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필리핀
- 감독
- 자크 로지에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장 클로드 아이미니, 다니엘 데캉, 스테파니아 사바티니
사태가 대단히 복잡하지 않은가. 상징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현전은 부재이며, 지연되지 않은 것이 지연되며, 희열은 죽음의 위협이다. 더구나 이런 체계, 대리보충의 이 이상한 경제에 추가되어야 할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미 판독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협인 대리보충은 또한 최초의 가장 확실한 보호라는 점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대리보충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말은 내가 아니라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의 제2부 두 번째 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에서 루소의 「참회록」을 설명하며 꺼내 든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모두들 이미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구태여 대리보충(la supplement)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다만 아주 제한적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를 막아서면서 환원 불가능하게 버티어선 그 흔적을 설명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결정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결정의 망설임. 그 흔적이 무언가 더해진 잉여의 덧셈에 따라 보충된 것인지(le supplement) 아니면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한 다음 대리하는 것인지(la suppleance) 그저 하염없이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 물론 루소를 경유하여 데리다가 말하려는 것은 예술과 자연 사이의 대차대조표이다. 나는 거기서 물러나서 단지 이 텍스트 안에서 활동하는 저 텍스트가 왜 항상 환대받지 못하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왜 스스로 충만하지 못한 채 그 틈새 사이에서 출몰하는 저것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 안의 외침. 바깥이라는 안. 안에 있는 바깥. 무엇이 부족함을 대신하고 그런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라마톨로지」 사태를 좀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임권택 의 영화들, 그중에서도 불편한 영화들을 볼 때마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참조 틀의 어딘가가 부서져 나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단지 1967년 그 어딘가에서 1977년 어디까지에 한정 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 욕망의 결산 >(1963), 혹은 < 달빛 길어 올리기 >(2009), < 신궁 >(1979), 그리고 < 아다다 >(1989). 단지 그 부서져 나간 표면의 범위를 따분하게도 바깥과의 대화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화는 영화사에 대한 각자의 은유라고 고다르가 말했다. 그걸 단지 어디선가에서 빌려온 영향이라고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반대로 처음부터 거기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핵심은 안에서 긍정하기 위해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도를 위해서 방법의 전위(轉位)와 그 수순에 따른 재평가의 결과로 나타난 영화에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요구를 순순히 따라야 한다. 여기서 왜 내가 까다로운 데리다의 전술적인 용어를 내세웠는지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불편함을 말할 때 종종 그 영화에 제한적으로 주어진 데서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 잘못된, 아주 잘못된, 그래서 임권택의 진정한 시작의 지점을 놓치는 실패를 항상 가져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이것을 최종 결과의 효과라는 데서 시작해보면 안될까. 이유들의 순서에 종속되지 않은 대리, 그사이에 재빨리 끼어드는 보충. 우리는 올바른 시작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불편한 실패들 속에서 자기원인의 동어반복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악순환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진화론적인 모델을 거부한다. 그건 그 영화들 사이에 놓인 영향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꾸만 그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목적론적인 설명의 함정에로 이끈다.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사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임권택의 영화들은 내게 그런 설명이 결국에는 왜 불가능한지를 알려주는 목록이다. 월하의 검 (1970) < 월하의 검 >을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재난에 가까운 실패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임권택 에게 의미 있는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여기서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지도 않다. 그 어떤 것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 무언가를 해본 것도 아니다. 1970년은 임권택에게 그런 해이다. 그 해에 임권택은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 애꾸눈 박 >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내리는 선창가 > < 그 여자를 쫓아라 > < 밤차로 온 사나이 > < 속눈썹이 긴 여자 > < 비검 > 그리고 < 월하의 검 >. 어떤 일관성도 없는 영화들. 하지만 이 실패가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임권택의 무능력에로 돌리기에는 그에 앞선 영화들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의 마지막 시퀀스 전부. 혹은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 나는 자꾸만 그의 실패한 영화들을 실패한 작품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 영화들은 실패라는 조건 속에서 자기들의 방법으로 실존하는 중이다. 실패와 부딪쳐서 부서져 나가는 영화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지금 바라보는 중이다. 그때 부서져 나가는 참조 틀 사이로 드러나고, 재생산되고, 존재하는 잉여들의 혼란스러운 모방과 마주친다. 잠깐. 모방이라고 했나요? 물론이지요. 그건 다른 무언가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때 모방은 나에게 효과라는 최종 결과라는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기서 멈춰 세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최종이라는 종착지. 임권택 은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 언제나 정창화 를 이야기한다. 그는 정창화 밑에서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충무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영화는 기계군의 활동이며 조직이다. 공장과도 같은 시스템. 그 안에서 개념의 추상화와도 같았던 이미지를 세계 안에서 찍은 다음 배열해야 한다. 여기에는 규칙과 문법이 있다. 그것을 쳐부순다고 말해도 그 안에서 진행되는 부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임권택이 정창화를 말하는 것은 그 인정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그런 다음 (펠리니의) < 길 >과 네 명의 할리우드 영화감독,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조지 스티븐스를 언급했다. 나는 여기 세 명의 이름을 더하고 싶다. 임권택이 언급하지 않는 이름. 그의 영화 전체는 아니지만 우리들이 실패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기, 실패의 상황이라고 내가 명명한 조건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마주치는 그림자들의 이름. 셀지오 레오네와 끌로드 를루슈, 그리고 장철. 물론 그 이름들은 잠시 후에 임권택의 영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실패의 상황 속에서 남과 여를 주연으로 한 영화들과 < 남과 여 >, 그리고 쇼 브라더스 영화들은 마치 그림 안의 그림처럼 거기 그림자로 남았다. 영화가 한참을 자신의 서사를 진행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들.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종종 지나치게 실패해서 그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는 느낌을 받기조차 한다. 미처 예기치 않았던 출현. 주인공이 자기의 몰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그가 놓여진 상황이 다른 영화 안의 반복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에 약간의 주석을 달고 싶다. 셀지오 레오네는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이 끝난 다음, 그것도 거의 끝난 다음, 그래서 펠리니가 그 방법을 버린 다음, 안토니오니가 리얼리즘을 거의 추상에로 밀고 나아간 다음, 황무지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에 대한 아이러니로 시작하였다. <길>을 자신의 거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말하는 (게다가 전형적인 한국 고전영화문법 안에서 배움을 얻어온) 이 사람은 < 석양의 무법자 >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정창화에게서 충무로의 영화문법을 배운 임권택의 영화에서 잠시 동안 <남과 여>에서 무차별하게 사용된 시네마 베리테의 촬영과 누벨바그의 데쿠파주에 대한 키치적인 활용이 홀연히 등장하는 순간을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마주칠 때 나는 어떤 쇼크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남과 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한국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었기 때문이다. <남과 여>는 한 시기의 한국영화들을 거의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처 < 히로시마 내 사랑 >과 < 비브르 사비 > < 어느 여름의 연대기 > <사촌형제> < 롤라 > < 활주로 > < 쥘과 짐 > <사자좌> <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 > < 파리는 우리의 것 > <아듀, 필리핀>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를 보지 못했다. 그저 < 네 멋대로 해라 >와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경험은 중단되었다. 아마도 오직 김기영 만이 영화‘歷’사의 시간을 좇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김기영은 (인터뷰에 따르면) 1960년대 그 부근 언젠가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오로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도쿄에 방문했다. 풍문으로 누벨바그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일본을 경유하여 각색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기의 글 자료들을 읽은 내 독후감은 그렇다. 그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고, <남과 여>가 굉장한 영화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의 법칙과도 같았던 고전영화 문법을 무시하면서 그저 그렇게 떠오르는대로 찍고, 연출하고, 편집하고, 그래도 괜찮은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자유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지배했던 도제제도로부터의 해방. 그때 임권택은 모던 시네마의 방법에 가까이 다가갔다. 실패한 상황. 예기치 않은 보충, 혹은 무엇이 무엇을 대리하기 시작했을까. 이 위험한 대리보충.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기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영화가 모두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임권택은 재빨리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도 방법의 흔적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다소 기형적인 양태로 분산되고 분할되어 머물렀다. 우리는 임권택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 방법을 잘 따라야 한다. 무엇이 멈추자 무엇이 활동하기 시작했을까. 거기서 우리는 영화의 어떤 역량이 표현되기 시작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역량. 때로는 실패해버린 표현. 거기에 적합한 개념. 거기서 멈춰버린 기능. (위) 정창화 와 <길>, (아래)셀지오 레오네, 끌로드 를루슈, 장철 나는 여기서 세 번째 이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생각이다. 장철. 張徹. 1968년 5월 23일 서울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가 개봉하였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그렇게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홍콩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는 한국 영화문화 안에서 하위 장르의 하위 장르이면서 동시에 재개봉관을 중심으로 컬트영화가 되었다. 