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냥
- 감독
- 신동우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한국영화필름 중 최초의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신동헌 화백의 < 홍길동 >(1967년 작)이다. 동생인 신동우 작가가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애니메이션 강국인 미국,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도 < 로보트 태권V >, < 아기공룡 둘리 >, < 뽀롱뽀롱 뽀로로 > 등 우리만의 특색과 아이디어를 지닌 다양한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 온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첫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애석하게도 <홍길동>의 필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2008년 애니메이션 연구자 김준양 선생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극적으로 발굴됐다. 물론 이 필름은 일본어 제목과 일어 성우 더빙을 거친 현지 판본이기도 했고, 2008년 당시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필름 디지털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나 아직 경험과 기술을 쌓아 나가야 하던 시기이기도 했으므로, 디지털로 변환한 디지털시네마가 1차적으로 공개됐고 본격적인 디지털 심화복원 작업은 훗날로 미뤄졌다. 무엇보다도 한동안은 극영화 필름의 디지털복원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으므로, 한국영상자료원은 2021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필름을 디지털복원 하게 됐고, 첫 작품은 당연히 <홍길동>이어야 했다. 1960년대의 셀 애니메이션 필름은 극영화 필름과 달리 계조가 단순하고 색 면의 형태를 띠므로 디지털복원 작업도 비교적 수월하리라는 예상은 뜻밖에도 처음부터 어긋났다. 우리는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원본’의 범위가 전혀 다른 기준에서 정해져야 한다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혼란에 빠졌다. 극영화 필름의 얼룩과 잡티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던 반면, 초기 애니메이션 제작에 쓰이던 재활용 셀에서 보이는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원본 특성의 일부로 볼 수도 있었다. 채색의 독특한 질감 또한 함부로 변형시키면 안 될 것이었고, 반면에 이 셀들이 필름에 인화된 후 필름 자체에서 발생한 얼룩과 흠집들은 어떤 면에서는 적절히 구분하여 제거할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여러 레이어가 겹쳐진 컷에서 그 복잡도와 작업의 난이도는 훼손이 심한 극영화 필름 못지않았다. 아울러 여러 세대를 거쳐 인화되면서 그레인이 누적되고 먹선이 흐려진 필름 화면에서 셀화의 느낌을 최대한 되살리기 위해 수차례의 테스트와 시사도 필요했다. 또 다른 이슈는 일본 상영에 맞게 변형된 <홍길동> 필름으로부터 한국 국내 개봉 당시의 형태를 최대한 복원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영상자료원에는 <홍길동>의 한국어 음향 필름이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일본판 필름이 발굴된 후에 대부분의 일어 성우 더빙 음향을 기존의 한국어 음향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타이틀, 오프닝 크레디트, ‘끝’ 자막이 모두 일본어로 삽입된 화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참고할 자료가 전무할 경우 유실된 부분을 최대한의 고증을 통해 제작, 재현하는 오늘날의 필름 아카이브의 관례에 따르기로 했다. <일본판의 오프닝 타이틀과 엔딩 타이틀> <포스터 이미지에서 추출하여 복원한 오프닝 타이틀> <엔딩 타이틀> 오프닝 타이틀은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인 <홍길동> 포스터의 캘리그라피를 기준으로 디자인했다. 자모의 열린 구조와 역동적인 경사 형태를 살리기 위해 끝 선의 질감을 디테일하게 다듬어 화면의 제 위치에 합성했다. ‘끝’ 자막은 같은 감독이 같은 해에 연출한 작품이자 <홍길동>의 속편 격이라고 볼 수 있는 <호피와 차돌바위>의 경우를 참고하여 제작했다. 동시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끝’ 자막은 조금씩 다양한 디자인과 효과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 경우 정황상 기존의 제작 기조를 거의 변함없이 유지했으리라 판단하여, 장평이 다소 넓고 꽉 찬 사각형으로 육중한 느낌을 주는 <호피와 차돌바위>의 한글 ‘끝’자를 <홍길동>에 적용했다. <크레디트 자막 디자인> 어쩌면 가장 까다로울 수 있는 부분이 오프닝 크레디트였다. 일본판 필름은 한국 제작진 부분의 크레디트가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고 일본어 성우진의 크레디트가 장시간 이어지도록 편집돼 있었다. 국내 개봉판에 없었을 일본 성우들의 크레디트는 삭제하면 될 일이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우선 개봉 당시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분들의 기억에 의존한 구술과 기타 여러 정황을 미뤄볼 때, 한국 개봉판은 동일한 배경 화면에 동일한 한국 제작진이 한글로 표기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었다. 한편 <홍길동> 포스터에서 크레디트를 표기한 글씨체는 일본판 한자 글씨체와 공통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보였다. 넓은 장평과 하부, 획 끝을 둥글고 부드럽게 처리한 점, 활자 인쇄라기보다는 손으로 적은 느낌이 드는 획의 직선 부분 등이 그랬다. 따라서 일본판 크레디트의 글씨체가 지닌 색감, 번진 느낌의 음영을 동일하게 살리고 국내 포스터의 한글 글씨체 모양을 모사하여 크레디트 글씨체를 디자인했다. 재생 중인 필름 특유의 불규칙적인 그레인 변화와 미세한 배경 떨림, 음영 차이 등을 살리기 위해 일본판의 원색 크레디트 배경을 프레임단위로 수정하여 복원된 자막 뒤로 그대로 옮겨와 작업했다. 장편 애니메이션 필름 <홍길동>을 제작하던 당시,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경험이 거의 없었으므로 신동헌 화백과 그의 스태프들이 열악한 여건 속에서 연구와 실험을 병행하면서 색감과 질감 표현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고 한다. 셀에 일일이 붓으로 쌓아올린 채색의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특히 어두운 밤중 길동이 야행을 하는 장면들에서 달빛에 어스름히 보일 듯 말 듯 한 어두움, 그 어둠속에서도 달빛 그림자가 주는 미세한 심야의 음영이 보여주는 색과 질감의 표현은 압권이다.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인 시대지만 이런 셀 애니메이션만이 주는 미학과 풍부한 정서가 있다. 