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 감독
- 조민호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박해일, 박희순, 신민아, 이민기, 정유미, 이천희, 고은아, 유나미, 김학선, 정석용, 최명수, 강왕수, 신동미, 이은우, 김준배, 김중기, 김채린, 권나영, 한서은, 윤성재, 김상호, 안정희, 백재호, 최서우, 정쥬드
중반부에 영화의 스타일을 요약하는 한 장면이 있다. 늦은 밤, 열아홉의 영하( 권한솔 )는 거실 소파에 잠들어 있다. 그가 잠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영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누인 계부 영진( 박종환 )이 훤히 드러난 영하의 쇄골 부근에 찍힌 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성장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하는 듯한 이 삽화는 자식을 향한 애틋한 부정(父情)과 자신의 충동에 굴복한 남자가 느끼는 자괴 사이를 진동한다. 연출자 김유리 의 개성은 이처럼 스토리의 흐름을 함축하는 중요한 정보, 인물의 감정을 다루는 복합적인 방식에서 나온다. 부분적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플롯은 관객들이 영하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무심한 말과 행위로만 전달한다. 생면부지의 영진이 이삿짐 트럭 앞에서 서성대는 열두 살 영하(문성안)를 안아 올릴 때, 등교를 준비해야 하는 부산스러운 아침, 머리를 감는 열다섯 살 영하( 안진현 )의 목덜미 위에 그가 물을 부어줄 때, 바람이나 쏘이자며 차를 몰아갔던 비 오는 날 영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서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감지한다. 김유리 감독은 단편영화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2013)에서부터 눈여겨보았다. 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처리된 장면들을 모아 진실을 이야기할 줄 아는 연출자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주인공의 초점을 상실한 내면 상(像)을 묘사하는 이 단편에서 김유리는 스토리와 감정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 팽팽하게 제어하는 연출의 힘을 보여주었다. 김유리의 장편데뷔작 < 영하의 바람 >(2018)은 주인공 영하의 성장기를 그의 삶에 중대한 전기(轉機)가 된 세 개의 시기를 이어 붙여 구성한다. 열두 살, 열다섯 살, 열아홉 살로 도약하는 세 개의 시간 프레임에 걸쳐서 세 명의 다른 배우들이 영하를 연기한다. 이 조각난 7년의 시간 안에서 영하의 세계는 격동한다. 친부가 떠난 뒤 그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신동미 ) 슬하에서 계부와 새 가족을 이룬다. ‘박영하’에서 ‘김영하’로 전환된 이 시기 영하는 믿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또래 사촌이자 친구인 미진( 옥수분 )과 유대감을 형성한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녀는 병적으로 안수에 집착하는 어머니, 종종 다정하기도 한 계부로부터 방치된다. 가족의 붕괴와 타락한 종교, 아동 학대, 여성의 독립, 불안정한 주거 등 많은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 안에서 영하는 이 무수한 문제들과 싸우고 있다. 세 개의 챕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상술하지 않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김유리는 영하를 덮친 외풍과 세계로부터 밀려나는 존재의 비의를 침착하게 쌓는다. 보호받지 못한 성장기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그린 이 영화의 핵심 의제는 좌초된 가족이다. 집과 연결된 문제는 10대 소녀가 직면한 고독과 소외의 교차점에 있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영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이삿짐과 함께 버려진 채 서럽게 울고, 스스로 집을 떠나 골방에 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집 없이 떠돈다. 거처를 상실한 유랑의 상태로 영하를 몰아가기까지 대다수의 사건은 극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생략과 뉘앙스로 전달된다. 이를테면 신앙의 외피를 두른 어머니의 욕망과 의뭉스러운 계부와의 관계는 은근하게 암시된다.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탐사 과정은 영하의 의식이 성장하는 속도와 흐름에 맞춰져 있다. 바람은 중요한 순간마다 불어온다. 낯선 운전기사가 모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열두 살 영하에게, 완전히 혼자가 되어 폐허의 골목길을 걷는 열아홉의 영하에게도 바람이 분다. ‘영하’는 극중 인물의 이름이자 기온을 표시하는 단위이고, ‘바람’은 자연현상인 동시에 기분전환이라는 의미를 품은 메타포이고,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교회 예배에서 신에게 무언가를 기원하는 어머니와 영하의 모습으로 열리고, 휑한 거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는 영하를 끝으로 닫힌다. 의미의 다원성을 가지고 유희하는 제목처럼 인간의 말과 행위는 하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고, <영하의 바람>은 단일하게 고정되지 않는 스토리의 경계를 진동한다. 존재의 기반을 매섭게 휩쓸고 가버리는 바람, 상실감에 대한 이 이야기 안에는 애조 띈 이미지들이 많다. 특별히 신성함이 느껴질 만큼 초연해 보이는 영하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과묵한 영하가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는 동안 관객들은 캐릭터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그의 얼굴을 통해 짐작한다. 대사가 전달하는 감정을 모두 합친다 해도 무감하고 스스럼없는 영하의 얼굴을 이길 수 없다.