임권택 은 이 이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길게 언급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갔다. 내 질문은 왜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버렸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영화 안에서 장철을 수 없이 다시, 거듭해서 다시, 호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셀지오 레오네와 < 남과 여 >를 불러낼 것이다) 이것이 단지 불균등한 위계적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장철과 셀지오 레오네, 그리고 <남과 여> 없이 더 나아갈 수 없었고, 아니, 차라리 그것들의 대리보충 없이 참조 틀을 부술 수 없었고, 그런 다음 거의 불순물과 다름없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다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실패해버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위험한 명제. 임권택에게 그가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무로는 참을 수 없는 문법이었고, 그런 다음 부서져 가는 그의 영화 안에서 셀지오 레오네와 <남과 여>, 장철은 다시 견딜 수 없는 대가가 되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설명을 따분하게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방식으로 도식화시키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다. 갑자기 여기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난 것이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 자기가 찾고 있는 진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서만 견딜 수 있는 형식을 찾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철이 단지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말고 그 영화들이 광동오페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판본 위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안의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임권택과 장철이 공유하는 것은 무협활극이라는 표면적인 약속의 장르 사이에서의 트랜스 내셔널 네트워크가 아니라 피와 시체들, 복수의 정념과 의리의 도덕 뒤에 수줍게 숨어있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혹이다. 더도 덜도 아닌 매혹. 그 속에서 그들이 즐기는 기쁨. 바로 거기서, 마치 그것을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참조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대한 참조라고 할 정도로 < 월하의 검 >은 장철의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 대협객(大刺客) >과 (부분적으로) < 심야의 결투(金燕子) >의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몇몇 장면에서는 거의 같은 구도, 같은 활극동작을 빌려온 살진(殺陣)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여기서는 단지 오마주라거나 두 영화 사이에서의 상호 텍스트성이랄까, 이런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교차가 나타난다. 나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패한 오마주라고 말해버리면 어떨까. 이 말을 잘 음미해주기 바란다. 오마주를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효과로서 나타나 버린 오류라는 실패한 오마주, 그 안에서 이행의 대리보충을 붙잡아야 한다. 무언가 저 영화가 이 영화에 구멍을 내고 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단지 거기에 동의한다거나 혹은 이미 해놓은 것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감흥의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 대협객 >(1967) < 심야의 결투 >(1967) < 대협객 >은 쇼 브라더스에서 장철이 왕우를 주연으로 하여 1967년에 만든 홍콩영화이다. 무협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다른 장철 영화들과 달리 긴 드라마가 장황하게 이어진 다음 아주 잠깐, 그래서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하지만 몹시 인상적인 무협활극 장면이 나오는 절정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나면 서둘러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는 1969년 10월 4일 종로 3가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는 자객열전 중의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백성이었던 섭정은 출중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시기한 동문 서식의 음모로 인해 스승은 당시 제나라와 적대관계에 놓인 나라의 첩자로 몰리고 무술 도장은 쑥밭이 된다. 이에 섭정과 그의 친구 두파는 복수를 한 다음 섭정은 모든 걸 포기하고 백정이 되고 두파는 옆 나라인 한나라로 피신하여 거기서 한나라의 충신 엄중자의 자식 무술 사범이 된다. 그런데 엄중자는 재상 한괴가 끊임없이 그를 음해하고 임금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며 몹시 괴로워한다. 그러다 보다 못한 엄중자가 두파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자기보다 훨씬 무술이 훌륭한 섭정을 추천한다. 제나라까지 찾아온 엄중자의 마음을 알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섭정은 다만 자기에게는 아직 병상에 누운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누이가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몇 해 후, 어머니 상을 치루고 누이가 시집을 가자 섭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엄중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하얀 백의에 백마를 타고 귀공자로 분장하여 혼자 수백 명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괴를 찾아가 그를 처단하고 자결한다. 나는 주변에 있는 섭정과 그의 연인, 그리고 누이와의 이야기는 모두 그냥 지나쳤다. 그런 다음 < 월하의 검 >. 이 이상할 정도로 기괴한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임권택 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물론 임권택은 첫 영화를 만들 때부터 끊임없이 영화를 찍으면서 시나리오를 고쳤다. 그건 ( 송길한 이 시나리오를 쓴) < 만다라 >를 찍을 때도 그러했고 ( 이청준 이 시나리오를 쓴) < 서편제 >를 찍을 때도 그러했다. < 취화선 >을 찍을 때는 심지어 시나리오를 탈고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매일 아침에 새로운 대사를 쓴 시나리오를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다시 고치는 것과 처음부터 쓰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뒤 이어 와서 그것을 닮은 다른 이야기가 이미 앞에서 포위하고 있을 때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가 다른 하나의 대리보충이 될 때 어느 쪽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지 그렇게 쉽게 분간할 수 있을까. 후렴구. 나는 지금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 하지만 그런 다음 더 이상 어떤 것도 분명한 지표가 없는 사극의 무대.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 월하의 검 >을 볼 방법이 없고 잘 정리된 줄거리도 없기 때문에 이 글을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 (...) 임금은 무능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화당 최씨의 미모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권세를 포도대장 최걸에게 모두 넘겨준다. 최걸은 자신을 비방하는 충신들을 모두 척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빼어난 무술을 지닌 장무력을 고용하여 마치 연화당 최씨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것처럼 꾸민 다음 최씨를 지키는 호위무사 박필에게 붙들리는 계교를 꾸민다. 임금 앞에 잡혀간 장무력은 자신을 고용한 자들의 명단으로 충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고 곁에서 통곡을 하며 연화당 최씨는 그들을 모두 참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한다. (여기가 영화의 시작이다)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고 이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충신들은 심산유곡에 자리한 절로 피신하여 이제 남은 방법으로 연화당 최씨보다 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을 궁궐로 보내 임금의 총애를 받은 다음 진실을 알리고 간신배들을 벌할 것을 상소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미 참수당한 충신의 딸 향아가 이에 적합한 미모를 가졌으며 그녀의 효성이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데 합의한다. 문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행방이 묘연한 향아를 찾는 것인데 우연히도 위험에 처한 그녀를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 박필이 구하게 된다. 박필은 천애 고아로 어려서부터 최걸이 돌보면서 무술을 배우고 그 아래서 최걸의 자객이자 누이인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가 된 몸이었지만 자신의 신세에 대해 처량함을 느끼며 그저 시간 날 때마다 조선팔도를 이리저리 떠돌며 그림을 그리면서 허송세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무술만은 조선 최고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박필은 향아의 정체도 모른 채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변장을 하고 궁에 잠입한 향아를 보고 모든 계획을 깨달은 박필은 부디 이 위험하고 허망한 복수를 중단하고 자신과 멀리 떠나자고 말하지만 향아는 반대로 자신을 도와 복수를 이룬 다음 함께 멀리 떠나자고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향아는 임금의 처소에 들고 그의 마음에 들지만 (여기서 나는 그사이에 향아의 정체가 탄로 나고 연화당 최씨의 인두질로 얼굴이 망가져 궁궐 바깥으로 내쳐지지만 심산유곡 절의 주지스님이 지극정성으로 치료한 묘약으로 미모의 얼굴을 고친 다음 다시 궁궐에 입궐한 사연을 둘러싼 대목을 건너뛰었다) 하룻밤 정사를 치르고 나서 증거가 없으니 연화당 최씨와 그 오빠를 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최걸은 이제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장무력을 제거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박필에게 제안한다. 박필은 장무력을 찾아가 일대 결전을 벌이지만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두 사람은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지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과 대결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한 수를 쓰지 않는 박필의 마음속 진심을 본 장무력은 기꺼이 그를 위해 임금 앞에 가서 진실에 관한 증언을 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박필은 그 증언이 모두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임금의 처소를 향해 수 없이 몰려드는 병사들과 홀로 싸워야만 한다. 장무력이 모든 증언을 마쳤을 때 박필은 수백 명의 병사들의 시체 곁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중이다. 그 곁에 온 향아는 그를 비로소 여보, 라고 부르며 품에 넣어둔 극약을 먹고 그와 같은 운명의 선택을 한다. 그 시간에 연화당 최씨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자 자결을 한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임금은 홀로 남겨진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 포스터에 있는 주연배우들의 명단을 보면서 당신은 포도대장 최걸을 허장강이 연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배역의 컨벤션이라는 약속. 하지만 김지미 는 향아가 아니라 악독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 최씨를 연기한다. 향아는 김명진 이 연기한다. 물론 배역은 일종의 수건돌리기 게임이다. 영화 바깥의 여러 가지 복잡한 변수가 있긴 하지만 누구든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질문은 이야기 안에서 이들 사이의 오류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턱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 영화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아마 이 말이 당신을 당황시킬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언가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결말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순간은 결말이 다가왔다기보다 무언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선악이 분명하며 우리가 누구 편에 서야 할지 따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점점 그 경계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무언가를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비웃으면서 보편적인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처리해버린다. 