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밤 심야극장
- 감독
- 장윤, 안소희, 이채담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이전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박: 애니메이션영화제 했었을 때, 아까 <에반게리온> 얘기했었지만. <에반게리온>이나 < 공각기동대 >, 뭐뭐 < 에스카플로네 > 이런 거 했었거든요. 근데 잘 됐었어요. [1] 해당 구술채록문을 읽다 보면, “아까 <에반게리온> 얘기했었지만”이라는 말에서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이 나오기 이전까지 구술에서 단 한 번도 <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안노 히데야키, 1995)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아까 한 이야기’는 인터뷰 사이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구술담당자로서 인터뷰에 참관하면서 구술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이렇게 쉬는 시간에 살짝 물어보곤 한다. 그리고 당시 구술자에게 <에반게리온>에 대해 물어본 것은, 내가 에바팬이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천천히 풀어갈 것이다. 닫힌 영화, 열린 영화제 사실 광주 ‘ 영화로 세상보기 ’ 운영자였던 박상백 구술(2024년 10월 17일 진행) 이전에 그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황: 일본영화 같은 경우는, 사실은 광주 기획을 좀 본따고 그랬는데.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그때 돈을 막 많이 벌었더라고요. 한: 재패니메이션으로? 황: 그래서 액정도 바꾸고. 이게 그때 ‘소년 탐정’인가? <에반게리온> 시리즈. 저는 뭐 내용도 아직도 모르는데, ‘야, 저런 매니아층이 또 있구나.’ 그래서. 저희도 해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이 꽤 오더라고요. [2] 대전 ‘ 씨네마떼끄 컬트 ’의 운영자였던 황규석 (2024년 6월 29일 인터뷰 진행)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에반게리온> 상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사실보다도 ‘저런 매니아층이 있다’라는 깨달음에 있었다. 이러한 관객층을 지금의 관점에서 그냥 ‘오타쿠(オタク)’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이 등장했던 시기만 해도, 국내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인식도 없었고, 특정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지지층의 활동이 눈에 띄지도 않았었다(존재는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구술자가 이들을 ‘저런 매니아층’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어느 정도 오늘날 재패니메이션 ‘오타쿠’에 대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느낌도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후적인 인식을 제외하더라도 평소 이상의 어떤 관객층들이 <에반게리온> 상영 당시 몰려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누구이고 왜 여기 왔을까? 정: 제 세대뿐만 아니라 바로 윗세대들도, 제 바로 다음 세대들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어요.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 일본영화. … 유학을 가지 않으면 그건 접할 수가 없는 거니까. 사실은 프랑스영화・독일영화에 대한 갈증보다 일본영화에 대한 갈증이 훨씬 컸어요. [3] 한: 혹시 그런 건 없었나요? 선호하는 영화 통계 같은 거. 조: 있었죠. 한: 아, 있었어요? 조: 네. 일본영화, 뭐 (사이) 제일 많이 봤던 영화가 아마 < 러브레터 >. 수입되기 전에. 그리고 피터 잭슨 < 데드 얼라이브 >, < 천상의 피조물 > 이런 게 공식적으로 소개 안 됐었거든요? … 되게 압도적으로 피터 잭슨 영화하고 일본영화하고 미국의 인디영화들, 이런 영화들이 사람이 많이 왔었어요. [4] 영화평론가 정성일 과 1990년대 문화학교 서울 의 운영자로 일했던 조영각 은 당시 시네마테크를 찾아오는 관객들은 근본적으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에 한국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프랑스영화, 독일영화, 미국의 인디영화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지만, 이 영화들이 수입자유화와 함께 쏟아지는 미국영화들 속에서 틈새를 찾아 소규모의 예술영화전용관들을 채울 때조차도 들어오지 못했던, 원천적으로 수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일본영화,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문화적・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시네마테크의 운영자들의 근원적인 고민 역시 있었다. 시네마테크를 찾는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한국사회로부터 ‘닫힌 영화’들 이기 때문에, 이들의 자료 확보와 상영 활동은 불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러브레터>는 처음에 어느 쪽에서 구하셨어요? 곽: (목소리를 낮춰서) 어디서 구했을까요? 어디서 구했을까. [5]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 조: 영화를 보려면 무조건 회원가입을 해야 돼요. 그게 저희 문턱이었고. 저희는 그렇게 운영해야지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실 불법이잖아요. 