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스데이 틸 선데이
- 감독
- 도밍가 소토마요르 카스틸로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파올라 기아니니, 산티 아우마다, 프란시스코 페레스-바넨, 에밀리아노 프레이펠드, 호르헤 베커
이 연재에서 존 포드의 1930년대 작품 중에는 1939년의 신화적인 두 영화 < 역마차 >(글)와 < 젊은 날의 링컨 >(글)을 제외하면, < 굽이도는 증기선 >(글)(1935) 밖에 다루지 않았다. 이것이 존 포드의 세계가 1930년대 말에야 원숙해졌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위의 세 편만 만들었다 해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포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빛나는 순간을, 압도적인 걸작들에 가려진 영화들 곳곳에 새겨놓았다. 그중에서도 < 순례여행 >(1933)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이 전사한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 순례여행 >은 무성영화 < 네 아들 >(글)(1928)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캐릭터의 면에서라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 시골 마을이 무대인 <네 아들>의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순박한 전통적인 어머니이다. 반면 미국 시골 마을이 무대인 <순례여행>의 어머니는 거의 정반대로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외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 비정한 가모장은 아들의 아이를 가진 연인과 떼놓기 위해 아들의 입대서류를 제출한다. 아들이 프랑스에서 전사한 뒤에도 아들의 아이를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뒤, 프랑스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어머니들의 프랑스 순례여행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바뀐다. < 순례여행 >은 곡예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엔 두 가지 난제가 있다. 어머니 한나 제솝(헨리에타 크로스맨)은 포드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에 속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이만큼 부정적인 중심 캐릭터는 < 아파치 요새 >(글)의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 정도지만, 그의 곁엔 요크 대위(존 웨인)라는 포드적 영웅이 있었다. 한나는 <순례여행>의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이 부정적인 주인공의 긍정적 변화를 서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난제는 희극의 도입이다. < 순례여행 >은 기본적으로 스산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희극의 표정이 있고 유머러스한 사건이 있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음을 맞게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어떻게 조금이나마 희극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가 참회 이전에도 유쾌하게 웃는 장면을 관객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심지어 함께 웃도록 만드는 게 가능할까. 포드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다. 두 난제를 단 몇 쇼트의 배치와 간단한 대사만으로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적 곡예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만큼 경묘한 솜씨다. 미학적 전위성을 앞세운 나머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장인적 능력을 경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작가이고,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경제를 경유해 발현되었다. < 순례여행 >은 포드가 이미 1930년대 초반에 어떤 이야기라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걸출한 장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포드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그가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의 자질은 시나리오작가의 능력에 속하며, 1930년대부터 < 웨건 마스터 >(글) 외에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는 없다. 세 편의 포드 영화에서 각본을 쓴 누널리 존슨은 포드가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써서 전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포드는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고치면서 특히 “대사에 대한 눈부신 감각”을 발휘했다. 포드와 13편의 영화를 함께 한 시나리오작가 프랭크 뉴전트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언제나 포드의 것이었고, 시나리오작가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 순례여행 >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능력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부를만한 특유의 간결한 터치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 터치의 중심에 한나 제솝이라는 여인, 혹은 그 여인을 연기한 헨리에타 크로스맨의 얼굴이 있다. 이 영화 외엔 영화사가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는 이 배우의 시선과 표정의 쇼트에 포드는 분노와 집착, 불안과 연민, 망설임과 혼란의 긴 이야기를 새겨 넣는다.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이 여인의 눈 속이다. 포드는 영화적 풍경의 발명가이지만 배우 연출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화의 비밀은 배우의 눈을 찍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말도 포드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순례여행>은 여인의 표정과 시선의 영화다. #1 #2 #3 #4 < 순례여행 >은 한나의 표정과 시선에서 시작된다. 