어쩌면 살아가며 경험하지 못했을지 모를, 고전 필름들의 영화적 체험과 감동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복원팀은 경기 파주 모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 홍하늘(영상복원팀) 편집 김기호(학예연구팀)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1. 2016년 6월 30일,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 >(1967)이 수록된 「 신동헌 애니메이션 컬렉션」 DVD를 출시했다. <홍길동>은 만화가 신동우가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 삼아,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연출을 맡아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필름이 유실된 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는데, 2008년에 일본 고베의 고베플래닛영화자료도서관(KOBE PLANET FILM ARCHIVE)으로부터 일본어 더빙이 된 <홍길동>의 프린트를 입수하여 한국어 사운드 필름과 합치는 작업을 통해 상영하면서 실제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신동헌 감독의 다른 작품 < 호피와 차돌바위 >와 함께 디지털 색보정 작업을 해서 DVD가 출시된 것이다. 이 < 홍길동 >을 2012년 11월 29일~12월 2일 한국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메카데미아 학회(미국 미네소타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 팝컬처의 연구 학회)의 콘퍼런스에서, 학회 참석자를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의 협력을 얻어 상영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필자도 메카데미아 콘퍼런스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스토리 메이커」 「이야기의 체조」 저자)의 초청을 받아 같이 관람했었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홍길동>을 본 감상으로 “폴 그리모(Paul Grimault)의 <사팔의 폭군 La Bergere et le ramoneur>을 방불케 한다”며 그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이 비단 일본의 영향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발언은, 일본 내에서는 한국이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일본을 ‘흉내 내’ 발전해왔다는 식의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 셈이다. 물론 한국인인 필자에게 인사치레한 것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많은 개인, 회사, 단체, 기관과 자주 싸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 평론가이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터부에 가까운 ‘덴노’와 그와 관련된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고, 요즘은 아베 신조 정권이 개헌을 논하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헌법에 대한 논의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거침없이 헌법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일본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 재판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어떤 다른 사람에게 배려를 하거나 인사치레를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학자이다. 그런 그가, 단 두 번 만났을 뿐으로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필자를 배려하기 위해 괜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평소에도 오쓰카 에이지가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고 (아무래도 자국이기도 하니) 타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 편으로는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국과 중국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므로, 역시나 단순히 ‘일본에서 만연하고 있는 통상적인 편견’에 대해 반대하는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되도록 중립적으로 보았을 때에, < 홍길동 >이 꼭 ‘절대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폴 그리모 감독의 < 사팔의 폭군 >은 1952년 작품으로 당시 이탈리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애니메이션이다. 다만 개봉 버전은 감독의 의향에 맞지 않은 형태로 1953년에 공개되었던 것이었는데 (제작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나도 완성시키지 못하자 공동제작자가 자금 회수를 위해 억지로 개봉시켰음), 1967년 재판을 통해 폴 그리모가 권리를 되찾은 이후 자금을 10년 걸려 모아서 1980년 < 왕과 새 Le Roi et l’Oiseau >라는 제목으로 다시 개봉했다는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 아무튼 구 버전인 < 사팔의 폭군 >은 일본에서 1955년 개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문부성 선정 및 우수영화감상회 추천 등을 받았다고 함),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하여 여러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팔의 폭군>은 세기영화에서 배급을 맡아 1957년 8월 31일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고 (「동아일보」 1958년 9월 4일 자 기사), 1960년에도 8월 21일부터 재개봉된바 (「동아일보」 1960년 8월 23일 자 기사)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종전 후에 한국에서는 월트디즈니는 물론이고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고, 미국 작품만이 아니라 유럽의 폴 그리모 작품도 상영되었다는 것이다. < 사팔의 폭군 > 중앙극장 개봉 광고. ‘붸니스 영화제 특별대상 및 심사위원상 수상 작품’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구라파 최고의 만화영화의 시인 포-ㄹ·그리모- 제작’이라고, 유럽 감독 폴 그리모가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왼쪽 하단에는 ‘세기영화 주식회사 배급’이라고 수입사가 표기되어 있다. 2. 그뿐만이 아니다. 