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
- 감독
- 문현지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김록경, 임재현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 기억 이 나시나요, 이제?” “아냐, 정확하게는 기억 이 안 나네요. (사이)” - 한나리, 「김희진 1차 구술채록문」,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권: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트워크』, 한국영상자료원, 2024, 178쪽. 구술이라는 것은 대상자의 과거 경험을 듣는 일이기에, 구술채록문에서는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기억이 난다’라든가, ‘기억에 남는다’라든가, ‘기억을 잊어버렸다’라든가, ‘기억이 없다’라는 등 우리는 기억을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무언가 또는 그 공간 자체인 것처럼 표현하곤 하는데, 특히나 아주 머나먼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야 하는 구술자들에게 그 공간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서 기억을 꺼내고 다시 넣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구술자가 기억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혼자 기억을 이끌어내기 힘겨워할 때 면담자들은 조심스럽게 구술자와 함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 사실 매우 불안하고 또 긴장되는 과정이다. 일단 면담자는 구술자에게 어떤 기억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자칫 기억을 이끌어내려는 과정에서 면담자가 구술자에게 선입견이나 면담자의 견해를 심어주게 될 수도 있다), 혹여 특정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구술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트라우마를 일깨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면담자와 구술자 간의 이러한 교감은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낯선 두 사람이 기억을 공유해가는 과정에서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는 구술을 지커보는 이의 입장에서, 구술자와 면담자의 라포(rapport)가 형성되는 과정 에 대한 썰을 좀 풀어볼까 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구술채록문을 통해 구술자의 기억을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읽어나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날씨도 따뜻해지고 하니, 잠시 미스터리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에서 벗어나서 이번엔 가슴 따뜻한 휴먼드라마다. 그가 과거를 기억하는 법 앞서 ‘구술자가 기억을 꺼내고 넣는 것이 쉽지 않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구술자의 연령대가 높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기억의 쇠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고, 조바심을 내는 순간 오히려 기억은 더 꽁꽁 숨어버리기 때문에, 면담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자의 화법과 기억법을 파악하며 천천히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리고 때론 기억의 문제보다도 고령으로 인해 청력이 약해지며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때는 필담을 준비하거나 목소리를 크게 내고 말의 속도를 늦춰 구술자가 입모양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던 시기가 있었으니,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한창이던 2020년이 딱 그랬다. 혹시 모를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 면담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구술자와 면담자 사이에는 투명 아크릴판 가림막을 설치했다. 고령에 청력까지 약한 구술자는 마스크 때문에 면담자의 입모양을 읽을 수도 없었고 발음이 명확히 들리지 않았으며,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판 때문에 필담도 쉽지 않았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달부 선생님의 구술은 진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구술연구팀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술팀은 구술채록문을 보는 이들이 조금 지루하고 산만하다 느끼게 될지라도 구술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여러 번 되묻고, 다소 대화가 반복되더라도 차근차근 사실 관계들을 확인하며 어둠 속을 헤쳐 나가듯 그렇게 나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매번 구술 인터뷰가 진행될 때마다 구술자의 가족분들이 함께 자리하여 쉬는 시간에는 구술자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면담자에게도 구술자의 부족한 기억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아주셨다. 그렇게 천천히, 그렇지만 그의 중요한 이력들이 구술채록문에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구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달부가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기 전에 그는 항상 장소 나 공간 을 먼저 떠올렸는데, 그렇게 해서 떠오른 연쇄적인 기억들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길림성, 자하문 밖에서의 생활, 군 생활을 했던 논산훈련소나 고모가 살았다는 종로5가 등 구술자는 눈앞에 실제의 공간을 그려놓고 그 공간 안에 건물, 물건, 사람들을 하나씩 배치하며 그것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마치 그림을 그려 채우듯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1) 면담자(공영민) : (필담으로) 선생님, 불나고 난 다음에 바로 《아리랑》으로 가신 거예요? 구술자(문달부) : 예. 서울에 있다가, 한옥 뒤에. 그리고 청파동 앞에 칠성사이다 뒤에 있었어요. 밑에는 창고고, 서무과가 있었고, 2층 가니까 김규동 씨, 전봉건 씨, 김희수 씨. 카메라가 김희수 씬데, 섭외는 잘 했는데. - 공영민,『 2020~2021년도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5권: 문달부 』, 한국영상자료원, 2021, 63쪽. (이하 페이지만 표시함) (2) 공 : 잡지사에 처음 들어가셨을 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그때 왜 “창문으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도자기도 보이고…” 이러셨다 그랬잖아요. 문 : 청파동이고, 후암동에 조금 후진 사람이 살았고, 나가야 집이 있고. 계단식으로 지어있고. 자하문 밖에서 이제 서정범 씨하고 만나서 후암동에 왔고. …(중략) 자하문 밖에는 임철호 씨 별장에 살았고. 공 : 임철? 문 : 임철호. 공 : 임철호. 문 : 응. 바로 자하문 옆에 있었어요. 공 : 네네. 그리고 후암동? 문 : 후암동부터 서 선생하고 같이 다녔죠. (65~66쪽) 1970년대 청파동의 전경 (사진: 《서울신문》, 2013. 3. 11.) 첫 번째 인용문에서 구술자는 청파동이라는 공간을 먼저 그리고, 자신이 일했던 칠성사이다 건물 뒤에 위치한 《아리랑》 사의 건물을 그린 뒤, 마치 건물의 단면을 잘라내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밑에서부터 각 층에 대해 설명을 해나가며, 2층에 이르러서는 자신과 함께 작업을 했던 인물들을 하나씩, 마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하듯 이야기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그 공간이 조금 더 커졌다. 