들판에서 일하는 아들(#1)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2)은 만족스러운 것 같다. 아들과 농장이 그녀의 소유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이 땅에서 한나는 제왕이다. 아들과 땅의 소유자인 그녀는 동시에 시선의 권력자이다. 그녀는 적어도 여기선 다 볼 수 있다. 농장이 원경으로 보일 때도 지평선은 보이지 않거나 화면의 상단에 드러난다. 게다가 이 농장은 < 선라이즈 >의 마을을 연상시키듯 안개와 옅은 어둠에 갇혀 있다. 이곳은 한나의 시선이 편재하는 그녀의 폐쇄된 왕국이다. 그러나 그 소유와 시선의 권력은 처음부터 금이 가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울타리를 넘어간다. 그는 연인 마리에게 달려가는 중이다(#3). 한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유물인 아들을 앗아갈 대상인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권력의 위기를, 전 장면과는 다른 불안한 표정의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4). #5 #6 #7 #8 아들 제임스가 연인을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다. 제임스는 무언가를 보면서 환한 얼굴로 연못에 돌을 던진다(#5, #6). 연못의 물이 파문으로 너울거리다 파문이 가라앉으면서 마리의 얼굴 윤곽이 수면에 드러나고 카메라는 틸트업으로 마리의 얼굴이 비춘다(#7). 연못을 사이에 둔 수줍은 두 연인의 애틋한 유희. 그런데 더없이 아름답게 촬영된 이 유희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과 비애가 있다. 연못이라는 작은 격리, 장난이자 신호이지만 수면에 비친 연인의 이미지의 훼손을 경유해서 비로소 마리가 등장할 때 마리의 얼굴은 놀랍게도 기쁨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8). 마치 앞으로의 서사에서 펼쳐질 격리와 훼손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는 듯. #9 #10 마리의 클로즈업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과 비교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 보고 대화할 때의 숏-리버스 숏을 떠올려 보자. 어머니의 클로즈업과 아들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크기가 다르다(#9, #10). 한나의 강조된 클로즈업에는 프레임을 지배하는 모종의 표정이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평범한 클로즈업에는 단순한 리액션의 표정만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서사 내에서의 둘의 다른 지위를 반영한다. 이 영화는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11 #12 마리의 클로즈업(#8)이 인상적인 것은 그 크기와 표정의 강도에서 연인인 제임스의 쇼트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가 제임스를 바라볼 때, 그녀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갈 어머니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의 클로즈업은 제임스의 클로즈업의 리버스숏이 아니라, 이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 한나의 클로즈업(#4)의 리버스숏이다. 한나의 시선의 편재성이, 그 권력의 강력함과 비정함이, 그리고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까지 이 기묘한 클로즈업에 담겨 있다. 포드는 불과 4분 만에 이 모든 상황과 예감을 단 몇 개의 숏만으로 압축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현실적 대면은 조금 뒤에 이루어진다. 한나는 마리를 찾아와 아들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이 장면의 숏-리버스숏에서의 두 인물은 정확히 같은 크기와 강도로 담겨있다(#11, #12). < 순례여행 >은 두 여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13 #14 제임스가 프랑스 전장으로 떠나는 기차역에서의 가련한 두 남녀의 마지막 조우 장면(#13)도,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한나는 보고 있었다. 이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기차역 장면이 얼마 뒤에 등장한다. 제임스가 전장에서 생매장당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 한나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멀찍이 있던 마리와 아들 지미는 기차로 다가와 창가에 앉은 한나에게 자신과 아들을 위해 제임스의 묘지에 놓아달라며 꽃송이를 내민다(#14). 두 장면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모두 최종 목적지가 프랑스이며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하지만, 전자의 제임스는 후자의 꽃으로 대체되었고, 마리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이제 열 살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장면에서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존재했던 한나는, 제임스 대신 기차를 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숏(#14)이다. 이 장면의 요점은 꽃을 받아드는 한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전 장면에서 한나는 땅을 20에이커나 더 샀다. 그녀의 왕국은 더욱 커졌고, 그 강대한 왕국에 마리와 아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놀림받는 아이는 한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제임스의 개에게 접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한나는 마리의 꽃을 받았고, 포드는 그녀의 얼굴을 찍지 않았다. 이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찍은 것인가. 달리 말하면, 인물이 보지 않는 것인가, 카메라가 보지 않는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후자가 맞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맞다. 우리는 사실상 양자를 식별할 수 없다. 포드는 인물을 볼 수 없는 지점에 카메라를 두는 것으로 그 인물을 진정으로 드러낸다. 극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객관적 시점의 카메라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의 태도와 심리를 표현하는 것, 아니 그 인물의 고통을 존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가 감정의 미스터리를 찍는 방식이다. 