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 감독
- 벨라 타르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안드라스 스자보, 졸라 포도르, 임레 돈코, 이스트반 볼라, 페렌시 자노시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올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가장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작품은 홍성은의 < 혼자 사는 사람들 >이다. 단지 내가 본 영화는 감독이 일반 관객들이 본 영화와 조금 다른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주인공 진아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교정되어야 할 사회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올해는 될 수 있는 한 아카데미상 후보들을 리스트에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샤카 킹의 <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가 가진 역사의 무게와 원초적인 비극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도 처참한 실제 역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고전 멜로드라마와 첩보물을 거쳐 펼치는 정교하고 장르 유희는 다른 의미로 매혹적이었다. 이어지는 세 편은 판타지와 SF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 메모리아 >가 SF, 그 중에서도 말이 되는 부류에 속한다고 하면 많이들 안 믿을 텐데, 사실이다. 여전히 벽의 페인트가 말라가는 걸 지켜보게 강요하는 거 같은 아트하우스영화 특유의 고집이 눈에 뜨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셀린 시아마의 < 쁘띠(뜨) 마망 >은 얼핏 보면 소박한 시간여행 판타지처럼 보이는 설정을 통해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평등성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독특한 작품으로,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 볼 영화가 될 것 같다. 데이비드 로어리의 < 그린 나이트 >는 아서왕 전설의 A24스러운 재해석으로, 아마 이 리스트의 영화들 중 ‘예술하는’ 것으로 <메모리아>와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왕 전설의 아이돌을 시치미 뚝 떼고 잔인하게 놀려먹는 사디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 영화는 모두 호러다. 단지 앞의 세 편은 장르호러를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조지 A. 로메로의 < 놀이공원 >은 개신교 계열 단체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교육영화지만, 유명한 동네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사람에게 이런 영화를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영화가 출구 없는 악몽으로 그리는 노년의 삶은 심지어 좀비떼보다 무섭다. 에마 셀리그먼의 < 시바 베이비 >는 유대계 전통 장례식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행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막 졸업을 앞둔 여자 대학생의 주변에서 일가친척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뒤틀림과 이 과정 중 발생하는 폐소공포증은 친숙하기 짝이 없다. 임신 주제의 영화가 바디 호러로 흐르는 건 흔하지만, 남궁선의 < 십개월의 미래 >는 여기에 임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덜떨어진 편견과 억압이 더해져서 <에일리언>보다 서너배는 더 무섭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 시계태엽 오렌지 >에 나오는 세뇌장치에 묶어놓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반복 감상시켜야 한다. 슬프게도 그들 상당수는 시체가 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예술작품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이제 한 편 남았다. 사실은 세 편이다. 리 자니악의 < 피어 스트리트: 1666 >은 < 피어 스트리트: 1994 >, < 피어 스트리트: 1978 >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으로, 이 세 영화를 분리해 감상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이 영화들을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틀었는데, 그 때문에 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8,9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 미니시리즈의 ‘텔레비전 이벤트’ 감상과 비슷해졌다. 어차피 극장을 통한 적 없는 작품이니 세 영화를 그냥 한 편의 미니시리즈로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원래 의도는 한 달 간격으로 개봉되는 극장용 영화 시리즈였다고 하지만. 예고편만 보면 큰 기대가 안 생긴다. 그냥 예쁘장한 틴에이저들과 연쇄살인마를 한군데 모아놓고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시체들을 쌓는 놀이를 하는 복고풍의 슬래셔 영화인가?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첫 편의 도입부를 보면 좋지 않은 의미로 어리둥절해진다. 잘 만들긴 했는데, 굳이 저렇게까지 성실하게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 도입부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스크림>은 이미 메타 호러인데 여기에 새 레이어를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설정과 맥락을 설명해보자.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의 원작은 어린이 대상 호러물인 <구스범스> 시리즈의 R.L. 스타인이 청소년 대상으로 쓴 동명 호러 시리즈다. 셰이드사이드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들은 책마다 바뀌며 폭력의 강도는 <구스범스>보다 높다고 한다. 자니악의 시리즈는 셰이드사이드라는 마을, 피어와 구드라는 가문명을 가져왔지만 이야기 자체는 오리지널이다. 셰이드사이드에 대응하는 부촌인 서니베일 역시 시리즈의 창작이다. 서니베일은 <버피> 시리즈의 무대인 서니데일을 연상시키는 이름인데, <버피> 역시 <스크림>만큼이나 이 시리즈에 뚜렷한 발톱자국을 남긴 작품이다. 둘 다 기존장르를 재해석하고 비트는 메타 호러에 속해있기도 하고. 시리즈의 주인공인 디나는 <스크림>보다는 <버피>에 가까운 인물이다. 셰이드사이드 고등학교의 밴드 멤버이고 동성애자, 흑백혼혈이다. 당연히 자신도, 도시전설에 미친 동생 조시도, 마약쟁이인 불량청소년 친구들도 모두 아웃사이더다. 여자친구 샘이 재혼한 엄마를 따라 부촌인 서니베일로 갔기 때문에 디나의 삶은 더 끔찍해졌다. 