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유키스...이러고 논다
- 제작년도
- 2010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본 원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에 기반해 작성됐으며, 기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함을 안내드립니다. * 이 글은 2024년 12월에서 2025년 12월까지의 한 무명 영화평론가의 도전기다. 다 쓰고 보니 비평에 관한 고차원적인 통찰은 없는 것 같다. 그걸 논하려면 실력적으로 좀 더 여물어야 한다. 그전에 평론가로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만난 영화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걸어온 길은 나를 다른 관점으로 좋게 보아온 이들의 눈을 통해서 [1]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Intro 바퀴가 되던가 바퀴에 깔리던가 난 다른 차선에 세우고 깜빡이 켜놔 - 이센스, <쉬게> “보안정책에 의해 차단 되었습니다.” 2026년 상반기에 잠시 일하는 곳에서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기로 한 영화를 예매 취소하려고 로그인하니 떡하니 보였던 문구다. 차단, 배제, 초대받지 못함 등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차단은 상당히 신선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갑자기 일을 하게 돼서, 평소에 가던 평일 오후 2시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주로 하는 언론배급 시사회는 당분간 못 가게 됐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에 가기가 아직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퇴근 후 노트북으로 영화를 파편적으로 보거나 주말을 이용해 밀린 숙제처럼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내가 취소하려고 했던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아마도 악마가 >(1977)였다. 손에 넣으려고 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도망간다. 영화와 잠시 멀어졌지만, 근무지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오히려 영화적인 순간을 최근 체험했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꼭 그러면 만난다. 하나는 친했던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마주쳤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신세라 친구와 담배 하나를 같이 필 수 없었다. 아쉽게 손 인사만 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잠시 마주친 그 순간이 어쩌면 그 친구와의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다른 하나는 답답해서 사무실을 나와 찬 공기를 마시는데 두 명의 영화배우가 지나갔다. 작년 《씨네21》 ‘프런트 라인’에 합류해 처음 쓴 비평이 두 배우가 나온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잘 움직였던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도로에 멈춰 선다. 그는 차 안에서 담배 하나를 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지금이 나에게 그런 시기 같다. 하는 일이 끝날 무렵, 시네필들이 안 좋아하지만 나는 애정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 오디세이 >(2026)가 아마도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시사회를 열 것이다. 놀란이 매달리는 ‘귀환’이라는 화두처럼 나는 다시 영화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사회 인원수 제한에 컷 당하지 않고 무사히 입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글쎄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 코너에 나는 언제 써보나? 영자원에 자주 가는 건 소용없다. 이들의 눈에 띄려면 어디서 놀아야 할까? 쟨 뭔데 50주년 리스트를 썼지? 왜 난… 이런저런 불만 섞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꼬여갔다. 늘 위기인 비평과 < 기생충 >(봉준호, 2019)으로 정점을 찍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직격탄을 맞은 후 급격하게 추락 중인 한국영화보다 내가 더 걱정이었다. 그곳에 기생하는 존재라 숙주가 위기일 때 가장 먼저 떠날(능동) 혹은 떨어져 나갈(수동) 이들은 누구일까? 래퍼 이센스의 <A-G-E>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와중에 버는 놈들이 타짜지.” 그런 타짜들이 부럽다. 나도 타짜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한몫 챙기는 영화평론가를 꿈꿨지만,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타짜가 되기엔 애매한 재능 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악마의 저주일까? 이런 상황에서 영화와 비평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내겐 사치다. 위기라고 상정하고 파국이 된 그곳을 사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안전거리가 확보된 이들에게 허락된 고상한 일은 아닌지 생각도 해본다. 그러기엔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이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일이 없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영화 시장이라는 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내보이곤 있지만 매칭이 잘 이뤄지지 않는 매력적이지 않은 매물인 것이다. 비평가 자체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대(大) 인플루언서 시대에선 더욱이 말이다. 등단 이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는데)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했던 것이 오산이다. 요즘은 등단 없이 혹은 등단 제도에 콧방귀를 뀌며 등장한 평론가들이 오히려 내가 원했던 그 자리에 더 빨리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를 써준 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완성형 시네필로 등단한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지금도 나를 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시네필-평론가들이 학창 시절부터 영화에 쏟아부었던 시간만큼 나 역시 영화에 투자해야 한다. 적게 잡아도 10~15년. 하지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잡지는 싸움의 장소라기보다는 매칭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크림처럼 실패한 비평가이자, 실패한 산문가는 오늘날에 잡지에서 그렇게 환대받는 작가는 아닐 것이다. 