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가족
- 감독
- 김진우, 박유영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정우, 박희순, 윤진서, 박지연, 최무성, 김성오, 오광록, 이문식, 신은수, 석민기, 김신록, 정준원
영화 제작에 관해 아무런 경험이 없는 관객들만큼 ‘데이터 매니저’는 현장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이었다. 필름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고 대부분의 영화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게 되면서 새로이 생겨난 개념이기에 그렇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필름에 촬영내용이 기록됐던 지난 시절에 비해 디지털은 실물이 아니다.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인화지에 인화하기 전까진 그저 카메라 혹은 컴퓨터 안의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데이터를 관리하는 파트. 그것이 데이터 매니저이다. DSLR 카메라를 사용해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32기가 혹은 64기가 용량의 메모리 카드에 저장이 된다. 영화용 디지털카메라도 마찬가지인데 카메라 기종마다 각양각색의 메모리 카드가 존재한다. 대략 담뱃갑 하나 정도의 크기인 이 메모리 카드에 1차적으로 촬영분량이 저장 되고 대개의 현장엔 카메라 한 대당 4개의 메모리 카드를 사용한다. 4개의 메모리 카드를 모두 사용하게 되면 그 날 촬영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 계속해서 촬영을 진행하기 위해선 처음 사용했던 메모리 카드의 내용 즉, 데이터를 어딘가에 저장 혹은 백업을 할 필요가 있고 디지털 시대 초창기엔 이 역할을 촬영부 막내들이 맡곤 했다. 그러나 점점 카메라 기종이 고해상도를 지원하게 되고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이 발전하면서 하나의 메모리 카드가 수용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도 커졌고 촬영부 막내가 잠깐 짬을 내서 이 업무를 처리하기엔 무리가 왔다. 가장 많이 쓰이는 카메라인 ALEXA XT의 경우 메모리 카드 하나에 400기가가 넘는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으나 소스의 포맷에 따라선 한두 시간 잠깐 촬영을 해도 100기가 200기가가 훌쩍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실물인 필름에 비해 데이터는 손실 혹은 유실의 위험성도 크다. 아예 하나의 파트를 만들어 이 업무만을 처리하는 ‘누군가’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현재 촬영이 진행 중인 상업영화 현장에는 데이터 매니저가 반드시 한 명 이상 존재한다. 촬영부의 하위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점점 촬영부와는 따로 떨어져 하나의 파트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촬영부와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제작부, 현장편집, 스크립터, 때에 따라선 의상과 CG, 분장팀과도 연관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본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니 스태프들은 자신이 관여한 작업을 확인하고 싶을 때 데이터 매니저를 찾곤 한다. 데이터 매니저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찾기 쉬운 방법이 있는데, 현장에서 약간 떨어져서 혼자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데이터 매니저이다. 그렇다. 데이터 매니저는 남들 다 뛰어다니고 바쁠 때 혼자 앉아 있다. 상업영화 현장에서 팀이 아닌 단독으로 움직이는 파트가 셋 있는데 스틸 촬영기사, 메이킹 기사, 그리고 데이터 매니저이다. 영화 규모에 따라선 두 명이 한 조로 투입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혼자 구석에 앉아 일을 한다. 사실 일 자체는 힘들지 않다. 수시로 건네받는 메모리 카드를 백업받고 다시 촬영부에게 전해준다. 촬영부는 백업이 완료된 메모리 카드를 포맷해서 재사용한다. 백업받은 데이터를 정리하고 어떤 포맷으로 찍혔는지, 몇 개의 클립이 촬영되었는지, 용량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뒤 소스를 눈으로 확인한다. 최근에는 디지털 장비도 초창기에 비해 많이 안정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디지털의 특성상 다양한 오류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녹색, 혹은 붉은 점이 화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검은 점이 보이기도 한다. 각각 배드 픽셀 (bad pixel), 데드 픽셀(dead pixel)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대표적인 디지털 오류들이다. 이외에도 플리커가 보인다던지 할레이션 따위가 들어온다던지 촬영적 오류들을 확인해서 촬영부에 일러주기도 한다. 