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힙합덕 비하인드 스토리
- 감독
- 조승현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유동균, 정훈석
존 웨인이 돌아온다. 이번엔 황야를 떠돌던 서부사나이가 아니라 모종의 사연을 지닌 전직 복서이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링의 강자로 군림하다 고향인 아일랜드의 이니스프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내려 한다. 이 공동체는 그를 받아들일까.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공동체는 치명적인 위협 아래 놓여있고, 이 유능하고도 폭력적인 사내는 그 위협을 제거한 뒤 어쩔 수 없이 떠날 것이다. 그 자신도 공동체의 문명에 순응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니스프리라는 가상의 공동체에는 제거해야 할 위협이 없다. 사내는 “이니스프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의 천국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곳은 정말 천국과도 같다. 테크니컬러로 촬영된 초록의 자연은 숨 막힐 듯 아름답고 마을은 한가로움과 선의로 가득하며 악인은 찾아볼 수 없다. 무대가 이처럼 샹그리라를 닮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는 < 도노반의 산호초 >(1963) 외엔 없다. ‘말 없는 사나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숙제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완전한 결합이다. 둘은 결혼했지만 여인의 오빠는 지참금 지불을 거절하고, 여인은 지참금을 찾아오지 않는 한 동침할 수 없다고 버틴다. 하지만 결국 결합은 완수되고 정착은 성공한다. ‘아일랜드의 연풍’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 말 없는 사나이 >는 포드의 드문 낙천적 로맨스영화, 어쩌면 유일한 섹스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사하고 명랑한 외피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의 완성은 존 포드의 오랜 숙원이었다. 1933년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모리스 월시(Maurice Walsh)의 단편 ‘초록의 쇄도 The Green Rushes’(초록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이다)를 읽은 포드는 이를 영화화하기로 마음먹고 1936년 원작 판권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실현에는 15년이 더 걸렸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믿는 제작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44년, 포드는 < 역마차 >(1939) 이래 친구가 된 존 웨인,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에서 인연을 맺은 모린 오하라와 이 영화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리퍼블릭 픽처스의 프로듀서 허버트 예이츠는 “이런 멍청한 아일랜드 이야기로는 한 푼의 돈도 벌 수 없다”고 투자를 거절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사정이 더 어려워졌다. 포드가 자신의 제작사 아르고시(Argosy)에서 찍은 < 도망자 >(1947)의 흥행실패로 빚더미에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포드는 웨인, 오하라와 서부극 한 편을 더 찍는다는 조건으로 리퍼블릭으로부터 어렵사리 < 말 없는 사나이 >의 제작 결정을 얻어냈다. 그 서부극이 바로 < 리오 그란데 >(1950)였다. “나는 이 무렵(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도망자>로 생긴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없는 사나이>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일했다. 이 영화로도 돈을 잃겠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포드는 회고했다. 전후의 포드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찍고 싶은 사적인 영화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서부극을 찍었고, 만들기만 하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대중적 장르인 서부극(아마도 오늘날이라면 호러가 이러한 장르로 취급받고 있을 것이다)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 10월 22일, 미국 감독협회에서 행한 포드의 유명한 연설의 첫마디 “내 이름은 존 포드요. 서부극을 만듭니다.”는 서부극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나 애착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영화를 만드는 하찮은 장인일 뿐이라는 자기비하의 수사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걸작들이며 이미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1950),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 등이 태어난다. < 말 없는 사나이 > 역시 포드가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영화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가장 사적인 영화 가운데 한 편이며, 그의 영화 세계가 온전히 드러난 포드적인, 너무나 포드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완성된 뒤에도 리퍼블릭 픽처스의 수장인 허버트 예이츠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러시 필름을 본 예이츠는 “온통 초록이구만”이라며 불평했다. 더구나 129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120분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포드는 스튜디오 간부를 위한 시사회에서 129분의 < 말 없는 사나이 >를 상영하며, 정확히 120분이 지난 시점에 상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말했다. “자, 지금까지 장면 중에서 뺄 곳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간부들은 말이 없었고 결국 원본 그대로 극장 상영이 결정되었다. 이 영화는 포드의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포드는 이 영화로 < 밀고자 >(1935) < 분노의 포도 >(1940)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에 이어 네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1952년의 아카데미 영화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된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문제로 잠시 우회해보자. 감독상은 < 말 없는 사나이 >의 존 포드가 받았지만 작품상은 세실 드밀의 <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 >에게, 남우주연상은 프레드 진네만의 서부극 < 하이 눈 High Noon >의 개리 쿠퍼에게 주어졌다. 이 해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이 눈>이었다. 비평 진영을 대표하는 뉴욕비평가협회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하이 눈>에 바쳤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찰리 채플린의 가슴 저린 애가 < 라임라이트 >였다. 앤드루 새리스는 저서 「John Ford Movie Mystery」(1975)에서 “이 해의 포드는, 채플린만큼 무시당하진 않았지만, 지나간 시절의 진기한 골동품으로 취급당했다.”고 썼다. 눈길을 끄는 건, 위의 네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당시에 ‘공산주의자 척결’을 주창한 매카시즘과 연관된 날카롭고 복잡한 정치적 갈등 관계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갈등이라기보다 정치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세실 드밀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 언급한 1950년의 감독협회 모임에서 그는 당시 감독협회 회장이던 조셉 맨케비츠의 모호한 태도를 비난하는 긴 연설 끝에 ‘비미국적 un-American’ 영화인으로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와 함께 프레드 진네만을 지목했다. 자신을 서부극 감독으로 소개한 포드의 돌발 연설은 드밀의 발언 끝에 나온 것이다. 포드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졌다고 한다. “나는 드밀의 말에 동의하지 않소. 나는 그를 존경하오. 하지만 그가 싫소... 나는 맨케비츠도 드밀도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로 알고 있소. 지금 여기서 공산주의를 두고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데, 내겐 그저 웃기는 일이오.” 그리고 2년 뒤 앞서 언급한 영화 네 편이 개봉된다. 존 웨인이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비미국적인 영화”라고 비판한 < 하이 눈 >의 각본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 칼 포어먼(Carl Foreman)이 썼고 그는 1951년에 결국 영국으로 이주했다.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찰리 채플린이 1952년 10월, < 라임라이트 > 런던 개봉을 위해 퀸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가던 도중에 미국 당국으로부터 비자를 말소당해 사실상의 추방명령을 받은 사건은 유명하다. 한편 포드의 절친한 영화 동료이며 < 말 없는 사나이 >에서도 함께 작업한 존 웨인과 워드 본드는 블랙리스트를 적극 지지하는 극우파였다. 워드 본드는 매카시를 위한 파티를 개최한 적이 있고, 존 웨인은 극우파 상원의원 로버트 태프트의 지지자였으며 매카시즘 시대의 블랙리스트를 다룬 최근 영화 < 트럼보 >(2015)에서 묘사되듯 갖가지 선동활동에 앞장섰다. 극우파 배우들의 친구이자 후견인이면서도 드밀의 극우적 선동에 반기를 든 포드의 정치적 입장은 기묘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트루만의 지지자였고 2차 대전 참전의 공훈을 인정받은 명예 해군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FBI는 포드를 ‘잠재적 공산주의자’로 분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노동자를 위한 존 스타인벡 위원회’ 같은 진보적 조직의 기부자였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를 후원했고, 사촌이 가입한 IRA에도 돈을 보냈으며 무엇보다 존 스타인벡의 ‘사회주의적 소설’ 「분노의 포도」를 영화로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작품성을 논외로 한다면, 1952년의 아카데미는 절충적 선택을, 비평 진영은 진보적 선택을 한 셈이다.