크림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엄숙한 비평 스타일에서 탈피, 구어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비평을 썼지만, 그의 지위는 어중간한 평론가로 머물며, 독자에게 호응받지 못했다.” 강덕구 평론가가 한예종 웹진에 기고한 “ 잡지의 전성기에 관한 영원한 수다 ”란 글의 한 부분이다.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평론가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신기한 행보로 비칠 수도 있다. 근데 그 누군가는 어디에 있을까? 아예 안 되진 않는다. 뭔가 되기는 한다. 그게 저주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이 아닌 뒤늦게, A를 바라면 B나 C를. 확실한 건 직행 티켓은 없다는 것! 우회를 거듭하며 돌고 돌아 영화라는 왕국에 잠시 머물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감질나게 맛만 보고 말이다. 2024년이 시작하고 《씨네21》에서 주는 리뷰만 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이는 차고 ‘젊은’ 시네필-평론가들이 새롭게 씬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나는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끝난 느낌을 받았다. 리부트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뭔가를 도모할 동료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내게 남은 선택지였다. 또다시 등단을 시도해야만 했고, 단편이 아닌 장편을 만들어야만 했다. 도착 지점은 다름 아닌 영화제. 여태 안 불러줬는데 내년이라고 다를까… 이런 허무함이 나를 뒤엎을 무렵, 안 불러주면 ‘내가 직접 간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오기가 작동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만들어서 도전해 보고 그러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그래야 후회가 덜 남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영화제에서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그 정도야 나도 안다. 그 천운이 내게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하겠나. 뭔 수를 써서라도 그 근처라도 가는 수밖에. 내가 찾은 틈새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 부산영평 출신 평론가들이 부산국제영화제 크리틱b상 심사위원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 우회로. 물론 그해 공모전 주제였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해서 쓴 것은 맞지만 앞서 설명한 저 욕망이 없었다면 글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2025년. 김칫국을 드럼통째로 마시고 있었는데 연락은 없었다. 갑자기 《씨네21》의 김성훈 기자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이번에 부산 내려가시죠? -안 불러줘서 못 가요. -(다 함께) 하하하 30주년 기념으로 씨네21상이 신설되면서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는 반가운 섭외 전화였다. 왜 뽑혔는지 나름 예상은 했지만, 핵심은 작년에 부산영평에서 등단했다는 것. 글을 안 썼으면 열리지 않았을 문이다. 우회에 우회. 그렇게 부산에 내려가서 12편의 영화를 보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1. <아코디언 도어>: 월경(越境)의 이미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의 한국독립영화 12편 중 씨네21상은 손경수 감독의 < 아코디언 도어 >(2025)에게 돌아갔다. 위에서 하이라이트한 부분은 모두 이 영화의 대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우선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스크리너를 친히 내준 손경수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영화제 심사 때 쓴 “CINEMA”라 적힌 노트를 다시 꺼내 봤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영화를 다시 보며 발견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아코디언 도어>에 왜 끌렸을까를 생각해 봤다. 작가(Writer’s Block) 한예종 전문사에 입학하면서부터 글 쓰는 캐릭터에 나도 모르는 새 빠졌던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 버닝 >(2018)의 종수를 시작으로 이지은 감독의 < 비밀의 언덕 >(2022)의 명은이, 그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을 때 GV 모더레이터 데뷔를 시켜준 천재 김홍기 감독의 < 익스트림 페스티벌 >(2022)의 래오, 홍상수 감독의 <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2025)의 시인 동화 그리고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까지. 영화평론가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지만 기본이 되는 것이 결국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와 비평이 내 삶에서 멀어지려고 할 때, 작가의 형상이 아른거리는 영화를 마주하면 더 눈길이 갔다. 캐릭터들의 고민이 그 시기의 나의 고민과 공명한 것도 한몫한다. 초기엔 뭘 써야 할지(<버닝>), 얼마나 솔직해야 하는지(<비밀의 언덕>)를 고민했다. 그러다 최근엔 좀 더 현실적인 고민에 접어들었다. 글을 안 쓰고 있는 나의 게으름(<익스트림 페스티벌>)과 나이는 먹어가는데 평론가로서 자리를 못 잡고 있는 현실(<그 자연>)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초라한 상황과 상반되게 영화제는 너무나 화려했다. 그곳에서 본 <아코디언 도어>의 한 문장이 내 가슴을 후벼팠는지 노트에 많이 적혀있었다. “어차피 평범해질 운명이었다.” <아코디언 도어>에 대한 작품 비평은 이 영화의 개봉을 고대하며 뒤로 미루고 싶다. 대신에 이 영화의 전환점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수직의 움직임을 말하고 싶다. 타임라인 상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하늘 높이 풍선을 띄운다. 소제목에도 썼듯이 <아코디언 도어>는 경계를 넘는 이미지로 넘실대는 영화다. 크게는 지구와 우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도달하는 이 영화는 그 사이에 낀 ‘재능’이란 녀석을 주목한다. 물에서 뭍으로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과학 괴짜 종윤이가 우주 풍선을 쏘아 올린다. 성층권 33km까지 도달한 풍선,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구. 한계에 다다랐을 때 풍선은 터지고 지구로 추락한다. 지구에선 지수( 문우진 )가 강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물에 빠진 건 이때뿐인데 <아코디언 도어>가 그리는 세계는 마치 수면 아래의 세계 같다. 