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 감독
- 매트 클라크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바나드 휴이스, 마틴 쉰, 윌리암 힉키, 휴 오코너
한국사회에는 유난히 중년 남자들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이들을 달래는 분위기가 있다. 캠페인 같은 이 구호는 가장 사적인 집단, 집안에서 시작된다. 결혼 전, 친정엄마는 ‘너가 박 서방한테 잘해야 한다, 남자는 인정과 칭찬을 먹고 산다’고 조언했다. 심심치 않게는 ‘아들 하나 키우는 기분’으로 살아야 가정이 평화롭다며 훈수를 두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들을 보면서 할머니들-현실은 황혼육아로 가장 고생하고 있음에도–은 ‘요즘 남자들 참 딱 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요즘 남자’라는 말은 다시 말해, 연장자 남성이 존중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창근( 김인문 )은 625전쟁 당시 어머니와 누이를 북에 남겨두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쪽으로 피난 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며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해 극도로 집착하지만,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는 그의 부고도 몰랐을 만큼 관계가 온전치 않다. 피를 쏟아내며 괴로워할 때도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 호정(문소리)뿐, 아내나 아들은 외면하며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한다. 창근의 가족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 모형은 대물림 되었다. 아들 영작( 황정민 )은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과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 있지만, 깊은 관계의 애인 연( 백정림 )이 있다. 그는 정부도 마다하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며 돈보다 정의를 위해 핏대를 세우지만, 집에서는 호정과 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공허한 몸으로 등을 돌릴 뿐이다. 영작이 “짐승 같은 시간은 관두고 제발 사람답게 자존심 좀 지켜 가면서 살자”고 유가족들에게 연설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붕괴된 가족 안에 무너진 가장이 있다. 영화<바람난 가족>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보면 가장의 역할은 물론, 어른으로서도 성숙하지 못하다. 창근을 요양원에서 모셔와 약주를 따르는 것도 호정이고, 창근이 피를 토하자 영작은 ‘호정아’를 외치며 자리를 피하기 바쁘다. 아이를 잃고 난 뒤에도 영작은 애인에게 쏟아내서 위로받으려 하지만, 호정은 산을 오르며 홀로 슬픔을 쏟아낸다. 우편집배원은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은 무능력한 가장으로 그려지고, 소통이 안 되는 지운( 봉태규 )의 부자지간은 남보다도 못하다. 이들은 나름대로 가장의 역할을 해내려고 애를 썼겠지만, 현실은 권위 있는 존경받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다. 연이는 대놓고 “남자들은 다 미성숙해. 그냥 다 애’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상습적으로 절도를 일삼는 가정주부를 변호하던 영작에게 판사는 묻는다. “가정은 어떤가요?” 영작은 “남편은 회계사인데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그러나 절도범 주부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 대조 속에서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정은 완벽하게 ‘정상적’일 것이라는 우리들의 편견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가족을 만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영화 내내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가 내 처남이야’라는 우편집배원의 외침은 처절하고도 처량하게 들린다. 챔피언도 아닌, 5위지만. 그리고 내가 아닌 처남이지만. 인정받지 못한 가부장은 그렇게 처남이라도 붙들고 체면을 세워야 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족의 권력자가 된 역사는 복잡하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 부계 중심의 가족은 조금씩 사라지고 가족의 형태나 개념 역시 이전보다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 전통적 가족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한 뿌리, 핏줄에 집착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속도를 낼 때가 있다. 그 속도에 밀려 가족 간의 애정은 바싹 메마르고 빈껍데기만 남아 단 한 번의 자극에도 바스락 부서진다. “엄마 난 입양된 거 몰랐을 때가 더 좋았던 거 같애. 왜 얘기해 줬어?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난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수인(장준영)이는 영작과 호정이가 입양한 아들로 혈연으로 맺어진 전형적인 의미의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수인은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데 여기서 엄마는 호정을 말하는 건지, 수인을 낳은 엄마를 말하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인은 가슴으로 낳은 엄마를 따라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를 잡는데, 무엇이 진짜 가족인지 헤매고 있는 다른 남자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겨우 욱여넣은 가장의 자리와 관계를 중심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서 휘청거리던 영작과 호정은 결국 수인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만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건가. 처음에는 모든 잘못을 다 네 아버지한테 뒤집어씌웠지. 나는 요즘에야 진짜 내가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그렇지 않으면 그게 사는 게 아니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거같이 살아야지. 나는 이런 내가 좋아.” 영화 내내 가족들은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시선은 서로 엇갈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데, 창근의 장례식 이후 한 이불에 누워 얼굴을 마주한다. 