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이 존 포드는 자신의 정치적 미학적 견해를 거의 밝히지 않는 과묵한 남자였다.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그는 20년 가까이 마음에 품어온 < 말 없는 사나이 >를 드디어 완성했다. 이 영화는 스튜디오는 물론 포드 자신의 예상과도 다르게 관객의 환대를 받았고 그해 최고 흥행작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간주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평가를 주저했다. 두 가지 쟁점이 <말 없는 사나이>에 대한 유보적 혹은 부정적 평가와 연관된다. 하나는 이 영화가 아일랜드의 마을을 이상화한 반면 진지한 탐구는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당대 주류언론의 리뷰어 뿐만 아니라 걸출한 비평가 마니 파버(Manny Farber)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에게 < 말 없는 사나이 >는 “싸구려 소설에서 유래한 종잇장처럼 얇은 캐릭터들”의 연애담이며 “감상 과잉의 풍경과 설교로 가득한 < 분노의 포도 >보다 나을 바 없는 구식 상업영화”로 비쳤다. 그의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럴듯해 보이는 모든 시시한 수작들(hokums)이 아일랜드인을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사람들로 보이게 만든다...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들에 관한 이 현혹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탐구는 교란적이다.”(‘Parade Floats’, 「Farber on Film」) 이런 견해에 대한 최근의 반론 가운데 하나는 에세이스트 벤 슈워츠(Ben Schwartz)가 썼다. “(보안관 개리 쿠퍼가 배지를 던지고 마을을 떠나는) < 하이 눈 >이 끝나는 곳에서 < 말 없는 사나이 >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블랙리스트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전복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다. 미국을 견딜 수 없어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존 웨인이 연기한 주인공 션 쏜튼처럼 포드 역시 폭력, 물질적 성공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예기치 않은 결과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The Subversive St. Patrick’s Day Classic’ 「New Republic」 2013. 3. 16.) 다른 하나는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의 엉덩이를 걷어찬 뒤 강제로 끌고 오는, 악명 높은 장면과 연관된다. 태그 갤러거가 “수백 년 동안 연극 무대의 관습 가운데 하나였던 엉덩이 차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욕먹은 감독이 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이 장면은 영화에서 여성혐오 표현의 중요한 사례로 꼽혔으며, 지금도 IMDb에는 ‘misogyny’가 이 영화의 첫 연관검색어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 말 없는 사나이 >는 반여성적 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영화비평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숭배에서 강간까지」에서 몰리 해스켈은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한다. “존 포드의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가운데 하나인 < 말 없는 사나이 >의 분명한 주제”는 “결혼을 통해 이름과 함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여성의 진짜 두려움”이다. 모린 오하라가 연기한 여주인공 메리 케이트가 가구와 지참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가구가 처녀 시절의 이름처럼 그녀의 인격의 일부이며, 돈은 그녀가 남편에게 완전히 의지해서 그에게 흡수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지참금을 얻어냈을 때 메리는 돈을 난로에 던진다. 남편이 돈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해스켈에게 <말 없는 사나이>는 존 포드의 가장 놀라운 페미니스트 영화이다. 여기선 두 쟁점에 대해 더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 엇갈리는 견해들이야말로 그의 소속 없는 정치성과 마찬가지로 존 포드의 영화가 지닌 정박될 수 없는 모호성과 복합성의 징표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말 없는 사나이 >를 볼 때마다 나는 무장해제당하는 느낌에 빠진다. 춥고 주렸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안식의 항구에 이른 느낌. 더 이상 닻을 올리고 싶지 않은 이 무력감에 가까운 행복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비판적 평자들이 말하는 ‘당의정처럼’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선의와 유머의 사람들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의 달콤함은 쓴맛을 감추는 당의가 아니다. 존 포드의 세계를 유랑해온 우리에게 그 달콤함은 이 세계의 심장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성취감 혹은 안도감에 가까운 것 같다.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 기차역. 한 사내가 기차에서 내린다. 말끔한 신사복을 입은 존 웨인. 군복 차림도 아니고 탄띠도 매지 않은 웨인이 도착하는 모습을 이전의 포드 영화(< 역마차 > < 데이 워 익스펜더블 > < 아파치 요새 > < 황색 리본의 여인 > < 리오 그란데 >)에선 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지금 환하게 웃고 있다.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거구의 낯선 사내가 왜 이곳에 온 걸까. 낚싯대도 카메라도 없이. 이들에겐 과도한 호기심 외엔 어떤 적의도 경계심도 없다. 존 웨인은 드디어 싸울 필요도 다시 떠날 필요가 없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첫 시퀀스만으로 겨룬다면 < 말 없는 사나이 >는 포드 영화 중에서 단연 최고다. 이니스프리로 가려는 낯선 사내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내자를 자처하며 한바탕 수다를 벌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 하고 싶은 말을 제멋대로 떠들고 웨인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잠시 목적지를 잊어도 좋은 세계, 얼마간의 지체가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세계, 오히려 그 짧은 지체의 시간이야말로 평온과 웃음이 가득한 천국과도 같은 세계, 5년 뒤 < 라이징 오브 더 문 >(1957)의 두 번째 에피소드 ‘1분간 정차’에서 온전히 펼쳐질 그 소란스럽고도 사랑스런 세계. 황야에서 맹수처럼 싸워 승리하고도 행복할 수 없었던 사내가 그런 세계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에게 주어진 이름은 션 쏜튼이며, 어릴 때 이 곳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나중에 밝혀지지만 권투 챔피언이었던 그는 시합에서 한 선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 때문에 링을 그리고 미국을 떠났다) 몇 십 년 만에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배경 서사가 설명된다. 하지만 존 포드 영화를 오래 만나온 우리에게 존 웨인은 이 개별 서사에 갇힌 인물이 아니다. 상호텍스트적이거나 초텍스트적 존재로서 그는 미국을 떠나 아일랜드로 돌아온 것이라기보다, 서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부를 고유명사가 아니라 서부극이 창안한 장소로서의 보통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미국관객이 아닌 우리가 별다른 노력 없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특권이 우리를 미국관객보다 존 포드의 세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그러니 마니 파버의 비판론과 벤 슈워츠의 옹호론을 잊어도 좋을 것이다. 슈워츠의 한 문장은 고쳐 쓸 수 있겠다. < 하이 눈 >이 아니라 서부극이 끝나는 곳에서 < 말 없는 사나이 >는 시작한다. 말하자면 <말 없는 사나이>는 포스트 서부극이다. 서부극에는 독이 있다. 아무리 서부극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서부극은 ‘정당한’ 폭력과 제거의 서사다. 서부는 황야의 규칙 즉 더 강하고 유능한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다. 공동체의 위협은 서부사나이의 정당한 폭력(주로 사적인)으로 제거된다. 어떤 예술 분야도 영화만큼 제거의 폭력을 애용하지는 않으며, 그 발원지에 서부극이 있다. 불가능한 공존, 불가피한 폭력과 제거라는 장르적 관습은 서부극의 율법이며 포드가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한 < 웨건 마스터 >(1950) 조차 넘어서지 않은 계율이다. 서부극의 독이 제거의 폭력이라는 장르적 관습 자체에 있는 건 아니다. 서부사나이는 폭력으로 악인을 제거한 뒤 공동체에 정착하지 않고 떠난다. 사적 폭력의 행사자인 자신 또한 공동체 문명의 위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축복은 그의 것이 아니며, 용감한 그에게 안식은 없다. 그는 자신의 총알이 악인을 꿰뚫은 다음 결국 자신에 이를 것임을 알고도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 영웅적 결단의 비극적 정념이 서부극 관객을 사로잡는다. 서부극의 폭력은 대개 정의의 실현이라는 에토스 이면에 감춰진 자기 비극화의 파토스에 실려 있고, 이제 폭력은 설득이 아닌 정동(情動)의 문제가 된다. 정의로운 제거의 폭력이라는 장르의 계율이 위험해지는 건, 자기도취적 정념이 폭력의 동력원이 되는 이 지점에서다. 션 쏜튼이 떠나온 것은 바로 그 위험한 계율의 장소인 서부다. 그가 성난 얼굴로 서부와 전장을 누비던 존 웨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 중의 쏜튼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링은 서부를 지배하는 황야의 규칙을 양식화한 공간이다. 20세기 초까지도 권투는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야만적 스포츠였다. 더구나 링에서 쏜튼은 정당한 폭력으로 상대방을 죽였다. 그는 ‘정당한 살인자’라는 딜레마를 서부사나이와 공유한다. 그의 이력은 서부사나이의 이력의 알레고리다. 