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
- 감독
- 안종화
- 제작년도
- 1948
- 출연
- 송재로, 김소영, 이해랑, 박상익, 구종석, 황남, 박옥초, 김덕심, 김복자, 전택이, 이금룡, 신카나리아, 서월영, 김일해, 복혜숙, 이화삼, 정득순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 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 1035쪽 이춘풍, “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 ”(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 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 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 >(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 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 )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 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 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 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 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 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 한은진 ,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 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좌) “여배우 언 파레이드”에서 다뤄진 복혜숙 (사진: “ 여우언파레이드 영화편 (9) 인기도 한떄런가 복혜숙양 ”, 《동아일보》, 1931. 8. 9.) (우) "스타의 기염"에서 다뤄진 남궁선 (사진: “ 스타의 기염 (2) 그 보푸계획자랑야심 극은 일생사업연극인 남궁선 ”, 《동아일보》, 1937. 11. 25.)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 )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 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1950년대 후반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과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로 포문을 연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본격적인 장르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춘쌍곡선>을 시작으로,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오부자>(권영순, 1958), <사람팔자 알 수 없다>(김화랑,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등의 코미디언코미디 1) 가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과 <흥부와 놀부>(김화랑, 1959), <탈선 춘향전>(이경춘, 1960) 등 시대극을 표방한 코미디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등의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을 찾아갔다. 1960년대 초에는 가족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등장하여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의 가족희극드라마가 다수 제작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중반 유행했던 청춘드라마의 영향으로 <총각김치>(장일호, 1964),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등의 청춘코미디가 한동안 코미디 시장을 휩쓸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서영춘, 구봉서를 투 톱으로 하는 코미디언 코미디가 다시 주류를 형성하면서, 구봉서 주연의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 <남자기생>(심우섭, 1969) 등의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 <팔푼며느리>(심우섭, 1968),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 등의 팔푼이 시리즈, 서영춘의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운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 등이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코미디영화는 197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미디영화의 제작 비율은 연평균 12%에 이르렀다. 2)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멜로드라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주요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코미디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미디언코미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홀쭉이와 뚱뚱이’ 양석천(1921~1990)과 양훈(1923~1998)에서 김희갑(1923~1993), 구봉서(1926~2016), 서영춘(1928~1986), 배삼룡(1926~2010)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남성 코미디언들만으로 명단이 완성된다. 같은 시기, 이들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이야기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이자 인정받는 만담가로서 신불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김윤심(1914~1997)을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윤심은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쇼 무대의 인기 출연자였다. 김윤심의 활약이 만담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박옥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에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옥초(1920-1984)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소녀가극단 낭낭좌에서 데뷔한 이래 남성 역을 도맡아 여성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박옥초는 코미디로 연기 영역을 넓힌 뒤 1950-60년대에는 악극단과 쇼 무대, 영화와 라디오, TV까지 각종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이 시기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활약했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 약 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박옥초의 첫 영화출연은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1948)였다. <수우>는 알려진 바대로 ‘경찰정책영화’였는데, 김소영, 전택이, 신카나리아, 서월영 등이 주요 출연자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두 번째 영화는 6.25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새롭게 발돋움하던 시기에 제작된 1956년 영화 <애정파도>(문화성)였다. (그림1)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위 전옥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는 이예성과 안나영, 오른쪽 맨 아래 수영복 차림의 박옥초와 구봉서가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예성과 안나영, 전옥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애정파도>는 구봉서의 데뷔작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구봉서와 콤비로 재미있는 장면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오른쪽 아래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이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급증하던 이 시기에, 박옥초의 영화 출연도 한층 활발해졌다. 박옥초는 이 시기에만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유행했던 코미디영화였다. <봉이 김선달>(한홍열, 1957), <공처가>(김수용,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 등에서 박옥초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림2)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의 한장면. 박옥초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정혜선)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아낙으로 등장했다. 