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 최후의 보스
- 감독
- 심위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주성치, 오맹달, 가준웅, 성규안, 우마, 심위, 주비리, 하지진, 로 웨이
좌초된 기대작-이만희의 <기적>(1967) 1967년 초, “한국 최초의 논 뮤직”영화 1) , “스토리 극이 아닌 심리묘사 위주의 새 스타일 실험영화” 2) 한 편이 세간의 주목을 끈다. 일주일의 촬영기간, 일체의 효과음 없이 기차가 달릴 때 발생하는 각종 소리만으로 음향을 대신하겠다는 포부를 앞세운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기적>이었다. 최무룡, 남정임 주연의 <기적>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석구(최무룡)가 기차에서 지연(남정임)을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담은 것으로 영화 배경의 대부분은 기차 안, 그것도 야간의 기차 안이었다. <만추>의 성공으로 영화계의 기대를 받던 이만희 감독의 차기작 <기적>은 “국산영화의 때를 대담하게 벗”겨 “산뜻한 외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고, 3) 1967년 3월 30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4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화 <기적>은 개봉 후 실험적인 시도 때문이 아닌 불미스런 이유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기적>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지 카발레로비치(Jerzy Kawalerowicz) 감독의 <야간열차 Trem Noturno>(1959) 4) 라는 폴란드 영화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1년이 넘는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60년대 많은 영화들이 표절의 의심을 받았으면서도 국외 작품에 대한 표절(대부분은 일본)은 도덕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며, 당시 많은 문제가 되었던 국내 소설을 영화가 표절한 경우에는 소설가가 제작사 대표를 저작권침해로 고소하는 식의 개인적인 소송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시작됐다. <기적>의 시나리오를 썼던 백결은 처음으로 이 문제를 거론한 관련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자 했으며, <기적>의 제작사였던 대한연합영화사는 표절여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기적>의 심의서류는 신문지면 등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꼼꼼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 산하 각본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사이의 미묘한 알력관계, 제작사가 인식하던 민간심의기구의 의미, 공보부 영화위원회의 무능 등을 확인시켜준다. 필사적으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려 했던 제작사의 노력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심의기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공보부의 행태는 왜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1년 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주면서 당시의 검열체계와 위상을 추측케 한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의 시각으로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둘러싼 더 흥미로운 면면들을 지금 확인해보자. 민간심의기구 사이의 알력 : 업자협회 VS 예륜 영화 <기적>의 심의서류를 살펴보면 <야간열차>와의 표절시비가 있기 전 또 다른 표절시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 이희중이 1967년 3월 27일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공보부에 제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적>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자신의 작품 <빙화>를 도용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희중은 진정서에서 백결이 자신의 작품을 윤색하여 한 잡지에 연재하겠다고 합의한 후 연재는 하지 않고 <기적>의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기에 형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며, 이 작품의 상영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을 보낸다. 그러나 같은 날짜로 영화 <기적>의 영화검열허가신청서, 영화학생관람허가신청서 등이 접수되고, 역시 같은 날 <기적>의 제작사 대한연합영화사 대표인 홍의선은 <빙화>와 <기적>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며, 표절을 운운하는 것은 이희중과 백결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이것으로 영화 전체가 피해를 입는 것은 억울하다는 요지의 글을 보낸다. (그림 1) 극영화 <기적> 상영허가 보류신청에 대한 회신 이희중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가 접수된 지 이틀 후인 3월 29일 공보부는 이희중에게 위의 공문을 회신하는데, 저작권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 간에 해결되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상영허가와 관련한 것은 공보부가 정하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며 시나리오 표절의 건은 작가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공보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 초 소설과 표절시비가 일어났던 영화들이 왕왕 있었고, 이 문제를 부풀리기보다는 개인적인 선에서 처리하려던 당시의 관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희중은 본인이 냉철히 판단해보니 본 문제로 제3자인 제작사가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제출했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철회한다는 서신을 공보부 측으로 보냈고, 6) 이 문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조용히 마무리 된다. 이후 <기적>은 어떠한 지적이나 수정사항 없이 필름검열을 통과했고, 1967년 3월 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을 받아 다음날 개봉한다. 문제는 개봉 후 《일요신문》 4월 9일자 기사에 <기적>이 폴란드의 영화 <야행열차>를 본뜻 것이라는 영화평이 실리면서부터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시나리오 작가 백결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4월 15일 일요신문의 편집국장 최병욱과 공보부 영화자문위원 이순근, 취재기자 조관희 등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동시에, 7) 업자협회 측에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는 건의서보내기에 이른다. 제작사가 표절의 판단여부를 공보부가 아닌 업자협회에 의뢰한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당시 실질적인 시나리오의 심의가 업자협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업자협회는 공보부의 요청으로 1967년 4월 1일부터 산하기구 각본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영화의 제작신고 전 자체적으로 각본을 검토한 후 문공부에 제작신고서를 내도록 했는데, 제작사는 <기적>의 표절여부를 바로 이 업자협회의 산하기구에 요청했던 것이다. (그림 2) 심의의견서 업자협회는 각본심의위원 이청기, 이진섭의 심의의견서를 첨부하여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을 공보부로 보낸다. 