그러니 존 웨인의 션 쏜튼을 어떻게 황야를 떠나온 서부사나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말 없는 사나이 >의 장소는 서부와 완전히 다른 곳인가. 쏜튼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기묘하게도 여기서 말 경주와 결투를 요구받는다. 서부극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습이 실행되는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말 경주는 서부극에서의 목숨이 걸린 추격과 도피와 무관한 말 그대로 이 마을의 전통이 된 시합이고 축제이며, 쏜튼이 끝내 피하려 했던 메리의 오빠와의 결투는 제거가 아닐 합일에 이르는 경로다. 말하자면 <말 없는 사나이>는 서부극의 핵심적 관습을 끌어오면서 서부극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 제거가 아닌 공존에 이른다. 요컨대, 존 포드는 이니스프리라는 가상공간에서 서부극의 관습을 반복하며 그것을 공존의 제의로 역전시킴으로써 서부극의 독을 씻어낸다. 말 경주 들판과 사람들 결투 두 사내가 주먹다짐을 벌이는 결투 장면보다 그 제의성을 더 잘 보여줄 수는 없다. 나른한 평화만 가득하던 마을에 두 사내의 싸움이 예고되자, 마을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삽시간에 모여든다. 한가롭던 초록 들판을 싸움 구경꾼들의 행렬이 가득 메우고, 성직자들을 포함해 마을 사람 모두가 내기에 뛰어든다. 모두 이 폭력의 대결을 고대했던 것이다. 술집 주인이 말한다. “오늘이 이니스프리 최고의 날이군.” 한없이 이어질 듯한 결투가 끝난 뒤 두 사내는 어깨동무를 하고 메리에게 향한다. 폭력을 피할 수 없다면 혹은 그것에의 동경을 멈출 수 없다면, 유일한 출구는 폭력을 제의화하는 것이다. 모두가 폭력에 환호하는 데 어떤 제거도 발생하지 않는 제의, ‘정당한’ 에토스의 위장 없는 날 것 그대로의 파토스로서의 폭력, 그래서 도덕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윤리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폭력이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제의. 이를 서부극의 살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쏜튼이 도착한 장소를 해독된 서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니스프리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한 장면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쏜튼은 어렵사리 구입한 옛집에 도착한다. 오래 비워져 있었을 그 집에 누군가 벽난로를 피워놓았고 청소 중이었는지 쓰레기를 모아두었다. 전 장면에서 우리는 쏜튼과 메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목격했으므로, 누가 그랬는지 쏜튼도 알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있다. 저녁의 잔광이 스며드는 창문을 바람이 세차게 흔들고 실내엔 약간의 긴장이 흐른다. 이때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 쏜튼이 돌을 집어 들더니 괴성을 지르며 창문을 향해 던지고 유리창이 깨진다. 숨어있던 메리는 놀라 일어나더니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지른 뒤 집 밖으로 달려나가려 한다. 쏜튼은 그녀를 잡아챈 뒤 격렬한 바람을 맞으며 입을 맞추고, 메리는 쏜튼의 뺨을 때리려 한다. 이 시퀀스는 논리적 연관이 없는 행위와 쇼트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왜 쏜튼은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옛집의 창문을 깨트리며 괴성을 지르는가. 숨어있는 메리를 불러내려 했다 해도 그는 왜 이런 난폭한 방법을 택하는가. 괴성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었을 메리는 왜 거울을 본 다음에야 비명을 지르는가. 매우 로맨틱한 조우가 될 수도 있을 장면에서 바람은 왜 이토록 거칠게 두 남녀에게 몰아치는가. 하지만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이런 질문이 무의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포드는 표면을 매끈하게 가다듬어 하나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는 감독이 아니다. 바람, 예기치 않은 괴성과 유리창 파열, 거울과 지체된 비명, 다시 바람, 흩날리는 스카프와 옷자락의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숨 가쁜 연쇄 후에 격렬한 키스가 이뤄진다. 이 키스 장면의 감흥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한 장면의 감흥은 그 장면의 미장센과 행동이 이전 쇼트들이 누적한 감정과 만나 표현된다. 온갖 이질적인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연쇄야말로 보통의 경우라면 로맨틱한 입맞춤에 그쳤을 이 장면에, 태그 갤러거가 경탄한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을 담아낸다. < 모감보 >(1953)의 클락 게이블과 그레이스 켈리의 키스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감정의 만화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의 디테일이다. 옛집에서의 키스 시퀀스와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한참 뒤에 등장한다. 결혼은 했으나 지참금 문제로 아내에게 동침을 거부당하는 사내 쏜튼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의 곁으로 메리가 조용히 다가온다. 메리에게 쏜튼은 말없이 작은 들꽃을 따 건네준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구애하고 키스하고 청혼하고 결혼했으나 아직 온전히 아내가 되지 않은 여인. 더 이상 소용없을 장미 꽃다발 대신 건네진 이 가녀린 들꽃에는 소란스런 격정과 흥분 이후의 슬픔, 우울, 간절함, 예의, 조심스러움이 사랑의 마음과 함께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답고 가슴 저린 장면이다. 포드의 영화를 이질적인 것들의 난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말 그대로의 축제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런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감정의 종잡을 수 없는 소란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해독된 서부인 이니스프리는 폭력적 제거의 행동 이미지를 대신하는, 긴 스펙트럼의 감정의 빛을 난반사하는 포드적 디테일의 카니발이기도 하다.(계속)
최근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한 재주꾼 중 한 명은 알폰소 고메즈-레존이다. 두 번째 장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로 2015년 선댄스 드라마 부문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NYU(뉴욕대)와 AFI(미국영화협회)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1990년대 초부터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컨드 유니트 디렉터로, 혹은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아니면 연출부의 일원으로 그가 ‘모셨던’ 감독들의 명단은, 혹시 이 사람에게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히 쟁쟁하다. 마틴 스코시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라 에프런, 시드니 루멧, 마이클 만…. 최근엔 벤 애플렉 감독의 < 아르고 >(2012) 세컨드 유닛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였다, 시작은 TV 시리즈였고 < 글리 >(2009~15)나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011~ ) 등에 참여했다. 2014년엔 드디어 첫 장편영화 <일몰이 두려운 마을 The Town That Dreaded Sundown>을 내놓는다. 전형적인 슬래셔 호러 장르에 나름의 스타일과 플롯 비틀기를 가미했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서 그는 환골탈태한다. 제시 앤드류스의 첫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적 전형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과 비주얼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몰이 두려운 마을>과 유사한 방식의 시도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깊이와 캐릭터의 매력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틴에이저 장르 안에서 이토록 유쾌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작은 기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나’인 그렉(토머스 만)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이스쿨 졸업반이 된 그렉. 그는 8년째 투명인간처럼 학교 생활을 해온, 거의 모든 성향의 집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게 말하면 친화력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색깔 없는 ‘왕따’나 마찬가지인 십대다. 유일한 친구는 얼(알제이 사일러)이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둘의 공통점은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영화사를 아로새긴 걸작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패러디)한다. 역사 교사 매커시(존 번탈)의 방에서 빈둥대거나 영화 찍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올리비아 쿡)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할리우드 틴에이저 무비는 겉으로는 얄팍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찰적인 장르다. 십 대들의 불안한 삶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저항으로 치닫고,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때론 힘겨운 운명의 짐을 지기도 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친구, 연인, 교사, 부모 등의 한정된 캐릭터로 이뤄지지만, 이 제약적인 토대 위에서도 틴에이저 무비는 매우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도 마찬가지다. 