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도연맹: 유럽공략단
- 감독
- 마임성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양조위, 크리스, 당언, 두견, 임자상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드는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운동을 동결하는 프리즈 프레임처럼 무리 없이 흘러가던 기존의 판단과 감정을 괄호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섣불리 의미화 하지 않게 하는 정초(定礎)의 얼굴들. 특히 엔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넘어 스크린 바깥으로 급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얼굴들 말이다. 인상 깊었던 한국영화의 그러한 순간들을 거칠게 꼽아보자면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 길소뜸 >(임권택, 1986), < 시 >,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얼굴-물음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 메타 영화인 <반도의 봄>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춘향전> 제작기와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화한다. 이 영화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세한 조선 영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성장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총독부의 국책회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영화는 여러 어려움과 오해에도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고 애정을 확인한 두 영화인 남녀가 선진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쇼트로 행복한 연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동료 영화인들의 어두운 얼굴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기차의 선로를 따라 뻗어 나갈 수 없음을, ‘발전’은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실제로는 진퇴양난에 몰려있음을 드러내는 당혹감, 즉 픽션과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시간성을 묻는 얼굴들이다. <길소뜸>은 1980년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국가적 미디어 이벤트였던 ‘이산가족찾기’가 가진 이면을 보여준다. 화영(김지미)은 한국전쟁 중 잃어버린 아들과 연인을 극적으로 찾게 되고, DNA 검사로 그가 아들임을 확인받는다. 그러나 화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 부부를 끝내 뿌리치고 부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운전해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검사를 진행한 의사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의사가 ‘과학’의 이름으로 민족과 가족의 가치를 설교하는 가운데 화영은 되돌아가려는 듯 차를 멈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살짝 눈시울이 불거진 얼굴은 ‘본능적 모성’이 그녀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영은 단호하게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국가와 대중이 기대하는 얼굴을 부인하며, 부인을 재확인한다. 화영은 그로써 대중매체와 과학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뿐 아니라, 여성 스타를 거대서사의 반응(reaction) 스크린으로 만드는 얼굴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된 평화로운 논밭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박두만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즉 직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밝혔듯이 박두만의 얼굴-물음 쇼트는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호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박두만의 표정은 아련하게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일까? 박두만은 그 시절을 ‘실수가 좀 있었지만 열심히 산 시절’로 추억할 수 있다. 여기서 범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질문받아야 하는 대상은 박두만을 비롯한 경찰 공권력 그 자체이다. 서태윤(김상경)도 처음에는 인권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도입하려 하지만 결국 대책 없고 폭력적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의 방식에 물든다. 박두만은 질문하는 얼굴인 동시에 질문 받아야 하는 얼굴이다. <시>의 얼굴-물음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정초의 얼굴에 가장 가깝다. 최종적으로 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타자의 얼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희생하는 급진적 선택을 한다. 양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겨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고 있다. 60대의 미자는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꽃과 시에 진심인 미자는 어느 날 한 자신의 손자가 집단강간 가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패닝한다. 강가 모래밭에서 놀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다 물에 떠내려 온 희진(한수영)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뒤집어져 있고 우리는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소녀의 시체가 서로 가까워지며 소녀의 뒤통수가 화면 안에 가득 찰 즈음 ‘시’라는 제목이 화면의 왼쪽에 떠오른다. 집단강간 피해 후 자살을 한 소녀는 ‘시’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 시와 영화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무얼까?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언어를 상실해 가는 미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죽음, 영화의 죽음 또한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시대에 말이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연대를 말한다. 영화에서 ‘봄’은 시/영화 쓰기의 핵심적 실천으로 언급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시적/영화적 봄은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사과를 두고 말한 것처럼, 존재(방식)에 관심을 두고 돌보며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봄이다. 