그의 기억은 청파동에서 후암동으로 지리적 이동을 거치며 그 공간에 연결된 사람 역시 임철호에서 서정범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특히 마지막 답변에서 ‘후암동부터 서 선생하고 같이 다녔다’라는 말에는 시간의 흐름을 공간의 이동으로 대치시켜 말하는 그의 독특한 화법과 기억법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또 한 가지 문달부의 기억법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과거의 상황들 속에서 그가 느꼈던 정서적 경험은 종종 음식 과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1) 문 : 예. 그래 거기서 역전 에 살다가 해방돼서 북간도 에 잠깐 있다가. 그때는 보안대 시절이니까 남쪽으로 왔어요. 남쪽에 오니까 묘지에 미군들이 있더구만요. 거기 오니까 종이컵에 우유 하고 빵 하고 주더만요. 물론 무료로 받아먹고. 한참 올라오니까 국민학교가 있는데, 거기 오니까 국수 를 주더구만요. 콩가루 넣은 걸. 그때는 저 많이 먹을 때니까 주는 대로 다 먹고. 거기서 군용버스를 타고 남쪽 으로 왔어요. (32쪽) (2) 공 : 선생님, 홍대 얘기를 좀 들을게요, 홍대. 문 : 마포나루 있을 때. 공 : 대학 시절 이야기. 문 : 뭐 대학 시절에 공부했나요. 그때 비락우유 , 깡통에 팔았는데. 그 아가씨 한테 (웃음) 내가 비락우유 많이 먹었는데. 따끈한 물에 타 먹으면 좋고. 그때 뭐 먹고 돌아서면 배고플 때니까, 그 아가씨한테 많은 신세 졌죠. 부잣집 딸이에요. (37쪽) (3) 문 : 거기는 참, 여름이면 좋았어요. 두부집이 있는데 두부를 잘하더구만요. {두부요? 두부 (웃음)} 그래 순두부 를 많이 먹어요. 지금껏 순두부 즐겨 먹죠. 그래 그분 이 주로 세종로의 두부를, 음식점에 리어카로 가져 가다가 나중에는 자동차로 5가까지 배달하더구만요. 그래 그 다음부터 자하문 밖에 떠나오니까 자연지 멀어지고요. (39쪽) (4) 문 : 한국 사람 귀빈 이나, 외국 사람 귀빈들 이 오면 거기서 브리핑하고 논산 소개를 해요. 거기가 계백장군이 활동했던 황산벌판 이에요. 전주비빔밥 이 유명한데 웬만하면 전주고. (모두 웃음) 진주에 가면 이제 진주비빔밥 은 육회 예요. 소 생고기를 넣어 주더군. 그래 논산서 비교적 편안하게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제대했어요. (41쪽) 첫 번째 인용문에서 중국에서 살던 구술자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경로와 그때마다 만난 사람들 그리고 먹은 음식을 함께 떠올린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도 홍익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자신이 살던 ‘마포나루’를 먼저 떠올리고 당시에 만났던 학우를 떠올린 뒤 그녀가 주었던 따뜻한 비락우유를 이야기한다. 그 이후의 인용문들도 모두 특정한 시기 자신이 지냈던 공간을 떠올리고, 그 공간에서 만났던 사람에 대해 떠올린 후, 거기서 즐겨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며, 그곳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이러한 그의 공간-음식-당시 만난 사람이 연결되는 기억법을 이해하면, 다른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커피 ’에 대한 그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1) 공 : 아, 유태인 사장… 그래서 선생님께서 그때 커피 도 드시게 됐다고요? 그 얘기해주세요. 문 : 예. (웃음) 아침에 출근하면 으레, 처음에 가니까 씁쓸한 걸 맨날 줘요. 공 : (웃음) 근데 나중에 좋아하게 되셨어요, 지금처럼? 문 : 그럼요 (웃음) 이제는 완전히 중독자가 됐죠. (58쪽) (2) 공 : 그러니까 유솜(USOM) 관계자들 이 럭키화학에 와서 같이 일도 하고 그랬다는 거죠, 선생님? 문 : 예, 그렇죠. 공 : 그럼 반대로 선생님께서 유솜에 가신 적도 있어요, 유솜 사무실에? 문 : 그럼요! 자주 갔지요. 공 : 자주 가셨어요? 문 : 거기 가서 커피 많이 먹었죠. (모두 웃음) (111~112쪽) (3) 공 : 그때 말씀하시기를 방송국에 계실 때, 외국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셨다고 그러셨잖아요. 문 : 그렇죠. 공 : 외국인들이 가져온 애니메이션이었던 거죠? 문 : 그게 아마 의례인, 어린이 시간에는 외국 만화를 많이 했어요. 공 : 고정된 시간에 외국 만화를 많이 내보냈어요? 문 : 네. 저는 RCA 방송국 에 와서 처음에 커피 를 먹어 보니 ‘씁씁한 거 이걸 왜 먹나’ 했어요. (모두 웃음) 공 : 근데 좋아하시게 되셨잖아요. 문 : 그럼요. 이제 완전히 중독이 됐죠. 공 : 그때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그 외국 사람들 이랑 같이 회의도 하신 거죠? 문 : 그렇죠. (117쪽) (4) 공 : 다 같이 다니시면서 사진을 찍으셨다는 거죠? 문 : 그렇죠. 예. 서광수 씨하고. 공장 사진은 거의 그분이 찍어 줬고. 또 상업 사진은 김한용 스튜디오가 잘 돼서 제품 사진은 거의 그 집에서 찍었어요. 공 : 그리고 유솜의 사무실에도 자주 왔다갔다 하시고요. 문 : 그렇죠. 거기 가서 커피 먹기 시작해서 중독이 돼서 아침저녁으로, 낮에도 전부 커피예요. (135쪽) 그가 커피를 언급하는 부분은 여기에는 인용하지 않은 종로에서 커피를 마시던 이야기(전람회 감상 후 커피를 마시고 집에 갔던 경험, 명동에 있는 커피숍에서 지인들을 만났던 경험 등)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을 만났던 기억과 연결된다. 맥락을 끊고 인용을 한 것이라 구술자가 처음 커피를 맛본 장소를 헷갈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확실하게 처음 커피를 맛본 곳은 ‘RCA 방송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RCA 방송국을 다니면서 외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고 그때 아침마다 커피와 도넛 같은,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들을 처음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력을 따라 구술이 진행되면서 유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다시 커피 이야기를 꺼낸다. 유솜(USOM)은 주한미국경제협조처(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Republic of Korea)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1952년 체결된 ‘한미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무상의 경제적 원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RCA 방송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직원 외에도 많은 미국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기업 광고 제작 당시 협력을 구하기 위해 유솜 사무실을 방문하면 한국인 직원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문달부에게 이러한 외국인들과의 만남, 미국식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느낌은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보다, 당시 그가 마셨던 낯설고 씁쓸한 커피 의 향과 엮여 나온다. 1956년 개국한 RCA 방송국(HLKZ TV)의 전경 (사진: 《세계일보》, 2011. 11. 15.) 문달부의 구술은 유난히,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에 대한 정서적 표현들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 물론 이는 많은 시간이 흐르며 당시의 감정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화법이나 기억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동안, 그가 직접 언어적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감정들이 기억 안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구술은 여러 번 읽으며 곱씹었을 때 더 그 맛이 살아난다. 파편화된 언어, 흩어진 기억을 조립하기 하나의 사례를 짧게 더 살펴보고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1999~2000년 사이,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목표로 설립된 씨네디비넷에서는 총 109인의 영화인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투자를 받지 못해 사업이 중단되며 이 자료들은 영원히 묻히는 듯했는데, 감사하게도 씨네디비넷의 대표였던 이하영 (현 하하필름스 대표)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에 모두 기증해주셨다. 