영화 내내 간간이 들리는 파도 소리와 귀가 먹먹한 사운드 효과는 물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지수가 마치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태 역시 물과 관련됐다. 예를 들면 무언가에 심취(心醉)한, 몰입(沒入)한, 사랑에 빠진(fall in) 등등. 이는 모두 물과 관련된 혹은 연상되는 표현들이다. 그러한 물의 세계와 작별을 고하고 뭍으로 넘어온 지수는 대전환을 맞이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튜브에서 보고 적어둔 글귀가 있다.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는 것은 인간이 산소통 없이 달에 간 정도의 놀라운 기적.” 물에서 건져진 이후로 지수는 키가 자라고 털이 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는 육체적 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만 믿고 까불었던 지수는 새롭게 다가오는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고 지수는 빵을 만드는 마이스터고에 진학한다. 글 쓰는 것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지수는 무탈하게 지낸다. 그리고 글을 조심스럽게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리감이었다. 매몰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글의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오고 여러 장면이 몽타주된다. 몇몇 장면에서 감독 본인이 지수의 어른 역으로 등장한다. 그가 출연한 사실 또한 영화를 다시 보며 엔딩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나오는 그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부침(浮沈)의 시간이 느껴졌다. <아코디언 도어>는 감독 자신을 영화에 각인시킨 에세이적인 면모를 지닌 흥미로운 픽션이다. 영화제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해가 바뀌고 지수와 엇비슷한 상황에 놓여 영화와 잠시 멀어진 상태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묘했다. <아코디언 도어>는 내게 미래의 한 조각을 미리 보여준 셈이었다. 물 안에서 지수가 봤던 익사한 남자는 최악의 경우 나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했다. 내시현상(內視現象) - 내 눈에만 보이는 벌레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재능이란 기생충을 CG로 선보이는 방식보다 지수의 시점 숏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놀라웠다. 영화제 때는 발견조차 못했던 장면이다. 그 장면은 지수가 잠에서 깰 때 등장한다. 무언가가 내 눈에만 보이는 내시현상, 의학 용어로 비문증(飛蚊症)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기생충이 지수의 신체 내부에 있는 실체인지 아니면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 그 두 개의 영역이 중첩된 숏이라 말하고 싶다. 기생충이 지수의 눈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낼 때의 조건이 흥미롭다. 무매개적인 조건이 아니라 빛과 커튼이 필요하다. 잠에서 깬 지수가 빛을 머금은 커튼을 바라볼 때 기생충의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영화의 영사 원리가 떠오르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와 달리 기생충은 지수 눈에만 보인다. 기생충이 몸에서 빠져나간 이후에 지수의 시점 숏이 같은 조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더 이상 지수에게 기생충이 떠다니는 불투명한 필터는 없다. 맨눈이 된다는 것의 두려움. 지수는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물지 않은 어떤 상처가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도 지수의 시점 숏이 나온다. 이 영화의 엔딩은 여전히 내게 미궁으로 남아있다. 지수의 흐느낌, 멈춰버린 그의 몸, 시끄러운 기계음. 밀폐된 공간 속에서 시청각적으로 구성된 이 감각적인 엔딩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장에 비평의 언어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몽타주하고 싶은 것은 현재 지수의 멈춘 뒷모습과 그가 다시 쓰기 시작한 글에서 표현했던 미래의 자신의 뒷모습이다. <아코디언 도어>는 두 뒷모습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수인(囚人)의 이미지 두 뒷모습은 현실과 픽션의 간극처럼도 보인다. 현실은 잠시 멈춰있지만, 미래에는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라며 써 내려간 희망의 픽션. 나 역시 현실의 고민을 픽션에 투영해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기사 한 줄 없이 주목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영화제에 흔적은 남긴 지옥의 영화 <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2025)이다. 이것은 희망의 픽션은 아니다. 무언가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나를 산 정상에 올려다 놓고 장대비를 맞게 한다.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는 느낌으로 말이다. 계속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하산할 것인지. 질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가 영화의 끝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내리는 비라는 사건은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우발적인 마주침” [2] 이다. 원래 엔딩은 “CINEMA”라 적힌 노트를 봉수대에 넣고 태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뻔해 보였다.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그래서 빗소리를 붙여봤다. 썩 마음에 들었다. 기껏 노력해서 무언가를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는 느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제에 가기 위해 200자 원고지 50매 이상을 썼다. 이번엔 장편 분량의 에세이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평론가가 이럴까 싶지만, 방법이 그것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없다. 평론가로서 나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다. 그게 과연 통했을까?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언이라고 잘못 알려진 ‘시네필 3법칙’을 등단한 이후에 몸소 실천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영화 비평을 쓰고, 직접 영화를 만들기.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영화와 좀 더 멀어진 것 같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당연히 만들면서도 알았고, 실제도 다 만들고 나서는 더욱 더 난감했다. 