그런데 전설의 마녀 사라 피어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마로 변신하고, 디나 일당은 이들에게 쫓기게 된다. 일단 <피어 스트리트 파트: 1994>를 다 보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는 여전히 <스크림>을 지나치게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통적으로 보이는 슬래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이 영화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감이 오지 않는다. 영화가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어 있어서 독립된 영화의 무게중심이 관객들의 예상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있고 그 때문에 늘 기대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폭력의 정도와 살생부의 선정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음 편의 예고도 예측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들이 계속 과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어 스트리트: 1978>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영화의 계산이 드러난다. <피어 스트리트>는 ‘진지하다’. 이 영화가 모델로 삼은 <스크림>과 7,80년대 슬래셔 장르의 관계를 보자. <스크림>의 영화광들에게 슬래셔 영화의 살인은 게으른 창작자들이 반복되는 클리셰들을 갖고 만든 어처구니 없고 대충 공허한 이야기의 일부로, 이들을 모방한 영화 속 연쇄살인 역시 잔인무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얄팍한 게임이다. 하지만 자니악은 비슷한 구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리즈 영화를 만들면서 이 허구와 현실 사이의 벽을 치워버린다. <피어 스트리트: 1994>에서 일어난 사건 일부를 설명하는 <피어 스트리트: 1978>의 사건은 여름 캠프와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익숙한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어 스트리트: 1994>의 우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피어 스트리트: 1994>를 통해 이미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디는 극중 내내 놀랄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존재한다.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대부분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주인공들의 진지함과 입체성을 막지는 못한다. <피어 스트리트: 1666>에서 시리즈의 야심은 심지어 더 커진다. 시리즈 설정의 기원을 파기 위해 북미 대륙 개척시대로 시간여행한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17세기 미대륙에서 일어난 마녀 사건과 연결된다면 그 마녀는 역사가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일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디나와 사라 피어의 소수성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국 건국역사 전체를 재검토한다. 허울좋은 공정의 판타지는 파괴되고 수백년에 걸친 차별의 구조가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온몸으로 이에 맞서 싸운다. 천진난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 속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냉소하는 건 유치한 일이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진지함 속에서 영화의 공포, 로맨스, 액션, 드라마는 모두 강렬한 힘을 얻는다. 그 결과물은 놀랄만큼 정통적으로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학교에 관한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수백명의 학생들. 이들은 모두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구령을 외고 있다. 유독 한 아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하듯 뻗어나온다. 당신은 우연히 그 아이와 시선이 얽혔다. 그 살기등등한 눈빛. 한편으로, 밤중에 복도를 걷고 있는 당신의 곁을 슥 지나치는 누군가가 있다. 불현듯 이 시간쯤 학교에 출몰한다는 어느 여학생 귀신의 얘기가 떠오른다. 소름이 돋아 다시 뒤를 돌아본다. 등을 보인 채 멀어져가는 그 애는 낯익은 옆 반 학생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그 애의 머리가 단발이었던가? 두 단편적인 이미지는 학교라는 공동체-공간이 품고 있는 매혹과 공포의 서로 다른 뿌리다. 전자가 존재증명을 향한 분투와 같이 획일적으로 도열된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우상 신화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상한다면, 후자는 또다른 원천을 나타낸다. 바로 모두의 외양이 서로의 복사판처럼 유사한 상황 속에 불쑥 유령적인 징후가 들이밀어지는 순간이다. 새로 출현한 우상을 구심점으로 한 집단이 다시 질서지어지는 과정과는 반대로, 이는 유사 판본들의 차원에서 경쟁과 유희의 장이 열리는 원심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진본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유실되었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상호 유사성 가운데 태어난 판본들은 계속적인 인력과 척력 작용으로 서로를 반영하면서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해나간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하는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김태용 , 민규동 , 1999)는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 '여고를 배경으로 삼은 공포영화' 시리즈를 대중의 인상 속에 고유명사처럼 안착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고괴담' 시리즈를 떠올릴 때마다 흥미로운 것은 여고라는 장소와 괴담이라는 소재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고, 혹은 10대 남성들의 세계를 경유하곤 하는 학원-조폭물 계보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나 권력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우화로서 독해되는 데 비해, 여성집단의 공간은 주로 괴담이나 불가해한 사건들의 발원지로 묘사되어온 것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온 어떤 하나의 경향성 여기에서 그 계보를 다루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또 모두 다룰 수도 없는 광대한 주제이지만, 한국영화에서 가장 시원적인 ‘여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공들의 야학까지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녀’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모태공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여공 집단은 언제나 입을 모아 합창하고, 중년의 중산층 남성 주인공 동식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가십과 저들만의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주인공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드러난다.