이 한 컷으로 이들이 한때는 좋았던 가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병한( 윤여정 )은 15년 만에 섹스를 하고 처음으로 오르가즘도 느끼며 산다고 고백하며 40년간 남보다도 못했던 가족을 벗어나 이제 진짜 삶을 살겠다 선언한다. 그리고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솔직하게 살자고 다독인다. 2003년 작 < 바람난 가족 >( 임상수 , 2003)은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모두 바람이 난다는 다소 자극적인 내용을 담으며, <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8), < 눈물 >(2000)을 잇는 임상수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미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여자들의 솔직한 성 담론으로 한 차례 센세이셔널을 일으켰던 만큼 <바람난 가족> 역시 또 한 번 여자들의 ‘발칙한’ 영화라 홍보되었다.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가볍게 배우들의 몸 감상에 나섰던 관객들이 어쩐지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고, 예상대로 호불호가 분명히 나뉘었다. 영화 속 가족들의 모습이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을 담고 있었고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가족 콤플렉스를 미화 없이 직설적으로 늘어 논 까닭일 것이다. 가장들이 기가 죽어서 <바람난 가족>처럼 불량 가족이 되는 건 아닐 터. 결국은 서로가 완벽한 타인임을 인정하고 병한의 말처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야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의미가 없는 낭만일지라도 결국은 사랑이 기본이고 답이다. 뒷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쭈뼛대던 영작을 아웃시켰던 호정은 아마도 지금쯤 15살 아이를 키우며 기가 센 가장이 되어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들고 있을 것 같다.
“물속에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여요” 사랑에 관한 가장 시적인 찬가 < 라탈랑트 >(장 비고, 1934)에서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조롱하며 비웃는다. 영화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라탈랑트>의 바로 이 장면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수를 하는 남편에게 물속에서 눈을 떠보라고 말하는 아내, 그런 아내를 놀리는 남편의 장면이 이어질 때 화면 안으로 또 다른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라탈랑트>를 연출하던 29살의 청년 장 비고였다. 장 비고의 유일한 딸이었던 루스 비고는 < 라탈랑트 >의 현장 촬영분을 바라보며 여전히 젊은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애잔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장면들에 대해 그녀는 애절한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장 비고 감독 프랑스의 여성 감독 레일라 페로 레비의 다큐멘터리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우리에게 시적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장 비고와 그의 딸 루스 비고에 관한 영화이다. 1905년에 태어난 장 비고는 1934년, 고작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총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 기존 예술가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매혹과 실험으로 다양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그 시기, 장 비고는 보리스 카우프만이라는 예술적 동지(지가 베르토프의 동생. 장 비고 영화 전체를 촬영했으며, 이후에는 할리우드에서 오토 프레밍거 등과 작업했다. 시드니 루멧의 < 12명의 성난 사람들 >, 엘리아 카잔의 < 워터 프론트 >의 촬영 감독이다)를 만나 영화를 시작했다. 그의 영화들에는 국가와 체제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저항, 세상을 시적인 서정과 추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예술가의 영감, 그리고 이십 대 청년의 맹목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매혹이 담겨 있었다. 니스라는 휴양도시에 관한 계급적이고 실험주의적 몽타주라 할 수 있는 < 니스에 관하여 >, 물에 대한 장 비고 특유의 매혹을 잘 드러내는 <수영왕 타리스>, 린제이 앤더슨과 고다르, 트뤼포의 오마주를 이끌어냈던 학생 반란에 관한 영화 < 품행 제로 >,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계급적 현실을 넘나드는 사랑에 관한 찬가 < 라탈랑트 >까지. 장 비고의 영화적 필모그라피는 길지는 않았지만 강렬했다. '루스, 아빠, 엄마'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바로 그 영화사의 전설이 된 장 비고를 아버지로 둔 루스 비고의 기억과 고백에 관한 영화이며 내밀한 가족사에 대한 진술이다. 루스 비고는 아버지를 세 살 때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병약했던 엄마 역시 사망한다(장 비고와 그의 아내는 결핵에 시달렸고, 이들은 각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렀던 요양원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어 외조부의 손에 맡겨지지만 그 역시 금방 사망한다. 루스 비고는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 등을 떠돌며 성장해야 했다. 부모를 잃을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렸으며,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거의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루스 비고는 아버지가 남긴 영화적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이후 영화평론가로 성장했으며, 여러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였다. ‘장 비고 상’ 수상위원회의 책임자이기도 한 그녀는 아버지로서의 장 비고와 영화사의 거장으로서의 장 비고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주요 장면들과 루스 비고가 살고 있는 집 내부의 여러 사적인 공간과 흔적들을 정교하게 연결하고 교차 편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루스의 집안은 흡사 수집가의 거대한 자료실처럼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인으로 80여 년을 살면서 쌓아온 삶의 흔적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장 비고에 관한 자료와 유품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루스 비고는 쌓아두었던 물건 중 가장 중요하게 간직했던 박스 하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레일라 페로 레비의 카메라와 그녀의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그 박스를 공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장 비고의 친필 시나리오를 비롯하여 각종 사진들, 여러 서한들, 비고의 영화에 실제로 쓰였던 영화적 소품들, 그리고 장 비고의 아버지였던 알머레이다에 관한 기록들. 