전반부가 제법 발랄한 톤의 루저 코미디를 통해 십 대들의 냉소적 불안감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어른스럽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가면, ‘쿨’하게 시작해 점점 온도를 올렸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런 드라마의 힘은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과 ‘나’ 그렉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하이스쿨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가는 관문인 졸업반 시기. 레이첼은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렉은 그 어떤 꿈도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불운한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첼의 백혈병이다. 그렉은 “가서 친구가 되어 주라”는 엄마(코니 브리튼)의 말에 못 이겨 레이첼의 집에 갔고, 어색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어느덧 졸업반 내내 이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렉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레이첼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욱 절박한 상황에 처한 레이첼이 그렉의 삶을 채찍질하고 이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그렉 대신 대학 입학처에 편지를 보내고 그를 격려한다. 하지만 그렉은 오히려 레이첼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그렉은 조금씩 껍질을 깨나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러한 성장 영화의 측면이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의 진지한 얼굴이라면, ‘나’ 그렉과 ‘친구’ 얼이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은 시네필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엔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된다. 그렉과 얼은 역사 선생 방에서 컴퓨터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 피츠카랄도 >(1982)에 대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인 < 버든 오브 드림스 >(1982)를 본다. 그렉의 아버지(닉 오퍼맨)도 헤어조크의 팬으로 < 아귀레 신의 분노 >(1982)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렉의 방엔 프랑소와 트뤼포의 < 400번의 구타 >(1959) 포스터가 붙어 있으며, 그는 실의에 빠졌을 때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렉이 얼과 함께 만드는 영화들의 제목들 역시 가관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에서 모티브를 얻은 <일곱 마리 물개 The Seven Seals>에선 기사와 죽음의 사자가 황당한 체스를 둔다(‘seal’엔 봉인과 물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이클 파웰의 ‘엿보기’에 대한 범죄 영화 <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1960)는 <똥싸는 톰 Pooping Tom>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은 뚫어뻥의 공격을 받는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가 <양말장치 오렌지 A Sockwork Orange>가 되고, 데이비드 린치의 <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이 <원숭이 맥주 Brew Vervet>가 되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1971)이 <테니스장에서의 죽음 Death in Tennis>이 된다. 과거 8mm 시대 영화광을 연상시키는 그렉과 얼의 이러한 ‘영화 장난’들은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전작인 <일몰이 두려운 마을>에서도 ‘영화 속 영화’의 컨셉트로 연쇄살인극을 구성했던 고메즈-레존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화 유희적 본성을 드러내며, 그 기발함과 유머는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 있는 루저 스타일 틴에이저 무비를 활기 찬 소동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는 결코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 순간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렉과 얼은 태어나 처음으로, 기존에 있는 영화를 비트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창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바로 레이첼을 위한 영화다. 그러나 ‘진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곧 난항을 겪고, 결국 얼이 그만 둔 상태에서 그렉 혼자 영화를 완성한다. 병원에 있는 레이첼과 그렉이 그 영화를 함께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여기서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장면이 환기시키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 이상이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는 현재 할리우드 틴에이저 장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이다. 관객과 대화하듯 진행되는 내레이션, 별나면서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 묵직한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연스레 결합하는 솜씨 등 이 영화는 많은 영화적 미덕을 지녔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아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피상적으로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잖아?”라며 대충 얼버무리며 끝나는 청춘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사족 하나. 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카메라 워크가 궁금해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봤다면, 우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Cinematography by Chung-hoon Chung’. 맞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바로 한국의 정정훈이다. 박찬욱 감독과 < 올드보이 >(2003)부터 호흡을 맞추었고, < 스토커 >(2013)로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솜씨를 인정받았고,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인 < 블러바드 >(2014)에서 우울하고 정적인 촬영을 선보이더니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선 마치 날개를 단 듯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비주얼들 역시,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
태그 갤러거(Tag Gallagher)는 부산 영화의전당 초청으로 지난 9월 11일에 방한했다. 부산에서 영화의전당에서 12일에 강연회, 13일에 임재철, 김성욱, 허문영과의 좌담을 가졌다.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도 14일 강연회를 가졌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 The Man and His Film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The Adventure of Roberto Rossellini: His Life and Films」(DaCapo, 1998)라는 탁월한 두 권의 저서를 썼고, 조셉 폰 스턴버그, 막스 오퓔스, 킹 비더, 장 마리 스트라우브, 페드로 코스타 등에 관한 뛰어난 평론을 써왔다. 이 연재를 읽어온 독자라면 태그 갤러거라는 이름을 여러 번 만났을 것이다. 포드의 열광자인 그의 견해는 특정한 이론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동시에 시네필적 수사학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대신 포드의 개별 영화가 지닌 풍성한 영화적 자질을 개인사적 산업적 맥락 안에서 정교하고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의 견해를 참조하지 않고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의 강연은 육성이 아니라 비디오에세이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아직 익숙지 않은 비디오에세이는 강연을 진행하며 필요할 때마다 영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고 재배열한 영상들과 그의 코멘트가 마치 대화하듯 진행되는, 새로운 비평 형식이다. 그의 존 포드 비디오에세이는 존 포드의 영화적 리듬과 공기를 재배열된 영상으로 체험케 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그는 “왜 다른 비평가들은 이 방식을 모방하지 않는가”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래의 인터뷰는 부산에서의 좌담, 사적 대화, 그리고 이메일 등에서 주고받은 말들을 추린 것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만족할만한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시네필이자 뛰어난 평론가로서의 의미 있는 발언들이어서 여기 소개하려 한다.(로베르토 로셀리니에 관한 발언도 다수 포함된 갤러거-임재철의 대담은 『씨네21』972호에 실려있다. 참고하시길.) 1960년대에서 바로 건너온 듯한, 허름한 히피풍 차림의 이 노비평가는 작은 가방 두 개만을 들고 먼 길을 왔고, 두 도시의 시네필들에게 기억할만한 많은 말들을 들려준 뒤 9월 16일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허문영_ 당신의 사적인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개인 소개를 부탁한다. 태그 갤러거_ 나는 1943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NYU에서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스턴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4년간 있었지만 학교와의 인연은 그게 끝이다. 20대에는 베트남 전쟁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피아노 교사를 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 달 생활비가 300달러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거기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이탈리아인 제자를 만났다. 