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여고괴담'을 위치시키고자 한다면, 시리즈의 다른 편들과는 달리 당시의 10대 여성의 문화는 물론 여성 퀴어 주체들에게까지도 시선을 확장하면서 '여고'라는 실제적인 장소성을 세밀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아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화학작용에 집중하며 통상적인 학원 공포물의 기획을 넘어서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상들에 더해, 이 영화는 왜 '여고'는 '괴담'으로 대중에게 먼저 읽혀져야 했는가를 근원적인 지점에서 재질문하며 적극적으로 여고라는 공간의 공포를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진입, 몸의 배반] 늦은 등교길, 지각생 민아(김규리)는 수돗가에서 숨을 돌리다 우연히 빨간색 교환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일기장의 주인은 어딘가 재수 없는 아이로 소문 나 있는 효신(박예진)과 민아의 동급생인 시은(이영진)이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던 민아는 점차 빨간 일기장에 담긴 효신과 시은의 관계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가고, 그에 따라 같은반 단짝인 지원(공효진), 연안(김재인)과 공유하는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상들 위로 겹쳐지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피처럼 빨간 일기장 속에는 효신과 시은 사이의 이끌림과 갈등, 그리고 효신의 외로움이 선명하게 맺혀있다. 효신의 투신을 기점으로 학교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이한 사건들 틈에서 섬뜩하게도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민아는 이 파국의 진실을 좇아 학교를 누비게 된다. 단순한 줄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민아는 틈입자이자 매개자로서, 현재와 과거, 나와 타자, 효신과 시은, 학교에 공존하는 일상적 세계와 유령적 세계 등의 대립쌍을 자연스레 포개어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 3자의 눈을 경유해 풀려나가는 이야기 구조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민아와 비교할 만한 또다른 대칭쌍이 함께 제시된다는 것이다. 학교의 국어선생님인 고형석 역시 이야기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며, 효신과 시은의 사이를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갔던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형석이 이야기 안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는 효신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력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명의 틈입자, 민아와 형석 중 왜 한 명은 이야기의 매개자로서 승인되고 한명은 외부자로 밀려나는가? 다시 말하면, 왜 민아는 효신과 시은의 관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며, 형석은 관계의 바깥에서 사멸하는가? 우선, 타이틀 시퀀스 이후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의 도입부, 수돗가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민아와 형석은 여기서 교차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행동 경로를 자세히 살피면 두 사람이 자연스레 어떤 공통분모를 형성하면서도 서로 빗겨나며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돗가에서 물의 세례를 받듯 얼굴을 흠뻑 적시다 우연히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장을 발견하는 민아와, 쓰레기를 주워 버리고 간단히 한 쪽 손만을 씻어낸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형석 사이의 평행선은 이후로도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민아가 별다른 의식 없이 효신의 '약'을 삼켜버리는 데 비해, 형석은 효신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그와 마시는 술을 모두 게워내고 마는 체질이다. 효신의 소지품을 경유해 환영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같은 패턴을 볼 수 있다. 민아가 온몸으로 침투해오는 효신의 손길로 인해 기절할만큼 강렬한 빙의를 경험하는 반면에, 형석은 효신의 환영을 겨우 귓가로 불러들여 무언가 속삭이게 했을 뿐이다. 그리곤 목숨을 끊고 만다. 이러한 차이들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분명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복잡한 설명 역시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가장 유력한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외연이다. 고형석은 선생-남성이고, 민아는 학생-여성이라는 가시적인 차이 하나. 영화의 초반부에 생기를 불어넣는 지원과 캠코더 소동은 이 당연한 차이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달려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웃는 민아와 달리 형석은 지원의 짝사랑 대상이자 멀리 떨어진 타자로서 암시된다. 지원은 그의 사적인 공간을 엿보려 캠코더를 들지만, 창과 창이 마주보는 건물구조를 통해 지원과 형석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가 정사-역사의 관계로 간신히 봉합되었을 때조차, 그의 얼굴이 아웃포커스로 새겨진 역사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이미지로서의 형석의 외연이다. 반면에, 민아는 '동등한 몸'으로 효신-시은의 관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이것은 공동체-연결망을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암묵적인 규칙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외적인 유사성' 속에서만 여기-이-공동체의 몸으로 귀속될 수 있음. 