비디오를, 영화를 트는 게 심의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도 저작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회원제라는 규정을 만든 거고. … 그런 규칙들이 있어서 내부 결속력은 되게 탄탄했던 반면에 다른 데서 보기에는 “좀 폐쇄적이다” 이런 얘기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6] ‘회원제로 운영되는 폐쇄적 시네마테크를 통해 극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본다’라는 것이 어쩌면 ‘특권’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음지화된 공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들어온 작품을 보고 있다는 사실, 즉 ‘ 모두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 ’라는 비밀(?)은 시네마테크를 찾는 관객들의 소속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이들의 응집력을 높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 통신전용망을 이용해 취미와 관심이 같은 사람 또는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토론을 벌이는 개인용 컴퓨터 통신동호회들이 많이 결성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동호회 회원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특정 주제에 대하여 온라인 토론을 벌이는 외에도 전자게시판 기능을 이용, 알리고 싶은 소식을 회원 모두에게 공개하거나 공동 자료실을 만들어 쓰고 있다. - “PC통신 동호인 모임 활발”, 《한겨레》 1990. 8. 14. 8면 기사 “이 영화가 < 미져리 >보다 무섭다는 ‘ PC통신 ’을 보셨습니까?” (《조선일보》 1994. 6. 10. 18면 광고) 1990년대 초 PC통신 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도입되면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사실 이 새로운 공간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정보를 준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김: ‘이제 그런 영화들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어떤 각인? 취향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 팬과 마니아라는 거에 대한 나의 소속감 ? 그게 굉장히 컸던 거 같아요. [7] 이 온라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영퀴’를 풀면서 소속감을 다져갔다. 이러한 소속감이 커질수록, 각자의 취향은 숨기거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그렇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지 정보를 공유하며 시네마테크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쉬는 시간을 빌어 구술자 박상백에게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에반게리온>을 상영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본 인터뷰 때 이야기한 것처럼 그 시기가 “닫힌 시대이기는 했지만 좀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다 알려져 있던 것들”이었고, 소문만 무성한 그 ‘화제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리고 덧붙여 ‘왜 <에반게리온>에 당시 관객들이 그토록 열광했다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을 이어 했고, 이에 대해 “<에반게리온>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당시 시네필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했다. 확실히 <에반게리온>은 지금까지도 말도 많고 해석도 다양한, 참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세기말 관객들의 관심이 상당 부분 이 ‘해석놀이’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반게리온>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 재패니메이션의 인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한 축으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구술자 송정환은 평택의 ‘ 시네마드리밍 ’에서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戰ポンポコ) >(다카하타 이사오, 1994)을 상영했을 때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왔고, 특히나 평택시민아카데미로 공부를 하러 오던 청소년들이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재미있어했으며, 이에 같은 공부방에 있던 아이들끼리 상영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함께 감상을 했던 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8] 누가 뭐래도 지브리 최고 남주는 ‘ 아시타카 ’다. (필자 개인 의견임) 뿐만 아니라,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과 호응을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쪽으로 이끌고 갔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영화제가 아니면 일반 관객에게 상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시네마테크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전국적인 시네마테크 배급망(전국씨네마떼끄연합은 1997년 결성되었다)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의 작품을 모아 순회상영을 하거나 장편 사이에 단편 작품들을 끼워 넣어 함께 상영하는 등 프로그램을 다양화했다. 