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자들
- 감독
- 김묵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김석훈, 황해, 엄앵란, 최지희, 이빈화, 장동휘, 장민호, 김동원, 이향, 김칠성, 서영춘, 남춘역, 김아미, 장혁, 남미리, 채랑, 이예민, 최창호, 황도석, 남석훈, 문정랑, 장명숙, 오창환, 장인철, 신충일, 최성호, 안성진, 남방운, 강철, 김주오, 김기호, 조석근, 유성호, 박일
서영춘(1928~1986)은 구봉서, 김희갑 보다 다소 늦게 연예계에 등장했다. 서영춘은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형 서영은의 도움으로 1952년에 데뷔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쇼 무대의 사회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백금녀를 만나 코미디 콤비를 이루면서 ‘뚱순이와 갈비씨’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후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리게 되었다. 코믹한 연기력과 뛰어난 순발력, 거침없는 언변으로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서영춘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다. 서영춘은 1961년 <인생갑을병>으로 영화에 데뷔한 뒤,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5년 6월 개봉한 <여자가 더 좋아>는 이례적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상영되면서 19만의 관객을 동원, 그 해 최고의 인기작이 되었고 이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영춘은 명실공히 원톱 주연이 가능한 최고의 코미디 스타가 되었다. 뒤이어 각종 라디오와 영화에서 서영춘의 겹치기 출연이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서영춘은 라디오, 영화, TV와 각종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하며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1)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포스터. 서영춘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로, 여장을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성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서영춘이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65년 최고의 인기작이자 서영춘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 서영춘은 ‘저질 코미디’ 논란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일례로, 1965년 12월 27일, 중앙라디오방송의 <다이아몬드 스테이지>라는 프로그램 중 한 코너인 ‘하꼬바꼬 요리강습’에서 서영춘은 파리로 국을 끓이는 법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66년 1월에 열린 방송윤리위원회의 정례위원회는 서영춘의 출연정지 1개월을 의결했다. 저속하고 품위 없는 코미디를 했다는 이유였는데, 중앙라디오방송에서는 그것이 서영춘의 탓이 아니라 각본을 쓴 작가 최휘로의 문제였다고 변명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각본과 코미디 실연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서영춘의 출연 정지를 재가결했다. 이듬해 9월 서영춘은 또 다시 경고처분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스테이지>에서 품위 없는 언동의 저속한 코미디를 했다는 것이었다. 1967년에도 역시 같은 방송에서 “우리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언어순화에 역행”하고 “청소년들에게 저속한 유행어를 전파”시키는 품위 없는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서영춘은 활동 기간 내내 라디오와 영화, 방송에 걸쳐 각종 감시와 제재에 시달렸다. 사생활에서도 서영춘은 공권력과 잦은 마찰을 빚곤 했다. 애초에 서영춘은 구봉서처럼 전형적인 ‘가부장’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거나 얌전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방송 이외에도 여러 차례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65년 10월 경찰의 날 행사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이 날 사회자로 섭외되었던 서영춘은 40여 분을 지각했다. 각급 경찰 간부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행사에 서영춘이 나타나지 않자 30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긴급수배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로부터 10분 뒤 도착하여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화가 난 종로 경찰서장이 그를 사기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영춘은 형제까지 연루된 폭행사건 및 경찰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사고로 가십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처럼 서영춘의 통제 되지 않는 성격, 금기를 깨는 막말과 눈치 보지 않는 코미디 스타일 등은 1960년대 후반 <팔도강산>의 아버지의 페르소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김희갑이나 그 자신 ‘건실한 사회인’이자 ‘가부장’으로의 이미지를 일찌감치 획득했던 구봉서의 코미디 스타일과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영춘 코미디에 대한 제재가 지속되던 시기,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코미디의 저속함을 비판하고 나섰다. 먼저 1964년 방송국에서 코미디언 전속제가 시행되면서, 코미디의 수준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미디는 방송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 않고 청취자의 말초신경이나 허파를 자극하는 걸로 만족해온 실정”인데, 코미디언 역시 “영화, 무대, 방송 등을 누비면서 같은 소재를 재탕삼탕 울거먹는다”는 것이었다. 1965년 5월 신아일보의 기사는 코미디언들이 때를 만나 TV, 라디오, 영화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저급한 대사가 아니라 독창성으로” 웃음을 줘야한다면서 작금의 코미디가 수준 이하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66년 9월 15일 《서울신문》 기사에서는 방송의 저속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코미디라고 단언하면서, 코미디가 청취자의 “가치판단과 생활 윤리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또한 “어느 프로보다도 청취자들에게 강렬한 자극과 영향력을 끼치는” 코미디 프로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방송 전체의 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요약하는 라디오 코미디프로그램의 특징은 “조잡한 말의 나열과 불순한 상상력의 동원”, “저속하고 무가치한 언어”의 나열, “쓴 웃음을 자아내는 애드립”, “기성(奇聲)의 연속”, “아이디어의 빈곤”, “위트 이하” 등이었다. 