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하는 천리마시대 일군들(1)
- 감독
- 신우철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박왕명, 박경실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 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 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주성철(이하 ‘주’) 첫 질문은 배우 원진 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영화에서 원진은 청량리역 지하보도에서 과격한 액션도 선보이고, 그동안 잘 관리한 상체도 드러내고, 벽 찍고 돌고. 예전에 예광했던 원진의 모습을 보면서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라는 느낌이 왔다. < 용의자 >는 이 배우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만족시킨 것 같다. 원신연 (이하 ‘원’) 사실 공유 는 워낙 팬이 많고, 김성균 이 최근 <응답하라 1994>로 인기가 많아져 관객들이 이 둘의 격투 액션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용의자> 개봉 후 무대인 사를 다니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니 지동철(공유)과 SA1( 원진 )의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 솔직히 액션의 퀄리티로 만 보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촬영 당시 추운 겨울이었고, 청량리역에서 촬영할 때에는 장소 섭외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다보니 일반인 통제도 어려웠다. 3분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이들이 지나갈 때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섭외한 엑스트라보다 일반인이 더 많이 나왔다.(웃음) 이런 상황이다보니 액션을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액션을 액션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원진 이 맡았던 SA1 캐릭터의 변화에 대해 많은 반응을 하더라. 과거에는 아크로바틱 액션이 많았는데 현대물에서 소위 ‘고전적인’ 액션이 등장하니 그게 관객들 인상에 깊이 남은 것 같다. 더군다나 와이셔츠가 찢어지면서 몸이 드러나는데, 얼굴은 50대 중반이지만 몸은 공유 와 비슷하니(웃음) 그게 강렬했던 것 같다. 주 < 용의자 >의 액션 신만 놓고 봐도 이 배역을 탐낼 만한 다른 배우도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과거 액션 스타를 기용한 것은 감독의 이 영화에 대한 의지 혹은 열정이 보이는 부분이다. 원진 을 캐스팅한 것 하나만으로도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떻게 끌고 나가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원 사실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원진 은 나에게 영웅이다. 이분은 여전히 액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분이다. 나는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계속 같이 작업하고 싶다. 그리고 감독으로서 액션배우라서 액션으로만 소비되는게 아니라 배우로서 같이 영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더라. 상업영화의 시스템에서 보면 사실 ‘이 사람이 과연 연기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이 정도 비중의 배역이라면 기존의 배우를 캐스팅하는게 좋지 않을까?’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감독 입장에서 관객으로부터 잊힌 배우를 기용하는 것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액션 주역들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재미를 넘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게 나와 같은 감독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유창국 과 원진 은 액션의 대가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분들에게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드라마를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 도전하고 싶다. 무술감독 원신연 vs 영화감독 원신연 주 감독 이전에 액션 배우, 무술감독의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으로 미루어 이전에 작업한 < 구타유발자들 >이나 < 세븐데이즈 >보다 앞서 이 영화가 감독의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원 반대다. 사실 < 용의자 >를 연출하는 것도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1990년 중반에 무술감독을 시작해 < 테러리스트 > 등 몇 편의 영화에서 무술 지도와 대역을 했다.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도 했지만 액션을 할 때 가장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 조폭마누라 >( 조진규 , 2001)의 무술감독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단편 < 세탁기 >(2001)를 준비할 때였다. <조폭마누라>에 참여하면 경제적으로 분명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빚을 내어 단편을 제작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연출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액션을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라마 요소가 강한 영화로 감독 제안도 많이 들어왔지만 상업영화로는 < 가발 >(2005)로 데뷔했다. 