현상학적인 봄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나의 봄은 언제나 당신의 봄과 얽혀 있다), 관습적인 사용방식, 즉 도구화에 질문하면서 존재의 다양한 역량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듯 현상학적 봄도 쉽지 않다. 미자는 꽃을 비롯해 보기에 예쁜 것을 좋아한다.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에 하늘하늘한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늘 웃고 다니는 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곱고 예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자 역시 자신을 곱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 늘 “저 멋쟁이에요?” “나 예쁘다고 생각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 없이 화제를 돌리기거나 자기 기준에 맞춰 에둘러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첫인상을 거리낌 없이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손자 종욱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희진을 불쌍해 하지만 자기 아들들을 위해선 그녀의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고, 희진 엄마를 쉽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며, 심지어는 미자에게 “같은 여자”, “혼자 손자를 돌보는 불쌍한 할머니”로서 희진 엄마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한다. 공적 책임이 있는 기자와 교감조차 희진을 진정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익에 따라 이용한다. 간병을 받는 김노인 역시 미자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풀 성적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고 피해자나 약자 역시 도구적 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희진 엄마는 결국 돈을 받고 합의를 해주기로 하고 미자 역시 김노인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자는 희진의 죽음과 울부짖는 희진 엄마를 가십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전한다. 미자가 다니는 병원 로비에선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가 고통스럽게 인터뷰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자는 정말로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미자의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다. 미자는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억으로서 서너 살 즈음 아픈 엄마 대신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돌보며 예쁜 옷을 입혀주고 애정을 담아 돌봐줬던 순간을 기억한다. 언니의 ‘예뻐해 줌’은 존재의 첫 각인으로 남는다. 언니의 사랑은 그녀가 존재함을 감각하게 한 원초적 기억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아픈 엄마’처럼 고통과 함께 한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고, 더 이상 손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관습적인 관계와 이해를 벗어던진다. 미자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으로 실천을 시작한다. 미자의 추도식에서 액자에 담긴 희진의 사진을 훔쳐오고, 그 액자를 손자가 보도록 식탁에 놓는다. 하지만 손자는 그 얼굴을 외면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미자는 다른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요구하기 위해 희진 엄마를 찾는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진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미자는 곧 자신의 목적을 잃고 따뜻한 햇살, 살랑대는 바람, 초록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에 마음을 뺏긴다. 희진 엄마를 마주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읊는다. 미자는 뒤늦게 그가 희진 엄마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다.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선 어쩌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봐야할지 모른다. 미자는 이후 자기에 대한 몰입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질문하고 비우는 것으로 간다. 희진이 자살했던 다리를 찾아갔을 때 더 이상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던 아름다운 글귀들을 적지 못하고 비운 채로 남아있던 시상 노트는 미자의 얼굴이 된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의 얼굴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때야 원초적인 존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미자는 희진의 존재를 삭제하지 않기 위해 홀로 손자를 경찰에게 신고해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를 쓴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미자의 시는 김용탁 시인이 읽으려고 하는 제스처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그리고 아마도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미자의 보이스오버로 시가 낭독되는 가운데 화면은 미자가 살았던 집, 미자의 집에 온 딸, 아파트 앞의 평상과 커다란 나무, 자주 이용하던 버스와 정류장을 따라간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볼 수 없는 부위는 얼굴이다. 눈이 포함된 얼굴은 다른 신체 부위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얼굴은 비움이자 물음이 된다. 이 장면은 미자가 보아 온 삶의 흔적을 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미지의 흐름 자체가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고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와 희진이 함께 쓴 시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를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읽게 하고 그 둘의 시점으로 보는 삶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의 중반부터는 희진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을 장면들이 주관적 시점으로 이어진다. 학교 운동장, 수업하는 교실, 희진의 집과 반가워하는 강아지, 버스와 경주하는 희진의 남동생, 그리고 희진의 친구들. 