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어터
- 감독
- 박재범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박동빈, 노진원, 장경희, 고민정, 김양우, 구은정, 노경준, 이서연, 손영섭, 권지혜, 엄세현, 김주복, 황원상, 서범석, 김건우, 엄춘배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버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해미( 전종서 )는 조금 뜻밖의 말을 한다. 팬터마임으로 눈앞에 없는 귤을 먹던 그는 종수( 유아인 )에게 마임의 원리를 설명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이 말은 < 버닝 >(2018)의 초반부에 불쑥 건네지고 나서 영화 전체를 실종과 부재의 미스터리로 물들인다. 해미는 갑작스럽게 사라지지만 종수는 해미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종수에게 남겨지는 이 말이 뜻밖인 이유는 이창동 영화 속 인물들이 갈구하던 질문과 정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 밀양 >(2007)에서의 신애( 전도연 )의 비명. “신이 어디에 있어요?” < 시 >(2010)에서의 미자( 윤정희 )의 외침. “시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찾아 헤매던 질문들과 다르게, 해미는 세계를 관통하는 자명한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해미의 방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껍질 벗겨진 귤이, 함께 사는 고양이가, 마침내 해미 자신마저도 그곳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다.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 전망대 유리에 햇빛이 반사돼서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곳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만 딱 한 번의 햇빛이 종수의 눈에 보인다. 무언가는 보이지 않고 기억에서 지워진다. 다른 어떤 것은 잊히지 않고 남겨진다. <버닝>이라는 이 거대한 야심의 영화 속 해미의 작은 방이 한국영화 비평을 말하기 위한 실마리일 수 있다면, 비평은 언제나 특정한 좌표 위에 놓인 공간에 거주하는 일이며 그 안에서 잔존하는 것과 지워지는 것들을 오가며 수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찬욱 은 정성일 , 허문영 평론가와 나눈 긴 대담에서 < 박쥐 >(박찬욱, 2009)와 <밀양>과 < 마더 >(봉준호, 2009)의 주인공들이 모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을 겪은 이후로 망각을 선택한다는 공통점을 지적하는 두 평론가의 말에 “이래서 평론가들이 필요한 거구나!”라고 웃으며 반긴다(언급된 영화의 세 연출자는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 <버닝>과 < 기생충 >과 < 헤어질 결심 >으로 다시 한번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공통의 우화를 작성한다). 이 일화엔 영화와 비평,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근접조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농담 섞인 감탄과는 반대로 비평은 망각된 것들을 기억하고 흩어진 기억을 서로 연결하는 일이 아니라 망각 자체에 속하는 일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행위다. 최근 영화잡지 《씨네21》은 잡지의 3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서 2024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화/해외영화 10편의 베스트 목록을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목록의 재생산이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영화문화에 과도하게 채워져 있는 목록과 관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조우가 아니라 사라짐의 체험이고 따라서 비평은 그 사라짐에 관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버닝>은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그리고 한국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관습을 정조준한다. 태양이라는 선명한 광원 아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팬터마임으로. 태양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21세기 한국영화가 설정한 특별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란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의 부작용을 포착해 온 영화적 관찰기의 다른 말이다. 이는 <밀양>과 <버닝>에서 우리가 머무는 세계 안으로 간신히 전해지는 미세한 빛을 프레임에 담아낸 이창동만의 화두는 아니다. 도망칠 수 없는 두 뱀파이어를 태양에 불태워버리는 <박쥐>, 햇빛을 바라보며 시큰거리는 눈에 안약을 넣는 남자의 비극(<헤어질 결심>)과 태양의 과도한 빛을 피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희극(< 어쩔수가없다 >)을 오가며 끊임없이 태양에 반응하는 신체를 불러들이는 박찬욱의 영화들. 봉준호 의 <마더>는 오후의 도로를 통과하는 관광버스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포착해 그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어두운 실루엣으로 덮어버린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쏟아지는 빛, 어찌할 수 없는 열기. <기생충>은 간신히 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의 어둠에서 통유리로 태양을 반사하는 거대한 저택으로 이동한 뒤 더 아래에 있는 어둠으로 내려간다. 한국영화의 불길을 통과한 뒤 경력을 중단한 장선우 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짧은 단편은 이장호의 영화 제목을 빌린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2019>였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쁨으로 회고하는 대신 검열과 금기라는 역사의 태양을 공격하고 야유한다. 태양 아래 있는 21세기 한국영화는 언제나 한 가지 특별한 장소와 결부되어왔다. 번쩍이는 태양의 가시광선을 피해 시선을 숨길 수 있는 어둠 속의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빛을 피해 숨을 수 있지만 그곳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 눈에 날카롭게 베인 듯한 상처를 입는다. 터널 속에서 영화는 눈빛을 숨기고 시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좌표를 망각한다. 2000년대를 여는 첫 번째 한국영화로 이창동의 < 박하사탕 >(1999)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영화가 새로운 세기 초입에 새겨둔 터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공간과 시간을 이행하는 데는 어둠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무심한 기계장치처럼 역방향으로 터널을 통과해 나간다. 거기엔 숨겨진 빛이 있고 우리는 그 빛을 잊어버린다. 태양이 가려졌으므로, 영화는 세계를 정확히 보는 것에 실패한다.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중 (사진: ㈜이스트필름, ㈜싸이더스, 디씨어터) 21세기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으로 회고되는 2003년에 ‘한국영화’의 외형과 속성을 상징적으로 각인한 두 편의 영화에서 솟아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깊은 어둠으로 인해 보는 것에 실패하는 터널 이미지다. 