알머레이다 비고는 프랑스의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유명한 아나키스트였으나 삼십 대 초반에 검거되어 바로 다음 날, 수감된 감옥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사건은 어린 장 비고에게 정치적, 경제적 트라우마로 남았고, 훗날 청년 장 비고의 영화적 세계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년기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장 비고의 삶은 고스란히 루스 비고에게도 이어졌다. 이 영화 속에서 루스 비고의 아들은 처음으로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어머니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내밀한 상처들을 직접 듣게 된다. 루스 비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프로그래머로 수십 년을 일 하면서도, 그녀는 장 비고에 대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진행하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루스가 어떠한 성장기를 거쳤는지, 그녀에게 장 비고에 관한 자료가 어느 정도 남겨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박스를 공개한 후, 루스는 아들과 함께 장 비고의 영화들을 함께 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영화감독 장 비고의 유산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루스 비고가 아버지의 흔적들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과정에 가까우며,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절한 순간이기도 하다. 루스는 장 비고의 영화 장면들 속에 감추어진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모습들을 발견해낸다. <라탈랑트>의 카페 신에 손님으로 앉아있는 어머니의 얼굴, 혹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사실, 또 단역으로 등장하는 피에로가 다름 아닌 장 비고임을 그녀는 알아채고 아들에게 알려준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들 혹은 다른 캐릭터들에 의해 얼굴이 거의 가려진 존재가 어머니임을 그녀는 알아본다. 아들이 루스에게 “어떻게 알았나요? 누군가 말해 줬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응답한다. “내가 딸이니까 알 수 있지”. 그리고 이어지는 루스 비고의 탄식,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그녀는 장 비고의 영화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 품행제로 > 이 영화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공적인 역사가 되어버린 영화사의 거장 장 비고와 그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딸 루스 비고의 사적인 애정과 기억에 관한 기록이다. 절묘하게 편집된 장 비고의 영화 속 장면들과 루스 비고의 현재의 모습들.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루스와 그녀의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의 긴 역사와 상처, 그리고 남겨진 유산들에 대해 이 작품은 매우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아 묘사하고, 오마주를 바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어지는 <품행제로>의 기숙사 반란신. 여전히 유효한 장 비고의 시대정신과 영화가 묘사할 수 있는 매혹과 열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ps. 이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후(2017년 2월), 루스 비고가 사망한다. 루스의 집안을 정리하던 아들은 비단 루스가 그에게 공개한 상자만이 아니라 집안 곳곳에 엄청나게 많은 자료들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 자료들은 현재 시네마테크 혹은 다른 영화자료실 등으로 어떻게 기증할 것인지를 논의되고 있다.
갓 제대하여 고향인 섬으로 돌아가던 도경은 배에서 가인을 만난다. 바다로 뛰어들 것처럼 위태로운 그녀를 잡아주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선배가 데리고 간 술집에서 가인을 만나고, 하룻밤을 보낸다. 그날 밤, 가인은 말한다. 나랑 결혼할래? 놀란 도경에게 농담이라고 말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상황은 뭔가 이상하다. 가인은 다시 결혼을 말하고, 놀라 그녀를 피하던 도경을 만나러 그의 집으로 간다. 도경이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자 얼마 뒤 가인은 도경의 아버지를 유혹해 섹스를 하고, 그의 집에 머무른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장르를 한국 분류에 따르자면 에로영화다. 일본에서는 핑크 영화라고 부르는 장르. 하지만 에로영화는 편의상의 분류일 뿐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드라마, 로맨스에 포함되고 세부 장르로 가면 에로틱 로맨스 정도로 부를 수 있다. 정사 장면을 어떻게 다루는가, 영화의 주제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차이가 지는 정도이고, 포르노와는 다른 장르다. < 아메리칸 파이 >나 < 포키스 > 등도 섹스 코미디 이전에 코미디인 것처럼. 일본은 AV가 나오기 전까지는 핑크 영화만 존재했다. 포르노가 금지된 한국은 70년대의 호스티스영화와 토속 에로영화에 이어 < 애마부인 > < 매춘 > < 뽕 > < 변강쇠 > 등이 있었고 비디오 시장이 커지면서 < 야시장 > < 젖소부인 바람났네 > <바람꽃> <자유학원> 등 비디오용 에로영화가 양산되었다가 시장 축소와 함께 몰락했다. 근래 IPTV 시장이 확장되면서 다시 에로영화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조잡한 에로영화들만 양산되는 것은 불만이다. 