마침내 다리 위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는 드디어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질문한다. 당신은 희진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다시 카메라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시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고, 개인적으로 참 애정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 래를 보면서 <화양연화>의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이 오버랩될 때가 종종 있었다.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영화인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면서도 진중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남녀 주인공의 미묘한 엇갈림과 모호한 상황들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전해주며, 동시에 연기나 대사 외에도 색채와 영상미 등 진중한 스토리에 녹아든 화면의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인 정훈희의 노래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의 주제가이기도 한 것처럼, 왕가위의 <화양연화> 역시 1930-40년대 중국 가수 주선의 히트곡 '화양적연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안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개(Fog)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지표 가까이에 작은 물방울이 떠 있는 현상을 말한다. 구름과 안개는 떠 있는 위치가 다른 것으로, 하늘 높이 떠 있으면 구름이고, 지표 가까이 떠 있으면 안개이다. 구름일 때는 시야 속 경관을 아름답게 하지만, 안개일 때는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도 특이점일 것이다.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흘러나오는 정훈희의 노래도 그렇거니와, 사건도 감정도 인물 간의 관계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이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쉬운 흥행 스코어 속에서도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이유도 서사구조는 심플한 데 비해 그것을 전달하는 장치들은 다양한 층위와 모호함을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각자 인상 깊거나 여운이 남는 (흔히 말하는 ‘꽂힌’) 부분에 대해 나름의 해석들을 자유롭게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예전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던 이 한 문장은 살짝 유머 코드를 갖고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운 변태’라는 말이 좀더 어울릴 것이다. 영화계에서 자타공인하는 영화광다운 해박한 지식과, 미장센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열정은 박찬욱이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영화감독에서 칸이 사랑하는 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찬욱 감독이 그리는 영화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다. 영화는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재현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온전히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작가로서의 해석과 재창조가 들어가야 한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본인이 그리는 영화 속 세상이 아주 사실적인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라, 비유의 세계이다. 감독으로서 박찬욱이 중시하는 것은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 겠는 딜레마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어떤 도덕적인 성격이 개입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한다. 관객들이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윤리적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윤리적 질문이 난처할수록 영화는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영화감독 박찬욱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들 앞에 ‘배운 변태’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연결짓게 만든다. <헤어질 결심> 역시 ‘배운 변태’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요소들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산과 바다로 대표되는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이면서, 용의자인 서래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형사 해준의 딜레마가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해준과 서래 둘다 기혼자라는 점에서 (서래의 남편은 극이 시작되자마자 변사체로 등장하긴 하지만) 불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리얼리티가 아닌 비유의 세계,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로서의 자아와, 아름답고 묘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남자로서의 욕망. 그 둘 사이에서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황에 처한 해준의 딜레마.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질곡동 살인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되어준 서래의 말은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불륜’이라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윤리적 질문까지 얹어 놓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이 밤새 서래의 집 앞에서 망원경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스마트 워치에 녹음하는 장면은 용의자 감시이면서 동시에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해준은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때우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서래를 지켜본다. 해준에게 서래 집 앞의 잠복근무는 감시이면서 관심이고, 의심이면서 매혹이다. 해준의 수사과정은 점점 더 서래에게 이끌리게 되는 마음의 동요이고, 연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용의자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후, 서래와 해준은 비 오는 날 산사에 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시간들. 