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세계 No 344
- 제작년도
- 1952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내가 죽던 날 >(박지완)은 메타영화, 즉 ‘영화에 대한 영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서사의 구축과 동일시의 과정을 탐색하는 ‘여성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이 영화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체를 찾을 수 없는 세진(노정의)의 진실을 찾고자 탐문수사를 벌이는 경찰 현수(김혜수)를 중심으로 한 추리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메타영화가 갖는 현학적 모호함이나 전위적인 표현 양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죽던 날>은 분명 탐정느와르 장르영화이면서, 또한 여성의 ‘서사’를 발견하려고 하는 어느 한 여성의 여정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왜 ‘(여성)영화에 대한 영화’인지를 본격적으로 해명하기 전에, 잠시 에둘러 여성영화라는 용어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최근 한국에서 전문 비평가뿐만 아니라 관객과 마케팅도 자연스레 사용할 만큼 대중화되고 있는 이 용어는, 씨네-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정의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 이유가 학문적 혹은 비평적 난해함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느 목적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층적 차원에서 경합하며 내용과 범주가 역동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마케팅을 위한 알트 장르(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여성 관객을 주요 타겟으로 한 장르)처럼 이용되거나, 여성 창작자나 여성 주도 서사에의 주목을 이끌어내기 위한 산업·정책적 용어로 지칭되고, 페미니스트 미학이나 담론을 강조하기 위한 폭 넓은 개념이 되기도 하며, 큐레이팅을 위한 실천적 범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영화학자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여성영화를 재사유하기: 미학 및 페미니즘 이론」(1985)에서 논의했던 개념에 기대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가부장제 이성애중심적인) 기존 주류 서사에 대항하면서도 서사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페미니스트 환상성을 길어내는 말 걸기(address)의 미학이다. 말 걸기의 미학은 송신자 및 수신자의 위치성과 신체성을 드러낸다. 보편자나 표준적 정체성을 가정하지 않으면서, 동일시의 욕망과 차이 속에서 타자를 인식하는 현실을 동시에 각인한다. 여성 정체성의 재현 역시 마찬가지로 접근한다. 여성의 동일성만을 강조하면 남성과의 대립적 이분법에 고착되고 의도치 않게 남성이라는 기준을 계속 상정하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그래서 드 로레티스는 여성영화(women’s cinema)는 추상적인 대문자 여성(Women)이 아니라 복수적인 여성들 간의 그리고 한 여성 내의 교차적 정체성을 표현하며 다양한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드 로레티스는 이러한 여성의 서사는 기존 재현에서 탈각되고 배제되어온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미 스크린 위에 보이는 것(space-on)뿐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 비가시화되어 있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리고 (카메라의 운동을 통해) 곧 도래할 이미지와 서사의 공간인 ‘스페이스-오프(space-off)’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내가 죽던 날>에서 현수는 세진의 죽음을 쉽게 확정짓지 않는다. 현수는 세진이 남긴 흔적에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읽어내고 말을 건넨다. 당신은 정말로 죽었는가, 이렇게 살려고 애썼으면서도 왜 죽었는가? 현수는 세진에게서 행동의 이유, 즉 서사를 발견하려 한다. 더 나아가 현수는 세진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이는 자기 경험과 욕망의 투사다. 현수와 세진의 관계는 형사와 실종자인 동시에, 여성인물과 여성관객 간의 동일시 과정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와 간극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희박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과 마음을 읽어내려는 의지 속에서 동일시가 발생한다. 심지어 현수는 섬에 도착해 자신을 낯설어 하는 섬 여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꾸로 이 과정을 이용한다. 남편의 불륜이라는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며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섬 여자들의 공감대를 얻어 세진을 이해할 정보를 수집한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영화적으로 말하면 스페이스-오프에 눈길을 주는 것이고, 문학적으로 말하면 ‘결을 거슬러 읽는(reading against the grain)’ 방식이다. 현수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누구 하나 세진의 마음을 돌보고 이해하려 하는 이가 없었음을 알게 되면서 더욱 세진에게 빠져든다. 현수/관객은 세진의 서사를 발견할 마지막 보루가 된다. 현수는 출동 중 접촉사고를 내고 팔에 자해를 해 징계위에 회부된 상태다. 게다가 몰래 바람을 피운 남편은 이혼재판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현수 회사에 악성 소문을 퍼트렸다. 완벽해 보였던 현수의 삶은 사생활과 경력 모두에서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편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며 부족한 것 없어 보였던 세진은 아빠가 죽고 그의 범죄사실이 밝혀지면서 자기가 살던 삶이 완전히 거짓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든 삶을 회복하려 하지만 한번 추락한 삶은 원상복귀 되지 않고 악화될 뿐이다. 흥미롭게도 현수와 세진은 모두 남편의 불륜과 아빠의 범죄 사실 그 자체보다 자신이 그들의 부도덕함을 ‘몰랐다’는 사실을 가장 괴로워하고 자책한다. 