허리께까지 물에 잠긴 남자의 뒷모습. 그는 곧 물속으로 가라앉고 그 자리엔 파문만 일렁인다. < 보희와 녹양 >( 안주영 , 2018)은 이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곧 소년 보희( 안지호 )와 소녀 녹양( 김주아 )이 극장에서 보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인 것으로 드러난다. 객석에 불이 들어오고 그때야 잠에서 깬 녹양이 묻는다. “그래서 영화 끝에 어떻게 되는데?” 보희는 어디까지 봤느냐고 되묻는다. “주인공 남자애가 갑자기 죽잖아.” 위의 장면은 아마 이 순간인 듯하다. 강물 속으로 사라진 소년의 풍경. <보희와 녹양>은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희가 단짝 녹양과 함께 아빠를 찾아가는 길을 담은 로드무비다. 아빠의 행방을 쫓는 둘의 걸음은 서울 구석구석으로 이어지고, 행적을 수소문하는 중에 둘은 다양한 사람과 마주한다. <보희와 녹양>을 ‘아빠를 찾아 나선 여정을 통해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라 정리한다면, 이 영화는 언뜻 보통의 성장영화 혹은 흔히 봐온 드라마와 다름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보희와 녹양>은 오히려 조용하게 통념을 뒤집는 영화에 가깝다. 우선 <보희와 녹양>은 캐릭터 성별에서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다. 이름 때문에 ‘이보지’란 별명을 갖게 된 보희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곧잘 흘리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다. 반면 일상의 순간들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게 취미인 녹양은 어떤 순간이건 스스럼없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씩씩하고 담대한 소녀다. 둘은 모두 한부모를 두고 있는데(녹양은 아빠, 할머니와 살고 있다. 엄마는 녹양을 낳다 세상을 떠났다), 여타 드라마가 재현하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처럼 불행에 휩싸여 있지 않다. 또 일찍 세상의 강퍅함에 눈뜬 아이 특유의 애어른 같은 면모도 없다. 그저 열네 살만큼의 활기를 품고 있고, 또 그만큼의 사춘기 혼란을 겪는다. 둘을 둘러싼 인물들도 전형성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특히 보희의 엄마(신동미)나 녹양의 할머니(이재희)는 ‘돌봄과 보호’의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에만 머물지 않는다.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보희와 녹양>은 여느 로드무비처럼 극적인 경험에 방점을 두지도 않는다. 영화는 아빠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에 더 큰 관심을 갖는데, 이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다감하다. 특히 보희가 배다른 누나라고 착각한 사촌 남희(김소라)의 남자친구인 성욱(서현우)은 보희에게 형 혹은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영화는 보희와 녹양의 시간만큼 보희와 성욱의 시간에 집중하지만 성욱을 굳이 아빠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이로 적극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아빠의 부재’를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선택 같아 보인다. 보희에게 아빠의 부재는 꼭 채워 넣어야만 할 공백이 아니다. 대신 그가 얻고 싶은 답은 ‘부재의 이유’고, 영화 말미에 보희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다. 아빠가 살아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럼에도 자신을 떠난 이유를 짐작하게 된 보희는 다음 순간 한강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리고 조용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이 영화 시작에 나온 풍경과 똑같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 초반 녹양의 대사처럼 주인공 남자애(보희)는 죽게 될까?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떠난 이유를 알게 된 후 자살을 결심한 걸까? 궁금증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이 바뀌는 순간 우리는 보희가 한강 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가 강물에 몸을 맡긴 채 평온하게 쉬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엄마와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의 접힌 뒷면에 아빠의 모습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어떤 사실은 이렇게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를 정하는 것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혹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따라 맥락이 달라진다. 녹양은 생일을 맞은 보희에게 그간 찍은 영상을 선물로 건네는데, 영상 속 대사를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안녕, 이보희. 내가 돈이 없어서 뭐 줄 건 없고, 재밌게 봐라. 생일 축하해.” “안녕, 보희야. 네 이름 들었을 때 내가 너무 웃겨가지고.” “보희? 보희가 누구야?” “야, 이보지.” “여자 이름도 아니고.” “생긴 건 좀 그래, 그런데.” “요리를 잘해.” “그날, 밥 먹으면서 엄마가 했던 말.” “엄마가 뻥치신 거야?” “그런 가봐.” “아니, 할머니. 내 친구 있잖아.” “내가 어릴 때 너 되게 많이 괴롭혔는데.” “많이 미안한 거 같아.” “아빠 찾는다고.” “찾아와 줘서 되게 고마웠고.” “너무 상처 안 받았으면 좋겠어.” “보희.” “우리 보희 없으면 안 되는 거.” “독특한 새끼.”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쩌면 진짜 어쩌면.” “뭔데.” “아빠가 살아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보희입니다.” “야, 똑바로 좀 해봐.” “됐어. 치워. 이런 거 안 할래. 가자.” 