굳은 살이 박힌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해준을 보며 서래는 마음을 전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라는 서래의 말에, 해준은 ‘경찰치고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이라며 서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장난인 듯 아닌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서래 역시 장난스레 ‘현대인치고는’이라고 말하며 해준의 우산을 뺏어 들고 먼저 걸어간다. 혼자 남은 해준은 남은 핸드크림을 자신의 손에 마저 바른 후 서래를 쫓아간다. 그토록 달달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기도수의 살해 당일, 서래의 행적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를 찾아와 추궁하면서 파탄이 난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의 말에 해준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해준이 인정한 것처럼 서래의 집 앞에서 해준이 했던 행동들은 비록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랑에 들뜬 보통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길냥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하던 서래의 중국어가 번역기의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로 번역될 때 해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인 용의자인 여자가 자신의 심장을 갖겠다는 말은 생명의 위협에 다름 아니다. 후에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수정하긴 했지만, ‘심장’이든 ‘마음’이든 서래가 해준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음은 분명하다. 해준의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위험하고 소중한 무엇, ‘심장’ 또는 ‘마음’.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예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 해준의 윤리적 질문은 기혼자로서 갖게 되는 불륜이라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해준의 윤리적 딜레마는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헤어질 결심>의 장르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형사물이 아닌 로맨스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후, 해준은 월요일 할머니의 폰을 바꿔주고 중요한 증거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품위 있는, 자부심 있는 형사였던 해준이 서래를 위해 자신의 품위를, 자부심을 포기하고 범죄행위를 은닉하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범행 은닉을 도와주는 순간 끝나버렸고, 해준이 자신을 위해 품위 있는 형사이기를 포기한 것을 안 순간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나를 좋아할 확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단일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크기가 같을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긋나고 빗나가기 일쑤인 게 사랑이란 놈의 속성. 그렇기 때문에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서래는 해준의 자부심에 한 점 얼룩이 되었고, ‘붕괴되어버린’ 해준은 더 이상 서래에게 줄 ‘심장’이 없다. 서로에게 ‘꼿꼿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얘기하는 서래에게 해준은 말한다. “내가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어쩌면 해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을까? 서래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함으로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고자 한다. 보통 사람에게 짙은 안개는 이포를 떠나게 만드는 이유지만, 서래에게는 이포로 오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죽은 까마귀를 묻기 위해 흙을 파내던 청록색 양동이로 바닷가 모래를 퍼내는 서래.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킨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이는 서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서래의 실종 이후 해준이 겪을 상실감을 상상하면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이포의 바다는 무심하게도 해변의 모래알들로 서래가 누워있는 구덩이를 메운다. 강한 파도에 쌓여있던 모래 더미들이 쓸려나가고, 해준이 달려올 무렵에는 그곳에 서래가 있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해준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 그 언젠가의 서래처럼.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오르는 강렬한 석양.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거칠게 넘실거리는 만조의 파도. 그 안에서 ‘마침내’ 해준도 자신이 이미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서래가 예전 해준의 말대로 핸드폰을 바다에 버렸을 것임을 감지한다. 충격과 슬픔에 일그러지는 해준의 얼굴. 이제 해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시간도 없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풀렸던 신발끈을 다시 고쳐매고, 손전등을 켠 채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로 들어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에 몇 번씩이나 쓰러지면서도 해준은 바다로 들어간다. 서래가 있을 그 바다로. 빛을 잃어가는 하늘빛도, 보는 관객의 마음도 먹먹하다. 사랑이란,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이는 것,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거센 파도를 맞으며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것. 안개는 미혹(迷惑)과 비슷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정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는 인간의 욕망, 사랑과도 비슷하다. 혼돈과 모호함 속에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상실의 아픔도 내포한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의 감정을 소멸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을 때 그 때 보이는 풍경이 늘 아름답지는 않는 것처럼, 흐릿하게 눈을 가리던 것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진실의 모습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양연화>에서 주모운이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앙코르와트에 가만히 속삭이며 봉인해 버리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가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고자 스스로를 바닷가 모래 구멍 안에 감추어 버린다. 