사실 업자협회는 <기적>의 표절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구로 보기는 힘들다. 당시 영화가 공보부에 제작신고의 신청을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업자협회를 경유했어야 했는데, 이미 자신들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보부로 경유시킨 이 작품에 대해 표절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해 4월 1일자로 각본심위원회를 설치, 공식적으로 공보부보다 먼저 각본을 심의하게 된 업자협회의 높아진 위상으로 볼 때, 제작사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표절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업자협회 측은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공보부로 회신했는데, 공보부는 이 결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륜 쪽으로 다시 한 번 의견을 물으면서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림 3) 극영화 씨나리오 심의결과 회신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6월 10일 예륜에 영화 <기적>의 표절여부를 심의하여 줄 것을 의뢰하고, 약 열흘 후인 6월 19일 예륜에서는 줄거리, 주제 및 구성, 무대설정, 등장인물, 사건, 효과 및 분위기, 기타 소도구 등 일곱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유사성을 분석한 후 “누가 보드라도 표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고 결정한다.” 이는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가 내린 결과와 정반대의 것이었고, 제작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한다. 예륜의 결과가 나온 직후인 6월 21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바로 공보부 장관에게 예륜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통고문을 발송한다. 심의기구에 대한 영화계의 인식 : 제작사 VS 예륜 (그림 4) 예술문화윤리위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 극영화 <기적> 표절결정 불인정 통고 홍의선는 이 통고문에서 예륜이 내린 결정에 대한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 통고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연 예륜이 영화에 대한 심의를 할 수 있느냐?’는 제작사 대표의 물음이다. 홍의선은 이 영화가 이미 공보부에 제작신고, 상영허가신고를 한 후 검열에 합격한 작품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 영화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와 같은 영화 ‘전문가’들이 표절이 아니라고 인정했다는 점을 들며 영화전문가도 아닌 이들이 이 영화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예륜의 어정쩡했던 지위에 대한 일침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1월27일 발족한 예륜은 4.19이후 자율적인 검열이 필요하다는 요구 하에 생겨났던 많은 민간 심의기구들 즉, 각종 윤리위원회들의 발생과 흐름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예륜이 발족 준비의 아이디어, 발족 후 모든 예산이 공보부에서 나온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예륜이 완전한 민간기구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였지만 정확히 민간기구도 그렇다고 정부기구도 아닌 예륜의 더 큰 문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각본은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영허가의 신청은 공보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예륜은 만약 이 각본에 대한 심의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판단하는 정도에 그쳤다. 8) 어떠한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예륜은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말한다 해도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사 측이 예륜의 결정에 흥분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텐데, 이만큼이나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던 것이 업자협회이다. 업자협회는 공보부가 자신들의 심의의견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륜 측으로 다시 한 번 표절 심의를 넘겼다는 것에 매우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림5) <기적> 표절문제에 관한 건의 6월 30일 업자협회가 공보부에 보낸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공보부 스스로 업자협회에게 준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의사가 엿보인다. 이 공문에 따르면 ‘업자협회의 표절 여부’를 ‘참고’하여 공보부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재심 처리’하는 ‘타당한 순서’를 무시하고 ‘전문분야가 아닌 구성원으로 된 예륜’에 의견을 묻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홍의선과 마찬가지로 업자협회 역시 예륜은 이 공식적인 절차에서 끼어들 만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무용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사의 통고문이나 업자협회의 건의서에 대해 예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각본 심의에 대한 전문성을 들어 항의하고 있는 업자협회의 태도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웠다. 영화의 제작을 위해서는 업자협회를 거쳐야만 하고, 업자협회가 내린 의견을 공보부가 바로 수용을 해오던 이전까지의 과정에 끼어든 예륜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의 입장에서 표절여부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실질적인 피해로 남는 것이었다. 업자협회와 예륜의 의견이 정반대로 나뉘고, 이 사이에서 공보부 영화위원회가 표절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기적>은 해외영화제의 출품작에서 모두 제외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외영화제 출품작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선정했는데, 제작사는 그 해 베니스, 베를린, 아시아 영화제에 <기적>을 출품작으로 신청했지만 표절시비 문제로 인해 어느 곳에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해외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이었던 외화쿼터는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날아가 버렸고, 제작사는 그만큼의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보는 공보부 : ? VS ? 상반된 두 심의의견서를 받아든 공보부는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이 작품의 표절 여부를 가리지 못했고, 급기야 10월 6일에는 아시아 영화제의 국제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여석기 교수, 조경희 여사에게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림 6) 대한민국주일공보관의 업무연락, 영화소견서 그러나 공보부의 요청으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이 자체로는 표절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에 매우 애매하게 작성되어 있다. 