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 감독
- 이병훈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이영애, 지진희, 홍리나, 양미경, 임호, 견미리, 임현식, 이희도, 김혜선, 박찬환, 여운계, 박정수, 박은혜, 이잎새, 이혜상, 전인택, 김도연, 이승아, 김민희, 이세은, 한지민, 전수연, 강정화, 박은수, 지상렬, 나성균, 백현숙, 조경환, 김여진, 맹상훈, 금보라, 신국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마치 명제를 말하듯이 미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윤리적 관점에서 유일하게 볼만한 영화는 웨스턴뿐이다, 라고 말했다. 다소 수수께끼 같은 이 말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든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염두에 두고 말한 웨스턴이 어떤 영화인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웨스턴은 영화가 창조해낸 가장 위대한 세계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첫 번째 발명은 에드윈 S 포터가 <대열차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1903)를 만들었을 때 시작되었다. 에드윈 S 포터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영화사에서의 그 명성에 비해서 그렇게 많지 않다. 그는 선박 엔진 회사의 전기 부서에서 일을 시작했다. 램프 관련 부서에 있던 포터는 1896년 극장 영사 기사로 일을 하다가 1899년 토머스 에디슨 회사로 옮겼다. 그때는 아직 영화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지 않았고 포터는 여러 종류의 일을 하면서 몇 편의 영화 장면들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를 보았다. 그는 1902년 <미국 소방수의 삶 Life of an American Fireman>을 연출했고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자 에드윈 S 포터는 좀 더 야심적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7개의 신으로 이루어진 6분 10초짜리 <미국 소방수의 삶>의 두 배에 이르는 <대열차강도>는 (18프레임 상영을 기준으로) 상영시간 12분에 13개의 신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마지막 장면을 더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강도들이 전신국에 침입해 열차를 세우고 그 열차를 타서 전신환을 훔친다. 그리고 열차를 세운 다음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해서 금품을 요구한다. 그 와중에 도망치려던 승객을 총으로 쏘기까지 한다. 그러는 동안 전신국 직원의 딸이 돌아와 아버지가 묶인 것을 풀어주고 직원은 이 사실을 알린다. 민병대의 추적이 시작되고 강도들은 숲에서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당한다. 모든 장면은 초기 영화의 방법론을 따라 액자 형식의 무대처럼 꾸며졌고(tableau_composition) 디테일을 묘사하는 편집 방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윈 S 포터는 <대열차강도>를 만들면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 영화는 세트 촬영과 로케 촬영을 오가고 있으며 달리는 열차 바깥으로 사람을 집어던질 때 사람 모양의 인형 더미를 사용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더미의 사용은 이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달리는 열차는 신이 바뀌더라도 동선을 맞추었고 이 ‘부드러운’ 동선은 바로 한 해 전에 만들어진 <미국 소방수의 삶>과 비교해보면 거의 혁명적인 수준의 도약을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강도들은 숲에서 모두 사살되었고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정면으로 찍은 강도단 두목 저스터스 D 번즈가 등장한다. 허리 정도에서부터 보여주는 반신상의 사이즈. 줄거리와도 아무 상관이 없고 지금까지 진행된 것과도 전혀 다르게 찍었다. 마치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버린 것만 같은 모습. 배경도 아무것도 없는 벽뿐이어서 장소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금방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만 같은 얼굴. 그런데 갑자기 총을 꺼내 들더니 우리를 향해 총을 쓴다. 그리고 올라오는 자막 ‘THE END’. 이 무법자가 법에 반항하기라도 하듯, 정의에 항의하기라도 하듯, 민병대에게 죽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복수하기라도 하듯, 그렇게 정면으로 우리를 향해 총을 쏠 때 그건 분명히 자신들의 죽음을 즐긴 우리들의 기쁨을 향해 한 방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 장면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에 붙어 있지만 에드윈 S 포터는 첫 장면에 옮겨 붙인 다음 상영해도 상관없다, 고 단서를 달았다. 분명히 에드윈 S 포터는 이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전복적인지, 그 불경스러움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대열차강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발명했다.
