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윤정희, 김희라, 김만, 방희, 홍성민, 이예민, 김정란, 최나영, 주상호, 장인환, 김지영, 조학자, 박예숙, 손전, 추봉, 박일, 김예성, 신찬일, 김승남, 최연수, 김신명, 최용원, 고애니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지난 12월 24일에 공개된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 준비 과정 중의 이모저모를 소개할까 한다. 이 컬렉션은 지난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 의뢰하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 2관(National Archives II, 이하 NA II)에서 수집과 동시에 연구까지 진행했던 1930~40년대 미군 노획필름 37편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국 육군 G-2 정보참모부가 적국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과 6.25 전쟁 당시에 노획한 영상들이다. NA II에서는 ‘해외 노획 기록물’을 묶은 기록군 242(RG 242)에 ‘정보참모부 영화필름’ 시리즈(242-MID)와 ‘정보참모부 일본 관련 영화필름’ 시리즈(242-MID-J)로 분류, 관리되고 있다. 이 필름들은 대부분 선전선동을 위해 제작됐던 것으로서, 일본, 이탈리아, 소련, 북한이 어떤 논리와 방법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비인도적인 침략 또는 경쟁국에 대한 흑색선전을 포장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아무리 ‘격동의 현대사’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더라도 이 시대가 폭력과 착취의 시대였고 ‘줄을 잘못 서면’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던 야만의 시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역량을 기울여 선전영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학습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허구든 실존하는 것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의 힘 없는 개인에게, ‘믿음’은 합리성보다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노획영상은 태생이 복잡하다. < 황도일본 >(아오키 타이스케, 1940)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년 전의 신화집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대전제로 하여 허구 위에 허구를 중첩한다. ‘신의 자손이 신의 명령을 이행한다’라는 신화적 명제를 사실로 포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개념들의 쓰나미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자 했다. 파시즘 우방국 이탈리아는 자신들만의 세계관으로 일제의 침략, 아니 ‘문명의 회복을 위한 전진’에 찬사를 보냈다. 소련은 이러한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 구원자 스탈린’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러시아 공산당 중심의 새로운 착취구조를 유토피아적 현실로 포장했다. 북한은 스탈린의 권위를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덧씌웠고, 소련의 ‘만들어진 유토피아’가 담긴 영상을 수입하여 한국어 웅변을 곁들여 북한 각 지역에 ‘영사 폭격’했다. ‘통일’, ‘해방’, ‘자유민주주의’, ‘평화애호’ 등의 인도적 개념어들은 ‘선의의 친구’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로 의도적으로 수없이 사용됐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선전영상들이 대중 대상의 최면효과를 위해 사용한 전략, 그리고 제작 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맥락까지 포함하여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영상이 그렇듯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까지도 샅샅이 훑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를 컬렉션 페이지의 자료집 에 수록했다. 기록영상 컬렉션에서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이 아니라 덕목이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잡다하게 아는 것은 많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은 AI 들과 함께 준비했다. 이들은 STT(sound to text - 채록), OCR(광학문자인식), 이미지 분류(유사이미지 검색), 번역, 레퍼런스 찾기, 자유로운 대화상대 역할로 투입됐다. 필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서 하우스가 화이트보드 앞에 부하 의사들을 앉혀 놓고 희귀병 추리의 단서를 모으듯, 수개월 동안 허당 AI들로부터 힌트를 뽑아내고 경쟁시켰다. *주1 기만의 전문가들이 만든 영상을 착각의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분석한 셈이다. 이렇게 채굴한 TMI 몇 가지를 부록으로 덧붙인다. 부록 1. <동양의 전투>( Battaglia D'Oriente ): 사상이 맞춤법을 지배한다. 이 영상 은 중일전쟁기 중 1938년 10월에 있었던 일본의 중국 광저우 진격 과정을 이탈리아 영화사(ISTITUTO NAZIONALE L.U.C.E)가 이탈리아어 해설을 곁들여 제작한 것이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9년에 송출됐다(...was broadcast)’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추축국들이 삼국동맹을 체결한 1940년 9월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1937년에 이미 이탈리아는 독일-일본의 대 소련 방어를 위한 ‘방공협정’에 참가한 상태였다. 그러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을 옹호하여 간접적으로 자국민들에게 파시즘의 정당성을 설파할 목적으로 이런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관영선전영화제작소였던 ‘L.U.C.E(루체)’가 영상에 ‘L.V.C.E.’