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방탄소년단 라이브 화양연화 온 스테이지 : 에필로그 리마스터링
- 감독
- 조형석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RM, 진, 슈가, 제이홉, 지민, 뷔, 정국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중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 유운성, 「우정의 이미지들」,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이 글은 2024년 12월 중순에 쓰이고 있다. 12월 3일의 계엄령 선포 이후라는 뜻이다. 연말의 나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해의 영화들을 순위 매기거나 놓친 영화를 돌아보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간 이미지들을 되짚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는 했었던 것인데, 반대로 요즘의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생중계되는 담화와 현안 질의 영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와중에 마감 일자는 다가왔고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청탁을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기분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원래 준비했던 글의 주제와 지금의 내 상태가 관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꽤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준비하던 글을 버릴 수는 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준비했던 대로만 쓰면 왠지 그건 평정심이라기보다는 뻔뻔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 섞인 걱정을 하고, 그럼 준비했던 대로만 쓰는 건 뭔가 아니다 싶고, 굳이 올해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사례를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와 관련된 옛날 얘기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단일한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비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유의미한 의견으로 정교히 언어화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는 각자의 개별적 경험이 스며들며 그 분리 불가능한 총합은 또 하나의 경험이 되어 각자의 마음에 남기 마련이다. 김대환 의 장편 데뷔작 < 초행 >(2017)이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개봉하게 되면 꼭 보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어떤 내용인지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편이 좋고 결말이 참 인상적이라는 말을 더해 주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스터나 시놉시스를 보건대 장르적이거나 플롯 운영에 있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는 아닌 것임이 확실할 텐데,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초행> 포스터와 스틸 <초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결말부는 2016년 가을 무렵부터 2017년 중순까지 이어졌던 광화문 촛불 집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7년 차 청년 커플을 따라가던 픽션의 세계에 돌연하게 쏟아지는 저 리얼리티의 막대함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단순히 허구와 현실의 구별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개념적 차원 그 이상의 가치로 빛난다고 느꼈는데,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가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KOBIS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내가 열심히 광화문 광장을 오가던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촬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이 영화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와 시간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망각하기 어려운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하고 보았지만, 그 물리적 간극을 상쇄시킬 정도로 <초행>의 끝이 주는 감흥은 생생하면서도 생경했다. <초행>에 기입된 광화문 광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한편으로 생경했던 이유는, 영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다는 모종의 관습을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거의 생중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은 환기되는 이상야릇함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작품 내에서 세계를 뒤집어놓는 급속한 반전처럼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난히 이어지던 이 커플이 광장으로 향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상황은, 이야기와 멀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끈끈히 달라붙으며 세계를 입체화하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영은 그 역할을 맡은 조현철 과 김새벽 으로 존재를 전환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삼척, 인천과 특별한 위계서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나의 사적인 경험, 역사적 현실, 영화적 허구가 한 데 섞여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이 기묘한 감각을 여전히 잊기 힘들다. <태풍클럽> 일본어 포스터(일부)와 국내 개봉 포스터 그 ‘너무 이른’ 경험으로부터 7년이 지나 2024년이 되었다. 올해는 정반대로 ‘너무 늦은’ 경험을 했다. 소마이 신지의 < 태풍클럽 >(1985)이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영상과 자막을 구했으며 이불에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한 영화 속의 거친 면모에 받았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태풍클럽>은 1985년 작이니 거의 3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객석이 의외로 꽉 차 있어 놀랐고, 영화가 끝난 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태풍클럽>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청춘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소마이 신지의 다른 영화들과 그의 연출 스타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차이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네필 꼰대처럼 우쭐대는 것은 아닐까? 상영관에 함께 있던 이들과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맞는 걸까?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 감상은 반드시 시차의 문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가 내게 익숙한지 생소한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풍클럽>은 개봉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며 몇몇 평자들에 의해 걸작으로 이야기되어 왔던 작품이었고, 이미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시네마테크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 감각을 수용한 상태에서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처음 본다 해도 기존의 맥락을 신경 쓰지 않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우려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의 유물을 목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2024 월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20위까지의 목록 중 재개봉 영화 목록 (출처: KOBIS / 회색 음영: 한국 최초 개봉 연도, 주황 음영: 당월 순위) 그 인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올해 개봉한 수많은 재개봉작들 때문이다. KOBIS를 참고해 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재개봉작들이 많이 출현했던 해다. 