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바위
- 감독
- 전응주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김진규, 최은희, 한은진, 허장강, 윤인자, 나애심, 고선애, 석금성, 이성섭, 장훈, 최걸, 최삼, 김동원, 이예춘, 박미영, 박순이, 정득순, 박상준, 이기홍, 김해룡, 박성근, 정운강, 임동훈, 장성희, 오경주, 김상훈, 김맹환, 김승일, 최명주, 이길수, 유진숙, 방우봉, 송춘애, 김희준, 배옥전, 최소자, 김연화, 신찬일, 황건, 오윤선, 배종걸
어렸을 때 작은 외삼촌과 함께 < 빨간 마후라 >( 신상옥 , 1964)를 봤다. 마포 극장에서 리바이벌 상영이었다. 극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다. 나관중 소령( 신영균 )이 부상을 입은 채 불타는 비행기를 몰아 다리 폭파의 임무를 완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애가 닳았다. 전쟁이 끝난 후 에필로그, 시민들 앞에서 전투기들이 쉭 쉭 소리를 내며 곡예를 할 때 어린아이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나는 공군이 될 거야요. 이 다음에 커다랗게 자라면...”으로 시작하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번갈아 바꿔 당시 아이들이 자주 불렀던 노랫말처럼. 다시 본 <빨간 마후라>는 클리셰 덩어리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불쑥 뚫고 튀어나오는 감독이자 제작자 신상옥의 기개가 화면에 넘친다. < 성춘향 >(1961)의 기록적인 흥행 성공 이래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림은 작은 방송국과 맞먹는 규모였지만 <빨간 마후라>가 극장에서 흥행할 때 부도를 맞을 만큼 경영상태는 오락가락했다. 신상옥의 그릇은 할리우드식 스튜디오를 지향했으나 한국영화산업의 형편은 영세했고 전근대적이었다. 생전의 사석에서 신상옥 감독을 뵈었을 때 그는 지방 극장들에서 수금액이 제때 올라오지 않아 늘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도 <빨간 마후라>는 한운사 집필의 원작료만으로 당시 영화 한 편의 제작비에 준하는 금액을 썼고 공중전 촬영에 세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으며 당시 한국영화 표준이 흑백이었던데 반해 화려한 색채 필름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전투기들이 사천 기지에서 강릉 제10 전투 비행대로 향한다. 씩씩한 음악은 휘파람 소리로 바뀌고 묵직한 남성 중창의 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흐른다. 배대봉 중위( 최무룡 )를 비롯한 아홉 명의 젊은 조종사가 전대장에게 신고를 한다. 홍길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대장은 모두에게 빨간 마후라를 나누어주면서 말한다. “전투나 사랑이나 비겁하지 말아라!” <빨간 마후라>에는 오글거리는 대사가 많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군인이 하는 대사가 많고 인간의 정념이 드러나는 대목에선 예외 없이 감상주의가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그 감상주의를 있는 힘껏 부정하는 또 다른 감상으로 틀어막는다. 이를테면 조종사와 벼락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지선( 최은희 )를 연모하는 조종사 배대봉은 실의에 빠져 지내다 새 출발을 결심한 지선의 이사를 도와주는 장면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들 조종사들은 오늘만을 생각합니다. 내일은 알 수 없는 거고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서는 어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살기로 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럼 죽어야겠죠.” “네?” “그러나 살아 주십쇼. 제발.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자기만이 비극의 주인공인 것처럼 제발 생각지 말아 주십쇼.” 이런 장면 다음엔 가차 없이 출격에 나선 전투 비행단의 장면이 이어지고 화면엔 전투기 굉음과 그들이 창공을 횡단하는 수평과 수직의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교차 된다. 매번 전투는 예상치 못한 질곡에 빠지고 누군가는 전투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며 누군가는 구사일생의 기회로 살아난다. 신상옥의 회고에 따르면 이 영화는 공군의 비협조로 애를 먹으며 찍었다. 비행기 조종간에 카메라를 설치해 전투 장면의 박력을 담아내려 했던 시도가 웬만한 장편영화 한 편 분량의 필름만 소모하고 실패하면서 신상옥이 직접 잡은 카메라는 정교한 사전 계획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대다수 전투 장면을 담아낸다. 화면에는 하늘에서 선회해 지상으로 다가오는 전투기들을 마치 실제 전투에서 맞닥뜨린 것처럼 다급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절박함이 담겨 있고 예전 기록 필름에서 가져온 듯한 북한군의 사격장면조차도 그 절박함에 응대하는 느낌을 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군 편대를 하늘에서 쫓아다니며 황망하게 찍어낸 듯한 숏들이 기록영화적 질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 하늘의 드라마와 병치되는 지상의 드라마는 급박한 전투 장면의 리듬만큼이나 빠르고 느닷없다. 나관중은 동료 고도원이 이북 출신 여성 지선과 벼락 결혼을 한 뒤 전투에서 사망한 걸 가슴 아파하며 지선의 안위를 위해 후배 배대봉 중위가 지선과 사귈 것을 권유한다. 고도원과 지선, 배대봉과 지선의 사랑이 지상의 드라마로 전개될 때 나관중은 그들의 보호자, 나아가 모든 후임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전투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가 죽은 뒤 그가 생전에 쓴 유서에는 “나는 전쟁에만 필요한 놈이다. 나 같이 무식하고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은 빨리 없어지고, 순수한 너희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너희들은 자라나라, 나는 그 밑에 깔릴 재다, 거름이다.”라고 적혀 있다. 신상옥은 자신의 대표작인 이 영화를 ‘반전영화’라고 자평했으나 거기에는 카레이싱에 임하는 카레이서의 심정에 준하는, 죽음의 경계에 임박해서야 삶의 절박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자들의 흥분과 절망이 있다. 그것은 여자들의 보호자를 자임하면서도 여자들의 보호를 원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욕망과 겹쳐 있는데 이 모순을 헤집는 것은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들의 거침없는 속도와 에너지일 것이다. >> 빨간 마후라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침체의 시작 | 1970~1974년 197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며 국가 주도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그해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어두운 일면을 극명하게 부각했다. 1972년 10월 유신 정권이 탄생했고, 한국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갔다. 