당시 진행된 많은 영화인의 인터뷰 중에서도 여기서 소개할 것은 원로배우 김일해 (金一海, 1906~2004)의 인터뷰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직접 진행한 구술은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구술채록문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파편화된 언어들 가운데 찾아낸 구술자의 기억이 갖는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인터뷰집은 8월 중 공개예정이다!). 인터뷰 당시 김일해는 95세의 고령으로 일반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녀분들이 동석하여 인터뷰어를 도와주었다. 이 인터뷰는 얼핏 보면 마치 인터뷰어의 질문을 무시한 채 구술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술자의 말들 속에 존재하는 일관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매우 재미있는 면이 많은 인터뷰이지만, 여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조금 살펴보겠다. 김 : 그때 조선영화주식회사 라는 게 처음 됐어요. 그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배우로 들어간 사람은 말이야, 그놈들이 뽑아간 건 누군고 하니 그때 벌써 조선이 자꾸 망해들어갈 적이야. 근데 그때 들어와서 그 조선영화주식회사 맹글어 놓은 놈이 꼽춘데, 그게 일화의 제작부장으로, 주인공으로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일화에서 조선영화주식회사란 걸 ‘너 나가서 여기서 이 영화를 잡아라.’ 이렇게 됐지. … 한국에서 유명한 것들을 알지, 다. 그래 나와줘야 하는데, 제작을 해야 하는데 ‘너도 같이 좀 협력 바란다’ 근데 역할을 정했는데 우선 전부 일본놈들만 꽃을 주고 나까정 졸병이야, 모두. 근데 이제 ‘ 한국에 사람들을 유혹시켜서 전부 군대로 나가게 해야 한다. ’ 내가 생각하면 아주 엄청난 얘기거든. 그래서 ‘ 허허, 이거 큰일 났구나. ’ 그러니 내가 이제 제작부장 찾아가서 껍치지. “나 일 그만두겠소.”, “왜 그러냐?” 내 편이 지금 한국에 많다 그거야. 그런데 우리를 꽃을 주고서 해라. 그래도 자꾸 뭐 ‘군대로 나가라’, ‘*노해라’, ‘만세를 불러라’. 그리고 남산으로 끌고 가서 그 친일파들, 여기 나와 가시는 분들, 남산으로 끌고가서 찬물로 목욕시키고 이럴 판이야. … 왜 한국 사람을 큰 이런 이렇게 만들어놓고, 일본 유명한 사람들은 밑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줘야 손님이 그래도 마땅치 않은데, 전부 저놈들이 꽃을 들고 나가고 한국 사람은 전부 **를 가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시시한 걸 주면, … 내가 무슨 사상이 말이여, 한국 사람이니까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이 이러니 내가 그 팬들한테 미안하다 그거야. … 아, 팬들이 그냥, 한국 전체가 팬들이 **한테 있는데 그거 시시한 역할 주면 누가 그 월급 받아 먹어. … 그렇다고 민족주의자라고 그랬다고 어떻게 보면. 자기 사상에 대한 문제, 예술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나중엔 인제, 내가 “무슨 사상에 대한 문제는 그 부분은 떠난 거 아니냐” 이러고. … 사상 문제는 여기 또 난거다. 그러니까 너희 알아서 해라. … 네가 생각대로 하진 않는데 만일 안 한다면 이제 사상범으로 생각하기 쉽다. 오해받지 않도록 해라. 이렇게 됐지. 그래 가만히 보니까 그놈들도 좀 기분 나쁘거든. 그만두자니 이거 이제 사상으로 취급해 가지고, 그래서 전부 출연했**. 여기서 김일해가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가 1937년에 설립된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말하는 것인지, 또는 194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위에 인용한 이야기가 실제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주1 여러 가지 사실 관계를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김일해가 1939년 무렵부터 조선과 일본이 합작한 선전영화에 출연한 것은 그의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위의 구술은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해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선전영화의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일본 배우들에게만 좋은 역할을 주었고(그는 이를 ‘꽃을 주다’라고 표현한다) 한국인 배우들은 모두 졸병 역할을 맡기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자신을 좋아하는 조선의 영화팬들에게 그런 시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그는 영화제작자를 찾아가 거절 의사를 표했고, 이를 들은 영화제작자는 ‘당신이 출연 제의를 거절하면 자칫 일본 정부 측에는 사상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오해받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충고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은 배우들의 출연 거부를 ‘사상으로 취급’했고, ‘남산으로 끌고가서 찬물로 목욕시키는’ 상황이 두려웠던 모든 배우가 출연에 응하게 되었다. 김일해가 출연한 <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 >(이익⋅야마나카 유타카, 1939)의 스틸 이 부분이 전체적인 인터뷰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이 구술 바로 앞서 나오는 ‘ 나운규 ’에 대한 그와 아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나운규는 < 오몽녀 >(나운규, 1937) 촬영 도중 사상범으로 경찰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때 일제 순사들을 설득해 그를 경찰서에서 빼내온 것이 김일해였다. 아들 : 아니 그리고 아버지, 나운규 씨가 민족주의자인데, 김 : 그럼, 민족주의지. 그런데 아편을 하기 때문에… 아들 : 근데 나운규 씨가 <오몽녀>를 만들다가 구속이 됐어요, 그렇죠? {응} 근데 구속이 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나운규 씨를 뺐단 말이야. 아버지가 가서 얘기해 가지고 촬영 마무리하게. 김 : 그렇지, 그렇지. 경찰서에 가서. 아들 : 이 얘기가 지금 먼저번에 방송이 됐어요, 이게.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볼 때는, 내가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친일파야. 나운규는 민족주의자고. 김 : 아니, 나를 친일파로 인정한다는 사람은 가짜로 친일파로 맹글어놨지만, 난 *** 있지, 지금. 김일해는 이 대화에서 나운규를 민족주의자라고 말하고,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민족주의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6.25전쟁 당시 월북한 영화인들과, 한강변에서 무언가를(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모조리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섞어가던 중, 이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갑자기 시작한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이 모든 이야기를 이어서 다시 읽어보면 그에게 ‘민족주의’ 내지는 ‘사상’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가 어떤 것인지, 그는 왜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할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영화제작자를 찾아가 선전영화 출연을 거부한 이유로 시시한 역할과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을 영화팬들, 월급 등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 사람들을 유혹시켜서 전부 군대로 나가게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일 났다’라는 생각에 제작부장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출연을 결정했기에 그는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할 수 없다. 