심지어 몇몇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영화와 경쟁해 당당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어쨌거나 이 통계는 한국의 사례이기에 동일한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며 이 흥행에 대한 인과론적 분석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니, 새로운 영화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쪽이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선택들이 일으키는 변화다. 영화 홍보에 있어 언제부터 ‘개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것이 빵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개봉박두’ 나 ‘대개봉’ 같은 한때의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우리네 관객이 마주하는 표현은 ‘개봉’ 대신 ‘공개’라는 심심한 표현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원 사격으로 부상한 OTT와 유튜브를 통과하며 우리는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이미지가 이전과 같은 환상성이나 신비로움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체감하다 못해 익숙해졌다. 내 손안의 영화관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속 릴스와 쇼츠로 맥락이 탈구된 수많은 밈(meme) 이미지들을 나의 취향에 맞는 알고리즘의 설계 아래 부지런히 스크롤링하며 갱신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감상 환경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구속적 방식의 영화 감상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20세기의 시대착오적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올해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해였다. 올해 나는 “무슨 무슨 영화가 재개봉한대”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아니, 그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재개봉이냐?” 가령 표의 4월부터 5월을 보면 < 남은 인생 10년 >(후지이 미치히토, 2022)이 1위를 차지했는데, 이 영화는 고작 1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차라리 재개봉 대신 재상영 내지 스크리닝이라는 심심하고 객관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재개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그 사이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재개봉’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영화가 놓인 위치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10년이 넘기는 했지만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같은 경우에도 ‘옛날 영화’라고 감각하지 않는 쪽인데, 이 영화도 ‘재개봉’을 해서 9월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20년이 넘었는데도 1등을 한다. 10월의 1등, 닉 카사베츠의 < 노트북 >(2004)이다. 이렇게 ‘재개봉’으로 소환되는 (너무 이른) 과거는 추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5년에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나카야마 미호의 출연작,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1995)가 작품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을 예정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로 자막 버전이라고 한다. 아! 그때 그 시절 …… 농담이다. 나는 극장에서 세로 자막으로 영화 본 기억이 없다. 좌우지간, 그런 점에서 올해의 극장은 추억의 공간이다. 다른 한편, 올해는 과거의 수많은 걸작들이 극장에 소환된 해다. 이들은 박스오피스권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시네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사례다. 앞서 말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오시마 나기사의 <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 < 우나기 >(1997), 다시 한 번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 큐어 >(1997), 무엇보다 90년대 한국에 뒤늦게 개봉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1986) 4K 리마스터 재개봉까지 …… 물론 이들의 방문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작’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영화가 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와 결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덩어리 내지 가치 있는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들에 익숙한 시네필들은 기꺼이 극장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라도 걸작이라는 은근한 압박에 둘러싸여 작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상) <전장의 크리스마스>, <복수는 나의 것> / (하) <큐어>, <희생> 그런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의 기획과 같은 대안적인 방식으로 상영되지 않고, 정식 개봉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최신 개봉작은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독립영화와 과거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이분법적 감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2016년에 처음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의 < 할복 >(1962)을 보고, 노인이 된 나카다이 다츠야와 이준익 감독의 대담 상영을 경험하며 그 시간의 아득함을 체감한 바가 있다. (적고 보니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예술영화 시장에는 큐레이팅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홍길동 특별전,’ ‘임꺽정 배우전,’ ‘장길산 기획전’ 같은 문구는 굳이 대안적 상영 공간을 찾지 않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딩 상품이 되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의 단편 < 알레고리 >(2024)와 레오 까락스의 단편 < 잇츠 낫 미 >(2024)가 동시대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주제의식과 레오 까락스라는 공유점으로 매끄럽게 묶여 개봉하는 상황은 시네필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자 선물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호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잇츠 낫 미> 중 그러니 이와 같은 유물의 소환을 다른 말로 ‘교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또 하나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다름 아닌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와 같은 작품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그것이다. 