봉준호의 < 살인의 추억 >(2003)에선 영화의 마지막에 빈 농수로를 보여준다. 전직 형사 박두만( 송강호 )은 과거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시골을 찾아 농수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의 눈앞에 있는 텅 빈 공간은 마치 터널처럼 가을의 태양을 가로막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가 고개를 숙여 농수로 깊숙한 곳에 놓인 여성의 시체를 쳐다볼 때, 어두운 수로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근처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 빛을 반사해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저편에 있던 어둠은 우리가 있던 곳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하여 영화의 결말은 살인 용의자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더 이상 터널을 들여다볼 수 없는, 본다는 것의 실패다. 박두만이 다시 용수로를 찾았을 때, 터널은 어둠으로 닫힌 모든 것이 투명하게 열려 있다. 우리는 그 명확하게 빛나는 어둠 앞에서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다. < 올드보이 >(2003)에서 오늘만 대충 살아간다고 다짐하던 오대수( 최민식 )가 감금된 밀실의 복도는 기나긴 터널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곳의 작은 방 한 칸에 갇혀 있던 이 남자가 15년 만에 석방될 때도 그는 조그마한 상자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실은 풀려나는 시점조차 정확히 통제된 것이므로 제대로 풀려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시간의 터널 속을 맴돌고 있다. 밀실에 되돌아온 오대수는 장도리를 들고 수많은 적을 넘어서 터널을 통과하지만, 그 어떤 것도 통과한 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오대수는 시종일관 태양의 빛과 열기를 피하는 검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영원히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마주하더라도 회피와 망각을 선택하려 든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한국영화가 직면하고 응답했던 이 치명적인 곤경은 이창동의 <시>(2010)에서 시인의 말을 빌려 울려 퍼진다. “틀렸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한국영화비평에 대해 말할 것들이 남았다면, 여기에 제도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는 비판이 아니다.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촉구와 반성 역시 아니다. 그 반대다. 해미의 조언처럼 우리는 여기에 무언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을 잊어버리고,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영화감독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을 잊어야 하며,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분류하는 영화제와 개봉 체계의 시각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인식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평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전개해야 한다. 이창동과 박찬욱과 봉준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긴 걸작들로 비루한 목록을 채우는 대신, 변함없는 명사로 자리 잡은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곤경의 장소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을 들여다보는 질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저 걸작으로 남아 있는 영화를 숭배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팬데믹이 초래한 대규모 봉쇄의 기억을 뒤로하고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친 지금 시점에 우리는 한국영화의 ‘장소’가 어디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터널을 지나친 한국영화의 흔적 뒤편에서 우리는 또 어떤 장소를 발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 비평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 하락에 있지도 한국 작가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에 있지도 한국영화 산업의 붕괴에 있지도 않다. 손쉽게 영화산업 일부분에 기생해버린 비평이 한국영화가 곤경을 투사하고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한밤에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에 빗댄 피에르 파울로 파솔리니는 두 가지 종류의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강력한 아버지의 규율과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무기력한 아버지를 마주해야 하는 세대다. 90년대 후반에 촉발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을 공유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단절된 아버지의 강력한 규율에 저항함으로써 그와 연결되려는 절차였다. 지금껏 언급한 한국영화의 ‘걸작’들은 모두 부모가 되는, 혹은 되지 않으려는 방식에 관한 서로 다른 시도들이고 적잖은 이들이 불필요한 결론이라 비판한 바 있던 <기생충>의 에필로그는 그 연대기의 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을 렌즈로 삼아 세계를 인식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들의 아들은 조그마한 렌즈에 눈을 대고 있는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지켜볼 뿐이다. 우리에겐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한국영화’가 보이지 않는다. <기생충> 중 순환어법처럼 들리지만, 한국영화 비평이 성립하기 위해선,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언젠가 특별한 비평의 감각을 자극했던 《씨네21》의 ‘전영객잔’ 코너가 건드린 것은 ‘긴 호흡의 비평이 있어야 한다’라는 하나 마나 한 저널리즘적 진단이 아니라 ‘한국영화에 어떤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라는 특수하고 역사적인 물음이었다. 그 지면에서 다뤄진 것은 넓은 의미의 비평일뿐만 아니라 임권택 , 이만희 , 김기영 , 배창호 , 강우석 , 임상수 , 박찬욱, 홍상수 , 이창동, 봉준호, 그리고 21세기에 새 영화를 만들어낸 한국영화 감독들의 시간에 대한 특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짧은 호기심과 문답의 시간이 지나고 비평은 너무나 쉬운 관성에 안착해버렸다. 투박한 비교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지금 영화를 해설하고 의미를 발굴하는 비평은 한국영화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구현하고 싶었으며 무엇에 실패하고 어떤 곤경을 직면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업무의 한 부분에서 성실하게 문장을 채우고 완성된 결론을 생산할 뿐이다. 