자주 지적되지 않고 있지만 사실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은 1963년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란 작품이었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DVD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일본에서 1959년 12월 25일에 개봉된 토에이애니메이션(당시는 토에이동화) 제작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 시네마스코프로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첫 번째 작품인데, 토에이애니메이션 사이트의 소개를 보아도 그 당시 첫 시도였기 때문에 “제작에 엄청난 곤란을 겪었으나, 그 성과는 매우 훌륭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 1960년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아동영화 부문 황금사자상(그랑프리)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문부성 선정과 우수영화감상회 추천을 받았다. (< 사팔의 폭군 >과도 마찬가지)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영화 산업의 일각에 안정적인 지위와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라고까지 토에이애니메이션이 자평하고 있을 만큼, 토에이 초창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1958년 개봉된 <백사전> 이후 토에이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몇몇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토에이가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초기작이었던 것이다. 토에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은 중국의 설화, 그것도 「서유기」나 「삼국지」처럼 아시아 전역에서 유명한 고전이 아닌 작품을 원작으로 한 케이스였다. (중국의 4대 민간설화 중 하나라서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도 물론 전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인지도가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만큼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일본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루토비 사스케’라는 캐릭터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말하자면 토에이가 중국 원작인 <백사전>을 만든 다음 소위 ‘신토불이’랄까 일본적인 것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작품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자, “시대극이라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평가가 높았다고 토에이 측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사루토비 사스케는 소위 ‘닌자’라고 하는 일본 창작물 속의 존재를 대표하는 캐릭터인데, 원래는 일본에서 2차대전을 전후하여 유행했던 ‘강담’ 1) 등과 같은 대중소설 비슷한 장르를 통해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 배경이 있다. 그리하여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이후 토에이는 <서유기>(1960), <안주와 즈시오마루>(1961),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배드의 모험>(1962), <개구쟁이 왕자의 큰뱀 퇴치>(1963) 등 장편 애니메이션을 속속 개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축으로 성장해갔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백사전>(왼쪽), <안주와 즈시오마루> DVD 3. 이같은 작품인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일본에서 개봉한 지 4년 만에, 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지 3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빠른 수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약간 편법을 사용한 수입이었고, 그로 인하여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1963년 당시에 국내에서는 반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63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 왜색 영화의 서울 상영에 대해 비판하는 독자 투고가 실렸고, 12월 17일 자 같은 「동아일보」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의 사진까지 인용하여 ‘눈가리고 아웅/판치는 왜색 붐’이란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를 ‘일본 토에이(동영) 작품’이라고 명기하면서, “백 퍼센트 왜색물이라는 것과 그것이 미국을 거쳐 들어온 상품이어서 당국이 관용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일본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공보부(이후 문화부로 이어지게 되는 정부기관)에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만이 아니라 역시 왜색을 이유로 수입이 제한되어 있던(하지만 그 이야기는, 수입 시도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병 동경에 가다> 역시도 수입 규제를 풀어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59년 일본 동영 제작·야부시다 감독인 <사루토비 사스케>를 MGM에서 영어로 자막을 넣어 배급(RELEASE)한 것이 틀림없는 만큼 완전히 일본 작품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 아닌 미국이나 이태리 등지에서 제작 또는 제공, 배급된 일본 작품은 수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결론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동아일보」) (※여기 표기된 ‘야부시다’란 감독 야부시타 타이지를, MGM은 미국의 영화 배급회사 MGM을 가리킨다.)