이걸 받아 줄 만한 영화제가 있을까? 어느 영화제에 붙여놔도 안 어울렸지만 그냥 일단 다 출품해 봤다. 그래도 받아 줄 만한 곳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였다. 당연히 떨어졌다. 그것에 낙담한 적은 없다. 떨어질 만한 영화기 때문이다. 서울독립영화제 빼곤 남은 카드가 없었다.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떨어진 것 같았다. 때마침 부산의 김영광 평론가가 운영하는 1인 시네클럽 ‘시네마 언노운’에서 상영작 공모가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서 홍보 게시물을 보자마자 바로 보냈다. 그렇게 다시 부산에 가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이 끝나고 바로 다음 주 화요일인 9월 30일에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게 된 것이다.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진행된 상영회에서 김영광 평론가는 3시간에 육박하는 GV를 진행했다. 그는 ‘뉴웨이브’가 올 것 같냐고 물었다. 그것은 초청된 모든 감독에게 물어본 공통 질문이었다. 그때는 이걸 왜 물어보나 싶었다.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는 3월 7일에 열리는 ‘뉴웨이브 전초전’이란 대규모 행사를 그때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당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분간 뉴웨이브는 안 올 것 같다. 지금은 기획자를 원하는 것 같다. 저런 거(<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만들지 말고, 영화를 틀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토그래프의 ‘이윤영’ 씨가 지금 스타다. 비평계에선 ‘김병규’ 평론가가 스타고 그 이후엔 없다. 등단하고 나서야 안 것이지만 이미 학창 시절부터 시네필이고 파워블로거고 그 집단을 끌고 들어왔다는 점, 다시 말해 인터넷 인간들을 우군으로 끌고 왔기에 리더다. 밑도 끝도 없이 온 나의 경우는 지지기반이 아예 없는 거고… 지역 기반이 있거나 혹은 업계 사람들을 많이 알아서 일을 따가고 잘 나가도, 그처럼 아이콘은 될 수가 없다. 래퍼 더 콰이엇의 명언이 이곳에도 적용된다. “스타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시대가 원해서 나타나는 것에 더 가깝다. 근데 스타가 안 나온다는 것은 그걸 안 원한다는 거예요. 이 시대가… 근데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비평이라면 그것을 소비하는 블로그, 커뮤니티, SNS 사용자를 끌고 와야 하는 것인데, 다음은 어떤 매체일까? 비평을 담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블로그가 아니었을까. 혼자서는 버겁다. 잘난 사람들도 뭉치는 판이다. 아이돌 그룹처럼 모여서 팀으로 활동한다. 소리그림, 키니마 등등. 현장에선 얼추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고 상영 이후에 정리한 말들이다. 평론가의 역할이 좀 더 확대되고 있었다. 나 역시 상영 기획을 해야 하나, 영화를 수입/배급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의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감독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나 수입/배급업자가 아닐까? 활황인 관객 프로그래머와 시네클럽들. 프로그래밍의 외주화. 영화제와 영화관은 이들과 손을 잡고 ‘멋(hip)’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통해 기획, 상영, 비평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융합형 인재가 양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종의 출현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잠복기를 거쳐 다시 부상한지도 모르겠다. [3] ) 나는 단종된 이전 모델의 길을 걷고 있는 퇴화하는 평론가의 종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러한 압력은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쓸 건지보다는 어떻게 상영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생존에 유리해졌다. 글도 잘 못 쓰는데 시장에선 그런 사람들을 더 반기니 말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이러한 시류를 반영이라도 하듯 ‘클럽 시네마’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소리그림과 키니마가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참여해 시네토크를 했다. 여태 이 글을 읽었거나 혹은 영화제를 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해당 영화제에 영화로도, 평론가로도 초대받아 일해 본 적이 아쉽게도 없다. 작가로서의 평론가만 지나치게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하게 됐다. 과감하게 집어던지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비평은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나는 그 스킬을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영화를 보러온 동지들(김영광, 강원우 평론가, 마산영화구락부의 김준희)과 화명역 근처에서 새벽까지 소주 먹고 대단원의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이 먹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식 발표 하루 전날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에서 전화가 왔다.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부문에 선정됐다는 전화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영화로 영화쓰기” 중 섹션 “오진우 단편선”(상영작 중략) 그전에 7월 15일에 “오진우 단편선”이란 제목으로 그간 만든 영상들을 틀 기회가 있었다. 다른 평론가들이 상영 기획으로 저변을 확대하며 예비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때, 나는 영상을 만들어왔다. “ 영화로 영화쓰기 ”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내 영상들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다른 상영작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래서 단독으로 꾸려졌을 것이다. 특색이 있다지만 일종의 갈라파고스. 나도 다른 창작자들과 교류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도마 위의 생선이 되겠다는 것이다. 평론가와 프로그래머는 칼을 들고 도마 위의 영화라는 생선을 바라본다. 일종의 게이트 키퍼로서 영화를 선별한다. 나도 그렇게 남의 영화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스스로 생선이 되었다. 비평의 세계에서 영화 창작의 세계로.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처럼 나 또한 물고기 같았다. 