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좌) 도입부 #1 / (우) 도입부 #2 이에 대해 AI 하나가 오랜만에 실속 있는 의견을 주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부터 ‘로마’는 국민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뜻하는 ‘리소르지멘토’는 ‘부흥, 부활’이라는 뜻이고, 그 지향점은 ‘위대한 로마’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이미지에 더욱 천착하여, ‘이전 시기의 부패한 로마’를 청산하고 고대 로마의 덕목과 정신을 이어받은 파시스트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명화 사명’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탈리아 파시즘은 철저하게 고대 로마의 신화적 상징을 사용하여 대중적 이미지를 조각했는데, *주2 이 영상 도입부의 독수리상, 고대 로마 묘비에 각인됐을 것만 같은 고전적 글씨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집착의 끝은 U 대신에 V를 사용한 것이다. 에트루리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고대 라틴어는 중세에 이르러 V가 U, V, W로 분화하기 전까지는 V만 존재했다. *주3 그래서 고대의 진정한 로마를 계승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선봉, 국립영화제작소는 L.U.C.E.가 아니라 고귀한 L.V.C.E.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 세계의 문명과 질서를 대표하는 일본’에게 ‘기아와 혼란의 시대가 끝났다는 확신으로’ 중국인들이 환대하고 있다는 내레이션 내용은 도입부의 독수리상에 이어지는 도리이(とりい, 일본 신사 등의 관문)와 총칼의 도상으로 이미 예고됐다.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즘의 사명을 잇는 일제의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고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내레이션 초반에 일본군 지휘관으로 언급되는 ‘왕의 동생 [치치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발음은 [치치부]로 들리고, 다수의 AI가 동일하게 ‘principe(왕족) CCV’라고 채록했다. AI는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1번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다. *주4 조사해 본 결과, 모두 틀렸지만, 이를 단서로 [치치부]가 쇼와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임이 밝혀졌다. 그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아니라 대본영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를 굳이 언급한 것은, 그가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군 기강 문제를 지적했다든지, *주5 훗날 삼국동맹을 지지했던 점 *주6 등을 미뤄볼 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록 2. <니혼뉴스 제7호>(日本ニュース 第7号):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던 승전보 속 위치는? 기록영상에서 ‘지명’은 늘 골칫거리다. 근현대 지도에 적힌 지명은 지도마다 제각각이고, 서양에서 통용되던 지명, 타국에서 발음 들리는 대로 표기한 지명, 자국민들이 부르던 지명, 옛날 지명과 이명,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선전과 기념의 목적으로 툭하면 바꾸는 지명까지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 니혼뉴스 제7호 >(1940)에서 지명 정보는 특히 중요하다. 이 영상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관심이 온통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급선을 끊는 데에 집중됐던 1940년 여름의 뉴스릴이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 동부의 주요 도시와 기간시설들을 확보했던 개전 초기에는 전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충칭정부를 세운 후부터 이 전쟁은 보급선을 확보하여 더 오래 버티는 쪽이 승리하는 구도로 전환됐다. 특히 일본군은 비현실적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선 데다가 철도, 도로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까지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후 1944년에 감행했던 대륙타통작전(1호 작전) 또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국 내륙 및 남부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둔 무리수였다. 반면, 중국은 동남부 해상으로부터의 보급로, 버마와 베트남으로부터의 육상 및 공중 보급로를 계속 뚫어내면서 장기 태세에 돌입했으니, 시간은 중국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 뉴스릴은 줄곧 이러한 장제스 지원 루트, 즉 원장(援蔣)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군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첫 번째 소식은 진해(鎮海)를 공격하여 해상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내용을, ‘문제의 원장루트, 인도차이나 국경을 공격하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소식은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두 갈래의 원장루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소식은 어려움에 처한 일본이 이후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체제로 돌입하고 군사적으로 폭주하는 도화선이 된 고노에 내각 출범 소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식의 ‘진해’라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 단서는 내레이션 중 [셋칸 루트]라고 발음되는 것의 정체를 찾는 데서 출발했다. 가동할 수 있는 모든 AI들은 이를 ‘석관 루트(石管ルート)’라고 채록했다. 