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ggar
- 감독
- 신명량
- 제작년도
- 2011
사진: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5년을 주기로 열리는 현대미술 전시회 ‘도큐멘타 14(documenta 14)’의 예술 감독인 아담 심지크(Adam Szymczyk)가 도큐멘타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헨리에트 갈루스(Henriette Gallus)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갈루스는 심지크에게 “그녀는 영악한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와 자신을 묶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심지크가 대꾸한다. “영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우리와 함께 가라앉을지도 모르니까요.” 1년 후, 그들이 말하는 ‘그녀’에 해당하는 아네트 쿨렌캄프(Annette Kulenkampff)는 540만 유로의 적자를 빌미로 도큐멘타 CEO 직(職)에서 물러났으며 이 스캔들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술행사의 성취를 통째로 가려버렸다. 독일 언론으로부터 ‘무모한 침입자’로 묘사된 심지크는 도큐멘타 14가 남긴 적자의 원흉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나친 예술적 야심이 화를 불렀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예술계에서 비난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끈기와 주견, 고독, 창의성을 지닌 별종들이 있다. 심지크는 그런 인물이며,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exergue - on documenta 14)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 2024)는 이 별스러운 인물에 관한 캐릭터 연구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현대적 예술 제도의 존재 양식과 가치 기준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제시한다. 도큐멘타 14는, 심지크의 담대한 결정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 카셀과 그리스 아테네, 두 도시에서 나눠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적자가 났고 정치인과 미디어 기관의 공격이 쏟아졌다. ‘아테네에서 배우기’라는 제목 하에 개최된 이 웅대한 프로젝트는 유럽 역사에서 식민주의를 탐구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고, 미투 운동과 테러리즘, 유럽발 경제위기, 폭력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어떤 다큐멘터리도 특정 행사의 총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지만, 14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것을 해냈다.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 감독은 큐레이터들의 회의, 스튜디오 방문, 기자회견과 프레젠테이션 따위의 공개 행사, 예산 문제, 설치 과정, 파티를 횡단하면서 위기에 처한 기관의 속살을 들추어낸다. 2015년 여름부터 2017년 가을 도큐멘타 14가 종료될 때까지를 따라가며 14개의 장으로 구성한 이 영화는 사명감에 불타는 예술 큐레이터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기록하였다. ‘아트 바젤’의 디렉터였던 심지크는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는 대신 카메라를 벗어나거나 화면 가장자리에 휴대폰을 두고 사진을 찍는다. 예술이 정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예민하지만 편집증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돈’이라는 주제를 피하지 않지만, 예산은 큐레이터들 간의 대다수 대화에서 나타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오히려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거대한 논쟁을 낳은 열네 번째 에디션이 예술 전시의 개념에 대해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꾀한 내력을 초점으로 한다. 사진: " exergue - on documenta 14 ", IMDb 미술 전시 큐레이팅에 대한 14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볼만한 가치가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가 이룬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매력적이고, 긴장감 넘치고,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다. 3년 넘게 아티리디스는 폴란드 출신의 예술 감독이 전 세계 국가를 돌며 뛰어난 작품을 찾고, 창의적인 큐레이터 팀과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유력한 지식인, 예술가, 영화 제작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금을 조달하는 기관과 협상하고, 작품을 설치하고, 정치인과 만나고, 언론에 답변하면서 도큐멘타 14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조명한다. 