지수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했다. 나는 이것이 진화인지 아니면 퇴화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후자에 마음이 쏠린다. 애초에 내가 평론가로서 잘 풀렸다면 영화까지 만들었을까? 아닐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타입의 영화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계속해서 비평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을 놓아버리고 건너편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미련하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KMDb에 이렇게 글을 쓰기 전에 웹진 아카이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또한 우회. 그 글 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비디오 에세이와 에세이 영화는 내게 고치지 못한 습관 혹은 만성적인 질환처럼 남게 됐다. 이 증상으로서의 시네마 를 발견해 준 담당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향후 미래에 다시 누군가가 이 분야를 디깅했을 때 재발견되어 한국 영화비평사의 B-Side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설령 그날이 안 와도 영화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수밖에 없다.” “오진우 단편선”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나를 최초로 발견한 은인 황민진 프로그래머님의 제안 덕분에 성사된 일이다. 좀 더 강단 있고 잘나가고 예술적인 평론가였다면 행사의 흥행을 위해서 고사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보통 일이 들어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네, 가능합니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쓴 노트를 살펴보자.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비디오 에세이,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뮤직비디오를 아우르는 오진우 감독/평론가의 작업은 단일한 규정으로는 묶이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저 모든 걸 안 하고 있기도 하다. 정확히는 못한다. 저 장르로 나아가 아예 감독이 돼서 뭘 만들 줄을 모른다. 자본화되지 않는 기술력인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감독을 꿈꾼 것도 아니고, 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제작 워크숍을 경험한 적도 없다. 평론가로서 다급해져서 만든 성과일 뿐이다. 내 영상은 그간 본 것들의 총합이다. 다양한 것들을 가져와서 믹스하는 것이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분석한 나의 작업의 특성은 유운성 평론가가 정의한 ‘에세이 영화’의 형식과 공명한다. 유운성 평론가는 에세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에세이란 고전적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부정하는 대안적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포괄하고 자신의 특수한 사례들로 만드는 보편적 형식이다.” [4] 에세이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실제로 에세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와닿는 정의가 바로 저 문장이다. < 영상자료원 가는 길 >(2022)과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저 정의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오진우 단편선”을 본 몇 안 되는 관객 중 유운성 평론가님이 계셨고 유일무이하게 리뷰를 남겨주셨다. 글의 일부분을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상) <영상자료원 가는 길> / (하)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 “ MUBI ”, 유튜브 “(…) 최근작인 <홍상수: 중력과 은총>(2025)은 비평적 몽상의 발걸음이 홍상수 영화를 일렁이게 하는 은밀한 저류와 짜릿하게 만나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다만, 이전 작업들에서 두드러졌던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는 여기서 훨씬 은근한 형상으로, 수줍은 자취로만 감지된다.” 바로 직전 작업인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에서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를 전면에 내세워서 반작용이 있었던 걸까? 하긴 이 영화에서도 내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 영화 또한 직접 보러 와주신 유운성 평론가님은 다음 작품에서는 본인이 직접 출연해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숨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로부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상자료원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도 영화제 맛을 본 작품이다. 여기에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라는 비디오 에세이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 후 MUBI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됐다. 나름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아시다시피 기사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부산을 찍고 서울에 입성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서울독립영화제의 자랑인 ‘독립영화 매칭 프로젝트: 넥스트링크’란 프로그램이 있다. 보통의 영화들은 개봉이 목표다. 서독제의 넥스트링크는 배급사와의 미팅을 주선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2025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상영작 중 배급사 미정인 작품이 이 프로그램의 자격 조건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조건을 갖췄으나 (양심적으로) 개봉이나 배급사를 둘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영화가 내가 바라는 다음 스텝을 위한 땔감이 되길 희망했다. 마침 그런 장면이 이미 영화 안에 있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은 감독의 자리. 내가 바라고 원했던 자리는 평론가의 자리인 모더레이터가 앉은 저 자리. 장편 분량의 영화를 만들고 고작 바라는 게 그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장은 그렇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일단 마무리가 됐다.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제 측에 나를 처음으로 알렸다. 