이런 장면 앞에서 카메라의 시점에 관한 복잡한 기호학적 논의는 사실상 거의 무용하다. 나는 이런 카메라를 경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과 40여 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여기서 영화가 끝났고 이후는 여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나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을 감춘 채 순례여행을 떠날 것이고, 결국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이 미스터리의 감정 숏에는 영화 전체에 값하는 긴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이후에는 웃음이든, 참회의 눈물이든 허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모든 예감이 이 신비로운 숏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가지 난제의 해결하는 포드의 방식이다. #15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이후의 프랑스 장면들은 전반부와 대조적이다. 한나의 농장을 감싸던 폐쇄적 안개는 사라지고, 개방된 세상 앞에서 이제 한나는 제왕이 아니라 낯선 순례자가 된다. 자신의 왕국을 노려보던 한나의 시선은 이제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방황과 발견의 시선으로 바뀐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아들과 같은 고뇌에 빠진 청년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기적 어머니를 만나고, 자신의 왕국에는 없던 축제를 발견한다. 이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감췄던 자신의 표정을 마리와 아이에게 보여줄 일만 남았다. 아들의 아이와 사실상 처음으로 마주 볼 때(#15), 순례는 끝난 것이다.(계속)
서부극은 기원적이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막 무언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모종의 질서를 향해 꿈틀거리고 소용돌이치며 나아간다. 무언가는 새롭게 태어나 굳건해지며, 무언가는 조용히 혹은 몸부림치며 사라지고 잊혀간다. 남겨진 것들은 정말 남겨질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사라진 것들은 정말 사라져 마땅한 것이었는가. 서부극은 기원을 기억하며 그렇게 묻는다. 서부극의 매혹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다루는 기원이 사료를 통해 재구성된 태고의 것이거나 이야기꾼에 의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기원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과거의 역사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 의식하진 못했을지라도, 영화사 초기와 고전기에 서부극을 만들었던(혹은 만들도록 요구받았던) 미국 감독들은 혜택받은 창작자들이었다. 18세기 말까지 세계 지도에 존재하지 않던 미국은 19세기를 거치며 유혈과 혼란을 대가로 거대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는 국가 형성과정의 고통과 불안과 희열을 직접 겪었다. 근대적 정체성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건국의 역사가 그들의 가족사에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그들은 근대적 정체성이라는 복합적 의제의 사회적 기원에 이를 수 있었다. 서부극이라는 기억의 서사에서 개인, 가족, 민족, 지역 공동체, 국가는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는 단위가 아니라 끝없는 교란과 충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다른 단위들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과도적이고 유동적인 단위였다. 서부극의 기원성에 대한 또 다른 면은 서부라는 장소에 있다. 서부는 미국의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미개척지, 무질서, 황야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현대 미국의 형성과정에서 원주민 축출이라는 정복전쟁의 요소와 신세계 개척이라는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 해도, 개척자들의 장소는 결국 미지의 위협과 희망을 품은 채 끝없이 펼쳐진 황야였다. 그들의 왜소한 공동체는 광대하고 텅 빈 공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기원의 자리에 버티고 선 무심하고도 냉혹한 황야의 풍경. 역사와 문명은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였는가, 아니면 풍경은 문명의 서사를 넘어 초역사적 시간을 살고 있는가. 이것은 서부극의 또 다른 물음이다. 서부극은 지리적으로도 기원적이다. 기원에 놓인 풍경의 시간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납득시킨 사람은 물론 존 포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1962) 태그 갤러거가 도덕의 시대(The Age of Morality)라고 이름 붙인 시기(1962~1966)의 첫 해에 68세의 존 포드는 후대의 평자들이 서부극의 만사(輓詞)라고 부르게 될 걸작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내놓는다. 포드는 이후에 < 도노반의 산호초 >(1963) < 샤이엔의 가을 >(1964) <일곱 여인>(1966) 등 세 장편을 더 만들었고 <서부개척사>(1962)의 한 에피소드와 TV 시리즈 한편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하나는 풍경이 없는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유례없는 영화적 풍경을 발명한 존 포드는 긴 이력의 마지막 단계에서 포드 서부극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고유한 풍경을 지우고 실내 서부극, 혹은 연극적 서부극으로 부를만한 이례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플래시백의 구성이다. 100여 편에 이르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플래시백이 영화의 본론을 구성한 것은 이 영화를 포함해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 < 롱 그레이 라인 >(1955) 등 극소수다. 풍경 없는 플래시백, 내성(內省)과 회한, 사라진 것들의 침묵과 기억....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고요하고 섬세하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다. 