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스쿨: 초보마법사 아우라의 대모험
- 감독
- 저겐 클루비엔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로라 메건 스탈, 벤 디스킨, 마이클 존스턴, 필리스 샘플러, 제이미슨 프라이스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 펜과 수채,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을 기억해? 벤야민은 그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파울 클레의 이 그림을 보며 역사의 잔해 더미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지. 날아오르려는 천사는 역사의 잔해 더미 앞에서 눈을 감지도, 날개를 접지도 못해. 폐허가 된 현재를 바라보고 있지. 과거의 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진보라는 폭풍 앞에서 말이야. 우리는 산개해 있는 역사의 잔해 더미를 더듬는 영화를 보려 했고, 글을 읽으려 했고, 그러한 글을 쓰고자 해왔던 것 같아. 우리는 영화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었지. 아마 늘 주변화된 것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의 성정을 감히 벤야민과 천사에 이입해 왔던 것일지도 몰라. 사실 이렇게 글을 계속 쓰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우리는 그저 늘 함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필요로 해왔고, 그렇게 기꺼이 서로에게 동료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글을 찾아 헤매다 결국에는 스스로 읽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글을 끝내는 찾지 못했잖아.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 ‘그’ 영화와 그 ‘영화’, 그리고 ‘영화’ 자체에 관해 말하는 글. 그러니까, 그러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질문을 되뇌면서, 이 끝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처음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가 점점 질문에 대한 문장을 찾았지. 문장의 끝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우리의 것이 되었어. 글로써 완성되는 영화. 그럼 이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물음과는 상반되잖아. 결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은 없고, 주변을 맴도는 글만 남아있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비평의 흐름에서 아주 작은 귀퉁이의 잔해가 되겠지. 오늘날 한국에서의 비평은 주류와 비주류, 프로와 아마추어가 구분되어 있다기보다는 사실 모두가 비주류라는 조각으로 맞춰지지 않은 채(혹은 프로는 아마추어인 체하고, 아마추어는 짐짓 프로인 체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비평과 작품의 ‘쓰루패스’를 지향하는 《마테리알》, 서버와 리시버가 편지를 보내고 응답하는 ‘비평의 편지’, 《씨네21》이나 《필로》… 그들까지 우리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어. 더는 비평의 독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가 비평과 한 발짝 떨어진 존재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퍽 만족스러워. 우리는 사라질 기회를 찾고 있어. 천사 앞에 놓일 잔해가 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사라지게 될 날은 매년 갱신하는 《 해파리 》의 도메인을 결제해야 하는 가을이 될까? 행방불명이 되자. 사라진 작가들처럼, 사라진 배우들처럼, 사라진 감독들처럼, 사라진 영화관들처럼, 사라진 필름들처럼. 그리고 신재인 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화를 위해. (좌)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중 (사진: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KOBIS ) (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신재인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 단편영화 < 소세지 >(2000),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2001),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2002), 그리고 장편영화 < 신성일의 행방불명 >(2005)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지. <김갑수의 운명>, <심은하의 잠적>, <어머니가 상했다>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신재인은 『포도주』(2007)라는 책을 한 권 남기기도 했는데(사실 로맨스 소설을 꾸준히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은 그가 쓴 66개의 단편을 한 데 묶었고, 2000년에 대산문화재단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세상에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에 출판의 형태로 공개됐어. 『포도주』의 단편 「남이 먹을 때1」과 「너의 진실1」은 영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원전이기도 해. 