그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를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영화만 틀고 끝날 수도 있다. 개막식 때로 시간을 돌려보자. 개막작 < 무관한 당신들에게 >(2025)를 기획한 문주화 평론가님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일은 저렇게 보는 거다.” 지난 1년간 내가 걸었던 길이 구태(舊態)라고 느껴졌다. 그녀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발탁됐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나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관객석으로 그리고 엉뚱한 사무실로 점점 영화와 멀어졌다. Outro 이것이 나의 지난 1년 간의 이야기다. 손경수 감독이 쓴 <아코디언 도어>의 연출 의도가 떠오른다.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계절처럼 한 템포 늦게 찾아왔다.” 비록 잘한 적도 없지만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아직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이 됐다. 영화에 대한 사랑보단 돈… 거짓말이라도 돈 말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쳤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별다른 변명도 할 수 없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영상자료원 로그인 차단은 해제되었다. 차단 해제 이후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본 영화는 오구리 코헤이의 < 진흙강 >(1981)이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명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진흙강>은 인물들 간의 거리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우동집 아들 노부오는 창문을 통해 강 건너편에 정박한 배 한 척을 본다. 그것은 그에게 신기한 매혹의 세계였고, 잔혹한 진실의 세계였다. 비가 퍼붓는 날 다리 위에서 노부오는 배에 사는 키이치를 만나 친구가 된다. 배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남매의 방으로,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방으로. 배는 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됐지만,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세계였다. 들어도 못 들은 척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남매는 살아간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식사 장면이다. 키이치와 그의 누이 긴코는 우동집에 초대를 받아 밥 한 끼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때 긴코가 즐겁게 노는 동생을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잠시 누린 이 행복이 내 것 같지 않은 느낌. 다른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진실을 목격한 노부오는 남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다음 날 배가 떠나기 시작한다. 노부오는 강을 따라 배를 뒤쫓기 시작한다. 그는 연신 친구 키이치를 불러보지만, 배는 무심하게 아무 말 없이 떠난다. <진흙강> 중 / 사진: <진흙강> 중 (“ Doro no kawa ”, IMDb) * 지난 여름과 겨울에 제 영화를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 감독님들, 평론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영화제 이후 자신의 영화를 내어준 < 관찰자의 일지 >(2025)의 임정환 감독님과 < 겨울날들 >(2025)의 최승우 감독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길이기에 그저 꿈만 같다. “영원히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이제 꿈에서 깰 시간. *** [1] 배우 권해효의 멘트를 문장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했다.( 링크 ) [2]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313쪽. [3] 한국영상자료원의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세대가 다른 시네필들이 만났다.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영화서클”은 지금 활황인 시네클럽의 부상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전 세대의 시네클럽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적하는 고고학적인 방식의 프로그램 같다. [4] 유운성 평론가는 장 뤽 고다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인디아 >(1959)에 대해 남긴 짧은 글로부터 ‘에세이’라는 형식을 다음과 같이 도출한다.(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18, 310쪽.) [5] <관찰자의 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영문 자막이 흥미롭다. “… Dreams can’t last forever … is the theme.”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오진우(영화평론가) l 2020년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데뷔했다. 이후 2021년 한국독립영화협회, 2024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에세이 영화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2025)과 비디오 에세이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2025)를 만들었다.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중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 유운성, 「우정의 이미지들」,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이 글은 2024년 12월 중순에 쓰이고 있다. 12월 3일의 계엄령 선포 이후라는 뜻이다. 