그러나, 그런 보급로는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AI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권위 있는 기관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AI의 억지 변명이 분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실마리는 현재 니혼뉴스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NHK 전쟁증언아카이브’ 중 <니혼뉴스 51호>의 스크립트 정보 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셋칸 루트’는 ‘敵浙 루트’였다. AI는 ‘敵浙’을 ‘절강’으로 번역했고, 지도 검색 결과도 절강성 인근으로 나왔지만, 우리가 아는 절강성(浙江省)의 한자는 다르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저장성과 장시성 지역을 잇는 철도인 저간선(浙赣铁路)이 이 시기에 이미 있었다는 것과, 저장성과 장시성의 약칭으로 쓰이는 글자가 저(浙), 간(贛)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도에서 현재의 저간선 경로로부터 해안 쪽으로 탐색해 나가다가 ‘진해(鎮海)’의 현재 표기일 가능성이 높은 ‘전하이 구(镇海区)’를 발견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저간 루트로 이어지는 저장성-푸젠성 해안의 보급 거점 위치가 확인됐다. 그런데, 앞선 전쟁증언아카이브의 <니혼뉴스 제7호> 스크립트에는 왜 이 정보가 없었을까? 해당 아카이브를 포함해 이 영상에 대해 현재 알려져 있는 모든 정보 에서 첫 번째 소식은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사스(沙市) 공략 입성’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 소식은 < 니혼뉴스 제3호 >의 세 번째 소식을 다시 한번 수록한 것이다. 3호 영상으로 공개했던 내용을 그대로 7호에 다시 수록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로서 알 길은 없다. 어쨌든 7호 영상으로 공개된 모든 판본 중에서 NA II 판본만이 유일하게 ‘진해 공격’ 소식을 담고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스 입성’ 소식으로 교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록 3. 일본인 여행 기록, 언제 촬영했을까? 왜 다른 선전영상들과 함께 노획됐는지 알 수 없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 은 한 일본인 가족이 도쿄, 카마쿠라, 에노시마까지 여행한 하루 일정의 기록이 담겼고 음향은 없다.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되더라도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가족이 여행한 시점이 언제인지 밝히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7 ?’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화면의 내용을 근거로 좁혀 갈 수밖에 없다. 우선,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여름 즈음이다. 여행 전에 베티 미용실(ベティ美容室)에서 머리를 하는데, 간판 정보로 보아 매월 정기휴일인 17일, 27일은 아니다. 영업시간 정보를 보니 아침 8시 이후이다. 이어 도쿄 메이지신궁 외원의 성덕기념회화관(聖徳記念絵画館)을 방문하는데, 관동 대지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1937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사이 기간인 듯하다. 센소지(淺草寺) 본당 계단을 내려와 바나나 파는 곳을 지나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바나나의 일본 수입이 중지됐다는 일본어 위키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1939년 9월 이전이지만, 참고로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사쿠사 마츠야 백화점(1931년 건립) 옥상에 있는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가 보이고, 그 앞 스미다(隅田)강에 수상버스가 지나간다. AI는 이런 것들이 1930~1940년대 유행했다고 하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좀 더 결정적인 근거는 우에노 동물원 장면이었는데, 수컷임이 분명한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다. 우에노 동물원이 1982년에 발간한 『 우에노 동물원 100년사 』에는 암수 두 마리의 기린을 1933년 8월 21일부터 사육하기 시작했고, 1937년 7월 11일에 첫 새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만일, 이 장면에서 수컷만 있는 이유가 암컷의 출산 때문이라면, 이 영상이 대략 1937년 여름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기린들의 이름이 ‘기린’과 ‘지라프’였는데, 이 책의 사진에는 ‘지라프’라고 적힌 팻말만 보이지만 ‘라벨에 기린과 지라프가 함께 적혀 있다’라는 설명이 달렸다. 영상 속에는 ‘기린’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수컷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좌) 영상 속 장면 / (우) 책 속 사진 결국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의 촬영 시점은 1937년 이후부터 1940년대 초 사이의 여름 정도의 범위로 좁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심, 귀여운 기린 새끼가 태어난 날이었길 바라지만 말이다. 이미 글이 길어졌으므로 다른 TMI들이 궁금하다면 컬렉션 페이지 에서 자료집을 다운로드 받아 훑어보기 바란다. 사실상 국가가 정한 ‘전연령 관람 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권 국가 제작 영상(‘특수자료’)들에 대해서는 정보만 안내하고 VOD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영상에도 TMI는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보들을 최대한 안내하고자 노력했다. 못 미덥지만 함께 수고했던 AI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주7 *** 주1. 