 3) 임재철, 한승희, 「영원한 구경꾼: 임재철」, 필름 2.0, 290호, 2006.07. 74쪽. 4) 김홍준, 정성일, 박은영 정리,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씨네 21, 2001.02.22. http://m.cine21.com/news/view/?mag_id=573(2023.06.18. 확인) 5) 미국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편, 브라질의 영화평론가 Filipe Furtado는 이렇게 트윗한 적 있다. “누구나 자국 영화에 애증 관계를 갖습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자국 영화를 기본값으로 보는 데 너무 익숙해서 애초에 그것을 ‘자국 영화’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https://twitter.com/filipefurtado/status/1172522298093506560) 6)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 마테리알 7호 https://ma-te-ri-al.online/archive/641 7) 이만희, 「혼자이기 때문에」, 샘터 4권 8호, 샘터사, 1973.08. 30-31쪽. 8) 이혜영,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여성동아 185호, 1983.02. 9) 이혜영에 의하면 이만희는 55년에 한 번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것이 오흥순이다. 이혜영은 오흥순이 “극예술협회라는 극단에 들어가셨어요.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구요.”라고 구술한 바 있다. (이혜영, 「이만희를 말하다」, 영화천재 이만희, 한국영상자료원, 2006, 258쪽) 이와 달리 오흥순은 이만희와 그가 처음 만난 것이 ‘서울문화학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흥순과 이만희는 각각 ‘서울문화학원’에 배우와 연출이 되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오흥순, 「사랑이 머물다 간 세월」, 아리랑 21권 8호, 아리랑사, 1975.08. 172쪽.) 서울문화학원의 한국연극학회가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공연한 것은 1955년 11월이다. (「全國大學演劇 콩클 作品은 「푸른聖人」」, 경향신문, 1955.11.06.」)이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극예술협의회(劇藝術協議會)’ 주최로 1956년 06월이다. 오흥순이 출연한 기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劇藝術協議會 創立 公演」(경향신문, 1956.06.0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천재 이만희 15쪽에 실린 ‘57년 공연장에서’라는 사진 또한 1956년 공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공연에는 이만희가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김승호도 출연했다. 10) 오흥순, 위의 글, 174쪽. 11) 문정숙, 「그 만추의 못잊을 사랑」, 여성동아 185호, 동아일보사, 1983.02. 236쪽. 12) 문숙, 마지막 한해, 창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