가끔 볼만한, 저예산이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진 에로영화들이 보이지만 극소수다. 아무리 옷을 벗고 나체로 노골적인 섹스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고 해도 끌리지가 않는다. 저예산의 한계를 지닌 에로영화에서 대단한 스펙터클이나 세트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양으로 본다면 < 투 문 정션 >이나 < 나인 하프 위크 > 정도의 영화가 가끔은 나와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에로영화를 찾아서, 수많은 에로영화를 보고 또 보다 멈추고는 하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도 분류상으로 에로영화에 속한다. 이 영화를 고른 대부분이 에로영화를 원하며 보았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감상을 적은 글에서, 에로영화인데 예술을 추구했다, 는 말이 보인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오락과 동시에 예술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많은 에로영화들이 오로지 보여주는 것에만 몰두하며 그 이상의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에로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만족을 준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장면은 당위성이 있고, 때로 절박하며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있다. 관객이 몰입하게 만든다. 가인을 연기하는 김화연은 아름답다. 세파에 지친 여인이 보여주는 허무와 고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녀의 얼굴과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물론 섹스 씬이 야한 것은 기본이고. 그것만이 아니다. 단지 배우가 야하고 아름답고, 섹스 장면이 흥분되는 것뿐이라면 비교적 세련되게 만든 에로영화일 뿐이다. < 사랑받지 못한 여자 >에는 그 이상이 있다. 가인은 묘한 여자다. 술집에서 적어도 10년은 굴러먹은 여자가 멀리 섬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일종의 전락이다. 가인의 미모를 본다면, 아마도 그녀의 어떤 태도나 극적인 상황이 그녀를 이곳까지 끌어내렸을 것이다. 그녀는 늘 말한다. 죽는 것보다 혼자인 것이 더 싫고 무섭다고.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은, 좋아한다고 믿는 도경을 만나자 가인은 집착한다. 같이 있자고, 결혼하자고 무조건 들이댄다. 세간의 상식 같은 것은 애초에 무시하고 가인은 자신의 의지만을 관철시켜 간다. 도경의 아버지와 섹스하고, 함께 살고 그러고도 다시 도경을 유혹한다.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런 것뿐이라고. 그녀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첫 장면에서 가인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보고 있다 바다에 날려버린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낳았고,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녀는 아이를 잃은 후 상실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일까? 어쩌면 모든 것은 망상이 아닐까. 아이를 낳고 잃은 것도, 상실감과 외로움도 모두 그녀의 파괴적인 망상에 비롯된 것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오히려 가인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행동이 설명 가능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일 경우에도 설명은 가능해진다는 것이 난점이다. 애초에 가인의 행동은 비상식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그녀의 이유는 그 무엇이든 가능하고, 그렇기에 그녀의 정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모호하다.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는 영화 속에 보이는, 두 남자에게 결국 사랑받지 못하는 가인의 모습이다. 또한 사랑받지 못하여 자기파괴에 탐닉하는 그녀의 과거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받지 못한 여자>를 일종의 판타지이자 스릴러로 위치하게 한다. 정말로 아이 때문이었다면 가인은 전형적인 신파의 주인공이다. 강박적인 망상에 휘말린 위험한 여자였다면 또한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갔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인은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가련한 여인일 뿐이다. 섹스의 순간에만은 너무나도 열정적이며 쾌락의 지점이 무엇인지 아는 위험한 여인인 동시에.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는 가인의 영화다. 김화연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녀가 매혹적이지 않다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를 보는 순간에 위험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경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상하고 위험한 여자. 가인에게는 그런 매혹이 있다. 흐트러진 헤어스타일과 때로 마른 입술까지도 남자를 끌어당긴다. 게에게 물린 도경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주는 가인의 얼굴은 아름답고 한없이 야하다. 결혼은 아니지만, 그녀가 끌어당긴다면 아마 바닥까지 그 순간에는 내려갈 것 같다.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마지막까지 그녀를 궁금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성공적이다. 저예산의 에로영화는 한계가 많다. 메이저에서 만드는 영화들과는 애초에 출발 지점부터가 다르다. 그런 점에서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는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에로영화를 보는 관객의 목적에 충실한 동시에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가인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그녀로 인해 굴절되어 가는 도경과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김화연이라는 배우의 탁월한 연기를 끌어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다. 노진수 감독의 에로영화를 계속 보고 싶다. 그가 만들어내는 더욱 다양한 인간의 성벽 그리고 섹스와 죽음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