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연인
- 감독
- 조문진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박근형, 이재룡, 박정수, 김혜선, 정선우, 박일, 김형자, 김상익, 박소연, 국정환, 박용팔, 정용국, 오희찬, 이석구, 안진수, 맹찬재, 박예숙, 길경석, 황진영, 구본민, 김은정, 김미정, 박은정, 계미경, 김미야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드는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운동을 동결하는 프리즈 프레임처럼 무리 없이 흘러가던 기존의 판단과 감정을 괄호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섣불리 의미화 하지 않게 하는 정초(定礎)의 얼굴들. 특히 엔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넘어 스크린 바깥으로 급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얼굴들 말이다. 인상 깊었던 한국영화의 그러한 순간들을 거칠게 꼽아보자면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 길소뜸 >(임권택, 1986), < 시 >,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얼굴-물음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 메타 영화인 <반도의 봄>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춘향전> 제작기와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화한다. 이 영화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세한 조선 영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성장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총독부의 국책회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영화는 여러 어려움과 오해에도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고 애정을 확인한 두 영화인 남녀가 선진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쇼트로 행복한 연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동료 영화인들의 어두운 얼굴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기차의 선로를 따라 뻗어 나갈 수 없음을, ‘발전’은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실제로는 진퇴양난에 몰려있음을 드러내는 당혹감, 즉 픽션과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시간성을 묻는 얼굴들이다. <길소뜸>은 1980년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국가적 미디어 이벤트였던 ‘이산가족찾기’가 가진 이면을 보여준다. 화영(김지미)은 한국전쟁 중 잃어버린 아들과 연인을 극적으로 찾게 되고, DNA 검사로 그가 아들임을 확인받는다. 그러나 화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 부부를 끝내 뿌리치고 부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운전해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검사를 진행한 의사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의사가 ‘과학’의 이름으로 민족과 가족의 가치를 설교하는 가운데 화영은 되돌아가려는 듯 차를 멈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살짝 눈시울이 불거진 얼굴은 ‘본능적 모성’이 그녀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영은 단호하게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국가와 대중이 기대하는 얼굴을 부인하며, 부인을 재확인한다. 화영은 그로써 대중매체와 과학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뿐 아니라, 여성 스타를 거대서사의 반응(reaction) 스크린으로 만드는 얼굴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된 평화로운 논밭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박두만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즉 직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밝혔듯이 박두만의 얼굴-물음 쇼트는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호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박두만의 표정은 아련하게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일까? 박두만은 그 시절을 ‘실수가 좀 있었지만 열심히 산 시절’로 추억할 수 있다. 여기서 범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질문받아야 하는 대상은 박두만을 비롯한 경찰 공권력 그 자체이다. 서태윤(김상경)도 처음에는 인권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도입하려 하지만 결국 대책 없고 폭력적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의 방식에 물든다. 박두만은 질문하는 얼굴인 동시에 질문 받아야 하는 얼굴이다. <시>의 얼굴-물음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정초의 얼굴에 가장 가깝다. 최종적으로 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타자의 얼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희생하는 급진적 선택을 한다. 양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겨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고 있다. 60대의 미자는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꽃과 시에 진심인 미자는 어느 날 한 자신의 손자가 집단강간 가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패닝한다. 