거기에 6.25전쟁 이후의 냉전 상황은 그에게 ‘사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다소 느닷없이 흐름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지만, 오히려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기’야말로 그가 역사의 평가 속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 - 고령의 구술자들을 만나 면담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이감이 들 때가 있다. 2022년 주제사 ‘ 1980년대 이후 극장 지형의 변화 ’를 진행하며 만났던 구술자 양재형 (1925~)이나 김기봉 (1931~)은 두 분 다 이미 90세가 넘은 연세로, 우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면담자의 이름을 기억해주지는 못했지만, 이미 6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이야기나 군대에서 경험한 전쟁, 1960년대에 영화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자신이 일했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이 진행되는 2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되새기고, 재구성하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술자의 이야기가 언제나 다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을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구성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게 기억 창고 안에 차곡차곡 넣어두셨던 걸까를 생각하면 그가 그 기억과 보내온 시간들이 그저 놀랍고, 그래서 타인에게 이렇게 소중히 간직한 기억들을 공유해준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확실히 요즘은 옛날에 비해 스스로 기억해야 할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자주 연락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외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휴대폰이 다 기억해준다. 몇 번 갔던 곳은 머릿속에 잘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방문할 때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스스로 길을 찾아가곤 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싶으면 바로 휴대폰으로 지도 검색을 해본다. 우스갯소리로 뇌를 휴대폰에 의탁하고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다는 말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으로 남겨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물이나 인물, 상황들에 직면했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어떻게 이를 재구성하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감정들은 어떻게 처리하여 기억의 영역으로 넘기는가를 혼자 생각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만의 구술을 남겨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주1. 인터뷰 중반쯤에 한 번 더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언급하며 의정부 촬영소에서 발성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37년 박기채 ⋅ 이필우 등을 주축으로 설립된 영화제작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 인용된 부분에 등장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전후 맥락을 살펴봐도 구체적 작품이나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 즉, 그가 여기서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4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회사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출연한 조선⋅일본 합작영화의 제작사인 조선문화영화협회를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2022년 노만 선생님의 생애사 구술 인터뷰 를 진행하며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하여튼 그때 내 임화수 씨를 처음 알게 됐고, 임화수 씨는 또 젊은 나를 굉장히 좋아했어. (웃음) 그래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하고는 전연 달러. 주먹이지만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겸손해요. - 노만(영화평론가, 2022, 90쪽) 아마도 위 발언에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 ’란 SBS 드라마 < 야인시대 >(2002~2003) 속 캐릭터로서의 임화수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51.8%, 평균 시청률 30%를 찍었던 이 드라마에서 임화수라는 캐릭터는 픽션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썰’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고, 또 해당 역을 맡은 배우의 살벌한 연기 덕에, 시청자들에게 아주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에 비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위 구술에서 이어지는 “겸손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겸손’의 뜻이 바뀐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국제영화》 1959년 7월호 속 임화수 하지만 임화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1950년대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양반이 스태프들한테는 잘했어요. 거기서 말썽 일으킨 거는 저, 돌아가신 김희갑 씨 때려가지고선 갈비가 부러졌다,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스태프들한테는 난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 또 영화에 투자도 많이 하고요. 이런 얘기하면 뭐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영화산업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난 생각을 해요. - 이도원 (편집, 2004) 내가 생각하기에 임화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본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나뻐,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원래 깡패 출신 아니에요? … 나는 임화수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이에요. - 박진수 (조명, 2007, 53~54쪽) 아주 연예계에선 임화수라고 하면 알아줘야돼, 그때. 뭐 배우고 뭐고, 연예계에 하여튼 가수고 뭐 할 거 없이 임화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그렇게 돼 있었다고, 그 당시에. 근데 임화수 씨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마찰이 한 번도 없었고. … 그리고 임화수는 배운 게 없지마는 머리는 잘 돌아가고 약았어. 그때 그래가지고 무슨 문화부장관인가, 응? 박마리아 여사한테 가 붙어가지고 그때 문화부장관인가 뭐 발령이 났다가, 사건이 터져가지고 고만뒀든가, 아마 그렇게 됐어. 그 얼마나, 그 사람 위대해. 위대한 사람이야. 