여기서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정박지인 임금은 단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과도하리만큼 색욕에 빠져 있다. 그 역을 연기하는 김순철 은 다른 배우들과 전혀 달리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어색한 코미디의 연기를 한다. 김순철은 단 한 장면에서도 다른 배우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김명진 과 침소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때조차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홀로 존재한다. 불편한 고정점. 나는 당신에게 임권택 이 영화 연출을 할 때 언제나 연기를 교정하는 것에서 그 인물의 형상화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 정창화 감독은 나를 카메라 옆에 앉혀놓고 배우를 보라고 시키는 거예요, 어떤 배우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약점이 보이는 거예요, 그게 내가 시나리오와 인물 사이의 오차 범위를 줄이는 방법이었어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겠다. 임금은 만월이 뜨는 밤이면 내시 한 명을 데리고 홀로 비원에 행차해서 그 달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 이건 궁중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래서 향아는 임금이 혼자가 되는 그 시간에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박필에게 애원한다. < 월하의 검 >이라는 제목은 달빛 아래서 대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에 거기에 가야만 하는 향아와 그녀를 거기에 보내야 하는 박필의 애처로운 사연의 알레고리이다. 하나의 시간. 만월의 밤. 세 개의 선. 임금과 향아와 박필. 서로 맞지 않는 정념들 사이에서 운명적으로 짜 맞춰져야 하는 매듭 사이로 벌어진 틈. 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그 자신들이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진 상태란 무엇일까. 말하자면 비극의 수순. 그런 다음 매듭을 자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임권택은 (장철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이 이야기가 죽음에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박필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역설적으로 스스로 운명 앞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녀의 간절한 소원. 하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내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저 사람은 임금의 침소에 들어 육욕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에게 벌거벗은 살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거의 기술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1970년의 한국영화 촬영기술을 바탕으로 무리할 정도로 반복해서 몇 번이고 만월(滿月)의 밤을 찍는다. 미첼 카메라의 둔중함과 값싼 아그파 필름, 그리고 조악한 조명은 한밤중에 만월을 찍는 것이 불가능한 장비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만월의 밤은 한낮에 밤 장면을 찍었다. (day_for_night) 종종 잘못 색 보정된 다음 무성의하게 현상된 필름들은 이 만월의 밤 장면들이 낮에 촬영되었음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월하의 검>은 기술적으로 거의 재난에 가깝다. 그걸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그냥 그걸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걸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의도라면 그건 나쁜 의도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그래도 상관없다, 는 자포자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임권택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걸 설명하는 것은 전기 작가의 몫이지 내가 할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여기서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월하의 검>은 미학적 기준으로 무자비하게 설명하기를 단 한 순간도 망설일 필요 없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는커녕 그걸 먼저 알아차리고 실패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다음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기묘한 실패의 정식화를 끌어낼 수 있다. 그건 실패가 외재적 조건일 때 이미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에 대한 긍정이라는 역설이다. 이때 영화는 임권택에게 일종의 자기 심문과 같은 것이 되어간다. 마치 영화가 자기의 속살을 내보이듯이, 정말 부끄럽게, 필름의 한계와, 촬영의 제한적인 조건과, 제작의 무성의한 진행에 관한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끔찍할까.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수수방관해야만 할 때, 그때 거기서 할 수 있는 방어의 기술이 전혀 없을 때, 임권택은 반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바로 거기서 위험천만한 상실이라고 할까, 그 자신의 영화의 내부적인 멜랑콜리가 불연속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안의 질문. 지금 이것은 그래도 성립되고 있습니까. <월하의 검>은 거의 부서진 영화이다. 그런데도 가까스로 버티고 선 무언가가 이 영화에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것을 방어하면서 성립시키고 있다. 재앙을 피해야만 해.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해. 여기서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장철의 < 대협객 >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을 쳐다보게 된다. 그때 그건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제도 바깥에서 나타난 부정성이다. 몹시 사악하고 거의 지켜지지 않는 규칙들. 강제적인 영화의 속도. 쇼 브라더스 영화의 처음 보는 기이한 문법. 거기서 섭정의 삶은 자유자재로 스튜디오 속을 거닐며 자기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다음 마지막 순간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오른다. 그렇게 사람이 날아가도 상관없는 것일까. 새로운 동선. 영화에서의 새로운 선, 하지만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선. 그 자신의 학습을 통해 얻어낸 경험을 앞지르는 건너편의 방법이 나타나서 부서져 가는 참조 틀 사이로 대리하고 보충하는 시간은 이 영화가 발작하는 순간들이다. 상감,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옵니다. 사실이옵니다. < 월하의 검 >을 보다가 누구라도 멈춰 서게 될 두 장면, 그런데 거의 마지막 장면, 그래서 이야기가 멈추는 두 장면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서 임권택 은 장르 안에서의 연쇄를 갑자기 끊어버린다. 그런 다음 이야기를 밀어내고 어떤 대체의 구조를 찾기라도 하듯이 인물에서 그것을 보충하려 든다. 어떤 절단. 그런 다음 그것을 떠안아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기라도 한 듯한 결정. 장무력이 임금의 앞에 가서 진실을 고하고 나자 포도대장 최걸과 연화당 최씨를 불러 그 말이 모두 사실이냐, 라고 묻는다. 그러자 최걸은 그 모두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로 시작하는 사극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는 상투적인 대사를 시작한다. 물론 악인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조금도 자비심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때 최걸 의 말을 자르면서 연화당 최씨가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표정으로 모두 사실이옵니다, 라고 대답한다. 임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본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요구를 거절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동시에 권리와 정의를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국가의 (상투적인) 변증법. 하지만 연화당 최씨는 이 일련의 자동적인 연쇄를 중단시킨다. 그런 다음 임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질문한다. 저년과 저, 둘 중에 누가 더 예쁜가요? 목숨이 걸려있는 순간에 이 질문은 적절치 않은 내기이다. 왜냐하면 임금의 대답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녀의 목숨에 대한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생명에 무관심한 듯한 질문. 하지만 이때 임금은 여기서 그 자신의 대답이 결정의 이해관계로부터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연화당 최씨의 질문은 임금의 자리로부터 그녀의 침소에서 몸을 탐했던 한 남자에로 임금을 추락시켜버린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는 임금으로부터 그건 물론 네가 더 예쁘긴 하지만, 이라는 대답을 듣자 거기서, 바로 그 대답의 거기서,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 옆에 서 있던 신하의 칼을 빼 들어 그 자리에서 자결한다. 대답이라는 패배. 대답을 통한 권리의 상실. 정의의 연쇄적인 추락. 자기 목숨에 대한 연화당 최씨의 스스로의 결정. 임금은 순식간에 결정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빼앗긴다. 그러므로 거기서 임금의 명령이 대상을 놓칠 때 그렇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얻어낸 진실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월하의 검>에는 표면적인 결론과 달리 드라마의 효과가 만들어내는 사필귀정의 카타르시스가 없다. 주인은 자기의 권리를 빼앗기고 주인의 주인은 그 권리를 죽음으로 돌려준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할 때 향아는 임금께 고하는 장무력의 고백을 위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밀려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희망 없는 칼부림 끝에 죽어가는 박필에게 달려온다. 물론 이 장면은 장철의 < 대협객 >의 마지막 장면의 변주이다. 혹은 < 심야의 결투 >의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대결을 끝낸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서 피를 흘려가며 끝없이 밀려드는 무사들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필사적인 결투를 계속하는 은봉황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박필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가 입은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계단에 쓰러진 채 죽어가는 중이다. 달려온 향아는 그를 껴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여보, 라고 부르며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박필은 향아에게 이제는 만족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반복해서 향아의 복수를 말렸고 그녀의 희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설득했으며 단 한 번도 그녀의 결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도와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향아는 복수에 성공했고 그녀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때 향아는 박필의 질문에 대답한다. 저 탐욕한 무리들을 떠나 당신과 함께 떠나겠어요. 연화당 최씨의 대답과 마찬가지로 여기까지 향아의 동선을 쫓아온 당신은 갑자기 멈춰 설 것이다. 탐욕한 무리들. 그 대답에서 가리키는 탐욕한 무리들은 최걸과 연화당 최씨가 아니라 그들에게 희생당한 충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아를 궁궐에 보내 자신들의 억울함을 탄원해달라는 명령을 내렸던 아버지의 친구들. 대의를 위한 희생. 향아는 그 충신들을 최걸과 연화당 최씨 남매와 별 차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단지 그들은 서로 권력을 잡은 자와 잃은 자의 반대의 자리에 놓여있을 뿐이다. 향아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었고,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한 그 빈자리, 임금의 옆자리에 가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한 다음 품에서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만일의 경우를 준비한 독약을 아낌없이 자기 입에 털어 넣는다. 두 개의 자살. 즐비한 시체. 