강가 모래밭에서 놀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다 물에 떠내려 온 희진(한수영)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뒤집어져 있고 우리는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소녀의 시체가 서로 가까워지며 소녀의 뒤통수가 화면 안에 가득 찰 즈음 ‘시’라는 제목이 화면의 왼쪽에 떠오른다. 집단강간 피해 후 자살을 한 소녀는 ‘시’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 시와 영화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무얼까?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언어를 상실해 가는 미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죽음, 영화의 죽음 또한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시대에 말이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연대를 말한다. 영화에서 ‘봄’은 시/영화 쓰기의 핵심적 실천으로 언급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시적/영화적 봄은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사과를 두고 말한 것처럼, 존재(방식)에 관심을 두고 돌보며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봄이다. 현상학적인 봄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나의 봄은 언제나 당신의 봄과 얽혀 있다), 관습적인 사용방식, 즉 도구화에 질문하면서 존재의 다양한 역량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듯 현상학적 봄도 쉽지 않다. 미자는 꽃을 비롯해 보기에 예쁜 것을 좋아한다.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에 하늘하늘한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늘 웃고 다니는 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곱고 예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자 역시 자신을 곱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 늘 “저 멋쟁이에요?” “나 예쁘다고 생각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 없이 화제를 돌리기거나 자기 기준에 맞춰 에둘러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첫인상을 거리낌 없이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손자 종욱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희진을 불쌍해 하지만 자기 아들들을 위해선 그녀의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고, 희진 엄마를 쉽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며, 심지어는 미자에게 “같은 여자”, “혼자 손자를 돌보는 불쌍한 할머니”로서 희진 엄마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한다. 공적 책임이 있는 기자와 교감조차 희진을 진정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익에 따라 이용한다. 간병을 받는 김노인 역시 미자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풀 성적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고 피해자나 약자 역시 도구적 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희진 엄마는 결국 돈을 받고 합의를 해주기로 하고 미자 역시 김노인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자는 희진의 죽음과 울부짖는 희진 엄마를 가십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전한다. 미자가 다니는 병원 로비에선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가 고통스럽게 인터뷰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자는 정말로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미자의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다. 미자는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억으로서 서너 살 즈음 아픈 엄마 대신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돌보며 예쁜 옷을 입혀주고 애정을 담아 돌봐줬던 순간을 기억한다. 언니의 ‘예뻐해 줌’은 존재의 첫 각인으로 남는다. 언니의 사랑은 그녀가 존재함을 감각하게 한 원초적 기억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아픈 엄마’처럼 고통과 함께 한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고, 더 이상 손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관습적인 관계와 이해를 벗어던진다. 미자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으로 실천을 시작한다. 미자의 추도식에서 액자에 담긴 희진의 사진을 훔쳐오고, 그 액자를 손자가 보도록 식탁에 놓는다. 하지만 손자는 그 얼굴을 외면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미자는 다른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요구하기 위해 희진 엄마를 찾는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진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미자는 곧 자신의 목적을 잃고 따뜻한 햇살, 살랑대는 바람, 초록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에 마음을 뺏긴다. 희진 엄마를 마주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읊는다. 미자는 뒤늦게 그가 희진 엄마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다.