학교 못 다녀도 그런 정도로 했다면, 응. - 이지룡 (배급, 2012, 171쪽) 그러나 위 구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임화수가 괜찮은 사람이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어떻게 1950년대 활동한 영화인들에게 임화수가 깡패이면서도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는가이다. 사실 구술자들이 임화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일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덕을 봤거나, 그와 특별히 마찰을 겪지 않아 그의 나쁜 점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구술자들이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기억을 조금 우회하면서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공적(功績)’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산업을 이해하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앞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역사가 ‘임화수’라는 한 인간을 통과하며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이 아니라 마치 빛이 프리즘을 지나 여러 갈래로 굴절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다양한 결과들로 귀결될 것이다. 깡패는 왜 ‘극장’을 좋아했을까? 그럼 먼저, 임화수와 영화산업에 접근하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내가 영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시절에 < 장군의 아들 > 시리즈(임권택, 1990~1992)를 볼 때도, <야인시대>를 보면서도 항상 궁금했던 것은, ‘왜 저 사람들은 자꾸 극장 앞에서 싸우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에 적당한 장소로서 극장 앞에 공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김두한’ 하면 ‘우미관’이라는 극장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 깡패들은 이상하게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의 한 장면. 오른쪽에는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인 ‘우미관’이 보인다. 물론 이때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되니까’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극장은 아주 수지가 좋은 현금 장사였다. 임화수처럼 직접 극장을 운영함으로써 *주1 수익을 얻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흥행업은 주먹 패거리들에게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나는 경리만 보고 돈만 계산하고. 표 받고 뭐하고 하는 거는 주먹이 댕겨요. 극장에 가면 극장마다 그 동네 깡패들이 있어. 그러면 이놈들은 날마다 극장은 상시출입이야. 지 맘대로 돈은 안 내고. 얘네들이 내려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먹이니까 딱 오면 “아, 형님 오셨습니까.” 절대로 그냥은 못 들어와. 그리고 또 유명한 게 그 당시만 해도 지방 가면, 입장료가 500원이다 그러면 400원 가지고 와서 그냥 들어가려고 그런다고, 현찰로. 그러면 지금은 표를 찍고 그러지만, 여기 딱 궤짝이 있고 구멍이 뚫려있는데, 표를 받으면 여기다 넣는 거야. 그런데 이제 이 궤짝을 주먹쟁이가 깔고 앉아. 극장 직원이 표를 받아서, 돈도 받으면 그걸 그 궤짝에 넣는 거야. 이 궤짝이 그날 전체 수입이야. … 이걸 가지고 극장 사무실에서 쏟아 가지고 표는 표대로 돈은 돈대로 해서 다 계산을 해요. 그리고 ‘오늘 얼마가 들어왔다’고 극장에다가 먼저 들이민다구. 그러면 극장에서 마지막날 전체 수입이 얼마다 계산해서, 당시 극장이랑 3:7이야. 극장이 3이고 단체(공연/연극단을 말한다)가 7할 가져가는 거거든. 그렇게 계산해가지고 거기서 세금 떼고 돈 딱 주면 그걸 봉지에 다 넣고 계산서 딱 붙이고, 봉투를 딱 여매서 신주 모시듯, 잊어버리면 큰일나니깐. 그런 식으로 지방을 돌고 올라와요. - 김인기 (제작/기획, 2004) 구술자 김인기는 임화수와 어린 시절 같은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인연으로, 후에 성인이 되어 임화수가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을 때 그의 회사 경리로 일하며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인기에 따르면, 극장마다 일명 기도(木戸, ‘문지기’를 뜻하는 일본어)라고 불리는 힘 꽤나 쓰는 ‘주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역할은 입장권을 사지 않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려 하거나 과감하게 ‘자체 할인’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고, 표나 돈이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도록 돈통 지키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공연단과 함께 극장을 돌며 간혹 배우들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때려주는 일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깡패들이 한몫을 한 게 있어, 흥행계에서는. 그런 일 많지. 배우가 유명하면 또 명동서 술먹고 놀다가도 얻어맞기 일쑤고, 댄스홀에서도 곤조부리고 그런 거지. 그런 거 많어. - 황남 (배우⋅제작/기획, 2004) 이처럼 극장의 기도 또는 수표주임은 극장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력이었는데, 이들을 지정해주는 것 역시 그 지역을 관리하는 주먹 패거리들이었다. 1950년대 명보극장 부사장을 지냈던 구술자 이지룡은, 명보극장 의 수표주임으로 명동파 이화룡 이 보내준 사람을 썼다고 말했다. 명보극장의 전경과 내부 이화룡이라고 있어. 무섭긴 이화룡이 더 무섭지. 이화룡이는 명동파야. 임화수는 종로파고. 근데 극장 하나 시작을 한다 하면은, 그 기도주임이라는거, 수표주임이야, 응? (이화룡은) 바로 극장이 자기 극장인 거처럼 생각하고, “이 사장, 수표주임은 내가 보낼 테니까 그 사람 쓰시오.” 이렇게 된 거야. (질문) 수표주임은 임화수랑 이화룡이 보내주는 사람을 무조건, 모든 극장이 다 쓰는 거예요? 응, 대부분 아마 그랬을 거야. 내 알 건댄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착취해 먹는 게 아니고, 다 자기들 따르는 그 나름대로의 제자들이거든? 그러니까 밥벌이 하라고 취직을 시켜주는 거지. - 이지룡(제작, 2012, 170~172쪽) 그런데 이 정도뿐이라면 깡패들치고 매우 성실하고 건전하게 극장과 공존하며 수익을 나눠 갖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당시 깡패들이 극장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가장 주된 방법이기는 했지만, 좀 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삼류관인께 한 푸로 4일간, 그러면 네(4) 푸로를 해야 돼. 회장이 한 푸로, 써금써금헌 놈 영화사 아무거나 그냥 공이로 갖다가 붙여먹고 많든 적든 수입 가져가. 그때 유지광 이가 그다음 꼬붕이여. 유지광이가 대. 그러믄 인자 극장 앞 부근에 이런 놈 있어. “사장님, 우리도 먹고 살어야 된다”고 … 그럼 9일을 뺏겨 갖고 21일 갖고 장사를 허니 미치제. - 전경섭 (배급, 2007, 80쪽) 전경섭은 해방 이후 제국관 (동방극장으로 명칭 변경)을 불하받은 형 전기섭의 밑에서 극장 운영을 배웠고, 호남 지역의 영화 배급일도 맡았었다. 이후 전기섭은 서울 동대문 천일극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천일극장은 광장시장 앞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화극장 과 매우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술자 전경섭은 천일극장이 평화극장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가 자신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천일극장이 이정재의 권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 구술은 당시 이정재가 천일극장으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챙겨갔는지 설명하고 있다. 