단편의 화자는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신재인 스스로가 ‘작가의 말’에서 화자는 “다중인격자”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지기도 해. 「리얼 드림1」에서 주인공 ‘나’는 꿈을 꿔. 그는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꿈을 꾸는 시간은 더욱 길어져만 가. 꿈도, 어머니도 없는 그의 사적 시간은 줄어만 가고, 그는 결국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돼. 완결 없는 결말로 향해 가는 그의 이야기는 신재인의 영화와 같아. 신재인의 영화는 절대 문턱을 넘지 않아. 지점을 향해 나아갈 뿐, 그저 시도할 뿐이야. 2006년 신재인 감독의 <어머니가 상했다>(가제) 연출팀 모집 공고글 발췌 신재인의 영화는 체제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등장으로 하여금 규범을 흔들어. 이방인은 체제의 안과 바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의 세계에서 규범이란 죄의식과 위선, 성스러운 것과 천한 것, 그리고 신성모독으로 뒤틀린 정상성의 형태야. 그리고 이방인, 혹은 메시아는 뒤틀린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정상의 세계를 뒤흔드는 시도에 가까워.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행위는 죄악이 돼. 보육원의 아이들은 아버지(신)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음식을 보급받으면, 불이 켜짐과 동시에 흩어져 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재래식 화장실이나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공중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수평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배설과 섭취를 등가로 만들어. 먹는 행위가 수치스러운 행동이 되는 보육원에서 남들보다 ‘뚱뚱한’ 성일( 조현식 )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천사를 만나. 성일은 이 뒤틀린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일까? 보육원에는 바깥에서 들어온 이영애( 문슬예 )가 있어. 영애는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야. 영애는 권사의 주방에 들어가 몰래 음식을 훔쳐 먹거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배고파”를 외치며 음식을 먹어. 아이들은 영애를 두려워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보육원의 규범은 점차 흔들리고, 마침내, 그곳을 통치하던 원장( 예수정 )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영애를 교단에 올려 억지로 음식을 먹는 벌을 줄 때, 아이들이 반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폭력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바로 그 순간, 영화는 폭력을 중지하고, 보육원 안과 바깥의 경계를 만드는 철문 앞에 서 있는 성일의 쇼트로 이동해. 보육원 바깥에 있던 카메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상승’하여 문을 넘어 다시 성일을 쫓지. 흑백의 영화는 컬러로 전환되고, 보육원의 성일은 터미널에서 눈을 뜨게 돼. 성일은 행자와 같은 모습으로 모텔촌과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먹고, 사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지. 신재인이 영화에서 흑백과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 “흑백은 아름답기에 억압받는 보육원 장면은 흑백으로 아름답게, 해방 공간인 바깥세상은 현실적으로 추하게 담고 싶었다”라고. (상2) 흑백의 보육원 장면 (하2) 컬러의 바깥세상 아이들을 통치하던 원장이 벌을 받는 뒤집힌 보육원의 시간과 성일이 돌아다니는 시간은 이리저리 중첩돼. 성일은 보육원의 안과 밖, 모든 시간에 있어. 아이들이 교단 위의 원장에게 돌을 던지고 음식을 던질 때, 바깥의 쇼트와 교차되던 성일이 보육원 안에서 폭력을 막는 장면이 프리즈 되고, 반복되며, 영화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폭력의 물리적 접촉을 막아. 영화의 마지막, 성일이 원장과 그의 아들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치킨을 뜯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동석하게 됐을 때, 카메라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창의 바깥에서 점점 물러나지. 흥미로운 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을 은유하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도, 보육원 건물에 높이 매달려 있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낡은 나팔형의 스피커라는 존재야. 신재인 영화에서 신을 위시하는 카메라는 신이 될 수 없어. 오히려 신은 낡고 기능하지 않는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지. 이러한 시점의 카메라는 신재인의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해. <소세지>는 남성, 여성, 아이로 구성되는 소위 ‘정상 가정’으로 보이는 구도를 유지해. ‘소세지’는 남성 성기의 직접적 대리물이 되고,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소세지를 핥을 때, 아이는 “나도 먹어보자”라고 말해. 