유사한 부분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크게 달라진 것인지, 혹은 무엇이 표절여부를 판단할 만큼 결정적인 차이인지 등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나 예륜에서 보낸 심의의견서 등이 정확하게 표절이다 아니다를 결정한 마지막 문장을 포함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견서라 할 수 있다. 당시 기사에서는 동경에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알려왔다고 기술했지만 9) 이 의견서만으로는 그러한 확답을 얻기에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공보부는 이 의견서까지를 받고서야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는데, 이때에도 깔끔하게 마무리 한 것은 아니었다. 공보부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스크린에 비친 결과의 차이점을 중시했다 10) 고 말하거나 예륜 사무국장의 말을 옮기고 있는 한 기사에서 공보부의 최종 결단은 시나리오는 표절일 수 있겠으나 영화는 표절이 아니라고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11) 새어나올 만큼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업자협회와 예륜 측 모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 수 있지만 사실상 책임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7) 극영화 <기적> 씨나리오 표절에 관한 건 공보부의 태도가 애매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기적>은 표절이 아닌 것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967년 11월 21일로 공보부는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화했고, 신문들은 <기적>이 억울한 일을 겪었으며 끝내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유일하게 <기적>이 표절작임을 주장했던 예륜은 공보부 장관에게 위의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공보부의 이러한 결정은 ‘본 위원회의 심의는 불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본 위원회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 주의해 달라는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지만, 이후 특별한 회신은 받지 못한다. 앞서 업자협회나 제작사의 항의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예륜이 공보부의 최종결정에 항의하는 것은 예륜이 공보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공보부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단체였다는 점 등을 추측케 한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적>은 표절의 오명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제작사는 큰 피해를 입은 후였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진 뒤였다. 영화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를 두고 오간 서류들은 당시의 영화 심의에 어떤 기구들이 관계하고 있었는지, 그 절차는 어떠했는지, 각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를 관장하고 있는 공보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등을 잘 보여준다. 민간심의기구였던 업자협회와 예륜의 알력, 제작사들이 인정하는 민간기구, 그리고 이 사이에서 뚜렷이 어느 한 편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못하는 공보부의 태도 등은 검열을 무조건적인 상하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의 영화검열은 아직 업자협회처럼 영화계 내 민간 기구의 입김이 세게 작용할 수 있었고, 예륜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약 10년 후 예륜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발족하고 강력한 사전검열기구가 되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1) 《경향신문》, 1967.2.11.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 중 《신아일보》, 《서울신문》의 기사는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1967)』, 한국영상자료원, 2008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두 신문사의 기사를 인용할 때에는 신문의 발행일자와 함께 위의 책의 면수를 함께 표기할 것이다. 2) 《신아일보》, 1967.2.14.(160면). 3) 《서울신문》. 1967.3.30.(281면). 4) 당시의 심의서류와 신문기사 등은 이 작품의 제목을 <야행열차>와 <야간열차>로 혼용한다. 이 작품은 2012년 부산영화제에서 <야간열차>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공개되어, 현재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에는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이 글에서 역시 확인이 용이한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사용할 것이다. 5) 영화 <돌아보지 말라>가 단편소설 「임진강」의 표절이라며 제작사의 대표가 피소되거나(《동아일보》, 1964.3.4.), 영화 <진성여왕> 역시 동명의 소설 『진성여왕』의 작가에게 제작사 대표가 피소되었고(《경향신문》, 1964.4.18.), 영화 <흑산도>의 경우 표절시비 작가가 공보부에 상영허가취소요구를 하기도 한다(《경향신문》, 1963.6.19.). 6) 이희중의 진정서취하신고서는 정확한 일자의 표기 없이 1967년 3월로만 적고 있다. 때문에 본 서류를 받은 후에 보낸 것인지 그 전에 보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여러 정황상 공문을 받은 후일 확률이 크다. 7) 《서울신문》, 1967.4.15.(318면). 8) 배수경, 「한국영화검열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2004, 37면. 9) 《신아일보》, 1967.11.25.(750면); 《경향신문》, 1967.12.2. 10) 《신아일보》, 위의 기사. 11) 《서울신문》, 1967.12.12.(800면)
영화 <오발탄> 검열 과정 개요 유현목에 따르면 영화 <오발탄>의 제작은 4.19 발발 직전에 기획되었다.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암울한 내용 때문에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감독 유현목, 촬영기사 김학성, 그리고 조명을 담당했던 김성춘이 동인 프로덕션을 구성하고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제작을 시작했다. 제작비 조달 문제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어져서 결국 영화는 제작이 시작된 지 1년 여가 지난 1961년 2월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당시는 4.19의 발발로 출범하게 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에 의한 ‘민간 자율심의’가 시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오발탄>은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의 심의를 거쳐 1961년 4월 13일에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고 같은 달 20일까지 8일간 상영되었다. 4.19 이후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봉을 마쳤지만, 1961년 5월 16일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오발탄>은 상영금지 영화가 된다. 