이 말들은 녹양과 보희, 녹양 할머니와 보희 엄마, 남희와 성욱의 말을 뒤섞은 후 짜깁기한 것인데, 교묘하게 앞뒤의 말들이 연결되며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보희와 녹양은 ‘잃어버린 아빠 찾기’의 여행이 마무리된 후 세상의 많은 일들도 이렇게 작동함을 알게 된다. 어디까지 볼 것인지,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떤 말을 새길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 많은 관계와 많은 일들이 달리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보희와 녹양>은 수많은 한국영화 속 청소년이 경험하듯, 혹독한 시련을 온몸으로 통과해야만 제대로 된 성장담이 쓰여지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따뜻하고 친절한, 호기심 가득하고 웃음 풍성한 성장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꿈. 이라는 글자를 적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양에서 조금 묘한 느낌이 든다. 또 모양만큼이나 발음 역시 묘하다. 꿈. 꿈. 의뭉스럽기도 하고 초탈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여튼 뭔가 꿈꿈한 느낌이랄까. 또 하나 재미난 점이 있다. 우리가 ‘꿈’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보통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잠을 자면서 나타나는 어떤 정신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꿈’(꿈1)과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나타내는 ‘꿈’(꿈2). 이 두 가지 의미는 언뜻 봐선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같은 모양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신기한 점은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영어에서 Dream이라는 단어 역시 꿈1과 꿈2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일본어에서도 꿈을 나타내는 ‘유메(ゆめ)’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꿈’이라는 단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는, 인류학적으로 뭔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광국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 < 꿈보다 해몽 >을 보며 나는 꿈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두 가지 의미의 연관성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더 이상 관객이 찾지 않는 연극을 때려치우고 나온 한 여배우( 신동미 분)가, 과학수사보다는 꿈 해몽에 능한 형사( 유준상 분)를 만나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여배우가 꾸었던 꿈으로 들어갔다가 그것을 해석해주는 형사의 이야기와 형사 누나가 꾼 꿈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여배우가 1년 전에 헤어졌다는 전 남자친구 ( 김강현 분)의 꿈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영화는 쉴 새 없이 현실과 꿈 사이를 들락날락거린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영화를 두 번 보았는데, 처음 볼 땐 자연스레 꿈1에 집중하며 보았다. 즉, 꿈1의 관점으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와 그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이야기에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꿈과 현실의 불분명한 경계와 그 상호작용이 꽤나 흥미로웠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 인셉션 >이 비교적 논리적인 체계 아래에서 꿈속의 꿈으로 들어간다면, < 꿈보다 해몽 >은 논리적 전개과정이 무의미한, 말 그대로 꿈에 가깝게 꿈을 그려낸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번째로 영화를 보았다. 같은 영화였지만 다른 영화였다. 이번엔 꿈2에 포커스를 맞춰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연기라는 꿈을 박차고 나온 여배우, 그녀와 헤어진 뒤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 세계로 사라져버린 전 남자친구,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소년과 그것을 끊임없이 지우려고 하는 소년의 엄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 표면적으로 꿈1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모두 자신의 꿈2에 대해 갈등하고 성찰한다. 영화는 연기를 그만두겠다며 무대를 박차고 나온 여배우의 모습으로 시작해, 곧 시작될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은 여배우의 미소에서 끝을 맺는다. 그 미소에서 느껴졌던 긍정의 에너지가,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꿈(1+2)에 대한 해몽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 구조에 이끌렸다면, 영화를 다시 보며 더욱 깊게 다가왔던 건 각박한 현실 속에서 꿈2에 대한 용기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응원의 메시지였다. 꿈1을 통해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된 꿈2라는 존재. 꿈2에 대한 자각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는 꿈1의 모습들. 비록 아직 현실에서 일어나진 않았지만, 어떤 기대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꿈이라는 존재. 서로 마주 보며 닮아가는 두 개의 꿈은 하나의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했다. 어쩌면, 꿈의 어원에 대한 영화적인 답변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