솔직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는 자신이 없지만, 일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의 흥행은 작품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항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대적인 요구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사회적이든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접했지만, 그 수많은 말들 속에는 왜인지 ‘나’의 시선이나 감상보다는 대체로 객관과 분석의 언어로 가득했다. 차이밍량은 “상업영화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예술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예술영화’들을 보고 나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했던 것 같다. <괴물>, <추락의 해부> 중 이제 영화관은 문자 그대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라는 무맥락적인 성격이 아니라, 지나간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혹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네마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속에서 오래된 영화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나’와 무관한 역사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나’의 그때 그 시절 향수에 젖어드는 정서적 힐링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일까? ‘재개봉’이라는 말로 너무 이르게, 혹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늦게 찾아온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비단 올해만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관에는 전통적 의미의 영화 대신 다른 영상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제목을 짚지 않더라도, 가령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스포츠 중계 등은 코로나 이후 극장 수입에 있어 효자 상품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러 가는가? 당연히 해당 작품이 다루는 대상의 팬들이 보러 간다. 그러니 팬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타겟팅 기획물 중 올해 가장 성과가 좋았던 작품은 김덕영 의 < 건국전쟁 >(2023)이다. KOBIS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11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한국에서 상영된 독립예술영화 분류 작품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이승만이라는 아이돌과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만들어낸 기념비적 성과라고 불러야 하겠다. 불현듯 “태극기 부대 속에 들어가서 <건국전쟁> 보기”라는 기획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볼 사람과 보지 않을 사람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품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이지선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내부를 그린 삽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19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를 상연하던 극장을 완전히 탈바꿈하며 바이로이트라는 이름의 극장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호화로운 장식이나 발코니석 같은 부수적 기물을 전부 떼어버리고, 바닥을 깊게 파서 오케스트라를 안쪽으로 은폐하여 관객들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관객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 미학적 파시즘의 설계는 이후 영화관의 메인 모델로 채택되었고, 그를 총애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파시즘과 짝꿍을 이루며 <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 1934)와 같은 걸작으로 당시 독일 인민들의 정신을 통합해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 플랫폼에 둘러싸인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작품을 보는 식이었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식 관람 환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얼 보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024년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영화관 모델의 역사를 떠올린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죽음, 무엇보다 우리와 각자의 문제. 혼란스러운 연말 시국 속에서 그 말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결산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올해로 3년째 하다 보니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작성하고 원고 독촉을 받으며 이 원고를 쓰는 일이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일이 되었다. 다시, 올해 본 영화 리스트를 뒤적거렸다. 상반기에 개봉한 영화들 중 사사로운 리스트에 넣을 만한 영화들은 대부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상영했으므로, 이번엔 주로 2017년 하반기 극장 개봉작과 이 시기에 본 영화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올해의 베스트 영화에 넣을 영화들은 되도록 제외하면서 사사로운 마음으로 나만의 2017년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올해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먼저 애니메이션 한 편,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 너의 이름은 >과 함께 흥행했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 목소리의 형태 >, 10대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넘어서서, 소통과 다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세련되고 유려하게 담아낸 영화는 별로 본 적이 없다. 10대는커녕 20대 이야기를 다룬 청춘영화조차 대부분 교훈과 감동을 버무려내기 위해 애쓰는 한국영화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 너머에 있는 영화다. 그리고 한국영화 두 편, 정윤석 감독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와 김대환 감독의 두 번째 극영화 < 초행 >, 두 감독의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을 모두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본인들은 손사래를 치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할지 모르지만 이 두 감독은 한국영화 미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제 3년째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면서 처음으로 넣은 할리우드 영화 차례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의 최근 경향의 중심에는 마블과 DC의 세계 속에서 존재론적 고민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겪고 있는 히어로들이 있다. 이 와중에 험상궂은 얼굴로 못된 인간들을 몽땅 몰아내고 유인원의 세계를 탄생시킨 <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은 올해 유일하게 마음을 움직인 할리우드 영화였다. 사실 보고나서야 알았다. 이 영화의 감독이 < 렛미인 >의 미국 버전을 연출한 맷 리브스였다는 걸, 빤한 영화가 좋을 땐 항상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감독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음은 올해 영화제 상영작 2편, 우선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오드리우스 스토니스 감독의 < 여자와 빙하 >, 최근 몇 년간 본 최고의 시적 다큐멘터리였다. 