기사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신진 코미디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응급조치로는 “저속의 낙인이 찍힌” 코미디언을 퇴출해야하며 코미디프로 역시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라디오스타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처럼 초기부터 저속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저속”하고 “무가치”하며 “조잡”하다고 혹평 받는 서영춘의 코미디는 점차 팬덤을 형성했고 서영춘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라디오와 악극 무대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로 진출하면서부터 대부분 비중 있는 조연이나 주연을 맡았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 서영춘은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부터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인생 갑을병>부터 서영춘은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어머니 울지 마세요>(전홍직, 1964), <눈물의 자장가>(최훈, 1965)에 이르기까지 20여 편에 가까운 극영화에서 엑스트라급 조연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코미디영화보다는 여타 장르 영화에서 단역 혹은 조연을 맡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당시 인기 코미디 배우였던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던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와 로맨틱 코미디 <총각김치>(장일호, 1964) 정도가 서영춘이 출연했던 코미디영화였다. <여자가 더 좋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까지, 영화에서 서영춘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사진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스틸.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를 리메이크한 심우섭 감독의 1983년 영화에서 서영춘은 여장남자 식모인 강태기를 짝사랑하는 노인 역으로 출연했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던 1965년의 영화와 달리 1983년의 영화는 그야말로 ‘건전’하고 ‘상식’적인 교훈극에 가까웠다. 서영춘이 영화 스타로 거듭났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의 흥행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라디오스타’로서 서영춘의 인기가 한층 성장했던 시기도 1965년이었는데, 영화에서도 서영춘은 비중 없는 단역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영화에서 늦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서영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어 한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물론, 더 이상 단역이 아닌 ‘비중 있는 조연’ 혹은 당당한 주연으로서였다. 그 중에서 단연 서영춘의 주가를 올렸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는 1965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그해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여장남자’ 코미디의 붐을 일으켰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서영춘의 영화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3) <큰 사위 작은 사위>(이봉래, 1965) 포스터. 1964년까지 주로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은 포스터에 얼굴이 실린 적이 없었다. 1965년부터 비로소 포스터에 서영춘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함께 큰 비중 없는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의 얼굴이 포스터 한 켠에 그려져 있다. (사진4)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정면을 바라보는 서영춘 고유의 코믹한 표정, 연민이 느껴지는 표정의 김희갑의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김희갑 얼굴 옆 제목의 배치 등으로 인해 조연이었던 서영춘이 주연 김희갑보다 조금 더 중심 인물로 보인다.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으로 서영춘은 영화계에서도 원톱 주연이 가능한 스타 배우가 되었다. 스타덤에 오른 코미디 배우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공담을 가상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보여주는 영화들이 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김희갑의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배삼룡의 <나의 인생고백>(심우섭, 1974), 이후 이주일의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등이 이런 계열의 영화들이었다. 서영춘의 경우에는 1965년에,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악극단 출신이었던 이 코미디 배우들의 성공담은 시골 출신의 코미디언들이 우연히 악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스타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 배우들은 자신들의 특기와 코미디 레퍼토리들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한층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사진5)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화려한 악극단의 뒷모습, 시골 출신 코미디 배우의 인생 역전, 각 코미디 배우들의 장기를 한층 살린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등이 이 ‘가상의 전기 영화’들이 가진 특징이었다. 서영춘의 ‘성공담’을 엮은 <출세해서 남주나> 역시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성공한 코미디 배우의 대명사가 된 서영춘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6년 동안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들에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외화 <007> 첩보 시리즈를 패러디한 <살사리 몰랐지>(일명 <007 폭소판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요절복통 007>(김대희, 1966), <기상천외>(김대희, 1967) 등이었다. 