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선 어쩌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봐야할지 모른다. 미자는 이후 자기에 대한 몰입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질문하고 비우는 것으로 간다. 희진이 자살했던 다리를 찾아갔을 때 더 이상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던 아름다운 글귀들을 적지 못하고 비운 채로 남아있던 시상 노트는 미자의 얼굴이 된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의 얼굴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때야 원초적인 존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미자는 희진의 존재를 삭제하지 않기 위해 홀로 손자를 경찰에게 신고해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를 쓴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미자의 시는 김용탁 시인이 읽으려고 하는 제스처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그리고 아마도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미자의 보이스오버로 시가 낭독되는 가운데 화면은 미자가 살았던 집, 미자의 집에 온 딸, 아파트 앞의 평상과 커다란 나무, 자주 이용하던 버스와 정류장을 따라간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볼 수 없는 부위는 얼굴이다. 눈이 포함된 얼굴은 다른 신체 부위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얼굴은 비움이자 물음이 된다. 이 장면은 미자가 보아 온 삶의 흔적을 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미지의 흐름 자체가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고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와 희진이 함께 쓴 시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를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읽게 하고 그 둘의 시점으로 보는 삶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의 중반부터는 희진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을 장면들이 주관적 시점으로 이어진다. 학교 운동장, 수업하는 교실, 희진의 집과 반가워하는 강아지, 버스와 경주하는 희진의 남동생, 그리고 희진의 친구들. 마침내 다리 위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는 드디어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질문한다. 당신은 희진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다시 카메라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손>은 유현목 이 1967년에 만들었던 50초 분량의 단편영화이다. 이 작품은 프린트의 소재가 불분명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이 2016년 5월 20일에 < 오발탄 >의 복원판과 함께 일반에 공개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은 프린트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분류가 유효하려면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손>이 실험영화의 정전들로 분류되는 1960년대의 영화들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면 그런 수고를 거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작품을 보면 50초라는 짧은 길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의 실험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손>이 실험영화라면 어떤 개념적 정의에 따라 실험영화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손>의 타이틀 이미지 필자는 <손>과 유현목이 주도하여 1964년 1월 18일에 설립했던 전위적 단편영화 제작 동인인 “시네포엠”(시네포엠은 미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단체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 단체로서의 시네포엠인 경우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고, 개념인 경우에는 별도의 표기를 달지 않도록 한다)에 관하여 두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첫 번째는 오큘로 온라인에 실었던 「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이고 두 번째는 『영화연구』 71호에 실었던 「이색적인 문화영화: 유현목과 시네포엠(1964-66)의 실험영화 개념에 관한 제안」이다. 첫 번째 글은 <손>과 관련된 공식 기록으로 신문기사에 실렸던 사실들과 당대의 정황 등을 고려하여 <손>이 몬트리올국제박람회를 준비했던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두 번째 글은 시네포엠이 지향했다고 하는 전위적 단편영화를 개념어보다는 지시어로 이해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들을 지칭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 개념이 이색적인 문화영화에 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손>에 관한 사실들은 첫 번째 글에서 정리해두었으므로 먼저 참고하기를 바란다). 