그리고 < 세븐데이즈 >(2007)와 <용의자>(2013)까지 만들게 되었다. 액션이라는 장르는 여전히 나에게 보물창고이고 욕망이다. 그리고 현재 시류와는 안 맞더라도 기술적 요소만 강조된 액션, 디지털 기술로 표현되는 액션보다 몸으로 소화하는 액션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다가 < 용의자 >의 시나리오를 받았고, 액션이 주가 되지만 그 안에서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에 연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동철뿐 아니라 민대령( 박희순 )과 김실장( 조성하 ) 캐릭터의 감정도 관객들에게 표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잘 봐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주 < 조폭마누라 >를 거절하고 단편영화에 투신한 것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결국 연출가라는 꿈을 추구한 것이다. 원 그렇다. < 테러리스트 > 무술지도를 하면서 정두홍 감독과 처음 만났다. 그때 정두홍 감독이 나에게 “우리 액션의 길로 멋지게 가보자.”고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웃음) 만약 내가 그때 정두홍 감독과 함께 액션을 계속했다면 나도 지금 경기도 어딘가에 집 한 채 장만했을 것이다.(웃음) 쌀도 임금님표 쌀 먹고 있을 것이다.(일동 웃음) 하지만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즐거움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직업이라기보다 나의 삶 자체인 것 같다. 주 < 세븐데이즈 >의 김윤진 , < 용의자 >의 공유 의 캐릭터는 일종의 워커홀릭이다. 그리고 <용의자> 초반에 등장하는 항공촬영이나 영화 전반에서 보여주는 도심 액션을 보면 이전 영화에 비해 액션의 강도가 무척 높다. 개인적으로 ‘촉감이 느껴지는’ 액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렇게 영화 속 캐릭터, 그리고 영화자체를 봐도 감독의 집요함, 전투성이 느껴진다. 개인적 성향과 유사한 면이 있나? 원 나의 개인적 성향이나 욕구가 장르를 통해 발현되는 것 같다. 감독이라는 직업은 평소 한없이 게으를 수 있지만 작업에 들어가면 그 순간만큼은 최대한 몰입해야 하는 직업이다. 나는 영화말고 다른 유희가 없다. 오늘도 여기(영상자료원) 오면서 영감을 얻기 위해 OST를 들으면서 왔다. 이게 생활이 되었다. 하지만 꼭 이런 성격이 꼭 장점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성격은 아마도 제도권 내에서 영화를 정식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열등의식은 없는데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있다. 이런 성격이 영화를 만드는 데 직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게 아닌가 싶다. 주변 사람들이 좀 쉬면서 작업하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너무 숨 가쁘게 달리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더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용의자 >의 등장인물을 말하다 주 캐릭터 얘기를 해보자. 최근 < 용의자 >를 전후로 ‘북에서 내려온 과묵하고 초인 같은 남자’ 캐릭터가 영화에 많이 등장한다. < 베를린 >이 그렇다. 그리고 < 은밀하게, 위대하게 >처럼 다양한 양상으로도 퍼졌다. <용의자>의 지동철은 그중에서도 가장 과묵한 남자다. 이 남자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원 지동철의 대사를 다 합쳐보면 A4 두 장이 채 안 된다. 그래도 지동철의 대사를 더 줄였어야 했다.(웃음) 영화를 만들면서 도전을 받을 때가 많다.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너무 설명적이란 느낌이 든다. 관객 중심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긴 하지만 관객이 생각할 틈이 없이 너무 떠 먹여준다는 인상을 준다. 스토리나 이야기 구성은 관객들에게 친절할 수 있다 쳐도 극중 캐릭터의 감정까지 그렇게 친절히 설명해야 하나 생각한다. 과묵하고 말 없는 지동철을 통해서도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눈빛 하나로 관객이 더 궁금해하고, 그러면서 관객이 더 몰입하고 이해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대사보다는 표정,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더 많이 잡고 싶었다. 주 < 용의자 >는 지동철이라는 큰 줄기를 따라간다. 그리고 극중에 나오는 기자 선후배, 최경희( 유다인 )와 주 기자( 김민재 )의 관계도 눈여겨볼 만하다. 주 기자는 자신이 기자의 사명감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서서히 자아를 찾아가는 캐릭터다. 주 기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사인>의 주진우 기자를 암시한 것인가?(웃음) 그리고 극중 기자라는 직업을 그렇게 그린 데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나? 원 난 <씨네21> 정기구독자다.(웃음) 얼마 전 <씨네21> 기획특집 ‘기레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봤다. 그리고 최근 에스콰이어의 신기주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들이 현재 기자의 세계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더라. 