박: 그때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영화하고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을 붙여 가지고 긴 독립영화, 해외 독립영화 장편에 앞서서 마치 인트로를 열듯이,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그다음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딱 이렇게 된다든가, 데이비드 린치의 < 이레이저 헤드 >를 상영하는 데 앞서서 나기용 감독의 단편이 상영된다거나, 이런 식으로 하는 시도들도 있었고. 그리고 독립영화협회하고도 좀 같이하는 활동들이 있었고. 문화학교 서울이라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거기하고 저희랑 같이 해서 상영회를 조그맣게 한다든가 이런 활동들이 더러 있었죠. [9] 손: 저기 문화학교 서울인가, 정말 하꼬방 같은 그런 극장에서. 기억나네. 완전히 다락방 같은 극장이었는데, 거기서 < 생존 > 틀고 이랬을 때 무렵이었거든요? 그러면서 교류를 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저는 모션&픽쳐에 있으면서 독립영화, 시네마테크 이런 쪽 하는 사람들 하고 교류가 되기 시작한 거죠. … 자체 영화제가 이런 때 서울에 있는 작품들 가져올 때도 지역 뭐 같이 해서 틀기도 하고. 그러면서 교류가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시네마테크 활동하던 분들이 독립영화협회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가 맞물린 거죠, 대구도 . 그래 가지고 대구에서도 원승환 이라는 친구하고 이렇게 해서 협회를 만들어보자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 그렇게 이제 모션&픽처하고 독립영화 하는 친구들하고, 시네마테크 하는 사람들하고 이렇게 해서 ( 대구독립영화협회를 ) 만들게 되었죠. [10] <생존>(손영득, 1997)의 한 장면 물론 < 아키라 >(오토모 가츠히로, 1988)나 <공각기동대>(오시이 마모루, 1995)를 보러 왔던 관객들, <에반게리온>의 팬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나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던 관객들이 모두 같은 성격의 관객층이라고 뭉뚱그릴 수 없다. 심지어 <에반게리온> 상영회를 보러 왔던 관객들조차도 하나의 성격을 가진 집단으로 묶을 수 없다. 개중에는 정말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오타쿠도, 그저 심도 깊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시네필도 있을 것이고, 혹은 ‘워낙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니 나도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네마테크를 찾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너무 보고 싶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작품이 상영되는 곳 , 그런 작품을 찾는 이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모일 수 있는 곳, 배급 경로를 찾지 못한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들고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곳으로서 시네마테크가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관객층들이 2000년대 초반, 흔히 ‘한국영화의 화양연화’라고 이야기되는 시기를 불러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킹덤>의 팬덤 1990년대 가장 ‘힙한’ 공간이었던 이 민간 시네마테크들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을까. 결론을 대신하여 2024년 주제사에서 가장 핫했던 작품 < 킹덤(Riget) >(라스 폰 트리에, 모턴 안프레드, 1994)과 < 킹덤 2(Riget II) >(라스 폰 트리에, 모턴 안프레드, 1997)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두 작품의 상영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시네마테크의 관객층이 갖는 응집력의 폭발 인 동시에 이들이 주류의 문화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 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된 이후로, 부천의 판타스틱영화제・서울여성영화제・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영화제(SICAFF) 그리고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제 들은 영화팬들에게 또 다른 놀이터였다. 영화제는 ‘합법적’으로 새로운 영화를 제공했고 관객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리고 영화제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신문 기사나 PC통신 동호회 등등을 통해 참석자들의 뜨거운 후기는 전해졌다. 수보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열기. < 브레이킹 더 웨이브 >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연출한 무려 4시간 반짜리 영화 <킹덤>이 대표적인 경우. 지난달 30일 자정에 열린 첫 상영에는 4백여 석 극장에 2천여 명이 몰려 급히 다른 극장을 잡아 시차를 두고 두 곳에서 상영했으며 그러고도 수백 명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시네마 부천, 9만 관객 갈채”, 《동아일보》 1997. 9. 6. 26면 기사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킹덤>과 심야영화 의 붐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킹덤>과 심야상영을 찾던 관객 안에는 좋은 작품을 찾아 헤매는 시네필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심야상영 문화를 즐기고 그 열기에 섞이고 싶은 젊은이들도 모여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심야시사회로 일반화되는 추세.