두 글을 작성하면서 주로 검토해보았던 것은 유현목이 “시네포엠”을 결성하고 전위적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던 동기가 외부의 영향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현목은 <오발탄>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1963년 10월 26일에 출국하여 12월 11일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8일에 “시네포엠”을 출범시켰기 때문에, 유현목이 40일이 넘는 방미 일정을 통해 실험영화를 접했고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도 첫 번째 글에서는 유현목의 방미와 “시네포엠”의 설립이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방미 일정, “시네포엠”이 설립 후 열었던 두 번의 상영회에 포함되었던 영화들,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을 일일이 따져보면 유현목이 당대의 북미 실험영화를 방미 기간에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현목은 1963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제 방문기에 해당하는 기사를 기고하는데, 이 기사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실험영화를 상영한다고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실험영화로 분류하고 있는 작품들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현목은 실험영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선을 국내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의 단서가 떠오르는데 시극동인회가 그것이다. 시극동인회는 1963년 6월 29일에 시, 연극, 영화, 무용, 미술 등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1963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시극동인회의 발족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시극의 연구 창작의 발표 활동을 목적으로 한 시극동인회가 발족을 보았다. 시극의 이론, 창작, 연출, 연기, 미술, 조명, 음악 등을 연구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동인들의 모임인 동회에서는 월 1회의 정기연구 및 합평회, 연 2회의 시극에 관한 일반 공개강좌, 시극 무대공연, 동인지 시극 발간, 월 1회 이상의 방송을 통한 시극 발표 등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회에서는 제1회 8월 정기 연구 및 합평회를 24일(토) 하오 5시부터 중앙공보관에서 여는데 이인석(현대예술과 시극)의 발표와 장호 작 「열쇠장수」에 대한 합평이 진행된다. 시극동인회의 역원과 회원은 다음과 같다. 대표 간사 박용구, 창작 간사 장호, 사무 간사 최재복, 연출 간사 김정옥, 기획 간사 고원, 연기 간사 최명수, 회원 이인석, 김원태, 이흥우, 김요섭, 오학영, 박정온, 최일수(이하 생략). 이 기사를 “시네포엠”의 발족을 알리는 1964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위적인 단편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시네포엠」 동인회가 새로 발족. 지난 주말(18일) 하오 중앙공보관에서 발기총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이 전위적 모임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유현목 감독을 비롯하여 수년 전부터 「시네포엠」의 주동성을 강조해온 최일수, 배석인, 김인걸 씨가 주동이 되어 발기한 것이다. 영화예술뿐만 아니라 자매예술의 각 분야에서 골고루 회원을 포섭할 예정인 이들 「시네포엠」 동인회는 연 일편이상의 작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연구발표회, 합평회 및 기관지발행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먼 꿈은 해외의 전위적인 영화작가들과의 교류와 국제영화제의 출품 등으로 무척 화려하다. 외국의 전위영화 동인들이 불과 사(四), 오(五) 명씩 모여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데 비하면 이들의 발족은 좀 모순되는 곳도 있으나 그들의 이 활동에 일단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발기총회에서 선정된 임원과 회원은 아래와 같다. 대표 간사 유현목, 총무 간사 김인휴, 기획 간사 최일수, 제작 간사 이형표, 해외 간사 정일몽, 창작위원 황운헌, 연출위원 배석인, 연기위원 김석강, 기술위원 박익순, 미술위원 박영일, 음악위원 정윤주, 무용위원 임성남, 회원(18일 현재) 장호 노만 황운헌 최일수(이하 생략). 두 단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일종의 종합예술을 지향하고 있고 활동의 목표와 세부 내용이 거의 같다. 또한 조직의 구성이 유사하며 회원의 이름이 일부 중복된다. 일부 자료에는 시극동인회 회원에 유현목 이름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유현목은 시극동인회의 발족 이후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단체의 성격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회원들 개개인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데,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이 두 단체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은 장호와 유현목이고, 단체의 활동 목표와 미학을 정의해서 일종의 쌍둥이와 같은 관계로 만들었던 인물은 비평가 최일수이다. 최일수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해서 주로 민족문학론과 관련한 글들을 썼다. 예외적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하는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다루었던 핵심 문제가 시극과 시네포엠이다. 시네포엠에 관해서는 한 편의 글을 펴냈다. 『자유문학』 1961년 9월 호에 실었던 「종합적 이메지의 예술-시네포엠에 대하여」이 그것이다(1982년에 출간된 최일수의 평론집 『현실의 문학』에는 이 글이 「시네포엠과 종합적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최일수는 “시가 핵심이 된 종합적 이미지가 스크린에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시네포엠이라 하고 그것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는 시극이라 한다”고 정의했다. 