내무부의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로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재검열의 결과 1962년 3월에 <오발탄>을 포함한 7편의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처분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발탄>의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을 시작으로 6월 11일(7월 8일), 8월 1일, 8월 21일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8개월에 걸친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노력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자막 및 화면을 추가하는 등의 자진 개작을 포함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오발탄>은 여섯 군데 화면을 삭제하거나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8월 23일 상영을 다시 허가받았다. 이렇게 개작된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어 25일까지 14일 간 총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10월 말에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오발탄>은 4.19와 5.16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통과하였고, 이 영화에 대한 검열서류들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 격변에 따른 영화검열 제도 및 운영 방식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발탄> 검열 서류는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료라고 하겠다. 검열 서류를 통해 본 영화 <오발탄>의 검열 과정 첫 번째 국면 1961년 2월 9일자로 작성된 “국산영화 상영신고서”부터 첫 번째 개봉을 마친 4월 말까지를 첫 번째 국면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서류는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1961년 2월 9일) (2)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3)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4일, 문화 제1623호) 및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등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에는 원작자 이범선과 작곡자 김성태가 작성한 저작권 관련 서류와 한국은행이 발행한 국채소화증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상영신고서는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경유(2월 13일)하고 영윤의 심의(2월 13일 접수)를 거쳐 문교부 장관에게 제출되었다. (2)의 서류는 (1)의 상영신고서를 접수한 후 문교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영윤의 “심사논평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심사논평서에서 영윤은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 매단 장면을 삭제하기를 희망”한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영윤의 의견은, 그것이 민간의 자율심의기구였기 때문에 명목 상으로는 행정적 강제력을 갖지 않았지만, 문교부는 이 권고사항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상영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강제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 (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첫 번째 국면에서 쉽게 해명되지 않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상영 중이던 4월 14일에 문교부가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앞으로 <오발탄>에 대한 심의를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영화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4.19 이후의 국면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영화검열의 주무부처도 아닌) 내무부와 법무부의 사후 심의가 왜 필요했던 것일까? 특히 “사회윤리적인 책임성이 전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자료가 되는 것으로 관취“되므로 ”추천키 난“하다는 내무부의 부정적인 의견이 <오발탄>의 상영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림 2] 국산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 (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다만 당시 영화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서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오발탄>이 아직 개봉하기 전이었던 1961년 3월 31일에 문교부는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 결정하는 국제영화 심사위원 12명을 위촉했다. 정부 관료가 다수 포함된 이 심사위원회 1) 에서는 4월 21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마부>(강대진, 1961)를 선정했다. <오발탄>을 제치고 <마부>가 선정된 것은 무지한 관제 심사가 낳은 불공정한 결과라는 영화계의 여론이 형성되면서 국제영화제 출품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문교부가 내무부와 법무부에 <오발탄>의 심의를 의뢰한 4월 14일은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위한 심사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영화 <오발탄>이 영화계 내에서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유력시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로서는 공식적인 심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출품작을 결정하기 전에 내무부와 법무부의 의사를 미리 타진해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국가기관에 의한 영화의 사전검열이 폐지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오발탄>에 대한 내무부의 부정적인 견해가 영화의 상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겠지만 국제영화제 출품작을 결정하는 데는 반영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추론이 맞다면 4.19 국면이 야기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별개로, 관이 주도하는 국제영화제 출품작 선정은 사실상 또 다른 검열의 관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국면 5.16 쿠데타가 발발한 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내무부는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를 문교부에 보냈다. 이 문서로부터 촉발된 대대적인 재검열이 한국영화 <오발탄>을 비롯한 총 7편의 상영금지 처분으로 마무리될 때까지가 두 번째 국면이다. 