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밤에
- 감독
- 이성구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신일룡, 박지영, 박남옥, 박암, 이용, 장훈, 송미남, 최무웅, 이강조, 임성포, 문미봉, 이영호, 지계순, 남방운, 김기범
강근식 구술을 통해 보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주목받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시대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영화들로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인력의 구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구별되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림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포스터 (그림2)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포스터 특히 이 영화들은 1970년대 각광받기 시작한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1960년대와는 달라진 새로운 청년세대의 등장을 강조하였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매 시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이민이 연기한 춘호가 전쟁 직후 미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프레게르’ 세대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한 두수와 요안나가 4.19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방황하는 ‘청춘’ 세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분한 경아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신인 신분으로 파격적으로 기용된 윤문섭, 하재영과 아역배우 출신의 이영옥이 연기한 병태, 영철, 영자는 이들 세대와는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히피 세대의 등장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을 담당했던 강근식이 “히피 감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세계적인 유행은 다양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콘텐츠에 녹아들었다. (그림3)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문오와 경아 (그림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의 병태와 영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력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 연출의 스타일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문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강근식은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합류한 대표적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본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영화와 미국음악에 오롯이 영향을 받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예술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즈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음악적 취향은 이들 영화를 동시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영화와 음악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연관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놓았다. 이렇듯 강근식을 비롯하여 당대 청년 세대에게 호응을 받은 소설가 최인호, 음악인 이장희, 송창식 등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이장호, 하길종 감독 등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대중의 열망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대중문화의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강근식의 프로필은 시대를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청소년 시절, 역사의 큰 분기점인 4.19와 5.16을 겪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음악에 심취해 학내 밴드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음악살롱에서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하며 상업영화와 상업광고음악계까지 진출한 그의 음악 프로필은 1960~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까지 살펴보는 데 일조한다. 특히 1970년대 TV산업의 확장과 성장으로 동반 성장한 광고산업과 이에 따른 하위문화의 번성이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는 데 유용한 구술이기도 하다. 강근식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매체의 넘나듦’이다. 이 시기 영화와 TV 그리고 공연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무대와 영화의 영향관계 내에서 활동한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멀티 엔터테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영화작업이 그러하며 (최인호는 자신의 원작이나 각색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걷지말고 뛰어라>(1976)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강근식을 비롯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인들 또한 본업인 음악작업 외에도 영화음악과 광고음악을 넘나들면서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는 TV 산업의 성장으로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쇠퇴한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체의 경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함으로써 매체 간의 영향이 다각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밴드음악과 영화음악 그리고 광고음악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림5)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최인호 출연 장면(아래 왼쪽) ‘평생 음악인’ 강근식의 음악이야기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60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청춘의 음악 만들어낸 영원한 청년 음악인」을 수정·보완했다. 