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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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아돌프 히틀러
- 참여 작품
- 기억 (1964), 세계를 망친 사람들 (1961), 의지의 승리 (1934)
브루노 간츠
- 참여 작품
- 살인마 잭의 집 (2018), 포르투나 (2018), 더 파티 (2017),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 (2015), 하이디 (2015), 사라짐의 순서: 지옥행 제설차 (2014),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2013), 다운폴 (2013), 파이널컷-신사, 숙녀 여러분 (2012), 언노운 (2011), 줄리아 사라지다 (2009), 먼지의 시간 (2008), 바더 마인호프 (2008),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비투스 (2006), 루터 (2003), 빵과 튜울립 (2000), 영원과 하루 (1998), 야간 비행 (1996), 멀고도 가까운 (1993), 프라하 (1992), 자연의 아이들 (1991), 사랑하는 여인 (1988), 베를린 천사의 시 (1987), 굿모닝 베이루트 (1981), 이사벨 아자니의 뱀파이어 (1979), 미국인 친구 (1977), O 후작 부인 (1976)
타이카 와이티티
- 참여 작품
- 넥스트 골 윈즈 (2023),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버즈 라이트이어 (2022), 세이브 랄프 (2021), 프리 가이 (2021), 조조 래빗 (2019), 토르: 라그나로크 (2017), 내 인생 특별한 숲속 여행 (2016),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2014), 보이 (2010)
수집자료
아돌프 히틀러 미공개 X파일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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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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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UMPH OF TH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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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망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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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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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느낌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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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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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스타쉽 트루퍼스」 때아닌 나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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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얼굴>(18) 영화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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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베를린에서 에른스트 루빗치와 폴라 네그리의 프랑스 대혁명 사극 <마담 뒤바리>가 ‘우레같은’ 박수갈채를 받다
교과서는 언제나 역사를 재구성한 다음 요약한다. 독일 무성영화에 대한 오해는 영화사의 ‘매뉴얼’화에 관한 사례이다. 그때 영화사의 섬광은 사라지고 오류추론이 시작될 것이다. 독일 무성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해설은 과도할 정도로 표현주의 영화에 기울어져 있고, 그런 다음 하나의 경향에 모든 영화를 수렴시키면서 현실의 반영이라는 도식을 끌어들인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저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사>가 너무 훌륭했기 때문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만 크라카우어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물론 독일 무성영화의 위대한 전통이 표현주의 영화(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향이 바이마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사극영화(Kostüfilme)의 대중적인 성공이 있었다.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 개봉했던 1919년부터 쏟아져나온 영화는 사극이었다. 먼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918년 11월 11일 일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유럽동맹들은 독일 제국을 해체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금을 요구하였다. 무엇보다도 산업혁명 이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근대적인 무기가 동원된 첫 번째 전쟁에 유럽인들 모두가 공포에 질렸다. 여기에 독일 국민은 패전으로 인한 천문학적 화폐 가치 평가절하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 빈곤과 허기에 시달리는 독일인에게 필요한 건 빛과 그림자로 표현주의 세트에 그려내는 암울한 실내의 심리극이 아니라 잠시라도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여흥과 웃음의 스펙터클이었었다. 여기에 늘 위대하다고 노래하던 게르만 민족의 낭만주의의 꿈을 산산조각 낸 ‘패전한 조국’에 대한 실망이 독일 관객들을 사극 장르로 이끌었다. 전쟁 전에는 무대 극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오페레타가 여흥이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대부분 극장이 문을 닫았다. 그 역할을 사극영화가 떠안았다. 경기 불황으로 제작비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고, 게다가 전쟁에서 돌아온 수많은 남녀노소가 실직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값싸게 대규모의 엑스트라를 쓸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 에른스트 루빗치는 1913년 막스 라인하르트 그룹에서 배우로 합류하였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별 재능이 없었다. 