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라인TV][실종자, 나현]2편_나현개인전_상상마당 갤러리
- 제작년도
- 2011
60년대의 기운 시대적인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령 196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유럽은 프랑스의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혁명에 돌입했고, 미국은 반문화 정서에 몰두했다. 현대영화의 형식과 내용의 급진성이 과감하게 실험됐고, 미국 영화조차도 상상력의 자유가 허용됐다. 카메라 움직임과 앵글, 편집에는 금기가 없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해 “뭘 해도 의미는 만들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대형 스튜디오들에겐 위기였으나 새로 등장한 신진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계기였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정치학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이러한 시대에 동참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그는 오즈의 엄격한 조형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는 거의 인류학자의 태도로서 일본의 인간 군상들을 관찰했고, 원시주의적 열정으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차마 발언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에너지, 혹은 폭력과 무지가 그의 영화들에서 가감 없이 펼쳐졌다. 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그의 발언은 그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두 가지 문제, 즉 인간 육체의 열등함과 일본의 일상적 현실의 끊임없는 바탕이 되고 있는 사회 구조의 열등함을 결합시키고 싶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했다. 시대적 기운도 그를 상승시켰다.(당대의 제도나 사회구조와는 다른 의미로서의 시대의식, 세대성) 쇼헤이의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걸작들은 금기가 없다. 검열도 없다. 카메라 움직임과 캐릭터, 주제와 소재, 영화적 형식과 스토리도 파격적이다. 그의 모든 영화들에는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괴이한 기운도 감돈다. 괴력의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의 진실 혹은 허구 60년대 쇼헤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진 < 인간 증발 >이다. 젊은 날의 쇼헤이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현장을 지배하는 그의 강단과 천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이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원래 TV 시리즈 물로 기획되었으나 영화로 전환됐다. 당시 일본에선 한해 십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이마무라는 도대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찰청 실종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32세의 남자, 타다시 오시마를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그의 약혼녀 요시에를 동참시켜, 그녀가 오시마의 가족과 동료, 실종 당시의 정황 등을 파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문 인터뷰어로는 < 붉은 살의 >(1964) 등에 출연한 바 있는 남자배우 츠유구치 시게루를 캐스팅하여 요시에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였다. 영화는 오시마 실종 1년 반이 지난 시점부터 촬영되기 시작해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소요했다. 촬영팀은 오시마를 추적하는 수사팀과 흡사했고, 요시에와 시게루를 내세운 인터뷰들은 직계 가족부터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영화 촬영팀의 첫 추적 대상은 당연히 오시마였다. 그의 내밀한 가족사와 부모 형제, 그가 왜 도시로 이주했으며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어떤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폭로되기 시작한다. 극기야 실종 시점에 오시마는 약혼녀 요시에가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쯤 되면 영화는 슬슬 관객에게 퍼즐과도 같은 질문의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부재하는 남자,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자, 실체가 없는 남자가 오직 타인의 증언에 의해서만 관객에게 제시된다. 누군가에게 그는 무능한 일군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그는 여자들을 농락하는 자였고 결국 실종 전에 회사 공금까지 횡령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영화가 정작 질문하는 것은 오시마라는 사람의 존재 혹은 오시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아니다. 오시마를 경유해 이마무라 쇼헤이의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단편적 사실들(그의 흔적들, 증언들, 기억들, 관계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본격적인 게임은 중반에 이르면서 고조된다. 오시마 실종 2년째 되던 날, 일본의 TV와 언론 매체는 이마무라의 영화 촬영팀과 약혼녀인 요시에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디어에서 요시에는 보기 드문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추앙되었고, 어떤 기자는 “단지 찾겠다는 일념으로 이마무라의 촬영에 응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요시에는 이때쯤 이미 변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오랜 추적과정 속에 더 이상 오시마가 아니라 인터뷰어이자 배우인 시게루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이마무라 쇼헤이는 시게루를 불러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미 영화는 목적(요시에의 오시마 찾기)을 잃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관계를 밀어붙이자.” 영화와 현실, 허구와 진실의 경계 < 인간 증발 >은 명백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표방하고 시작된 작품이었다. 오시마 실종이라는 사건, 오시마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요시에의 추적은 모두 사실에 기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영화로 기록하면서 이마무라는 새로운 실험을 덧붙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마무라는 관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사실들을 추적하다 보면 진실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했다. 물론 진실은 있겠지만 여기 세 명(극 중 진실 공방을 벌이는 요시에와 요시에 언니, 그리고 어떤 사건의 목격자인 생선장수)에게 진실은 다 다르게 존재한다. ... 사람 마음은 믿을게 못 된다. 이건 픽션이다. 