강근식은 194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탄광촌인 강원도 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락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환경에서 기타를 치던 형님들과 나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는 누이를 보며 음악을 배웠다. 가수 활동을 하던 삼촌 손인호는 때때로 악극단 활동에 얽힌 무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생활한 덕에 그는 평생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림6) 홍대강당에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홍익캄보의 첫 공연. 왼쪽에서 두번째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그림7) 밴드 홍익깜보 시절 신입생 환영회. 가운데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홍익대학교 도예과 재학 시절 학내 밴드인 홍익 캄보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강근식은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수상 후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음악프로그램 <TBC 쇼쇼쇼>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음악의 산실이라 부를 수 있는 오리엔트프로덕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이장희와 동방의 빛>, <조동진>, <현경과 영애>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이장희와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할 때는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직접 무대의상을 제작해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림8)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 공연 사진. 2회 연속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당시에는 무대 모니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밴드 공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9) <쇼쇼쇼> 출연 사진. 왼쪽부터 이장희, 진행자 곽규석, 강근식 (그림10) <동방의 빛> 공연 사진. 앙드레 김 선생이 맞춰준 옷을 맞춰입고 공연하였다. 이후 강근식은 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음악인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인들 그리고 광고인들과 협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에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화천공사의 만남으로 탄생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충격과 파장을 끼쳤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이 영화들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1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OST (그림12) <바보들의 행진> OST 영화음악과 더불어 그가 작업한 광고음악은 음악인 강근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프로필이 되었다. 김세환이 부른 “부드러운 껌”(<해태껌>)과 정훈희, 윤석화 등이 부른 “열두 시에 만나요”(<부라보콘>),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트라이>) 등은 CM송을 넘어 시대를 소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광고음악을 창작하며 경험한 대중문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그의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197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에서 광고의 거리로 변화하는 모습, 영화가 아닌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 광고의 종류가 식료품 위주에서 전자기기로 변화하는 모습 등은 광고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13) <부라보콘> 광고 (그림14) <부라보콘> 광고 (정윤희와 신일룡이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시도로 탄생한 새로운 청년영화 강근식이 작업한 영화음악은 총 13편으로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1970년대 작업한 영화가 6편(<바보들의 행진>,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 <미스 영의 행방>(박남수, 1975) <걷지말고 뛰어라>(최인호, 1976)(편곡), <내마음의 풍차>(김수용, 1976)), 영화음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1986년 작 <가슴을 펴라>(최원영)를 포함해 1980년대 작업한 영화가 8편(<하얀미소>(김수용, 1980), <강변부인>(최동준,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별들의 고향 3>(이경태, 1981), <이별없는 아침>(이경태, 1985))이다. 그중 1970년대 작업한 6편은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197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이끈 화천공사와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한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국가의 제도로 제약을 받고 있던 1970년대, 화천공사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들을 통해 새로운 메이저 제작사로 등극했다. 이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 분야에 새로운 인력을 영입해 활용한 것 또한 주효했다. (그림1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신문광고 (그림16)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신문광고 특히 음악은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현격하게 비중을 높임으로써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화천공사는 도시 중심의 청년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대중 전체에게 어필했다 볼 수 없는, 밴드와 통기타를 기반으로 ‘젊은 음악’을 선보이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협업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이장호, 하길종, 최인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맥 기반의 우연한 기획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관객층을 공략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작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의 결과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강근식이 