그가 내게 「역경 易經」을 소개해 읽었고 크리슈나무르티 강의에도 데리고 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정좌하고 앉아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고 하고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강의가 내가 들은 가장 훌륭한 강의의 하나로 남았다. 8번 정도 강의를 들었는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베스파(스쿠터)를 사서 이탈리아 일주를 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 조셉 폰 스턴버그도 스쿠터로 이탈리아 일주를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12살부터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너무 늦었다. 대신 내 아들이 피아니스트여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한다. 아들 이름이 킴벨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킴」(루디어드 키플링)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허문영_ 당신은 학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립적으로 비평과 저술 작업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같은 길을 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이며 어떤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었는가. 태그 갤러거_ 내가 아카데미를 거부한 게 아니라 아카데미가 나를 거부한 거다(웃음). 보스턴대학교의 윌리엄 애로우스미스 교수가 나를 고용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는 영화이론 전공을 도입하려고 나를 고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도중에 죽었다. 학교에서는 언론 전공학자를 그의 후임으로 고용했다. 그는 영화전공 도입을 원치 않아 내 자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대학교에 있었을 것이다. 미국 대학교 시스템의 이상한 점은 박사 학위 취득하고 1, 2년 안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6년 동안 한 사람의 교수 아래서 조교수 노릇을 해야 테뉴어가 되는데, 4년간 나를 돌봐주던 교수가 죽은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미 존 포드에 관한 책을 써서, 이름이 약간 알려지는 바람에 더욱 고용되기 힘든 어중간한 사람이 되었다. 독립적인 작업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문영_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는가. 태그 갤러거_ 그렇지 않았다. 나는 돈이 많다.(웃음) 나는 16mm 필름 거래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필름 딜러들은 대부분 영화에 대해선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강점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포드의 < 굽이도는 증기선 >이 얼마나 귀한 필름인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귀한 필름들을 사서 내 라이브러리도 만들고 장사도 했다. 필름 거래는 마약 거래와 비슷하다. 마약 중독자는 보통 마약 장사를 겸한다. 마약 장사로 번 돈으로 자기도 마약을 하는 것이다. 마진율이 높다는 점도 비슷하다. 보통 100% 정도다. 비싼 건 한편 팔아 200달러 정도 남겼다. 둘다 간단한 사업이다. 전화나 팩스로만 거래한다. 내게 필름 장사는 많은 걸 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16mm 프린트로 영화제를 여는 데가 많아서, 예컨대 런던에서 로셀리니 영화제를 한다고 하면 나는 내가 가진 프린트들을 짊어지고 가서 상영하고 끝나면 싸들고 돌아왔다. 필름장사를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큰 필름 라이브러리도 갖고, 돈도 벌고, 여행도 다녔다. 행운이었던 셈이다. 물론 초산화 때문에 집 안에 식초 냄새가 진동하긴 했지만. 아직 빌려줄 가치가 있어서 로셀리니 영화는 몇 편 가지고 있고 존 포드의 < 순례여행 >도 갖고 있다. 로빈 우드 Robin Wood, 조너선 로젠봄 Jonathan Rosenbaum 허문영_ 영화적 견해를 교류하는 가까운 동료 비평가가 있는가. 태그 갤러거_ 음, 미국에는 거의 없다. 오히려 외국에 조금씩 있다. 로빈 우드는 죽기 1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토론토에서 로셀리니 회고전을 할 때였다. 그와 와인 3병을 마셨고 그는 내 발과 사랑에 빠졌다(로빈 우드는 게이이며, 갤러거는 주로 맨발로 다닌다). 나는 논쟁을 즐기는 편이지만 로빈 우드와는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로빈은 포드의 최고작이 < 모호크족의 북소리 >라고 말했는데, 그 영화는 나의 존 포드 톱 30 정도에 겨우 넣을 수 있는 영화다. 보통의 경우라면 반박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너무 쇠약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과는 굉장히 친했는데, 2000년에 심하게 싸운 뒤로 보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아드리아노 아프라와는 매우 친하다. 그는 나의 로셀리니 책을 꼼꼼히 읽고 코멘트해주었다. 허문영_ 조너선 로젠봄과는 왜 싸웠는가. 태그 갤러거_ 글쎄, 왜 싸웠는지 누가 알겠는가. 싸움이란 알 수 없는 거다... 싸움이 궁금하다면 다른 싸움 하나를 알려주겠다. 로셀리니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생긴 일이다. 나는 로셀리니의 오랜 친구 프랭크로부터 로셀리니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셀리니의 아들 렌조를 만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처음엔 “프랭크 아저씨가 말했으면 사실일 것”이라고 순순히 수긍했다. 무솔리니 시절엔 당원증이 없으면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로셀리니가 2차대전 중에 군대에 관한 영화를 몇 편 만들었는데 당원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무솔리니 시절에 당원증을 얻는 건 잡지 구독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약간의 돈을 내면 1년짜리 당원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대신 신청해서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가입 날짜 조작까지 가능했다. 로젤리니가 당원이었다는 것은 사실 거의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렌조를 만나고 나서 며칠 뒤에 팩스를 보내 결투 신청을 해왔다. 이유는 내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죽은 이를 공격하는 겁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렌조가 가족과 이야기하고 나서 가족의 방침이 그렇게 내려졌던 것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아는 건 지금 너와 나밖에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이라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나는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는데, 무기 선택까지는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게 “너를 평생 괴롭히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이탈리아는 정치적 힘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힘을 미치는 특별한 사회다. 나와 렌조와의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탈리아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로셀리니와 관련된 어떤 행사에서도 나는 금지된 사람이 되었다. 나의 로셀리니 책이 출간된 뒤로 이탈리아서 로셀리니 관련 책이 6, 7권 출간되었는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인용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학자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는 식으로만 내 견해가 인용될 뿐이다. 내 책은 불어로는 번역되었지만 정작 로젤리니의 조국인 이탈리아에선 번역될 수 없었다. 허문영_ 존 포드라는 영화감독에게 매혹된 최초의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그 순간의 경험에 대해서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_ 나는 사실 존 포드를 알기 전에 존 포드를 알게 되었다. 십 대 시절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많은 영화를 보았다. 사실 그때는 크레딧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배우 이름조차도 관심 밖이었다. 감독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굉장히 많은 영화를 보았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기도 했다. 대학에 갔을 때 영화 연출에 관심이 있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가 그 영화의 감독들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그때서야 내가 좋아했던 대부분의 영화들이 존 포드가 만든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 포드를 알기 전에 존 포드를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Lincoln 허문영_ 당신의 저서에서 < 젊은 날의 링컨 >을 언급하면서 50번을 넘게 봤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시네필에게는 즐거운 것이지만, 무언가를 써야 하는 비평가들에게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면도 있다. 끝없이 고쳐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저서에서 스스로 불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태그 갤러거_ 발견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나의 포드 책도 3번째 개정판을 냈다. 포드의 경우, 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노트를 하고 다시 쓰는 일을 지속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쓴 「존 포드」 초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형용사가 너무 많다. 5년 전 스페인어로 출간하자는 제안이 왔을 때, 나는 25% 정도를 다시 썼다. 