물론 필자가 하우스 같은 천재는 아니기에 다소 고통스런 공부가 수반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주2. 최병진, 짐바르도 마르타,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 선전물의 쟁점과 어법: 무솔리니의 도상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논집』 11호(2), 21~39쪽. 문준영, 「파시즘의 로마 이미지와 로마관, 로마성(Romanità)―그 기원과 변천」. 『역사비평』 139호, 366~400쪽. Coluzzi, Paolo, “The significance of typography in the linguistic landscape during the Fascist period in Italy (1922–1943)”, Forum for Linguistic Studies 5(3):1885, 2023. 주3. “ Latin alphabet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주 4. prompt engineering 효율 측면에서 ‘천황’이라고 언급했다. 명칭은 명칭일 뿐이다. 주5. “ 【独自】秩父宮、軍紀の乱れ懸念…日中戦争初期の書簡見つかる ”, 《요미우리신문》, 2020. 11. 15. 주6. “ 秩父宮雍仁親王 ”, 일본어 위키피디아 주7. 글에는 어쩌다 보니 claude의 프롬프트 화면만 나왔지만, 다양한 AI들과 그 기술이 적용된 툴들이 함께 했다.
2000년 | 태흥영화사 감독: 임권택 | 각본: 김명곤 강혜연 | 제작: 이태원 | 촬영: 정일성 | 미술: 민언옥 | 음악: 김정길 | 판소리: 조상현 CAST 이효정 : 성춘향 | 이몽룡: 조승우 | 변학도: 이정헌 | 월매: 김성녀 | 방자: 김학용 | 향단: 이혜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 받았던 < 춘향뎐 >(2000)은 임권택 감독의 97번째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판소리와 영화를 일치시키는, 매우 실험적인 영화였죠. 고전을 새로운 형식으로 재해석한 작품 <춘향뎐>. 그렇다면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감정을 전하고 싶었을까요? “<춘향뎐>은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지요. 젊은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게 깊이 함몰되는 과정과, 춘향이의 절절한 마음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는 당시 민중들의 정서예요. 임진왜란 이후 신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어요. 기생의 딸로서 양반가의 자식과 사랑을 이루려는 춘향의 의지를 통해 당시 민중의 신분 상승 욕구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임권택 감독은 < 서편제 >(1993) 때의 경험을 살려 판소리를 영화에 입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판소리와 영화를 번갈아 반복한다는 것이 사실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죠.” 그래서일까요? 임권택 감독은 그때까지 만든 97편의 영화들 중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99년 5~6월에 찍은 필름을 모두 폐기해야 했는데요, 영상과 판소리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월이 되어서야 겨우 윤곽을 잡을 수 있었고, 7개월의 현장을 거쳐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9월 민속촌 촬영 현장이 공개되었는데요,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효정)은 급창들에 의해 댓돌 아래로 끌어내려집니다. 후다닥 들이닥쳐 춘향을 끌어내리는 장면이기에 치맛자락이 찢어지기도 했는데요, 좀 더 빨리 끌어내리기를 바라는 임권택 감독의 요구에 테이크가 반복되었습니다. 드디어 춘향이 형틀에 앉았습니다. 이후 장면은 현장에 국창 조상현의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을 틀어놓고 촬영이 이뤄졌습니다. 십장은 형틀에 묶여 집장사령에 의해 10대의 매를 맞는 것이지요.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죄인데요, 이때 판소리가 흐릅니다. “집장사령 거동을 보아라. 별형장 한아름 덤쑥 안아다가 동틀 밑에다가 좌르르르르르. 형장을 고르는구나. 이 놈도 잡고 느끈능청, 저 놈도 잡고 느끈능청, 그 중 손잡이 좋은 놈 골라잡고, 꼼짝 마라, 뼈 부서질라, 매우 쳐라!” 대사 구절에 정확히 액션이 일치해야 했는데, 특히 “좌르르르르르” 부분에서 형장이 쏟아져야 했고 여러 번의 리허설 끝에 촬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대사와 판소리가 충돌하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 선명하게 표현됐다”며 만족감을 표현했습니다. 집장사령이 춘향에게 뒷속말 하는 장면을 임권택 감독이 직접 시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촬영분은 없지만 현장을 방문한 조승우가 형틀에 묶인 이효정에게 간식을 먹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로 데뷔 하는 조승우는 <춘향뎐> 현장이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고 어색해서 답답”했지만, “차츰 연극과 다른 감정을 찾아냈고 나름의 매력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 한편 16세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으며 역시 첫 영화를 찍은 이효정은 ““춘향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저 정숙하고 얌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촬영에 들어가선 훨씬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네요. 한편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애를 먹었어요. 저도 흔들렸지요. 연기뿐만 아니라 판소리 리듬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꾸중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소질도 있고 갈수록 자신들의 역할에 적응했어요.” 월매 역은 베테랑 배우이자 소리꾼인 김성녀가 맡았습니다. 마당극 <변사또뎐>에서 남장을 하고 몽룡 역을 맡았죠. 방자(김학용)와 춘향과 향단(이혜은)입니다. 김학용은 국립 창극단에서 방자 역을 단골로 연기한 배우입니다. 이혜은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연기파 배우죠. 