재미있는 점은 여성-남성-아이의 구도가 계속 바뀌고 있음에도 삼각형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같은 구도는 가부장을 환기하면서도, 남성의 소세지를 핥는 데 집중하던 여자가 아이가 재촉하니, 남성 성기와 가부장을 대리하는 소세지를 다른 길쭉한 야채들과 함께 싹둑싹둑 절단 내고, 소세지 야채볶음으로 만들어내는 코미디로 무너지지. 여자와 아이는 소세지 야채볶음을 맛있게 나눠 먹고, 카메라는 투샷에서 물러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을 보여줘. 마치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의 주체, 그리고 욕망을 모방하도록 하는 매개자가 있다고 했을 때, 영화는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남성을 결말부에 욕망으로부터 아예 배제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신재인 영화는 오히려 욕망의 매개자를 영화 바깥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세계의 질서와 규범을 계속해서 조롱하는 거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마찬가지로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는 주인 없는 시점 쇼트가 많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의사( 홍승환 )는 환자의 머리에 진실을 넣었고 그것을 깨끗하게 봉합했다고 말해. 이때 카메라는 환자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환자는 죽고, 법정에 선 남자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봐. 떨어지는 물의 시점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영화는 법정과 교회의 연단, CCTV의 시점 쇼트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시점을 제외한 인간의 시점으로 느껴질 만한 쇼트를 배치하지는 않아. 의사가 진실을 넣은 환자의 머리를 봉합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시점으로 연결해 봉합하는 데에도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거지. 의사는 교회와 법원을 오가며 자신의 죄를 고하는데, 목사( 정인기 )와 판사( 권택기 ) 앞에서 물을 토해내며, 자신이 토해내는 진실에 잠겨 버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남자 앞의 모두는 도망을 가. 판사, 목사, 변호사, 소위 “‘사’짜”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경건한 십자가 앞에서 진실은 마침내 물고문실로 연결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진실을 고해야 하는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 있다가 CCTV 화면을 통해 빠져나와. 이러한 주인 없는 시점과 그것의 물성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규칙이나 명령,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성경의 인용이라는 언술로부터 순응주의적 진실을 전복해. 마치 신재인이 유명인의 고유명사를 쓰면서 실제 세계의 아우라, 숭고를 벗겨내는 방식을 전유하는 것처럼 말이야. (특히 재미있는 점은 ‘성일’이 영화감독 신성일과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고.)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비위가 좋은 사나이인 소년 준섭이 지우개나 배설물을 먹을 때, 그를 보여주는 부감 쇼트와 같은 방식은 영화 바깥의 타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지. 준섭은 이 영화에서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쟁취하고, 외계인의 우주선을 먹음으로써 인간을 구하며, 음식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자폐적 상상력은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처럼 망가진 메시아의 형상으로 작동하는 거지. 신재인 영화는 일상적이고 동질적인, 즉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 플롯과 규정적 한계의 바깥에서 규범을 소격화하여 불균질하게 연결함으로써 자아로 필연적으로 빠져버리는, 영화와 영화 바깥에 초월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우리는 이런 조각나고 어긋난 것 같은, 주인공의 상상으로 치부될 법한 영화의 장면들이 산란함으로써 ‘진실’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그래서 신재인이 『포도주』에서 말하듯 영화들은 모순 없는 매끄러운 이야기로서 영생하지 않고 언젠가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필멸하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장면은 진실로 향하게 되겠지. 신재인은 운동하는 진실을 포착해 불쑥 솟구쳐 오르도록 글과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너머의 무언가는, 현실에 천착해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도망침을 꿈꾸는 우리에게 닿으며 필연적으로 주변화되는 비평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그러므로 신재인 영화는 영화 속 세계 바깥에서도, 그저 쌓이고 잔해가 되어, 사라짐 후에도 우리 앞에 놓인 영화처럼 ‘새로운 천사’ 앞에 놓일 거야. 