올해는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짧은 버전 출판을 제의해왔다. 그걸 위해 다시 내가 쓴 걸 봤을 때, 여전히 형용사가 너무 많다고 느꼈다. 형용사는 부정직해지거나 과장하기 쉽다. 지금으로선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고 싶다. 내 책이 지닌 좋은 점도 있다. 나는 프레임 확대(frame enlargement)에 의한 스틸을 쓴 첫 연구자 중의 하나다. 16mm 프린트로 내가 일일이 작업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영화 책은 영화사가 제공한 프로덕션 스틸을 썼다. 이건 가짜다. 왜냐하면 감독은 그 스틸을 찍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영화연구에서 가장 중대한 부정직함 중의 하나다. 내가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아카데미 쪽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들은 스틸 사진의 화질을 따지고 있었다. 과연 존 포드가 그 장면을 찍은 게 맞는지를 따지지 않고 말이다. 이젠 DVD가 있어서 훨씬 좋은 프레임을 얻을 수 있다. 어쨌거나 긴 버전을 줄이면 내 책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 「John Ford, the Man His Films」 허문영_ 당신이 존 포드 연구에 몰두하고, 첫 저서(「John Ford, the Man His Films」)가 출간된 것은 1986년이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존 포드를 인종주의자, 극우파, 군국주의자로 보는 시선이 강하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당신의 저서는 존 포드에 대한 그런 선입견, 오인 혹은 잘못된 평가를 불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태그 갤러거_ 그랬기를 바란다. 허문영_ 자신의 책이 존 포드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느낌을 실감한 경험이 있나. 태그 갤러거_ 나로선 그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나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70년대, 80년대 당시에 존 포드가 이러한 오해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존 웨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존 웨인은 그 당시에 반공산주의 활동을 굉장히 활발히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존 포드를 변론하고,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존 포드를 보호하는 것에서 시작을 했다. 존 포드에 대한 이해는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책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나로선 그 목적에 이 책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허문영_ 존 포드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에 대한 당신의 저서는 전기와 감독론이 결합되어 있다. 전기 작성은 매우 많은 자료 조사를 필요로 하는, 비평가들에게는 매우 힘들고 소모적인 작업일 수도 있다. 존 포드와 로셀리니에 관한 책을 쓰면서 전기적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태그 갤러거_ 존 포드의 책을 준비하면서 16mm 필름 반복해 보았다. 한 영화를 숏 별로 기록하면서 앵글과 숏의 크기, 카메라 움직임 등등을 적는다. 한 영화당 대략 4, 5일이 걸린다. 그러고 나서 다른 영화로 넘어간다. 각 영화별 기록을 마치면 영화들 간의 관계를 찾아본다. 이 과정에서 존 포드가 어떤 시기에는 좋은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 수색자 >(1956) 이후에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 사이의 기간이 후자에 해당한다. 물론 < 투 로드 투게더 >나 < 기병대 > 등의 괜찮은 영화들이 있지만 좋았던 시기에 비하면 확실히 좀 떨어진다. 이 시기에 존 포드는 한쪽 눈의 시력과 그의 집을 잃을 정도로 개인적 어려움을 겪었다. 산업적으로도 스튜디오 붕괴하면서 그의 개인 프로덕션도 문을 닫았다. 이제 개인이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와의 계약서가 30년대에는 2쪽이었는데, 50년대에는 전화번호부 두께가 되었다. 이 모든 나쁜 일이 5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영화 외적인 요소가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 전기는 나의 우선 분야가 아니어서 자료가 불충분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10일 동안 인터뷰를 했다. 존 포드 지인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들 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정확히 말해주었다. 조셉 맥브라이드의 포드 전기는 훌륭하다. 나는 그 책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화는 무에서 오지 않는다. 삶의 여러 사실들이 영향을 미친다. 로셀리니도 그런 사례다. 그는 다른 영화인들과 직업적인 관계를 맺은 적 없고,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밀한 혹은 적대적 관계 속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제작의 커뮤니티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존 포드, 장 르누아르도 그런 사례다.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기운, 특별한 친밀함이 영화에 반영된다. 무엇보다 포드의 < 조용한 사나이 >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로베르 브레송의 전기를 여전히 기다린다. 그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동반자였던 안느 비아젬스키가 < 당나귀 발타자르 >에서 같이 작업한 경험에 대해 쓰긴 했지만 사적인 부분은 별로 없다. 대신 그녀가 쓴 고다르에 관한 책은 정말 훌륭하다. 여하튼 궁금하다. 브레송의 삶은 영화 같았을까. 그의 영화 이를테면 <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의 주인공처럼 얀세니스트였을가.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다. 돈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했다는. 나는 브레송의 전기 작가라는 영웅을 기다린다. 허문영_ 존 포드 영화(특히 < 젊은 날의 링컨 > <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등)에서 프로듀서 대릴 F. 자눅의 역할은 비평가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포드는 종종 자눅에게 편집권을 넘겼고, < 황야의 결투 >의 마지막 장면은 직접 찍기도 했다. 그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한다고 보는가. 태그 갤러거_ 물론 자눅은 포드가 인정한 위대한 편집자다. 하지만 자눅이 제작한 다른 감독들의 영화들을 생각해봐라. 대부분 끔찍하다. 비밀은 포드의 영화 만들기의 방식에 있다. 존 포드는 스토리보드 없이 이미 머릿속에 영화를 만들어 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포드는 촬영하는 과정에서 이미 편집을 해버렸다. 촬영이 끝나면, 더 이상 다르게 편집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자눅이 포드의 영화들을 편집한 건 맞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때로 자눅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 황야의 결투 >를 30분 줄이고 자신이 마지막 장면을 찍은 것 같은 일 말이다. 물론 포드가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찍은 영화에서는 완전한 통제권을 발휘했다. 역마차 Stagecoach 허문영_ 당신의 베스트 존 포드 리스트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내가 늘 좋아하는 10편의 존 포드 영화가 있다. 먼저 < 역마차 >가 있고, < 젊은 링컨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 미드웨이 전투 >, < 웨건 마스터 >, < 조용한 사나이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도노반의 산호초 >,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 <7명의 여인>. 재작년에『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라는 잡지가 올타임 베스트 설문조사를 했는데, 존 포드 영화 중에 어떤 걸 고르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역마차>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정했다. 하지만 아마 내일이라도 <역마차>로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존 포드가 방금 얘기했던 그 열 편 중에 한 편만 만들었다 할지라도 존 포드는 지금만큼이나 존경받는 감독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_ 내일 바뀔 수 있다 해도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를 최고로 꼽았다는 건 약간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주류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많은 시네필들에게는 오랫동안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히치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기증>을 최고로 꼽는다. 존 포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각기 다른 자기만의 최고작을 꼽는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를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라고 보는 건 주로 영국인들이다. 데이비드 톰슨 같은 사람이다. < 시민 케인 >과 같은 해에 나왔기 때문에 혁신적인 <시민 케인>과 비교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관습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건 피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 영화가 왜 좋으냐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것이 좋다. 캐릭터, 숏, 촬영, 이야기, 감정 모두 좋다. 소년이라는 한 캐릭터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드문 존 포드 영화이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도 같은 방식이다. 