천일극장은 재개봉관으로 영화 한 편을 상영하면 평균 4일 정도 상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정재와 유지광, 그리고 그 밑에 깡패들이 영화사로부터 낡은 영화 한 편씩을 공짜로 가져와서는 극장에 상영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자신들이 가져갔다. 그러면 극장 측은 한 달 중 열흘 *주2 정도는 영업을 하고도 한 푼 벌어들이지 못하니,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장 주변의 깡패들은 대체로 영화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중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던 영화 흥행을 이용해 쉽고 빠르게 현금을 챙기고자 했다. 그러나 임화수는 단순히 극장 경영을 돈벌이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영화 제작에 돈을 투자했으며, 영화 정책에도 관여하고자 시도했었다. 그의 이러한 영화산업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기억 그때 그 면세조치운동이요, 지금 그거를 어떻게들 평가할런지 모르지만, 사실은 임화수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어요. 임화수가 그 국산영화면세조치를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 강대선 (감독⋅제작/기획, 2004) 1950년대 영화 기자로 활동한 바 있고, 이후 영화 연출, 영화제작⋅기획을 했던 구술자 강대선은 임화수와 관련하여 그의 가장 큰 공(功)으로 ‘국산영화면세조치’를 꼽았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비오는 날이었어요. 내가 기억하기론 여름인데, 돌아가신 김승호 란 배우가 있었는데,아주 유명한,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던 명배웁니다. 이 양반이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고 단성사 극장 흙탕물에 털썩 주저앉아서 땅을 쳤던 일이 있어요. 각 신문 사진기자들이 (담기에) 좀 좋아. 당대 최고의 스타가 말이지 비오는 날 말야 물구덩이에 앉아서 땅을 치면서, 또 연기는 좀 잘했겠어? (웃음) 연기자인데. 이거를 전부 그냥 사진을 찍어가지고 곽영주 경무관이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을 가리킨다)한테 드린 거라. 이 박사가 그냥 특명을 내려가지고 이기붕 씨가 손수 나서서, 말하자면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를 해줬지. - 강대선(감독⋅제작/기획, 2004)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영화배우 김승호는 당시 임화수가 경영했던 한국연예주식회사 소속 배우였다. 즉 임화수는 자기 회사의 소속 연예인을 이용하여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냈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곽영주를 통해 이 그림과 함께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청을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는 것이다. 영화 < 해떨어지기 전에 >(강대진, 1960)에서의 배우 김승호.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과 대략 비슷할 것 같은 사진을 골라보았다. 구술자의 증언이 너무 극적이고,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해서 하마터면 덜컥 믿어버릴 뻔했다. 그렇다고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 자체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약간 기억의 왜곡이 작용한 듯 보인다. *주3 사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국산영화뿐만 아니라 흥행물에 대해서도 입장세 인하 요구는 꾸준히 예술인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다. 그 결과 국산영화제작 진흥의 일환으로 1954년 3월 31일 공포⋅시행된 입장세법에는 ‘국산영화에 대해 입장세를 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 임화수가 극장 및 연예단체 운영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는 이루어져있었으며, 그는 오히려 이러한 특혜조치에 따른 이득을 누리기 위해 영화계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김승호가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에 이름을 알린 것도 1957년 < 시집가는 날 >(이병일, 1956)이 동남아에 수출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 에서 최우수희극상을 받은 뒤부터였다(물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연극계에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강대선이 기억하는 저 화려한 퍼포먼스는 적어도 1958년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4 비록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위 구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임화수라는 인물이 ‘김승호’라는 명배우를 동원할 수 있는 힘과, 동시에 국가 최고 권력에 닿을 수 있는 ‘끈’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영화계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외 진출 시도와 실패 임화수는 영화계에 첫발을 딛는 동시에 과감하게도 해외로 진출했다. 많은 당대의 영화인들이 꼽는 그의 두 번째 ‘공적’이 바로 이 해외와의 합작 시도이다. 그는 1957년 한국연예주식회사에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해준 것은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극장 체인과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영화사 쇼브라더스였다. 처음에 홍콩에 도착을 했더니, 트랩에서 내리는데 정말 배우생활 60년 동안에 그런 카메라 세례를 받아본 건 처음이야. TV기자라든가 잡지사, 신문사 기자들 한 50명이 트랩 밑에서 후레쉬를 터뜨리는데, 정말 야! 정신이 없더라구요. … 그날 저녁, 우리가 파티 저녁을 먹는데 그쪽 뉴스에 “한국배우들 도착” 그리고 합작영화 소개가 뉴스 시간에 나오더라구. 그러니깐 그때부터 우리 일행들은 좀 흥분이 되고, (웃음)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50년대 우리 영화계는 아주 빈약했고, 또 촬영현장 가도 카메라래든가 조명이래든가 여러 가지 기재가 아주 구닥다리였고. … 근데 가서 촬영현장을 보니까 쇼브라더스의 스튜디오라든가, 조명기구, 카메라 그리고 기술적인 그 흐름이 아, 역시 우리가 처음 보는 그런 환경에서 연기한다는 게 참 신기스러울 정도로, 변화를 느끼게 됐죠. - 윤일봉 (배우, 2015, 11~12쪽) 영화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의 스틸컷. 왼쪽이 구술자 윤일봉이다. 쇼브라더스 측에서는 일찍이 1956년부터 한국 정부에 자신들이 보유한 영화와 한국영화를 교환하는 방식의 무역 거래를 요청해왔다. 이 시기 쇼브라더스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한국과 일본으로 시장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한국도 1955년 제2회 동남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한국영화의 수출과 합작을 통한 기술 교류)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가 맞닿은 찰나에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 임화수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영화사들에 비해 더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임화수에게 닿아있던 정부 권력 덕분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합작영화 제작이 어려웠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당시에는 여권을 받아 해외로 출국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그때는 국제적이라는 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합작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나 홍콩을 자주 왕래할 수도 없었고. … 아주 여기서 허가 내는 데 어려왔어요. 