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안녕
- 감독
- 고영남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김진규, 윤정희, 김혜정, 도금봉, 최남현, 한은진, 최명수, 성소민, 안인숙, 최삼, 이승현, 지계순, 석귀녀, 문미봉, 김경란, 최일, 최준희, 임성호, 윤신옥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산업이자 예술이며, 오락이다. 그것은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상당한 자본과 기술,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특히 한 해에 200편을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그리하여 적어도 편수로만 놓고 따지자면 세계 5대 영화산업국에 들었다는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일선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만들었던 감독만큼이나 한 해에 20-30편의 영화를 꾸준히 제작해 낸 제작자들 역시 영화산업에서 중요한 주체들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토록 많은 한국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은 정부가 소수의 독과점 기업체를 메이저기업화하고자 만들어낸 대량생산 유도 정책 때문이었다. 이 회사들은 대개 20개 남짓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 중 신필름, 세기상사, 합동영화사, 태창영화사, 연방영화사, 극동영화사 등이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던 소위 메이저 제작사에 속한다. 이 영화사들에는 대개 회사를 창립하고 굳건하게 운영했던 굴지의 제작자들이 대표로 있기 마련인데 연방영화사의 주동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주동진 은 1927년 2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한국시청각 연구원 연출과장을 지냈으며, 한양대학교에 영화과가 신설되자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의 모체인 한양재단이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관여하며 한양영화사의 전무로 재직했다. 당시 전무후무한 5억원이라는 자본금으로 설립된 한양영화사는 <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 < 아편전쟁 >, < 손오공 > 등 대작을 중심으로, < 혈맥 >, < 굴비 > 등을 제작한 굴지의 영화사였다. 1963년 한양영화사로부터 독립한 주동진 은 동서의 돈을 빌어 <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를 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명제작을 한 것으로 현재 KMDb에는 동원영화사의 작품으로, 주동진은 기획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후 다시 대명으로 제작한 < 아빠 안녕 >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연방영화사를 설립하게 된다. 1965년 연방영화사 설립한 해 그는 기대치 않은 흥행작을 통해 영화계의 행운아로 등극한다. 바로 김기풍 감독의 < 여자가 더 좋아 >였다. 서영춘 이 주연한 이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는 불과 8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저예산영화였으나 서울에서만 18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 그 해 흥행랭킹 2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여 연방영화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나아가 1966년에는 이광수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유정 >이 관객수 30만명이 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성춘향 > 이후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짧은 시간 내에 한국영화 제작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유정>의 신인 여배우로 픽업된 여배우 이민자에게 극 중 이름을 따 남정임 이라는 예칭을 붙여준 것도 주동진 이었다고 한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67년에는 한국영화업자협회의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주동진은 중소영화사들을 규합하여 일시적이나마 당대의 거물 제작자인 신상옥을 회장에서 퇴임시킴으로써 한국영화 제작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했다(이후 신상옥 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회사들을 규합하여 ‘한국영화제작자연합회’를 구축하여 영화 제작계를 반분하고 이후 새로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회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이 ‘쿠데타’는 종국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간다). 전성기의 연방영화사는 모회사가 없는 개인 회사로 출발한 영화사 중에서 신필름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영화사 중의 하나였다. KMDb 기준에 따르면 주동진 이 연방영화사의 이름으로 제작한 영화가 거의 150편에 이른다. 또한 그는 1970년 < 사랑하는 마리아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출과 섹스신으로 당시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으며, 1970년 흥행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그는 부사장이던 최춘지 에게 사업을 물려준 후 갑작스럽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 이민을 택한 원인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양영화사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던 양춘 은 그의 형 때문이라 증언한 바 있다. 양춘에 따르면 주동진 의 큰 형 주동인은 1953년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장과 1964년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을 역임한 북한 영화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정보기관들은 그의 형 때문에 주동진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였고, 주동진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민을 택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주 후 시네마 엠파이어라는 영화의 수출입사를 운영하였다. 1990년에는 남북영화제를 개최하는데 집행위원장의 역을 맡았고, 1996년에는 북한과의 합작영화를 추진하기도 하는 등 남북한의 영화 교류에 힘을 쓰기도 했다. 뉴욕에서 거주 중 2003년 작고했다. 주동진 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이자 정부에 의해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가 유지되었던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자였다. 그는 기업적인 배경, 혹은 자산, 심지어 영화업의 특별한 기반도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영화계의 중심에 진입했던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달변가이자 비상한 수완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며, 당대 영화계의 브레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는 없다. 박정희 정권기 정부의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 즉 일단 진입하면 특혜를 누릴 수 있는 독과점 시장이라는 상황이 개인의 능력과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 글: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연구부장) KMDb 정보 주동진 추천 VOD < 불나비 >(1965) | < 시발점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