이것은 흥미롭고 신명이 나는 광경인 동시에 끔찍한 시간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구조와 큐레이션 담론을 묘사하는 정밀성을 통해 심지크의 큐레이션 팀은 선동적인 정치가 무참하게 무너뜨린 것(예술의 본원적인 가치)을 구제하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거대한 예술 이벤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이벤트의 연속성을 조각조각 모으려는 이 영화의 엄청난 노력은 검열이나 부채로 인해 가려지는 것들,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이상적인 협업 모델, 시대의 쟁점을 가시화하는 과정에 대해 말해준다. 2017년 나는 ‘도큐멘타 14’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다양성과 깊이를 갖춘 전시의 모든 레퍼토리에 감동을 받았다. 7년이 지난 지금도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의 방들, 스탠리 휘트니(Stanley Whitney)의 추상화와 어니스트 만코바(Ernest Mancoba)의 수채화, 올루 오귀베(Olu Oguibe)의 오벨리스크, 기차역의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에게서 받은 영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화려한 축제의 뒷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만성적인 위기에 시달리는 예술계, 이 역설과 씨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고한 에디터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다. 베이루트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전 큐레이터들은 지붕을 타격하는 총소리를 듣는다. 그리스의 극우 정당인 ‘황금의 새벽’은 도큐멘타 본사 바로 앞에 있는 노점상에 불을 지르고 도큐멘타 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본다. 베이루트에서 작가 카엘렌 윌슨-골디(Kaelen Wilson-Goldie)와 미술계의 순회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심지크는 “파티는 끝났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심지크의 허탈한 말과 달리 도큐멘타 14의 현란한 주제 설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폐허, 다중적 시간성, 장애 연구, 반정신의학, 섹슈얼리티의 정치, 트랜스 페미니즘, 포스트 포르노 정치학, 에너지 정치, 죽음과 애도, 의식의 기술, 샤머니즘, 다중 자연주의, 자유의 발명을 위한 프로토콜로서의 건축, 범 아프리카주의, 흑인 전통, 반 식민지주의와 탈식민지주의 지식, 원주민, 토착주의, 급진적 교육학.’ 시대를 통찰하는 예술 행사의 문제설정에서 비판과 창의성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사진: " exergue - on documenta 14 ", IMDb /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전설적인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의 <레산(Resan)>(198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다큐멘터리로 기록된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예술 시장과 외교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연구 작업을 만들어냈다. 지적인 야망을 품고 관료주의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뚫고 가는 이들의 용기가 한 편에 있지만, 독점적인 접근을 통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빛나는 예술 작품의 큐레이션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힘을 얻는 것도 예술의 힘이다. 영화에는 숱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리고 두려움, 분노, 기대, 좌절, 기쁨 등과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 있다. 시를 읽거나 그림에 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거나 무언가를 발명할 때 느끼는 것도 감정이다. 오늘날 영향력 있는 예술 콘텐츠는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다른 수준에 존재하는 예술, 지적이고 영적인 희망을 줄 수 있는 예술의 감정에 관해 묵상하게 한다. 축제 기획자이자 큐레이터로서 나는 이런 주제를 말하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였다. 정부 지원 이벤트의 큐레이터가 정부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 공공 예산을 사용하는 예술 이벤트의 큐레이터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예술과 대중의 간극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가? 이것은 혁신가 아담 심지크의 고뇌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술 전시 축제의 기획자로 일하는 모든 이들의 뇌리를 맴도는 질문이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쁜 놈들에게 개과천선은 가능한 걸까? 성악설을 따로 들먹이지 않아도 늑대, 뱀, 피라냐, 상어, 거미 등 오래 전부터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취급 받아온 이들이 새롭게 거듭나겠다며 착한 일에 도전한다. 