물론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는 1970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업형 제작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주도의 정책은 인위적이었던 만큼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고, 폐해는 더 커져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대중오락의 왕자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1970년대 내내, 흑백이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꾸준히 상승한 반면 전국의 영화관 및 영화 관객 수는 줄어들었다. 불황기, 침체기 그리고 쇠퇴기로 불리는 이 시기, 영화인들은 더 나빠지지 않을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그 골자는 1)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2)제작업과 수입업의 통합 3)영화진흥공사의 설립이었다. 1972년 20개이던 영화제작사는 1973년 12개로 줄었고, 그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47편으로 한정한 수입권도 12개 제작사에만 나눠주었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부여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사들은 졸속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제작비 대비 흥행 성적이 안정적인 저예산 액션영화 장르가 유행한 이유였다. 특히 이런 유의 영화는 네거티브 필름을 반만 써서 촬영하는 테크니스코프 사이즈로 만들어져, 제작비를 아끼는 대신 완성도는 포기했다. 외화 쿼터를 더 따내기 위한 방법은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제작사들은 관객보다는 정권의 기호에 부응한 반공영화, 새마을영화를 만들었다. 한편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을 슬로건으로 내건 영화진흥공사가 발족되어 유신 정권의 지배구조를 영화 산업 내부로 뿌리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계의 불황을 타개하겠다는 당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불황은 가속화되었다. 1971년까지 200편을 넘겼던 한국영화 편수는, 검열 편수 기준으로 1972년 122편, 1973년 125편, 1974년 141편을 기록했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 의 < 별들의 고향 >이었다. 행운아에서 풍운아로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 는, 흥미롭게도 영화 검열관이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의 권유로 신필림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신상옥 감독 등의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출부를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극단 생활을 위해 신필림을 들락날락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넘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로,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영화화 권리는 확보했지만 이후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승 신상옥 감독이 데뷔는 시켜주지만 신필름의 노장 이형표 감독에게 촬영을 맡긴다고 하자,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신필림을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연출부 제2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 같은 일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광나루의 백사장에 도착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즉흥적으로 장면들을 만들어나간 것이 첫 연출 풍경이었다는 일화처럼 행운과 돌파력, 천재적 기질 사이의 어딘가에서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했고, 이장호는 46만이라는,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흥행 성적으로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1975년 연배가 위인 하길종, 김호선 등과 결성한 ‘영상시대’를 통해 ‘뉴시네마 운동’의 흐름을 이끌던 그는,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한 4년간의 시간은, 그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 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 바보선언 >(1983), < 과부춤 >(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 무릎과 무릎 사이 > (1984), < 어우동 >(1985)을 히트시키며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후의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30대 후반의 이장호 감독. <과부춤> 촬영 현장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만든 참신함 1972년 9월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별들의 고향」은 연재 중은 물론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1973년 한 해에만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장호 가 연출의 기회를 잡고 개봉 초기 관객의 주목을 끌어낸 것은 당대 최고의 소설을 판권으로 확보한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관 개봉 시절,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석 달을 상영하며 4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은, 영화 자체의 힘이 분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선배 감독 다수가 판권을 탐내는 상황에서, 특유의 직관과 돌파력으로 이런저런 난관을 이겨낸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냥 자기 느낌대로 한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의 촬영기사 장석준 이 함께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이장호는 자신이 즐겨본 일본의 전문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서 스크랩한 이미지들을 장석준 기사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척하고 구도를 잡아냈다.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 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무려 40여 일을 투자했다. 