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부름꾼의 운명
- 감독
- 심온
- 제작년도
- 2010
< 룩백 >(오시야마 키요타카, 2024)은 뒷모습에 관한 영화다.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넣긴 난망한, 60분도 채 되지 않는 애니메이션. 그래서 사사로운 리스트에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이 작품을 되새기며 2024년을 되돌아본다. 2024년 극장가의 침체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생존을 위한 절박함은 때론 예상 밖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2024년 극장가의 뒷모습을 보면 세 가지 두드러진 변화가 눈에 띈다. 우선 암울한 소식부터 꼽자면 공연 실황 영화가 늘었다. 예전에는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웠던 공연 실황이 이제는 정기적인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 잡았다. 이걸 ‘영화’라고 지칭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지만 극장이 중심이 되는 상영 콘텐츠라는 점에서 논의를 피해 갈 수 없는 변화임에는 분명하다. 두 번째는 재개봉 영화들의 정기적인 개봉이다. 신작 위주의 시스템에서 이제 과거 영화들이 개봉 리스트에 걸려 있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 됐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어느덧 극장은 과거의 비디오 숍이나 초창기 OTT 플랫폼을 닮아가는 것 같다. 신작 경쟁에 열을 올리는 건 오히려 OTT 쪽이고 극장은 이제 제작 시기와는 상관없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아카이빙에 일정 부분 자리를 할애한 극장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까지 내몰린 건 신작의 축소와 경쟁력 약화 때문임이 분명하지만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 풍경 자체기 그리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세 가지 풍경은 각각 우려와 가능성 그리고 희망을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희망의 풍경은 작은 영화들의 개봉이다. 다양성의 포용이라 해도 좋겠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본 기억은 20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 4월 이야기 >(이와이 슌지, 1998)를 보고 나왔을 때 주변 반응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짧은 상영시간에 대한 당혹감이 넘쳐 났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당시 극장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에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넉넉히 짐작 가능하다.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애니메이션 <룩백>은 그동안 한국의 극장 환경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증명하는 좋은 척도라 할만하다. 60분 남짓의 소품 같은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빠르게 정식 개봉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제는 <룩백>과 같은 형태의 개봉이 이상한 일이 아닌 상황이 됐다. 지금 극장에는 수요만 있다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허용되는 중이고 <룩백>의 30만 관객 동원은 이렇게 마이너한 작품에 공감하고 호응할 준비가 된 관객층이 이 정도로 두텁다는 걸 증명했다. “등 뒤를 봐” 작품 외적인 부분을 길게 언급할 수밖에 없는 건 <룩백>이 한국에 당도한 시기와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룩백>은 작은 이야기다. 소품이라 불러도 좋겠다. 만화가를 꿈꾸는 두 사람이 만나 이인삼각으로 꿈을 향해 매진하는 이야기. 한 줄의 로그라인으로 정리한다면 전형적인 성장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 설정.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서사가 스며들어 마침내 공감을 자아내는 건 이 작품이 이들의 꿈을 지켜보는 방식 때문이다. 최고의 라이벌이자 동료가 바라보는 꿈의 풍경은 다름 아닌 서로의 등이다. 고개를 처박고 만화를 그리는 자의 뒷모습. 4컷 만화처럼 짧고 간결한 구성의 이 애니메이션은 꿈꾸는 자의 주변 풍경을 되새기며 과정의 무게와 의미를 전달한다. 소품이라 했지만 그 무게와 밀도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당신의 뒷모습이 거울처럼 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쿄모토(좌)와 후지노(우) 시작은 뭐든 적당하다. 학교신문에 실릴 4컷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도 마찬가지다. 곧잘 그리는 그림이 주변의 칭찬을 받고 기대에 부응하듯 4컷 만화를 그린다. 꼭 만화여야 할 이유는 없다.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은 후지노는 그쪽도 가능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 후지노의 적당한 욕구에 불을 부치는 건 또 다른 재능이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 쿄모토가 자신을 대신해 그린 그림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에 후지노는 충격을 받는다. 아마추어라고 무시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아마추어로 느껴지는 쿄모토의 그림을 보며 ‘이 녀석을 이기고 싶다’라는 열망에 휩싸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평범한 이들이 그리는 꿈의 정확한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꿈과 대의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상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큰 방향은 ‘만화’라는 길을 향해 있을 수 있지만 현실로 만드는 한 걸음 한 걸음에는 그때마다 새로운 연료를 필요로 한다. 너를 이기고 싶다는 동기.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는 동력. 욕망이 쌓인 시간은 곧 꿈이 된다. 그렇게 연습에 매진한 후지노의 실력은 향상되지만 라이벌로 여기는 쿄모토의 실력은 더 빠른 속도로 늘어간다. 재능의 벽을 느끼고 만화의 길을 포기하려던 찰나 후지노가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새로운 동력이 제공된다.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쿄모토의 집을 방문한 후지노는 자신보다 훨씬 많은 쿄모코의 연습용 스케치북을 보며 놀란다. 우리는 타인의 과정을 대체로 알지 못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대체로 타인의 결과들이다. 