서영춘은 이 영화들의 주연을 맡아, 한국 코미디 첩보물을 개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6)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7)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서영춘 (사진8)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한 장면. 탐정소설 매니아인 보석점 직원 서영춘이 우연한 기회에 007처럼 첩보원이 되어 마약밀매법 일당을 소탕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자신의 유행어인 ‘살사리 몰랐지?’를 매 에피소드마다 연발하며, 자신의 코미디 레퍼토리인 여장하기, 권투 시합 등의 장면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편, <살사리 몰랐지>에서처럼,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 이후 서영춘이 주연인 코미디영화들에서는 서영춘의 여장이 주된 플롯의 장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이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가 대표적인 영화였다.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은 일종의 <시집가는 날>의 패러디로,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부잣집 바보 도령(김희갑)에게 시집가게 된 주인댁 딸을 대신해서 결혼하는 머슴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과 서영춘의 결혼생활이 유발하는 웃음의 코드는 <내 것이 더 좋아>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내 것이 더 좋아>는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시골에서 상경한 성춘(서영춘)이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부부 행세를 하고 각종 소동을 벌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봉한 영화로,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이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진9)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10)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목욕탕에서 쫓겨난 서영춘 (사진11)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미용체조를 하는 서영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혼자 있을 때도 풀메이크업의 여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한 미용체조에 열중하는 등 성적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서영춘은 주로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영춘은 구봉서와 짝을 이루어 ‘남자 시리즈’나 ‘팔푼이 시리즈’ 등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 과제에 서민 대중의 욕망을 투사했다. 구봉서가 항상 성공적으로 취업과 결혼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윤리를 구현하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서영춘은 그의 곁에서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고 우직한 구봉서에 비해, 한결 약삭빠르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서영춘은 그럼에도 과히 밉지 않은, 평범하면서도 속물스러운 서민 대중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했다. <단벌신사>(김기풍, 1968)에서 친구 구봉서의 복권을 탐내는 도어맨,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또 다른 가짜 미용사로 변장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되돌리려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버림받는 세탁소 직원,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인 줄 알고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만 사실은 식모였음을 알게 된 수위(물론, 사장 딸은 구봉서와 결혼하게 된다.),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에서 생계가 어려워 가짜 장군을 사칭하고 다니다 우여 곡절 끝에 진짜 산적을 잡게 되고 진사 댁의 식모와 맺어지는 검객(물론, 여기서도 진사 딸은 구봉서와 결혼한다.) 등 서영춘의 캐릭터들은 성공의 ‘일보직전’에서 약간의 패배와 함께 약간의 좌절을 맛보는 인물이었다. (사진12)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단벌양복과 복권을 탐내는 친구 서영춘 (사진1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가짜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그리고 진짜 앙드레 곽규석(가운데) (사진14)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 행세를 하는 식모에게 속아 넘어간 수위 서영춘 (사진15)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 포스터. 가짜 검객 구봉서와 서영춘의 억울한 민중 구하기가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 근대화의 뒷길에 놓인 서영춘의 캐릭터는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여장이나 변장과 같은 속임수가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들이었다. 구봉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서영춘은 지켜야 할 가족이나 도와야 할 동생이 있는 ‘가부장’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좀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타는 생존욕구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변장을 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영춘 캐릭터의 실패는, ‘정상성’이나 ‘사회적 규범’을 포기한 데 따른 일종의 징벌과 같은 것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이 ‘가학’적 쾌감을 만끽하게 했다. 그런 한편, 서영춘의 거침없는 언변,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애드립,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슬랩스틱에 적합한 신체는, 점차 경직되어 가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의 규율 안에서 ‘해방감’을 주는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다. 