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 I. 이원론/심신 II. 일원론
- 감독
- 임정서
- 제작년도
- 2015
“한국영화의 얼굴들”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재개하게 됐다. 이 연재에선 한국영화에서 얼굴이 된 클로즈업(close-up) 쇼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된 인간의 얼굴뿐 아니라 동물, 사물, 풍경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응시(gaze)를 돌려주며 기어이 얼굴이 되는 클로즈업까지 포괄하려 한다. 클로즈업은 영화사 초기부터 어떤 다른 영화 쇼트보다도 영화이론가들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클로즈업은 이전의 시각매체가 보여준 적 없는 시점과 크기를 표현하면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평가되곤 했다. 영화학자 매리 앤 도앤은 이러한 매혹에 대해 클로즈업이 양가적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클로즈업은 근접성, 내밀함, 디테일, 부분, 정서, 인칭화된 시점, 닮음, 연속성, 인간화, 주체화, 의미작용의 집중화 공간이면서, 반대로 거대함, 외부성, 총체성, 디제시스로부터의 자율성, 비례에 맞지 않음, 노출, 탈인칭화된 응시, 낯선 기이함, 불연속성, 비인간화, 객체화, 의미화 할 수 없는 잔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콘으로서의 스타를 표현하는 주된 기법이자 높은 주목도 때문에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상품-물신이 될 수 있는 반면, 압도와 경외감을 일으키는 낯선 타자로서 탈약호화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 국가의 탄생 >(1915)의 미국감독 D.W. 그리피스와 < 전함 포템킨 >(1925)의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은 두 대립된 관점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그리피스는 친밀감과 정서적 집중을 활용해 멜로드라마적 순간과 영화스타를 창조했고, “롱 쇼트의 코끼리떼보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더 무섭게 보인다.”고 피력했던 에이젠쉬쩨인은 일상을 넘어선 낯선 충격으로 계급화된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깃발을 들게 만들었다. 이 연재는 클로즈업의 양가성 중 어느 한쪽을 옹호하기 보다는 이 대립된 잠재성이 교차하면서 혼란과 붕괴를 야기하고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들 속에서 영화적 응시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더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보다는 휴대가능한 스몰 스크린이 지배적인 상영 플랫폼으로 부상하면서 영화의 개념과 범주가 달라지는 가운데 위에 언급한 클로즈업의 잠재성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로 다룰 클로즈업은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 >(1991, 이하 <이태원 밤하늘>)의 마지막 쇼트로, 샤니라는 인물의 얼굴이다. <이태원 밤하늘>은 < 고교우량아 >(1977), < 깊은 밤 갑자기 >(1981), < 장군의 아들 >(1990) 등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삼육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태원으로 오게 된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린다. 여기서 이태원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받아주는 포용적 공간이자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적 공간이다. 미군에게 성판매를 하는 기지촌 클럽의 ‘양공주’, 클럽댄서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들, 조직폭력배들, 미군과 ‘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가진 것 없지만 기성세대에 질린 젊은 청춘들이 그곳에 산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 마지막 순간에 도청을 탈출해 동두천 기지촌으로 숨어든 대학생이 민중의 삶을 지척에서 경험하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가 취했던 반제국주의 관점과 1980년대 상업영화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절묘하게 섞는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씬은 “미국 UPI 영화 직배저지투쟁에 앞장서온 모든 영화인에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당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1988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되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지는 가운데 한국영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투쟁이 영화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국영화 위기’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 민족-국가 및 이성애중심의 ‘정상’가족 위기와 남성성 재건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샤니가 있다. 