줄거리는 이렇다. 노년의 상원의원 랜섬 스토다드(제임스 스튜어트)와 아내 할리(베라 마일즈)를 태운 기차가 작은 서부 마을 신본에 도착한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랜섬은 한 사람의 장례식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전 젊은 법률가 랜섬은 법률책 몇 권만 들고 명성과 부를 찾아 동부를 떠나 서부로 향한다. 신본 외곽에서 랜섬 일행이 탄 마차는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 일당에게 강도를 당한다. 여성 승객을 보호하려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랜섬을 톰 도니폰(존 웨인)이 발견하고 신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할리에게 데리고 와 치료받게 한다. 법으로 리버티를 응징하겠다는 랜섬, 랜섬의 방식을 비웃는 소목장주이자 강한 서부 사나이 톰, 톰과 랜섬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랜섬에게 마음이 기우는 할리. 세 남녀 사이엔 감정적 긴장이 높아간다. 대목장주에게 고용되어, 톰과 랜섬이 이끄는 신본 주민들의 주 편입(statehood) 시도를 저지하려는 리버티는 마침내 랜섬을 결투에 끌어들인다. 랜섬은 기적처럼 리버티를 쓰러뜨린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랜섬은 이후 정치가로 승승장구하지만, 기원의 진실은 다른 데 있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고전적 서사의 기술이라는 면에서 거의 완벽한 영화다. 존 포드 특유의 리듬감과 유머가 빚어내는 활력은 여전하지만, 사건들은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매끈한 기승전결의 구성이 전개되며 인물들은 분명한 정체성으로 성격화되어 있다. < 황야의 결투 >의 산만하고 거의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구성(17회 참조)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정교함은 놀라울 정도다. 역사적 사실과 장르적 관습이 교직된 이야기의 복잡성과 냉소와 감상과 격정이 중첩된 정조의 풍성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극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다. 이야기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긴 논문이 필요하리라. 서부극을 근대적 정체성의 기원에 대한 질문의 서사로 이해한다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아마도 최상의 서부극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존 포드의 세계를 탐색해온 우리를 숙고하게 만드는 것은 풍경의 실종이라는 이례적 사태다. 오슨 웰즈의 말대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나오면 표절처럼 보이는 모뉴먼트 밸리가 없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지 않은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포드는 2년 뒤 < 샤이엔의 가을 >을 찍기 위해 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찾는다.) 우리의 관심사는 포드의 서부극에서 풍경이 사라지면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문제다. 당겨 말하면 풍경의 실종은 단순히 이야기의 공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넘어 무언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듯한 아득한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풍경의 실종과 플래시백의 구조는 모종의 내면적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플래시백은 사라진 것들을 현재에 불러온다. 불려 나온 과거는 현재의 감정적 결핍을 메우는 향수의 대상이거나, 현재의 진실의 결핍을 메우는 결정적 사실이거나, 대개 둘 중 하나다. 전자의 경우(주로 멜로드라마에서) 현재는 계기적 시점일 뿐 과거가 완결된 서사로 등장하며, 후자의 경우(주로 필름누아르와 미스터리에서) 과거의 보충으로 현재가 완결된다. 존 포드는 드물게 플래시백을 사용하면서도 둘 중 하나를 택한 적이 없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전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려 나온 과거 자체가 점점 망가져 가면서 플래시백의 마지막에 이르러도 회상 주체가 정박할 곳, 혹은 현재로 돌아올 수 있는 서사의 매듭이 보이지 않는다(8회 참조). 이 때문에 플래시백이 끝나도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플래시백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기괴한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후자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누가 리버티 밸런스를 쏘았나’라는 범죄 미스터리의 표제어로도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랜섬이 마침내 고백한 과거의 결정적 사실(리버티를 쏜 사나이가 랜섬이 아니라 톰이라는)은 현재의 사실로 승인받지 못한다. 편집장은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합니다.”라고 말하며 새로 밝혀진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실은 애매하다. ‘사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사실로 밝혀진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유통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말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하나의 전설이 충분히 힘 있고 광범한 전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사실의 진실성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플래시백이 밝혀낸 진실은 무화되며, 현재는 플래시백의 진실 없이 완결된다.(마지막 대사는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랜섬 스토다드에게 기차 차장이 각별한 친절을 베풀며 하는 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게라면 못 해 드릴 일이 없지요”이다. ‘그 사나이’는 여전히 랜섬이다.) 물론 이것은 극 중 현실 속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관객인 우리는 플래시백을 거쳐 현재에 대한 교정되고 확장된 앎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앎의 정체는 무엇일까. < 아파치 요새 >(16회 참조)의 결말에서 써스데이 중령의 허황된 전설을 들었을 때처럼 전설의 허구성과 힘을 다시 알게 된 것 정도일까.