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동아일보」 1963년 12월 17일 기사 이처럼 비판적인 논조이기는 하나, 이 기사를 읽고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일본 작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없을 것이고, 즉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정식 수입·개봉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나중에는 이처럼 비판론이 나오는 바람에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수입을 허가해주지는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초에는 분명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입이 되었다는 것을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입’이라기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지만 미국 MGM이 배급을 맡았으므로’라는 이유로, 크게 검토하지 않고 단지 실무적 차원에서 수입이 이루어졌던 것 같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한국의 여러 신문에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TV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로 비판하는 논조로) 자주, 또 크게 다루었고,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심지어 전문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일컬어지는 “과거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적을 속인 채 한국 작품인 것처럼 방영하였다”는 말이 실은 잘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 MBC나 KBS의 방송국 연감을 살펴보더라도 해당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임을 (굳이 강조는 하지 않았을지언정) 감추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까지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비판 기사를 싣는데 감춰질 수도 없고, 한국이 그때 일본과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신문사에 일본 특파원도 있고 사업차 일본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 방송국이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없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및 극장 상영은 ‘일본대중문화 3차 개방안’에 의해 2000년 개봉된 < 무사 쥬베이 >(원제 <수병위인풍첩>)가 아니라 1963년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당시 개봉 제목은 <요술 소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더불어 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은,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1963년 개봉되면서 당시 국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도 이 작품을 보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당시엔 아직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지금처럼 흔한 장르가 아니었고, 월트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작품에 환호하면서 “우리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초기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가까운 일본이 만들어낸 상업 장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필자가 앞서 2012년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의 < 홍길동 > 관람 소감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에 전달하였을 때에, 2008년 복원 상영 당시 신동헌 감독이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아시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중국의 < 철선공주 鐵扇公主 >(1941년 1월 1일 개봉)였음을 밝혔지만,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도 본 적은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는 2012년 당시 필자에게 이렇게 밝혔다. “초당 24프레임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을 기조로 했으면서도 부분적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점, ‘선 녹음 후 작화’ 2) 방식을 고수한 점, 천체망원경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고안한 그림자의 표현 등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두고 부단히 노력하며 새롭게 고안한 것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클래식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음악과 움직임의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해학’은 오롯이 감독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감독님은 ‘유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고, 그런 감독님의 세계는 유명한 진로소주 등 CF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미 잘 보여지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필자 역시 상영 당일에 오쓰카 에이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 홍길동 >의 배경 그림이나 몇몇 부분이 ‘조선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나 소나무 등의 묘사’와 ‘작품에 흐르고 있는 해학’에 대해 지적한 바 있었는데, 이 같은 필자의 감상이 어긋난 방향이 아니었음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의 이런 설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역시도, “< 홍길동 >에 관한 정보, 감사합니다. 제 안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아주 분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역시 < 철선공주 >였군요. 그리고 디즈니. 제가 마침 지난 11월에 중국에서 <철선공주>는 디즈니의 기법으로부터 ‘로토스코프’를, 일본의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은 ‘멀티플레인’을 채용함으로써 각각 서로 다른 스타일이 성립되었다고 강의를 했습니다. <철선공주>로부터의 영향, 디즈니 수용 형식의 차이점, 그리고 각국의 전통양식과의 관계라는 3가지 시점에서 < 홍길동 > < 철선공주 >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을 대비(對比)함으로써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사(史)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쓰카 에이지가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이처럼 아시아의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관계와 각국 작품의 비교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모색을 시도했다. 2012년 당시 오쓰카 에이지는 혹시 < 홍길동 > 관련으로 나중에 심포지엄이나 세미나가 열린다면, 개런티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강연이든 패널로든 참석하고 싶다고 했을 만큼, <홍길동>과 아시아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연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5. 