구 소비에트 연방과 주변 나라의 감독들은 몽타쥬의 본질과 그것이 가지는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드리우스 스토니스 감독은 리투아니아 출신이다. 그리고 올해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데뷔작 중 한 편인 < 신의 나라 >, 영국 출신 프란시스 리 감독의 데뷔작으로 요크셔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국판 < 브로크백 마운틴 >으로 불린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올해 최고의 영국영화 중 한 편임을 확신한다. 내년에 개봉하지 않는다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첫 TV 드라마 < 비밀의 숲 >.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에는 TV 드라마를 넣을 수 있다. TV 드라마의 형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매회 정보의 양을 효과적으로 조절한다. 그러면서 세련되게 메시지를 담아낸다. 이수연 작가의 이런 솜씨는 좀처럼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스릴러 영화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영화가 벤치마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017년 하반기 개봉작 3편. 2012년 < 신의 소녀들 >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2016년 영화 < 엘리자의 내일 >,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차가운 리얼리즘을 표방한 동유럽 영화는 언제든 보고 싶다. 이제 그의 영화는 어떤 경지에 올라간 것 같다. 거기서 내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국의 린 램지(< 케빈에 대하여 >), 미국의 켈리 리처드(<어떤 여인들>), 프랑스의 미아 한센-러브(< 다가오는 것들 >)와 함께 항상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또 한 명의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춘 로드 무비 <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 >. 유려하게 움직이면서 포착해내는 청춘의 빛과 그들의 감정은 황홀하다. 이런 클로즈업이라면 어떻게 쓰든 얼마나 쓰든 괜찮다. 그리고 올해 리스트의 마지막 영화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와 데이빗 맥켄지 감독의 < 로스트 인 더스트 >(2016)의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의 본격적인 첫 연출작 < 윈드 리버 >다. 볼 날을 기대했던 몇 안 되는 영화였다. 누군가는 실망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올해 선택한 10편의 영화 중 쓰고 싶은 유일한 영화였다. 테일러 쉐리던 테일러 쉐리던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관심 있게 지켜봐 온 미국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다. 그는 현재까지 쓴 3편의 영화를 통해 기존의 장르 영화에서 보던 흔한 이야기를 다층적인 콘텍스트에 얹어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원래 배우였다. 2005년 <베로니카 마스>를 시작으로 주로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2008년부터 2010년까지는 <썬즈 오브 아나키>에 출연해 부서장 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러다가 2011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저예산 호러 영화 <고통 Vile>을 연출했다. 이 무렵 주로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2012년 즈음에 시나리오 상태였던 < 시카리오 >와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영화 판권 계약을 마쳤으니 말이다. 이렇게 그는 40살이 넘어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길을 열어젖혔다. 그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진 첫 결과물은 드니 빌뇌브가 연출을 맡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였다. 사실 드니 빌뇌브는 지금이야 가장 주목받는 할리우드 영화감독이지만, 원래 캐나다에서 주로 활동했던 감독이다. 첫 출세작은 8번째 영화 < 그을린 사랑 >(2010)이었다. 거의 한국 드라마 수준에 육박하는 감동의 막장 이야기를 힘 있게 연출하여 특히 한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2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지만 그는 여전히 캐나다 바깥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2013년이 끝나갈 무렵 테일러 쉐리던의 시나리오 <시카리오>를 만났다. 그의 11번째 연출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2015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호평을 받았다. 처음으로 영화화된 쉐리던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감독과 작가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드니 빌뇌브는 이후 < 컨택트 >(2016), <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를 연달아 연출하며 할리우드에서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 테일러 쉐리던은 <시카리오> 이후 데이빗 메킨지가 연출을 맡은 <로스트 인 더스트>(2016)가 공개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는 2016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었고, 아카데미영화상 및 많은 영화상의 시나리오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2016년 자신이 각본을 쓴 세 번째 작품이자, 연출을 맡은 두 번째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 윈드 리버 >를 완성했다. 2017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고, 곧바로 칸영화제로 직행하여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미국 변방 3부작 테일러 쉐리던은 스스로가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 < 로스트 인 더스트 > < 윈드 리버 >를 미국 변방 3부작(frontier trilogy)으로 부른다. 세 영화의 배경이 모두 현대 미국의 변방이기 때문이다. 이 3부작은 특정한 공간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이 세 편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은 영화 속 공간이다. 변방은 정부의 사법권이 잘 닿지 않기 때문에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세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범죄는 이런 공간적 배경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된다. 여기서 이 삼부작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주’와 ‘정착’이다. 변방은 이주가 용이하고 정착이 어렵다. 그러므로 이미 변방에 정착한 사람들의 삶은 불안하다.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이주민은 잠시 머물렀다 어제든 떠날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삶 역시 부유한다. 불안한 삶은 폭력을 내재한다. 폭력으로 나를, 내 삶을, 내 가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주민과 정착민 사이에는 긴장이 만들어지고, 그 긴장이 깨지면 폭력이, 그리고 그 폭력은 다시 범죄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 3부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폭력’이 된다. 3부작에는 인간에 내재된 폭력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삶은 얼마나 폭력에 발목이 잡혀있는지가 그려진다. 테일러 셰리던은 자신의 영화 속 폭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종은 폭력적이고, 폭력은 말 그대로 삶의 접착제다. 