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슨가족 시즌11
- 감독
- 스티븐 딘 무어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댄 카스텔라네타, 줄리 카브너, 낸시 카트라이트, 이어들리 스미스, 행크 아자리아, 해리 쉬어러, JACK BURNS, 멜 깁슨, Marcia Wallace, Pamela Hayden, Tress MacNeille, Maggie Roswell, Karl Wiedergott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중 (사진: "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 IMDb)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멀티버스란 컨셉트는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요즘 다시 보고 있는 <릭 앤 모티>(2013~) 시리즈와, 며칠 전 마침내 개봉일과 티저 이미지를 공개한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2027)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 평행우주론/다중우주론을 끌어들여 흥미진진하게 소화한(혹은 그러리라 기대되는) 두 사례를 비슷한 시기에 마주쳐 함께 음미하던 도중에 문득 그럴듯한 상념들이 떠오른 것인데, 하나 이는 단지 질적인 수준에 대한 인상만은 아니었다. 물론 멀티버스 컨셉트의 유행이 불러온, 스케일만 넓어졌을 뿐 지루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실사’ 영화들의 향연이 내게 상당한 불쾌감을 주고 있기는 하다. 특히 < 데드풀과 울버린 >(숀 레비, 2024)처럼 (디즈니가 사들인 지식재산권을 이용하여) 관객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데나 급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신작들은 도저히 참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멀티버스를 끌어들인 ‘실사’ 영화들은 이미 (배우의 존재나 문화사적 기호들이 자연스레 추동하는) 추억의 인력에 끔찍한 모양새로 잠식된 것은 아닐까? 그에 비하면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로 막을 내릴)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시리즈(Spider-Verse Animation Flim Series, 2018~)는 스파이더맨에 대한 추억을 자극하면서도 거기에 마냥 기대지 않고 (스파이더맨 파생 캐릭터들의 상이함을 유머러스하게 전면화하는 등) 창의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재밌는 기획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재밌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2010)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너에게> & <너를 사랑했던 한 사람의 나에게>(2022)처럼 평행우주를 직접적으로 내세우는 경우만이 아니라 여타의 애니메이션들도 멀티버스의 성질에 대해 묘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예컨대 <릭 앤 모티> 시즌5 2화 “Mortyplicity”에서 무수한 ‘미끼’ 가족들이 쉴 새 없이 죽고 새로 나타나길 반복하다 종국에 다 함께 서로를 찢고 베고 터트려 죽이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야, 이거 좀 <톰과 제리>(1940~) 같네’라고 문득 생각했다. 어떤 에피소드에선 죽은 듯이 묘사되거나(“The Yankee Doodle Mouse”) 정말로 죽는(“Mouse Trouble”) 톰이 다른 에피소드에선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제리와 마찰을 계속 일으키는 식의 픽션적 허용이 여기서 멀티버스적 설정을 경유하여 서사적으로, 또 폭력적으로 소화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Mortyplicity”는 멀티버스 컨셉트를 직접 끌어들이진 않았다고 반론을 제기할 독자도 있겠다. 그러나 저 무수한 ‘미끼’ 가족들이 모두 서로 마주치지 않은 채 한 우주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비약적인 극적 설정에서 멀티버스를 떠올리지 않기란 무리일 터이다) <릭 앤 모티>(2013) 중 / <톰과 제리(Mouse Trouble)>(1944) 중 (사진: 좌 , 우 _IMDb) 당연하게도 이런 픽션적 허용은 <톰과 제리>만의 것이 아니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팬덤에서 ‘사자에상 시공’이란 용어가 뿌리 깊게 박혀있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나 통신 기기의 변화는 묘사하되 캐릭터의 나이처럼 작품의 정체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는 묘사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우직하게 지속하는 경향을 우리는 여러 초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번번이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게게의 키타로>(1968~), < 심슨 가족 >(1989~), <크레용 신짱>(1992~), <명탐정 코난>(1996~), <네모바지 스폰지밥>(1999~)… (이에 더해 본편에 대한 평행우주로 ‘일단’ 취급되곤 하는 극장판까지 셈해보자) 계속해서 ‘갈아 치워지는’ 타겟 시청자층과, (성우의 노화, 그림체의 변화, 해상도 포맷의 변화 등을 제외한다면) 영구적으로 같은 외양의 극적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는 표현성 등 애니메이션 특유의 문제계가 여기에 큰 몫을 한다. 