연말의 나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해의 영화들을 순위 매기거나 놓친 영화를 돌아보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간 이미지들을 되짚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는 했었던 것인데, 반대로 요즘의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생중계되는 담화와 현안 질의 영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와중에 마감 일자는 다가왔고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청탁을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기분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원래 준비했던 글의 주제와 지금의 내 상태가 관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꽤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준비하던 글을 버릴 수는 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준비했던 대로만 쓰면 왠지 그건 평정심이라기보다는 뻔뻔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 섞인 걱정을 하고, 그럼 준비했던 대로만 쓰는 건 뭔가 아니다 싶고, 굳이 올해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사례를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와 관련된 옛날 얘기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단일한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비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유의미한 의견으로 정교히 언어화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는 각자의 개별적 경험이 스며들며 그 분리 불가능한 총합은 또 하나의 경험이 되어 각자의 마음에 남기 마련이다. 김대환 의 장편 데뷔작 < 초행 >(2017)이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개봉하게 되면 꼭 보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어떤 내용인지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편이 좋고 결말이 참 인상적이라는 말을 더해 주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스터나 시놉시스를 보건대 장르적이거나 플롯 운영에 있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는 아닌 것임이 확실할 텐데,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초행> 포스터와 스틸 <초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결말부는 2016년 가을 무렵부터 2017년 중순까지 이어졌던 광화문 촛불 집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7년 차 청년 커플을 따라가던 픽션의 세계에 돌연하게 쏟아지는 저 리얼리티의 막대함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단순히 허구와 현실의 구별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개념적 차원 그 이상의 가치로 빛난다고 느꼈는데,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가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KOBIS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내가 열심히 광화문 광장을 오가던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촬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이 영화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와 시간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망각하기 어려운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하고 보았지만, 그 물리적 간극을 상쇄시킬 정도로 <초행>의 끝이 주는 감흥은 생생하면서도 생경했다. <초행>에 기입된 광화문 광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한편으로 생경했던 이유는, 영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다는 모종의 관습을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거의 생중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은 환기되는 이상야릇함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작품 내에서 세계를 뒤집어놓는 급속한 반전처럼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난히 이어지던 이 커플이 광장으로 향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상황은, 이야기와 멀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끈끈히 달라붙으며 세계를 입체화하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영은 그 역할을 맡은 조현철 과 김새벽 으로 존재를 전환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삼척, 인천과 특별한 위계서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나의 사적인 경험, 역사적 현실, 영화적 허구가 한 데 섞여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이 기묘한 감각을 여전히 잊기 힘들다. <태풍클럽> 일본어 포스터(일부)와 국내 개봉 포스터 그 ‘너무 이른’ 경험으로부터 7년이 지나 2024년이 되었다. 올해는 정반대로 ‘너무 늦은’ 경험을 했다. 소마이 신지의 < 태풍클럽 >(1985)이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영상과 자막을 구했으며 이불에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한 영화 속의 거친 면모에 받았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태풍클럽>은 1985년 작이니 거의 3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객석이 의외로 꽉 차 있어 놀랐고, 영화가 끝난 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태풍클럽>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청춘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소마이 신지의 다른 영화들과 그의 연출 스타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차이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네필 꼰대처럼 우쭐대는 것은 아닐까? 상영관에 함께 있던 이들과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맞는 걸까?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 감상은 반드시 시차의 문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가 내게 익숙한지 생소한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풍클럽>은 개봉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며 몇몇 평자들에 의해 걸작으로 이야기되어 왔던 작품이었고, 이미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시네마테크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 감각을 수용한 상태에서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처음 본다 해도 기존의 맥락을 신경 쓰지 않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우려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의 유물을 목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2024 월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20위까지의 목록 중 재개봉 영화 목록 (출처: KOBIS / 회색 음영: 한국 최초 개봉 연도, 주황 음영: 당월 순위) 그 인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올해 개봉한 수많은 재개봉작들 때문이다. KOBIS를 참고해 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재개봉작들이 많이 출현했던 해다. 