박옥초는 빠른 템포로 수다를 늘어놓으며, 특유의 표정 연기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3)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죽음 이후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주인(구봉서)이 유령인 것 같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식모로 등장하여 짧은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신 스틸러였다. 이처럼 조연이나 단역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코믹한 순간의 웃음을 담당했던 박옥초의 경력은 196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악극단과 쇼 무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출연자였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가진 코미디언이었다. 1960년대에는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사극,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안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그림4)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장면 기생점고에 나타난 나이든 기생 박옥초를 변사또 이예춘이 타박하는 장면이다. 박옥초의 표정연기가 돋보인다. 이 장면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중 변학도(이예춘)가 남원에 부임하여 기생들을 불러 모아 점고를 하는 씬이다. 맨 끝에 서 있던 기생 박옥초를 발견한 변학도가 몇 살이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열여섯이옵니다”이라고 대답하며 교태를 부리다가, 타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민며느리>(최은희, 1965)에서는 무당으로 등장하여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와 허세를 부리는 박사 부부로 출연하여 이 진지한 영화에서 단 한 번 웃음을 유발하는 씬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림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의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부부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오른쪽부터 신성일, 백일섭. 박옥초와 곽규석이 출연했다. 드물게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으로 등장했던 <장군의 수염>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박옥초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은 주로 식모, 동네 아낙, 무당 등 하층계급의 여성들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 그 중에서도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이 당시 한국영화 속에서 맡을 수 있었던 캐릭터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박옥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이런 역할들로 채워갔다. 그럼에도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고 웃음을 유발하는 개성 있는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그림6)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의 한장면. 박옥초는 코미디영화 제작이 드물었던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톱스타 코미디언 이주일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박옥초가 출연했던 마지막 코미디영화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김수형 감독의 1981년작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박옥초는 심우섭, 이형표, 김화랑 등 주요 코미디 감독들의 코미디 영화 및 신상옥, 최은희, 이성구 감독 등의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는 씬 스틸러로 출연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만하다. 박옥초가 주로 조연배우로, 다작을 한 경우였다면 백금녀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드물게 주연작을 가진 배우였다. 백금녀(1931-1995)는 김정분이라는 본명으로 부산 지역 악극단에서 데뷔한 뒤, 서울중앙방송 성우 제1기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청춘극장과 황금좌 등의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 후반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갈비씨와 뚱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서영춘과 백금녀는 쇼 무대와 라디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백금녀는 여기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 <공처가>(김수용, 1958)로 데뷔했다. 또,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 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중반에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유일하게 고소득 연예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공처가>에서 백금녀는 장소팔과 부부로 등장하여 곰탕집을 운영하는 여걸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은 당시 악극단과 라디오 만담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장소팔의 ‘대화만담’ 파트너였던 고춘자나 고백화가 아니라, 백금녀가 상대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백금녀가 ‘공처가’의 부인이라는 컨셉에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 백금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림7)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장소팔의 등에 업힌 백금녀가 포스터 전면에 위치하여, 이 영화의 코믹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백금녀라는 예명은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이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정분에게 ‘하얗고 돈 많은 여자’가 되라고 지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백금녀가 다시 주연 배우로 등장한 영화는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는데 여성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남자는 싫어> 단 한 편이었다. (그림8)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백금녀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960년대 여성 코미디언을 단독 주연으로 삼아 제작된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백금녀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포스터, 시나리오, 개작 전의 원작 시놉시스, 백금녀-서영춘 만담 레코드 등이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9) <서영춘과 백금녀, 폭소가요 코메듸-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 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춘-백금녀 만담 레코드의 표지. 이들 콤비 코미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스타 코미디언이자 중견 악극 배우였다. 이 같은 백금녀의 스타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남자는 싫어>는 기획부터 개작까지, 백금녀를 통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였다. 