이런 경향은 누적된 에피소드들 사이에 중대한 모순을 야기하면서 절대 해소하지는 않기 때문에 종종 몹시 기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한때 국내에서 유행했던 ‘짱구 자폐증 괴담’은 이런 기묘함을 음모론으로 확장한 결과였을 게다), 이 느낌은 멀티버스를 직면할 때의 (가정된) 당혹감과 어느 정도 유사할 것이다. 컨셉트로서 멀티버스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친연성은 좀 더 있다. 스파이더맨을 구심점 삼은 멀티버스 영화들인 ‘실사’ <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존 왓츠, 2022)과 애니메이션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호아킴 도스 산토스 외 2인, 2023)를 비교해보면 확실해지는데, 전자에 (지금껏 실사 영화화된)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적어도 외양에 있어선) 이물감 없이 매끄럽게 등장하는 반면 후자에는 (코믹스에만 등장했던 이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스파이더맨과 그들 각자의 우주가 (그웬의 우주에서 배경이 물감 텍스쳐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서로에 대한 이물감을 드러낸 채로 제시 및 교차된다. 멀티버스가 단지 ‘여기가 아닌 우주들’이 아니라 ‘여기와 다른 우주들’을 지시하는 낱말임을 떠올린다면, ‘실제적인 것’을 충족해야 하는 제약이 상대적으로 덜 해 상이한 질감의 캐릭터와 사물이 하나의 장면/작품에서 불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기에 수월한 장(場)인 후자의 애니메이션이, 멀티버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친연성을 갖는다 해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예컨대 2D 애니메이션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기괴하게 공존시킨 < 내 주머니 속의 돌들 >(시그네 바우만, 2014)은 명시적으론 멀티버스와 어떤 관계도 없으나, 서로 다른 질감의 존재들을 병립시키고 나아가 충돌시켜 이따금 (그 질감이 지시하는) 우주들의 경계가 뒤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상)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중 세 명의 스파이더맨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중 물감 텍스쳐로 나타난 그웬과 그의 아버지 (사진: 좌 , 우 _IMDb) (하) 2D와 스톱 모션의 연출이 공존하는 <내 주머니 속의 돌들> (사진: " ROCKS IN MY POCKET Official Trailer ", 유튜브 Signe Baumane) 하지만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멀티버스가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린다고 해서 ‘실사’ 멀티버스 영화가 무용하다고까지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데이빗 린치, 페드로 코스타, 홍상수 , 웨스 앤더슨,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같은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은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의식하진 않았더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멀티버스적인 존재론적 혼란을 강렬하게 육화하지 않았던가? 친연성과 탁월함은 통일된 개념이 아니다. 다만 이 자리에선 이런 친연성이 컨셉트로서 멀티버스에 대한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으로 향할 수 있음을 논하고자 하였다. 그 점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팝 팀 에픽> 1기(2018)이다. 동일한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성우들이 상이한 연기(여기에는 호흡은 물론 대사 애드리브도 포함되어 있다)를 펼친 후 이를 본방송과 재방송 구도로 함께 뻔뻔하게 제시한, 방법론의 차원에서 은근하고도 흥미진진하게 멀티버스를 소화했던 이 애니메이션은 갑작스레 마지막 화에서 (시간 여행 설정을 통해) 멀티버스를 가시적으로 끌어들인다. 작품의 방법론이 지닌 힘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작품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조바심의 발로였을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논한 애니메이션의 친연성/잠재력이 <팝 팀 에픽>에서 과도할 정도로 ‘잘’ 양식화되었다는 사실뿐이다. <팝 팀 에픽>(2018) 중 (사진: " Poputepipikku ", IMDb)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등이 있다.