마침내 코모토의 과정을 목격한 후지노는 그와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게다가 자신의 팬이라는 쿄모토의 고백을 듣고 다시금 만화를 그릴 동력을 얻는다. 그리하여 배경을 잘 그리는 쿄모토와 인물을 잘 그리는 후지노는 함께 만화를 향한 이인삼각의 달리기를 시작한다. <룩백>은 꿈의 과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행보를 함께 지켜본다. 그리하여 이들이, 아니 관객이 목격하는 건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이들의 등이다. 후지노는 자신의 등 뒤에서 같은 과정을 공유하는 쿄모토의 등을 보며 의지를 불태운다. 쿄모토 역시 후지노에게 등을 맡기고 기댄다. 상투적인 의미에서의 ‘과정’은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구체화 된다. 과정의 아름다움. 나아가는 힘. 4컷 만화를 닮은 <룩백>은 코모토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반과 후반이 접혀있다. 불행한 죽음을 애도하고 먼저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제작된 이 작품은 남겨진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되묻는다. 미대에 입학한 쿄모토는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괴한에게 살해당한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이 그를 만화로 이끈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자신과 쿄모토가 만나지 않았을 만약의 세계를 상상한다. 서글픈 아이러니는 자책의 순간에도 후지노가 만화적 상상력으로 IF의 세계를 구현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시작은 적당했을지 몰라도 꿈을 향해 걸어왔던 긴 시간은 이미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매진한다는 건 그토록 잔혹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좌절하고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방식을 바꿀 수 없을 때 그것은 곧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삶은 언제나 통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연속이다. 이야기 속 사건은 명확한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지고 집착해봤자 길을 잃을 뿐이다. 후지노는 가상의 상상으로 과거를 수정하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잘 안다. 후지노의 상상은 자책하여 과거를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이유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신기루 같은 과거의 감옥에 갇힌다. 이미 정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후지노의 IF는 그것을 위한 예방주사이며 이야기의 효능이 본래 그러하다. 누구도 미래를 바꿀 수 없다. 오히려 바꿀 수 있는 건 이미 일어난 과거 쪽이다. 과거를 바꾸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화, 이야기, 상상을 통해 의미를 선택할 수 있다. 꿈의 의미. 남겨진 자들의 의미. 지금의 의미. 정정해야겠다. <룩백>은 뒷모습이 아니라 ‘뒤를 보는 모습’에 대한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등이다. 후지노는 내일을 향해 걸음을 떼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이 괴롭고 지난할지라도 다시 한발 한발 걷는다. 이 소박하고 짧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꿈을 향해 매진하는 자의 주변 풍경을, 잊고 있던 과정들을 새삼 다시 마주하며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을 이어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에 잠긴다. 문득 극장을 나서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 공간도 바뀌고 있다. 과거로 멈추지 않고 내일로 이어지기 위해 뭐든 하고 있다. 어떤 영화는 사라지고, 어떤 길은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길이 어디까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어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영화는 멈추지 않고, 극장은 계속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길을 잇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열정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영화산업의 더 추운 겨울이 닥칠 거라는 2025년에는 꿈에 매진하는 과정을 잊지 않도록 영화의 등, 극장의 풍경도 종종 고개 들어 눈에 담아두어야겠다.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씨네21》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가끔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게 무슨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분명 A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정신차려보니 F나 Q정도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 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분명히 뭔가 급작스럽게 커브를 튼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또 이해를 못할 건 아니라서 그렇군. 하면서 따라가게 된다. 이런 경우 애초에 설정이 희한한 경우가 많다. 꽤나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후반부에 이르러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시키려다보니 연결부가 조금 허술하거나 어떤 경우는 아예 그냥 철갑을 두른 듯 뻔뻔하게 진행시키기도 한다. < 고스톱 살인 >은 꽤나 뻔뻔한 영화다. 영화의 홍보문구부터 ‘기상천외한 한국형 판타지스릴러’이니 아무튼 좀 평범하지는 않은 이야기라는 걸 미리 경고하는 중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되는 ‘고스톱 살인’은 도박을 하다가 한 쪽이 돈을 많이 잃어서 뭐 사람을 죽였다. 그런게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었던, 그저 화투를 좋아하고 사랑을 기다리던 한 여자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대충 그렇다)이다. 소싯적부터 도박을 하며 큰 빚을 지고 삼촌이 키우는 말을 돌보며 숨어있는 ‘상’(이승준). 말 농장에는 매주 일요일 미스 정, 안교수(김홍파), 최여사(권남희), 삼촌(송영재) 넷이 모여 화투를 친다. <타짜>처럼 큰돈이 오가는 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두둑한 만원짜리가 오가다 보니 상이도 옆에서 담배 심부름, 커피 심부름을 하며 용돈 벌이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미스 정이 급사해버려 멤버가 3명이 된다. 