이듬해 단편 <비누 거품 아가씨>를 첫 연출 했다. 배우와 연출을 오가던 루빗치는 1918년 첫 장편영화 <엄마의 눈길>을 감독했다. 다소 놀랍지만 1919년에는 7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그런 일정에도 <즐거운 남편> 시나리오를 썼고, 레오 라스코가 연출했다. 그 해 연출한 <마담 뒤바리>는 9월 18일 베를린의 가장 크고 화려한 극장에서 개봉하였고, 상영이 끝나자 “우레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영화를 보고 막스 라인하르트는 에른스트 루빗치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빗치씨, 이 학생은 이제 스승을 넘어섰군요” 프랑스 대혁명 전야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이었던 루이 15세의 정부 잔느 베퀴, 천민 계급이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뒤바리 백작과 결혼한 다음 루이 15세의 ‘공식적인’ 정부였던 마담 뒤바리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혁명 관중들 앞에서 목이 잘리는 장면이다. 그래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문학적 표현으로 우회하지 않았다) 이렇게 설명했지만 에른스트 루빗치는 <마담 뒤바리>에서 프랑스 대혁명 전야를 재현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다. 이 영리한 유대인은 처음부터 시대정신의 공기를 읽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루빗치는 1919년 독일 관객이 스크린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를 읽었다. <마담 뒤바리>는 다가오는 혁명의 기운과 열광으로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을 맞이한다. 독일인들은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매일 거리에서 보고 있었다. <마담 뒤바리>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동안 거리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독일 공산당 스파르타쿠스당이 경찰과 바리케이드까지 치면서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다. <마담 뒤바리>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랄 것이다. 첫째, 루빗치의 영화를 대부분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로만 알고 있을지 모른다. <마담 뒤바리>에서 이미 ‘루빗치 터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동시대의 표현주의 영화들 속에서 루빗치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루빗치는 ‘여자’ 주인공 (1919년이라는 걸 먼저 염두에 두고 셈을 하기 바란다) 잔느 베퀴를 따라가면서 자유자재로 사회의 신분과 계급을 옮겨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성 복장으로 변장(cross_dress_gender)하면서 영화의 모든 장면을 동기화하고 재구성해나간다. 그러면서 영화의 플롯은 잔느가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장면들에서 잔느는 항상 중심을 차지한다. 이 사이의 긴장이 상황을 거의 난장판으로 만들어나가는데 거기서 루빗치는 희가극이라고 부를만한 코믹한 유머를 냉소적인 조롱을 끌어낸다. 이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루빗치는 이미 공간 안에서 인물의 동선을 연결하면서 콘티뉴이티 편집을 비롯한 할리우드 문법을 자신의 영화에서 활용하고 있었다. 에른스트 루빗치는 독일 영화시장을 이미 장악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다른 독일 감독들이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더 ‘독일적인 것’을 찾는 동안 대중들이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인다면 그 일부가 되어야 하는 방법을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잔느 베퀴를 연기한 폴라 네그리는 아마도 첫 번째 팜므 파탈의 계보에 속할 것이다. 폴라 네그리와 에른스트 루빗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조셉 폰 스턴버그와 마를레네 디트리히에 버금가는 여배우와 감독으로 하나의 짝이 되었다. 놀라운 성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담 뒤바리>는 이듬해 12월 12일 뉴욕에서 개봉하였다.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미국 관객들은 독일영화를 혐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담 뒤바리>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마담 뒤바리>는 독일에서 만든 에른스트 루빗치의 ‘아메리카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토마스 엘새서는 재치 있게 제안했다. 나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비평가들은 루빗치를 “독일의 그리피스”라고 불렀다. 유대인이었던 루빗치는 스튜디오에서 ‘독일에서’ 계속 영화를 만드는 것은 금방 한계와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이 열광은 루빗치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1920년 뮌헨에서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를 당 강령으로 내세운 독일 노동자당이 창설되었다. 그 해 아돌프 히틀러가 당에 가입하였다. 에른스트 루빗치는 1923년 미국으로 떠나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표현주의 세트장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촬영을 시작하다
한 가지 사실을 먼저 환기해야 할 것 같다. 로베르트 비네의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은 첫 번째 표현주의 영화가 아니다. 순서대로 따라가야 한다면 1913년 파울 베게너의 < 프라하의 학생 >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이 영화에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보여줄 거의 모든 것을 선취하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소설과 <파우스트>를 느슨하게 각색한 시나리오, 도플갱어의 등장,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대조법(chiaroscuro) 촬영,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오가는 진행.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왜 영화사의 순간을 건너뛰었나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독일 영화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표현주의에 대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파울 힌데미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물론 그 배경에는 저 멀리는 독일 낭만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배경에는 바이마르 문화가 음산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몇 번이고 영화사의 섬광 같은 순간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했다. 