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예술영화의 재상영 기회 로도 그 몫을 한다. 심야상영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우선 값이 싸기 때문이다. 일반영화 한 편 값으로 서너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IMF형 문화상품. 단순한 영화관람에만 그치지 않고 젊음과 영화를 매개로 한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도 한 이유. 여대생 박진아 양(22)은 “영화관에 있으면 한배에 탄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전율과 긴장, 공포와 웃음으로 밤을 지샌 뒤 인적없는 새벽거리로 나설 때의 쾌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한다. - “값싸고 젊음・마니아 상징에 만원사례, 심야상영 신세대문화로 뿌리”, 《경향신문》 1998. 5. 29. 22면 기사 상대적으로 수도권에 비해 문화적 전파가 더딜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도 뒤늦게 <킹덤>과 심야상영을 즐기려는 관객들이 자신의 지역에 위치한 시네마테크에서의 재상영을 찾았다. 박상백은 “전라도의 모든,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다 왔던 것 같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표현했는데, 이런 엄청난 관객 동원은 기존 시네마테크를 찾던 시네필들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박: 그때 부천영화에서 이미 상영을 했었고, 필름으로. 저도 그때 가서 봤고. 열기를 봤었고. 자연스럽게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비디오테이프로 그거를 작업해서 돌았었어요 . 그래서 그거를 가져다가 이제 상영을 한 건데. … 심야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게 또 사람들은 새로운 거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런 걸 경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잘 이렇게 융합이 돼 가지고 아마 그렇게 많은 관객분들이 오시게 된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잘되니까 다른 시네마테크에서도 했었던 걸로 알고 있고. [11] 원: 그중에서 관객들이 제일 많이 봤던 영화가 <킹덤>이라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가 97년도 부천영화제에서 매진이 되고, 그해 12월에 동숭씨네마텍에서 개봉을 했는데, 대구에는 이 영화가 내려올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한 것죠. 그래서 2월쯤에 그 영화만 가지고 상영회를 했어요. 근데 어느날 배급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가 그 영화 권리를 가지고 있는 회사인데 무단으로 틀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재산상 손해를 이렇게 봤으니까 만나자.” … “그러면 대구에서 <킹덤>이 개봉되는데 홍보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 을 주셨는데, … <킹덤>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흥행했던 영화들하고 다르게 전국 로드쇼를 했던 영화고. 서울 상영이 대박이 터지면서 부산 상영을 했고, 부산에서도 대박이 터지면서 대구로 이제 상영이 옮아온 거고. 그게 12월이었는데 대구가 2월이니까 한 3개월 뒤에 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서울에서 홍보가 이미 다 끝났고 지역에서 개봉할 때는 지역 언론사에 별도로 홍보를 해야 되는 필요가 생겼는데. … 또 <킹덤 2> 할 때는 아예 처음부터 ‘지역에 있는 시네클럽들, 시네마테크들하고 홍보를 같이 하자’ 라는 계획을 세웠어요. … 대구에서는 그걸 제가 했던 거고, 광주에는 뭐 광주극장에서 워낙 잘하시니까 그걸 했던 거고. 부산은 뭐 부영극장에서 잘하시니까 그랬던 거고. 대전은 이제 ‘컬트’가 그거를 하게 된 거고. [12] 대전 씨네마떼끄 컬트에서 개최된 ‘킹덤 상영회 포스터’ ※황규석 기증자료 박상백이나 원승환의 말처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킹덤>을 향한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를 확인한 시네마테크들도 앞다퉈 <킹덤> 상영회를 추진했고, 그 열기에 동참하고, 함께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며 시네마테크에서도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이들은 이듬해 <킹덤 2>의 상영회도 추진하고자 했지만 <킹덤 2>의 정식 수입사인 KJ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 시네마테크의 불법적 상영에 제동을 거는 한편으로, 오히려 이들이 갖고 있는 지역에서의 홍보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여 전국 상영을 진행했다. 그렇게 <킹덤 2> 역시 흥행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제 시네마테크들의 입장에서는 합법적 상영 공간에 자신들의 역할을 내어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일부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은 멀티플렉스에 자리를 빼앗긴 소극장이나 각 지역 대표 단관극장들과 손을 잡고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을 운영하거나,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독립예술영화 배급 쪽으로 자리를 옮겨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은밀한, 그래서 더 자유롭고 끈끈했던 관객들, 그리고 그들에게 아지트가 되어준 문화공간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각 지역의 민간 시네마테크들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한국영화 산업 내에서 여러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지역의 