가장 친밀한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그녀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모를 수 있었냐’고 힐난한다. 현수는 단순히 사생활에 대한 비난을 넘어서 경찰로서의 직업적 수행능력까지 의심 받는다. 새엄마가 있어도 집안 살림을 책임져왔던, 똑 부러지고 어른스러운 세진은 갑자기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된다. 그녀들은 자신이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서 타인이 그린 ‘그림’에 갇혀 일순간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게 된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던 그림이 허상이라는 사실은 그 자신의 정체성마저 빼앗기는 일이 된다. 그래서 세진은 유서에서 자신의 가장 큰 죄는 ‘바보처럼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이라며 아빠와 오빠의 죄까지 대속하려 한다. 그것만이 다시 주도권을 되찾을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무지의 죄’는 도덕이 아니라 파워의 문제이다. 현수도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기에, 세진이 애써 살아보려는 흔적을 발견하고 성긴 증거들을 연결해 서사를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흔적들 사이의 구멍을 채우는 것은 현수의 삶과 경험이다. 누구의 시점에서 누구를 위해 그리고 누구에게 가닿기 위해 그린 그림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현수도 깨닫는다. ‘개연성’과 그럴듯한 그림에 대해 우리는 끈질기게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다분히 편향된 것일 수 있다. 풍경조차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것이다. 현수는 마침내 경찰조직이 보기에 좋은 ‘그림’에 다시 자신을 넣는 것을 거부하고, 세진과 순천댁(이정은)이 그린 진실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현수 덕택에 세진의 얼굴은 더 이상 미스터리로 남지 않는다. 남성중심적 서사, 특히 느아르나 스릴러 장르에서 여자의 얼굴과 표정은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매혹적이다. 그 미스터리는 모호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남성영웅이 풀어야하는 문젯거리이자 남성중심의 서사를 추동시키는 동기가 된다. 남성 관점에서 만든 서사와 그림을 위해, 남성들이 해결할 때까지 여성들은 계속 미스터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남성중심적 그림에서 여성의 서사는 희박하거나 행동의 근거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잘 납득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은 손쉽게 ‘민폐’ 캐릭터로 낙인찍힌다. 경찰이 설치한 CCTV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카메라를 움직여 사각지대를 만드는 세진의 행동은 기존의 ‘그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현수 역시 이러한 세진의 얼굴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해결해야할 문젯거리나 매혹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이해하고 공감하며 서사를 불어넣어줄 동일시의 대상이다. 순천댁과 세진은 CCTV의 사각지대, 즉 스페이스-오프에서 교류하고 그들만의 서사를 쌓아간다. 순천댁이 세진의 죽음을 위장하고 그녀를 빼돌렸다는 진실은, 동시대 한국 장르영화에서 점점 더 핵심적인 장치로 사용되는 충격적인 반전효과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순천댁의 계략과 세진의 생사 그 자체가 장르적으로만 소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음 이후 원한을 풀어주는 멜로드라마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박지완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너무 커서든, 너무 작아서든 누구나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자신만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누군가 보이는 걸 봤다고 얘기해 주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듯, 중요한 것은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세진의 ‘내일’이다. 영국 감독 샐리 포터의 영화 <스릴러>(1979)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재해석하며 ‘낭만적인 희생자’로서의 재봉사 미미가 정말로 병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남성 예술가의 시적 소재와 동기가 되기 위해 살해당한 것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미미는 ‘나는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남성 예술사 내에서의 여성살해를 비판하고 <라 보엠>에서 악녀로 그려진 또 다른 여성 무제트와 남성이 제외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둘은 결말에서 남성이 그린 그림에서 문자 그대로 창문을 통해 탈출하며 여성의 서사를 발견하고 써내려갈 가능성을 맞는다. 마찬가지로 현수도 세진의 죽음의 이유를 질문하며, 순천댁과 세진이 그린 새로운 그림을 만나게 된다. 현수는 순천댁이 세진을 빼돌렸을 것이라 거의 확신한 후 기존의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굳이’ 세진의 안녕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미 현수와 관객 모두 진실을 알아냈기 때문에 이러한 꽉 닫힌 엔딩은 재확인에 불과한 군더더기처럼 보일 수 있다. 왜 진상이 거의 드러나 장르적 완결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녕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통쾌한 반전과 자기충족적인 문제해결을 넘어서 이 영화가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은 세진의 서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그녀가 정말로 안녕한지, 그녀가 원하던 ‘해가 지는 그림’ 속에 자신을 놓고 있는지 이기 때문이다. 여성영화가 관심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것은 진부한 군더더기가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스트 환상성을 길어내는 장면, 기존 서사에 대항하면서 서사와 함께 가는 양상이다. 