여기서 자살은 어느 쪽도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살을 선택하면서 무언가를 항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대하는 행위는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길고 긴 영화의 목록 끝에 자신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가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말한 이 사람의 영화에서 끈질기게 자살이 반복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부를만한 < 취화선 >에서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오원 장승업은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결론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런데 장승업에 관한 전기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그저 실종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각자의 이야기에서 살고 있는 각자의 주인공들이 살아온 삶의 결론에 이르러 각자의 죽음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어디서 시작했건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어떤 (텅 빈 상태의 공허한) 중심에로 이끌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역사 그 자체. 나는 <취화선>에서 바로 이어지는 또 한편의 전기인 < 하류인생 >의 마지막 장면을 유심히 바라본다. 여기서 자기의 자리를 텅 빈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일까. 나는 임권택에 관한 논의를 더 멀리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실패한 선택으로서의 장철의 쇼 브라더스 영화를 경유할 필요를 느낀다.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 머물지 않기 위해서 비극적인 것에서 진정한 비극에로 점핑하면서 도약하는 과정이, 오로지 그 과정이, 임권택의 목록을 쫓아가는 내게 감동을 준다. 방법론으로서의 소용돌이의 심연. 무한정한 회의. 그 안에서 탄식하는 부자연스러운 매혹. 먼저 덧셈을 한 다음, 보충한 다음, 그다음은 빼내는 것이다. 거기서 원래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대리를 다시 바꿔야한다. 대리보충에 대한 대리.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이중의 세션. 물론 모든 문제 안에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얼마나 주어져 있는가. 이제까지 나는 < 월하의 검 >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서 모든 장면들이 보고 난 다음 내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권택 은 내가 보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장면을 종종 바늘처럼 찌르듯이 불쑥 내밀 때가 있다. 이건 바르뜨가 말하는 푼크툼과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이야기 안에서, 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따로 이야기에서 때어놓고 보면 별로 대단하지 않을뿐더러 이미지 자체가 훌륭한 것도 아닌데 정말 갑자기 그 장면이 이야기 앞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이 장면을 이야기에 놀랍도록 적절하게 조응한다거나 혹은 이야기를 압도하면서, 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면은 이야기에 대해 몹시 불길하고 축축한 외설성을 갑자기 드러내듯이 출현한다. 여기서 방점은 갑자기, 에 놓여있다. 그건 무언가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것만 같은 불만에 빠졌을 때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장면이 앞에서 상연되는 것이다. 나는 상연, 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의도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누구에게? 우리에게. 왜 그런 상연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건 이야기의 표면만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필과 향아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제 자리를 맴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박필은 향아를 그녀의 원대로 한밤중에 비원으로 데려다준다. 비원에 깊은 밤이 오면 임금이 내시 한 명만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며 이 시간을 홀로 즐기기 위해 나들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향아는 그 밤이 만월의 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한밤중의 비원에 홀로 앉아 오지 않을 임금을 기다리며,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장소에서, 그 누구도 들을 리 없는 피리를 거기 없는 임금을 향해 불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이야기 안에서 오인의 청각 기호가 작동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밤은 깊어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향아는 피리 불기를 중단한다. 이때 화면에서 향아가 중단을 했는데도 영화는 계속해서 피리를 분다. 그때 이 피리는 향아의 몸과 분리되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런 다음 마치 장면의 사운드 트랙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 홀로 남은 향아를 위해서 영화가 불어주는 풍경으로서의 청각 기호가 된다. 이 이행의 순간은 순식간에 벌어져서 단지 실수가 아니라 마치 이야기 전체가 어떤 오작동을 일으킨 것만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임권택은 텍스트라고 정의 내려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거기에 마치 어떤 맹점(blind_spot)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의 가시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가장 가까이에 다가간다. 우리는 이걸 단지 속임수라고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갑자기 이야기 바깥에서 운명이 찾아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이야기 바깥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이야기를 조정하는 끈. 이때 운명은 비극을 상연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장면이 필요해진 것일까. 임권택은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에서 역사를 삭제하는 대신 역사 안의 실재적인 질서가 작동시키는 운명이 비극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남겨놓는다. 여기서 조선 시대의 구체적인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아니 차라리 그런 임금의 존재를 역대 왕조에서 누구로부터도 유추할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가 아니라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대리된 가상의 임금. 그 안에서의 광동 멜로드라마의 보충. 이때 임권택은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에서 다시 이야기의 현실 안으로 되돌아올 때 소름 끼치게 무서운 장면을 준비해놓고 있다. 향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비원에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하여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이때 향아가 방에 앉는 장면은 무언가 이상한 구도로 잡혀있다. 지나치게 멀리 물러난 카메라와 향아의 거리. 그녀를 둘러싼 어둠. 그런 다음 호롱불을 켜자 방 안이 밝아지면서 이제까지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화당 최씨와 그녀의 궁녀들, 그리고 야경을 돌며 궁궐 안을 순찰하던 포졸들이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병풍처럼 향아를 둘러싸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 우리를 경악(驚愕)이라는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여기가 궁궐 안에서의 향아의 유일하게 사적인 공간이자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것처럼 여겨진 그녀의 방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이 방을 마치 향아에게만 개인적으로 허락된 장소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기를 향아의 안전한 피난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화당 최씨가 여기에 나타났을 때는 습격을 당했다기보다 갑자기 피난처의 베일이 찢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이를 때까지 연화당 최씨는 향아의 행동반경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거나 마치 그 둘 사이에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원. 각자의 운동. 그런데 가장 이상한 세 번째 이유가 남아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진행이 향아와 연화당 최씨 두 인물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진지함을 상실한 채 지나치게 나태했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동선 안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이후의 진행을 생각하면 거의 희박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란 우리들은 그만 이 순간에 불쑥 찾아온 예기치 않은 방문객을 맞이한 심정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임권택은 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여기가 이 시기의 임권택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다시 참혹한 기술적 수준의 장면들과 진부한 이야기에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두 개의 자살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둘이 자살을 맞이할 때까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 월하의 검 >에서 그 두 사람의 죽음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영화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 속의 요지부동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죽음 끝에 정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사실상 이 영화의 무대가 된 존재한 적이 없는 조선 시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임금은 새로운 여자를 찾을 것이며, 그는 정사에 관심이 없으며, 충신들의 무리는 자신들의 복권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어떤 변화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세월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임권택 은 그의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하여 사극을 만들었다. 구체적인 왕조와 역사적인 실록은 이야기에 개입하였으며, 실존했던 인물들은 자기의 자리를 버티고 앉았으며, 외세는 이 시대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권택은 역사 안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때 그는 우아한 화면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연출하였다. 우리는 임권택이 1934년에 전라남도 끝자락 아직 조선 시대의 향취가 남아있던 시대에 자라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1965년에 만든 < 왕과 상노 > 혹은 그 무렵부터 실록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임권택의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남은 것은 시대의 조건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부여한 최소의 이치였다. 제도와 계급. 의상과 호칭. 마치 게임의 규칙처럼 되어버린 역사의 매트릭스. 역사는 형식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임권택이 누린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된 상황과 공허한 유교에 바탕을 둔 감상적인 남녀 사이의 희생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전근대적 향수의 눈물이었다. “그때 그 영화들을 만들면서 내 영혼이 다 부서지고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살아본 시대는 아니지만 이게 무어가 진짜고 무어가 가짜인지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다 들어본 세상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어른들에게서 법도와 예절을 배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내가 내 손으로 좋았던 유산을 다 부수고 있으니 만들면서 내내 참 몹쓸 짓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 월하의 검 >은 정확하게 그 말에 대한 대답이다. 임권택은 먼 길을 돌아와야 했으며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자기에게 강요된 조건을 수락해야만 했다. 그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참으로 참혹하게도 임권택이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 증언 >을 경유하여 그해 여름 한국전쟁을 마주 보면서, 다 부서져 버린 고향을 바라보면서, 흩어진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서로 총을 쏘고, 고발하고 신고하고, 죽고 죽이는 세상을 보면서, 그렇게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만, 아직은, 아직은 좀 더, 나는 임권택의 그 시간에 머무를 생각이다. 그러므로... (계속) 1970년 10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임권택 촬영 최호진 조명 윤창화 편집 장현수 음악 황문평 김지미 윤양하 김명진