영화에는 그냥 ‘주 기자’로 나왔지만 영화에서 이 기자의 본명은 주진웅이다. 하지만 (물론 그러시지 않겠지만)자신의 캐릭터가 영화에 등장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할 수도 있고, 관객의 몰입도도 떨어질 수 있어서 그냥 ‘주기자’로 표현했다. 아무튼 영화에서 난 사회의 문제와 이슈를 펜으로 표현하는 기자에 대해 가감 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주진우 기자의 책은 물론 기자들이 쓴 책을 많이 읽으며 기자에 대해 공부했다. 사실 극 중 주 기자보다 최경희(유다인)의 캐릭터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기자상에 더 가깝다. 지금와서 밝히지만 최경희의 핵심 대사가 있었다. 사실 유다인 씨가 이 한 문장의 대사에 애착을 갖고 영화에 참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지보다 높지 않고, 대통령보다 낮지 않은 게 거지다. 씨발!”이다. 결국 이 대사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강도보다 세서 빠지게 되었지만 이런 성격을 가진 최경희가 내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기자다. < 용의자 > vs <본 시리즈> 주 < 용의자 >를 <본 시리즈>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원 한국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박한 면이 있다. 하지만 어떤 특정 영화에 대해서는 관객들의 배려심이 깊다. 이를테면 < 도둑들 >을 보면서 <오션스 시리즈>를 깊게 얘기하진 않잖나? 사실 < 용의자 >가 <본 시리즈>를 표절했다고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독립 다양성 영화가 아니고 상업영화 시스템 내에서 제작되는 영화라면 <본 시리즈>뿐 아니라 유사한 장르의 영화에 등장하는 흥행 요소들을 배치해 적절히 균형을 맞추는게 일종의 협의사항이다. <용의자>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6개월 동안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했다. 수정하면서 주인공의 감정, 정서를 많이 강조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감독이 생각하는 대로 수정 하다보니 ‘이 프로젝트(<용의자> 제작)가 무산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결국 최초 시나리오의 톤앤매너를 바꿀 순 없었다. 한국의 대중은 이런 속사정을 모르니 어찌보면 <본 시리즈>와 비교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들도 있지만 앞으로 소재적으로나 장르적으로 관객들에게 좀 더 충격을 줄 수 있는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 추격 신의 경우 어떤 면에서는 <본 시리즈> 이상이라 생각했다. 기존의 한국영화 액션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도 많이 나온다. 원 시각적 요소를 위해 준비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결론적으로 <본 시리즈>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성을 했다. 유사한 것을 인정한다기보다 오히려 <본 시리즈> 뿐 아니라 기존의 영화들과 차별되는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해 더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만약 <용의자2>를 만든다면 드라마가 중심이 된 액션이 될 것 같다. 액션으로만 < 용의자 >를 봤을 때 화두는 ‘액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였다. 대부분 제작 환경이 디지털로 변했는데 그렇게 촬영한다면 실감이 안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보니 액션을 실감 나게 촬영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한 분이 많았다. 다만 이분들이 그 동안 영화에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산적인 부분에서의 합의도 잘 이루어졌다. 향후 액션영화에도 많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원신연 이 바라보는 액션영화, 그리고 액션배우 주 < 용의자 >에는 이 영화의 무술감독인 오세운 감독이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무술지도나 액션 경험이 많은 감독으로서 무술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원 지금도 오세운 감독과 만나면 많이 싸운다.(웃음) 나도 촬영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많았고, 무술감독도 나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무술감독의 역할에 비해 대우를 제대로 못 받는 실정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다양한 장기를 펼칠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그런 시나리오가 없다. 그리고 그런 시나리오가 있어서 영화화가 된다해도 그에 맞는 금전적 보상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이것은 상업영화 시스템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무술감독들도 평소에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연출자가 요구를 듣고 현장에서 그 외에 3~4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만큼 자신감과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주 개인적으로 국내 무술영화의 < 어벤져스 >라고 할 수 있는, 무술 대가들이 대거 참여한 액션영화를 언젠가 꼭 보고 싶다. < 자장가 >( 원신연 , 2002)에 나오는 권성영 무술감독은 마스크도 훌륭하다. 