두 번째 국면에서 <오발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데, 그것은 <오발탄>의 재검열이 내치정 제3846호 문서에서 언급한 총 57편(한국영화 35편, 외국영화 22편)의 영화들에 대한 재검열과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발탄>의 재검열 과정을 담은 서류는 <오발탄> 검열서류철 뿐 아니라 외국영화 <폭력교실 Blackboard Jungle>(1955) 검열서류철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쿠데타 세력에 의한 대대적인 재검열 과정의 전체상은 문제가 되었던 57편 영화들의 검열서류철 모두를 검토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오발탄> 검열서류철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서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 및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그림 3]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 (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내치정 제3846호 서류에서는 1958년 이후 개봉된 국산영화 35편과 외국영화 22편이 이른바 “불순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재검토 대상의 광범위함과 문건 작성에 소요된 짧은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불순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지향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다. 대상에 오른 외국영화는 대개 영윤 시절에 풍속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이었다. 한국영화의 목록을 보면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전기영화 두 편과 ‘의적’을 다룬 <의적 일지매>(장일호,1961)를 제외한다면 사극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서민의 일상생활을 다룬 영화들이 집중적인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옥화>(신상옥,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1958), <종말 없는 비극>(이강천, 1958), <철조망>(조긍하, 1960)처럼 한국전쟁의 여파를 다룬 영화들, 그리고 <돈>(김소동, 1958)과 <오 내 고향>(김소동, 1959), <하녀>(김기영, 1960), <3등 과장>(이봉래, 1961)처럼 1960년대 초 가족 드라마의 보수적 관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 있는 영화들이 포함되었다. 5.16 직전에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결정되었던 <마부>까지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도시 빈곤층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이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 <춘희>(신상옥, 1959), <쟌발쟌>(조긍하, 1961), <카츄샤>(유두연, 1960) 같은 외국 번안물과 외국으로부터 유래한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사회불합리’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장르적으로는 미국 갱영화의 영향을 현저하게 받은 범죄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내치정 제3971호의 서류는 불순영화 목록을 전달한 지 5일 만에 다시 내무부 치안국장이 문교부 문화국장에게 보낸 <오발탄>에 대한 별도의 의견서이다. 이 서류가 지적하는 <오발탄>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조장과 “반미감정의 극단화”,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적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오발탄>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및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보류의 건”(1961년 7월 20일, 문화 제2412호) [그림 4]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 (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7월 18일자 서류에서는 내치정 제3971호에 표명된 내무부 치안국장의 의견에 따라 <오발탄>의 재검열을 위한 시사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재결을 요청한다. 1961년 7월 20일 3시에 문교부 시사실에서 열릴 시사회에는 내무부 치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정보과장), 중앙정보부 제3국장, 재건국민운동본부 예능과장, 문교부 문화국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7월 20일자 서류는 시사회 결과 <오발탄>의 상영보류가 결정되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시사회에 참석했던 법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정보부의 관계관들이 제출한 “검열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내무부는 5월 28일에 제출한 내치정 제3971호의 견해로 검열의견서를 갈음하였다. (3)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1962년 3월 22일) [그림 5]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 (1962년 3월 22일) 영화 검열 사무가 문교부로부터 공보부로 넘어온 후이기 때문에 이 서류는 공보국 영화과에서 작성하였다. 이 서류는 1961년 5월 23일 내무부에서 작성한 총 57편의 “불순영화” 가운데 공보부에서 재심을 결정한 11편(국산영화 3편, 외국영화 8편)에 대하여 1962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심사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내무부의 “보류 작품 영화 심사결과 통보”(1962년 2월 10일, 내치보 제65호)와 중앙정보부의 “검열의견서(종합 재검열 분)”(1962년 2월 6일로 추정)가 첨부되어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당시 공보부의 재심 대상으로는 한국영화 <하녀>, <고바우>(조정호,1959), <오발탄>, 그리고 외국영화 <템페스트 La Tempesta>(1958), <챠타레부인의 사랑 Lamant De Lady Chatterley>(1960), <로마의 여성 La Romana>(1954),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954), <폭력교실>, <위험한 고빗길 Les Tricheurs>(1958),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J'irai cracher sur vos tombes >(1959), <비트 걸 Beat Girl>(1961) 등이 올랐다. 이 가운데 재심에 참석했던 내무부, 문교부, 중앙정보부, 공보부 등 네 기관 가운데 다수가 상영불가 의견을 낸 7편, 즉 <오발탄>, <템페스트>, <챠타레 부인의 사랑>, <로마의 여성>, <적과 흑>, <위험한 고빗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이 최종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세 번째 국면 <오발탄>의 제작사인 대한영화사 대표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 첫번째 탄원서를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23일 마침내, <오발탄>의 상영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화면의 삭제와 자막 및 몇몇 화면의 추가 등의 자진 개작을 하고 탄원서를 제출한 외에, 제작자 김성춘은 감독 유현목과 함께 여러 비공식적인 루트로 로비를 펼치는 등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서류들에 나타나는 공식적인 발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성춘과 유현목의 ‘비공식적인 노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구술자료 및 여타의 자료들을 참조함으로써 공식적인 서류가 발화하지 않는 이면의 맥락까지 가급적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국면의 검열 서류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산영화 재심사 신청의 건”(1963년 1월 23일 김성춘 작성, 26일 공보부 접수) 및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1963년 2월 25일, 435호) [그림 6]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 (1963년 2월 25일, 435호) 첫 번째 탄원서는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반려되었다. 