그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데 바탕이 되는 상황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시는 추상적인 소리에서 구상적인 이미지로 이행해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시가 스크린이나 무대로 진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 현대 사회는 개별 예술 장르들을 단독으로 두지 않고 하나의 종합을 이루도록 추동하며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3) 성격이나 형식이 전혀 다른 예술들의 종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현대시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만이 “근원적인 창조의 계기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연극이나 영화는 모든 예술을 종합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 지니는 근원적 창조의 계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실패했다. (5) 시가 “스크린에 진출한 것”은 영화가 결여하고 있는 진정한 종합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 비추어 보면 최일수가 내리는 시네포엠의 정의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되므로 시를 통해서 개별 예술 장르들을 종합해내는 영화라고 풀어서 쓸 수 있다. 영화 대신에 무대라는 말을 쓰면 시극의 정의가 된다. 정의에 따르면 위에서 인용한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는 단체의 목적, 조직 구성 등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를 어떻게 실현 가능한 방법론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최일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이 제시한 시네포엠의 정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장르인 시네포엠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시네포엠을 “1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의 시인을 비롯한 미술가, 음악가, 영화인들이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하나로써 시도된 전연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 장르가 “현대시의 변천과 더불어 하나의 뚜렷한 양식을 갖춘 예술”로 세계화되었다고 파악했고 장 콕토, 만 레이, 폴 엘뤼아르, 기타가와 후유이코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꼽았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들의 시네포엠이 영화-시라는 단어 자체에만 치우쳐서 “영화적 수법의 시”라든가 “시적인 수법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시적인 영화라고 호칭하며 그 정의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시네포엠이 시적 형식 혹은 영화적 형식의 차용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가 주는 영상의 표출이 시각적인 상상(원문에는 이메지네이슈운)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이 곧 종합적인 광장인 스크린에 진출됨으로써 시네포엠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어가 주는 인상을 영화로 시각화하면 그것이 시네포엠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최일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적 수법의 시, 시적인 수법의 영화, 시적인 영화 각각을 예로 들어 시네포엠과 다름을 보였다. 우선 영화적 수법의 시의 예로 장 콕토의 1920년 시집 『시 Poesie』에 실린 「첫 눈물 Premières Larmes」을 들었다. 최일수는 이 작품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마치 눈앞에 그리듯이 언어화했다는 의미에서 시각적인 영상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시네포엠으로 이끌어가는 계기는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각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일 뿐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시적인 수법의 예로는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의 1925년 작품 『길 위의 아름다운 결혼식 Les Belles Noces dans la Rue』을 들었다. 이 작품의 장르는 직역하면 벽장 시나리오가 되는 Closet Screenplay에 속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레제시나리오(レ―ゼシナリオ)가 사용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질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거나 혹은 소수의 그룹 앞에서 낭독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지칭한다. 최일수는 봉장의 작품이 시적 수법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적 수법의 시와 시적인 수법의 영화 각각은 시와 시나리오일 뿐이지 영화화를 전제로 하는 시네포엠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적인 영화의 예로는 오슨 웰즈의 <오델로>(1952), 잭 카디프의 <아들과 연인>(1960),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1959) 중에서 특정 장면을 뽑아 이 장면들이 “영화 이상의 그 무슨 심오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해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 영화들에서 특정 장면들을 시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시네포엠은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존재해야 하며 시적인 장면들의 연쇄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교가 시네포엠이 영화시로 번역되었을 때 올 수 있는 개념적 혼란을 다루기 위해서, 시네포엠은 시나 시적 언어로 작성된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며 또한 특정 장면이 시적 인상을 준다고 해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논거를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최일수의 목적은 자신이 정의 내리는 시네포엠이 고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비교 자체가 잘 못 되었다. 