다른 지면에 적었던 이들의 운명을 다시 빌려오자면, “비평이 테러리스트 역할을 자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고작해야 제작사와 수입사의 홍보문장을 작성하는 대리인이거나 이름 있는 연출자의 의도를 정제된 언어로 세공하는 복화술사거나 제도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성실한 일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 한국영화에 어떤 곤경의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동시대 한국영화 비평이 영화에 드리운 특수한 곤경에 호기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어쩌면 한국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들조차 그들 자신이 처한 곤경에 응답하지 않는 걸까?). 영화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역량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카메라 바깥에 있다. 한국영화는 그것들이 동시에 거주하는 장소다. 비평가들이 이미 결정된 한국영화의 외형과 위계와 비평의 문법을 잊어버린 채로 영화와 만나지 않는다면, 한국영화를 향한 질문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평가받는 모든 영역에서 빈틈없이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그것이 위태롭고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엄습한다. 끝없이 불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는 비평이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 없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 한국영화가 이룩한 제도에서 비평은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무언가 부재한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비평의 역량이 약화되었고, 위대한 작가 감독이 존재하지 않고, 경이로운 영화들이 나오던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사라졌다는 자각. 그 사라짐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를 대상으로 하든 비평의 첫 문장이 작동하기 위해선, 어떤 한 가지 장면과 생각을 영화의 나머지 전체보다 앞서서 서술할 수 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영화의 나머지 전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임의적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영화는 모든 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일을 실천할 뿐이라는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비평은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영화비평을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비평이 더 이상 많은 것을 유효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그 부재를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언제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래서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지금 약간만 검색을 해보면 거의 모든 인문사회학에 관련된 교수들, 필자들, 혹은 글을 발표할 지면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거의’ 전문가들이다. 정작 의학 전문가들은 이 바이러스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사실은 이 바이러스에 관해서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은 앞 다투어서 전문적인 사회적 진단을 내린다. 심지어 어떤 자리에 가도 팬데믹 담론에로 귀결되는 악순환 속에서 상당히 피로하고 이제는 권태를 느낄 지경이다. 나는 여기서 내 논점을 후퇴해서 영화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역시 이야기는 어떤 자리로 되돌아간다. 다만 이 자리가 좀 다른 것은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영화 ‘시장’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호명할 수는 없지만) 극장을 운영하거나, 영화를 수입해서 배급을 하거나, 그 영화를 홍보 마케팅을 하거나, 저예산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들은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지금 시장이 죽었다, 라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하여튼 언젠가는 끝날 팬데믹 ‘이후’가 걱정된다는 누군가의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상대방이 말을 잘못한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극장이 텅 빈 지금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건가요, 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내게 대답했다. 극장에서 관객들이 떠나가고 있어요, 정말 문제는 코로나가 끝난 다음 그들이 돌아온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떠난 동안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고 거기서 재미를 찾아낼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난 다음 새롭게 찾은 재미에 머물지 아니면 극장에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루 종일 노는 사람도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밖에 안 되니까요. 여기서 이 대답의 논리적 허점을 찾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이 말에는 어떤 진실이 있다. 그건 영화를 보러 가는 건 하나의 습관이라는 사실이다. 인구 비례에 따른 관객점유율을 놓고 한국영화 시장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약간 우쭐한 말투로 영화를 선택했다는 상대적 우월의 관점을 가지고 다가간다. 이때 이 설명이 항상 실패하는 순간은 구태여 누군가의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을 만큼 보는 쪽에서 누구나 형편없는 영화라는 걸 누구나 다 아는 영화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때이다. (나는 지금 구체적인 제목을 열거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는 중이다) 반복해서 말하겠다. 하나의 습관. 술을 마실 때 그걸 마시면 다음 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는 걸 알면서도 마신다. 하나의 습관. 그걸 보고나면 불쾌해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러 간다. 