제435호의 “반려” 서류에서는 “해(該) 기간 중에 재심사에 불응한 작품 및 불허가 조치된 작품은 일체 재심 청구를 접수치 않기로 하였으므로 재심이 불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심 신청과 반려 사이에 <오발탄>의 재심이 있었던 사실은 외국영화 <폭력교실>의 검열서류철에 철되어 있는 <오발탄>의 재심 관련 서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공보부는 2월 13일 외국영화 <폭력교실>과 <오발탄>의 재검열 시사를 열었고 재심위원으로 참석한 최유현과 백영석은 두 작품 모두 상영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재검열 의견서”, 1962년 2월 13일)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상영보류 판정이 내려진 지 3일 만인 2월 16일에 문교부 문화국장은 <폭력교실>은 2개 처를 단축하고 상영을 인정해도 무방하지만 <오발탄>은 “현실과는 너무나 부합되지 않은 비참한 스토리”라면서 상영보류 의견을 표명하는 공문을 공보부 공보국장 앞으로 보냈다. (“<폭력교실> 및 <오발탄>의 재검 시사의 건”, 1962년 2월 16일) 결국 <오발탄>은 상영보류가 해제되지 않았고 두 차례의 합동심사를 거쳐 외국영화 <폭력교실>은 7개 처를 삭제 또는 단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 (2)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1963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접수), “부전지”(1963년 6월 13일), “민원서 이첩”(1963년 7월 10일, 중비서 060), “부전지”(1963년 7월 22일),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날짜 및 작성자 불명)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01),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내무부),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민원서 처리결과에 대한 통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2),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1) [그림 7] 진정서 (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그림 8]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 (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김성춘이 작성한 진정서 두 통이 공보부(6월 13일)와 중앙정보부(7월 8일)에 접수되었다. 이 진정서에서 노모의 “가자” 대사를 “저 푸른 벌판의 양떼를 따라가자”로 바뀌는 개작이 처음 언급되었다. 이 진정서 이외의 서류들은 이 진정서가 접수되고 나서 이루어진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6월 13일자 “부전지”는 진정서를 공람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1962년 1월 26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재심결과 불허가 조치되었지만 “영화내용은 건전하다”는 담당관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 담당관은 공보국 영화과 행정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신봉승으로, 그는 검열관이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역시 신봉승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7월 22일자 “부전지”는 제작자 스스로의 개작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신문 및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맥칸 박사 등”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를 해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부전지”의 내용을 참조하면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 또한 같은 시기에 신봉승이 작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신봉승은 자신이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여 서류 기안 당시 첨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첨부 자료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다이어 맥칸(Richard Dyer MacCann)이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 앞으로 보낸 “베니스영화제 출품작(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이라는 문서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 영화과 교수였던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학자로서 미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963년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한국의 여러 영화인들과 접촉했다. (박익순 구술증언, 김정옥 구술증언) 신봉승은 국립영화제작소의 감독인 배석인이 소개하여 리처드 다이어 맥칸과 만났고, 특히 그와 <오발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구술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할 한국영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달라는 공보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 추천 두 작품(<굴비>(김수용, 1963)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사적인 경로(미국으로 돌아간 후 맥칸이 쓴 글에 따르면 <오발탄>을 그에게 추천한 것은 극작가 이근삼이었다.)를 통해 보게 된 <오발탄>에 대한 평가를 적은 보고서를 냈다. 이 글에서 맥칸은 <굴비>는 일본 영화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1953)를 표절한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미국의 전쟁영화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썼다. 대신 그는 <오발탄>이야말로 “세계 수준에 있는 작품”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뿐만 아니라 <오발탄>에 대한 맥칸의 견해를 인용한 기사들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가 해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영화 <오발탄>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에 첨부된 것은 당시의 이 같은 여론을 보여주는 기사들 중 일부이다. [그림 9] 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 (발신 : Richard Dyer MacCann, 수신 Lee Sung Chul) 요컨대, 1963년 7월 당시에 검열관 신봉승, 국립영화제작소 배석인을 포함한 공보부 내 인력들, 그리고 이근삼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미국의 영화평론가까지 합심하여 <오발탄>의 해금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보부는 7월 22일 노인의 “가자” 대사 및 화면 삭제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는 공문을 작성했다. <오발탄>의 상영을 허가한다는 결정은 제작자 김성춘, 그리고 이미 7월 10일자 “민원서 이첩”(중비서 060)에서 “상연 허가함이 가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던 중앙정보부와 <오발탄>의 상영금지를 결정하는데 참여했던 내무부에도 통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일 후, 결정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와 제작자 김성춘을 수신인으로 한 7월 25일의 서류 두 종에는 <오발탄>의 상영을 