정두홍 , 원진 … 모두가 출연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원 정두홍 감독이나 오세영 감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류승완 감독도 그런 욕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영화를 만들기에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제도권 내에서 타협해서 장르영화를 만들기보다 무술 대가들이 그들의 재능을 내세워 자유분방하게 영화에서 표현되게 하려면 내가, 다시 말해 감독의 힘이 강해지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언젠가 결과(흥행)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영화를 꼭 한 번 만들고 싶다. (‘주’ 언젠가 꼭 만드신다니… < 어벤져스 >가 아니라 < 익스펜더블 >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일동 웃음)) 얼마 전 < 세븐데이즈 >의 최영환 촬영감독이 자료를 찾다가 <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 >( 신우철 , 1989)을 봤는데, 거기서 대역을 했던 나를 보고 전화를 했더라. “왜 살짝 스쳤는데 두 번 돌아서 화려하게 넘어지냐!”며 면박을 주더라.(웃음) (‘주’ 그 영화는 유창국 과 원진 의 대결을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영화다.(일동 웃음)) 이 얘기를 한 이유는 그 만큼 여러 감독이 액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 용의자 >, 그 이후… 주 < 용의자 > 개봉 후 6개월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원 꼭 < 용의자 >만의 얘긴 아니다. 감독에게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작품을 만들수록 제작 환경은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억압이 커진 달까? 작품을 판단하고 검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이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감독은 누구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업영화 시스템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용의자>는 조금 불만족스러웠다. 결국 상업영화 논리에 많은 부분 양보했지만 더 많은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반성하는 중이다. 주 < 용의자 > 엔딩이 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원 속편은 사실 < 용의자 >를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감독이 아무리 준비되었다 해도 시나리오 등 탄탄한 설계가 중요하다. 속편에 대한 욕심도 크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다른 감독이 <용의자> 속편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용의자>가 프렌차이즈가 되는 것은 반대한다. 아무튼 <용의자> 이후 지동철을 계속 따라가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과연 지동철은 딸이라는 것을 확인했을까? 이후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욕구가 남아 있다.
지난 회에 이어 여름특집은 계속된다. 여름 하면 역시 블록버스터다. 터지고 부서지고 그 사이에 맺어지는 화끈한 인연!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이미 유명한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야기가 됐던 영화다. 그래서 삐용삐용B무비에 어울릴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 코너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다룬다면, 다른 대안은 없다. 무조건 이 영화다. “우리도 < 터미네이터 > 같은 영화 하나 만들어 봅시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많은 사건, 사고들이 말 한마디로 시작되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당시 < 외계에서 온 우뢰매 > < 슈퍼 홍길동 > 등으로 어린이들로 하여금 ‘Shut up! Take my money!’ 를 외치게 했던 김청기 감독의 야망에서 시작된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으나 한계를 느낀 김 감독은 이후 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섞는 작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다. 그것을 바탕으로 완전한 실사영화를, 다시 말해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일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본격 성인대상의 액션-에로틱-SF로 기획된 이 영화는, 데뷔하자마자 청춘스타가 되었고 동시에 작품성도 알아보는 재능을 보여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던 한 젊은 배우에게 김 감독이 건넨 한 마디로 의기투합해 제작이 성사되고 만다. < 바이오맨 >. 한국이 키운 가장 강한 男子! ‘8메가 디램이라니 그런 터무니 없는...! 