다시 돌아와,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과거를 들여다보되 지금의 시간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야. 메시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메시아를 신격화하지 않는 벤야민처럼, 우리는 신재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고, 복수적인 시간의 공존과 긴장을 경험해. *** 주1. 1) 배장수, " 장편 데뷔작으로 주목 받는 두 감독 '신재인·박성훈 '", 《경향신문》, 2006. 2. 16. 해파리(영화웹진) l www.haepari.net.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및 전시 도록을 쓰거나, 영화계 인력을 인터뷰하고, 독립상영회를 기획한다.
올해 나는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부활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게 되었다. 감히 꿈꿀 수 없는 성스러운 부활보다는 ‘평범한’ 사람 라자로의 이야기가 희망이 되어주었다.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해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걸어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희망뿐만 아니라 좌절도 안겼다. 신체의 형상을 묘사한 대목이 특히 그랬다. 부활을 꿈꾸기 위해서는 일단 신체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죽은 몸은 보존되기보다는 대부분 화장된다. 부수어져 가루가 되어버린 몸의 부활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상상하기를 포기할 수 없던 나는 잘게 부수어진 입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는 광경을 기어이 상상했다. 머릿속에 재생된 그 장면은 마치 21세기 SF 판타지 영화처럼 보였다. 과장된 상상은 부활과 무관하다고 여긴 영화를 부활의 서사로 보게 했다. < 3000년의 기다림 >에서 알리테아는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작은 유리병을 전동 칫솔로 닦다가 그 속에 존재했던 정령 지니를 깨운다. 뚜껑이 달린 작은 호리병은 축소된 유골함이고, 그래픽화된 연기는 기체처럼 흩날리는 뼛가루와도 같다. 뚜껑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죽음(혹은 영원한 기다림)의 시간은 삶의 시간으로 역행한다. 거대한 몸이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트인 장소에서 나타나곤 했던 지니가 이번에는 고개조차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의 호텔 방에 구부정한 상태로 등장한다. 일상성과 구체성은 그것이 리얼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데 기여한다. 호리병 속 생명체가 죽음에서 삶으로, 입자에서 거대한 몸으로, 거대한 몸이 점차 부피를 줄이며 생체 순환을 역행하듯, 이야기의 방향도 전환된다. 소원 성취 스토리에서 사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소원의 주체에게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간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니의 오랜 사연이 중심에 놓인다. 알리테아는 구멍이자 심연이었던 지니의 삶을 깨우는 눈이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섭렵한 훌륭한 서사학자로 소원의 무용함을 진작에 간파한 인물이다. 지니가 기나긴 사연을 늘어놓게 된 이유도 알리테아가 소원 기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3000년 동안 좁은 병에서 깨어났다 갇히기를 반복한 지니의 인생 이야기가 불러오는 연민과 공감 그리고 사랑은 결국 알리테아의 마음을 돌린다. 알리테아의 첫 번째 소원은 정령을 향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에는 지니에게 바쳐진 소원들에 대한 메타적인 시선이 잠재해 있다. 모든 소원은 그것이 사람에 관해서든, 부와 명예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관해서든 소원을 비는 현장에 연루되지 않은 인물 혹은 사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이후에 존재할 무수한 변수를 차단해 소원이 지닌 근본적인 모순을 벗어나는 해결책처럼 보인다. 알리테아의 소원을 통해 소원의 실행자이자 대상이 된 지니는 거의 소원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알리테아의 소원 역시 다른 소원 성취 서사와 마찬가지로 실패의 과정을 겪는다. 지니가 알리테아의 곁에 머무는 것이 그에게 고문과도 같아지면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원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은 소원의 내용보다는 소원에 내재한 구조에 있다. 소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가지인 이유는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다. 소원은 소원 빌기,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한 실패, 폐기 혹은 수정의 삼단계를 거쳐 완전해진다. 구조 속에 소원의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이를 바꿀 순 없을지라도 인간에게는 남은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알리테아의 선택은 소원의 완료 이후에 덧붙은 저주의 해제를 자신의 소원으로 삼는 것이다. 