(... 전편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돌아가서 인터뷰를 먼저 읽기 바란다. < 몽녀 >에 관한 글은 전편과 후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은 후편에 해당한다. 나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어서) 1968년 임권택 은 입체영화 <몽녀>를 찍었다. 나는 만들었다거나, 연출했다거나, 라고 말하는 대신 찍었다, 라고 썼다. 물론 이 말 사이에 어떤 위계 질서를 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언가 기술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고 싶다. 무엇보다 먼저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의 절차를 차례로 밟아 볼 생각이다. 먼저 신문광고를 보았다. 그때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 첫 번째 순서는 신문 하단에 실려 있는 개봉 광고를 보는 것이었다. 거기 영화제목 <夢女>만큼 큰 글자로 ‘立體映畵’라는 카피가 자리 잡고 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몽녀>의 마케팅 포인트가 ‘입체 영상’이 아니라 ‘입체 음향’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아래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4본 츄럭 입체음향’ (물론 ‘츄럭’은 ‘트랙’의 당시 표기이다)이라고 ‘기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구는 영화광고 지면의 맨 위에도 다른 서체로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이재웅 녹음기사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피로를 주지 않는 선명한 영상에 완벽한 입체화면, 입체 음향. 등골이 오싹하는 장면들이 많은 본격적인 입체음향, 4본 튜럭을 겸한 완전 입체영화이오니 임신부나 심약한 분은 동반하시길...” 이라고 충고하는 카피를 덧붙였다. (아래는 ‘츄럭’이라고 쓰고 바로 위에는 ‘튜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두 가지 이상한 점. 이재웅 녹음기사는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 현장에 있는 스텝들 이외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다. 하긴 그건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 설국열차 > 혹은 < 올드 보이 >, < 밀양 >, < 피에타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의 녹음 기사 이름을 들어는 보았는가. 그런데도 <몽녀>는 주연 배우나 감독의 이름 대신 녹음 기사를 내세워서 광고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말 그대로 ‘前無後無’한 일이다. 두 번째, 만일 카피에 내건 이름이 무언가를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문구에는 연출(과 촬영)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냥 녹음 기사의 이름으로 “오싹하는 장면들과 선명한 영상”을 보증하고 있다. 카피의 목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카피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몽녀>는 사운드로 연출된 영화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우리는 지금 <몽녀>를 ‘4본 츄럭 (혹은 튜럭)’으로 감상할 수 없다. 현재 보존하고 있는 네가의 손실에 사운드트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판스코프와 장석준 촬영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번째 ‘입체영화’를 찍은 임권택 에게 돌아오고 싶다. 1968년에 임권택은 네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그런 다음 이듬해에는 6편을, 그리고 70년에는 8편을, 71년에는 7편을 찍었다. 그 자신은 “완성한 영화들이 개봉이 밀려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4년간 25편을 찍은 건 사실이다. 임권택은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에 넘쳐나서 (그의 전 작품 중에)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영화를 이 시기에 찍은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몸의 피로. 시간의 피로. 지쳐버린 이미지. 무시무시한 속도.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도. 막다른 골목. 이어지는 현장. 임권택은 지나간 것에서 나와야했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건 그저 그때 그의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다. 그 안에 있으면서 임권택은 영화가 무언가에 침범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테크놀로지들. 영화는 테크놀로지가 변하면 문법이 바뀐다. 한국영화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찾고 있었다. 기술의 진보. 기존의 기계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 영화는 미래주의의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동. 그 와중에 놓인 해. 1968년에 만든 영화들 사이에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단 한 가지. 그건 그 이전과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이미 임권택이 만들어온 사극이지만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물론 그 새로운 이것임, 이 기술에만 놓여있던 것은 아니다.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반공영화지만 희미하게 구원이라는 테마가 종교의 말씀에 이끌리고 있다. < 돌아온 왼손잡이 >는 임권택의 세 번째 ‘다찌마와리’영화지만 여기서 그의 영화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는 신체훼손의 테마가 불려 나온다. 만일 이 또 다른 새로운 이것임, 에 대한 새로운 짝이 없었다면 < 잡초 >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위험한 가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영화 자체의 감각에 대한 불안이다. 새로운 시스템. 잘 작동되지 않기 시작하는 영화의 지각 장치들. 그 사이를 에워싼 다음 무언가 닫혀버린 듯한 장치들. 자기 앞에 놓인 영화의 구역이 자기에게 친숙함 속에서 낯설어지는 경험. 임권택은 그것을 익혀야만 했다. 무언가 그가 여기서 새로운 것을 해냈다기보다는 어쩐지 이 영화들에는 배움의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3D 영화 < 몽녀 >가 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아직도 3D 영화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 아바타 >에 대해서 일제히 흥분했을 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단지 영화가 너무 시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가 보여준 3D에서 어떤 영화적 흥분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질 것이다. 천만의 말씀. 나는 논쟁을 하기 위해 지금 이 말을 꺼내든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반문하고 싶다. 3D는 영화에 무엇을 부여하였는가? 생명? 글쎄. 상상? 천만에. 거기엔 정반대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당신도 알고 있다. 사유? 어쩌면. 그렇다면 어떤 사유? 여기엔 다시 어떤 관념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신 무언가를 보여주려들 때 나타나는 그저 물리적 운동들, 드러난 흔적선, 거기서 나는 단지 프레임의 변주를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대신 어디에선가 쇼트가 중단되었음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너무 섣부른 것이라면 적어도 영화라는 시간의 멈춤, 거기서 비롯된 모종의 고통, (그렇다) 무언가 멈춰버린 답답한 쇼트 안에서 다소의 피로를 경험하였다. 나는 여전히 3D를 볼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좌표체계들의 질서로 다시 배치된 프레임. 새로운 조건, 이때 내가 여기서 보는 질서는 동시에 (재난이라는 의미에서의) 카오스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창조를 보는 대신 무언가 떠오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어떤 실패를 본다. 나는 아직 이 실패를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때 무엇이 어른거리는가. 새로운 이미지? 아, 이미지. 그런데 어떤 이미지? 공간의 새로운 경험. 그렇게 다시 경험이라는 말이 영화에서 우리들의 중심에 들어섰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기술의 경험이라는 문제는 영화에서 까다로운 질문이다. 만일 누군가 3D 효과의 가장 훌륭한 예를 요구한다면 (3D기술로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힛치콕의 < 현기증 >에서의 줌 인 트랙 아웃을 선택할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현재의 생산조건이 예술에서 실현가능한 발전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가치의 기준과 시장의 교환가치 사이에서 모호한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가능성의 잠재성. 어쩌면 내게 당신은 그 잠재성과의 거리에서 가능성의 상상이라는 능력을 다시 조절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 몽녀 >를 말하기 위해서 나는 다소 우회하고 싶다. 잠시 멈춰 세운 1968년. 모두가 물어보았다. 21세기 영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D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 아바타 > ‘이후’ 만큼 전세계적인 (자본과 그에 얽혀든 노골적인) 구경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를테면 2013년, 할리우드로부터 (겉으로는) 영화 예술을 방어하기위해 예술가들을 위한 파티처럼 ‘골치 아픈 작가’들의 영화를 모아놓는 칸 영화제가 3D 영화 < 위대한 개츠비 >를 개막작으로 초대하였고, 경쟁하듯이 이어지는 베니스영화제가 역시 3D 영화 < 그래비티 >를 마찬가지로 개막작으로 발표하였다. 3D영화에는 한 가지 신화가 있는데 그건 지금 막 발표한 ‘아무도 보지 못한’ 새 영화가 이제까지의 어떤 3D 영화도 기술적인 이유로 구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문이다. 물론 그건 빈 상자이다. 마치 진짜 선물을 감춰놓은 최후의 상자처럼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열고 또 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차라리 이미지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IMAX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다. 그건 시네마스코프만큼 생각해볼만한 영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연설명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당신은 내게 냉소적으로 반문할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IMAX를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없잖아요. 나도 알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당신의 지적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화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리에서 IMAX 스크린으로 고정시킨 것이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화 전체를 IMAX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IMAX 체험이라는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영화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의 물신적 체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는 다소 짓궂은 담론의 교란이 음산하게 떠돈다. 잘못 잡아당긴 재앙의 실. 그때 테크놀로지는 비판적 거리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가치와 이윤율의 회전 사이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예술에서 기능이라는 문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영화에서 우리를 새로운 환경, 낯선 속도, 무언가 시선이 얽히고설킨 가운데로 데려다 놓는 것처럼 보일 때 거의 동시에 어떤 영화적 능력이 마비되고 있음을 동시에 느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기능이 속도를 갖기 시작하면 다른 능력은 감속하기 시작한다. 나쁜 경우는 그 능력이 제로가 될 것이다. 문제는 21세기 영화에서 오로지 산업적인 이유로 두 가지 테크놀로지가 배급 구조에 따른 (제한된 자본 순환구조 안에서 일반적 이윤율의 하락을 상쇄하는 새로운 제 요소 중의 하나로 강제적으로 결합시키려는) 극장 라인의 요구에 따라 기형적으로 결합하면서 오히려 영화의 모든 잠재성은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자본의 운동. 3D 영화는 초과잉여가치의 발생인가, 아니면 (관객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제공하는 자리를 바탕으로 한) 임대업의 상승인가. 그 자리를 차지한 시각적 스펙터클. 말하자면 영화의 입장에서 IMAX 3D는 일종의 스펙터클한 괴물이다. 나는 이것을 벤야민의 말을 빌려 와해된 시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와해된 시장에서는 오락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기 드보르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덧붙인다. 스펙터클이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되어버린 자본이다. 자본은 미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마틴 스콜세지의 < 휴고 >를 보았다. 멜리에스의 환상적인 타블로 안에서 재현된 3D. 베르너 헤어초크의 < 잊혀진 꿈의 동굴 >을 보았다. 프랑스 남부 아르데스 협곡 안에 자리 잡은 쇼베 동굴 안에 자리 잡은 3만 2천 년 전의 동굴 벽화들. 