다수의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클럽댄서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레즈비언으로서 애인 금자(임주연)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샤니는 마지막까지 영화의 주제를 운반하는 동시에 비트는 인물이다. <이태원 밤하늘>이 제작된 시기는 사회 진보운동이 통일, 계급, 민주화 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확장되어가던 시기였다. 현실과 스크린 모두에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은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민중 또는 시민으로 소환되기 시작한다. 일부 용어나 관점이 문제적이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제도적 문제들을 인권적 관점에서 조명했던 <PD수첩>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들-‘게이’들의 삶」(1995.5.9.)이라는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 개 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는 가정폭력에 항의하며 옥상에 올라가게 된 여성들 중 트랜스젠더를 포함시켜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에서 지정받은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한다고 인지하는 사람) 중심의 여성범주를 해체했으며, <이태원 밤하늘>과 < 마스카라 >(이훈, 1994)는 트랜스젠더 여성 캐릭터에 각각 오윤희와 하지나라는 트랜스젠더 당사자 배우를 캐스팅했다. 샤니는 애인 금자의 만류에도 둘의 미래를 위해 미군을 상대로 성판매를 한다. 그러던 중 금자가 샤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래전부터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호르몬치료를 받아온 샤니는 금자의 임신을 믿을 수 없다. 금자의 임신은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선배는 호르몬 치료에도 불구하고 간혹 “어떤 자극에 의해” “죽어있던 남성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 자극이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민족-국가의 미래가 있으려면 반드시 이성애 부부에 의한 생물학적 친자가 있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암시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샤니가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달라는 금자의 청을 거절하자, 금자는 홀로 자신의 시골 고향집으로 떠난다. 결국 샤니는 고민 끝에 남장을 하고 금자를 만나러가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이 영화에는 샤니와 금자 외에도 아이가 있는 또 다른 대안 가족이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클럽의 다른 ‘양공주’ 여성들과 달리 젊은 커플인 유진(최진영)과 상희(전세영)는 동생을 학대하는 엄마와 청년들을 착취하는 조폭 두목 아버지 장포 모두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이 셋은 “대안을 찾아 떠나겠다”는 분명한 선언에도 친자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국가를 맡길 수 있는 이상적 가족으로 선택되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샤니에게서 제국인 미국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미래 서사를 찾는다. 트랜스젠더인 샤니를 강제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재성전환 하는 혹은 드랙킹(drag king) 수행을 하게 만드는 과정은 ‘식민화되고 여성화되었던’ 민족-국가의 재건/재남성화로 은유화 된다. 이성애 부모와 친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로 맺어진 규범적 가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산부인과 의사의 증언처럼 죽은 줄 알았던 민족적 자존심인 ‘남성’이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샤니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분법적 대립과 위계화가 형성된다. ‘근대/도시/여성/비규범적 트랜스젠더 신체/동성애/(탈)식민화된 공간/오염/헤테로토피아’인 이태원과 ‘전근대/자연/남성/규범적 시스젠더 신체/이성애/주권적 민족-국가/순수/유토피아’인 고향으로 이원화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성장서사처럼 진행된다. 샤니는 심신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자르고, 깨진 거울을 응시하고, 양복을 입으며 남장을 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사각앵글로 이뤄진 짧은 쇼트들이 몽타주씬으로 구성되며 그야말로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엄청난 폭력과 고통을 가시화한다. 이것은 단순히 샤니에게 보존되어 있던 남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의 강제된 (재)성전환이자 강압적인 이성애로의 교정이다. 또한 거칠게 이어 붙어진 몽타주는 그 자체로 프랑켄슈타인의 몸처럼 남성성의 편집이 된다. 남성성이 편집된 자국과 인공성은 사라지지 않고 드랙킹 공연처럼 샤니 혹은 오윤희 배우의 신체의 표면에서 이질적으로 겉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몽타주씬 이후 쓸쓸하고 황폐해 보이는 이태원 낮의 거리를 걷던 중 샤니는 남자 행인에게 부딪혀 욕을 먹는다. 남자는 “야 임마! 똑바로 보고 다녀, 이새끼야!”라고 소리친다. 순간 샤니는 자신이 남성으로 패싱(passing,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겉보기 성별)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샤니는 옅은 미소를 띤다. 