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플래시백에서 우리가 본 것은 어떤 정보, 그러니까 톰 도니폰이야말로 어떤 대가도 없이 리버티 밸런스라는 절대악을 처단한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극 중 현실이 사실로 수용하지 않은 사실뿐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 영화는 두 번 봐야 하고, 플래시백은 다시 플래시백 해야 한다. 옛 친구(연인)의 부고를 듣고 노부부가 먼 길을 왔다. 또 다른 두 옛 친구(링크, 팜피) 외엔 마을의 누구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내, 그리고 노부부와 두 친구가 조문객의 전부이며 관청의 지원금으로 만들어진 관에 놓인 외로운 노인의 죽음. 놀랍게도 여기엔 어떤 애도의 언사도 없고, 장례식은 등장하지 않으며 치러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네 조문객은 초라한 관에 담긴, 관객인 우리는 보지 못하는 시신을 볼 뿐이다. 그들의 유일한 애도 행위는 선인장꽃을 관 위에 두는 것이다. 그 관에 잠든 자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플래시백의 마지막 시점에서부터 영화의 현재까지는 아마도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악당 리버티 밸런스의 이름은 남았지만 그의 이름은 사라지게 만든 세월. 그 세월은 그 사내에게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영화의 서사는 단 하나의 단서도 주지 않는다. 이름도 삶도 완전히 잊힌 수십 년의 텅 빈 시간, 텅 빈 존재. 사내의 육신은 하루 전에 죽었지만 그의 존재는 오래전, 정확히 말하면 랜섬이 ‘그 사나이’로 오인되어 영예의 삶을 시작한 플래시백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지워졌다. 부츠도 권총 벨트도 없이 누운 그의 시신, 그의 얼굴은 스크린에서도 가려져 지워졌다(등장인물이 보는 것을 특권적 시선을 지닌 관객이 보지 못하는 장면은 영화를 포함한 시각 매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지금 부재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부재했다. 이 플래시백의 가장 놀라운 점은 플래시백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현재 시점과 플래시백 시점 사이에 놓인 톰 도니폰이라는 인물의 완전한 공백의 시간, 공백의 삶이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에서도 그 사이의 시간이 지워져 있지만, 플래시백이 플래시백의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강박적 노스탤지어의 순환운동이 빚어내는 감상적 정조가 그 공백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에서는 현재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고 있는 서사가 그 공백을 환기한다. 존 포드는 그 공백에 어떤 말도 바치지 않으며, 단 하나의 프레임도 할애하지 않는다. 마땅히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 혹은 우리가 무언가 있기를 바라는 곳을 완전히 비워버린 것이다. 부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구체적 실체로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랜섬이 톰의 시신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 시신이라는 육체적 대상은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잠정적 부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다른 의미의 부재는 공백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무언가이며 이를 근원적 부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지난 30년간의 톰의 시간이,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말해 누구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서사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시간은 이 근원적 부재의 차원에 놓여 있다. 현재 시점에 톰 도니폰은 영원히 떠났다기보다 근원적 부재에서 잠정적 부재(스크린에 등장하지 않는 시신)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신은 물리적으로는 짧은 시간만 지속할 뿐인 존재이므로, 그는 근원적 부재에서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근원적 부재로 이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잠정적 부재에 대해선 말할 수 있지만 근원적 부재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 <리버티 밸런스>에는 한 영웅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슬픔이 있다.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은 일련의 사건들의 효과와 인물에 대한 동일시에서 비롯된 표면의 감정이다. 하지만 여기엔 동정적 슬픔과는 다른 차원의 쓰라린 상실감, 아득한 허무감이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그 상실감과 허무감은 근원적 부재의 차원과 연관될 것이다. 플래시백을 통해 불려 온 사실이 아니라 불려 오지 않은 혹은 불려 나올 수 없는 공백, 그 말할 수 없는 부재가 보는 이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 흔든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보기 전까지는 이런 플래시백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나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왜 톰 도니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도 근원적 공백으로 사라졌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서부극을 보면서 해왔던 질문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왜 서부사나이는 잘못을 바로잡고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가. 이 영화 제목을 변용한다면, 누가 톰 도니폰을 쏘았는가. 태그 갤러거는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랜섬 스토다드이다. 랜섬이 대변하는 법과 질서가 톰이 대변하는 힘과 자유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수긍할만한 해석이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답을 생각해볼 수 있다. 