절대로 못 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22~23쪽) … 나라에서는 여권이라든가 그 편의는 문화공보부, 그땐 공보부에서 ‘많이 편의를 봐줘라. 이거 대한민국을 위해서 외화수입만 의존하지 않고 이제 우리도 합작을 해서 우리 걸 제대로 국제적으로 이 무대에서 나가는 거니까 도와줘라’ 그래서 스무스하게 왔다갔다 하는 거는 참 잘했어요, 우리가. - 문금순 (제작, 2014, 22쪽) 하지만 무엇보다 합작 진행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화(外貨)를 국외로 반출하는 일이었다.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주식회사는 합작 당시 제작비를 5:5로 분담하기로 했다. 영화제작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거액이 필요한 사업이었고 그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0년대는 국내 보유 외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의 사용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매년 상공부의 무역 계획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규모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계획에도 없는 거액의 외화를 갑자기 필요에 의해 갖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임화수가 ‘썼다는’ 칼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해외시장 확보에 목적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투자를 자유스럽게 해야 하겠는데 우리 영화제작계에는 외화(外貨)가 없고, 또한 있다 해도 자유롭게 해외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정부는 선진국의 예를 따라서도 해외시장진출을 목적한 영화제작에 제작비를 보장 내지 보상해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의 자유스러운 길을 열어주어야만 우리 영화도 우방국가의 영화와 대열을 같이 하여 해외시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점유할 수 있고 따라서 발전과 향상을 기하리라 생각된다. - 임화수, "합작영화의 가능성", 《조선일보》, 1958. 2. 20. 4면 기사 중 어쨌든 이런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때그때 외화를 조달해가며 합작을 진행했다. 합작영화라면 외화 유출을, 인제 보내줘야 되잖아요? 근데 대체로, 송금하고 이게 아니라 이 양반이 싸 가지고 갔다고. 왜냐면 세관이라든가 이게 외화유출로, 법적으로 걸릴 수도 있는데 이이는 용감했어요. 그리고 또 세관 사람들 다 알고. 임화수 하면은 뭐 다 그때는 통할 때니까. “아, 오늘 누구 엄마 연락해서 몇 만 불 좀 사라.” 뭐 이래서 현금 주고. 자금줄이라는 게, 그이가 그렇게 돈이 많고 이러지는 않더라고요. 그때 평화극장 하면서 뭐 갈쿠리로 긁을 정도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이니까 현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거 갖고는 제작비 감당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에요, 잔돈푼은 될지언정. 대개 재택이 엄마가 계모임을 조직해서, 그거 어… 동대문시장 상인연합회에 7형제라고 있어요. 그 부인들하고 계조직을 하면은 계모임에서 그 돈을 가져오고. 또 두 번째 부인을 통해서. 자기 본부인하고 둘째 부인하고 경쟁을 시킨 거예요. “얼마가 오늘 필요한데, 며칠날 홍콩 가는데 돈이 있어야 되니까 해오라”고. 양쪽에서 해오는데 어떤 때는 안 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되면, “크, 그냥 너는 아주 최고다.” 막 이러고. 그날 인제 좋은 분위기로 그 집을 가는 거고. 안 되면 “야, 넌 그것도 못 해오냐”고, “기분 나쁘다”고 막 싸우는 수도 있고. (18쪽) … 각 극장에서도 좀 도와준 것 같아요. 극장주들이 많이 도와줬고, 또 나름대로 주위의 고리대금하는 사람들도 슬슬 흘려서 빌려줬어요. 이자를 다른 데보다 싸게. … 하여튼 저는 열심히 그냥 명동에 달라 아줌마한테 가서 받아다 드리고. (30~32쪽) 그냥 야미(뒷거래)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고 가서 쓰고. 또 홍콩 자체에서 필요해서 교포들하고 거래로 해서 우리나라 돈 주고서 하는 수도 있고. 무슨 수든지 하여튼 우리 걸 분담은 다 깨끗이 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나온 거겠죠. (35쪽) - 문금순(제작, 2014)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영화 < 천지유정 >(김화랑, 1957) 양국 참여 스태프 단체사진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동원된 막대한 자금은 제작비로도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경비로 나갔다고 한다. 보은의 뜻으로 자기한테 충성했던 사람들을 홍콩 구경시켜 준다고 많이 갔어요. … 외국에를 나갔으면 좋겠는데 영화를 핑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굉장히 선호도가 좋았어요. 배우들이고 뭐, 엑스트라라도 좋으니까 홍콩 좀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조금 이쁘게 보이면 그냥 “이번에 너 데려간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비가 좀 많이 나갔어요. - 문금순(제작, 2014, 40~44쪽) 제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한중 합작영화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한 임화수(왼쪽에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3편의 합작영화를 제작했지만,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는 합작에서 손을 뗐다. 비록 임화수는 합작에 손을 뗐지만, 이후에도 합작에 대한 국내 영화사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특히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 합작영화를 법제화하여 그 기준을 정하고 정식 공보부의 허가 절차를 통해 자금 출자도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만들어진 바탕에는 어쨌든 앞서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법이 제정된 후 가장 활발하게 합작에 나선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초까지 신필름(신프로덕션)을 거쳐간 많은 영화인들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을 통해 새로운 영화기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홍콩 무협영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수의 한국 영화제작사들이 합작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에는 위장합작 문제를 야기시켰고 이로 인해 합작영화에 대한 여러 제한 규정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그만큼 당시 합작영화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기억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처음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공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임화수는 자신이 세운 공든 탑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이맘때부터 그는 반공예술단을 결성해 소속 연예인들을 관제행사에 동원하는가 하면,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신상옥, 1959)과 같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만송 이기붕>이라는 제목의 문화영화와 함께 1960년 3월 15일 이루어질 정부통령선거를 위한 선전영화로 전국 극장과 군(軍)에서 상영되었다. 