일본과 미국같은 선진국가에도 4메가 디램이 없소’ 재벌기업 총수인 장만근( 윤일봉 )의 둘째 아들 장도일( 박중훈 )은 매일 나이트클럽을 들락거리며 술이나 먹고 여자와 노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집안의 골칫거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기업에서 개발한 ‘초 고용량 메모리’인 8메가 D-RAM 칩의 설계도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도일은 자신에게 메모리의 정보를 묻던 친구가 생각나고, 그를 다그쳐 홍콩에 문제의 설계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홍콩으로 떠난, 갑자기 효자가 된 도일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동남아 최대 조직의 보스인 ‘스리랑카의 별’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쫓는다. 형 영일( 남성훈 )이 붙여준 여자 요원 수지 한( 신미아 )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에 쳐들어간 도일은 애석하게도 악당들의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수지 역시 그들에게 붙잡혀 옷이 벗겨진다. 소식을 들은 형 영일은 한달음에 홍콩으로 달려간다. 온몸의 기능이 망가졌으나, 정신력으로 뇌파만이 요동치는 도일을, 그는 현대 과학의 결정체인 기계 인간으로 살려놓기로 한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영일을 돕는 오석도( 신우철 )는 마약에 취한 채 윤락녀로 사는 수지를 찾아 병원에 입원시킨다. 상태가 호전 된 수지, 그리고 기계인간이 된 도일과 베트남 참전용사 오석도는 의기투합하여 ‘스리랑카의 별’을 찾아 라오스와 크메르(캄보디아를 크메르라고 말하고 있다.) 국경 어드메 쯤으로 출발한다. 그들은 무사히 ‘스리랑카의 별’을 해치우고 8메가 D-RAM 설계도를 찾아올 수 있을까? 바이오맨의 탄생 “시나리오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100명이 나와야 할 장면에 10명 나오고,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야 할 장면에 제작비 때문에 한 번 갈기면 30명씩 나가떨어지고... 아무리 각본이 좋아도 프로덕션이 못 받쳐주면 답이 없구나 하는 걸 느꼈죠.” < 바이오맨 >의 주연인 배우(이자 감독) 박중훈 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만큼 곡절이 많았던 영화였다. 성인용으로 기획된 만큼 영화에는 꽤 수위가 있는 표현들을 담고 있다. 여주인공 수지가 적에게 붙잡혀 강제로 탈의 되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그녀를 다시 찾았을 때는 마약에 찌든 윤락녀가 되어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적인, 그것도 권력에 의한 강제적인 뉘앙스가 담긴 묘사들이 꽤 있는 데다가 최후에는 아예 헐벗은 여성 전투원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한다.( < 특명! 미녀군단 >도 그랬는데 왜 조명화 감독의 영화엔 항상 이런 분들이 등장하는가!) 그렇다고 이 영화를 ‘성인용’으로 부르기에도 조금 어렵다. 왜냐하면 성인이 봐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편집은 축약을 넘어서 거의 축지법 수준이고, 묘사는 적극을 넘어서 극단적이다. 악어와의 결투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화가 나는 장면이 있다면, 으아아아아!!! 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끝도 없이 들어가는 줌 인!) 장도일은 강하다! 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면 갑자기 잘 가던 자동차가 진흙에 빠진다.(이건, 빠지는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첫 번째 컷이 잘 굴러가는 자동차, 두 번째 컷이 진흙탕에 바퀴가 빠져 헛도는 자동차. 이런 식이다.) 그리고 도일은 한 손으로 차를 번쩍 들고, 자기 발 위에 바퀴를 올려놓는다. “헉! 도일씨 발에 바퀴가!” 라며 수지가 놀래면, 도일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으응?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부분에서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악어와의 일 대 일 맞장을 들 수 있다. 이 에피소드 역시 아무런 앞뒤가 없는데, 수지가 강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으니 악어가 슬금슬금 나온다. 분명히 오석도는 기관총을 들고 있는데, 장도일은 칼을 들고 물로 뛰어든다. 그리고 악어와의 사투. 우리는 분명 악어의 아가리에 감겨있는 피아노 줄을 볼 수 있다. 넓은 아량으로 역시 위험하니까, 라고 생각하지만, 꼬리 쪽에 보이는 어색한 사람의 손을 보면 아... 하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건 마치 <에드우드>에서 보았던 벨라 루고시와 거대 문어 인형의 격투 장면을 보는 듯하다. 팀 버튼이 이 장면에 영화 만들기의 고단함과 퇴물 배우의 애잔함을 동시에 배어 나오게 했다면 < 바이오맨 >에서는 기관총을 든 오석도의 멍청함과 기계 인간 장도일의 뛰어난 방수성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하여간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겁다. 삐용삐용B무비를 시작한 이래, 첫 회를 장식했던 < 신사동제비 > 이후로 이렇게까지 막가는 영화는 처음이다. 그나마 이런 부류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격투장면도 허탈할 뿐이다. 그나마 오석도 역을 맡은 중견 액션 배우 신우철 (전에 소개했던 < 김두한 형, 시라소니 형 >에서 시라소니 역의 그 배우다.)이 약간의 다찌마리를 소화하고 있지만 주연 박중훈 의 액션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시공간이 오그라들 정도다. 이 모든 과정이 지나고 라스트 장면이 다가오면, 관객은 심각한 멘붕에 빠지게 된다. 