처음 변학도 역에 캐스팅 되었던 배우는 중견배우 유인촌이었지만 촬영이 늦어지면서 스케줄 조절이 어려워졌죠. 그래서 캐스팅 된 배우는 당시 서른 살이었던 이정헌이었습니다. < 기막힌 사내들 >( 장진 , 1998)로 데뷔한 서울예전 연극과 출신 배우인데요, 우리에겐 < 실미도 >( 강우석 , 2003)의 박 중사로 익숙한 배우죠. 이날 가장 힘든 신은 곤장 맞은 춘향을 방자가 업고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뒤를 월매와 향단이 울며 뒤따르는데요, 화면의 심도가 깊어 동헌 초입부터 끝까지 한 눈에 보이는 터라 쉽사리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방자 역의 김학용 배우가 많이 고생했죠. 나들이 하기 좋은 가을 날, 민속촌은 관광객과 소풍을 온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사인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죠. 임권택 감독은 현장에서 특유의 느린 목소리로 “레디, 고!”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판소리와 액션을 일치시키기 위해 작은 부분도 꼼꼼히 챙겼습니다. “영화의 큰 틀은 조상현의 ‘춘향전’ 창본입니다. 대략 4시간 35분 길이인데 이 가운데 영화에서 다룬 부분은 22퍼센트 정도예요. 영화에서 판소리가 차지하는 부분은 40퍼센트 정도고요. 현장 콘티를 짜는 작업은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판소리를 초 단위로 세분화했고 이에 따라 영상의 길이도 정확하게 계산했어요. 이렇게 해도 나중에 편집할때 보면 길이와 리듬이 맞지 않아서 애를 많이 먹었어요. 더구나 한번도 해보지 않은 작업이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춘향뎐>은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14번째로 호흡을 맞춘 영화였습니다. 1979년 < 신궁 >에서 시작해서 < 만다라 >(1981) < 안개마을 >(1982) < 길소뜸 >(1986) < 아다다 >(1987) < 장군의 아들 >(1990) < 서편제 >(1993) < 태백산맥 >(1994) 등, 수많은 걸작에서 그는 임권택 감독의 카메라가 되어 주었죠. < 이재수의 난 >(1999) 촬영을 마치고 여유가 생긴 박광수 감독이 현장을 찾았습니다. 대선배의 현장에서, 마치 연출부의 일원들처럼 주변의 관광객 통제를 직접 맡기도 했죠. 1980년대부터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과 역시 오랜 파트너인 정일성 촬영감독의 모습입니다. 쉬는 시간 친구와 문자를 주고 받는 이효정 배우의 모습입니다. 중학교 시절 CF 모델로 카메라와 인연을 맺었고 오디션을 통해 <춘향뎐>의 주인공이 되었죠. 당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연극영화과를 꿈꾸었는데요, 이후 법학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춘향뎐>은 이효정의 유일한 작품이죠.
1976년 쇼브라더스의 합작영화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의 주연으로 데뷔한 신인 배우가 있다. 바로 태권도와 무협 액션이 가능했던 연기자 김정란이다. (그림1)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 국내 포스터 그녀는 다양한 액션과 대규모 폭파장면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 <여신탐>에 결코 운으로 캐스팅되지 않았다. 연기력과 액션 실력에 더해 해외 거주 경험과 여권까지,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배우였다. 그녀가 22세에 <여신탐>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원로 방송작가 김희창 선생으로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열두냥짜리 인생>(이만희, 1963), <또순이>(박상호, 1963) 등의 영화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부터 연출자와 배우들을 접해왔고 이런 점은 그녀가 영화나 방송계에 편입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워낙 엄격하고 작품당 휴지기를 길게 두는 편이라 실질적인 생활은 어머니가 이끌었다. (그림2) 부친 김희창 작가와 연출가 허규 1960년대 중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동남아 등 해외 각국으로 기술 이민을 권장하던 때, 그녀의 어머니는 부르나이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청소년기를 부르나이에서 보냈고 19세에 귀국한 뒤에는 외국으로 미술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다. 그런데 마침 다니던 화실 아래층에 연출가 허규의 극단 새문화스튜디오 연습실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극단에 발을 디뎠고 문하생이 되었으며 수련과정을 거쳐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와 극단 민예 소속 배우로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에 도시코 역으로, <고려인 떡쇠>에는 찌몽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한다. <고려인 떡쇠>는 아버지인 김희창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3)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의 연극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의 한 장면 1974년에는 스승인 연출가 허규의 제안으로 KBS 오디션 프로그램 <신인탄생>에 출연해 입상하며 KBS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그녀의 활동을 반대했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방송국 내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인 시절을 보내던 중 그녀는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된다. 태권도 도장에서 요가를 알려주는데 요가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 당시의 속설 때문이었다. 하다 보니 송판 두어 장과 기와 일곱 장 정도는 깰 실력이 되었고 국기원에서 초단 단증도 받게 된다. 꽃꽂이와 뜨개질이 아닌 태권도가 특기라 하니 기자들은 당장 과장을 섞어 그녀를 태권도 3, 4단의 실력자로 소개했다. 1974~5년은 태권도 액션 영화가 등장해 흥행했고 발차기가 아름다운 챠리 셀(한용철) 같은 신인 남자배우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다. 