이중의 성전환 속에서 분명히 정체성과 존재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고통을 겪지만 또한 그녀의 (재)성전환 혹은 드랙이 제대로 통했다는 복잡한 트랜스젠더의 쾌감을 보여준다. 품이 커서 어색해 보이는 남자 양복을 입은 샤니는 산으로 둘러싸인 금자의 시골 고향에 도착한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비교되는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풍경 속에서 놓인 샤니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뒤쫓는다. 금자는 전통적인 초가집 가옥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금자의 신체는 샤니가 트랜스 여성으로서 동일시하는 여성 신체인 동시에 레즈비언으로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원초적으로 보이는 그 젖가슴은 오직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인 재생산만을 위해 거리를 두고 타자화해야 할 자연적 신체로 묘사된다. 재생산이 가능한 모성성으로 환원된 시스젠더 여성의 신체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근접할 수 없는 원본의 환상을 만든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신체화된 금자와 대비되게 카메라는 역쇼트로 손을 허리에 얹고 우뚝 서며 역광을 받고 있는 샤니를 로우앵글을 시각화하며 남성성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로우앵글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잡힌 샤니 얼굴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고 전통음악이 깔린다. 샤니의 얼굴은 모성적 자연 풍경에 빨려 들어가며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이자 남성적 민족-국가의 얼굴로 이론의 여지없이 알레고리화 된다. 여기서 샤니의 여성 정체성과 퀴어한 섹슈얼리티는 폭력적으로 부정되고 제거되며 남장을 한 샤니는 한국영화와 민족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구원해내고 동질화하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의미화 되지 않는 잔여가 남는다. 줌인 클로즈업의 순간 샤니의 얼굴에는 찡그린 미소가 각인된다. 이 미소는 다시 줌아웃하며 풍경 속에 작게 남아있게 되는 샤니와 독립되어 부유한다. 샤니/오윤희 배우의 얼굴은 산으로 병풍 쳐진 자연, 즉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뜯겨져 나와 자율성을 갖는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 미소는 샤니가 남장을 하고 패싱된 후 짓는 미소, 오윤희 배우가 느끼는 잘 수행된 드랙킹의 쾌락, 그리고 여성성을 지워내고 남성성을 인공적으로 편집하는 쇼트들의 봉합솔기와 겹쳐진다. 그 미소는 감독이 설정한 엔딩씬의 샤니 캐릭터를 떠나와 이물감을 느끼고 있는 오윤희 배우의 트랜스젠더 신체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찡그린 미소는 가부장적 민족-국가의 시스젠더 응시 아래 억눌리지만 곧 슬며시 고개를 들며 벌어진 봉합 솔기를 비집고 되돌아오고 마는 트랜스젠더의 응시로 전치된다. 누구의 모습과 수행으로, 어떤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로, 어떤 마음으로 짓는 미소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얼굴이 레이어된 마지막 클로즈업은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욕망과 끊임없이 오염되고 변용되며 이질적인 장소로서의 트랜스 신체성이 교차하는 마디점(nodal point)이자 영화적 응시가 된다. * 샤니의 남장 혹은 재남성화를 드랙킹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김일란 감독과의 대화중에 나온 것임을 밝힌다.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의 해석은 필자의 논문 「헤테로토피아 공간과 트랜스젠더 여성 재현-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중심으로」(『한민족문화연구』, 2023.3)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KMDb 칼럼 연재 제안에 ‘한국 여성영화의 정동들’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건 < 아워 바디 > 때문이었다. <아워 바디>는 어떤 감정이나 의미로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 인물의 행동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내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꾸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을 연이어 덧붙이게 했다. <아워 바디>는 심신의 소진에 대해 말하는 가하면 함께 달리는 움직임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넘쳐나는 몸들을 전면화하고, 관습적인 이성애 섹스를 스크린에 반복 재현해 가시화하면서도 영화 전체는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관통한다. <아워 바디>는 영화와 관람자인 ‘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공간에서 영향을 미치며 형질전환을 감행한다. 정동(affect)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 힘들, 즉 정서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에 부여하는 이름이다(<정동이론> 14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워 바디>는 스크린의 정동 개념을 적용하기에 적당한 사례로 보인다. 