톰 도니폰을 쏜 것은 그 자신이다. 여기엔 얼마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날 밤 랜섬과 리버티의 결투에서, 톰이 숨어서 리버티를 쏘지 않았다면 백면서생 랜섬이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톰은 할리를 얻었을 것이다. 이 결투는 꽤 복잡한 게임이다. 결투의 승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랜섬이 쏘았다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다만 법의 배타적 신봉자이자 무력의 반대자로서의 자기 윤리는 붕괴된다. 톰이 쏜다면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힘과 자유의 신봉자로서의 톰의 자기 윤리는 전혀 손상되지 않지만, 그는 결투자가 아닌 제3자이므로 명백한 살인자가 된다. 톰은 연적(戀敵)을 위해 살인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발설할 수 없다. 톰의 선택이 정의감의 발로인지 사랑하는 할리의 간청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결과적으로 톰은 힘의 영웅이라는 자리도, 연인 할리도 이미 법의 챔피언인 랜섬에게 모두 넘겨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상실은 바로 악당 리버티다. 리버티가 살아있는 한 공동체는 톰의 총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리버티가 사라지는 순간, 톰의 자유(liberty)도 공동체 내에서의 존재 이유도 사라졌다. 리버티를 쏜 순간 그 총알은 결국 톰 자신을 향한 것이다. 왜 서부사나이는 잘못을 바로잡고도 떠나는가. 적어도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는 ‘바로잡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총으로 바로잡는 순간 그는 존재의의를 상실하거나 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링고 키드(< 역마차 >)는 복수에 성공하고 나면 영원한 감금 혹은 추방을 피할 수 없다. 이산 에드워즈(< 수색자 >)는 공동체도 더 이상 원치 않는 복수의 여정에 나선 동안 문명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며 복수가 완수되는 순간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자 떠날 수밖에 없다. 전쟁 장르와 혼합된 기병대 서부극을 제외한 포드의 서부극은 서부 사나이의 자기 살해에 관한 이야기, 총알이 자신을 꿰뚫을 줄 알면서도 방아쇠를 당긴 사내의 이야기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은유적 죽음으로서의 떠남을 시신으로의 귀환으로 대체한 것이다. 풍경의 상실이라는 사태로 돌아오자. 앞서 풍경을 잃고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포드 서부극에서 풍경은 혹은 모뉴먼트 밸리는 문제를 해결한 서부사나이가 돌아가는 공백의 장소다. 그곳은 말해질 수 없고 묘사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층위에 있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이다(6, 7회 참조). 링고 키드도 이산 에드워즈도 닥 할러데이도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 곳은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플래시백이 환기한 근원적 공백과 동질의 장소다. 하지만 이 은유적 해석은 어딘가 불충분하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무시간적 풍경에로의 떠남은 사건의 서사 너머의 장소, 지금 이곳 아닌 어딘가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상상력을 응원하는 낭만적 바깥이 있다. 그러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는 바깥이 없다. 바깥이 있던 자리에 놓인 것은 지금 이곳의 관, 그리고 가려진 시신이다. 바깥은 이제 사라졌고 세계는 바깥 없는 폐쇄공간이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가 실내 서부극이라면 그것은 많은 장면이 실내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서사의 바깥이 사라진 서부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 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 쇼트를 꼽을 수밖에 없다. 말 탄 사내가 무언가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조금 뒤에 알게 되지만 그 사내는 톰 도니폰이며 그가 달구지에 태운 것은 강도를 당한 뒤 심하게 다친 랜섬 스토다드이다. 그는 중상자를 구하려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움직인다. 우리는 포드의 영화에서 영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을 수차례 만나왔다. 젊은 링컨(< 젊은 날의 링컨 >)이 마을에 처음 등장할 때, 그리고 이름없는 성직자(< 도망자 >)가 위험한 마을로 진입할 때, 그들은 마치 망설이듯 느리게 움직였다. 톰은 결국 랜섬을 위해 모든 것을 잃는 선택을 하게 될 미래를 예감이라도 하듯, 그래서 그 운명의 자리에 오기를 주저하듯 천천히 다가온다. 그는 이제 그를 위한 출구가 사라진 세상 속으로 그렇게 걸어온다.(계속)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만든 가장 개인적인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던 < 도망자 >(1947)의 흥행 실패로 큰 빚을 떠안게 되자(12회 참조), 존 포드는 서부극으로 돌아와 < 아파치 요새 Fort Apache >(1948)를 만든다. 포드는 자신의 전후 서부극을 돈벌이용(potboiler)이라고 스스로 폄하했지만, 그중에서 < 황색 리본의 여인 She Wore a Yellow Ribbon >(1949)에 대해선 종종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파치 요새>에 대한 자평은 엇갈린다. “돈벌이 목적에는 잘 맞았지. 하지만 날조된 이야기야.”(1950년, 린지 앤더슨과의 인터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야. 거기엔 액션도 있고 유머도 있고,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첫 작품이지.”(1965년, 에릭 르게브와의 인터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존 포드의 변덕스럽고 짓궂은 자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자의 발언에서 ‘내 인디언 형제들’, 그리고 그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말은 흥미롭게 들린다. 