비교를 하려면 제르맹 뒬락, 만 레이, 한스 리히터, 장 콕토 등의 영화 작품들을 예로 들었어야 했다. 이 작가들이 1960년대 전까지 영화와 시에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의 오류는 최일수가 시네포엠을 정의할 때 이에 상응하는 해외 작품들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식민지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번역된 초현실주의 문헌들이나 김기림의 시론과 관련된 글들만을 참조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최일수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해외의 시네포엠이 아니라, 국내에서 시네포엠이 이해되었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당대의 문헌들에 대한 추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네포엠”의 설립과 시네포엠의 정의가 1960년대 당시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라 식민지기 이후 국내에서 축적된 특정한 맥락에 따른 것임은 분명해진다. “시네포엠”의 설립은 당대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독립적인 영화작가들의 조합과 같은 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동인지 중심의 활동이 문학, 연극, 영화 등에서 소환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시극동인회와 “시네포엠”에서 1920년대의 극복은 연극과 영화를 시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로 정의하여 이종 예술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단체를 대표하는 장호와 유현목이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김기림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과제는 김기림의 비판적 극복이라고 함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일수가 시도했던 비교에서 생각해보면, 김기림은 시와 영화를 기법의 측면에서만 접근했을 뿐 서로 다른 예술 장르로 남겨두었다면 자신들은 시를 통해 모든 예술을 종합하는 연극과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네포엠은 시가 중심이 되어 영화를 진정한 종합예술로 승격시키는 영화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이 시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종합예술은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각각 독자적이면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서 이 두 요건이 충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손>은 짧은 내레이션과 함께 이미지가 전개되는데, 내레이션은 “There were hands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로 시작한다. 이 문구가 나올 때의 이미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There were 부분에 나오는 이미지 hands in the beginning에 나오는 이미지 of the world에 나오는 이미지 아기, 원숭이, 어린이의 손이 순차적으로 나오면서 해당 내레이션이 전개되는데, 작품의 나머지에서도 내레이션의 특정 단어들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나온다.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든 간에 시네포엠의 첫 번째 조건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의 시각화는 충족한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결합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요소를 굳이 찾아보면, 내레이션의 낭독이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의 낭독처럼 들린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손>의 내레이션은 최일수가 썼는데, 여기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최일수의 시극 이론을 생각해보면 최일수가 일종의 산문시로 내레이션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서 <손>은 시, 이미지, 낭독을 결합해서 독립적인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에서 시네포엠의 두 번째 요건이 불충분했던 것이 50초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화려한 인적 구성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비해 “시네포엠”의 구심력이 약해진 시점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시네포엠”의 첫 번째 작품인 <선>을 볼 수 있어야 종합예술로의 영화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프린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시극동인회의 작품들은 기록이 보다 상세히 남아 있으므로, 종합예술의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추후에 설명하고자 한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때 실험영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의미한다. 