영화문화와 독립・예술영화 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KOFA컬렉션을 통해 공개된 2024년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트워크’ 에서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자! *** [1] 공영민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1권: 정희섭・박영정・박상백・송정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217~218쪽. [2]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3권: 이진이・원승환・황규석・강민구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192쪽. [3]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2권: 정성일・이하영・손주연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37~38쪽. [4] 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3권: 안정숙・곽용수・조영각・김영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188~189쪽. [5] 한나리 채록연구, 앞의 책, 101쪽. [6] 한나리 채록연구, 위의 책, 147~148쪽. [7] 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3권: 안정숙・곽용수・조영각・김영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224~226쪽. [8] 공영민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1권: 정희섭・박영정・박상백・송정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295쪽. [9] 이문주 채록연구,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8권: 박보경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1, 69쪽. [10] 유은정・박지윤 채록연구,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21권: 손영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1, 95~96쪽. [11] 공영민 채록연구, 앞의 책, 한국영상자료원, 2024, 216~217쪽. [12]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앞의 책, 한국영상자료원, 2024, 142~147쪽.
<애마부인>, 에로영화 시대의 개막 <애마부인>(정인엽, 1982)은 한국영화사에서 이른바 ‘에로영화’ 2) 붐을 일으킨 영화다. 이에 대해 1980년대 3S 정책과 검열의 완화가 그 배경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신군부의 전반적인 문화정책이 에로영화 제작 붐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군부가 검열을 완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의 검열 시스템을 답습하였고 검열 원칙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애마부인>이 상징하는 변화는 1980년대의 사회 전반의 변화― 민주화의 요구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수반된 통금해제와 유흥문화의 확산, 컬러TV와 홈비디오의 보급 등―를 계기로 1960년대 말 이후 억압되었던 욕망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봄이 보다 적절하다. 다시 말해 신군부의 정책에 의해 에로영화 붐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자유화의 물결을 신군부가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고, 그 흐름 중 하나가 에로영화였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영화계에서의 에로영화 붐은 세계적인 성 자유화의 조류와 함께 1960년대 말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1970년대 내내 강고한 검열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러면서도 성을 표현하려는 노력은 계속 경주되었고 외설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서구 섹스영화에 관한 정보가 해외토픽으로 소개되며 이러한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에둘러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그러한 정보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예컨대 1980년에는 <칼리귤라 Caligula>(1979)가 영국에서 말썽이 되고 있다는 기사 3) 가, 1981년에는 그리스가 영화 검열을 폐지했다는 기사 4) 가 보도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며 한국에서도 억압되었던 욕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애마부인>이 개봉하기 전 해인 1981년에는 ‘에로티시즘 영화’라는 문구를 전면에 걸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1980)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1981)가 개봉하여 크게 흥행했다. 그 뒤를 이어 1982년 2월에 <애마부인>이 개봉하여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같은 해에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 Twice>(1981)와 <보디히트 Body Heat>(1981)가 수입되어 관객동원 1위와 3위를 기록함으로써 5) 그야말로 1982년은 에로영화의 해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볼 때 신군부의 3S 정책 중 적어도 영화[Screen] 부문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의도된 전략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더 이상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민주화·자유화의 국면에서 집권한 신군부는 사회비판보다는 성적인 표현에 관대한 것이 낫다는 선택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애마부인> 이후 에로영화가 양산되자 검열이 1970년대 후반 기준으로 다시 강화되었던 것은 검열의 본질, 나아가 정권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었다. [그림 1] <애마부인>(정인엽, 1982)의 포스터. 