이렇게 촬영 내용을 전부 눈으로 확인하면 외장 하드디스크에 데이터를 담아 DI(Digital Intermediate)파트로 보낸다. DI 파트는 최종적으로 데이터를 보관하며 색보정 등의 작업을 진행하고 상영본이라고 할 수 있는 DCP(Digital Cinema Package)까지 책임진다. 데이터 매니저는 이후 해당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원본 데이터를 보관한다. 필자가 데이터 매니저의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물론,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이고 슬픈 이유를 제외한다면, 위에 언급한대로 모든 소스를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 현장은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난장판이다. 촬영감독이 보고 연출자가 보고 최종적으로 관객들이 보게 되는 뷰파인더 안의 세상은 멋지고 예쁜 배우들이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에서 로맨틱하고 달달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화면 밖으로 한 걸음만 멀어져도 수많은 조명 장비와 녹음 장비들이 늘어서 있고 백여 명의 스태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으며 온갖 소품들과 미술 대도구들이 치워져 있다. 때에 따라선 발전차는 물론이거니와 커다란 조명차나 살수차가 위엄을 자랑하며 서 있기도 한다. 차분하게 앉아서 소스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란 이야기다. 연출자, 연출자 옆의 스크립터, 현장편집기사, 제작자, 분장팀장 정도만이 그럴 수 있다. 나머지 스태프들은 제 할 일 하기도 바쁘다. 하지만 데이터 매니저는 이런 소스들을 확인하는 것이 본 업무이다. 촬영 전 읽어봤던 시나리오가 어떤 식으로 촬영이 되고 어떻게 화면구성을 하는지 데이터 매니저는 볼 수 있다. 소스를 보면서 어떻게 편집이 될지 상상해 보기도 하고 이런 장면에선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까 혹은 어떤 방식으로 연기연출을 해야 할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 가려진 시간 >의 촬영 소스들을 확인하면서 나도 모르게 신은수 배우가 연기한 수린 역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데 (필자도 연출이 전공인지라) 나도 모르게 “컷! 오케이!” 라고 말해 버린 기억이 있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주변부터 살폈다. 천만 다행히도 필자의 월권행위(?)를 들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완도에서 많은 분량을 촬영했고 때문에 서울과 완도를 수도 없이 왕복했는데 데이터 매니저의 페이는 위험수당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완도에서 3, 4회차 촬영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정말 긴장된다. 혹여나 사고가 나서. 나 죽는 건 그렇다 치고. 데이터가 전부 다 날아가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긴 시간 운전하면서 절대로 졸 수가 없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세 개의 하드디스크에 백업을 한다. 동일한 내용의 데이터를 세 군데에 백업을 하고 이를 제작부와 서로 나눠서 소지하기도 한다. 그래도 농담 삼아 ‘오늘은 죽어도 되는 날 : 지금까지의 촬영분을 전부 DI실에 넘기고 완도로 내려가는 날’과, ‘절대 죽으면 안 되는 날 : 몇 회차의 촬영분량을 담은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로 구분해서 말하기도 했다. 영화 내용상 숲속에서 촬영할 일이 많았다. 모두들 수풀을 헤치며 장비와 소품을 옮겼다. 필자 역시 노트북 컴퓨터와 전용으로 들고 다니는 테이블 등등을 숲속 한가운데에 옮겨 놓고 그 자리에 앉아 백업 작업을 했다. 혼자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다 보니 메이킹 영상이나 스틸 사진에 데이터 메니져가 찍힐 확률은 매우 낮다. 의무적으로 한 번은 찍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스틸 기사님이 필자를 도촬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뭐 찍을 게 있어서 찍느냐고 농치니 스틸 기사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런 산속에 앉아 컴퓨터 하는 그림 흔치 않아요.” 데이터 매니저는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전기가 근처에 있어야 하고 현장과도 너무 멀면 안 된다. 카메라 앵글에 잡힐 만한 곳도 피해야 한다. 현장 나갈 때는 항상 맨 먼저 하는 일이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그 날도 나름 머리를 굴려 자리를 잡았는데 어쨌거나 숲속 한복판이었다. 스틸 기사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테이블까지 펼쳐 놓고 노트북 컴퓨터를, 그것도 전국에서 영화판에만 반 이상이 몰려 있다는 A사 제품의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