소원 이야기의 최종 결말은 지니의 자유에 있다. 알리테아는 변치 않는 조건을 소원 삼아 실패 없는 결말을 만든다. 반면 영화가 주는 감동은 알리테아가 소원 성취 서사의 허점을 간파해 지혜로운 방식으로 그 굴레에서 빠져나왔다거나 익숙한 정령의 이야기를 새롭게 썼기 때문이 아니다. 감동의 자취를 따라가 보면 구조에 눈을 돌리면서 누락한 내용 쪽으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세계가 버겁다면 당신이 있을 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든지.’ 소원이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알리테아의 말에는 소원의 구조 분석 따위는 무화시킬 힘이 있다. 마지막 소원은 첫 번째 소원의 전제였던 지니에 대한 알리테아의 사랑을 증명하며 이것이 결국 사랑의 서사임을 긍정하게 한다. 모든 행복한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합일에 바쳐진다. <3000년의 기다림>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나란히 언덕 너머를 향해 걸어가는 알리테아와 지니의 뒷모습은 합일의 증거처럼 보인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장면 위에 깔리는 내레이션은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다. 둘은 그 뒤로도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했으리란 것, 알리테아는 죽을 때까지 지니를 기다리리라는 것을 예감케 할 뿐이다. 영화의 결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알리테아가 홀로 있던 순간들 때문이다. 알리테아가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결에 고개를 돌리면 지니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를 한낱 환상으로 치부하든, 영화적 사실로 받아들이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전까지 지니가 나타난 장소들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장소인 것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개인 컴퓨터의 기본 바탕 화면 속 그래픽화된 들판과 하늘을 연상시키는 가공된 자연 이미지다. 정령은 여전히 정령이며,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다만 알리테아는 인간과 정령이 어울릴 수 있는 환상의 장소를 마련해 두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사실도, 거짓도 없다. 다만 이야기가 있다. 인간과 정령은, 알리테아와 지니는 서로에게 아우라를 형성한다. 기나긴 시간에 대한 상상과 오랜 기다림이 바로 아우라의 정체다. 그것은 이야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올해는 새삼스럽게 서사의 위기에 관한 진단이 부활한 해였다. 위기론은 서사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서사로 주어를 바꾸어 반복된다. 극장의 위기는 여름과 추석 시즌에 연달아 부진한 성적을 낸 한국 상업영화만이 아니라, 견고할 것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현주소인 마블 유니버스의 부진에 의해서도 견인되었다. ‘서사의 실패’에서 은폐되는 건 논의 대상이 ‘거대’ 서사라는 점이다. 마블 코믹스 유니버스에 기생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대 서사의 세계는 망각의 수혜 속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롭게 무너질 수 있는 세계처럼 보였다. 그런데 더는 무너질 것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진 것일까. 이를 논하는 데는 거대 서사라는 말보다는 ‘메타 서사’가 더 익숙하고 적합한 단어 같다. 영화에 관한 영화가 점해온 메타라는 수식은 이제 평행 우주를 오가는 메타버스 영화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지금 여기의 세계 바깥에 평행한 세계를 지으며 도망치고 부활하는 세계는 단 몇 시간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 여기 실존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켰다. 부활도 죽음도 심드렁하거나 곧 잊혔다. 어쩌면 부활이 가장 시급한 대상은 부활 그 자체다. 부활이 전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지금, 부활은 부활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여전히 우리 곁에는 근사한 부활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영화에 관한 영화, 혹은 자전적인 영화로 돌아온 반가운 이름이 유독 많았다. 마치 ‘메타’를 되가져오려는 비밀스러운 집단 공모가 진행 중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배우가 극 안에서 다른 배우로 등장해 세트장 사이를 평행 우주처럼 만들기도 했고( 애스터로이드 시티 ), 감독이 극 중 다른 감독으로 등장해 영화 존재의 부활을 견인하기도 했다( 파벨만스 ). 