한때 유행했던 다원예술이나 최근에 등장한 융복합 예술이라는 말과 개념적으로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최일수가 시극과 시네포엠의 정의를 종합예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T.S. 엘리엇이나 장 콕토의 극복을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하필 왜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근거나 맥락 없이 예나 지금이나 예술 장르 간의 종합이라는 아이디어가 때때로 유행을 타는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현목은 1970년에 변인식 , 하길종 등과 함께 전위적 영화운동을 벌이기 위해 소형영화동호회를 결성하는데, 이 시기에 언급했던 작품들이 동시대의 미국 독립영화 작품들이다. 유현목이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실험영화들을 일부 접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시네포엠에 준하는 개념은 아예 사라지고 취미로서의 영화 혹은 아마추어의 영화가 전면에 나타났다. “시네포엠”에서는 미학적 개념이 중요했다면, 소형영화동호회에서는 8mm와 16mm 포맷을 이용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더 중요해졌다. 전위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시네포엠”에서나 소형영화동호회에서나 마찬가지만, 둘 사이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하기는 힘들다. “시네포엠”이 1920년대의 자장에 속해있다면, 소형영화동호회는 동시대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의 공백이 너무나도 크며,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의 흔적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 실험영화를 말 할 때, “시네포엠”을 최초의 위치에 올릴 수 있겠지만 어떤 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이고 갑작스런 전환들의 공백 사이를 최대한 메꾸어 보려는 노력이 한국에서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전위와 실험이 어떻게 자리바꿈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 이 글은 현재 작성 중인 논문의 일부를 추려서 실은 것으로, 시극동인회나 김기림에 대해 빠진 설명들을 포함하여 추후에 논문으로 낼 예정이다. 영화-시에 관한 전반적인 정리는 Fil Ieropoulos가 쓴 < Film Poetry: A Historical Analysis >에 잘 되어 있고, 참고문헌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최일수가 일본을 통해 수입되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제시나리오나 이론들은 Christophe Wall-Romana가 쓴 Cinepoetry: Imaginary Cinemas in Frech Poetry(Modern Language Initiative, 2013)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시극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이나 연극학 분야에서 축적되어 왔는데, 이현원, 「최일수와 장호의 시극 인식에 대한 연구」, 어문론집, 64, 2015를 참조하면 추가적인 자료들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오랜 친교를 해온 내가 본 조 감독은 깔끔한 신사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늘 자상하고 이타행의 모범을 보여주며, 지금까지의 영화작업을 천직으로 살아온 멋쟁이이다. 자신의 작품을 과대포장이나 과시하지도 않는 영화라는 화려함 속의 고고한 청자와 같은 분이다. 음력 1935년 11월 5일생으로 제물포고, 건국대학교 정외과에서 수학한 조 감독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 침향 』의 김수용 ,『 애 』의 이두용 감독과 더불어 분단의 아픔을 그린 신작 『 만날 때까지 』로 원로감독으로 융숭한 대접(?)과 칭송을 받았다. 급변하는 영화환경 속에서도 투철한 작가정신과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만날 때 까지』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임권택 감독이 타인의 시나리오로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하고 있을 때 조문진은 시나리오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70여 편의 시나리오, 다수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작품들은 약 45편에 이른다. 이중 일부는 보관되어 있고 이미 필름의 존재조차 모르는 작품들도 있다. 제1회 도쿄 국제영화제는 12편의 초청작 중 하나로 그의 『 언제나 타인 』을 선정했다. 이작품은 비경쟁부문에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로 선정되었다. 이미 제6회 대종상에서 각본상을, 김지미 · 김희라 가 신인상을 탄 동년, 『 언제나 타인 』으로 제6회 백상예술상 감독상에 빛나는 그는 충무로 도제 시스템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기록된다. 『 장군의 수염 』으로 유명한 이성구 감독 밑에서 2년, 김수용 감독 밑에서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조연출 생활을 한, 조 감독은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 1969년 딸의 留學病을 모티프로 한 『 포옹 』으로 데뷔, 69년에만 『 젊은 여인들 』,『 새색시 』,『 명동나그네 』,『 죽어도 그대 품에 』,『 여자의 모든 것 』,『 언제나 타인 』,『 남편 』을 내놓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후 70년에 『 분노 』,『 여자이기 때문에 』,『 약속은 없었지만 』, 71년에 『 말썽 난 총각 』,『 내 아들아 』,『 속 두아들 』,『 내 아내여 』,『 두 딸의 어머니 』,『 처복 』,『 지금은 남이지만 』의 소프트 멜로, 가족과 가정의 이면을 묘사하는 전형을 고수하고 있었다. 