내 목표는 체계적인 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사에는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혀 훌륭하지 않다. 이 영화를 연출한 로베르트 비네는 영화사에서 이 영화 단 한편으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영화사의 섬광이 되었다. 일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두 사람은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다. 모두 6개의 막(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공원 벤치에서 시작한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마지막에 스포일러가 있다.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기를 바란다) 한 청년이 곁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그 앞을 지나간 여인이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긴 이야기를 한다. 청년과 그의 친구는 약혼녀를 사이에 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중인데 마을에 칼리가리 박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수 체자레를 이끌고 나타난다. 칼리가리 박사는 체자레에게 최면을 걸어서 예언을 요구한다. 체자레가 죽음을 예언하면 다음 날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해서 발견된다. 청년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칼리가리 박사와 조수 체자레를 뒤쫓는다, 그리고 그들의 은신처인 정신병원에까지 따라간다. 거기서 알게 되는 건 청년이 정신병원 환자라는 사실이다. 이 각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독일 영화사들의 경제적 연합인 Ufa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영화사 데클라(Decla)를 운영하던 에리히 포머였다. 그는 다른 영화사들과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각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에리히 포머와 두 명의 시나리오 작가 사이에서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아니다. 제작자 에리히 포머는 돈을 벌기를 기대했고,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자신들이 예술적인 무언가를 썼다고 믿었다. 이 시나리오의 세트를 지어야 했고, 그때 프라하에서 온 세트 디자이너 알프레드 쿠빈에게 제안했을 때 관심을 보였다. 이 도시에서 공무원 프란츠 카프카가 퇴근하면 밤마다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함께 떠올려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에리히 포머가 제작비를 받아들고 일부만 세트를 짓고 배경은 그림을 그려서 대신 하자는 제안을 했다.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프리츠 랑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었을 것이다. 프리츠 랑은 이 영화의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다, 영화사의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배경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슈트룸' 그룹의 헤르만 바름이 가세하였다. 혼자서 그 많은 벽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의 동료인 발터 뢰리그와 발터 라이만이 함께 작업하였다. 그들은 이 세트를 그리면서 자신들의 '표현주의' 그림 속을 몽환적인 시나리오의 영화가 산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관의 벽에 걸려서 멈춰 서 있었다. 이제 그림 속을 미친 영화가 최면에 빠져 유괴를 하고 살인을 저지르면서 홀린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위한 세트 제작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영화는 아벨 강스가 1915년에 연출한 실험영화 <튀브 박사의 광기>였다. 아벨 강스는 이 영화에서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이용한 '요술 거울의 방' 효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알프레드 쿠빈과 헤르만 바름은 렌즈에 의한 이미지 왜곡을 만들어내는 대신 세트 자체를 왜곡해서 디자인 하고 그걸 바탕으로 벽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에리히 포머의 결정과 그 한계 안에서 세트를 자신들의 인스톨레이션(이 도착도 하기 전에 그런 미술관)처럼 만들어버린 세트 디자인 팀은 그저 불합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시켰다. 이제까지 꿈속에서 만나는 불안과 두려움은 문장 속에 있거나 그림을 바라보면서 상상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미지가 펼쳐지고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관객들이 본 것은 기기 묘묘한 이야기, 액자 형식의 서사. 빛과 그림자. 굴곡지어지고 왜곡된 세트,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배우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영화가 갑자기 내면의 형상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서 멈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영혼의 삶에까지 밀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 영화는 역사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멈추지 않으면 다음에는 현실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고 있을 때 빈에 있던 프로이트는 "(...)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경우"(정잔진 옮김) 에 관해서 정식화시킨 <친숙한 낯섦(Das Unheimliche, Uncanny)>를 발표했다. 한 가지를 더 부언해야 할 것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해 국가방위군의 명령으로 독일 노동자당을 감시하기 위해 위장 가입하였다. 독일 노동자당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되었다. 간단하게 줄여 부르는 말. 나치 정당.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사의 순간은 역사의 순간과 헤어진 적이 없다.