이런 점에서, 잘 짜여진 스토리와 닫힌 결말, 교훈을 주는 메시지를 선호했던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 서영춘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는 배우였다. 코미디영화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당시에도, 서영춘은 항상 좋은 악극 무대를 기획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쇼와 만담, 사회 등 단편적이고 버라이어티한 구성에서 강점을 보였던 서영춘은 1960년대 말,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기획하여 코미디 쇼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소비되었던 ‘서영춘’이라는 캐릭터 안에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코미디로, 그 자신만이 주연인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코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서영춘 역시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1년 8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 다작으로, 1972년 이후부터 1979년까지 총 8편, 1980년대에는 총 4편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팔도강산>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국책영화 <노래 실은 관광여행>(박희준, 1973), <팔도유람>(이명식, 1974)를 비롯하여 여전히 1960년대의 향수를 안고 있는 심우섭 감독의 영화들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82 바보들의 청춘>(심우섭, 198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에 잇따라 출연했으나, 그 웃음의 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하자, 단편적이고 감각적이며 속도감 있는 웃음을 추구했던 텔레비전 코미디에서 서영춘의 코미디는 더욱 빛을 발했다.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제작되었지만,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미 한껏 순화되어 텔레비전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참고문헌>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물체가 움직이는 효과가 특수효과예요. 그래서 조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특수효과 이문걸) 1) 영화 특수효과(Special Effect)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렇다, 마술사이기도 했던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그는 원-쇼트 필름(one-shot film)에서 우연히 ‘스톱 모션(stop motion)’을 발견해 마치 마술에서처럼 영화에서도 특수한 효과인 스톱 액션(stop-action), 이중 노출(double exposure), 원근감 트릭(perspective trick)을 사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신데렐라 Cinderella>(1899)에서는 스톱 액션을 써서 호박이 화려한 마차로 변하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누더기가 파티 드레스로 변하도록, <인디언 고무 머리 Indian Rubber Head>(1902)에서는 부분 마스킹을 이용한 분할화면(spilt-screen)을 활용해 자기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폭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1902)에서는 원근 전환(perspective shift)과 많은 트릭 효과를 사용해서, 총알 우주선이 저 멀리 우주의 달로 발사되고 달세계에서 지구의 우산이 버섯으로 깜짝 변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시작된 특수효과는 오늘날의 관객들의 뇌리에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generated imagery, CGI)을 사용하여 스펙터클한 화면 시각 효과(Visual effect)를 내는 할리우드식 공상과학 영화를 만드는 최첨단 기술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특수효과의 영역으로 진입한 컴퓨터 그래픽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도 <퇴마록>(박광춘, 1998)을 시작으로 <괴물>(봉준호, 2006),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2017) 등의 판타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9), <명량>(김한민, 2014)처럼 사극과 전쟁 영화, <화산고>(김태균, 2001), <악녀>(정병길, 2017) 같은 액션 영화는 물론 멜로드라마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에서도 수준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효과는 대부분 광학효과를 만들어내는 후반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하면 특수효과의 일부분이다. 자연현상인 눈, 비, 안개, 지진부터 건물 파괴, 총격이나 폭발의 장면 등을 기계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 고속/저속촬영은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미니어처 같은 촬영 방법을 함께 동원해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그 모두를 일컫는 것이 바로 특수효과이다. 그래서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인력들은 영화 연출에 전반에 대한 미학적 기술적 인식은 물론이고 물리 법칙이나 화학 배합에 대한 지식을 장착해야 한다. (사진1)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처럼 1960년대 전쟁영화에서는 특수효과랄 것도 없이, 실탄을 장착한 총기를 사용해서 실제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의 궁금증,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특수효과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상상과 공상의 장면을 구성하고 코믹한 효과를 주기위해 특수효과가 시작된 서구의 영화 제작과는 달리, 한국영화에서의 특수효과는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는 195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민족의 수난을 소재와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 시작되었다. <5인의 해병>을 연출한 김기덕도 회고한 바 있듯이, 연기자 주변의 땅바닥에 총이 맞아 튀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군이나 경찰의 지원과 엄격한 통제 하에 명사수를 데려다 실제로 실탄 사격을 해댔다. 2) 이처럼 전쟁과 첩보, 군사, 액션영화에서 적과의 총격이나 전투 장면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총격과 폭파 효과를 내던 것이 바로 한국 특수효과의 시초였다. 