태권도가 특기인 그녀에게도 곧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는 1976년 태권도 도장 관장님의 다급한 부탁으로 해외에 태권도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문화영화에 출연한다. 원래 예정되었던 여자선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나갔던 것인데 ‘KBS 탤런트 김정란, 태권도 문화영화 <동과정>에 출연’이라는 소식이 작게 신문에도 실리게 된다. 얼마 후 영화사인 우성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긴급하게 우성사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홍콩 쇼브라더스로 가 영화를 찍을, 액션이 되는 여배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성사 사무실에는 김용덕 대표와 홍콩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배우이자 <여신탐>에 함께 출연한 남석훈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림4)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남석훈과 김정란. 뒤편으로 불타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오픈세트가 보인다. 우성사에서는 오디션이랄 것도 없이 함께 인삼차를 마시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녀가 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 이미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김용덕과 남석훈은 더욱더 그녀를 반겼다. 당시는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외국에 거주 중인 신원보증인의 초청장과 재무보증 등이 필요해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너 외국 갈 수 있니?” “네”. “당장 갈 수 있니?” “네” “그러면 준비해라” 너무 쉽게 끝난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우성사가 찾던 배우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디션 프로 <신인탄생>에서 검증한 연기력과 태권도 실력은 물론 여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홀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출발한다. 홍콩 쇼브라더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오픈세트에는 강과 산, 탑, 폭파시킬 별장과 여러 건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촬영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해 이뤄졌다. 가히 동양의 할리우드였다. 그리고 그녀는 쇼브라더스 영화의 주연배우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숙소와 자동차, 의상과 분장 그녀에게 제공된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스튜디오 분장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분장과 의상을 마치면 때로 옆 방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간단하게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차에 오르면 그녀를 촬영장으로 데려갔다. 촬영장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어 그녀는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연기가 끝나고 그녀가 카메라 뒤로 빠져나오면 현장의 전담 매니저가 김정란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펴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 보장되었고 촬영은 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림5)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벨트에서 화살을 꺼낸 뒤 석궁을 쏘는 장면이다. (그림6)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오토바이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탐>은 일본과 홍콩, 한국의 여형사로 구성된 특별수사반이 스코틀랜드 출신 형사반장과 함께 보석밀매와 납치를 일삼는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여형사들에게는 각자의 장기가 있는데 김정란이 연기한 한국형사 고은미는 석궁과 태권도가 특기이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국내장면에서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그녀는 한국의 악당들을 태권도로 홀로 소탕하며 몸을 사라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석궁을 쏘며 몸을 날리는 등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한다. (그림7)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포스터 <여신탐>은 홍콩개봉 당시 영어 제목이 <Deadly Angels>였는데, 세 명의 미녀들이 악당을 퇴치한다는 설정이 1976년에 방영된 미국 abc 방송국의 드라마 <Charlie's Angels(미녀삼총사)>와 유사하다. 당시 쇼브라더스는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킹콩>(1976)의 흥행을 보고 <성성왕>(1977)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쇼브라더스는 국제적인 흥행의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제작, 배급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한국의 영화사들도 이런 흐름에 공동제작 혹은 투자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림8)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촬영 중 이한상 감독에게 출연 섭외를 받은 김정란. 1) 그녀는 내심 홍콩에서 촬영을 마친 후 바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촬영 중에도 영화출연 섭외가 쇄도했다. <여신탐> 촬영 중 홍콩의 명감독 이한상으로부터 <백사전>(이한상·최동준, 1978)의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노출장면 때문에 거절했는데 그 역할은 대만 배우 임청하에게 돌아갔다. 