이 말은 < 아파치 요새 >의 어떤 면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아파치 요새>를 오래전에 보고 개인적으로 받은 첫 충격은 이 영화가 포드 자신의 < 수색자 >(1956)를 포함한 후대의 소위 수정주의 서부극들보다 더 수정주의적이며, 서부극의 만사(輓詞)로 알려진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보다 더 급진적인 탈신화와 서사를 이미 1948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서부극의 진화론 그리고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개념은 이런 영화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물론 포드의 말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오웬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은 아파치 요새 신임 부대장에 임명된다. 딸 필라델피아(셜리 템플)와 함께 요새에 도착한 이 성마른 인물은 외딴 서부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과 승진 및 동부 귀환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요새에는 백전노장 요크 대위(존 웨인), 써스데이의 육사 동기생 콜링우드 대위, 그리고 이들과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특무 상사 오로키(워드 본드)를 비롯한 노련한 하사관들이 있다. 마침 아파치 족이 보호구역을 넘어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요크 대위는 평화적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려 하지만, 써스데이는 보호구역 탈출을 핑계 삼아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써스데이와 그의 부대는 몰살당한다.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 황야의 결투 >(1946) < 도망자 >(1946)을 보고 헨리 폰다라는 배우에게 매혹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허공을 휘젓는듯한 긴 팔과 다리, 느린 걸음으로 등장해 어느 순간 프레임을 우아하게 장악하던 이 배우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여기선 전혀 볼 수 없다. 존 포드는 헨리 폰다의 특별한 자질을 < 아파치 요새 >에선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전작들에서 헨리 폰다는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그는 어떤 프레임에서도 앤의 묘비 앞에서 중얼거리던 젊은 링컨의 자문, 혹은 폐허가 된 자신의 성당을 다시 찾은 떠돌이 신부의 자문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 내 의지로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끈 것일까?’ 의지와 운명의 영원한 내적 교전. 그의 낮은 음성과 느린 동작에는 혹독한 교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어 침묵조차 치열했다. < 아파치 요새 >의 써스데이 중령은 전적으로 의지의 인간이다. 자신의 권위와 지위 외엔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이 과도하게 각 잡힌 군인은 포드 영화에선 보기 드문 범속한 속인이다. 그는 아무래도 포드의 영화 세상에 잘못 찾아온 손님 같다. 누구도(물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군사령부를 제외하고)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진입해 엄격한 말투로 프레임 내부의 모두에게 명령한다. 그의 등장은 프레임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화는 침묵에 빠지고 술자리는 어색해지며 무도회는 중단되고 저녁 식탁은 엉망이 된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체념의 몸짓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오던 헨리 폰다는 이제 그를 전혀 원치 않는 곳에 난입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1 #2 #3 이것이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는 그렇게 보이도록 찍었다.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중 반 이상은 요새 내부의 일상을 담고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는 가족, 평화로운 저녁 식사, 젊은 남녀의 로맨스, 무도회, 신병훈련... 요약된 줄거리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을 사소한 사건과 표정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 아파치 요새 >는 미군과 아파치의 충돌을 그린 서부극이라기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의 풍속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헨리 폰다의 경직된 몸짓과 강압적 말투는 이 풍속도의 오점으로 드러난다. 써스데이 중령의 죄는 무엇인가.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쟁을 벌여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그에겐 그만큼 중대한 죄가 또 있다. 공동체를 부인한 것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가 지닌 고유한 규칙과 지혜, 생기와 소란의 활동을 부정하고 억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오류와 공동체 수장으로서의 인간적 결함 사이엔 논리적 연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 아파치 요새 >에서 그 오류와 결함은 한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자는 다른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도 볼 수 없다. 써스데이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은 존 포드의 세상, 그러니까 소란과 도취, 왈츠와 세레나데의 난장이다. 결국 세속의 질서가 개입해 중단되지만, 어쩌면 중단의 운명으로 인해 덧없는 난장의 순간이 더욱 반짝이는 공동체다. 써스데이가 요새 공동체를 부인했을 때, 아파치 공동체를 오인한 전술가로서의 실패도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포드가 이 영화를 ‘날조된 이야기’라고 말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틀 빅혼 전투’ 혹은 ‘커스터의 옥쇄(Custer’s Last Stand)’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1876년 6월, 커스터 장군이 이끌던 제7기병대가 인디언 수족에게 패배해 미군 268명이 몰살당한 전투)을 소재로 삼긴 했지만, 존 포드는 인명과 지명을 전부 바꾸면서 실제 사건과는 사실상 절연했다. 