김수용 감독 밑에서 20여 편의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임해온 그는 주로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영화연출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화창작 관습은 영화 스승인 김수용 감독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그가 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회귀』가 당선된 것도 김수용 감독의 영화감독으로서 문학성 강조의 탓도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여성을 유린하는 멜로 드라마 『 언제나 타인 』(20회 에딘버러영화제에 출품), 판이한 생활공간을 가진 두 형제의 이해공간을 그린『 두 아들 』,1920년대 충남 양반 가문의 비극을 그린 시대물 『古家』를 들 수 있다. 그는 곽지균 같은 감독을 대표적 조감독으로 두면서 그의 감정선을 전수하고 있었다. 이외에 심재석 , 한덕규 , 김수형 , 양병간은 그와 작업을 같이한 조감독들이다. 그가 꿈 꾸어온 영화들은 데뷔작 『 포옹 』에서 보여주는 명쾌함이나, 빌리 와일더의 『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 챨리 채프린의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태풍자와 인간 가치를 따스한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현역감독 중 40편이 넘게 자신의 창작 시나리오로 연출한 감독은 한국영화사에 거의 없다. 그만큼 문학성을 앞세우는 그가 작가다운 작가로 부상한 영화는 『 만날 때 까지 』이다. 당시의 영화제작 현실이 어떠했건 조감독이 비난 받을 부분도 여러 면에 걸쳐있다. 그의 멜로, 반공, 문예, 시대, 청소년물등은 1)한국적 멜로드라마나 코미디 등의 장르 발전에 역동적·예술적 접근으로 기여하지 못한 점 2)작가주의영화를 표방했지만 실험성이나 부문별 심층연구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한 점 3)도제 시스템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점 4)가족이나 가정의 진보적 풍경이나 비전을 과감하게 보여주지 못한 점등은 지적 받을 부분이다. 로버트 알트만 이나 조지 쿠커의 실험성이나 오손 웰스의 탐구정신, 데이비드 린의 클래시칼한 분위기를 제쳐두고 한국 영화의 생산에 몰두한 결과는 대부분의 충무로 감독들의 경우처럼 결국 후회스러운 부분으로 나타났다. 당시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작업 보다는 호구지책으로 영화를 방편으로 삼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작, 단기제작, 여러 장르 섭렵은 영화창작의 밀도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전성기가 불경기로 크로스 오버되는 70년대의 감독은 작가정신의 고매함이나 영화의 예술성을 고려할 시·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검열의 공포는 단순한 소재를 요구하게되었고 결국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고리를 갖고 있었다 . 이런 가운데 생산된『 무릎꿇고 빌련다 ,72』『 엄마결혼식 ,73』『 신설 ,74』『 호기심 ,74』『 올챙이 구애작전 ,74』『 황홀 ,74, 김승옥 의 『무진 기행』을 영화화한 작품』『 어린 시절 ,74』『 빗속의 여인들 ,76』『 고가 ,77』『 슬픔은 파도를 넘을 때 ,7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78』『 과부 ,78』『 학을 그리는 여인 ,79』『 황토기 ,79』『 두 아들 ,81』『 내일 있는 청춘 ,82』『 설마가 사람잡네 ,85』『 젊은 밤 후회 없다 』는 암울한 시대의 음영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90년대 들어 탄생한 『 아들과 연인 ,92』과 『 만날 때까지 ,99』는 비교적 안정되고 여유가 있는 가운데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환경 탓에 영화감독협회장과 공륜심의위원을 거친 그가 부르짖는 말은 영원한 현역이다. 『아들과 연인』은 사돈이 될 부모님들이 애인인 경우를 설정한 것이고,『만날 때 까지』는 북에서 휴전선을 넘어 온 기억 상실 청년을 자식으로 생각하는 아버지 후보와의 재회를 그린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활약했던 배우들을 작품 제작 순으로 살펴보면 신성일 , 윤정희 , 김창숙 , 고은아 , 신영균 , 전양자 , 남정임 , 김희갑 , 남궁 원 , 김동원 , 한은진 , 박암 , 이낙훈 , 김순철 , 박노식 , 문 희 , 최남현 , 김진규 , 강부자 , 송 해 , 전계현 , 노주현 , 황정순 , 최무룡 , 문정숙 . 하명중 , 태현실 , 장동휘 , 김희라 , 신일룡 , 방희 , 홍성우 , 신 구 , 김추련 , 한인수 , 윤미라 , 황 해 , 도금봉 , 김상순 , 윤일봉 , 이대근 , 정혜선 , 민지환 , 선우용녀 , 조미령 , 현 석 , 이덕화 , 안소영 , 선우 일란 , 하재영 , 윤양하 , 나영희 , 강석현 , 이상아 , 김혜선 , 이재룡 , 박근형 , 조용원 , 양택조 , 김인문 등 화려한 스타 군과 만날 수 있다. 영원한 현역 감독,조감독이 있는 한 우리는 영화계의 또 다른 중심 축을 갖고 있는 셈이다. 가족과 인간, 고향이 살아 숨쉬는 인간미 넘치는 차기 작품을 기다려 본다. 장석용 (영화평론가, 중앙대강사) / 2002년 <프로필> 1935년 11월 5일 인천 출생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회귀'로 당선 1970 < 포옹 > 각본, 감독으로 감독 데뷔 1971 < 언제나 타인 > 동경 제1회 국제영화제 입선 공개 상영 1988 영화감독협회 회장 1989 미국영화직배 반대 투쟁위원장 1991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 1994 청주대학교 강사 1996 영상작가교육원 강사] 1998 영상등급물 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작품명 1970 포옹 / 남편 / 분노 / 여자이기 때문에 / 약속은 없었지만 1971 말썽난 총각 / 두아들(속) / 내 아내여 / 처복 / 지금은 남이지만 1972 무릎꿇고 빌련다 1973 엄마결혼식 1974 신설 / 호기심 / 올챙이구애작전 / 황홀 / 어린시절 1976 빗속의 여인들 1977 고가 1978 슬픔은 파도를 넘을 때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과부 1979 학을 그리는 여인 1981 두 아들 1982 내일있는 청춘 1985 설마가 사람잡네 1986 젊은밤 후회없다 1992 아들과 연인 1999 만날 때까지 등 47편 시나리오 100여 편, 소설집 '조문진 단편소설집', '재벌의 문' '조문진 시나리오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