국내 영화사들의 계속된 출연요청으로 그녀는 <여신탐>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특명>(김선경, 1976),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정무문(속)>(남석훈·초석, 1977), <금호문>(김선경, 1977), <용왕 삼태자>(최동준, 1977) 등 쉴 새 없이 작품을 이어갔다. (그림9)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포스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상관영봉이고 흰옷을 입은 이가 김정란이다. 상관영봉의 화려한 손모양이 포스터에도 드러난다. 1977년 출연한 <소림사 흑표>는 당시 무협영화의 히로인이었던 대만 출신 배우 상관영봉과 공동 주연한 작품이다. 상관영봉은 이미 <소림사 18동인>(1976) 등의 영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무협 배우였고 쿵푸 액션을 하다 보니 이 작품에서는 그녀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쿵푸는 손동작이 화려하고 사전 동작이 많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주목을 받기 쉬운 반면 태권도는 발차기 위주여서 액션을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화면에서 얼굴이 멀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일단 중국식 의복을 입으면 연기가 달라졌다. 액션을 하려면 목을 한 바퀴 돌려 긴 머리카락을 감아서 정돈한 뒤 옷을 접고 대사를 하고 손동작을 하는 식으로 사전 동작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화면에 더 오래 나갈 수 있었지만 태권도는 한번 자세를 잡으면 바로 발차기를 하고 주먹이 나가는 식이었다. 이런 동작의 차이 때문에 화면에서 돋보이기 힘들어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림10)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의 한 장면. 검은 옷을 입은 상관영봉과 흰 옷을 입은 김정란 쿵푸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액션의 합을 그대로 외우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국내촬영은 장비도 열악하고 준비도 오래 걸리다보니 무조건 몰아찍기를 해야 되었기에 한번 찍을 때 최대한 길게 촬영했다. 그러니 액션도 길어져 합은 열 동작 이상이었다. 사전에 액션 연습도 없이 촬영 직전 현장에서 처음으로 열 동작 이상을 알려주면 그대로 외워 촬영했고 한 동작이라도 틀리면 사고와 부상으로 이어졌다. 큰 사고는 <금호문>(김선경, 1977)에서 발생했다. 소품이 부족해 촬영용 칼이 아닌 육중한 무쇠칼을 사용했던 게 화근이었다. 상대 배우가 무쇠칼로 액션을 하다 타이밍을 놓쳐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것이다. 머리에 둘렀던 진주 장식이 터지고 머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촬영지가 고창 정읍의 선운사다 보니 열악한 교통상황에서 급히 갈 수 있는 병원조차 없었다. 제작진은 담배를 으깨 피가 나는 머리를 지혈한 뒤 그녀를 리어카에 실어 가축병원으로 옮겼다. 마취도 없이 환부를 꿰매는 것으로 처치를 마친 후 현장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다음날부터 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미 개봉일이 잡혀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그나마 진주 머리 장식이 있어 큰 화를 면했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부은 얼굴로 고통 속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촬영을 마쳐갈 즈음 꿈을 꾸고 찾아온 어머니와 함께 겨우 서울로 올라와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던 열악한 촬영 환경에서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있었고 사고 후의 수습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다. 그녀뿐 아니라 무협액션장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사나 작품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협액션영화 촬영현장의 조건이나 대우는 국내가 홍콩이나 대만보다 훨씬 열악했다. 당시 무협액션영화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천대가 촬영현장의 열악함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림11) <금호문>(김선경, 1977)의 한 장면. 사고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진주머리 장식이 눈에 띈다. 대만에서는 로웨이가 제작한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과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을 촬영했다. 두 편 모두 성룡과 함께 출연했는데 <사학비권>에서는 성룡에게서 권보를 빼내기 위해 소년처럼 남장을 하고 접근하는 역할이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진행되는 합작영화의 경우 사전에 시나리오를 보기가 힘들었다. 보통 합작영화 제작 시 한국 영화사가 전담했던 한국 로케이션 장면의 대본 정도만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만의 영화사가 전담한 대만 촬영분량에서는 역할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현장에서 캐릭터를 파악하고 연기해야 했다. <사학비권> 또한 대만 촬영현장에서 당일 그날의 의상을 보고서야 남장소년 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 통역조차 한국말이 서툰 화교라 대부분 눈치껏 해석하고 연기해야 했다. 가령 “여자인데 남자로 분장했어. 배고파. 빵 먹고 싶어.” 라는 통역된 감독의 말만 듣고 ‘남장을 하고 빵을 훔쳐먹어야 하는 장면’이라 판단하고 연기했다. 그러다 옆에서 한국말을 조금 아는 성룡이 “귀여워” 라고 첨언하면 그녀는 귀여운 표정이나 코를 치는 연기를 더하는 식이었다. 