그러나 폭력을 사악하게 사용하는 유일한 종은 인간뿐이다.” 그는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현대 미국의 변방의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이주와 정착, 폭력을 주제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섬뜩한 스릴러 영화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배경으로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과 그로 인한 폭력의 이면을 차갑게 담아낸다. 불명확한 선과 악의 경계에서 FBI 요원인 여주인공은 원칙을 지키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정부가 개입하여 얻어낸 마약과의 전쟁의 결과물은 다시 전직 마약 두목에게 돌아간다. 선악이 불분명해진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미국의 시스템은 영화 속에서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다. 한편, 멜랑콜리한 감성이 느껴지는 서부극의 느낌이 물씬 나는 범죄 스릴러 영화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배경은 몰락해버린 미국 서부 텍사스이다. 영화는 가족을 위해 은행을 터는 형제 강도와 이를 쫓는 텍사스 두 경찰을 통해 자본주의가 파괴해버린, 그래서 이제는 미국의 변방으로 몰락한 서부의 모습을 노란빛의 화면에 담아낸다. 웨스턴 장르를 통해 찬양받으며, 무자비한 폭력으로 미국 서부를 개척했던 카우보이 모자를 쓴 미국 백인 남성들은 이 영화에 와서 몰락한 채 퇴장한다. 범죄를 처단하고 정의를 부르짖었던 서부극의 총잡이들은 이제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은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로스트 인 더스트> 앞에는 신서부극(네오 웨스턴)이라는 단어가 붙곤 한다. < 윈드 리버 > 그리고 쉐리던이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또 다른 미국의 변방,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미국 와이오밍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 윈드 리버다. 미국 정부의 인종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쉐리던은 이곳을 잘 안다. 한 때 오랫동안 이런 보호구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의 연출을 다른 감독에게 맡기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윈드 리버는 겨울이 되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눈 폭풍이 며칠씩 몰아치는, 끝없는 백색 설원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 광활한 공간에서 인간은 한낱 점과 같다. 그 새하얀 눈밭에서 처참한 모습을 한 한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FBI의 관할이다. 지역 사법권의 부재는 외부에서 초짜 여성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을 윈드 리버로 불러들이고, 여기에 인디언 경찰과 야생동물 헌터 코리(제레미 레너)가 합세한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디언 보호 구역의 삶은 그 곳의 풍경만큼 스산하고 황폐하다. 죽은 채 발견된 소녀는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백인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광활한 자연의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범죄를 저지른 이 백인들은 결국 인디언들에게 유일하게 빼앗아 가지 못한 그 백색의 자연 속에서 죽어간다. < 윈드 리버 >는 이렇게 오래전 인디언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했고, 이제 한 인디언 소녀를 잔인하게 폭행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백인들의 범죄를 정부의 사법권으로 처벌하지 않고, 인디언 아내를 둔 코리를 통한 복수로 마무리한다. 따라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가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언의 아내를 둔 백인 남성(코리)과 백인 여성(제인)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쉐리던이 가지고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의 거주 경험과 인디언 커뮤니티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영화의 끝에 등장하는 자막을 생각하면, 코리는 분명 쉐리던의 분신이므로, 이 영화를 통해 정말 쉐리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폭력으로 밖에 지킬 수 없는 인디언 보호 구역의 처참한 현실에 대한 것이다. 쉐리던은 <윈드 리버>에 대한 인터뷰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의 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토리텔러로서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옆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세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이 명백하게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점은, 질문함으로써 우리 세계를 비춰보도록 하고, 결국 관객이 질문을 하게 함으로써 어떤 변화를 끌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쉐리던이 각본을 쓴 이전 두 작품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에는 이런 하나의 사회적 의미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쉐리던의 세계에선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캐릭터를 찾기가 어렵고, 각 인물에게는 많지 않지만 정확하고 필요한 대사가 딱 그만큼 주어진다. 그래서 한 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넘어갈 때 꽤 대담한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거의 필요 없다. 그렇게 인물들은 안정적인 감정의 인과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에선 공간 자체가 캐릭터화 되어 공간과 인물이 상호작용을 하고, 이를 통해 다른 의미를 끌어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윈드 리버라는 공간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사건과 이 사건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을 통해 인디언 보호구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치적 영화가 되지만, FBI 요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여성 초짜 법률 집행인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희생자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해 가고, 갖은 고초 속에서 결국 사건 해결에 성공하고 살아남은 과정을 담은 성장영화가 되거나, 야생동물 헌터 코리의 입장에서 보면 딸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가 딸을 잃은 친구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여 복수에 성공하는 범죄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딸을 잃은 아버지 마틴의 입장에서 보면 상실의 고통과 아픔을 견디는 과정을 담은 심리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삼부작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다른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주제는 바로 ‘아버지’, 자식을 지키는 데 실패한 아버지다. 적에게 무참하게 가족을 잃은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의 아버지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 가난 밖에 물려줄 수 없어 형과 함께 은행을 털기로 한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아버지 토비(크리스 파인), 살해된 딸과 마약으로 망가진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 윈드 리버 >의 두 아버지 코리(제레미 레너)와 마틴(길 버닝햄), 이 무능하고 실패한 아버지들은 잔인하게 복수하거나,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가만히 슬픔을 체화한다. 