실제 총에 실탄을 장전해 연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던 1960년대 초, 중요하지만 또 위험한 소품인 총기나 무기류를 챙겨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제작부 소품 담당의 주요 임무였다. 아직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특수효과’라는 명칭으로 오르지도 못한 채, 총기류와 폭약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가 바로 이문걸이다. 1996년 <크레이지 댄스)<박한순>을 마지막으로 약 7백여 편의 극영화, <배달의 기수>등 군 홍보영화와 <전우> 같은 4백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다. ‘보이는 모든 장면을 실감나게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문걸은 특수효과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분야를 개척한, 명실상부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계에 독보적이고도 유일한 특수효과 ‘맨’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특수효과의 역사는 이문걸의 작품연보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진2) 군홍보영화 <잃어버린 세월>(설태호, 1990) 촬영현장에서 왼쪽부터 특수효과 감독 이문걸, 감독 설태호, 촬영감독 팽정문 이문걸은 1935년 일본 나가노켄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한국으로 왔다. 1956년에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꼼꼼하고 부지런한 성격 덕분에 상병 계급이던 당시, 오히려 하사를 병기계 보로 두고 병기계 담당을 맡았다. 1960년 한흥영화사의 제작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화계에서 일하던 동생 이예남의 권유 때문이었다. 병기계 담당을 하던 군에서의 경력이 인연이 되어 그는 자연스럽게 제작부에서 총기를 관리했다. 그가 제작부로 입사한 한흥영화사는 최관두가 이끌고 있었고 당시 제작부장은 김홍빈이었다. 1959년 창립한 한흥영화사는 정창화의 멜로드라마 <사랑이 가기 전에>(1959)로 영화제작을 시작했지만 주로 활극, 스릴러를 기획, 제작하면서 가히 ‘액션 스펙터클의 총본산’으로 불렸다. 김홍빈의 제작부에서 활동한 이문걸은 <지평선>(1961)의 정창화, <싸우는 사자들>(1962)의 김묵,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의 임권택, <창살 없는 감옥>(1963)의 강범구의 작품을 함께 했다. (사진3)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제작부에서 총기 담당을 맡으며 특수효과에 입문했다. (사진4)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소품’ 담당으로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지평선>에서도 활약을 했지만 이문걸이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흥영화사의 10회 기념작 <싸우는 사자들>의 ‘소품’ 담당이었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철원지구에 잠입한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이 작품은 여성 유격대원들의 전투장면과 포로수용소의 대폭파 장면이 압권이었다. ‘7백 여 명의 「엑스트라」 및 약 6백 자루의 권총, 「엠원」 소총, 「칼빙」소총, 자동소총, 다발총 등의 소화기를 동원하였고 TNT 폭탄 2백 「파운드」씩 두 번’을 사용해, 촬영 당시 ‘파편으로 경상을 입은 「엑스트라」가 21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처음 있는 특수효과를 실험해 전쟁 스펙터클을 구현해 낸 액션 영화였다. 3) (사진5)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중 독립군과 일본군이 펼치는 설원의 최후 전투 장면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학생독립단의 무력 항쟁을 그린 임권택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특수효과 ‘맨’ 이문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첫 촬영은 독립투사가 일본군 중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었다. 대관령에서 촬영한 이 장면을 위해 이문걸은 연기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실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총격 효과를 내는 특수효과를 실험한다. 마분지를 연필 굵기로 3cm씩 말아서 그 속에 특수 약품을 넣어 가짜 실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백여 개를 만들어 하나씩 특수전선을 연결한 후 땅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어 선에 전기가 흐르도록 합선·폭발하여 흙이 튀면서 실탄이 맞는 특수 효과를 만들어 냈다. 4) 또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은 만주로 가려는 독립군들의 마지막 격전, 두만강 도하를 목전에 둔 겨울 계곡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이는 전투이다. 영화 내내 어두웠던 흑백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눈 쌓인 설원을 활강하는 스키 부대의 활약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살상이 벌어지는 총격전은 비장할 만큼 눈부시기도 하다. (사진6) <증언>(임권택, 1973)의 탄착효과가 돋보이는 전투장면 (사진7) <증언>(임권택, 1973)의 한강 다리 미니어처 폭파 장면, 이문걸은 특히 <빨간 마후라>(1964)와 <대괴수 용가리>(1967)의 경험 이후에 다리 폭파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임권택과 이문걸이 함께 만든 이러한 액션 미학은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임진란과 계월향>(1977), <아벤고공수단>(1982), <개벽>(1991), <장군의 아들3>(1992), <태백산맥>(1994)으로 이어진다. 