애초에는 서영춘과 백금녀 콤비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꾸로 부부’를 차용한 ‘역할전도 부부 코미디’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검열에 의해 전면 개작을 하게 되면서 이 영화가 택한 두 번째 길은 백금녀를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언코미디가 다시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성 코미디언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백금녀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획은 일견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개작된 <남자는 싫어>에서 백금녀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금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즉, 백금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배타적인 웃음을 만드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백금녀가 자신의 스타 페르소나와 레퍼토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웃음의 유발자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스타 코미디언으로서의 장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코미디언코미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방식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백금녀의 몸을 희화화하고 객체화하는 여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웃음은 사회적 전형화typification의 하나로, 남성들만의 세계all-male-world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4) 따라서 그의 신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동안 백금녀 자신은 코믹 행위의 주체이거나 능동적인 주어가 아니다. 즉, 영화 속에서 백금녀는 유머의 주체로 기능하거나 유머를 적극적으로 주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함’으로 인하여,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적인 신체’로 규정됨으로 인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의 코미디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범주에서이다. 즉, 기존의 퍼포먼스와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일 때, 백금녀는 능동적 주어로 활약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인 백금녀의 화려한 노래와 코믹한 춤 솜씨를 볼거리로 제시하는 장면, 서영춘과 함께 ‘거꾸로 부부’와 같은 남녀 역할 전도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 여성 레슬러로 활약하는 장면 등은 백금녀 코미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림10)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이 영화는 서영춘의 출세기를 다룬 것으로, 주연 서영춘(왼쪽)과 함께 스타 배우였던 김희갑(오른쪽)이 포스터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영춘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강문, 그 아래 서영춘을 제압한 백금녀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출세해서 남주나>와 같이 서영춘과 함께 출연하는 코미디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범주에서 금순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비체abject’로 여겨져 왔다면, 레슬링 장면 등을 통해서 금순의 신체는 ‘단련된 스포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요절복통할 폭소’를 유발하는 슬랩스틱의 신체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특히 레슬링 복장을 하고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장면은 남성들이 부과한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이는 훨씬 더 풍성하고 더 문제적인 신체의 가능성’들’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 5)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금녀의 ‘신체’는 배제와 폭력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 혹은 ‘비체’의 경계를 넘어, 주체됨을 통해 웃음을 만드는 ‘여성 코미디’의 신체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백금녀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는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이다. 이 영화는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의 원장으로 등장한 백금녀는 김희갑과 함께 감동적인 고아원 재건 스토리를 그렸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와 <팔도강산>(배석인, 1967)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백금녀와 김희갑은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고아원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 백금녀는 한편으로는 김희갑의 코미디를 보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사기꾼을 제압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11)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의 한장면 고아원 원장 역의 백금녀와 고아원 운영을 돕는 김주사 역의 김희갑. 이들은 고아원을 재건하기 위해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을 여행하며 자녀들을 만나는 김희갑 부부가 출연하는 영화 <팔도강산>와 같은 계열의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영화에서 백금녀의 활발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12)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백금녀는 코미디영화가 아닌 여타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그림1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에서 백금녀는 ‘파이 던지기’라는 고전적 코미디의 한 장면을 차용한 레스토랑 신에 등장했다. (그림 14) <팔도노랭이>(심우섭, 1970) 포스터 <팔도노랭이>는 팔도의 구두쇠들을 사위로 삼은 김희갑의 이야기. 가운데 김희갑이 보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딸로 등장한 백금녀는 오른쪽 맨 아래. (그림15)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의 한 장면. 왼쪽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춤추는 백금녀. 왼쪽 끝이 김희자, 백금녀의 오른쪽 옆이 양석천, 갓 쓴 할아버지 역의 김정훈, 그 오른쪽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허장강과 흰 재킷에 권색 바지 차림의 배삼룡이 보인다. 1) 코미디언코미디는 이미 잘 알려진 스타 코미디언의 개성과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워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을 일컫는 장르 명칭으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연구자 스티브 사이드만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Steve Seidman, Comedian Comedy-A Tradition in Hollywood Film, UMI Research Press, 1981 참고.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는 기존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의 스타성과 레퍼토리, 퍼포먼스 등을 전시하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영향력 있는 장르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는 박선영,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참고. 2)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 영화진흥공사, 1977, 46~48쪽의 “국산극영화 내용별 제작실황”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멜로드라마가 거의 60-7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연예인고액납세”, 『중앙일보』 1966.8.5.3쪽; “늘어가는 스타의 자가용차”, 『서울신문』, 1966.9.17.5쪽; “납세액으로 본 인기 바로미터”, 『조선일보』 1967.3.26.5쪽. 백금녀는 1965년 연예인 고액납세자 중 가수 분야 3위로, 이미자, 박재란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코메디언 4인(구봉서, 김희갑, 후라이보이, 백금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1966년에도 가수 중 8위로 링크되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올랐다. 4) Helga Kotthoff,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2006, p.12. 5) Andrew Stott, Comedy, Routledge, 2005,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