하지만 기니피그로부터 제안된 이 실험은 시작부터 그리 녹녹치가 않은데,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 탓에 뭔 일을 시도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숨마저 내어줄 만큼 가장 친한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 배드 가이즈 >는 변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서투른 고백이자 위로이고, 환대받지 못한 아싸들의 진솔한 우정을 그린 헌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15권까지 출간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호주의 배우 출신의 아동 작가 애런 블레이비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영화는 크게 1권과 3권의 기둥 줄거리를 바탕으로 < 펄프 픽션 >과 <오션스 시리즈> 등의 전통적인 범죄 장르 영화들과 < 루팡 3세 >나 < 명탐정 번개 (홈즈)> 그리고 <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 같은 다양한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아 재해석되었다. 특히나 실사적인 움직임을 강조해오던 그간의 미국 전통적인 CG 애니메이션 경향에서 벗어나 만화 특유의 과장된 움직임과 가변 프레임적인 연출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공유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음악을 맡은 이도 다니엘 펨버튼으로 동일하다는 것! 다니엘 펨버튼 1977년생의 다니엘 펨버튼은 현재 가장 핫한 영화음악가인 동시에,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뮤지션이다. 1994년 그의 나이 약관에도 미치지 않은 16살 때 만든 데뷔 앨범을 들은 TV연출자 폴 윌름스우스트(다큐 연출을 하다 방향을 틀어 <스트라이크 백>과 <다빈치스 데몬스> 등의 시리즈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베테랑) 눈에 띄어 픽업돼 그때부터 17년간 TV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다. 그 필모 안에는 <핍쇼>나 <헬스 키친>, <공룡 구출 대작전>,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사무소> 등 제법 우리 귀에도 익숙한 영국 프로그램들도 보인다. 그러다 2011년 비로소 경력에 비해 늦은(그러나 여전히 젊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닉 머피 감독의 < 어웨이크닝 >으로 장편 극영화음악 데뷔를 한다. 그 후 리들리 스콧과 대니 보일, 가이 리치, 아론 소킨 등 여러 잘 나가는 감독들을 단숨에 만족시키며 영화계 주류 작곡가로 편입되었다. 그가 이처럼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명징한 멜로디 감각과 탁월한 아이디어, 재기발랄한 편곡 솜씨를 보유한 실력 덕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지한 드라마를 필두로 다큐멘터리, 범죄물, 블록버스터 액션 히어로, 시대극, 판타지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편식 없이 가리지 않고 모든 스타일의 음악을 매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길고 길었던 TV시절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배드 가이즈>에서도 이런 그의 유연한 다재다능함은 빛이 난다. 다니엘 펨버튼은 이번 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하이스트 영화들에 기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 1960-70년대 사이에 제작됐던 수많은 할리우드 케이퍼 영화들이나 캅 영화들의 스코어에 경배를 바치고 있다. 헨리 맨시니의 < 핑크 팬더 >이나 <피터 건>, 퀸시 존스의 < 이탈리안 잡 >, 랄로 쉬프린의 < 블리트 >, 데이빗 사이어의 <지하의 하이젝킹(펠햄 123)>, 돈 엘리스의 <프렌치 커넥션>, 그리고 존 배리의 007시리즈 등 당대 가장 인상 깊었던 그 쿨한 재즈 사운드가 고스란히 그의 손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를 위해 휘황찬란한 브라스 섹션에 그루브한 하몬드 오르간과 펑키한 퍼즈 기타,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리드미컬한 봉고 드럼, 짜릿한 무그 신디사이저 등 그 당시 악기들을 이용했다. 이미 앞서 다니엘은 그 시절 첩보물의 리메이크인 < 맨 프롬 엉클 >과 오션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 오션스 에이트 > 그리고 진지한 누아르 < 머더리스 브루클린 >에서 재즈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마음껏 피력한 바 있기에 <배드 가이즈> 스코어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건 시간낭비에 가깝다.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적재적소에 위치하는 활력 넘치는 레트로 사운드는 교활함과 긴장감, 위트와 낭만, 감동과 눈물을 동시에 아우르며 10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중 거의 내내라 할 수 있을 정도인 80여 분간 깔리며 기둥 분위기를 잡아준다. 하지만 단순한 스타일의 재현과 답습을 넘어 자신만의 색채를 입히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힙합 비트에 심포닉 사운드를 섞어 삽입곡들과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새로운 슈퍼히어로 스코어를 완성시켰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처럼 다니엘 펨버튼은 고전 하이스트 장르물 스코어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색다른 악기들이나 모티브를 도입해 기발한 재미와 흥미를 자아내게 만든다. 