브레송의 당나귀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로 부활해 신성은 인간의 형상을 요구하지 않음을 드러냈으며( 당나귀 EO ), 시대를 초월한 채 영속하는 것 같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을 마주하기도 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충고와 모방으로부터 도망치던 홍상수의 인물들은 도망치는 대신 도망을 유발하는 방식을 통달했으며( 우리의 하루 ),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여겨졌던 빅토르 에리세의 배우와 필름을 찾는 여정은 득도의 체험처럼 느껴졌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 인물의 구원을 차단하는 냉정함에 부활의 염원을 덧씌워 보기도 했고( 토리와 로키타 ), 잔소리꾼 수다쟁이 감독이 한 명쯤은 존재해도 괜찮지 않을까 괜스레 긍정적인 마음이 되기도 했다( 찬란한 내일로 ). 리스트를 뽑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인 요약지만, 그렇게라도 기다림에 대한 응답의 증거나 여전한 기다림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3000년의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의 역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영화 내부에만 소용되는 데서 벗어나 개별 관객의 삶을 두루 자극하는 방식으로 메타를 쓴다.
최근 OTT 드라마 <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2021)와 JTBC의 <전체관람가+: 숏버스터>의 한 에피소드인 <미지의 세계 시즌투에피원>(2022)와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 말이야 바른 말이지 >(2022) 등으로 부쩍 바빠 보이지만, 윤성호 감독의 다산성은 동시대 그 어떤 크리에이터에 뒤지지 않는다. 그 종류도 다양하여, 단편영화로 시작한 그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성 가득 한 작품을 거쳐 장편영화를 경유한 후 웹드라마라는 형식을 개척하더니 지상파와 케이블과 OTT에 이르렀다. 20여 년 동안 20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과 15편의 드라마를 만든 숨가쁜 시간! 여기서 쉼터 같은 작품이 하나 있다면, 바로 < 도약선생 >(2011)이다. 이 자유분방한 영화는 놀랍게도(!) 문화체육관광부와 아리랑TV가 제공하는 공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의 도시를 알리기 위한 시리즈 중 한 편이었다. 윤성호 감독은 대구를 배경으로 <도약선생>을 만들었고, 윤태용 감독은 서울을 배경으로 < 서울 >을, 배창호 감독은 제주에서 < 여행 >을, 김성호 감독은 부산에서 < 그녀에게 >를, 전계수 감독은 춘천에서 < 뭘 또 그렇게까지 >를, 진광교 감독은 여수에서 < 려수 >를, 문승욱 감독은 인천에서 < 시티 오브 크레인 >을 연출했다. 65분이라는 애매한 러닝타임을 지닌, 스포츠 예능을 풍자하고 있는 건지 스포츠 영화를 조금 독특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이 영화는 20세기까진 한국영화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취향의 B 무비였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면서 만든 단편 < 졸업영화 >(2006)로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하고 첫 장편 < 은하해방전선 >(2007)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던 윤성호 감독은 이후 단편으론 ‘두근두근’ 시리즈를, 웹드라마로는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를 내놓으며 왕성한 30대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 제안 하나를 받는다. 아리랑 TV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으로 제공하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시리즈는 각 도시를 배경으로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프로젝트였다. 그의 도시는 순천. 윤성호 감독은 순천 송광사에 미국의 흑인 래퍼가 힐링 하러 온 이야기인 <소울>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때 갑자기 제작사에서 도시를 바꾸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대구에서 영화를 찍으면 제작 지원과 현물 협찬이 들어온다는 제안이었고, 윤성호 감독은 받아들인다. 처음 기획한 제목은 ‘육상소녀’였다. 의도는 진지했다. 육상을 빙자해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원래 들어오기로 한 제작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그래서 장면들을 빼기 시작했고, 몇몇 장면들은 즉흥적인 예능처럼 찍었다. 엔딩에서 영화를 황급하게 닫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고, 러닝타임은 한 시간을 조금 넘기는 65분이 되었다. 제목은 <도약선생>. 주인공은 윤성호의 페르소나인 박혁권, 당시 웹드라마로 인연을 맺은 걸그룹 밀크 출신의 박재영(본명 박희본), 그리고 처음 함께 작업하는 나수윤이었다. 우정 역의 이우정과 원식 역의 나수윤. 이우정은 윤성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은하해방전선>부터 시작해 총 10편의 윤성호 감독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2008년부터 단편을 만들기 시작했고 2020년엔 첫 장편 < 최선의 삶 >을 내놓았다. 나수윤은 <도약선생>에서 윤성호 감독과 처음 만나, 이후 여러 편의 웹드라마에서 함께 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동성 친구인 우정(이우정)과 원식(나수윤). 남친이 생긴 우정은 대구에서 서울로 떠나게 되고, 원식은 매달린다. 우정은 원식에게 “뭔가를 보여 줘. 