그 사이를 외롭게 떠도는 3D 카메라(들). 빔 벤더스의 < 피나 >를 보았다. 피나 바우쉬의 제자들의 기억과 재현. 종종 무용수들은 2차원을 벗어나듯이 도약한 다음 중력이 잡아당기는 무게에 따라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픽사의 < 토이 스토리 3 >를 보았다. 나는 단지 효과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3D는 애니메이션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금방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3D 영화는 실재의 감각을 가져야만 한다는 명제를 여기서 확인한다. 프란시스 포드 콧폴라의 <트윅스트>를 보았다. 이 야심적인 뱀파이어 영화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3D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명백히 이 영화는 장 엡스탱의 < 어셔가의 몰락 >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엡스탱의 포토제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 그 속에서 창조된 시간. 영화와 물리학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이미지의 부피와 표면, 길이와 지속. 그러나 콧폴라는 그렇게 멀리 가는 대신 몇몇 시퀀스에서 꿈을 바라보며 멈추었다. 스필버그의 <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을 보았다. 무언가 스필버그는 이 새로운 효과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 쥬라기 공원 >의 3D 트랜스퍼 버전을 보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3D 효과에 심취한 팀 버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흑백 3D < 프랑켄위니 >. 하지만 나는 팀 버튼이 여기서 정확하게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 리안의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았다. 아, 리안. 영리한 리안. 매번 시퀀스마다 새롭게 다시 정의되는 3D의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 그는 극장을 마치 갤러리처럼 활용하였다. 연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큐레이팅이라고 부르고 싶은 배치들. 나는 의자에 앉아있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배회를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떠도는 배에 실려 함께 부유하는 스크린의 프레임들. 리안은 거의 영화를 멈추기 직전까지 끌고 간 다음 관(람)객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재빨리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영화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수상쩍게 쳐다보고 있다. 서극의 < 용문비갑 >을 보았다.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유희들. 과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동들. 과도할 정도로 배치된 특수한 순간들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선. 비검(飛劍)의 선. 능공허보(凌空虛步)의 선. 마치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톱니바퀴들의 향연.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D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그 원래의 의도에 따라) 2D로 볼 수 있는 기회가 함께 제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D로 ‘하여튼’ 본다. 물론 그건 그 영화에 대한 전적인 내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극장에 간다. 물론이다. 거기서 무엇을 즐길 것인가. 흥미로운 것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적인 것들. 우리는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질문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투명하지 않았다. 3D 효과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영화의 이야기 진행에서 사실상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맞받아치고 싶을 것이다. 물론 미메시스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 영화에는 이상하게도 미메시스로부터 독립적인 그 무엇이 거기에 머물기 시작한다. 거기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미지들의 수수께끼. 바로크적인 재현들.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종종 재현의 디테일과 만날 때 새로운 경로들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때로 영화의 매너리즘을 재촉할 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논의를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3D 영화를 볼 때 이 효과가 영화의 일부라기보다는 이상하게 3D 라는 효과가 영화에 침입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단지 이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영화 안에 강제적으로 이 효과를 삽입하면서 벌어지는 기계적인 외설적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차례차례로 만나게 된 3D 영화들. 새로운 효과들, 기발한 상황들. 낯선 미장센. 그 안에서 물건들의 이상한 이동. 때로는 동선. 기괴한 카메라의 위치. 이 질문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D 효과는 영화에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효과는 이차원의 착시를 이용한 이제까지의 영화 문법에 대해서 외설적일 뿐만 아니라 난폭한 부름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깨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종종 장르적인 외피 때문에 3D 효과가 환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효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이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하는 외부적인 공간 감각의 재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미지가 우리들에게 감각의 방어선을 찢고 외상적 실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3D 영화를 볼 때 보는 자세를 조금만 흐트러트리면 곧장 쓰고 있는 안경과 스크린의 이미지 사이의 시차적 초점이 맞지 않아 화면이 이중으로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3D 영화를 볼 때 (감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은 꼼짝도 하면 안 된다. 고정된 시선만이 당신의 감각을 입체적인 화면 안에 집어던져 넣을 것이다. 그때 당신이 견뎌야하는 자세와 맞바꾸는 것은 < 아바타 >의 제이크 설리처럼 마음껏 화면을 뛰어다닐 수 있는 환상적인 착시의 자유가 아니라 반대로 화면 사이에서 부딪칠지도 모르는 미장센들 사이의 모서리와 추락할 지도 모르는 가장자리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시뮬레이션의 감각들이다. 점점 더 영화와 나 사이의 동일화는 단지 상상적 자아에 호소하기보다 실재적 감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다.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우리는 작품으로부터 심미적인 감흥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이 고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낙천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영화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 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내가 망연자실해진 것은 올해 여름이다. 지금 무심코 지나가고 있지만 2013년은 어떤 표지판을 갖게 될 것이다. 미학적 논쟁은 프랑스 남쪽 니스 근처의 해안가 칸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LA의 영화제작자들은 그런데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거의 눈부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3D 영화들. 무엇보다도 두 편의 영화. JJ 에이브럼스의 < 스타 트렉 다크니스 >와 길레르모 델 토로의 < 퍼시픽 림 >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그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 그저 공간의 깊이와 대상의 근접이라는 문제에 머물렀던 영화들에서 이 영화들은 쇼트의 기형화와 리듬의 왜곡이라는 새로운 영역 안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이 영화들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클리셰들이 머물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엔 < 맨 오브 스틸 >처럼 끔찍하리만큼 유치한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두 편의 실패작을 말할 차례이다. < 7광구 >와 (한국영화 사상 첫 번째 풀 3D라는) < 미스터 고 >는 영화로서 뿐만 아니라 3D 효과라는 면에서도 재난에 가깝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망설여진다. 영화와 영화의 효과. 그 둘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그들은 기술적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하이테크한 기술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효과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왜 그들은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일까. 누군가는 마케팅 전략에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지난 봄부터 바보 같은 영화들이 차례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미스터 고>는 실패할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박스오피스에 관심이 없다. 내가 말하는 실패는 그 효과가 왜 대중들의 구경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왜 그 효과들이 영화 화면의 좌표 안에서 선별된 변수들 바깥으로 빠져나와 종종 물리적이거나 단지 역학적인 기능 이외에 달리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프레임의 집합 안에 머물지 않으면 곧장 영화 자체를 부수기 시작한다. 제임스 캐머론은 < 아바타 >에서 (종종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시각적 영역을 서사의 범주 안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지닌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종종 바보 같은 영화들이 그걸 뛰어넘어서 화면 바깥 어딘가에서 어른거리고 싶어 했다. 혹은 손에 잡힐듯 한 그 무언가를 신기루처럼 허공에 멈춰 세웠다. 허공에 떠 있는 건 자막만으로 충분하다. 3D 영화들은 프레임으로부터 이미지의 일부를 바깥으로 내 보내는 대신 어디서 멈춰 세워야 할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영화에서 새로운 영토이자 구역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new Zone’이라고 다시 정의하였다. 새로운 개념의 발명. 이때 핵심은 3D 영화는 스스로에게 어떤 한계를 설정할 것인가, 라는 그 경계의 설정이 미학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악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내가 던진 돌이 거기서 멈출 것입니다, 라는 태도. 혹은 당신을 향해서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결정. 처음 3D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결국 이 테크놀로지는 스포츠 중계와 포르노로 귀결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적어도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당신은 3D 모니터가 대중화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경고가 담겨있다. 모두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 장르가 둘 다 3D 영화를 이끌지 않은 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방어선처럼 놓여 있는 둘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는 순간 대중들의 상상은 중단되고 신기루와 같은 효과를 채우는 그 기능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D 효과도 사실상 시각적 착시 효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착시를 보충하는 상상을 포기하게 되면 반대로 감각은 그것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영화에서 결국 터치(touch)라는 문제가 불려나오게 되었다. 이제 3D 영화는 바로 그 거리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다시 결정하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Etant donnes : 1. la chute d’eau, 2. le gaz d’eclairage Two Home Homes [Top: ‘Two Home Homes’ - split-level entrances, 1966; Bottom: ‘Two Home Homes’ ground-level entrances, 1966] 단지 질문만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우리들의 논의는 왠지 영화와 미술 사이의 친밀성에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이제 제법 많은 목록을 갖게 되었다. 