결국 쉐리던의 세계는 이 실패한 아버지들을 통해 더 커다란 은유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테일러 쉐리던이 만들어낸 세계 난 테일러 쉐리던이 미국 변방 삼부작을 통해 구축해낸 세계를 좋아한다. 폭력이 가득한 이 세계는 우울하고 슬프고 황폐하며 차갑다. 끝없는 절망도 섣부른 희망도 없다. 사랑 때문에, 부조리한 구조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살아가는, 그 흔한 로맨스 하나 없는 세계다. 영화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명백하게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세계, 그러나 우리는 이 견고해 보이는 세계조차. 천천히, 보이지 않게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변화는 결국 사람으로 비롯된다는 것도. 지난 수년간 암흑기를 겪었던 우리가 그랬듯, 이 삼부작의 각기 다른 공간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들 -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의 FBI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다시 마약 두목이 된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토비(크리스 파인)과 해밀턴(제프 브리지스), < 윈드 리버 >의 두 아버지 코리(제레미 레너)와 마틴(길 버닝햄)과 살아남은 FBI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 도 그럴 것이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화 되고 있는 < 시카리오 2: 솔다도 >(2018)와 케빈 코스트너의 출연을 전제로 각본과 연출을 맡은 TV 드라마 <옐로우 스톤>(2018)을 기다리는 나의 이유이다.
이상한 일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2016)(이하 <설리>)에는 단 한 명의 죽은 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리>는 2009년 1월 15일, 전 세계에 알려진 실화 사건에 기반한 일이다. 이 사건이 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55명을 태운 민항기가 사고로 인해 비상착수를 했는데, 승무원 한 명의 경미한 부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을 수 있었으나, 모두가 살아남게 된 사건. 미디어와 대중들은 그 기적적인 ‘생존’에 열광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반대로 그들 누구도 ‘죽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방점이 다르다. 어떻게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진부한 응답은 기장 설렌버거(설리)의 영웅담에 그치겠지만, 이스트우드는 자꾸만 현실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설렌버거의 실패를 상상한다. < 설리 >에 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전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죽음’을 기록하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지속된 그의 초기 서부극은 ‘죽은 자’가 귀환해 복수를 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영화였다(< 평원의 무법자High Plains Drifter >(1973) < 페일 라이더 >(1985)).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영화들은 아예 유령학에 가까웠다. 이 유령학의 핵심에는 현재로 침입해오는 과거의 망령들, 죄의식, 혹은 죽은 자를 증언하는 강신술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라졌다. 가령 < 미드나잇 가든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 >(1997)과 < 히어애프터 >(2010)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자들에 관한 영화이다. 산자와 사자의 공존, 죽은 자들은 현세를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말을 건네거나 복수를 감행한다. < 퍼펙트 월드 >(1994)나 <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4)는 등장인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화자들의 기억 혹은 편지에 관한 영화이다. < 미스틱 리버 >(2003)는 죽음이 예정된 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잔혹한 숙명적 세계에 관한 영화이며,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 그랜 토리노 >(2008)는 아예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 자신의 죽음으로 마감하는 ‘비가’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의 최고작들로 언급되는 < 용서받지 못한 자 >(1992)나 < 아버지의 깃발 >(2006)은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임과 동시에 ‘과거’의 망령 혹은 죄의식이 현재를 증언하거나 기억의 책무를 남기는 영화들이다. 그 과정에는 무수한 죽음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됐다. 2010년대, 그의 필모그라피는 흡사 바이오그라피 시네마에 가까웠다. 미국의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FBI의 에드가 후버를 그린 < 제이. 에드가 >(2011)나 이라크 전쟁에서 활동한 미군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에 관한 < 아메리칸 스나이퍼 >(2014) 그리고 이번 영화, 허드슨 강의 기적을 그린 < 설리 >까지. 특히 <제이. 에드가>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주인공의 ‘죽음의 순간’이 중요한 작품들이다. <제이. 에드가>에서 후버의 죽음은 무서운 권력을 창출하고 지배했던 역사적 인물의 비장함이 아니라, 자신의 침대 아래로 처박힌 한 인간의 늙고 추레한 살덩어리, 죽음 그 자체의 쓸쓸함에 관한 소묘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 전쟁이 만든 미국적인 영웅의 정당성과 딜레마, 그러나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그 이라크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살해당하고 마는 삶과 정치의 아이러니를 피력하는 작품이었다. U.S. Airways Flight 1549 [출처]huffingtonpost.com 그런데 < 설리 >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속 한 구조대원이 한 승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는 날입니다.” 아마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우연적이건 필연적이건(혹은 주인공이건 주변 인물이건) 그 어떤 죽음도 묘사되지 않은 건 이 영화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아흔을 바라보는 미국의 완전작가 이스트우드는 이미 알고 있다. 위대하고 두터워 보이는 삶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롭고 우발적인 방식으로(혹은 필연적인 숙명으로) 죽음의 순간들과 공존하는지 말이다. <설리>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 건 고작 208초의 순간이었다. 설렌버거 기장도 말하지 않는가. “42년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고작 208초의 시간이 나를 설명한다”고 말이다. 그 208초의 시간이 155명의 사람을 살렸고, 설렌버거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반대를 가정한다. 모두가 살아남았지만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던 그 208초의 운명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설렌버거의 비행기가 허드슨 강이 아니라 뉴욕의 마천루로 치달아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수한 죽음을 발생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 서사 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영화는 이내 그것이 주인공 설렌버거의 ‘악몽’임을 드러낸다. 미국의 영웅 설렌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순간, 자칫 죽음의 208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고통과 불확실성의 순간으로 영화 속 설렌버거는 자꾸만 소환된다. 