구술에서 언급하는 <별들의 고향>의 음악살롱 장면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되는 장면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당시 강근식, 이장호, 최인호가 드나들었던 음악살롱 등의 아지트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이는 원곡의 가수인 이장희도, OST를 부른 김세환도 아닌 가수 백호빈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여러 명의 가창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제 존재하는 대중문화 그룹에 가상의 가수와 극 중 인물들을 동시에 투입시킴으로써 허구와 현실을 함께 녹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허구의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 당대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예술인 그룹을 직면하게 된다. (그림1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백호빈) (그림18)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바보들의 행진> 또한 비슷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대학생 신분인 배우들의 학교명을 광고에 활용하여 마치 이들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노린다.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송창식의 <왜 불러> 가사와 박자에 맞춰 편집된 장면은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장면은 인파 속에서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과 시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과 교차 편집을 통해 현실감을 높인다. (그림19)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장발단속 중인 경찰에게 붙잡힌 장면) (그림20)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그림2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육교에 매달린 장면) 이처럼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의 관계처럼 이 영화들의 장면 장면들은 이야기와 음악이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시도해 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인 강근식 구술의 의의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화천공사가 제작한 청년영화의 음악작업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인 동시에 당시 청년문화를 직접 겪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대학생 밴드 활동과 이장희, 송창식, 조동진 등의 음악을 작업한 오리엔트프로덕션(사장 나현구)의 작업 방식과 회사의 분위기, 대중문화예술인과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다. 말하자면 강근식 선생의 구술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1960~1970년대 젊은 대중문화예술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술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음악의 역사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구술이기도 하다. (그림22) 쎄시봉의 현장. 왼쪽 아래에 안경낀 사람이 이백천. 이백천은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을 기획하였다. 더불어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대중문화의 경험과 초기 문선대의 공연 모습도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1975년 첫 번째 대마초파동에 얽힌 뒷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근식은 이 사건에 엮여 고초를 받은 당사자로서 당시 대마초가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후의 과정과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이 일로 인생의 목표 설정이 많이 변해버린 것을 담담하게 소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음악부터 영화음악, 광고음악까지, 평생을 음악 ‘일’을 해온 백발의 노신사는 현업에서 은퇴한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한 음악인 강근식의 모습은 이제 무대 위 ‘기타리스트 강근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림23) 강근식
배우 최은희 의 이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화려하다. 1943년 연극무대로 데뷔한 최은희는 1947년 < 새로운 맹서 >( 신경균 )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1950~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부동의 ‘스타’였다. 따라서 박남옥 , 홍은원 에 이은 한국영화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라는 칭호는 배우 최은희의 화려한 명성을 장식하는 ‘특별한 이력’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라는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홍은원 감독의 표현처럼 “「신필름」이라는 대 메이커에다 손발이 척척 맞는 스탶들을 거느리고 진행을 했”고 박남옥 감독이나 홍은원 감독의 “고통 같은 것은 느낄 필요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작품을 탄생시켰” 1) 기에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감독 데뷔 당시에도 하락하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선전효과’로 크레디트에 이름만 올린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과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최은희는 ‘인기의 하락’과는 선을 긋되 자의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꾸준한 권유로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연출 배경에 대해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때로는 연기자로서 새로운 공부를 하기 위해 결심했다는 동기를 부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데뷔작인 < 민며느리 >(1965)를 시작으로 < 공주님의 짝사랑 >(1967), < 총각선생 >(1972)까지 ‘감독 최은희’보다는 ‘스타 최은희의 감독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에 대해 최은희 자신은 활동 당시 특별한 감독의 변을 내놓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회고에서도 ‘ 신상옥 감독의 권유’가 가장 큰 동기였다고 재차 밝혔다. 2) “메가폰을 든 스타 최은희” 3) 에 대한 시선과 평가는 최은희 개인보다는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과 