신동헌 감독은 2009년 11월 7일 일본 나고야의 아이치 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시네마 코리아 2009 ~한국 고전 애니메이션 특집~’에서 < 홍길동 > 상영의 게스트로 초대받아 열린 무대 인사 및 토크 이벤트에서, 참고를 하거나 의식했던 외국 작품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을 했다.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당시 장편 만화영화라면 디즈니 정도. 그리고 존 하라스 3) 가 만든 <동물 농장> 정도였죠.” (「시네마 코리아」 채록) 한국에서는 특히나, 1960년대에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서적이 번역되거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직접 작품 자체를 보는 것 외에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일본에서도 과거에는 비슷한 상황이었으므로,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같은 경우에도 2차대전 종전 후인 1951년 < 밤비 >(1942년 미국 개봉)가 일본에서 개봉되었을 때에 영화관에서 무려 100번 이상이나 관람한 다음 1952년에 (월트 디즈니 사의 허락 없이) <밤비>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만든 만화 판을 출간하기도 했던 것이다. 4) < 홍길동 >도 마찬가지로, 디즈니나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실제로 어떻게 그러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는지 참고할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작품만 보고 어렵게 제작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는 점, 또한 월트 디즈니 역시도 애니메이션이란 장르 자체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므로, 영화라는 장르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역시도 어느 누구 한 명의 천재가 전부를 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새로운 기술이나 창작을 덧씌우면서 발전되어 왔다는 점은,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그와 같은 애니메이션 장르 초기의 교류사(史)를 연구함으로써 당시 세계 각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왔는지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국내의 애니메이션 사(史)에 관한 서적은 물론 일본이나 서양 쪽의 서적에도 과거에 출판된 책 중에는 그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반영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앞으로 애니메이션 학계에서 좀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일본 토에이의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미국 MGM 배급으로 국내 수입되는 바람에 개봉이 가능했다는 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일본에서 필름이 발견된 < 홍길동 > 역시도 수출 자체는 미국 회사인 20세기폭스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신동헌 감독은 ‘시네마 코리아 2009’ 토크 이벤트에서 본인은 일본 수출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당시 제작회사였던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만 언급했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당시 신문에 기사가 실린 바 있다. ‘만화영화 홍길동 등 일본에 첫 수출’(「경향신문」 1968년 6월 12일), ‘<홍길동> <7공주> 수출’(「동아일보」 1968년 6월 13일) 등이다. 국산 만화영화 <홍길동>과 실사영화 <칠공주>를 세기상사가 미국 20세기폭스사의 일본지사에 수출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기상사 작품인 이 두 영화는 폭스사 영화의 한국 수입과 바터로 수출이 결정된 것이다. 폭스사는 < 홍길동 >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 금년 여름에 일본 전국에 공개하며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제작, 배급한다.” (「동아일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선 ‘바터’로 수출이 결정되었다 함은 바터무역(barter trade), 즉 특정 상품의 상호 교환을 통한 수출입거래를 말한다. 바터무역은 본래 금전 거래가 없는 물물교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출액과 수입액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무역을 말한다. 즉 한국에 할리우드 영화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국내 영화사(세기상사)에, 외국영화만 수입해오지 말고 한국영화도 수출해야만 그에 비례하는 만큼의 외국영화를 수입해올 수 있다는 식의 조건을 내걸었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특히나 외화벌이가 중요했던 시기이니만큼 비단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통상에 있어서도 바터제를 조건으로 내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세기폭스사가 일본지사를 통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개봉을 추진했던 것을 보면, 20세기폭스 측에서는 당시의 한국영화가 미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그나마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기사에서 폭스사가 < 홍길동 >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라고 한 부분은 즉 일본어 더빙을 했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홍길동> 필름은 일본어 더빙이 되어 있는 것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복원했을 때에는 한국에 남아 있던 사운드필름을 가지고 한국어 음성을 새로 덧입혔다.) 그리고 실사영화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배급한다고 되어 있는데, 슈퍼판이란 자막판을 뜻한다. 