점차 영화계 내서도 총격 효과를 내는 것, 화약을 다루는 것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문걸은 자연스럽게 ‘특수효과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흥영화사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문걸은 1963년 영화사가 폐업하자 <소만국경>(강범구, 1964)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특수효과’로 크레딧을 올렸고, 조수 5명을 데리고 독립했다. (사진8) <소만국경>(강범구, 1964) 총격 장면의 화약 효과 ‘제작부’나 소품‘으로 이름을 올리던 그가 특수효과로 독립하면서 시작한 것은 ‘가짜 실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짜 실탄’은 하나하나 말아서 만들어야했던 불편한 ‘마분지 실탄’이나 다소 위험했던 공업용 뇌관을 대신할 수 있는, 보다 간편하고 좀 더 안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실탄과 선을 직접 맨손으로 합선시켜야만 폭발시킬 수 있던 방법도 개선해서 버튼 하나를 눌러 수백 발의 실탄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자동 폭발시킬 수 있는 전자식 ‘컨트롤 박스(control box)’도 그의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9)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 미니어처로 제작한 비행기와 한강 다리 장면 미니어처(miniature)를 제작해 물리적, 화학적 효과를 가미하는 촬영 방법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도 사용했던 영화사 초창기부터 발달해온 오래되었지만 대표적인 특수효과 기법이다.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에서 이문걸은 동생 이예남과 함께 미니어처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당시 주먹구구식의 미니어처를 만들어 야외에서 촬영해 폭파 장면을 찍었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해야하는 것은 물론, 폭파되어 전소될 건물을 짓기 위해 미술 담당 스태프에게 톱밥을 섞은 연한 석고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여러 번 실험해 촬영 스태프와 합을 맞추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에서 여러 번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는 경험을 했는데, 다리 폭파(?)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진 10)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칠흑 같은 우주에서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 장면 (사진 11)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용가리가 서울 시내의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 (사진 12)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와 대치하는 군의 포격 장면 (사진 13)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가 한강 다리를 파괴하는 미니어처 장면 이문걸이 본격적으로 미니어처와 결합한 특수효과를 몸에 익힌 것은 김기덕의 한국형 공상과학 영화이자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1967)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철사에 모형 비행기를 매달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하는 공중전을 연출했고, 떨어지는 유성은 물론 반짝이는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을 영상화했다. 또 특수전선을 늘어놓고 순간적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여 번개가 치게 하고 미니어처로 만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을 거뜬히 해냈다.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괴수물에 능숙한 일본의 특수효과 전문인력들에게 연화(煙花, 불꽃놀이 폭죽으로 사용되는 화약)로 영화 촬영용 폭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미니어처이다 보니 축소해 만든 건물이나 다리를 폭파하면 폭파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물론 눈으로 보기에도 작은 폭발로 보인다. 이를 스크린 상에서 용가리가 야기한 거대하고 웅장한 재난의 현장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카메라를 이용한 고속 촬영은 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해한 특수효과 팀의 폭파 기술이 유기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체화했다. 그가 이때 연마한 미니어처 폭파 기술은 이후 <증언>에서의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은 물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해전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사진14)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이문걸이 만들어 낸 새벽의 안개 장면 하지만 총기나 폭약으로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로만 이문걸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수효과 담당자가 맡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임 속에서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고, 지진이 나게 하고, 물 위에 살얼음이 뜨게 만들었다. 연기자의 몸에서 피가 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훨훨 공중을 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김수용의 <갯마을>(1965)에서의 안개 낀 바닷가 소나무밭 장면을 보자. 시동생 성칠(이낙훈)과 시어머니(황정순)은 마을 사람들이 잠든 안개 낀 새벽을 틈 타 주인공 혜순(고은아)이 상수(신영균)이 마을을 떠나보낸다. 부산 기장에서 촬영한 이 장면에서 감독은 ‘바다 전체에 안개(스모그)를 깔아 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혹여 안개가 낀 바다를 연출하기 위해 바다 전체에 연기를 까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바람이 불 수 있는 야외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당시 스모그를 만들어내는 담당 스태프를 ‘쪼다통’이라 불렀다. 피우라는 시점에 해당 공간에 스모그를 채운다고 해도 바람이 불어 버리면 담당 스태프는 변명의 여지없이 ‘쪼다’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이 장면은 바람이 거의 없는 기압이 낮은 새벽에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숨을 참아가며 연막통을 터뜨려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15) <결사대작전>(고영남, 1969)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경험한 이문걸을 이후 <오, 인천!>(1981)의 특수효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사진16)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포스터 (사진17)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포스터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던 시기 특수효과를 시작했던 이문걸은 영화를 촬영하기 이전에 연기자들과 동선을 맞춰보고 촬영지에 가서는 수차례 시험 폭파를 했다. 