신필름 그리고 스타 최은희의 이미지’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속에서 감독 최은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감독 최은희는 신필름의 위기와 변화 국면마다 등장했다. <민며느리>가 발표된 1965년 한국영화계는 200여 편에 가까운 제작편수, 청춘멜로드라마‧스릴러액션‧만주활극액션 등 다양한 장르 영화들의 인기,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으로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름의 부족, 컬러영화와 와이드스크린의 도입 그리고 물가 상승에 따른 제작비 증가로 영화산업 내부에서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또한 배급‧상영 환경에 비해 과잉 생산되는 제작편수로 한국영화 내부의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진데다 <007> 등 스파이 물을 중심으로 한 외국영화와의 경쟁력에서도 뒤처지는 형편이었다. < 성춘향 >(신상옥, 1961) 이후 승승장구하던 ‘대 메이커’ 신필름 조차 부채로 위기에 처한 것이 바로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이었다. 신필름은 경영 위기에 처하자 홍콩과의 합작영화 제작, 문예영화 제작, 인기 드라마의 영화화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흥행을 위한 홍보 아이디어로 떠오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최은희의 감독 데뷔였다. ‘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신필름의 시스템 하에서 안전한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신필름은 최은희의 스타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는 사극 장르 중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이서구 원작의 TV 연속극 <민며느리>를 데뷔작으로 선택했다. 순종적인 성품의 민며느리가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꼬마 신랑과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전작인 < 벙어리 삼룡 >(신상옥, 1964)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둔 최은희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며느리>는 ‘인기 드라마를 영화화해 추석에 개봉하는 최은희 감독‧주연의 신파 사극’의 모습을 갖추고 ‘최은희의 감독 데뷔’에 홍보 포커스를 맞췄다. 원작의 이름값과 신필름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영화의 제작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기 드라마 원작과 감독 최은희에 중심을 두는 대신 주‧조연 배우진은 상대역인 아역 장원배 외에 황정순 , 한은진 , 박노식 , 김희갑 , 서영춘 으로 최소화하고 단역배우들은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해 제작규모를 줄였다. 결과적으로 톱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큰 화제가 되어 <민며느리>는 1965년 추석 대목 프로 12편(한국영화 6편, 외국영화 6편)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기대한 ‘선전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아 흥행에서는 평균 수준인 5만 여명을 동원하며 현상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간판스타 최은희의 건재를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기획에 도전하는 신필름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외유로 끝날 줄 알았던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1967년 <공주님의 짝사랑>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연출작 역시 신필름이 직면한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신필름은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며 명실상부한 메이저 스튜디오의 모습을 갖췄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다시 한 번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거대한 스튜디오의 운영과 영화법에 따른 제작쿼터 달성은 메이저 영화사인 신필름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필름이 제작 편수를 늘리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인 안양필름이 <공주님의 짝사랑>의 제작을 맡았다. 신필름은 새롭게 출발한 촬영소와 영화사 그리고 신필름 연기실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공주님의 짝사랑>을 제작하며 다시 한 번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를 활용했다. 따라서 <공주님의 짝사랑>은 <민며느리>에 이어 ‘신필름의 건재와 새로운 출발’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며느리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공주님의 짝사랑> 역시 사극 영화였지만 데뷔작인 <민며느리>와는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주었다. 제목 그대로 짝사랑에 빠진 공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소동극으로 <공주님의 짝사랑>은 온전히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에 기대었던 <민며느리>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 번째는 선택과 집중을 들 수 있다. 신필름은 사극 장르 안에서 신파보다는 로맨틱코미디를 채택하고 주연배우에도 떠오르는 스타였던 남정임을 캐스팅해 보다 젊은 관객을 흥행 타깃으로 삼았다. 최은희는 배우의 역할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감독의 역할만 맡았다. 두 번째 변화는 제작규모에 있었다. 궁중사극이라는 배경을 활용한 다양한 로케이션과 스튜디오 촬영, 화려한 의상과 소품, 신필름 연기실 연구생들을 활용한 군중 신 등에서 <민며느리>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스케일이 드러났다. <공주님의 짝사랑>과 <민며느리>를 비교하면 2년 사이 규모가 성장한 신필름의 제작 시스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화려한 의상과 소품이 돋보이는 다양한 군중 신들에서는 한홍 합작영화 < 달기 >( 최인현 ‧악풍, 1964)와 < 대폭군 >( 임원식 , 1966)의 한국 촬영을 계기로 대형 사극영화의 제작 노하우가 쌓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영화의 규모와는 별개로 <공주님의 짝사랑>의 홍보는 여전히 ‘스타 최은희’에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민며느리>가 감독 못지않게 주연배우인 최은희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공주님의 짝사랑>은 주연을 맡은 신예 남정임 , 김광수 와 발랄하고 이색적인 러브 스토리를 강조하며 젊은 관객에게 어필했다. 