즉 주로 아동이 보게 될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아이들을 위해 더빙판으로, 성인이 보게 될 실사영화는 자막판으로 제작해서 일본에 상영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국 수입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일본 수출도 양쪽 모두 미국의 배급 업체(영화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필자가 평소에 1970년대 초반의 일본 TV 애니메이션 수입에 있어서도 미국 방송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던 점과도 연관되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에 관련해서 올해 들어 일본의 애니메이션 연구자와 논의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한일 간 애니메이션 교류 역사의 일환으로써 언젠가 다른 기회에 발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1. 강담(講談)이란 연기자가 무대 위 책상에 앉아서 관객들에게 역사나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낭송해주는 일본의 전통 예능의 일종. 이것이 일본 메이지 시대에 속기술이 발달되면서 강담의 연기 내용을 속기해서 만든 ‘강담 속기본(講談速記本)’이란 것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강담 속기본의 유행이 일본에서 구어체를 보급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컬어진다. 1911년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코단샤(講談社)가 강담 속기본의 인기를 바탕으로 잡지 「강담 구락부(강담 클럽)」를 창간하는 등 일본 출판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최대 출판사인 코단샤의 회사 이름부터가 바로 이 ‘강담’ 및 잡지 「강담 구락부」에서 따온 것이다. 이 강담 속기본에 대해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찾아본 바로는 국내에 2013년 「최천종 살해사건을 소재로 한 실록체 소설 연구」(경희대학교 대학원 동양어문학과 안대수)라는 논문에서 특정 강담 속기본 작품을 비교 대상으로써 사용했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잡지 「열풍」 2011년 12월호~2013년 8월호에 연재된 「잊혀진 이야기─강담 속기본의 발견」(야마시타 타이헤이) 정도가 강담 속기본에 대해 연구된 얼마 안 되는 사례인 것 같다. 강담 속기본이 ‘줄거리를 가진 대중/통속 창작물로서, 표지와 내지에 그림이 있고 캐릭터를 중시한 표현이 특징이다.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당대와 후대의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라이트노벨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 듯한데, 야마시타 타이헤이는 ‘라이트노벨과 비교할 때 표지나 삽화의 그림이 내용과 전혀 관련없는 경우도 많고, 둘 다 통속 문화로서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단 것은 비슷하나 그나마 라이트노벨은 인터넷 상에서나 소수의 비평가, 연구자들 사이에선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강담 속기본은 당대에나 후대에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양자의 비교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강담 속기본이 일본 근현대에 있어서 현재 알려져 있는 닌자 전설, 사무라이 전설과 그 캐릭터의 태반을 만들어내었다는 점 등 일본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강담 속기본은 일본에서 초기의 소설, 카미시바이(종이연극), 영화, 만화 등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향후 일본에서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강담 속기본은 어디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의 원류 중의 하나일 뿐 그 외에도 현재의 만화나 라이트노벨 등 일본의 대중문화는 할리우드 영화, 미국이나 유럽의 SF·판타지 소설, 펄프 픽션 등 수많은 영향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강담 속기본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일본 고유 문화론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연구자들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테고,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연구할 때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란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2. 프리 레코딩(prerecording; 선 녹음)이란 애니메이션 등 영상 작품에서 대사나 음악을 먼저 녹음하는 수법을 말한다. 다른 용어로는 ‘프리스코어링(prescoring)’이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제작비 절감이나 작화 스케줄 때문에 ‘애프터 레코딩’(후시 녹음)을 주로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보통 프리 레코딩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3. 존 하라스(John Halas)(1912~1995년)는 헝가리의 애니메이터. 4. 테즈카 오사무는 <피노키오>도 마찬가지로 월트 디즈니에 무단으로 만화화한 다음 출간한 바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테즈카판 <밤비>와 <피노키오>는 2005년에야 디즈니의 허락을 얻어 복각판이 출간될 수 있었다. 테즈카 사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 라이언 킹 >(1994)의 내용이 테즈카의 만화(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 정글 대제 >(한국 방영 제목 <밀림의 왕자 레오>)와 유사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디즈니 측에서는 <라이언 킹>은 < 밤비 >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착상을 얻었을 뿐이라고 반박했었는데, 이에 대해 테즈카 프로덕션 측에서 “만약 테즈카 본인이 살아 있었다면, ‘내 작품이 디즈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영광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끝낸 바 있었다. 또한 실제로 <정글 대제> 연재 도중에 <밤비>가 일본 개봉되었으며 테즈카가 <밤비>를 100번 이상이나 관람했던 만큼, 실제로도 <밤비>를 보고 감명을 받게 되면서 <정글 대제>를 당초 구상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던 테즈카 본인의 문장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라이언 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