1. 1980년대, 이장호 의 시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 현은 자신의 나이가 4.19와 5.16 시절에서 멈췄다고 말한 바 있다. 1980년대를 자각 있는 청년으로 통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 현의 표현처럼 1980년에 나이가 멈췄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끝없이 흘러가지만, 멈춰 있는 의식의 시간과 공간은 집요할 정도로 제자리 걸음이다. 그 제자리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므로 제 발 밑을 더욱 깊게 파내려 갔을 것이다. 그 파내려간 자국, 나는 그것을 1980년 한국 근대의 상처라고 부르고 싶다. 1980년대 한국영화들 역시 그 상처의 흔적, 어눌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상처의 자국으로 본다. 그 영화들 속에 등장한 인물들, 그들은 1960년대 한국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못나고 집요하며 파괴적이었다. 그 역할은 대체로 남자들이 맡았다. 남성 감독들은 그렇게 남성을 묘사함으로써 스스로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1980년대의 한국 영화도 그런 상황에서 새롭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광란의 1980년대를 다시 되돌아본다면, 1980년대는 한국의 근대가 겪어야 될 하나의 과정이기도 했다. 독재 정권에 대한 ''힘없는 저항''은 당연히 또다른 독재 군사 정권을 낳았던 것이고, 그 독재 정권이 추동했던 경제 개발은 당연히 빈부의 격차를 극대화했고, 그 서구의 근대화를 모방한 경제 개발은 고유의 문화와 공동체의 미덕을 당연히 파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장호 감독이 서있었던 지점은 바로 그 곳이었다. 우리가 1980년대 한국 영화를 떠올리면서 언제나 이장호를 앞자리에 세울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이장호는 독보적인 동시에 1980년대 영화 청년들에게는 ''스승''이었다. 그는 8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한 인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독이었다. 과거 '1980년 ''서울의 봄''에 때맞추어 나타난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를 시작으로 해서...'라고 표현할 당시의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란 바로 < 바람불어 좋은 날 >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젊은 평론가들이 80년대 영화를 대상으로 뽑은 베스트 10에서도 이장호 의 영화는 < 바보선언 >(1위), <바람불어 좋은 날>(2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6위), < 과부춤 >(8위) 등 무려 네 편이나 포함될 정도였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이장호를 가장 많이 언급한 까닭은 6,70년대 한국영화의 전통을 흡수하여 80년대에 쏟아낸 피드백 장치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장호 감독보다 여러모로 선배격인 감독들과 동년배 감독들도 그러한 역할을 했지만 그가 유독 돋보인 까닭은 가장 충무로적으로 자라났으면서도 가장 격변기의 청년의식을 잘 대변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풍부한 공식 기억이 현재의 관객들에게 기억되지는 않고 있다. 또 한국영화를 ''직업적으로'' 기억하는 평론가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잊혀지고 있다. 그 망각은, 현란한 변화로 압축할 수 있는 21세기식 변화에서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 이유 즉, 80년대식 시선으로 이장호 의 영화들을 바라보는 방법을 잊어버린 집단 기억 상실증 혹은 현재의 시각으로 봤을 때 뭔가 석연찮은 미학의 부재 등이 그 망각 현상을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는 이장호의 시대였다. 2. 이장호 라는 상처 이장호 는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감독길로 들어섰고 다행히 이 작품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청춘의 아름다움과 애정을 노래한 < 어제 내린 비 >(74), < 너 또한 별이 되어 >(75), <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75) 등을 연거푸 만들던 중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5년간의 강제된 공백기간을 가졌다. 당시의 한국은 남자머리가 길다고 파출소에서 강제로 머리를 자르거나 길을 가는 여자를 불러 세워 미니 스커트의 길이를 자로 재던, 말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가혹한 불행의 시기였지만 대통령의 부하가 대통령에게 총을 겨눌 정도로 국민들의 억제된 민주화 요구가 서서히 폭발 직전에 다다른 그 시절은 상대적으로 그의 의식이 첨예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 바람불어 좋은 날 >(80)은 바로 그 시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세 청년이 결국 서울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독재 정권의 경제 개발과 그 개발이 가져온 빈부의 격차와 인간성의 파괴 등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시대의 상처를 자신의 재기작에 심었던 것이었다. < 바람불어 좋은 날 > 이후 < 어둠의 자식들 >(81), < 낮은 데로 임하소서 >(81), < 바보선언 >(83), < 과부춤 >(83)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성 드라마 혹은 관객과 현실을 이어주는 영화들이 있는가하면, 여러모로 동의를 구하지 못한 작품인 < 일송정 푸른 솔은 >(83)이나 < 무릎과 무릎사이 >(84), < 어우동 >(85)같은 가벼운 포르노 그라피, 그의 부정적인 재능이 결집된 < 이장호의 외인구단 >(86), < 와이의 체험 >(87) 등이 그의 작품연보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 그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사회 반영의 의지, 흥행 집착, 작가의 지향 등이 마구 뒤섞인 그의 작품연보는 보는 이들은 물론 본인조차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는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을 만들어도 불안한 기간을 거치면서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를 내놓았다. 