여전히 연예계에서 활동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치깡패로서 정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선택이 그에게 가져온 결말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깡패냐, 예술인이냐 3.15부정선거의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임화수는 이후 3.15부정선거 개입과 고대생 시위대 피습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의 재판 끝에 1961년 12월 21일 사형에 처해졌다. 재판 최후진술에서 임화수는 자신이 ‘예술인’임을 강조하며 “국가에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를 지은 일은 없다” *주5 고 주장했다. 5.16 이후 진행된 혁명재판의 최후진술에서도 그는 다시 “자유당을 위해 <청년 이승만>의 영화를 만드는 등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고대생 습격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잘 살펴달라” *주6 며 자신이 ‘문화사업가’임을 강조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인’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든 크게 문제될 바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이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있다. 임화수는 무궁화악극단과 코리아악극단이라는 당시 굵직한 두 개의 악극단을 연합하여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고는 소속 연예인들을 빈번하게 자신의 명예와 문화적⋅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영화산업에 뛰어든 후에는 자신이 가진 뒷배를 동원하여 합작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속시켜 제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작비를 긁어모아 지인들과 선심성 여행을 다니기에 바빴다. 이렇다 보니, 이른바 그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공로라는 것도 단지 ‘예술인’ 또는 ‘문화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한 깡패의 허세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임화수는 비슷한 길을 걸었던 화성영화사의 이화룡과 비교가 된다. 이화룡은 앞서 구술에서도 나온 것처럼 명동파 어깨두목으로 1958년 일명 ‘명동깡패사건’으로 기소되어 1959년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그는 1960년 화성영화사를 설립하며 영화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4.19 이후에는 임화수와 마찬가지로 ‘단체적 폭력행위’로 혁명재판에 기소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주7 196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도 영화인으로서의 생을 살며, 한국영화계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 신세계 >(박훈정, 2012)에서 정청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이자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제 고만 선택해라. 그래야 니가 살아”)처럼 임화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영화인으로서 살 것인지, 정치깡패로 살면서 언젠가는 몰락할 정권과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따라서 분명한 선 긋기에 실패한 이 예술하는 정치깡패는 한국 연예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여러 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죽는 순간까지 대중에게 ‘예술인’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 주1. 임화수는 해방 후 적산(敵産)이 된 제일극장(일제시기 미나도좌)을 불하받은 뒤, 평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주2. 영화 한 편에 4일 상영이니까, 이정재, 유지광, 그 아래 깡패가 한 편씩만 들고 와도 총 12일간은 극장 수익이 없는 셈이다. 구술자는 9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술자의 단순한 계산 오류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날짜가 그만큼 유동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3.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했던 문금순도 구술에서 “한국영화 세금 안 내게 한 사람이 임화수 씨”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문금순은 면세조치가 이루어진 과정이 강대선과는 또 다르다. “‘우리 한국영화를 위해서 말이야 면세조치를 받아야 되는데 재무부장관 집에 새벽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 갖고 김승호 씨, 김희갑 씨, 복혜숙 씨, 고선애 씨, 이향자 씨 이런 사람들 … 막 끌어내고. 그래서 새벽 일곱 시에 재무부장관 집을 가는 거예요. … 재무부장관이 허락해야만 되니까. 그래 갖고 그걸 뚫고 면세조치가 돼서 한국영화 세금 없이 상영관에 상영을 했어요.” (공영민, 『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문금순 박행철 안정무 편 』, 한국영상자료원, 2014, 23~24쪽 참조.)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기억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임화수는 자신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4. 국산영화면세조치 덕분인지는 몰라도, 1955년 이후 한국영화는 제작편수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타 무대연예예술이나 외국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국산영화만 특별히 입장세를 면해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58년 즈음이다. 그리고 1959년 자유당에서 제안한 입장세법 개정안(국산영화와 외화 모두 극장의 등급에 따라 세율을 차등 부과)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국회 앞에서 배우들 진정", 《조선일보》, 1959. 12. 27. 3면 기사 참조) 구술자 강대선이 봤다는 시위는 1958~1959년 즈음에 있었던 이 배우들의 시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가 입장세법 개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60년 개정⋅시행된 입장세법에 따라 국산영화에 대해서도 2~4%의 입장세가 부과되었는데, 대신 1958년 문화공보부 고시를 통해 우수 국산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 외화수입배급 쿼터를 1편씩 추가로 배정하는 ‘국산영화제작장려 및 영화오락순화를 위한 보상특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화수는 외화 배급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정책이 수립되는 데에 그의 입김이 얼만큼 닿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주5. "법정스냎-말끝마다 예술인/임화수, 국가공로 있다고", 《동아일보》, 1960. 9. 6. 3면 기사. 주6. "임화수⋅유지광 최후진술", 《경향신문》, 1961. 8. 22. 조간 2면 기사. 주7. 이때 그의 범죄혐의는 ①국도극장 임검순경 폭행 ②명보극장 사장을 협박하여 권리행사 방해 ③투자액 반환을 요구하는 공연 투자자 폭행으로 인한 상해 등 세 가지였는데, 모두 영화사 설립 이후 극장 흥행과 관련한 폭력 행위로 이전에 명동파로 활동하던 때의 범죄로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 성적표의 김민영 >(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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