한글로 쓴 제목 위에 ‘愛麻夫人’이라는 한자표기가 보인다. 이는 검열 과정에서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변경이 강제된 제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위에 나신으로 말을 타고 있는 애마(愛馬)의 모습이 보이고 있어서 아이러니하다. [그림 2] 염해리[김부선]가 주연을 맡은 <애마부인3>(정인엽, 1985)의 포스터. 역대 ‘애마’를 누가 맡느냐는 큰 관심사였다. 원조 애마인 안소영을 비롯해 오수비, 김부선 등이 ‘애마’ 역으로 데뷔했다. [그림 3] <애마부인>은 13탄까지 제작되며 한국영화사에서 에로영화를 대표하는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애마부인13>(김성수, 1966)은 비디오영화로 제작되어 정식 시리즈에 넣지 않기도 한다. <파리애마>(정인엽, 1988)와 <짚시애마>(이석기, 1990), 그리고 최근에 나온 <애마부인2016>(김미연, 2016)까지 포함하면 <애마부인> 시리즈는 16편에 이른다. 보수와 외설, 그리고 검열의 친연성 1970년대에는 강력한 검열로 인해 ‘외설’에 해당하는 신체부위의 노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통제와 불황의 늪에서 성적인 표현은 영화계가 그나마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기도 했다. 이에 영화계는 예술을 내세우며 외설을 추구하였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명분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성적인 표현이 스크린에서 이루어지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면해 보려는 영화계의 안간힘 속에서 성적인 표현은 도착적 환영의 영역이 되어갔다. 그 왜곡된 이미지가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 1980년대였고, 그 대표작이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애마부인>은 표면적으로는 강력한 가부장제의 윤리를 역설하면서 이면에서는 욕정을 참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통해 외설을 보여주는 모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남편의 배신과 귀환, 그리고 그에 따른 애마의 일탈과 귀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마는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탈하지만, 결국 남편에게 돌아옴으로써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킨다. 이 영화에서 애마는 매우 도덕적이고 정숙한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마에 대해 적대적인 시어머니나 시누이와 달리 시아버지(김진규)는 애마를 이해하고 아낀다. 그럼으로써 그는 애마로 하여금 가부장제의 이념에 충실하게 만드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결국 애마는 시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보수적 주제 아래에서 애마가 보여주는 성적 행동은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애마의 성충동을 묘사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은 클로즈업이다. 이 영화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 그것은 혀가 살짝 드러날 만큼 반쯤 벌어진 입술과 몽롱한 눈을 중심으로 애마의 얼굴에 집중된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애마의 몸을 더듬는 듯한 패닝, 그리고 말을 탈 때 말의 둔부와 맞닿는 애마의 둔부와 다리 등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 등이다. 프레임으로 절단된 여성의 육체를 성적 도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1970년대 검열이 보여준 페티시즘적 시선과 유비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 즉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이 영화에서 애마의 모든 행동에서 성충동을 연상시키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애마는 혼자 자면서도 몸의 선이 드러나는 슬립이나 슬리브리스 네글리제를 걸친다. 심지어 시골 친정에 내려가 밭 매고 똥지게를 지면서도 밤에는 흰색 네글리제를 입는다. 그녀는 침을 맞으면서도 붉은 카펫 위에 엎드려 알몸으로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성충동에 사로잡히고, 아침에 개울에서 세수를 할 때에도 다리를 벌린 채 둔부의 곡선이 한껏 드러나는 포즈로 얼굴과 목선을 쓰다듬는다. 남편을 면회하는 창 앞에서는 손가락을 잔뜩 벌려 침대를 움켜잡듯 하고는 입김을 불어넣으며 “헤어지자는 얘기는 진심이 아니 었져? 당신도 날 사랑하고 있져? ”라고 입술이 닫히지 않는 형태로 서술어미를 발음한다. 그리고 이러한 애마를 보여주는 방식은 엿보기이다. 카메라는 애마의 성욕에 사로잡힌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제시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을 관음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의 밀실에 잠입하여 사생활을 엿보는 긴장과 쾌감을 준다. 