영화를 보러가는 습관의 이유는 서로 다른 여러 층위에서 결정되는 복합적 요인들의 카오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습관에 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누군가 해내기는 하겠지만 아무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보러 가는 선택은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고르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했다가 중간에 마음을 바꿔 서점에 들려 시간을 보내다 올 수 있지만 밥을 먹으러 외출을 하면 식당을 바꿀 수는 있지만 밥을 먹고 돌아온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그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각자의 기술이다. 아주 가끔 이 시간 낭비가 큰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건 얼마나 드문 경험인가) 대부분은 그 시간을 덜 지루하고 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영화를 보러 간다. 누군가는 내게 그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권리를 느껴보기 위해서 영화를 본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논점으로 돌아오자. 그런데 그 작은 즐거움에 예기치 않게 불안이 동반하게 되었다. 당신 옆 좌석에서 누군가 기침을 할 때 갑자기 영화를 보다 중단하고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그 사람의 얼굴에 마스크가 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 기침 소리가 나는 곳이 뒷좌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자신에게 질문할 것이다. 불안을 무릅쓰고 이 작은 즐거움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운이 나쁘면 당신은 14일 동안 격리될 수도 있다. 더 운이 나쁘면, 지금의 상황은 최악의 가정까지 순식간에 당신을 데려갈 수도 있다. 이번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도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가장 좋은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접촉 빈도가 높아질수록 당신이 익명의 확진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당신은 그러면 극장에서 방(room)으로 옮겨가면 되잖아요, 산업의 구심점이 이동하면서 극장이 침체하겠지만 영화 산업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라고 냉정한 대답을 할지 모른다. 그 대답은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때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까지 거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정치경제학적 환경이 민주적이었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당신은 입장료를 내면 계급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를 경험할 권리를 얻었다. 나는 구태여 경험, 이라는 표현을 썼다. 방으로 물러나게 되면 이제 이 민주적 기회는 사라지고 각자의 환경의 토대가 제공하는 영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경의 토대? 누군가는 홈 씨어터에 최신 버전의 프로젝터와 스피커를 갖춰놓고 방음까지 된 방에서 스크린에 가까운 화면으로 영화를 ‘경험’할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영화를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으로 볼 것이다. 두 개의 경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두 계급 사이의 극장이라는 교집합의 경험이 사라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논점이 부동산으로 옮겨올 때 당신은 더 이상 이 상황 앞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간극에 놓여있는 모순은 영화를 하찮은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세상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논쟁의 장소이다. 나는 너무 멀리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간극의 모순에 시간이 부여되면 연쇄 고리가 만들어진다. 모순은 어느 순간에 멈추는 법이 없다. 이것이 이 세계의 원리이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자신의 상대적으로 하찮은 경험 속에서 노트북에 최적화된 기쁨을 내어줄 시간 낭비의 기술에로 눈을 돌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영화는 부르주아들의 문화 일부가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질문한다면 아직도 당신은 순진한 것이다. 이 관객들이 옮겨가기 시작할 때 영화라는 상품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자본의 축적과정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적 잉여가치를 놓고 여러 가지 대응이 모색되겠지만 한계에 부딪힌 상품은 임금과 노동 사이에서 시장에서의 자신의 가치를 놓고 재조정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따라가는 중이다. 물론 이 과정이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당신이 반문할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그 걱정에 대한 위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가 아니라 아마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는 긍정을 한 다음 우리들 앞에 다가온 변화에 우리들도 변해야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 안에서 자신의 성격을 바꿀 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는 다시 한번 영화라는 이름의 다른 그 무엇이 될지 모른다. 나는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위험한 단정이다. 하나의 가정. 하나의 가능성, 그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준비. 영화의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한 번 재정의 내리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개념의 위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장의 위기로 모습을 드러낸 다음 구체적이고 (당신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폭력적인 위기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여기서 가장 나쁜 태도는 위기를 구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위기가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런 다음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위기를 먼저 긍정하고 (달리 무슨 방법이 남아있는가?) 긍정 안에서 위기를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진짜 위기와 위기를 이용하려는 가짜 위기를 구별해내야 한다. 우리들은 오직 진짜 위기 앞에서 영화의 새로운 변화를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도, 아마도 그렇게 해서, 새로운 영화 앞에 나타나게 될 새로운 관객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질문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가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번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