대신 최은희라는 브랜드는 ‘제2회 작품’을 발표한 전문 감독으로 자리했다. ‘감독 최은희’는 남정임 외에도 한은진 , 조미령 , 전계현 , 강미애 등의 스타진과 함께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홍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신필름은 개봉 전 ‘여류인사 초청 시사회’ 4) 를 개최해 <공주님의 짝사랑>이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를 유지하는 동시에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관객층을 확산하려던 신필름의 기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총각선생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신필름이 내리막길에 있던 1972년 최은희는 세 번째 작품 < 총각선생 >을 연출했다. 신일룡 , 나오미 가 주연한 이 영화는 최은희가 감독한 첫 번째 현대물이었으며, 제작도 신필름이 아닌 새한필름이 맡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홍보는 ‘스타 최은희의 제3회 감독작’에 맞춰졌다. 한 가지 덧붙여진 점이 있다면 앞 선 두 편의 영화에서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했던 것처럼 <총각선생> 역시 최은희가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총출연시키며 감독 최은희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지도하는 ‘교육자 최은희’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총각선생>은 2만 여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관계가 파국을 맞고, 그들의 납북사건이 일어나며 남한에서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1984년 북한에서 발표한 <약속>까지, 최은희의 감독작은 총 4편으로 마무리되었다.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가 비록 신필름이라는 시스템과 기획에서 탄생되었고, 최은희 자신조차 연출 배경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제작 상황과 작품의 캐릭터를 통해서 최은희 개인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감독 데뷔를 앞둔 당시 최은희는 배우로서 여러 가지 편견과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선전효과, 내리막길에 들어선 인기, 나이’ 등이 ‘감독 전향’의 이유로 제기되었다. < 맨발의 청춘 >( 김기덕 , 1964)으로 시작된 청춘영화의 붐과 고은아 , 남정임, 문희 등 대형급 신인 배우들의 등장은 한국영화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최은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새롭게 대두된 젊은 관객들에게 최은희는 여전히 ‘성춘향’을 상징하는 대 배우였을지는 몰라도 유행을 주도하는 청춘스타는 아니었다. 신필름에도 최은희라는 스타 브랜드가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대중에게 고착된 지고지순한 여인상으로서 최은희의 이미지는 단점이 되기도 했다. 최은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연기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천편일률적으로 남편에 순종하고 어떠한 고생도 감수하는 주체성이 없는 단순한 도덕적인 여인”을 벗어나 “극한 상황에 처한 적나라한 여성의 역할” 5) 을 꿈꿨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감독이라는 길은 어쩌면 연기에 대한 갈망을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배우이자 감독 최은희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민며느리>의 경우 비록 순종적인 민며느리라는 캐릭터의 한계가 있지만 세밀한 설정과 연기를 통해 마냥 수동적이지만은 않은 역할을 만들어냈다. 황정순과 한은진의 캐릭터에도 적극적인 여성상을 녹여냄으로써 신파영화의 어머니상에 변주를 주었다. <공주님의 짝사랑>의 경우 궁중법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배우 최은희가 꿈꾸던 또 다른 자아를 표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성과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 스스로 공주의 자리를 내려놓는 영화의 결말은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나마 최은희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주체성 있는 적극적인 여성” 6) 을 구현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홍은원, 「한국의 여류영화감독들-한국은 여류영화감독의 선진국」, 『영화』, 1981년 1월호, 영화진흥공사. 2)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강의」, 2000년 3월 24일. 3)「메가폰을 든 최은희」, 『주부생활』, 1965년 10월호, 학원사. 4) 『경향신문』 , 1967년 7월 19일자 5면. 5) 「나의 순정파 연기는 모든 여인상의 모태」, 『주부생활』, 1966년 1월호, 학원사. 6) 위의 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당시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 파리 애마 >와 < 짚시 애마 >(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 유혜리 ), 필라 김( 이화란 )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 현석 )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 애마부인 4 >(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 드라큐라 애마 >(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 최동준 )은 하나코( 민희 )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 강승미) 는 성불구 남편( 이무정 )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 복카치오 >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 원석 )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 와 조명화 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 레드 슈 다이어리 >(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 다희아 )는 언니( 소비아 )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 애마부인 9 >(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 색깔 있는 남자 >(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 우뢰매 >와 < 슈퍼 홍길동 >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 애마와 변강쇠 >(김문옥) < 애마와 백수건달 >(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 의 < 젖소부인 >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 애마부인 2016 >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 애마부인 9 >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