대학졸업 후 서른 살이 넘도록 좁은 방에 갇혀 고시에만 매달려온 자영(최희서)은 더 이상 공부도 시험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온 심신은 목표가 사라지자 갈 곳을 잃는다. 그야말로 소진(burn-out)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아워 바디>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소진은 마음과 몸,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소멸시킨다. 어떤 정해진 그릇이 있어 그 안의 내용물이 비워지고 다시 채우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소진된 자영은 아예 존재의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소생시키기 위해 자영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자영은 생동감과 활기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현주(안지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딛는 발바닥, 전진하는 다리,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팔, 현주를 뒤쫓는 눈, 그리고 현주의 기를 받는 내장감각까지 그렇게 자영의 심신은 하나 둘 다시 생성된다. 영화는 분절된 신체의 클로즈업과 그 부분-신체들을 쫓는 주관적 시점들을 통해 존재 감각이 통일된 전체의 방식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생성됨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각기 자기 용도를 처음 발견한 부분-신체들이다. 고시공부가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몸을 인지하고 이질적인 에너지를 가진 타인과 조우하며 자영도 소진된 심신을 다시 만들어 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워 바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복잡한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자영이 소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영의 심신이 단일한 목표만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목표가 사라지면 그에 종속된 심신도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목표마저 자기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자에 의해 주입된 욕망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엄마와 전 애인은 ‘사람구실’이라는 말로 그녀의 욕망을 가두려 한다. 정규직 혹은 공무원 같은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는 이들은 의미를 갖지 못하고 실패로 낙인찍히며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영화는 소진되지 않는 존재로 자영을 변신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방향을 튼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영 옆으로 나체인 현주가 눕는다. 균형이 잘 잡힌 현주의 탄탄한 뒷모습이 흡사 외계생물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현주는 사라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외계인이 지구침공을 위해 지구인의 마음과 신체에 침투해 구분불가능한 이질적인 신체들이 하나의 존재에 공존하게 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SF 호러를 연상시킨다. 자영은 현주를 삼킨 것일까, 현주가 자영을 차지한 것일까? 아니면 둘의 공존인가? 현주는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氣)’를 빨아먹으며 따라오라고 말한다. 함께 달리기에서 그녀들은 서로의 에너지와 리듬을 나누고, 신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들’이 구분되지 않는 체험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아워 바디(our body)’가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관습적인 성기 중심의 이성애 섹스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하고도 에로틱한 퀴어한 섹스 장면일 수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섹스 장면처럼 말이다. 만약 <아워 바디>에 이성애 섹스 장면들만 가시화 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퀴어 에로틱한 순간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순간을 통해 자영은 하나의 존재에 다양한 욕망과 미결정된 (비)의미를 품는 다양체가 된다. 이후 영화 후반부에서 자영은 ‘자기 몸에 도취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와 자고 싶다던’ 현주의 은밀한 욕망을 실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던 인턴과 정규직 되기도 시도해본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들을 실험하고 수행하며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동일한 행위라도 수행하는 주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의미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구분불가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존재는 고정된 약호들 이상이다. 결국 자영은 현주의 질문을 경유해 끌어낸 자기의 성적 욕망을 실천한다. 