크고 높고 늠름한 걸”이라고 말하고, 원식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영록 코치(박혁권)에게 장대높이뛰기를 배운다. 여기에 재영(박재영)이 합류하고, 그들은 다양한 트레이닝을 통해 조금씩 도약한다. <도약선생>은 윤성호 감독의 단편과 웹드라마를 꾸준히 ‘복용’해온 관객에겐 익숙하지만, 그의 영화 문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꽤 난해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낯선 가장 큰 이유는 ‘생뚱맞음’이다. 이것은 윤성호 감독의 클리셰이자 유머 감각인데, 그 핵심은 ‘서사의 실험’이다. 파괴까지는 아니지만, 윤성호의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의 구성과 사뭇 다르다. 느슨한 챕터 구성인 <도약선생>은 한 국면이 넘어갈 때마다, “원식, 불심검문에 걸리다” “코치님은 채식주의다”라는 식으로 쨍한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의 화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다중 시점 서사는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론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걸 교란시킨다. 여러 명의 화자들은 때론 장면을 멈추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영화라는 장치’를 드러내는 건 그의 필모그래피 중 전반부를 대표하는 방식이었다. (왼쪽 사진) 윤성호 감독의 작품엔 종종 동료 감독들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육상 체험장의 사회자는 최근 < 잔고 : 분노의 적자 >를 내놓은 한국 B 무비의 스페셜리스트 백승기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도약선생>은 배우 김종수의 초기작 중 한 편이다. 그는 대구스타디움 관리인으로 출연한다. 원래 썼던 시나리오가 어떤 완결성을 지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축약’된 <도약선생>에서 또 하나의 포인트는, 툭툭 끊기고 난데없으며 즉흥적인 톤이 주는 묘한 아우라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기록과 연습 방식과는 상이함”을 경고했듯, <도약선생>에서 전영록 코치(내내 가수 전영록의 잠자리 안경을 쓰고 나오는)의 트레이닝 방법은 독특하다. 기본적인 러닝에서 시작해 요가를 경유해 평행봉과 점핑을 거쳐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시 쓰기 수업까지 이어진다. 어떠한 계획도 없이 순전히 우발적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 과정을 장대높이뛰기를 위한 트레이닝 커리큘럼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서사 구조를 따르는 듯하면서 그 내용은 예능과 다름없는, 변칙적 서사 전개다. 재밌는 대목은 실제로 대구 육상 스타디움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잔디에 들어간 죄로 관리인(김종수)에게 야단을 맡는 전영록과 선수들 앞에 갑자기 전영록의 군대 후임이었던 김 병장이 등장하고, 여러 후임들이 합세한 갑작스런 술자리가 이어지며, 그들은 군대 시절을 회상하고, 갑자기 모두 일어나 소주병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고삐 풀린 서사 전개는, 갑작스레 장대높이뛰기가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바꾸는 스포츠라는 대사가 등장함으로써 의외의 방식으로 봉합된다. (왼쪽 사진)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 장대높이뛰기를 요약하는 이 영화의 모토다. 소주병을 잡고 있는 사람은 < 장례식의 멤버 >(2009)를 연출한 백승빈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얼굴에 붕대를 감고 연을 날리고 있는 전영록. 그의 모습 위로 노래 ‘도약은 패턴’이 흐른다. 이처럼 <도약선생>은 마치 아나키스트처럼 ‘영화적 서사’라는 것을 뒤흔들고, 그러면서도 정말 신기하게도 소정의 기승전결을 갖추며 전진한다. 그리고 영화는 갑작스레 “우연히도 결전의 날”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절정에 다다르고, 갑작스런 이사를 하는 우정 앞에, 원식 역시 갑작스레 대미를 장식한다. “애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건지,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서 애정을 길어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은, 어쩌면 영화 전체의 전반적인 주객 전도 상황을 요약하는 듯하며, 역시 갑작스레 전영록이 지니고 있던 치명적 문제가 폭로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샹송 톤의 주제가 ‘도약은 패턴’이 흐르면서 영화를 닫는다. 여기서 윤성호 감독이 직접 쓴 가사는 음미할 만하다. “도약, 슬픈 믿음의 도약/약도, 약도를 들고 도착/도착, 제 시간에 도착/아아 그러나 나는 성도착/애착, 가쁜 착오들의 고착”으로 시작되는 가사는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이렇게 마무리된다. “패턴, 자기만의 패턴/아니 어쩌면 자기 기만의 패턴/유턴, 너를 목격하고 유턴/아니 어쩌면 너에게로 돌아가는 P턴/그렇게 나는 아직 인턴, 너에게 훌쩍/뛰었다 착지하는 나는 영원한 인턴/랜턴, 너는 나를 비추는 랜턴/윈스턴, 피아노는 역시 조지 윈스턴/볼턴, 이청용이 있는 볼턴/워싱턴, 오바마가 사는 워싱턴.” 한국영화의 삽입곡 중, 이토록 중독성 있는 라임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격조 있는 대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