단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둘 다 거의 전체가 플래시백인 영화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반복해서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자기식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래시백에서 베라 마일스가 존 웨인을 사랑한다는 걸 못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는 기억을 왜곡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도 기억의 왜곡이 있다. 포드의 영화는 의식과 전통에 관한 것이라는 통념이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흥미로운 점은 이런 의식과 전통이 사회를 유지하기도 하면서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걸 결코 깨닫지 못한다. 아이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공동체를 파괴시킨다. 이 영화의 센티멘탈리티는 이중적이다. 사람들은 비극적 사건에만 주목하고 그 뒤에 감춰진 잔혹함을 보지 못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허문영_ 나도 그런 관객이었다. 20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저 비극적 멜로드라마라고만 생각했다. 몇 년 지나 다시 봤을 때, 이 영화가 매우 기괴하고 뒤틀려 있다고 느꼈다. 거의 무서웠다. 태그 갤러거_ 포드의 마법이 그런 것이다. 울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섭게 한다(horrifying). < 아파치 요새 >도 그러하지 않은가. 백인 장교와 하사관들은 고귀한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병사들을 그리고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명령에 복종한다. 포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중성을 못 본다. 포드가 그들의 행동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 나의 계곡 푸르렀다 >는 아이가 밸리를 50년이 지나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엄마의 숄로 싸는 책들은 자기가 어릴 때 읽었던 책들뿐이다. 새 책이 없다.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는 가족이 파괴되고 밸리가 망가지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이 든 주인공은 가족들 밸리 사람들이 죽지 않았고, 그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어리다. 그는 과거를 반복, 반복, 반복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는 과거에 갇힌 사람이다. 포드는 이 인물의 슬픈 사연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인물의 어리석음, 의도하지 않은 파괴성이라는 이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위대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은 위대한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이유는 나를 울게 하니까, 이다. 훌륭한 예술은 우리를 울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연루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술은 감정에 관한 것이니까. 예술의 또 다른 자질은 창의성(invention)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한 순간도 경이롭지(marvelous) 않은 때가 없다. 구도는 아름답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발레 같다. 너무나 우아하다. 오손 웰스가 이런 걸 하면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미학적이라고 알아차리게 된다. 근데 포드가 하면 그 솜씨를 눈치 못 채고 그저 울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모차르트를 좋아한다. 자기 시대의 보통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물론 지적인 사람도. 포드의 영화도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봐도 충분히 즐기고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50번 넘게 봐도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아직 두 번밖에 안 봤나? 계곡 봐라! 좋은 음악 몇 번 듣나? 좋아하는 시는 몇 번 읽나? 처음 읽을 때 얼마나 이해하나? 계속 보면서 심장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리듬, 단어의 느낌 등등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영화들도 그러하다. 존 포드 영화가 그런 영화다. 스테핀 페칫 Stepin Fetchit 허문영_ 이번 특별전 동안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관객과 함께 다시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이 영화에서의 흑인 묘사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관객도 있었다. 존 포드 영화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스테핀 페칫(Stepin Fetchit)이 보여주는 바보스러운 언행을 말하는 것 같다. 태그 갤러거_ 스테핀 페칫의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미국에서 인종적 편견은 단순히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과 몸 동작의 문제이기도 하다. 50년 전이라면 당신이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흑인이라면 말투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에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관용의 증대인가, 아니면 다름에 대한 불관용의 승리인가. 어느 쪽의 주장도 가능하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스테핀 페칫처럼 행동하는 흑인이 그 당시에 존재했는가. 그렇게 말하고 걷는 사람이 그때 존재했는가. 그렇다. 프랜시스 포드와 같은 백인 주정뱅이, 혹은 메이듀 같은 백인 정치가가 존재했듯이 말이다. 페칫은 백인의 편견을 증대시키는 특질들의 패러다임인가. 물론 그렇다. 그는 이것이 의도적이라고까지 말했다. 영화가 좋은 롤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같은 이유로 존 스탈의 <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 >(1934)가 더글라스 서크의 1959년 리메이크작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페칫은 최악의 이미지일 것이고, 그래서 TV에서 금지되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포드는 페칫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관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복잡한 문제다. 허문영_ 존 포드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재확인하게 된 사실이 있다.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보도 자료에 이런 내용을 써서 돌렸다. ‘존 포드는 서부극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서부극에 한정되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상시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도기사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서부극의 거장이 찾아온다’, ‘고전 서부극의 맛을 다시 만끽하기를’. 이 기획전의 의도가 서부극의 감독으로 한정된 존 포드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고자 하는 점도 중요했는데, 이런 보도들을 보면 서부극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하다고 다시 느끼게 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서부극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뛰어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말하는 데 있어서 서부극이라는 틀, 혹은 장르 어프로치가 유용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_ 난 개인적으로는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존 포드를 늘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와 같은 영화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포드는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단 한 편의 서부 영화도 만든 적이 없다. 그가 해리 캐리와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많은 서부영화를 만들었지만, 폭스사로 옮기고 난 이후, 자신의 이름을 잭에서 존으로 바꾸고 난 이후에는 서부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웨스턴이 아닌 일반 극영화들이 보다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 밀고자 >, < 분노의 포도 >, < 롱 보이지 홈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같은 비서부극로 아카데미상을 받았기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포드를 서부영화 감독으로 특정화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가 영화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 < 황야의 결투 >를 만들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폭스사와의 계약 때문에 의무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제작사 아르고시(Argosy)에서 < 도망자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훌륭한 영화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싫어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일련의 서부 영화들을 다시 만들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 아파치 요새 >다. 