그래서 클리셰 같은 이 해지는 이국적 풍경은 고착되고 고정된 그림이 아닌 앞으로 더 다양하게 그려질 ‘여성서사’의 시작이다. 그런 이유로 카메라는 그 그림 속에 현수와 세진을 남겨두고 멀어진다. 그것은 여성들의 해방적 공간의 그림을 끝까지 그리고 시각해보고자 하는 마음, 그녀들의 서사를 발견하고 그 서사 속에 ‘너’가 있고 ‘너’의 내일이 있기를 바라는 순천댁의 마음이기도 하다. 순천댁이 쓴 것처럼 말이다. “니가 남았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완전 범죄는 있다 2018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 암수살인(暗數殺人) >( 김태균 )이었다. ‘보이지 않는 숫자’는 모든 정치의 열쇠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대표적인 숨겨진 범죄(hidden crimes)다. 신고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문제, 보지 않으려는 문제, 왜 어떤 문제는 드러나고, 어떤 문제는 덮어지는가, 어떤 문제는 문제로도 상정되지 않는가. 누구는 보호받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의 살인은 과실치사인데(폭력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피해 여성이 사망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살인은 교묘히 계획된 범죄인가(남성의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를 행사한 여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가 정하는가? 차이와 배제, 범주를 둘러싼 권력과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말은 생각보다 심오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완전 범죄는 머리 좋은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암수살인처럼 피해를 파악할 수 없는 범죄가 완전 범죄다. 신고도, 시신도, 증거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유일한 증인은 범인이다. 미제 사건도 아니고 범죄 자체가 가시화되지 않은 경우, 그것이 완전 범죄다. 하룻밤에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혹은 성 산업에 종사하다가 사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강남역 사건은 드러났을 뿐이다. 암수살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이주자, 난민, 노약자, 빈곤층, 노숙자, 여성 등 취약 계층이 대부분이다. 글쓰기나 인문학 강의를 하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지식과 지식인의 개념이다. 다른 문제에 비해 이 이슈는 자신 있게(?) 대답하는 편이다. “지식의 개념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을 모르는데...” 지식인의 개념보다는 지식인에게 필요한 태도를 묻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사명이나 역할이 아니다. 윤리에 대한 추구와 지향.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지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기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앎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에 달려 있다. 등록되지 않는 죽음 영화 <암수살인>의 미덕은 윤리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형사 영화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나 액션(폭력), 스릴러를 강조한다. 주제는 남성들 간의 승부이고, 피해자(주로 여성과 어린이)는 그들의 대결이 가능하도록 기능하는 도구다. 그런 영화 중에서 가장 웰메이드를 꼽으라면 < 살인의 추억 >( 봉준호 , 2003)이 될 것이다. <암수살인>은 반대 입장을 취한다. 등장인물은 형사와 범인이지만, 서사의 흐름은 철저히 피해자 중심이다. 또한, 이 영화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다. 이로 인해 <암수살인>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 ‘되었다’. 이 지면에서 굳이 언급하자면, 당대 한국의 남성 영화감독 중에서 시대의 윤리, 재현의 윤리를 가장 고민하는 이는 이창동 감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윤리성은 실화를 바탕 하는 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범죄자 강태오( 주지훈 분)는 김형민( 김윤석 분) 형사에게 진부한 대사를 던진다. “당신은 나 못 이겨”. 형사는 진부하지 않게 받는다. “내가 너를 이겨서, 뭐 할 긴데?” 그는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진짜 이겼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역시 승부의 관점이다. 인간의 생명을 두고 승부가 중요한가? 형사의 관심사는 범죄자와의 심리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자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있다. 때문에 (실화와 달리), 김형민은 재소자 강태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불법 행위도 불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대립 구도가 사회운동에서도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적’과의 싸움, 이기는 것에 무게를 두는 반면 어떤 이들은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상황을 더 걱정한다. 물론, 피해는 사회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피해자는 사회운동의 명분, 증거로 전락하게 된다. 피해자를 ‘앞세우거나 동원하는’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의 변(辨)은 한결같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긴 이야기다.) ‘완전 범죄’라는 표현은 가해자의 관점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완전 범죄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사람이 범죄의 대상이 된 현실이 완벽하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도 넌센스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은 완벽했다”는 말이 가능한가? 피해가 퍼펙트 했다? 영화에서는 “암수살인이 한 해 200건”이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이 숫자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법무부 장관도 알 것이다. 