이는 에로티시즘 영화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는 유난히 애마의 일정한 신체 부위와 성욕이 강조되며 애마는 관객의 성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엿보는 대상으로 최적화 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녀의 옷차림도 그 아래에 언뜻언뜻 비치는 알몸에의 엿보기를 충동한다. 마지막에 그녀가 동엽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는 그것이 폭발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애마는 성충동에 못 이겨 흰색 네글리제 바람으로 동엽에게 달려가는데, 마침 폭우가 쏟아지고 그녀의 네글리제는 비에 젖고 나뭇가지에 찢어지며 몸을 부분적으로 노출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각도로 그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클로즈업하여 번갈아 보여준다. <애마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에 음성적으로 유통되었던 <엠마누엘 Emmanuelle>(쥐스트 재캥, 1974)을 연상시킨다. 유한마담의 설정, 말을 타는 여자, 친구와의 동성애 관계, 여주인공의 상상을 통한 외설적 장면 제시, 몽환적인 영상 처리, 그리고 주인공이 화장대 앞에 앉은 모습으로 끝나는 장면의 유사성 등이 모두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을 재현하는 방식은 <엠마누엘>에 비해 훨씬 타자화되어 있으며, 매우 분열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적 윤리에 충실한 현모양처를 표방하면서 이면에서는 타자의 성욕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 결과 <애마부인>은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창녀의 표상을 지니는 ‘성욕이 강한 도시 주부’를 관객의 성충동을 자극하는 ‘정숙한 창녀’ 6) 캐릭터로 조형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맥락이 결여된 도착성과 일견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 보수적 주제가 1970년대 검열의 시선과 명분에 유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애마부인>은 1970년대 검열에서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부추겼던 외설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1970년대를 거치며 정향된 음화의 결정판이었다. <애마부인> 검열의 경과 앞서 말했듯이 1970년대 검열의 원칙은 198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했다. 그러니 <애마부인>의 검열과정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우선 1980년대에도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 영화사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신고를 해야 했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검열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애마부인>의 검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시나리오였다. 검열 당국은 대본검토 단계에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제작사에 시정통보를 내린다.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화 제목이 내용과 무관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전개에 있어서 외설, 퇴폐성이 짙어 성도덕이나 가정윤리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 36개의 장면이 성적 표현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그림 4]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발신: 문화공보부 장관, 수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문화공보부, 1981.10.15. 그러자 제작사는 통보받은 지 엿새 만에 다음과 같은 신구대조표를 첨부하여 문제가 된 장면들을 모두 수정하겠다는 각서와 함께 제작신고서를 다시 제출한다. [그림 5]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발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수신: 문과공보부장관), 연방 제79호, 1981.10.21. [신구대비표] 제작사가 예술성을 내세우며 수정을 거부하지 않고 검열당국의 지적에 따라 순순히 시정하겠다고 한 태도가 좋게 보여서인지, 제작사와 검열 당국 간의 물밑 교섭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검열문서로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제작사의 자진 개작 이후 <애마부인>은 비교적 부드러운 ‘유의사항’을 통보받는 선에서 제작신고가 수리되었다. 유의사항의 내용은 “제명을 변경하고 신체 과도 노출 및 정사 장면을 순화 또는 삭제하는 한편, 외설스러운 작품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을 제작”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제명은 반드시 한자로 표기토록” 하라는 제한사항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애마(愛馬)’가 외설스럽다고 하여 한자 표기를 ‘愛麻’로 수정했으니, 그것을 반드시 표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림 6] 「극영화 <애마부인>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발신: 문화공보부장관, 수신: 연방영화(주) 최춘지), 문화공보부 예일 1724-19796, 1981.11.7. 