얼떨결에 미스 정의 자리에 앉게 된 상. 워낙 도박에 재능이 없는 터라 안 그래도 없는 돈을 잃고 괴로워하던 그의 앞에 안교수가 나타나 술을 한 잔 하자고 권한다. 그리고 ‘최여사’에 얽힌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최여사가 게임을 끝내는 판에서 그녀가 가진 패의 숫자 나열이(점수가 아닌 각 화투장이 가지고 있는 숫자들. 예를 들면 똥은 11, 단풍은 10) 주민등록번호의 모양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사망하게 된다는 것. 너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상이는 무시하려고 하지만, 안교수는 그 동안 자신이 기록해왔던 주민등록번호와 해당 인물의 생사여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은 그저 연구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화투판을 조작해 안교수가 지정하는 숫자가 최여사에게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고, 한 번에 100만원을 제시한다. 당연히 믿음은 가지 않지만 돈이 필요했던 상이는 이를 수락하고, 그들은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충격적인 설정이다. 일단 화투로 주민번호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그렇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그럼 이건 한국인 한정으로만 통하는건가? 물론 그런 생각들은 부질없다. ‘데스노트’보면서 그런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에 그런 걸 볼 자격이 없는 것 아니던가. 영화는 이 능력을 안교수와 상이의 복수와 재물욕에 사용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운 부분이었다. 안교수-최여사-상이 3인조 암살단이 신나게 화투를 치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부귀영화, 주지육림, 풀소유... 이런 식으로 폭주했으면 정말 화끈한 B급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영화가 제작되진 못했겠지만.. 능력에 대해 더 알아가면서 죽는 시간을 지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과거로 지정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알아낸다.(주민번호 이후 붙는 화투패의 숫자들로 가능) 이건 데스노트를 능가하는, 초시공적 살인능력인데 문득 드는 상상만 해도 타노스 저리가라 할 가공할 능력임과 동시에 인류의 오점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는 절대 스킬... 이지만 당연히 그런 쪽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복잡하고 힘든 상이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준에서 소박하다면 소박한 마지막 화투판을 벌이게 된다. (물론 능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비해 소박하다는 것이지 상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비극을 되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꾸려고 했던 작은 변수는 의외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참 특이한 설정을 가진 영화다.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싶어 찾아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준권 감독은 ‘고스톱은 가장 일상적인 게임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고, 아주 사소한 것이 큰 부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가 섞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고스톱 살인> 이다. 난 이 영화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가장 중요한 ‘능력’부터 너무 극단적이고, 이후 이 능력의 사용처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 가는 부분도 꽤 엉성해서, 글의 초반에 말한 것처럼 ‘어?’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 뻔뻔함을 더 많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B-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특히 한국 영화에서 갈수록 더 ‘이상한’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진다. 안 만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돈이 안 벌려서 일 것이고, 사람들이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비디오 가게가 흥했던 시절에는 대충 아무 영화나 빌려서 보고 우연히 발견한 꿀잼작에 즐거워하고, 노잼작이 걸리면 에잉.. 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에서 전설의 B급 영화들이 발굴되고 입소문을 통해 후대까지 그 이름을 남기는 일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접하기 말도 안 되게 쉬워진 요즘은 오히려 더 고르는데 신중해지고 블록버스터, A급 영화 아니면 아예 흥미조차 갖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된 듯하다. 비용도 저렴해지고 접근도 쉬워졌는데 왜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일까? 선택지는 다양해졌는데 그 선택이 가리키는 방향은 획일화에 더욱 더 가까우니 알다가도 모를 일. 칼아츠(CalArts,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픽사와 팀버튼을 배출해 유명한 그 학교 맞다.)를 졸업하고 <고스톱 살인>으로 장편 영화 데뷔를 한 김준권 감독은 아직 차기작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런 독특한 상상력을 밀고 가는 스타일을 유지한다면 분명 쉽지는 않은 길이겠지만, 누구나 봉준호가 되고 박찬욱이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김준권 감독의 괴상한 상상력을 매우매우 응원한다. 두 번째 작품을 가지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사족 : 이야기를 정리하다보니 생각보다 복잡해서 다 풀어내면 과한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꽤 있다. ‘고스톱 게임 중 획득한 패가 의미하는 숫자의 나열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는 설정, 꽤 끌리지 않는가?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은 뒤의 이야기들도 제법 재미가 있으니 나른한 주말 오후 맥주 한 잔 하면서 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스톱 살인> 은 왓챠, 티빙,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