이것이 ‘날조’가 뜻하는 바다. 포드의 관심사는 실제 전투라는 사건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다수의 비서부극도 포함해 포드 서부극의 숨은 주제는 공동체의 몰락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영웅이 없는 거의 유일한 포드 서부극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가 전경화된다. 요크 대위는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자질은 공동체의 몰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써스데이는 요새 공동체의 오점이며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반영웅이다. 그의 뒤에 국가의 명령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한편에 아파치 공동체가 있고 그곳엔 탐욕스러운 상인인 미첨이라는 반영웅이 있다. 그의 뒤에도 국가의 위탁이 받쳐주고 있으며 아파치에게 저질 위스키를 팔아 그들을 병들게 한다. 아파치 요새가 주 무대라고 해도 여기엔 두 공동체와 각 공동체를 파열시키는 두 반영웅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 아파치 요새 >의 주인공은 두 공동체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와의 협상을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요크 대위가 추장 코치스에게 예의를 갖출 때이다.(#4) 코치스는 요크는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국가의 명령과 위탁이라는 완장을 두른 써스데이와 미첨은 두 공동체의 존중과 신뢰를 파괴한다. <아파치 요새>는 그렇게 몰락해가는 공동체를 위한 만가이다.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존 포드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4 에필로그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부대장 요크와 기자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써스데이의 대형 초상화를 보며 기자가 묻는다. “위대한 분이었겠죠? 위대한 군인이었고요. 아이들한테는 영웅이 됐어요.” 요크가 대답한다. “그래요.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죠. 부대를 승리를 이끌었고요.” 이어지는 대화. “그런데 같이 죽은 사람들은 누구죠? 써스데이는 기억하는 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잊혀졌군요.” “잊혀지지 않았어요. 저기 그대로 살아있어요... 얼굴과 이름은 달라져도 그들은 지금이나 50년 뒤에나 여전히 이 요새의 훌륭한 대원들로 남을 거요. 써스데이가 해냈죠.” 이 대목은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보도합니다”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하지만 < 아파치 요새 > 쪽이 훨씬 신랄하고 비관적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고, 다만 해결의 영웅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아파치 요새>에서는 국가 권력의 대리자들로 인해 사건 해결이 실패했고 공동체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은 조작을 통해서라도 영웅의 전설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영웅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서글프게도 지금 그 조작의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다. 존 포드의 ‘날조’는 정확히 그 조작을 겨냥하며, 그리하여 잊혀진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한 저녁 식사 장면이다. < 아파치 요새 >의 단란한 시간들은 모두 써스데이에 의해 중단되지만 이 장면만은 예외다. 콜링우드의 집에 요크, 오로키 상사의 아들이자 신참 소위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과 사랑에 빠진 필라델피아가 모였다. 이때 문밖에서 세레나데가 들려온다. “제네비브, 그대에게 세상을 드리죠....” 영창 신세를 지고 있는 그러나 부대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퀸캐넌을 닥터 윌킨스가 빼내 노래를 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자 닥터는 위스키 한 병을 주머니에 꽂아주며 퀸캐넌을 영창으로 돌려보낸다. 노래와 춤이 없는 존 포드의 영화를 이젠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그 예외성과 넘치는 유머로 인해 유독 깊은 정감을 남긴다. #5 #6 또 다른 장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오로키 상사의 집에 그의 아들이 마이클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4년 만에 돌아오는 장면이다. 성경을 읽고 있던 오로키 상사가 문을 열고 등장한 아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성경으로 눈을 다시 돌린 뒤 일어나서 아들과 포옹한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 눈물을 훔친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여보, 아들이 왔어”라고 말한다. #7 #8 #9 #10 #11 #12 #13 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인지에 대해선 잘 설명하진 못하겠다. 다만 오로키가 아들을 보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시 성경을 보는 그 짧고 단순한 행위에 기쁨과 감사의 어떤 표현보다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건 알겠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마음이 그렇게 짧은 지체와 작은 동작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진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태그 갤러거도 이 장면을 < 조용한 사나이 >에서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에게 들꽃을 건네주는 장면과 함께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선사한 오로키도 콜링우드 부부도 그리고 다정했던 주정뱅이 하사관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며 그들의 소란스러운 공동체도 몰락할 것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아름답지만 더없이 스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