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놈만 아는여자
- 제작년도
- 2004
< 휴일 >의 주인공 허욱( 신성일 )은 몹쓸 인간이다. 돈도, 직업도 없는 남자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무 대책도 없는 남자임을 뻔히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묻거나 결혼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아이는 둘을 낳을지, 셋을 낳을지, 결혼식을 예배당에서 할지 어디서 할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자는 여자가 임신중절을 염두에 두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훈계부터 내놓지만 그 외에 아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수술비를 마련하러 나선다. <휴일>은 허욱이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녀의 수술비를 마련하러 돌아다닌 하루를 다루고 있다. 허욱은 “난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난 차라리 바보”라고도 한다. 택시비도 없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담뱃값까지 덮어씌우는 장면은 그가 거짓말을 잘 하는 남자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커피 한잔 살 돈도 없으면서 길에서 만난 점쟁이에게 오늘의 운세를 보는 걸 보면 그가 바보인 것도 사실이다. 허욱은 그런 자신을 잘 안다. 그래서 그걸 자신의 핑계로 삼는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라는 것이다. 허욱이 못난 남자인 것은 그가 겁쟁이의 면모를 보여줄 때 가장 도드라진다. 여자와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간 남자는 당장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수술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여자를 혼자 두고 병원을 나온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낯선 여자를 만나 함께 술에 취한다. 심지어 육체적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휴일의 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여자가 죽어버린 후이다. <휴일>은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당대에 개봉을 못 했다. 지금 다시 봐도 <휴일>에는 내일의 희망을 꿈꿀만한 여지가 없다. 영화 초반부에 연인이 대화를 나누는 늦가을 남산의 풍경은 <휴일>이 감상적인 로맨스영화로 해석될 길을 열어놓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런 기대는 무참히 짓밟힌다. 모래바람이 계속 불어대는 남산 공원의 메마른 나무 옆에 가녀린 여자가 커피 한잔 마실 돈이 없어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서 있다. 남자는 수술비를 마련하겠다고 여자 혼자 남산에 남겨둔 채 떠난다. 어떻게 보면 가난이 원죄일 수도 있다. 그들이 다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이유도 수중에 돈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그들의 시련이 해결될 것인가? 영화는 가난의 원인을 추적하거나 가난의 양상을 펼쳐 보이는 데 관심이 없다. <휴일>은 여기서 보통의 리얼리즘영화들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 가난이라는 조건 안에서 영화는 그저 한 남자의 자기 파괴적인 행보를 쫓는다. 허욱은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리며 돈을 훔치고 여자를 배신한 뒤 후회하고 자책한다. 모든 잘못은 이미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휴일>의 정조를 완성한다. 이것을 ‘60년대의 비관’이라 부르건 ‘시대의 우울’이라 부르건 이 정조는 <휴일>의 독보적인 성취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나 캐릭터가 아니라 무드이다. 지독히 낭만적인 무드에서 참으로 암울한 무드까지 <휴일>을 보는 경험은 어떤 무드에 흠뻑 젖어 드는 일이다. 오직 영화를 통해 시를 쓰는 대가들만이 이런 영화를 만든다. <휴일>은 이만희 감독이 그런 대가였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남는다. 어떻게 보면 <휴일>은 시종 기다리는 사람과 그날 그곳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뤄진 영화다. 영화는 다방 앞에서 기다리는 여자와 뒤늦게 도착해 “왜 안 들어가 있냐?”고 묻는 남자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남산을 향하고 남자가 돈을 구해올 동안 여자는 그곳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남자를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병원에서 헤어진다. 여자는 병원에서 남자를 기다렸을 테지만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 남자는 그 시간에 다른 여자와 술에 취해 있었다. 남자는 오직 연인이 죽은 뒤에야 그곳에 도착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남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에 서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부터 깎아야지”라는 중얼거림뿐 이다. 남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배반한 대가로 전차의 종점에서 비틀거리는 중이다. 불현듯 이곳이 이 남자가 맞이할 삶의 종점일 거란 생각이 든다.