만일 3D IMAX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토대를 무시하고 그저 순진하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스톨레이션에서 훨씬 더 창조적인 역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예. 마르셀 뒤샹이 20년 동안 남몰래 제작해 온 <주어진; 1 폭포, 2 점등된 가스등>에서 마치 핍 쇼 공간처럼 옮겨놓은 광경은 우리들에게 뚫린 구멍 너머의 (시각의) 원뿔을 제시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도 같은 자리에 불려간 관객. 문 너머의 스펙터클. 그 안에서 뒤샹은 르네상스 원근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구멍 너머에 있는 광경 안의 대상을 우리에게 던져놓은 다음 다시 한 번 시선이라는 원근법의 기하학을 미술관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때 나의 관심은 새롭게 정의 내려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개념이다. 차라리 우리는 이 작품을 3D 로 보는 편이 더 뒤샹의 시선 안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두 번째 예. 1966년 댄 그레이엄의 사진 작업 중 <미국을 위한 집; 스콜릿 레벨과 그라운드 레벨, 두 개의 집이 있는 집>을 보고 있으면 이 두 장의 사진은 (뉴저지에서 레디 메이드한 미니멀리즘의 코드를 드러내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얼핏 유사해 보이는 둘 사이에서 서로 겹쳐지지 않는 차이를 통해 단지 건축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상호간의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지표 사이의 상호작용을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두 개의 사진을 3D 화면으로 올려놓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든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예. 빌 비올라의 비디오 프로젝션은 영화를 빌려온 다음 고스란히 영화에 수 없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1996년 작품인 <교차>. (나는 의도적으로 백남준의 예를 들지 않았다) 비올라의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다른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다. 명백히 마샬 맥루한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다음 비올라는 빛과 프로젝션 사이에서 보는 자리를 다시 배치하였다. 물론 비올라는 자신의 작업이 매체에 지나치게 다가가는 것을 경계했다. 여기서 미술 비평가들이 끌어낸 개념은 외상적 숭고란 칸트적 개념이었다. 숭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미 라캉이 물 자체라고 정의 내렸던 그 경험 안으로 지각이 방문할 때 3D 스크린은 우리를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게임을 제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Bill Viola - the Crossing 너무 멀리 온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 몽녀 >를 바라볼 생각이다. 3D 효과의 가능성이라는 질문. 아직 질문이 잠재적인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었을 때 임권택 의 선택. 산업 안에서의 선택. 장르 속에서의 선택. 판스코프 촬영으로 찍은 첫 번째 입체영화 < 천하장사 임꺽정 >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 영화 사이에서 입체 기술의 효과가 보여주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혹은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임권택도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입체영화는 특수(라고 해야 장난감 안경 수준에 양쪽에 서로 다른 레드와 블루 셀룰로이드를 프레임에 붙인) 안경을 착용해야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만일 개봉당시에 보지 못했다면 관람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3D 영화에 대한 별다른 경험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3D 영화의 전문가들은 3D 효과는 기술적인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험에 대한 데이터의 문제라고 조언한다. 아마도 임권택이 <몽녀>를 만들었을 때 장석준 의 조언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석준은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이미지의 입체라는 효과에 대해서 무슨 조언을 했을까. 내 질문은 단순하다. 그 말에 따라 임권택이 가정한 효과의 연출이라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 가짜 박인호 인숙 (이하의 글은 스포일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금 리뷰를 쓰는 것이 아니다) < 몽녀 >는 광고 문구에서 자기 장르를 ‘推理 怪奇 映畵’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다소 장황한 줄거리. 자수성가한 재계의 거물 정 사장은 카바레 라스베가스의 사장이자 밀파간첩인 리나에게 가짜 유언을 녹음하도록 협박을 당한 후 살해당한다. 목소리만 남은 아버지. 그런데 그 목소리에 담긴 가짜 증언.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장례식 날 정 사장이 평소에 아끼던 박민호가 일본에서 급히 귀국하지만 중간에 속임수에 빠져 호텔로 유인당한 후 가짜 박민호에게 역시 살해당한다. 가짜 상속자. 결혼을 위임받은 가짜 사위. 하지만 이 두 개의 씬은 연달아 붙어있고, 어떤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본 다음 가장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말고 정 사장은 더 이상 영화에 어떤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 영화가 추리일 뿐만 아니라 괴기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아버지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름으로서도(name-of-the father) 사라졌을 때 유령의 존재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몽녀>는 <햄릿>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을 때 억압은 어디서 귀환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유령은 어디서 출현해야 하는 것일까. 실망스럽겠지만 이 영화는 초자연적 현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때 3D(와 입체음향) 효과는 어디에 개입할 수 있을까. 그 효과들은 영화 안에서 어떻게 시청각적 기호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임권택 과 장석준 은 귀신을 버린 대신 무엇을 얻은 것일까, 혹은 얻으려는 것일까. 악당들의 목표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는 정 사장의 금괴. 가짜 박민호는 장례식에 참석한 후 가짜 유언에 따라 사업을 물려받고 정 사장의 딸 인숙과 결혼을 준비한다. 가짜 박민호는 인숙의 호의를 사면서 집에 입주하마자마 한편으로 매일 밤 (정 사장이) 금괴를 숨겨놓은 지하실을 뒤진다. 아, 지하실. 언제나 지하실. < 사이코 > 이후에 언제나 비밀은 그곳에 있다.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경계선으로서의 계단. 이때 이 거대한 저택에서 지하실은 이상하게도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장소처럼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차 있고 종종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 상황은 장르적인 약속이다. 박찬욱의 < 스토커 >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넓은 일층. 그 자체로 완전하리만큼 충족된 장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나치게 좁고 작은 인디아 스토커의 방에 도착한다. 상자들로 가득 찬 그녀만의 세계. 그리고 마치 다른 집에 온 것만 같은 온통 먼지에 가득 찬 채 전깃불도 제한적으로 들어오는 이상한 지하실. 영화에서 지하실이라는 공간의 역사. 가짜 박민호는 지하실에 금괴를 숨겨놓았다고 확신하고 매일 밤 지하실로 내려간다. 물론 우리도 같이 내려가야 한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현재의 (탈색현상으로 이미지의 정보 손실이 크고, 사운드 코팅이 벗겨져 심지어 대사조차 불분명하며, 일부 쇼트가 사라졌고, 권수가 뒤바뀐) 프린트 판본으로는 지하실의 미장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가짜 박민호가 마주치는 장르의 두 가지 컨벤션은 말해야겠다. 하나는 고양이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저택의 식모이다. 아마도 도둑고양이. 인숙은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 집 주인이 기르지 않는 동물을 누가 그 저택에서 기를 수 있을까. 마치 금괴를 지키기 위해 지하실에 머무는 듯한 고양이. 거의 말이 없는 여주댁. 그녀는 밤늦은 시간 불도 켜지지 않는 지하실에 왜 내려온 것일까. 가짜 박민호는 이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야만 했다. 지금 이 게임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가짜 박민호와 리나가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금괴라는 유혹에 이끌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이상한 집에 끌려 들어온 것이다. 잉여지식으로서의 지하실. 그때 우리는 원근법을 잃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원근법. 새롭게 세워져야 할 타블로. 임권택 (과 장석준 )이 3D 효과를 전시하기 위해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하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때 임권택(과 장석준)은 지하실 세트를 설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지하실이 과도하리만큼 직선으로 이어진 수직선의 공간이며 이 선을 따라 카메라는 트랙 위에 올려져서 안정적으로 후진하거나 전진한다. 이동이라는 깊이. 인물은 그 선을 따라 동선을 연결하고, 카메라의 렌즈는 인물과 소실점 사이에서 이동할 것이다. 이 직선을 따라서 여러 개의 방이 양쪽 좌우로 늘어서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지하실은 불가능하다. 이때 이 설계가 소실점을 가정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점과 선으로 이어진 공간. 이 공간을 찢고 등장하는 고양이의 무규칙한 동선과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이 놓인 문이 몇 개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여주댁의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의 출몰. 누가 누구를 홀리는 중일까. 임권택의 쇼트는 여기서 이상하리만큼 길어지고 있다. 아니, 감각적으로 늘어지고 있다. 나는 이 늘어짐, 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카메라의 이동이 요청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늘어지고 있는 중이다. \ 성우와 인숙 물론 이야기가 계속 지하실에서 진행될 수는 없다. 가짜 박민호가 지하실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밤사이에 잠깐 뿐이다. 인숙은 자꾸만 지하실로 내려가는 가짜 박민호을 의심한다. 물론 이 의심의 외설적 판본은 명백하다. 왜 당신은 이렇게 예쁜 나를 내버려두고 밤마다 지하실에 내려가는 것인가요? < 몽녀 >에서 임무와 욕망 사이의 교차는 이상하게 서로 뒤엉키고 있다. 가짜 박민호는 리나가 인숙을 없애버리자고 제안할 때 망설이면서 두 번이나 전혀 예상치 않은 답변을 한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불쌍하더군, 그 애만은...” 임권택 은 이 감정을 더 발전시키지 않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인숙은 처음부터 가짜 박민호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으며, 계속 의심하고, 그런 다음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의 비서였던 성우의 품에 안기면서 “무서워요, 절 좀 지켜주세요, 그 사람을 집안에 끌어들인 것도 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서였어요. 성우씨”라고 간절하게 고백한다. 이때 이상할 정도로 3D 효과는 완전히 작동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임권택(과 장석준 )은 3D 효과가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금도 3D 영화들의 고민이다. 이야기의 진행 때문에 할 수 없이 3D 효과를 멈춰야하는 순간과 마주칠 때 3D 영화들은 단지 이미지뿐만 아니라 리듬 자체의 변주를 경험하게 된다. 베르너 헤어조크와 빔 벤더스는 소재의 힘을 빌려 이 순간을 피하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를 불균형하게 만들었다. < 위대한 갯츠비 >는 그런 의미에서 거의 효과의 재난에 가깝다. < 몽녀 >가 기괴해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이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법칙들의 적용. 한쪽이 기울기 시작한 진행. 균형을 잃을 때 보게 되뇩오鵑贊?위치의 시선. 낯선 반응. 영화는 환상에 이끌리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정신을 잃는다. 그 다음의 진행. 인숙이 의심을 품자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서 한편으로 정신병을 유발하는 약을 먹여 최면 상태에 빠져서 금괴를 숨겨놓은 곳을 자백하도록 유도한다. 그때 리나는 정 사장의 목소리를 가짜랜옇링榕底?인숙에게 전화한다. 전화로 정 사장은 인숙에게 “나다, 아버지야, 애비 소릴 몰라, 감춰둔 금괴 말이다, 나쁜 놈들이 그걸 노리구 있어, 그걸 빼앗기면 안 된다, 아무래도 그 장소는 마음에 걸리거든, 장소를 옮겨서 다른 곳에 숨겨두라구, 알았지” 라고 말한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뒤집힌 햄릿의 버전. 