안개 속을 헤매이듯 모호하고 흐릿한 감정의 편린 속에서도 누 군가는 사랑을 보고 이야기하고 냄새 맡는다. 비록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봉인될 수 밖에 없는 감정일지라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라고 반문할 정도로 기억조차 못한다고 해도. 흐릿해도, ‘마침내’ 선명하게.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 < 비밀은 없다 >와 < 마더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 장르 영화에서 모성은 오랫동안 여성인물의 주요한 서사적 동기로 사용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남성인물이 이끄는 서사에서 자원쟁탈, 권력투쟁, 우정, 가족, 직업적 소명, 공동체의 대의 등 다양한 동기가 제시되어 온 것과 대비된다. 현실에서 가부장제가 여타의 활동공간, 역할, 관계를 허용하지 않고 모성의 자리에만 여성적 가치를 할당하며 제약해온 탓일 것이다. 역으로 주류의 허구적 서사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모성성을 강화하는 신화가 되었다. 등장인물이 서사의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행동을 할 때는 설득력 있는 그럴듯한 동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성인물에게는 모성이나 이성애 로맨스 이외의 상상력이 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럴듯함, 핍진성, 개연성이라고 거론하는 서사적 약호들을 현실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인과관계와 등치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핍진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그래서 이제는 지나치게 당연하게 여기는 장르적 관습에 의해 상당부분 정립된다. 즉 익숙한 설정은 알고 있는 정보로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별다른 근거제시 없이도 설득력을 높인다. 하지만 핍진성은 또한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요소와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더 중요하게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변화시킬 수 도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다. 여성인물의 주요한 서사적 동기로 모성이 아닌 완전히 다른 소재를 찾을 수 있지만, 기존의 모성서사를 구부리고 늘리고 비틀면서 스스로 균열을 내는 방법도 있다. <비밀은 없다>나 <마더>(봉준호, 2009)가 후자의 경우다. 두 영화는 자식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한 엄마를 탐정으로 내세운 느와르 장르를 전유한다. 이 영화들은 자식을 위해 복수를 감행하는 폭력적 액션의 쾌감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모성복수극과는 다르다(< 오로라 공주 >, < 돈 크라이 마미 >, < 공정사회 > 등). 그보다는 자식을 위해 진실을 찾아 나선 탐정-엄마들이 자신이 근거해 있던 세계를 뒤집어엎을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을 대면했을 때의 윤리적 태도를 시험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일반적 탐정과 달리 그들은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자식과 거리를 둘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때때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영화들에서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격한 모성과 탐정의 진실추적의 욕망은 문자 그대로 ‘-(하이픈)’이 필요한 마찰 있는 조합이다. 두 장르적 도상의 조합은 서로를 낯설게 만들면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두 영화의 주인공인 연홍(손예진)과 엄마(김혜자) 모두 자식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하면서 모성을 발판으로 그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거기에는 진실에 대한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들에서 모성은 최종적 목표나 결과물이 아니라 서사의 시작점이자 욕망을 발현할 발판 정도가 된다. 여성이 강력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할 때 지배 이데올로기가 모성 내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틀 지웠던 것을 역이용한다. 한번 시동을 걸자 멈출 줄 모르는 그녀들의 폭발적인 욕망은 기반하고 있는 모성서사의 프레임을 뒤흔들어 버린다. 1970년대 활동했던 영국의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클레어 존스톤은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로라 멀비와 달리 스스로 서사에 균열을 내고 의문을 품게 만드는 진부한 도상의 사용과 여성의 집단적 판타지의 역량을 믿었다. 당시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서사영화」(1975)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주류 서사영화가 이성애 남성의 성적 응시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서사적 쾌락을 만들어내는 영화구조를 비판하며 장르적 도상과 서사로부터 열정적으로 거리를 두는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 반면 클레어 존스톤은 스테레오타입을 반복하는, 말하자면 관습이 굳을 대로 굳어져 사유가 제거된 이미지는 스스로 균열을 만들어 내고 의심을 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존슨톤은 멀비와 달리 대중장르영화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에서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하여, 우리의 집단 판타지들은 공개되어야 한다. 