연기자의 안전을 위한 이유가 첫 번째였기는 하지만 필름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폭파 시험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점차 표준이 되어 가자 감독들은 특수효과에서 더 많은 폭파 불꽃을 시각화하기를 원했고, 총탄을 맞자마자 피가 나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같은 영화에서 안중근(김진규) 의사가 이등박문(박노식)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문걸은 피가 범벅된 화약과 함께 솜을 긴 대롱에 넣고, 에어스프레이(Air-spray)로 쏘아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쟁 영화에서 총탄을 맞아 가슴에서, 머리에서, 철모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들은 분장과 이런 특수효과의 트릭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대만과 홍콩영화와의 합작이 많아지고, ‘으악새 영화 혹은 참바라 영화’로 불리는 액션영화가 국내에서 많이 제작되던 시기,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같은 영화에서 이문걸은 배우들의 액션과 점프를 도와줄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장비를 도입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사진18)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포스터 이 영화 작업을 통해 이문걸은 할리우드식 영화제작 및 운영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했다. (사진 19)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폭격 장면 스틸 특수효과가 주요했던 전쟁영화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은 이문걸의 작품연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그가 특수효과를 담당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문걸은 <오, 인천!> 촬영에 참여해 할리우드식 영화의 제작 및 운영 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값진 계기를 얻었다. 통일교 문선명의 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이 작품은 <디어 헌터 Dear Hunter>(마이클 치미노, 1978)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프레드 크래머(Fred Cramer) 팀이 도맡아 작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한 무기류의 국내 반입이 쉽지 않았을 뿐더러 할리우드에서 촬영용으로 사용하던 흑폭약이나 화학 약품들을 한국에서 구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또 특수효과가 대부분인 로케이션 촬영이 상당수이고 계획대로 촬영할 수 있기 위해서 국내 여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자 이문걸의 특수효과 팀이 합류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촬영용 폭약은 대부분 이문걸이 직접 공수해 가능한 것이었고, 이문걸 팀은 촬영 상황에 따른 장비 응용력은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이 팀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깊어져갔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인천 등대 유리창을 깨어야 했는데 건설부 친구들이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산소통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도리가 없어서 이문걸 씨가 고무줄에 베아링을 연결지어 쏘아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한국 측의 이문걸 씨나 박광남 씨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어서 미국 측도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6) 실사에 더 유능했던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과 미니어처를 제작해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을 촬영했으나 결국 감독 테렌스 영은 이문걸에게 맡겨 그 장면을 재촬영을 했을 정도로 그의 미니어처 폭파 기술을 인정했다. 또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이문걸이 만든 콘트롤 박스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결국 이문걸 팀에게 컨트롤 박스를 얻어갔다. 총탄이 비 오듯 퍼붓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아비규환의 전쟁터. 그리고 가슴에 총탄을 맞은 연기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 모든 장면들은 진짜‘처럼’ 보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가져야하고 감독이 ‘컷’을 외칠 때까지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은 머리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이문걸이 일생을 바친 특수효과란 “같은 양의 특수약품이더라도 방향, 습도, 위치에 따라 위력이 다르고 화면도 달라” 7) 지기 때문에 철저한 계산은 물론 수많은 경험치가 필요한, 자신은 물론 스태프의 목숨을 담보로 한 매번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총기 소지가 힘들 뿐 아니라 탄약과 화약을 민간인에게는 공식적으로 판매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문걸은 종종 ‘불법으로’ 일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참고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는 가운데 영화 장면을 위해서 총을 개조하고 뇌관을 만들었다. 이문걸은 서늘한 간담을 뜨거운 열정으로 녹이며 임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험과 현장 감각으로 한국영화의 명장면들을 만들어 낸 특수효과 ‘맨’이자 스크린의 마법사이다. *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를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 참고. 2) 「김기덕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5 참고. 3) ‘TNT 4백 「파운드」로 쾅!’, 조선일보, 1962년 8월 28일 4면. 4) 오홍근, ‘국내 유일, 그만둘 자유도 없어 영화 특수효과맨 이문걸 씨’, 중앙일보 1981년 2월 17일 6면. 5)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2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1/2월호, 45~48쪽. 6)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3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3/4월호, 43쪽. 7) 오홍근, 앞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