불허가한다고 적혀 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할 만한 다른 서류들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결정을 번복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이 사례는 검열제도가 일관된 원칙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서 작동하기보다는 여러 우연적 요소들(예컨대, 검열관의 자의적 판단이나 외부의 정치적 압력, 또 피검열자와 검열자 간의 협상 등과 같은)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의성’은 사실 검열제도가 작동하는 근본적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극영화 <오발탄> 상영에 대한 탄원서 회신”(1963년 8월 5일, 분류기호 1733.01 3226) [그림 10] 탄원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오발탄> 상영보류 해제를 위한 탄원서가 한국영화인협회에 의해서 제출되었으나, 공보부는 7월의 재심 결과에 따라 상영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회신하였다. (4)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21일 공보부 접수),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 해제”(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증 교부”(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3473),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8월 23일 작성, 28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 3543과 1733. 3544) 8월 21일 한국영화인협회가 탄원서를 제출하자 곧바로 공보부는 <오발탄>의 상영허가 보류를 해제하고 상영허가증을 교부했다. 이어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결정에 참여했던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이같은 사실을 통고한다. 상영허가 보류 해제 문서에서는 미국 MGM 및 영화업자들이 <오발탄>의 수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 리처드 다이어 맥칸의 고평과 국내 언론들에 의한 상영허가 여론 등이 해금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유로 든 사실들과 관련한 근거 자료는 이미 1963년 7월에 제출된 바 있고 8월 21일에 한국영화인협회가 제출한 탄원서도 이미 거부되었던 8월 1일자 탄원서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시사 및 재평가 같은 재심의 절차 없이 탄원서가 제출된 날 바로 허가증교부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 해제에는 어떤 다른 힘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른 힘이 무엇이었든 간에, 최종 허가 당시에 제한사항은 여섯 군데의 화면 및 대사 삭제와 화면 단축이다.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가자” 대사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 외에 상이군인이 소변을 보는 장면이 추가로 삭제되었는데, 감독인 유현목은 이 삭제 처분이 소변을 보는 장소가 한국은행 앞이었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4) “영화상영허가 신청서”(1963년 10월 18일), “국산영화 <오발탄> 복사판 상영허가”(1963년 10월 19일, 분류기호 1733.12 4096), “영화상영허가증”(1963년 10월 19일) 상영을 허가받은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 이 서류들은 재개봉에 사용된 프린트 외에 별도로 한 벌의 프린트(복사판)의 상영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의 검열제도에서는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그 복사판은 원칙적으로 별건으로 처리되어왔다. 이는 원본과 복사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영화 검열이 내용에 대한 검토 뿐 아니라 프린트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까지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재개봉 이후의 서류들 1963년 10월의 재개봉 이후에 작성된 서류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영화사 김성춘으로부터 영화 <오발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양도받은 동원영화사 김진문이 이를 공보부에 통보하고 새롭게 상영허가서를 받는 과정에서 생산된 서류들이고 둘째는, 세계문화자유회의에서 유현목 감독이 이만희 감독의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일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당시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과거 <오발탄>의 상영금지 이력과 관련한 사실조회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1.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순영(서울지법 소년부 지원장), 이병일(제협 회장), 김은우(이대 교수), 홍승면(한국일보 편집국장), 오종식(영륜위원장), 오영진, 서정덕(문교부 문화국장), 최운조(외무부 방교국장), 노태준(문교부 예술과장), 문총사무국장, 법무부 국사처 영화과장. 《동아일보》, 1961.03.31.석간 3면.
아주 매혹적인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다 그만한 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호칭들을 붙여줄 것이다. 그렇다, 나도 주저 없이 이 시대 충무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영화감독 설태호 를 그렇게 부르고 싶다. 그와 함께 있는 맥주집안은 늘 안온했고, 그와 함께 있는 충무로 뒷골목의 막걸리 집은 노상 정이 넘쳐흘렀다. 또한 설태호 감독이 함께 하는 영화사 안은 항상 웃음꽃이 피고 또 피고 또 피어났다. 눈이 오고 비가 내려 촬영이 펑크나거나 연기자의 스케줄이 안 맞아서 촬영이 마냥 지연돼도 설태호 감독은 기다림에 지친 스태프들을 위해서 기꺼이 삐에로가 돼 주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설태호 감독과 같이 하는 술자리에선 전혀 술값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충무로가 늘 따듯한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주머니가 가벼운, 그래서 춥고 긴 겨울이 많은 영화인들을 힘들게 했다. 영화 일이 많은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많았으니까..그래도 영화예술을 한다는 긍지, 자부심 하나로 충무로를 떠나지 못했던 그 춥고 서러운 긴 세월, 충무로의 그 이름 없는 골목들은 많은 영화인들이 남몰래 흘린 눈물이 눈발이 되어 흩날리도 하고, 때론 웃음이 넘쳐흐르는 초원이 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그 세월에 설태호 감독의 곁에 있으면 겨울에도 추운지 모르고 폭염 속에서도 더운지 모르게 그렇게 많은 영화인들이 그와 함께 충무로를 지켜 갔다. 단세포적으로 말하면 술값이던 밥값이던 늘 설태호 감독이 도맡아 내는 그는 한마디로 호구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주머니가 비어도 배불렀고 없어도 얼큰하게 취했으니까... 설감독은 자기 아닌 남이 돈 내는 것을 보는 스타일이 이 아니다. 술값을 다 털어 내고 차비가 없으면 집에 까지 한시간 반을 걸어 간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였다. 난 설태호 감독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와 만나면 어느 자리에서건 늘 허허 웃는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스트레스 해소제였고 활력소였고 그는 윤활유였다. 그래서 인지 설감독 주위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자주 만나는 그의 친구들 그 누구도 얻어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밥값이나 술값을 계산하는가? 