평자들의 평가가 엇갈리기는 해도, 이 작품에 대한 견해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가장 실험적인 그리고 이야기와 형식의 독특한 경지를 확보한 것이라는데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장호 는 이 작품에서 민속신앙과 우리 민족의 용해된 삶,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가차없이 침범 당하는 개인의 삶, 분단과 통일에 대한 뒤틀린 견해로 가득찬 사회 등을 풍부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영화만 본다면 그는 작가이자 격조 높은 예술가였다. 그러나 예술가이면서도 그는 영화 제작자였다. 판영화사를 차려서 우습고도 야릇한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장호를 근대 한국의 상처이자 제대로 자랄 수 없었던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상처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의 정확한 문맥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와 행적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몇 가지의 개념들을 파악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영화의 모더니티, 신파성, 한국형 내러티브와 스타일, 집단주의, 사회문화적 맥락 등은 이장호 를 통하여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1980년대 한국영화의 뉴 웨이브, 이장호]({영상문화정보}, 2002년 여름호)에 실린 글을 토대로 다시 쓴 글이다. 이효인 (영화평론가,경희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45년 5월 15일 서울 출생 1966년 홍익대학 미술대학 건축미술과 2년 수료. < 작품 연보 > 1974 '' 별들의 고향 ''감독 데뷔 제13회 대종상 신인감독상 수상 제11회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 신인상 수상 1975 어제 내린 비 / 너 또한 별이 되어 1976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1980 바람불어 좋은 날 제19회 대종상 감독상 수상 제17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작품상ㆍ대상 수상 1981 어둠의 자식들 (흥행 베스트)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2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제21회 대종상 작품상ㆍ감독상 수상 제18회 한국연극ㆍ영화예술상 작품상 수상 1983 일송정 푸른 솔은 제 22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수상 1983 바보선언 시카고 국제영화제 본선 진출, 'OUTSTANDING OF MERIT' 수상 1984 과부춤 일본 키네마준보 우수외국영화에 선정 1984 무릎과 무릎사이 (흥행 베스트) 1985 어우동 (흥행 베스트) 1986 판영화 설립. 대표이사 취임 1986 이장호의 외인구단 (흥행 베스트) 1987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제2회 동경 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상 수상 1987 Y(와이)의 체험 1988 바보선언 ''과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베를린 국제영화제 영인터내셔널포름 부문 동시출품으로 ZITY상, CALIGARI상 각각 수상 1988. 9. 제 26회 뉴욕 필름페스티발 선정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1990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 1992 명자 아키꼬 쏘냐 1995 천재선언 제9회 기독교문화대상 영화부문 수상 < 주요 경력 > 1996년∼2000년 8월 31일 - 중부대학교 연극영화과 부교수. 1997년 - 부천시 영상도시화 PROJECT 연구원 1997년 - 제1회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1999년 - 창작 오페라 ''황진이'' 연출, 예술의 전당<오페라하우스> 공연 2000년 - 중국문화부초청 8월 24일, 25일 북경 21세기극장 오페라 ''황진이''공연 연출 2000년 - (사) 한국영화감독협회 부이사장 2001년 -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TM 공동개최기념공연 오페라 ''황진이'' 도쿄 신국립극장공연(4월 15ㆍ16일) 연출 2001년 - 전주시 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2002년 - 미주 한국일보 초청 오페라 ''황진이'' LA -Hollywoo d KODAK 극장 공연 (8월7. 8일) 연출 2002년 11월 서울시문화상 수상. 2003년 현재 - 전주대학교 예체능영상학부 연극영화전공주임교수 < 주요 논문 > 「부천 영상산업화 연구보고서 」(공동), 부천시 , 1997년. 「일본문화개방 이대로 좋은가?」(단독), 아태평화재단 , 1998년. 「큰 정신 작은 영화」(단독), 한성대학교 , 1999년. < 주요 저서 > 「모두 주고 싶다」 태멘출판사 , 1980년 「바보처럼 나그네처럼」 도서출판 산하, 1987년 < 기타 영상제작배급실적 > 1986년 - 이장호의 외인구단 제작배급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제작배급 1987년 - Y의 체험 제작배급 1988년 - 깜동 공동제작배급 1988년 - 이장호의 외인구단2 공동제작배급 1989년 - 독일 이탈리아 합작영화 '' 모모 '' 수입배급 1989년 - 베르린 국제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죄''(영국제작)수입배급 1989년 - 미스코뿔소 미스터코란도 제작 배급 1990년 - 미국영화 ''헬레이저'' 수입배급 1991년 - 미국영화 '' 헬 바운드 '' 수입배급 1992년 - ' '숲 속의 방 '' 제작배급 1992년 - '' 핸드백 속 이야기 '' 제작배급 1994년 - KBS 텔레비젼 특집드라마 3부작 ''너의 뺨에 입 맞추리'' 외주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