굉장히 많은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결국 < 조용한 사나이 >를 만들기 위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이후에 그의 유일한 목적은 <조용한 사나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용한 사나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 리오 그란데 >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상 그 이후의 유일한 서부극은 < 수색자 >이다. 그 뒤로는 영화를 만들기 어렵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이따금씩 서부영화를 만드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됐다. < 투 로드 투게더 > 같은 경우는 그가 그다지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영화다. 물론 나는 존 포드가 만든 서부극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를 서부영화 감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장르라는 틀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편이다. 허문영_ 1894년은 위대한 감독들이 많이 태어난 해다. 포드 뿐 아니라, 조셉 폰 스턴버그, 킹 비더(장 르누아르도 있지만) 등. 스턴버그나 킹 비더는 그들의 전성기에 재능에서는 포드를 능가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포드만이 1950년대를 살아남았고, 70세가 넘어서 만든 마지막 작품(<일곱 여인> 1966)에서도 그의 재능을 입증시켰다. 포드의 예술가로서의 긴 수명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태그 갤러거_ 오해가 있다. 킹 비더도 살아남았다. 1959년에 만든 <솔로몬과 시바>는 훌륭하다. 1956년에 만든 <전쟁과 평화>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다만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을 뿐이다. 그 점에선 존 포드도 당대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일곱 여인>은 처참한 대우를 받았다. 재난 수준이었다. 나만 그 영화를 좋아했다. 필라델피아의 빈민지구에서 상영되었을 때, 나는 서너 번 정도 봤다. 다른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포드의 예술가적 수명의 이유? 그것은 그가 그저 훌륭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의 수명은 그의 재능과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예술가는 병이나 사적 곤경을 넘어서는 재능을 발휘한다. 존 포드가 그런 사람이었다. 해리 캐리 Harry Carey 허문영_ 포드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에서 당신은 “포드적 영웅은 도착하고, 바로잡고, 떠나간다. 이 모든 것은 해리 캐리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영웅상이 작가들이나 감독들이 아니라 해리 캐리라는 한 배우로부터 유래했다는 뜻인가. 또 이런 영웅상은 포드 영화에만 고유한 것인가. 보통의 영화 교과서는 그런 영웅상이 대부분의 서부극에 공통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태그 갤러거_ 그 표현에서 해리 캐리는 배우 혹은 스크린 캐릭터를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포드 연출-캐리 주연작은 3편만 남아있다), 그는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고, 존 웨인도 같은 방식으로 연기했다. 몇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모델로서이다. 이것은 우선 연기와 스크린 페르소나에 관계한다. 바로 그의 느긋함(Laid-back)이다. 그는 자신을 관객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존 웨인도 이것을 복제했다. 다른 하나는 캐릭터로서이다. 바로 선한 악인(good badman)이다. 존 웨인도 < 역마차 >< 3인의 대부 > 등에서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마지막은 포드적 영웅으로서이다. 그는 가족을 재결합시키고 마지막엔 떠나간다.(<스트레이트 슈팅>의 원래 결말은 그가 마지막에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그것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도착하고 / 바로잡고 / 떠나간다’는 물론 모든 포드 영화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많은 변주가 있다. < 프리스트 판사 >에서는 도착하지 않고 떠나가지 않는다. < 황색 리본 >에서도 도착하지 않는다. 떠나가지만 돌아온다. 그런 영웅상이 서부극에 공통적이지 않느냐고?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모든 서부극 중의 1% 정도만 보았을 것이다. 아마 더 적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서부극을 떠올릴 수 있을까. < 셰인 >? 혹은 세르지오 레오네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극?(하지만 그들은 존 포드를 모방하지 않았는가). 하워드 혹스의 어떤 서부극이 이런 패턴일까? 혹은 프리츠 랑, 자크 투르뇌르, 새뮤얼 풀러? 어쩌면 < 하이 눈 >? 1970년대 이후 서부극의 공통 요소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의 서부극에도 적용될까? 허문영_ 당신은 오늘의 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가. 동시대 영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것이 비평가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가. 태그 갤러거_ 오늘의 영화에 대한 내 무관심이 내 잘못인지 영화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오늘의 영화를 다루는 비평가나 프로그래머는 아니다. 나는 오늘의 영화에서 구도, 편집, 블로킹의 혁신성과 정교함을 찾지 못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깊은 휴머니즘을 찾지 못한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영화들을 떠올려본다면, 오늘날에도 1년에 만들어지는 500편의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오직 2, 3편 정도만이 흥미로울 것이다. 거기에 얼마간의 외국영화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물론 나는 월드 시네마의 아주 일부만을 봐왔을 뿐이다.). 나는 옛 영화의 99%도 좋아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TV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 다운튼 애비 >(Downton Abbey), <라크 라이즈에서 캔들포드까지>(Lark Rise to Candleford) 등. 물론 이들은 ‘작가’ 영화는 아니다. 프로듀서, 대본작가, 배우들이 ‘작가’들이다. 흥미로운 미장센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와 이야기가 흥미롭다. 반면 오늘의 영화들은 지루하고 흥미로운 점을 찾기 힘들다. 너무 많은 미국 영화들이 진부하고 가식적이다. 너무 많은 외국 영화들이 느리고 무겁다. 50년 전 나는 수천 편의 영화를 즐거워하며 죽치고 앉아 보았다. 오늘에는 10분 혹은 15분이 지나면 멈춘다. 내가 망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내 잘못일까. 영화 잘못일까. 내 철학은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올바른(right)”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보편적 핵심은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덕(morality) 또한 제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도덕은 가장 큰 즐거움이다. 허문영_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페드로 코스타에는 깊은 관심을 보여왔고 그들에 관한 글을 썼다. 이런 예외적 관심의 이유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아벨 페라라도 포함시켜야 한다.(적어도 < 뉴 로즈 호텔 >(1998)까지는 그렇다.) 그들에게는 앞서 말한 내가 좋아하는 자질들이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말했지만, 비평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한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텅 빈 형용사 같은 것을 쓰지 않고서 말이다. 스타라우브와 코스타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왜 그들을 좋아하는지 말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것을 25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나는 스트라우브의 DVD와 자막을 만들어왔다.(비공식적인 작업이어서 그는 모른다. 판매용이 아니라 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의 작품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다니엘 위예와의 공동연출작보다는 덜 강렬하고 덜 정교하다. 얼굴들은 작고 표정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이것이 스트라우브-위예의 작품들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존 포드 영화의 두 쇼트가 내가 막스 오퓔스,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킹 비더,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칼 드레이어, 미조구치 겐지, 스트라우브 등의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오늘의 영화에서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고, 옛 영화의 1% 정도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 쇼트는 < 조용한 사나이 >에서 모린 오하라가 존 웨인에게서 꽃을 건네받는 장면이다. 다른 쇼트는 < 아파치 요새 >에서 워드 본드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들어오는 장면이다. 서울에서 인터뷰할 때, 한 영화잡지의 표지를 보았다. 한 젊은 한국 스타가 표지에 실렸는데, 그는 마치 자기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말한 두 쇼트에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눈빛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턴버그는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한 정신의 힘을 압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존 포드 John F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