궁금하겠지요? 간단하다. 술값이던 밥값이던 설감독 보다 먼저 내는 비법이 있다. 먹기 전에 들어가면서 카운터에 설감독 모르게 넉넉히 돈을 내고 먹고 나올 때 잔금을 받는 수법이다. 이에 당황한 설감독은 아예 먹으러 갈 집에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하면서 술값을 아무 한 테도 받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는 거다. 이차 삼차 갈 집도 대략 정해진 단골집이 있으니까 한 십 여 군데다가 미리 전화를 해놓는 데는 먼저 돈을 내고 싶어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영화계에는 설태호 감독과 절친했던 선후배 동료들이 많았으나 그 중에도 멜로드라마를 잘 만드는 김기 감독, 청소년드라마의 선두주자 김응천 감독 (작고),그리고 이 세 감독의 시나리오를 단골로 써서 공급했던 나 이렇게 네 사람을 충무에서는 사 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설태호 감독은 유모어 감각이 남 다르다. 시나리오 심사를 들어가서 하루에 수 십 편의 시나리오를 읽는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심사에 설태호 감독이 참여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하루의 고된 심사가 끝나고 저녁회식 자리에선 설 감독의 좀 야한 유모어가 튀어나오고, 자중은 배꼽을 잡고 나뒹굴어지는 웃음 바다가 되기 때문이다. 동료 심위원들과 유모어 대회를 열면 언제나 일등은 설태호 감독이 따놓은 당상이였다. 설태호 감독은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이다. 19세때 홀홀 단신 남하한 실향민, 한시도 잊어 본적이 없는 이북 단천에 두고 온 어머니. 설감독의 모친은 중견 탈렌트 나문희 씨를 쏙 빼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나문희씨가 나오면 그녀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내가 말야,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돼 가지고 이북에 가서 오마니를 만나면 난 총살을 당해도 다시는 오마니 곁은 떠나지 않을 게야, 여기 있는 아내와 자식들한테는 몇 십 년을 지극 정성 다 했지만 오마니 한데는 단 하루도 효도를 해보지 못한 후래자식이니끼니' 그렇게 말하면서 설감독은 술잔을 꼭 쥐고 그 주름진 눈가에 이슬을 묻히곤 했다. 이산에 아픔의 멍우리를 풀지 못한 한 때문 이였을까, 설태호 감독은 유독 반공영화나 군사영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냈다. 정창화 감독과 이만희 감독에게서 연출수업을 받고 1963년 설태호 의 감독 데뷔작 ' 살아야 할 땅은 어디냐 ' 허근욱 의 실화소설이 바탕이 된 실향민의 고통을 담은 방공영화였다. 같은 해 해병문관이었던 체험이 밑그림이 된 ' YMS504의 수병 ' 1965년 ' 신화를 남긴 해병 ' ' 위험한 보수 ' 1967년 ' 0호작전 ' 이렇게 반공영화와 군사영화만을 고집스레 만들어 오던 설태호 감독은 일정기간을 자신의 특기인 유모어와 해학이 넘치는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1970년 ' 운수대통 일보직전 ' 연이어 같은 해 ' 남대문 출신 용팔이 '가 대박을 터트린다. 당시의 쾌남아 스타 박노식 을 주연으로 출연시켜 장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코믹 액션 ' 조폭 마누라 ' 신라의 달밤 ' ' 달마야 놀자 ' 그 이상의 코믹액션 붐을 일으키면서 연이여'용팔이' 씨리즈가 탄생한다. ' 역전 출신 용팔이 ' ' 운전수 용팔이 ' ' 신입사원 용팔이 '가 황금알을 낳으며 한 시대를 풍미 한다. 1970년대는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정치 경제 사회는 끝간데를 모르게 암울한 시대였다. 억압에 시달리고 궁핍에 찌들고 숨쉬기조차 답답하던 그 시대에 용팔이 씨리즈는 시민들의 탈출구였다. 일자무식 시골 청년 용팔이 ( 박노식 )가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 와서 벌이는 해프닝, 무식한 촌놈이 얼렁뚱땅 돈을 벌고 여차하면 주먹과 발길질로 약아 빠진 서울 놈들 코피 터트리는 그 통쾌함에 수많은 관객들이 참았던 숨통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렇게 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설태호 감독은 방향을 틀고 이산의 아픔을 다시 되새기듯 반공영화와 군사영화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1973년 제2회 한라 문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을 연출하고 1973년 간첩 잡는 귀신 오제도 검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 '에 윤정희 최무룡 을 출연시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여간첩 영화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 특별수사본부와 여대생 이난희 사건 '이 극장가를 강타 하며서 여간첩 영화들이 줄을 잇기 시작한다. 설태호 감독은 바람돌이처럼 '용팔이' 바람을 일으켰고 '여간첩'을 소재로 다시 바람 몰이를 하고 나서 기수를 또 다시 군사영화로 돌렸다. 1976년 제15회 대종상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한 ' 원산공작 '을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서 흥행감각과 예술감각을 두루 갖춘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견고히 했다. 설감독은 여세를 몰아 연속적으로 군사영화를 만들어 갔다. 1977년 ' 케논 청진공작 ' ' 도솔산 최후의 날 '' 수병과 제독 '' 제3공작 ' 대형 전쟁영화 ' 땅울림 '등 계속 군사영화를 만들어 갔고 설감독은 잠시 쉬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마지막이라 할 극영화 역시 군사영화인 걸작 '에미의 들'을 연출하여 춘사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다고 설감독이 군사영화와 반공영화, 그리고 코믹액션 영화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설태호 감독은 멜로드라마와 어린이들의 따듯한 사랑이 담뿍 담긴 영화들도 연출하였다. 1974년 ' 사랑이 있는 곳에 ' 1975년 ' 십 년 만에 외출 ' 1984년 안성기 주연의 ' 깊고 깊은 그곳에 ' 그리고 설태호 감독은 제작까지 겸한 대만 로케이션 작품 ' 스잔나의 체험 ' 1987년 ' LA 용팔이 '를 가지고 영화 팀들에게 유독 입국을 힘들게 했던 미국 로케이션도 감행했다. 어린이들의 정과 휴먼 드라마로는 1978년 ' 슬픔을 저 별들에게도 '' 누가 이 아픔을 ' ' 둘도 없는 너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설태호 감독은 뼈에 사무치는 이산의 한을 안고 국군 홍보영화도 수 십 편을 연출한 한마디로 한국영화계에서는 반공군사 영화에 대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70 고령인 지금도 살태호 감독은 청춘 같은 의욕에 불타 극영화 한편이라도 더 만들려는 의지와 정열로 충무로를 그리워하며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상훈 (시나리오작가) / 2002년 <프로필> 1929. 5. 26 함경남도 단천 출생 1963 < 살야할 땅은 어디냐 > 데뷔 작품명 1963 살야할 땅은 어디냐 / YMS504의 수병 1965 신화를 남긴 해병 / 위험한 보수 1967 0호 작전 1970 운수대통 일보직전 / 남대문 출신 용팔이 / 역전 출신 용팔이 1971 운전수 용팔이 / 신입사원 용팔이 1972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 혈보산천 1973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 / 특별수사본부와 여대생 이난희 사건 1974 어둠속의 목격자 / 사랑이 있는 곳에 / 암살지령 1975 십년만에 외출 1976 원산공작 / 보루네오에서 돌아온 덕팔이 1977 케논청진공작 / 둘도 없는 너 / 도솔산 최후의 날 1978 대동강 출신 / 수병과 제독 / 슬픔은 저별들에게도 1979 제3공작 / 누가 이 아픔을 1980 땅울림 1981 복수는 내게 맡겨라 1984 깊고 깊은 그 곳에 / 스잔나의 체험 1987 LA용팔이 1988 햄버거 쟈-니 1992 에미의 들 수상 경력 1976 < 원산공작 >제15회 대종상 감독상 1973 <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제2회 한라문화제 감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