조사위원회의 회의나 청문회에 불려 나가 그 시간을 진술하는 실제적 순간으로의 소환 외에도 그는 악몽과 환영, 기억의 방식으로 자꾸만 그 자리에 불려 나간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운 잠자리의 악몽으로, 꺼져있는 TV의 환각으로, 그리고 심지어 젊은 여성이 그의 볼에 감사의 키스를 한 직후에도 그는 창밖 뉴욕의 도심 풍경을 보며 자신의 비행기가 빌딩으로 충돌해 화염에 휩싸이는 환영을 보게 된다. 설렌버거는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돌아가는 지점은 사고의 순간, 그 208초의 시간 속이다. 죽음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으며, 명백한 자기 확신과 명예율로 살아가는 단독자들. 이런 캐릭터는 고전기 서부극의 남성 영웅들이었다. 6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에 의해 그러한 반영웅 캐릭터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 단일하고 명백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어떠한 내적 균열과 불안 혹은 자기모순에 찬 존재들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 용서받지 못한 자 >를 만들었을 때, 그 영화는 단순히 서부극의 90년대적 부활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 이미지(반영웅 아이콘)를 해체하는 영화였으며 서부의 신화를 탈신화하는 영화, 이상화된 영화적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영화였다. < 아버지의 깃발 >은 그 정점에 있는 영화였다. “전장을 모르는 자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지. 선과 악, 영웅과 악당,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2차 세계 대전 중 이오지마에서 벌어졌던 참상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노인은 후대의 젊은이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웅은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며, 그 영웅으로 호명된 존재 자체도 그 신화 속에서 희생되어 가는 존재들이었다. 영화 속 이오지마에 깃발을 꽂은 영웅으로 조작된 인디언 아이라와 위생병 닥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영웅의 거짓 선동 속에서 진짜 영웅들, 전장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자리, 즉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며 항변하곤 하였다. < 설리 > 역시 명백히, 이스트우드가 늘 묘사해왔던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궤적에 있는 영화이다. 155명의 승객이 단 24분 만에 전원 구조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미디어와 대중은 즉각적으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그를 대중사회의 영웅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 앞에 두려웠으며, 불안과 회의 속에서 자기 확신을 하지 못한 채로 ‘두려움의 반복강박’(꿈에서 같은 자리로 자꾸만 되돌아가는 악몽을 표현하는 프로이트 용어)에 시달린다.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어쩌면 위원회 결정에 의해 퇴직금과 연금을 박탈당하고 소유하고 있는 빚과 건물을 잃을지도 모르는 노후에 대해 걱정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155명 전원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과 책무감에 시달린다. <설리>(2016) <아버지의 깃발>(2007) 가장 심플하고 명백해 보이는 이스트우드의 이번 영화 < 설리 >는 의외로 그의 가장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조화된 걸작 <아버지의 깃발>과 같은 영화이다. 두 영화가 같다는 것은 서사적 구조와 테마, 그리고 ‘진짜’ 영웅들을 복권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설리>가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 아버지의 깃발 > 역시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노년의 닥(의무병 존 브레들리)의 악몽으로 시작된다. 꿈속에서 그는 2차 대전 중인 이오지마의 격전지에 홀로 서 있다. 고통에 찬 병사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작 그는 아무도 없는 전장에 홀로 서 있다. 그는 텅 빈 전장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에 눈물을 흘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죄의식과 두려움의 반복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은 이제 진짜 역사와 기억을 증언해야 한다. 이스트우드는 그 방법론으로서 ‘플래시백’을 사용한다(이스트우드의 주된 수사학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플래시백은 과거와 현재를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기능주의적 장치이지만, 이스트우드에게 플래시백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복권이자 진실의 구조이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자의 기억이자 증언이며 죄의식의 공유기법(서사적 시각화)이기도 하다. 먼저 < 아버지의 깃발 >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소급하는 영화이다. 3명의 영웅 중 닥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로부터 2차 대전 중 벌어진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증언과 기억에 따른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당시 이오지마의 영웅으로 위장된 아버지들이 결국 어떻게 국가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려졌는지, 그 과정에 그 아버지들이 어떠한 부대낌과 죄의식을 평생 강요당해야만 했는지를 기록한다. 파편적인 증언들은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진실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걸작에 반열에 오른 진짜 이유는 영웅 신화의 진실을 폭로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순간 이후에 맞이하게 될 ‘애도와 상기’의 시간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라는 거짓된 깃발 퍼포먼스의 강요에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전장에서 내가 한 건, 내가 본 건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난 영웅이 아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다. 영화는 후반부 영웅으로 호명됐으나, 그 거짓 신화에 홀로 저항하고 거부했던 닥의 죽음을 묘사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닥의 아들은 “세상에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릴 위해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한 방식”으로서, 즉 애도의 방식으로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의 맨 마지막을 닥의 소망이미지로 대신한다. 잘려나간 시체들의 무덤이 아니라, 혹은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전장의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로운 해변에서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으로 일군의 병사들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닥의 시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과 함께 오는 진짜 이오지마의 영웅들(평범한 군인들, 영웅 신화에 이용당한 병사들), 그리고 참혹한 전장의 풍경들. < 설리 >는 테마와 구조의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영화이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며, 국가나 조직의 필요에 의해 영웅으로 조작된 사기극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로부터 손실의 책임을 강요당하는 일개 항공사 기장에 관한 영화이다. 