원신연 감독, 공유 주연 < 용의자 >는 왕년의 ‘레전드’ 스턴트맨들이 총집결하여 반가웠다. 최태환 무술감독과 원신연 감독의 동생인 배우 원풍연 , 그리고 성룡이 이끄는 무술팀 ‘성가반’에서 이충지, 박현진 등과 함께 맹활약한 한국인 이인섭 도 눈에 띄었다. 최태환 감독이 소속된 무술팀 ‘트리플A’(All About Action)는 이인섭이 < 러시아워3 >(2007)를 끝내고 돌아와 오세영 무술감독과 함께 < 왕의 남자 >(2005)에 참여하기 직전 공동대표로 꾸린 팀이다. 가장 반가웠던 인물은 바로 원진 이었다. 영화 속 청량리역에서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얼핏 왜소해 보이는 남자가 지동철(공유)과 싸우며 그야말로 날렵하고 화려한 발차기를 자랑했다. 가끔이라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스턴트맨들 중 정두홍 무술감독의 몇 안 되는 선배이자, 그가 머리 숙여 실력을 인정한 진짜 레전드가 바로 원진이다. 그들 대부분은 ‘밥풀데기’ 개그맨 김정식이 몸담기도 했던 ‘오뚜기 무술단’ 동료들이었다. 최태환 , 원풍연 , 이인섭 물론 그는 < 조폭마누라 >(2001), < 청풍명월 >(2003), < 낭만자객 >(2003), < 청춘만화 >(2006) 등의 무술감독이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력자라 종종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무명 시절에도 왜소한 체격 탓인지 주연 여배우 대역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폭마누라>에서 신은경 대역을 한 것도 역시 그다. 다소 중국스러운 이름 때문에 중국 액션배우로 아는 사람도 많았고, 실제로 홍콩 골든하베스트사의 초청으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바로 < 가자왕 >(1992)에서 길게 머리를 늘어트리고, 다리를 뒤편 위로 치켜 올려 전갈 권법을 구사하는 모습이다. 그 자세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한 ‘공중 돌려 가위차기’는 홍콩 스턴트맨들도 한없이 부러워했다. 원진 을 포함해 역시 오뚜기 무술단 스턴트맨 출신의 원신연 감독이 옛 동료들을 불러 모아 완성한 < 용의자 >는 그야말로 훈훈한 ‘우정의 무대’라고나 할까. 여기서 떠오르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비록 전체적인 완성도는 미흡하지만 당대 ‘무술인’들의 ‘십시일반’ 정신으로 완성한 김춘식 감독의 < 고수 >(1997)다. 역시 스턴트맨 출신의 김춘식과 당시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원진 이 동료들을 규합해 ‘진짜 우리들만의 제대로 된 액션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품앗이하듯 의기투합한 것. 비록 스타급 배우는 없고 제작비는 넉넉하지 못 했지만 스턴트맨들끼리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거기에는 ‘액션을 영화의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주재료로 써보자’, ‘우리도 남들 대역만 하지 말고 진짜 배우가 되어 보자’는 생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배경은 1930년대 일제치하, 친일파인 기봉( 장정국 )은 딸 승희( 김지은 )를 일본의 실력자 노무라( 최성 )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이에 승희는 연인 형철( 우승봉 )과 함께 돈을 훔쳐 달아난다. 전국을 떠돌던 그들은 우연히 차례로 변소동( 오동영 ), 조달구(김춘식)를 만나 도움을 얻게 된다. 기봉이 보낸 조직 ‘야수파’ 등에 맞서 승희와 형철을 도와주는 그들은 물론 돈 때문이다. 한편, 한 손에 갈고리를 하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고수(원진)는 조달구를 쫓는다. < 고수 > 출연자들 아쉬운 점은 역시 어설픈 유머가 난무하는, 물론 보다 보면 귀엽기도 한 이야기의 완성도다. 승희와 형철을 추적하는 조직의 이름이 야수파인 이유는 그들의 별명이 하나같이 멍멍이, 풍뎅이, 메뚜기, 반달곰, 올빼미 등 ‘야수’ 혹은 ‘동물’들이기 때문이다. 개의 귀 모양을 한 모자를 쓴 멍멍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이인섭 이며, 승희와 형철을 쫓는 또 다른 3인조 중 핑크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바로 오세영 무술감독이다. 또한 ‘홀쭉이와 뚱뚱이’처럼 반목하는 변소동과 조달구는 서로의 이름으로 장난을 친다. 자신을 ‘조달구’라고 소개하자 변소동이 “좆 안 달고 태어나는 남자도 있당가?”라고 놀리고, 이에 질세라 조달구는 ‘변소똥’이라 부르며 달려든다. 이들이 등장해서 완성한 추격의 로드무비가 B스러운 것은, 바로 등장인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동료들을 규합해 영화를 찍고자 합의는 하였으나, 이 사람도 눈에 밟히고 저 친구도 눈에 밟히니 그저 엇비슷한 분량으로 몽땅 출연시킨 느낌이다. 그래서 친일파 기봉은 딸을 잡아들이기 위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야수파도 보내고, 혼성 3인조도 보내고, 다시 남성 2인조까지 보낸다. 게다가 서로 각자의 실력을 자랑해야 하니 의욕에 넘쳐 그야말로 영화 내내 묘기 대행진이다. 별것 아닌 동작도 굳이 날아오르거나 몇 번 굴러서 ‘짠’ 하고 잡아내는 식이다. 당연히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한 덤블링 하는’ 스턴트맨들이다. 단지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킬러를 보낸 인해전술의 추격극이 과연 있었던가. 원진 그래도 역시 실질적인 주인공은 가장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원진 이다. < 가자왕 >을 연상시키는 돌려차기에다 쉴 새 없이 ‘날고 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분명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지만 적어도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대역도 속임수도 없는 진짜 퀄리티 높은 액션영화인 것. 원진의 또 다른 추천할만한 한국 액션영화로는 < 용호취 >(1988)와 <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 >(1989)가 있다. 코흘리개 신인 정두홍이 참여한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는 그가 실력을 인정하는 두 선배 류창국 과 원진의 대결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랬던 그들이 이른바 ‘아동용 영화’의 긴 암흑기를 지나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된 건 무척 뿌듯한 일이다. 한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김춘식 감독은 작년 조주현 , 전세홍 주연의 ‘리얼 액션영화’를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진짜 완성됐는지 어땠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 아는 여자 >의 패러디인지 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건 제목은 < 패는 여자 >였다. 오동영 김지은 감독: 김춘식 각본: 이무섭 개봉극장: 바다, 파고다4관(서울) 관람인원: 1,300(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