아무래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영화사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와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계 영화사에서 이 두 개의 발명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또 하나의 발명을 뒤이어 소개할 것이다) 고유한 순간들. 그런 다음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확장되어나간 기호들. 먼저 첫 번째 발명에 대해서 말하겠다. 파이 던지기. 영어로는 ‘Pie Fight(파이 난투극)’ 하나의 용어가 된 광경. 아마도 영화에서 상대방의 얼굴에 파이를 집어 던지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면 항의의 의미로 정치인, 혹은 누군가에게 연설의 순간에 그를 향해서 집어던지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변형이랄 수 있는 계란 던지기가 있다. 파이 던지기의 장면들은 이제 하나의 영화사가 될 만큼의 역사가 되었다. 영화에서 파이를 가장 먼저 던진 사람은 맥 세네트였다. 그때 키스톤 스튜디오에서 그걸 유심히 보던 사람이 있었다. 찰리 채플린. 아마도 키스톤 스튜디오는 채플린에게 영화 학교였을 것이다. 맥 세네트의 영화에서 먼저 던졌지만 그는 이것만으로 하나의 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채플린은 1916년에 9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주연을 했다. 그 중 상영시간 23분의 <촬영 현장에서(Behind the Screen)> 속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파이던지기로 장식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촬영 현장에 소품을 옮기는 일을 하는 찰리는 미숙한 실수와 악당 소품 팀장의 구박으로 온갖 실수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서부극 영화 촬영 현장에서 찰리와 무대 팀장은 대역으로 서로에게 생크림 파이를 집어던지는 연기를 하게 된다. 그때 마침 옆 스튜디오에서는 17세기 프랑스 사극을 촬영 중이었고, 바깥에서는 해고당한 무대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와서 모두 날려버릴 참이었다. 찰리와 무대 팀장은 32개의 파이를 서로 주고받는데 (아마 촬영에는 더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파이가 옆 현장까지 날아가 왕과 왕비와 주교도 파이를 뒤집어쓰고 마지막에는 촬영 현장이 폭발된다. 관객들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도 이 파이장면을 보기 위해 <촬영 현장에서>를 다시 보러 왔다. 생크림 파이. 맛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손에 묻히기를 원치 않는 끈적거리는 축축함.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기 모습으로부터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액체 직전의 표면장력. 그걸 집어던져서 상대의 얼굴과 옷을 망쳐놓는 무례한 퍼포먼스. 여기저기서 파이 던지기를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찰리 채플린은 그런 다음 이 영화 이후 파이 던지기 난투극에 관심을 잃었다. 파이 던지기를 스펙터클로 만든 것은 ‘뚱뚱이와 홀쭉이’ 컴비로 더 유명한 (스탠) 로렐과 (올리버) 하디의 <세기의 전투>(1927년)에서 였다. 여기서 파이 난투극이 시작되자 3,000개의 크림 파이를 서로 집어던졌다. 이때 파이 던지기는 영화의 문법에서 완전히 과잉하는 소비의 그로테스크한 익살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집어던지는 장면과 상대방이 맞는 장면은 한 쇼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둘을 나눠찍는 순간 하나의 파이를 던져서 상대방이 맞는 장면을 찍을 때 언제나 현장에는 두 개의 파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던진 파이는 두 번 쓸 수 없다. 이건 낭비의 퍼포먼스이다. 정식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파이 던지기를 보면서 느껴보는 통쾌한 기쁨은 상대방에 대한 가학적 조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크림 파이를 뒤집어 쓴 모습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스펙터클, 아마도 그것이 정치적 퍼포먼스의 목표일 것이다) 오로지 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낭비라고 할 수밖에 없는 퍼포먼스의 순간에 가져보는 일시적인 카니발의 향연의 이미지에의 과소비일 것이다. 토키 영화가 시작하자 여기에 집어던지고 난투극이 벌어지는 상황을 더 실감나게 연출하기 시작했다. ‘파이 난투극’의 영화적 형식은 ‘세 얼간이(Three Stooges)’가 등장하는 <달콤한 파이, 파이>(1941년)에서 거의 완성되었다. 파이의 개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5분 30초 동안 레스토랑의 신사숙녀들이 서로에게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쉬지 않고 집어던진다. 이때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던지는 파이가 아니라 그걸 맞는 순간 상대방의 얼굴에서 나는 철썩! 하는 끈적거리는 크림 액체의 사운드 효과이며 마치 스크린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만든다. 물론 그런 다음에도 영화에서 계속해서 파이를 던졌다. 브레이크 에드워즈의 <그레이트 레이스>(1965년)에서는 마치 기록을 세우듯이 4,000개의 파이와 엄청나게 커다란 파이를 상대방에서 집어던지는 씬이 등장한다. 이 목록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은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어찌하여 나는 걱정을 그만두고 수소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의 파이 던지기일 것이다. 여기서 큐브릭은 원폭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인류의 마지막 날에 어울리는 향연을 보여준다. 나는 한정 없이 파이 던지기의 목록을 늘어놓고 싶지만 여기서 참아야 할 것 같다. 다만 두 편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첨언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톰과 제리’이고 다른 하나는 ‘심슨 가족’이다. 약간 흥분하면서 말하자면 파이 던지기를 보는 순간 내가 지금 영화를 보는구나, 라고 감격하게 된다. 파이 난투극은 영화라는 향연에 초대받았음을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