같은 원리로 효신의 죽음 이후 학교의 옥상, 복도, 화장실에서 출몰하는 유령들이 화면을 스칠 때, 우리의 시각이 판별할 수 있는 정보는 하나 뿐이다. 이들의 외양을 교복을 입은 그 주변의 친구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공포인 동시에 매혹이다. 그러므로 왜 상관도 없는 타자의 일에 개입하냐는 친구 연안의 말에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응수하며, 효신의 죽음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민아의 뛰어난 공감적 상상력은 이 유기적 네트워크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확대하여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효신이 자신의 창작시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는 힌트 그대로다. "나는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재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몸에도 언제나 정상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주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7월 9일은 효신과 시은의 생일이자 신체검사일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효신은 키나 몸무게를 표지하는 숫자들이 진짜 성장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반문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몸은 쉽게 그러한 분별과 통제의 수단을 전유하고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사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보를 교실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기록하는 이 신체검사 의례는 학교 시스템의 폭력적인 면을 상기시키지만, 또한 교실은 다시 그 수치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폭로하는 놀이터로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를 잴 때 슬쩍 까치발을 드는 아이를 통해 신체검사의 경직된 절차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일상적인 층위로 해체되어가는 순간, 비명소리로 먼저 암시되는 효신의 투신은 정상성의 폭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공표하며 우리를 뒤흔들어놓는다. 영화에서 연안을 비롯한 아이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게 튀는 것들을 볼 때마다 여지 없이 "재수 없어"라고 반응한다. 효신과 시은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길 때, 마치 반작용처럼 교실은 이들을 밀어낸다. 재밌는 것은 남학생 집단을 다루는 영화에서 주로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힘이 있는 인물인 데 비해, 여기서는 '비정상'으로 낙인 찍히고 고립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이목의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이미 고형석을 '외부자'로 날인한 바 있는 이 유사한 이미지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협화음을 쌓으면서 그 내부의 주파수를 넘어서는 '다른 음'들을 다시 예민하게 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청력 문제로 음악시간에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하는 시은과, 어른들 아이들도 지겹다는 듯 아웃사이더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효신에게는 늘 눈총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진정한 역설은 이 척력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부된 이미지들은 거꾸로 집단 내부에 음각처럼 깊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효신은 물론이고 효신의 죽음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민아에 대해서까지 과할 정도의 적개심을 표출하는 연안은 사실상 그 누구보다 '재수 없는 애' 효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시은이 홧김에 찢어버린 교환 일기장의 페이지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무언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만을 덧붙이며 되돌아와 더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어대는 것처럼, 효신의 존재와 부재는 어떤 의미로든 강력한 것이 된다. 이때 학교는 공간 속에 배어든 과거의 기억들을 뿜어내며 효신의 자취와 반향을 이룬다. 그렇게 효신을 향했던 배제의 원리는 학교와 아이들의 무의식 속으로 다시금 어떤 유령적 판본을 불러들인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이미 너무 갑작스럽고 돌출적인 이미지라고 지적한 바 있는 ‘욕조씬’(욕조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효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참조하면 이 지점은 더욱 흥미롭다. 원래는 시은과 효신이 욕조에서 나누는 대화가 여러 씬 있었는데, 이후 편집 과정에서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거북한 장면들로 받아들여져 결국 모두 강제로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가위질이 놓친 장면 하나가 살아 남아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고의 공포, 그것은 '여고'라 이름 붙은 무신경한 묶음 속에서 유사 이미지로 귀속되는 몸들이 다시 파악 가능한 지평을 넘어서는 돌출물을 내밀기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온몸으로 밀어내어 온 이미지들이 불현듯 기억들 속에서 재활성화 될 때 또 한 번 세워진다. 이 유기망을 이루는 개별적 몸이자 결절점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영화 초반 시은에게 관심을 드러내며 눈 속에 담기는 인영, '눈부처'를 언급한 효신은 어느날 불안감에 이렇게 다시 묻는다. "내가 안 보여? 내가 개미야?"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된 이질적인 질감의 화면들을 통해 암시되던 효신의 유령적 시점이 마침내 강당의 지붕 위로 드리운 거대한 효신의 눈동자로 현신하여 학교 공간 자체를 눈부처로서 담아낼 때, 우리는 효신의 얼굴을 눈과 마음에 새기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어떻게 잊겠냐고. 이제, 모든 것은 밝은 빛으로 산화된다. 우리는 유령적 시간인 과거로 돌아가 그들과 자리를 바꾼다. 기억들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유령적 시선으로서 그곳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