갑작스러운 수지의 배신으로 에너지 칩이 빠져버린 장도일은 결전에 앞서 오석도에게 비장한 부탁을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전 쓰지 않던 하오체를 써가면서 말이다. 도일 : 난 절대 포기하지 않소. 당신은 알고 있죠? 어서 에너지를 비상전달 장치로 연결해 주시오. 어서. 석도 : 그건 자폭하는 짓이야! 도일 : 나는 현대과학이 만들어낸 기계 인간일 뿐이오. 어서. 시간이 없소. 어서. 석도 : 미스터 장... 도일 : 딱딱(손가락을 튕긴다) 착잡한 표정의 오석도는 칼로 도일의 등을 따서 전기선을 뽑아 연결하기 시작한다. 이 비장한 장면에서 전기 공사 일을 하시는 우리 삼촌이 잠깐 떠올랐지만 어쨌든 슬픔이 밀려온다. 바이오맨의 이 숭고한 희생 앞에서, 토종 히어로의 탄생을 목도하는 기쁨에 복받치지 않을 자 그 누구란 말인가..! 결국 악당의 소굴을 초토화시킨 둘. 스리랑카의 별은 다급히 차에 올라타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를 뒤쫓기 시작하는 도일. 그리고 그는 자동차에 올라타고, 차와 함께 터져버린다. 에너지 비상전달 장치가 전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을, 나는 여러분께 보여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장도일! 끝내 인간이고 싶어 했던 마지막 절규와 함께 그는 몇 조각의 전자부품 조각만 남기고 사라져 갔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의 국경에서... 이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득하다. 김청기 감독과 조명화 감독은 성인을 타깃으로 영화를 기획, 제작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방향을 급선회하여 전체관람가로 등급을 낮추고 어린이 회관, 무지개 극장 등을 통해 개봉했다고 한다. 당시 손에 손잡고 극장에 들어간 가족들이 영화가 끝나고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나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이 영화를 ‘체험’한 관객이 KMDb 집계 2,445명. 정극배우를 대거 기용하고 박중훈 이라는 당대의 청춘스타까지 캐스팅해 < 터미네이터 >와 < 람보 >를 섞어 대한민국 슈퍼히어로를 만들려던 야심은 이렇게 안타깝게 실패했다. 김청기 감독은 이 영화의 실패로 막대한 금전적, 정신적 피해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몇 편의 <우뢰매> 시리즈와 애니메이션을 연출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는 없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인 < 의적 임꺽정 >은 관객 151명이라는 기록적인 숫자를 남기며 결정타를 날리고 말았다. (놀라지는 말자. 이 분야에서는 허리우드 극장 1일 개봉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남기남 감독의 < 천년환생 >이 있다. KMDb 집계 관객수 39명) 김청기 감독은 분명 어린이 영화계의 흥행사였다.(<우뢰매>의 오리지널리티나 작품들의 완성도는 둘째 치고) 내 또래 중 그가 만든 영화 한 편 안 보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야심은 당연한 것이었을 테다. 한국에 토종 슈퍼 히어로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 아동용 감독이 아니라 누가 봐도 멋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욕구, 그러나 인프라의 부족과 장르 이해의 부족으로 결국 좋지 않은 모양새로 나온 < 바이오맨 >은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쓸쓸히 퇴장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좋다.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시도 속에서 분명히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고, 이를 토대로 우리가 지금 즐기는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그냥 이 상태로도 좋다. 모든 영화가 잘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이 영화를 통해 힘들어했을 많은 사람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B무비는 나름의 방식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재미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재미가, 영화가 담을 수 있는 가장 개성 있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른 어떤 예술이 ‘실패’와 ‘실수’에서 애정을 끌어낼 수 있는가. 그런 사랑스러움이 내가 그동안 삐용삐용B무비를 해나갈 수 있었던 힘 이었을 거다. 시작할 때는 꽤 오래 하겠구나 싶었지만, 지나고 보니 금방이었다. 내가 쓰는 삐용삐용B무비는 다음 회가 마지막이다. 마지막을 맞아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이 쪽 분야에서 괜찮은 영화를 써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진짜 말도 안 되게 막 나가는 영화를 골라야 할 것도 같고. 그러나,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가 삐용삐용B무비 정신에 위반하는 것이다. 무게를 담으면 안 된다. 잘하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던지고, 그것이 낭비냐 밑거름이냐는 상관하지 않는다. 쿨내 진동하는 이런 영화들을 소개하려 했던 것이 본 코너였다. 잘 되었던 것일까? 일단 마지막 회에서 뵙겠다. 박중훈 신미아 신우철 감독: 조명화 , 김청기 각본: 조명화 개봉극장: 무지개, 바다, 다복(서울) 관람인원: 2,44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