고급 호텔에서 어떤 의미나 목표도 두지 않고 혼자 자위를 즐기는 자영은 이미 혼자가 아니며 둘 이상이다. 다양체로서의 자영은 고정된 범주와 이분법을 해체하며, ‘아워 바디’로서의 강도를 발견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나도 힘들다.” 그 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괴로움이 일상화된 요즘이다. 여기저기 생존의 절박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노라면 존엄한 밥벌이 앞에 자존심 따위 내려놓은 지 이미 오래 인 것 같다. 기러기 아빠, 사오정, 팔팔 세대란 말을 들으며 팍팍한 세상사를 걱정했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어느새 절망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 청년 실신, 오포 세대 등등 새로운 낙담을 표현하기 바쁘다. 그래서 피로하다. 한때 유행했던 ‘피로 사회’라는 표현이 공감되는 건 삶이 피로해서가 아니다. 피로한 삶을 나타내는 이 같은 용어들이 너무 많아져 이제는 ‘지옥 같다’는 말조차 일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 와중에 이용선 감독의 < 화장실 콩쿨 >은 조금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기러기 아빠와 권고 퇴직의 이야기는, 그때는 충격적이었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버린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옥에 비유되며 불행을 나눠서 져야 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에 비춰보면 조기 유학은 어쩌면 속 편한 소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화장실 콩쿨>은 곱씹을수록 더 예뻐 보이는 작품이다. 기러기 아빠 상민은 만성 변비에 시달리고 있다. 스트레스성이라지만 나아질 기미는 없다. 딸의 미래를 위해 아내와 함께 해외 유학을 보낸 지도 벌써 3년, 심신은 지쳐가고 외로움은 쌓여간다. 그러던 어느 날 상민은 회사로부터 권고사직 통지를 받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조르고, 아내는 잠시 귀국하겠다는 약속을 번번이 미룬 채 유학을 연장하자고 한다. 몰릴 때까지 몰린 상민은 딸의 한 마디에 용기를 내고 권고사직을 되돌리고자 잠적한 본부장을 찾아 나선다. 30분 남짓한 시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 익숙하다. 사실 시대를 반영하는 소재일수록 식상해지기 쉽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시의성을 놓칠 수 있고 이미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된 소재일 확률도 높다. < 화장실 콩쿨 >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여전히 유효하지만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고,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마주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이 작품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화장실 콩쿨>이 곱씹을수록 예뻐 보이는 건 닳고 닳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적절한 비판이나 시대성의 반영, 다시 말해 소재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작품 저변에 깔린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 더 진하게 두드러진다. 기러기 아빠로서의 피로감, 짊어져야 하는 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는 이유 등이 꽤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용선 감독의 이전 작품에 비해 훨씬 장르적이고 서사적이다. 일견 장르적이라고 하면 틀에 박힌 구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 화장실 콩쿨 >은 익숙한 듯 새로운 재치가 있다. 변비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바이올린을 배우는 딸, 두 부녀의 접점은 화장실에서 울려 퍼지는 클래식 선율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건 그 유머감각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유머 감각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데, 불륜에 빠진 본부장, 시크하지만 따뜻한 참견쟁이 친구, 철없는 인턴사원 등 장편으로 늘려도 손색이 없을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가득하다. 이들이 벌이는 각기 다른 톤의 사건들은 마치 한 곡의 콩쿨 음악처럼 재치 있는 구성으로 보는 이의 마음마저 다독인다. < 화장실 콩쿨 >은 괜찮다고, 모두가 힘들다고 어깨를 두드리는 식상한 위로가 아니다. 팍팍한 일상의 피로마저 털어버릴 수 있을 자존감 있는, 시대를 향한 농담이다. 이용선 감독 특유의 따뜻한 작화가 이 같은 위로에 한 몫 단단히 하는 건 물론이지만, 그 밑에 깔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따스하다. 2010년 < Alone >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후, <기억하려하다>(2011) <거대한 태양이 다가온다>(2014) 등 단편을 통해 일상 속 공감과 애니메이션의 환상성의 접점을 모색해왔던 이용선 감독의 진일보한 한 걸음이 느껴진다. <화장실 콩쿨>은 인디애니페스트 2015에서 독립보행상, 관객상, 관객심사단상을 받았다. 관객들의 압도적인 지지에서 알 수 있듯 오늘도 팍팍한 일상을 버티는 우리를 위한 달큰한 오아시스 같은 작품이다. 일상에 치이고 힘들어도 다음 걸음을 디딜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