오시마의 실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일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다. 가공된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중반 이후 관객들은 보이스 오버 방식으로 흘러나오는 영화 촬영팀의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화면은 여전히 오시마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요시에 일행을 제시하고 있지만, 목소리들은 이 영화의 방향에 대해 극영화적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촬영팀이 사건을 왜곡하거나 정황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영화적 포커스를 오시마에서 요시에로 옮겨가며, 요시에 언니를 새로운 사건의 용의자로 제시한다. 막장에 가까운 의혹도 제기한다. 무당의 강신된 목소리가 결정적 계기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무당은 오시마가 이미 죽었으며, 그를 죽인 것은 오시마와 불륜을 저지른 요시에의 언니라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포커스는 요시에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불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생선장수의 진실게임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알려주지 못한다. 화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와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말처럼, 영화는 다 허구이며, 사실의 단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내는 명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언니와 진실공방을 하던 요시에는 목격자인 생선장수를 집으로 불러와 언니와 대면시킨다. 이 세 명은 격한 논쟁을 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때 이마무라 감독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앉게 되고, 답답해진 요시에는 이마무라에게 질문한다. “감독님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이마무라는 큰 목소리로 “세트 준비!”라고 외친다. 이에 누군가의 집일 거라고 간주되었던 방의 벽들이 뜯겨 나간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며 이들을 전경화하는데,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관객은 이들이 실제 공간인 집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에 마련된 방과 집기들, 그리고 조명 장치 및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마무라의 주장. “인간의 마음을 믿을게 못된다~(위에서 언급한 내용)”. 이 작품이 천재적인 것은 단순히 진실 게임을 능란하게 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어느 심리 스릴러 못지않은 치밀함과 긴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시마는 살았는가? 언니는 정말 동생의 약혼자와 불륜을 저질렀나? 요시에는 약혼자를 찾겠다는 건가, 유명해지겠다는 건가? 그뿐 아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60년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TV 다큐멘터리나 독립 다큐멘터리에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파격적인 형식 구조와 실험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증언자와 카메라의 관계, 관객과 사건의 관계 등 모든 것들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 속에서 놀라운 에너지로 결합된다. 이마무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아이디어로 영화의 쇼트를 구성하고 편집하며 사운드를 배치한다. 그리고 그 인공적 가공물은 더 근원적으로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 허구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67년 작인 이마무라의 이러한 파격적 실험은 동시에 유럽의 시네마 베리테나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의 정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시네마 베리테의 인터뷰법은 이 영화에서 얼핏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네마 베리테는 진실을 추동하는 카메라, 무수한 질문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그들은 영화의 진실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그들의 한 계를 이미 간파했다. 증언자들은 신뢰할만한 것인가? 카메라는 과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언자들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구성능력’에 관한 문제였다. 2차원적인 카메라 렌즈가 세상을 프레이밍 하는 순간, 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세계(드라마, 허구)를 구성할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 이창 >, 그리고 고다르의 <경멸> 못지않게 뛰어난 자기 반영적 영화로서, < 인간 증발 >에서 진짜 진실은 오시마의 실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구성능력, 현실과 영화가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오시마나 요시에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요시에 자매와 목격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사건 정황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기록한다. 촬영팀이 장비를 동원해 소란스런 촬영을 시작하고 세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의 증언이 사실이라 우기며 싸우기 시작한다. 여기에 또 다른 관련자들이 모여들고 도시의 구경꾼들이 가세하면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그러자 이마무라는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하다며 중단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하는 마지막 발언. “이 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시마의 실종에 다시금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영화는 픽션이다. 다 사실이 아니다.” 이때 카메라는 공중으로 빠지고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대화 목소리. “끝인가요?” “응 그래. 영화는 끝이지만 현실은 시작이지. 내일 뭐해?” ps. 영화가 개봉하자 여러 논쟁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윤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조작했다는 비난부터, 오시마 및 요시에의 사생활 침해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그러자 역시 강단 있는 이마무라 감독의 응수. “내가 요시에의 시련을 영화 만드는 데 이용한 만큼 요시에도 나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