경찰이 인지한 사건만 이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는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실종 사건에서 남겨진 이들의 고통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확인하는 문제다. 기다리는 이들의 고통. 이들은 고통이 끝나길 원한다. 여기서 딜레마는 그것은 범인만이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수사 기관이 파악하지 못한 범죄를 범인이 자백하는 조건으로 형량 거래가 이루어지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형사가 자기 돈을 써가며 범인과 적극적으로 협상한다. 요컨대 <암수살인>은 고통, 가시성, 윤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상업 영화로서 성공했다는 점은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다. 암수살인의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 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은 다르게 분배된다는 현실. 용의자만 유전무죄가 아니다. 안전 역시 사회적 공공재이기 때문에, 잠재적 피해자들도 유전무죄다. 등록되지 못한 피해 정찬의 소설집 『새의 시선』(2018년, 문학과 지성사)에 수록된 단편 ‘등불’은, 세월호에 승선한 사람 중에 명단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에 탄 모든 이들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는가? 세월호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만일, 운임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아이와 함께 배에 탄 가난한 여성이 있다면? 이제 세월호 사건의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등록된 자의 죽음. 역사도 우주도 저 하늘의 별도, 그 어디에도 흔적 없는 죽음이다. 무지가 권력인 사회에서, 소수자를 함부로 하는 사회에서, 시민권의 의미가 좁은 사회에서는 누가 인간이고 성원권을 가졌는지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태아는 생명권, 선거 연령, 동성애자의 숫자, 인터 섹스(間性), 누군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는 투쟁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통계를 통해 현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통계는 그 사회가 합의한 개념에 따라, 그에 맞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폭력일까. 무엇이 위계일까. 가해자, 피해자, 조사자의 개념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군대 내 폭력이든 실태 조사가 어렵다.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다. 통계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통계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한국기지촌여성인권운동사』를 쓴 적이 있어서) 주한미군 기지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당황한다. 통상, 기지(bases)의 개념에는 다양한 ‘시설’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a military base, camp, post, station, yard, center, homeport facility...) 이는 번역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처럼 팩트는 단 한 번도 팩트일 수 없다. <암수살인>은 고통, 지식, 권력의 문제를 연결한다. ‘통찰’을 뜻하는 영어 ‘insight(in + sight)’는 “눈을 감아야 새로운 것이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을 잠시 잊거나 상대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지식은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절충’을 가장 싫어한다. 여성주의 지식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적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부터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 만만치 않은 삶이다. <암수살인>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장면. 처음 두 남자가 비 오는 자갈치 시장을 걷는다. 바로 다음, 칼국수 집 장면은 화면 밖으로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경찰서나 관공서에 박카스류를 사 들고 오는 민초들, 실종자 할머니 역의 허진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그지 맹크로(거지처럼)” 같은 부산 사투리(서울말도 사투리지만)는 중독성이 있었다. 6년간에 걸친 감독의 필드웍은 이 속도의 시대에도 창작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음을 일깨운다. 김윤석 배우의 형사 영화를 모두 보았지만 비슷한 장면이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 천하장사 마돈나 >( 이해준 , 이해영 , 2006)다. 여성이 되기를 꿈꾸는 뚱뚱한 씨름 선수( 류덕환 분)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그는 상흔이 가득한 얼굴로 학대를 대물림한다. 상처 입은 남자가 아들에게 휘두르는 폭력. 나는 그의 ‘루저 한국 남성’ 연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변호사 역의 김중기 배우는 오십대 초반인데, 아주 젊게 나온다. 택시 안의 구토물을 닦아내는 여성 노동자들의 일하는 장면. 강태오‘도’ 하지 않는 노동이다. 구토기와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 식사 장면을 기억하리라. 두 명의 형사(김윤식, 진선규 )가 포크레인 기사에게 ‘애원’하는 장면은 굉장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일도 아닌데 늘 손해를 보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일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처럼 상관, 후배, 검사, 가족... 그러니, 이들의 인생은 늘 “미안하고 죄송하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일은 혼자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