정보 없이 현장에서 눈치껏 연기하다 보니 촬영 중인 화면의 사이즈를 알리도 만무했다. 그 덕에 자신이 찍히지 않는 쇼트에서도 혼자 열심히 연기해 감독이 몇 장면 더 찍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12)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소년처럼 남장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림13)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비호성주의 딸 황주로 돌아온 모습이다. <사학비권>과 <오룡대협>의 대만 촬영현장은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분위기나 대우는 좋았다. 분야별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 진행이 순조로웠고 식사를 굶거나 밤을 새는 경우도 없어 좋은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 그녀 뒤에는 언제나 발받침과 차를 담은 보온병이 졸졸졸 쫓아왔는데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 전담 스태프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발받침을 가지고 따라다녔다. 뿐만아니라 대만 제작팀은 당시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스폰지 속굽이 있는 키높이 부츠를 특별히 제작해줄 정도로 세심하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줬다. (그림14)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 대만 촬영현장. 방수일, 성룡, 진지화 감독, 김정란. 김정란의 오른쪽에는 촬영장에서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던 발받침과 보온병이 있다. 하지만 액션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다. 덤블링을 하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의 액션은 직접 연기해야 되었고 그 수준을 넘는 경우는 대역이 대신했다. 중국에는 무술 인구가 많아 대역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무술이 가능한 키 작은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보물이 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배우들과 결투를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데 결투 내내 맞고 쓰러지는 액션을 해야 했다. 대역이 있다 해도 어지간한 액션은 모두 해야 되었기에 비가 오면 아파서 울 정도로 늘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림15)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 촬영현장에서 김정란과 대만의 무술감독.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 난감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몇 편의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이 그중 한 편이다. 술집 작부와 정신이상자라는 1인 2역을 맡았는데 조연이긴 했지만 개성 있는 역할이라 선뜻 응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파에 시달린 인물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연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어우, 나도 막 이런 연기가 되네.’ 라며 신나서 한 역할이었다. (그림16)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의 한 장면 <신궁>(임권택, 1979)에서는 술집 주인으로, <짝코>(임권택, 1980)에서는 짝코의 애인 역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다. <짝코>는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능청맞은 연기로 어둡고 진지한 극의 분위기를 재치있게 살렸는데 그녀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림17) <짝코>(임권택, 1980)의 한 장면 연기에 재미를 느낀 그녀는 작은 역이라도 열심히 참여했다. <물보라>(김수용, 1980)에서는 동네 아낙으로 출연했는데 바닷가에서 여자들이 뛰어와 서는 장면에서 그녀는 제일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촬영 전, 다른 배우들에게만 땀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물을 뿌려준 상태였다. ‘나도 땀을 흘렸어야 되는데…’ 걱정이 된 그녀는 얼른 바위틈 웅덩이로 뛰어가 고여있는 물을 찍어 얼굴에 뿌렸다. 그걸 본 김수용 감독이 웃으며 “정란이까지 찍어줘”라고 해서 출연장면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림18)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의 한 장면 (그림19) TBC 드라마 <대춘향전>(1980)의 한 장면. 왼쪽 끝이 향단 역의 김정란, 오른쪽 끝이 춘향 역의 이경표이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 방송 활동도 겸했다.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에는 정순누나 역으로, TBC 특집 드라마 <대춘향전>(1980)에는 향단역으로 출연했으며 꾸준히 방송 섭외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에서 그녀의 결혼을 서둘렀고 1981년 결혼 후 남편의 반대와 육아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다. 그녀는 영화계에서 약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굵직한 무협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1970년대 액션 여배우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국내 무협액션영화의 특징과 여성 연기자의 조건, 합작영화의 제작 관행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녀의 지난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조명받기를 바란다. 1) 경향신문 1976년 9월 20일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