이장희가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리스트 강근식 이 연주한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은, 국내 첫 OST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영화만큼 성공을 거뒀다(그 이전의 한국영화 음반은 주제가가 수록된 것이지만, 이 앨범은 문자 그대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도 이장호의 감각을 기반으로 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의 참신함이 특히 그렇다. 물론 시퀀스 전체를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을 전면에 내세워 연결한 장면들은, < 졸업 The Graduate>(마이크 니콜스, 1967) 같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희대의 흥행작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느낌대로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같은 혁신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운규가 그리피스의 대작 멜로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 아리랑 >(1926)을 만들고, 이만희 가 할리우드의 빼어난 장르영화와 유럽의 예술영화를 소화해 < 만추 >(1966)를 만든 것처럼,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움은 늘 서구 영화의 언어와 문법에서 힌트를 찾았다. 이장호 영화의 새로움 역시 서구 영화의 고전과 현대작을 섭렵한 영화광 출신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별들의 고향>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장 뤽 고다르, 1959)의 장 폴 벨몽도의 중절모나 <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오손 웰스, 1947)의 거울의 방 같은 설정을 넘어서는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같은 대사가 흐르던 바로 그 장면 멜로드라마와 새로움 사이 < 별들의 고향 >은 20대 중반의 순진하고 발랄한 여성 경아( 안인숙 )와 그녀가 만난 4명의 남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사실 영화는 내러티브의 밀도가 희박한 편으로, 시간순으로 줄거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빌려 그 행간을 채워야 한다. 작은 회사 경리인 경아는 직장 선배인 영석( 하용수 )의 구애로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는 아이까지 지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두 번째 남자는 중년의 만준( 윤일봉 )이다. 경아는 만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경아를 닮은 전부인이 의처증으로 자살한 것과 경아의 낙태 경험이 밝혀지면서 파경을 맞는다. 이후 경아는 호스티스가 되고 화가 문오( 신성일 )를 만난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둘은 동거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폭력적으로 그녀에 집착하는 옛 애인 동혁( 백일섭 )이 찾아오면서, 문오도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고향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문오는 1년 반 만에 술집에 있는 경아를 만나고, 그녀가 잠든 사이 돈을 두고 나온다. 그리고 1년 후 경아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눈밭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문오가 유골함을 들고 경아를 회상하는 장면과 한강에 그녀의 재를 뿌리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에 기반을 둔 것이 그 이유겠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촬영해놓은 필름을 돌려보며 편집실에서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하지만 이는 되레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영화의 발전도 계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별들의 고향>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관객을 한 단계 성숙시킨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별들의 고향> 역시 이전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영화의 중반부 두 번째 남자 만준과의 에피소드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경아로 분한 안인숙의 연기가 이마저도 상쇄시킨다.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는 여리고 순진하고 발랄하지만 도시의 비정한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경아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여성의 수난담과 성적 과잉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제공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경아를 잡아내는 구도나 쇼트들의 배치를 자세히 보면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고 가부장적 폭력을 고발하는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경아역의 안인숙 호스티스 영화와 청년 영화의 산파가 되다 < 별들의 고향 >이 출현한 덕분에 197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와 관객들도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별들의 고향>이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김호선 감독에 의해 세련돼졌다. 조선작의 연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 영자의 전성시대 > (1975)가 36만 관객을, 조해일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 겨울여자 >(1977)가 5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양쪽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해 여러 남성을 거치는 과정을 관음증적으로 전시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양산되는 계기가 된다. ‘청년 영화’로서의 선명한 줄기는 미국 영화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이 만들어냈다. 통기타. 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의 생기에, 당대 청년들의 저항과 체념의 정서까지 담아낸 < 바보들의 행진 >(1975)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