여성영화는 욕망의 작용을 구체화해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 오락영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오락영화의 아이디어들은 정치적인 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하며, 정치적 아이디어들은 오락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 즉 상호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대항영화로서의 여성영화」, 1973) 흥미롭게도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을 만든 실험영화 감독 트린 민하도 진부한 도상, 즉 스테레오타입과 관련해 유사하게 말한다. “스트레오타입은 거짓된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의 포획된 재현”(「근처에서 말하기」, 1992)이기에 시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트레오타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과정, 균열, 위치바꿈, 미끄러짐, 멈춤 그 자체를 포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 창작자는 번역가의 위치를 자처하며 의미의 종착지를 만들지 않고 스테레오타입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실재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지시할 수 있다. <비밀은 없다>와 <마더>는 존스톤이나 트린이 말한 낡고 낡은 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럼에도 두 영화가 동일한 도착점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모성의 도상과 관련해 <비밀은 없다>가 궤도를 뚫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튕겨져 나간다면, <마더>는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회귀해 심연에 재침잠하는 운동을 보여준다. <비밀은 없다>의 오프닝 씬에서 연홍은 관습적으로 장르영화가 그려온 모성의 과잉된 양상을 연기한다. 그녀는 기존 사회가 원하는 모성의 텅 빈 기표를 말 그대로 뒤집어쓴다. 연홍은 그 기표가 자신이 욕망하는 곳에 데려다줄 운반체라고 믿는다. 연홍은 유력한 지역 정치인 종찬(김주혁)의 아내로 남편을 성공시켜 영부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연홍은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남편 선거를 도우며 내조를 한다. 딸 민진도 그 기표가 얼마나 텅 비어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니다. 민진은 너무 비밀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엄마를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가상친구 ‘자혜’를 연홍의 어린 시절 정보를 모아 몽타주한다. 또한 어떤 비밀들은 연홍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춰야 하는 어두운 비밀이 되고 폭력으로 변질된다. 모두가 거리낌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지역에서 연홍 혼자만 표준어를 사용한다. 광주출신인 그녀가 자신의 출신지를 말하지 않고 사투리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더러운 것을 감추고 숨기는 비밀이 된다. 차이는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상대방 후보뿐 아니라 종찬의 선거운동원들도 연홍의 지역출신이 당연히 혐오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한다. 실상은 혐오의 낙인인 공공연한 비밀과 텅 빈 모성의 기표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연홍은 민진의 죽음 이후 달라진다. 선거가 우선인 종찬과 달리 민진을 죽인 자를 찾아내려는 연홍은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덮인 기표들을 벗어낸다. 그 자리에는 각성하는 모성이 있다. 각성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연홍의 모습은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푸라기 잡듯 굿을 하고, 자신의 손등을 찔러 자해하고, 민진의 이메일 비밀번호와 노트에 적힌 암호를 풀기 위해 몇날 며칠 밤을 샌다. 그러나 모두 민진의 실종과 죽음에 눈 감으려할 때 연홍은 고립되어 유일하게 진실을 찾으려는 자다. 그녀의 광기와 집착은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연홍은 남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비밀을 폭로한다. 자신의 애초의 욕망이 얼마나 스스로와 딸을 해하는 기반에 근거했는지를 연홍은 깨닫는다.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은 기존 사회로부터 더러운 비밀이 있는 자들로 분류되어 왔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들을 배제하고 주변화하기 위해 ‘더러운 비밀’을 폭로해 ‘추문’을 만드는 방식을 자주 사용해왔다. 연홍은 남편 종찬에게 동일한 방식을 돌려준다. 연홍은 딸의 복수를 위해 종찬이 선거에서 이겨 목적을 달성한 순간 비밀을 폭로하고 추문에 휩싸이게 만든다. 첫 유세가 있는 남편과 친구 자혜와 함께 과제를 하다 늦게 들어오겠다고 하는 딸 민진(신지훈)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첫 장면 바로 직전에 충혈되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연홍의 얼굴 클로즈업이 붙는다. 이 쇼트는 <마더>에서 석양이 내리쬐는 갈대밭에서 정신을 놓은 듯 춤을 추는 엄마의 첫 쇼트와 상응한다. 기존의 많은 영화들에서 충격을 받아 초점을 잃은 여자의 얼굴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녀의 존재와 이미지는 그 자체로 그 충격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할 미스터리가 된다. 그러나 연홍과 엄마는 모두 스스로 미스터리이자 사회의 미스터리를 푸는 탐정이 된다. 미스터리로서의 모성을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는 자신 스스로를 포함하고 있기에 미스터리를 풀고 진실을 대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를 뒤집어엎을 각성이 수반한다. 연홍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남편이 딸을 죽였다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해왔던 것이 다 무너지더라도 그녀의 모성은 그 진실을 뚫고 지나간다. 스스로가 그 비루한 체제의 일부였기 때문에 기존의 자신도 해체된다. 그렇게 연홍은 무지한 자에서 깨달은 자로 변모해 나간다. 가족을 해체시킬 비밀의 폭로와 진실의 대면에서 <마더>의 엄마는 자신이 아들 도준(원빈)을 죽이려했다는 사실을 도준이 알고 있다는 진실과 도준이 살인범이라는 진실 두 가지를 모두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찌르고 정신없이 춤을 춘다. 한편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에서 아버지 오대수(최민식)는 미도(강혜정)가 딸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본인만 고통스럽게 진실을 품은 채 미도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를 무지의 상태로 돌리려 한다. 여기서 미도는 알지 못한 채 근친상간을 저지른 오이디푸스, 비극의 주체인 오대수와 비교해, 진실을 모두 알고도 타인에 대한 애도를 포기하지 않는 안티고네가 될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 오대수는 미도에게 아예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더>의 모자서사와 <올드보이>의 부녀서사에서 여성들은 진실에 대면했을 때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감당하거나 이용하려는 남성들과 달리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반면 <비밀은 없다>는 죽은 딸을 대체한 미옥과 함께 아직도 풀어야 할 암호가 가득 찬 ‘와일드 로즈 힐’에서 대항적 판타지의 세계를 구성하며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튕겨져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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