이에 제작사에서는 ‘제명 변경 신청’을 하여 승인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제목과 내용이 부합해야 한다는 검열 당국에 명령에 맞추어 주인공의 이름은 ‘오수비’에서 ‘이애마’로 바뀌었다. [그림 7] 「극영화 제명 변경 승인」, 문화공보부 1724-20627, 1981.11.27. <애마부인>이 시나리오 검열 과정을 통과하여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글래머 안소영 전라(全裸) 출연 영화”로 화제가 되었고, 필름 검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영화의 전례 없는 과감한 노출은 신군부 정권의 검열 수위를 가늠해보는 층샛돌이 된 셈이었다. 우리나라 여배우중 가장 가슴이 크고 육감적이라는 안소영이 주연이며 탤런트 임동진이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하명중, 하재영도 공연하고 있어 캐스트로도 중량급이다. 네거티브 몽타주 수법 등 특수촬영기법(이석기)을 도입, ‘상당히 끈적끈적한 화면’으로 평가된 이 영화는 아직 검열 전이어서 엄격한 이 과정에서 얼마만한 관용(?)을 얻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7) 그런데 <애마부인>은 필름 검열 단계를 큰 제재 없이 통과한다. 예고편은 말 위의 다리 노출 장면과 말 위의 애마 모습이 나오는 화면 2개 처만 삭제하는 조건으로, 본편은 “신체 과도 노출 및 정사장면 3개 처”만 단축하는 조건으로, ‘연소자관람불가’ 등급을 받으며 검열에 합격한 것이다. 이에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안소영을 알몸으로 말에 태워 달리게 한 장면”이나 “환상적인 남자와의 관계를 마라톤 달리기 식으로 처리한 대담한 장면” 8) 은 완전히 삭제되지는 않은 채 연(軟)초점화나 단축된 형태로 공개될 수 있었다. [그림 8] 「<애마부인> 영화예고편 검열 합격증」, 문화공보부 제6053C1-123호, 1982.1.16. [그림 9] 「영화검열 합격증」, 문화공보부 6060C1-6호, 1982.1.28. <애마부인>은 개봉하자마자 “TV, 영화에서의 여성해방 기류” 9) 를 상징하고, “탈선한 유부녀를 긍정적 시각으로 묘사한” 10) 파격적인 영화로 소개되며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11) 게다가 통금이 해제되고 심야극장이 운영되면서 심야영화관의 ‘미드나잇스페셜’ 첫 프로로 선정되었다. 12) <애마부인>으로 촉발된 “관능영상(官能映像)의 세찬 바람!!” 13) 은 ‘성인용 에로물 제작붐’으로 이어진다. 14) <애마부인>을 통해 증명된 검열의 완화가 불황에 허덕이던 한국영화 시장에 불을 지핀 셈이었다. 같은 해에 개봉한 <반노>는 제작신고서에 아예 ‘완전성인영화’로 분류되어 검열을 통과하기도 했다. 마침 비디오영화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부인 시리즈’로 이어지며 홈비디오 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다. 1980년대 검열의 원칙은 1970년대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이제 검열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매체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고, 행정적 검열보다 강력한 자본의 검열이 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1. 이 글은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 한국영상자료원, 2016.12, 190-201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에로(티시즘) 영화’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되는 것도 1969년경부터 주로 섹스영화의 미학을 논급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1981년으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 대해 “원시적인 자연세계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정을 그린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 영화”(「<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동아일보』, 1981.3.16.12면.)라고 부르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82년에 <애마부인>이 나오면서 급격하게 사용 빈도수가 높아졌다. <애마부인> 이후 ‘에로영화’는 한동안 19금 섹스영화를 가리키는 장르 명칭으로 받아들여진다. 3. “로마時代 섹스 映畫 英 검열통과로 말썽”, 《동아일보》, 1980.09.27.3면. 4. “希 映畫 검열 폐지”, 《경향신문》, 1981.10.31.4면. 5. 《동아일보》, 1982.06.22.12면; 《동아일보》, 1982.12.15.12면. 6. 캐스린 노버그는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을 크게 정숙한 창녀, 희생자적 창녀, 자유사상의 창녀로 분류한다. 캐스린 노버그, 「자유사상의 창녀: 마르고에서 쥘리에트까지 프랑스 포르노그라피 속의 매춘」, 린 헌트 편, 조한욱 옮김,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 1500~1800』, 상지사, 1996, 275-308쪽 참조. 7. “글래머 안소영 全裸 출연 영화 <애마부인> 檢閱과정”, 《경향신문》, 1982.01.16.12면. 8. “글래머 안소영 全裸 출연 영화 <애마부인> 檢閱과정”, 《경향신문》, 1982.01.16.12면; “안소영 육감적 演技 자랑/ 첫 主演 ‘愛馬부인’이 ‘愛麻부인’으로/ 풍만한 가슴에 정사신 대담/ 半裸로 안장 없는 말 타기도”, 《동아일보》, 1982.02.04.12면; “지금 애마부인이 몸 전체로 숨가쁘게 달려온다”, 《동아일보》, 1982.02.01.7면. 9. 《동아일보》, 1982.01.16.11면. 10. 《동아일보》, 1982.01.16.11면. 11. “1회부터 전회매진열풍”, 《매일경제》, 1982.02.24.14면. 12. “심야에도 영화 상영한다”, 《매일경제》, 1982.03.19.9면; “영화가 심야극장 첫선 <애마부인> 자정관객 만원”, 《동아일보》, 1982.03.29.12면. 13. 《동아일보》, 1982.02.04.6면. 14. “성인용 에로물 제작붐”, 《동아일보》, 1982.02.04.12면; “벗기는 映畫가 主流/ 下半期 邦畫 製作 30篇”, 《동아일보》, 1982.09.06.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