베를린에서 UFA 스튜디오의 출범을 알리다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역사는 그 자체로 그 나라 영화의 역사의 하부 토대이며 동시에 대중영화의 정치경제학이다. 돈의 역사. 아무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스튜디오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할리우드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독점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고몽 파데의 스튜디오가 세워졌다. 그러나 독일에서 세워진 UFA는 다른 설명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베를린에 세워진 UFA(Universum-Film Aktiengesellschaft) 스튜디오는 독일 영화사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화가 지닌 상품적 성격에 따른 해외배급의 맹렬한 경제적 지역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은 군소영화사들이 흩어져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와 프랑스 영화, 이탈리아 영화들이 독일 영화시장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1913년 독일에 개봉한 독일영화는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대중들은 전시 상황에서 구경거리를 원했고 수요는 폭등하고 있었으며, 사회는 전시경제로 불안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근심한 것은 영화인들이 아니라 루르지방의 중공업자들 대표였던 알프레드 후근베르크였다. 그는 19·16년 독일 소규모 제작사를 중심으로 한 카르텔 형태의 도이치 리히트빌트(Deutsche Lichtbild)를 세웠다. 이것이 하나의 출발이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연합체는 불공정 거래를 했으며 경쟁 영화사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다. 여기에 개입한 사람은 독일 군(軍)장성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었다. 전시체제였고, 아직은 바이마르 공화국 전야의 빌헬름 2세가 이끌던 프로이센 왕국의 마지막 황혼기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놀랍게도 영화가 지닌 정치적 오락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간파했다. 그는 국방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국의 극장을 외국의 영화에 내주어서는 안 되며 외세의 영화들로부터 방어해야 합니다. 영화가 지닌 특별한 힘을 우리는 전시 중에 보았습니다. 이제 대중들을 집중시키고 통제해야 합니다” 아마도 루덴도르프 장군이 염두에 둔 것은 (정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전시 중에 내내 프랑스 국민들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뉴스 릴을 통해서 영화의 프로파간다 홍보 활동을 했던 고몽영화사 ‘주르날 시네마’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아직 등장하기 전인 그 시절 영화보다 더 강력하게 전쟁의 현장을 전달하는 다른 수단은 없었다. 아마도 영화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그렇게 독일의 정치적 전술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치 문화상이었던 괴벨스는 어린 시절 그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서서 새로운 독일 영화사들의 연합체를 설립하였다. 이 연합체인 UFA는 합병형태(consolidation)로 서로 결합했는데 정확하게 동일한 형식은 아니지만 트러스트의 협약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트러스트 협약형식처럼 서로간의 경쟁형태를 피하고 서로 간의 수익을 거두기 위하여 독점적 지위를 갖기는 했지만 각자의 독립적 위치를 포기해야했다. UFA의 경제적 협력방식을 규명하는 설명에는 영화학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견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UFA는 처음부터 프로이센 왕국의 군부 산하 명령을 따라야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된 다음에는 국방부에서 이 스튜디오를 관리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문화부에로 이관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점도 있었다. 처음 UFA 스튜디오를 출범할 때 국가가 보증했기 때문에 독일은행인 도이체 방크가 거액의 기금을 내놓았다. 1917년 12월 13일 베를린에서 거의 기습적으로 UFA 출범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영화사들이 당황했지만 이 스튜디오를 주관한 사람이 루덴도르프 장군이라는 사실을 앍고 모두 침묵하였다. 군부는 그 당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반대를 표명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행위가 되었다. 처음 출범할 때 노르디스크 영화사. PAGU, 메스터 GmbH를 합병하였고, 1921년까지 21개 영화사를 UFA 스튜디오 아래 집결시켰다. 그러면서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오늘날 영화사에서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무르나우의 <최후의 사람>을 보면서 감탄해마지 않는 UFA 스튜디오가 되었다. UFA는 거의 모든 영화를 제작했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민족지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매주 상영되는 뉴스 릴 영화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 출발이 영화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UFA는 바이마르 문화의 위대한 꽃이 되었다. 여기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독일 영화감독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영화인들도 이곳으로 합류하였다. 프릿츠 랑, 빌헬름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에른스트 루비치, 빌헬름 디터, 로베르트 시오드마크(훗날 할리우드로 망명한 로버트 시오드마크), 심지어 빌리 빌더(훗날 할리우드에 간 빌리 와일더)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릿츠 랑이 UFA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을 최면으로 조종하는 마부제 박사의 이야기 <마부제 박사>를 찍고 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쓰면서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와 역사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