인도의 전통 악기 ‘반수리(대나무 플루트)’로 재즈에서 사용되는 플루트를 대체해 작전 이나 잠입 시 독특한 은밀함과 영화 중반 등장하는 크림슨 포의 신비주의를 선사한다던지, 하프와 아코디언, 치터가 뒤섞인 것 같은 음색을 들려주는 일본의 전통악기 ‘다이쇼고토(大正琴)’를 들고 와 그 특유의 서늘한 공명감으로 섬뜩한 빌런의 음모를 암시하는 등 기존 장르 스코어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실험을 펼쳐 보인다. 복잡한 사연을 지닌 입체적인 기니피그 캐릭터 마멀레이드 교수를 위해선 바흐에서 영향을 받은 피아노(대체적으로 영화에서 컨벤션화 된 악당 캐릭터들이 바흐 음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를 대입하고 있으며, 후반 들어선 의도적으로 역시 바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프로콜 하럼의 히트곡 “A Whiter Shade of Pale”의 하몬드 오르간 전주를 따와 반전의 전조로 써먹는 재치도 발휘한다. 시종일관 질주하는 다니엘 펨버튼의 음악은 마치 갱단의 노련한 움직임처럼 지치거나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앤서니 라모스 이기 팝과 함께 작업한 영화 <골드>의 주제가 “Gold”로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셀리스트와 함께 한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의 주제가 “Hear My Dream”으로 오스카 주제가상에 올랐던 만큼 다니엘 펨버튼의 송 라이팅 실력 또한 무시 못 하는데, 이번 <배드 가이즈>에선 흥겨움을 담당하는 두 곡 “Good Tonight”과 “Brand New Day”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 중반 스네이크가 위기에 빠지자 피라냐가 마이크를 잡고 주위 환기용으로 불렀던 “Good Tonight”는 실제 목소리를 맡은 앤서니 라모스의 출중한 노래 솜씨를 맛 볼 수 있는 곡인데, 그는 뮤지컬 <해밀턴>과 < 인 더 하이츠 >, < 트롤: 월드 투어 > 등으로 이미 검증된 바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주제가라 할 수 있는 “Brand New Day”는 영국의 소울 충만한 펑크 락 밴드 더 헤비가 소화해 그들 특유의 신명나는 그루브함과 화려한 스윙감을 선사한다. 그 외 배우이자 코미디언 롭 슈나이더의 딸로도 알려진 엘르 킹이 부른 “Feelin' Alright”도 쿨한 <배드 가이즈>만의 색채를 빛내주고 있으며, 사운드트랙 안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 흐르던 줄리 런던이 부른 고전 스탠다드 팝 “Fly Me to the Moon”이나 아니타 오데이의 “Whisper Not”이 분위기를 돋아주고, 더 블랙키스의 “Howlin' for You”, 케미컬 브라더스의 “Go”, 캔트 스톱 원트 스톱의 “Stop, Drop, Roll” 등이 유쾌함을 더한다. 개봉 전 예고편에선 재밌게도 빌리 아일리시의 딱 한글자만 틀린 제목의 노래 “Bad Guy”가 사용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에 제작되고 상영돼 제약이 많았음에도 전 세계적으로 2억 5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배드 가이즈>이기에 속편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선 23년 연말을 목표로 홀리데이 스폐셜이 제작 중에 있다. 다니엘 펨버튼이 직접 참여할 진 미지수지만, 현재 애플TV+에서 <에프터파티>와 <슬로 호지스> 시리즈를, 24년 개봉 예정이었다가 무기한 밀린 대망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삼부작을 마무리 짓는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를 작업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이어가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폭등할 것으로 보인다. 거장이 되어갈 다니엘 펨버튼을 지켜보며 <배드 가이즈>라는 제목과 달리 썩 나쁘지 않은 비장의 OST 하나를 기억해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Track List 1. The Big Bad Wolf 2. Meet The Bad Guys 3. Let's Bounce 4. Push Pop 5. Step 3 6. Security Surprise 7. The Dolphin Heist 8. Going to Go Good 9. Turn on the Charm 10. Marmalade Prelude 11. A Heist for Good 12. The Sharing Laboratory 13. Save the Cat 14. "Good Tonight" by Anthony Ramos 15. So Long Suckers 16. The Lair of Loot 17. Loot Loops 18. Bedtime Story 19. Double Crossed 20. Tricky Fox 21. The Crimson Paw 22. Secret Hideout 23. Evil Masterplan 24. The Sad Guys 25. One Last Push Pop 26. Finish Them 27. Huff + Puff 28. Just Robbing This Place 29. Freeway Escape 30. Who Said It Was the End? 31. Redemption 32. The Old Switcheroo 33. "Feelin' Alright" by Elle King 34. "Brand New Day" by The Heavy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