국가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책무에 관한 영화이고, 그 과정의 완결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고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을 이용해 영웅으로 올라서는 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통해 소소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수주의자로 낙인찍힌 이스트우드의 세계는 종종 남성 마초이즘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적 이상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지점이 내재하지만, 그러나 우파 파시스트로 매도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시선과 태도가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적 정치 프레임에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평가한다면 우파는커녕 좌파 극단주의자로 매도될지도 모른다. 전쟁의 광기와 불모함, 국가 권력의 폭력과 기만, 정치적 조작을 폭로하는 영화들, 기계적 시스템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영화들, 심지어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들이지 않은가) < 설리 >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수행해내는 소시민들의 일에 대한 책무와 공동체적 연대로부터 진짜 영웅성을 발견해내려는 의지의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설리는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나’라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승무원들, 승객들, 구조대원들)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무와 연대에 대해 언급하고, 엔딩 크레디트에 진짜 설렌버거를 통해 “155는 그저 생존자의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집합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 설리 >는 죽음을 통해 진실을 피력했던 이스트우드가 이번엔 죽음에 거의 가 닿을 뻔했던 삶의 순간으로부터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삶과 희망은 이스트우드에겐 낯선 화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과 절망의 반대극이라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여전히 이 영화에서도 그는 젊은이들의 치기가 아니라 삶을 오래 살아낸 노장의 원숙함과 혜안이 사건을 해결하고, 냉정하고 수학적인 기계적 시스템의 세계(비행 시뮬레이션)가 아니라 ‘휴먼 팩터’라 말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선택을 신뢰한다.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이스트우드와 톰 행크스에게 트럼프 선거기간,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작업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했다. 이스트우드는 잘 알려진 대로 공화당원으로서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톰 행크스는 민주당 지지자였다. 이스트우드는 자기가 겪어온 역사적 시기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의 변화과정을 언급하며, 적어도 그는 사람에 따라 다른 정치적 의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이에 기자가, 타인의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리버럴리스트’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수긍했다. - 사족(그러나 < 설리 >가 올해의 베스트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 이스트우드는 < 설리 >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2001년 9.11의 트라우마를 상기한다. 민항기가 뉴욕의 빌딩과 충돌하며 빚어진 참상의 이미지들은 이 영화 속에서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재현한다. 두 재난은 모두 뉴욕이 주인공이었으며, 하나는 수천 명의 삶을 앗아간 재앙으로, 다른 하나는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삶의 미래로 이어졌다. 허드슨 강으로 비상착수하기 이전에 상황들, 설렌버거의 악몽과 환상, 그리고 실제 비상착수 당시 민항기가 강으로 저공 비행하는 순간의 위기를 직감한 불안한 목격자들의 시선 쇼트들은 명백히 9.11의 트라우마이자, 208초가 갈라놓은 죽음의 잠재적 이미지들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고기에 간신히 탑승했던 한 청년의 말처럼 ‘오늘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불과 25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1,200명의 구조자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몰려왔다. 아침 출근 선박들과 전문 구조요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객을 가장 먼저 탈출시킨 승무원들의 행동들. 실제로 설렌버거는 승객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침몰해가는 항공기 내부를 두 번이나 들어가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승객들을 살펴봤으며, 제일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이 순간 우리에게 < 설리 >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와 겹쳐지고, 슬픔과 회한의 시간으로 내몰린다. 모두가 살아나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300여 명의 삶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의 출근 선박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변 어선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 그나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지만, 그냥 거기서 멈춰버렸다. 제일 먼저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들, 납득 불가능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건과 시간이 아직 그곳에 침몰해있다. 위정자들의 음모와 태만, 폭력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이스트우드는 모두가 살아남은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혹시 발생할지도 몰랐을 참사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를 자꾸 상기하며 현재의 희망에 대해 역설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시대의 알레고리)에 따라 그 자리에서 수장당한 300여 명의 죽음에 대한 무력한 방관자로서의 트라우마, 죄의식과 분노.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이스트우드와 반대로 죽음 속에서 가상의 구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시작된 ‘희망의 고래(아이들을 제 몸에 실어 날아오는 고래 일러스트)’가 SNS에서 공유되고, 촛불을 든 광화문에서 가상의 증강현실로 등장하고, 다시금 어느 건축가에 의해 실제 ‘고래와 아이들’ 풍선으로 등장하기까지, 우리는 그저 가상의 상상물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위한하고 기억하고 애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트우드는 < 제이. 에드가 >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과 좌파 이념에 대해 폭력적인 척결을 자행했던 에드가 후버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개개인이 소중하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삶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도덕이 무너지면 선한 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악한 자는 번창한다.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절대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