죽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인숙에게 말해준다. 나쁜 놈들이 금괴를 노리고 있으며, 그들이 네 곁에 있다는 사실.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상 아버지의 진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인숙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인숙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경유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더 나아가 목표마저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죽음에 머물지 않고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딸이 염려되어서 돌아온 아버지. 그때 음모를 진행하던 리나는 이상한 대사를 한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이 없었다면 이런 약을 만들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나는 거기서 멈춰 섰다. 물론 나도 안다. 이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진지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인숙에게 사용된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다. 프로이드는 장 마르탱 샤르코의 최면술에서 영감을 받긴 했지만 곧 버리고 자유연상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가짜 박민호는 이때 인숙에게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정 사장이 살아생전 아끼던 꽃병이 놓인 책상 다리를 미리 자른 다음 인숙이 지나가자마자 쓰러져 깨지게 만들고 인삼차를 타려는 그녀보다 앞서 부엌에 들어가서 설탕과 소금을 바꿔친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는 인삼차에 소금을 탄 다음 자기의 실수를 발견하자 흐느끼면서 “이러다 미친 여자가 되고 말 거예요, 광인이 돼버릴 거란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마치 리나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인숙은 자신의 증세를 스스로 진단을 내린 다음 그 증세 안으로 자기를 밀어 넣기 시작한다. 텔레파시와도 같은 조응. 여기서 이상하게도 나는 임권택 이 영화에서 3D 효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건 단지 눈속임이 아니다. 이미지의 새로운 유형.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임권택은 그걸 영화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미지의 알리바이. 하지만 임권택은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입체영화, 혹은 3D 영화를 찍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갈 수 없다. \ 만일 < 몽녀 >가 복원된다면 나는 오로지 그 다음 장면, 그러니까 인숙이 대낮에 마치 홀린 듯이 길거리로 나간 다음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걸어가는 시퀀스 때문에 (불편한 입체 안경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으로 찍혔다. 한산한 초여름의 서울 시내. 넋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인숙. 초점 없는 산책. 육교 위를 수평으로 걸어갈 때 다소 기울어진 수직으로 보이는 차선. 수평의 동선과 수직의 운동. 인숙이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에서 다가와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동선들. 서로 다른 속도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할 때 만들어지는 화음. 그녀가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뒤쫓아 오던 리나가 그녀 곁에 차를 대고 “아니, 인숙씨 아니세요, 타세요,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셔다 드릴께요” 라고 호의를 베푼다. 서울 외곽으로 이어지는 풍경들. 1968년 서울의 3D 풍경. 리나는 인숙에게 친절한 척 가장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신경쇠약이라고 들었는데 하루 속히 고쳐야죠, 잘못하면 정신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무서운 병이죠” 인숙은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고치지 않겠어요. 고칠 수가 없어요” 리나는 인숙을 끌고 부평 기찻길까지 데려간 다음 인숙에게 말한다. “기적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충동을 느끼곤 하죠. 가령 기차를 향해 뛰어들고 싶다든가” 그러자 인숙이 터널을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그렇군요,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함께 기찻길을 따라서 걸어가던 리니는 갑자기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기차에 인숙을 밀어 넣는다. 인숙의 죽음. 이때 인숙은 두 번 몽녀가 된다. 한번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유령에 시달리면서 빠져들 때이고 (꿈꾸는 여자), 두 번째는 그녀 자신이 죽은 다음 가짜 박민호 앞에 잠옷을 입고 나타날 때이다. (꿈으로서의 여자) 인숙이 죽은 다음 유령이 되어 다시 찾아올 때 그녀를 보는 것은 그녀를 살해한 리나가 아니라 그녀를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설득하던 가짜 박민호이다. 심지어 고양이가 달려들 때 가짜 박민호는 해골을 본다. 만일 < 몽녀 >에서 의학적으로 정신이상에 빠진 인물이 있다면 그건 가짜 박민호이다. 이 이상한 증후의 인과관계. 물론 죽은 (흉내를 내고 있는) 인숙은 리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리나 송, 내 목을, 내 목을, 리나 송, 내 목을”이라고 반복해서 읊조린다. 두려움에 질린 리나는 가짜 박민호에게 말한다. “우린 신경쇠약에 걸렸나 봐” 리나는 인숙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증세가 자신들을 덮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자 가짜 박민호는 이상하게 대답한다. “일 년 육 개월의 남반부 생활이 그렇게 만든 거야” 가짜 박민호는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재빨리 인정한 다음 그 원인을 남반부 생활에 돌린다. 나는 약간 웃음을 참아가며 이 대사를 따져들고 싶다. 그들의 신경쇠약은 자신들이 살해한 정 사장이나 혹은 그의 딸 인숙때문이 아니다. 또는 제한된 일정 안에 찾아서 북에서 온 공작원에게 넘겨야 했던 금괴 때문이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그들의 임무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숨겨야하는 긴장에서 온 것도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까지 그들의 정체를 간첩과 연결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대공수사본부의 감시와 평행 편집될 뿐이다) 그들은 북한에서는 (적어도 신경질환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들을 억압하는 건 ‘남반부의 생활’이다. 휴전선 이남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들 신경증 환자이다. 그러므로 환자들의 일상 안에서 사는 건 가짜 박민호와 리나에게는 그들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을 마주하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삶이다. 아, 가련한 남반부의 삶이여. 물론 그 다음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다. 리나를 인숙의 유령으로 착각한 가짜 박민호는 그녀를 살해한 다음 혼자 빠져나와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접선한다. 하지만 이미 대공수사본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고 가짜 박민호는 급히 차를 몰고 달아나다 그만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다. 간단한 에필로그. 인숙과 성우는 정보계장을 만난다. 두 사람에게 정보계장이 그들의 공고를 치하하자 성우는 “모든 것이 인숙씨의 기지로 성공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정보계장은 인숙에게 “아닌 게 아니라 어제 밤 유령노릇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인숙은 “반납하겠어요, 이십세기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보계장에게 청첩장을 주고 함께 떠난다. 끝. 임권택 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교훈? 물론 임권택이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 대해 적대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 증언 >에서는 한강 철교 폭파를 일본 스텝진의 도움으로 미니어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특수촬영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 춘향뎐 >과 < 취화선 >에서 사용된 CG 효과. 끝내 미루기는 했지만 101번째 영화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디지털로 촬영했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까다로운 문제이다. 새로운 기술들은 가까스로 만들어진 미학적 규칙 안에서 어떤 훼손들 사이의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종종 진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로 미학적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임권택은 여기서 3D 효과라는 것이 영화 안의 형식적 용법들을 거의 중단시킬 뿐만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이 효과의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나는 현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 몽녀 >를 보고 있으면 어떤 순간에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 앞에서 연출의 방법이 평면화되거나 때로 제한적으로 멈추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지나치게 테크놀로지가 압도하게 될 때 이상하게도 이미지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나는 이미 장 엡스탱의 포토제니를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영혼을 거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이미지라는 반대 방향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때 이미지는 테크놀로지로 영혼을 물화시키고 더 나아가 종종 우스꽝스러운 형식의 기형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감각 전체가 마비되기 시작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임권택은 거기서 잠재적인 가능성 대신 위기를 본 것 같다. 혹은 무언가를 판단하기에 1968년은 너무 이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몽녀>는 자문자답하고 있다.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진화는 무엇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가. 임권택의 대답. (어떤 영화적) 효과가 멈추었을 때 (이미지의 어떤) 효과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영화를 기능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영화는 이미지의 도구가 된다. 그때 영화의 윤곽이 부서질 지 새로운 구성이 시작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새로운 문턱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절망적으로 부서져버렸다.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영화에서 3D 효과에 대한 질문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의심한다. 과도할 정도로 많은 질문들이 3D 효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던져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3D 효과가 무엇을 하는 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몽녀>는 거기서 멈추었다. 좀 더 공평하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몽녀>에서 더 나아간 것은 촬영감독이었던 장석준 이 직접 연출하고 김상희 가 촬영한 < 지지하루의 태양 >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몽녀>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다시 3D 영화가 진행 중인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마도 알폰소 쿠아론의 < 그래비티 > 이후의 3D 영화들은 이제까지의 많은 논의들에 대해서 다시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게다가 <아바타 2>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진행중인 질문을 그냥 여기서 잠시 멈춘 다음 그대로 남겨 놓을 것이다. 그 대신 예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다. 고다르가 첫 번째 3D 영화 <아듀, 언어에게 작별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보지 못한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예고편 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계속) 1968년 85분 컬러 3D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제일영화사 각본 신봉승 촬영 장석준 , 유영길 조명 김진도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 사운드(입체 특수음향) 이재웅 남정임 인숙 박노식 (가짜)박민호 김지미 리나 이순재 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