심지어 몇몇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영화와 경쟁해 당당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어쨌거나 이 통계는 한국의 사례이기에 동일한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며 이 흥행에 대한 인과론적 분석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니, 새로운 영화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쪽이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선택들이 일으키는 변화다. 영화 홍보에 있어 언제부터 ‘개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것이 빵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개봉박두’ 나 ‘대개봉’ 같은 한때의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우리네 관객이 마주하는 표현은 ‘개봉’ 대신 ‘공개’라는 심심한 표현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원 사격으로 부상한 OTT와 유튜브를 통과하며 우리는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이미지가 이전과 같은 환상성이나 신비로움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체감하다 못해 익숙해졌다. 내 손안의 영화관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속 릴스와 쇼츠로 맥락이 탈구된 수많은 밈(meme) 이미지들을 나의 취향에 맞는 알고리즘의 설계 아래 부지런히 스크롤링하며 갱신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감상 환경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구속적 방식의 영화 감상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20세기의 시대착오적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올해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해였다. 올해 나는 “무슨 무슨 영화가 재개봉한대”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아니, 그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재개봉이냐?” 가령 표의 4월부터 5월을 보면 < 남은 인생 10년 >(후지이 미치히토, 2022)이 1위를 차지했는데, 이 영화는 고작 1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차라리 재개봉 대신 재상영 내지 스크리닝이라는 심심하고 객관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재개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그 사이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재개봉’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영화가 놓인 위치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10년이 넘기는 했지만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같은 경우에도 ‘옛날 영화’라고 감각하지 않는 쪽인데, 이 영화도 ‘재개봉’을 해서 9월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20년이 넘었는데도 1등을 한다. 10월의 1등, 닉 카사베츠의 < 노트북 >(2004)이다. 이렇게 ‘재개봉’으로 소환되는 (너무 이른) 과거는 추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5년에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나카야마 미호의 출연작,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1995)가 작품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을 예정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로 자막 버전이라고 한다. 아! 그때 그 시절 …… 농담이다. 나는 극장에서 세로 자막으로 영화 본 기억이 없다. 좌우지간, 그런 점에서 올해의 극장은 추억의 공간이다. 다른 한편, 올해는 과거의 수많은 걸작들이 극장에 소환된 해다. 이들은 박스오피스권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시네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사례다. 앞서 말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오시마 나기사의 <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 < 우나기 >(1997), 다시 한 번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 큐어 >(1997), 무엇보다 90년대 한국에 뒤늦게 개봉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1986) 4K 리마스터 재개봉까지 …… 물론 이들의 방문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작’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영화가 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와 결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덩어리 내지 가치 있는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들에 익숙한 시네필들은 기꺼이 극장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라도 걸작이라는 은근한 압박에 둘러싸여 작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상) <전장의 크리스마스>, <복수는 나의 것> / (하) <큐어>, <희생> 그런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의 기획과 같은 대안적인 방식으로 상영되지 않고, 정식 개봉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최신 개봉작은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독립영화와 과거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이분법적 감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2016년에 처음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의 < 할복 >(1962)을 보고, 노인이 된 나카다이 다츠야와 이준익 감독의 대담 상영을 경험하며 그 시간의 아득함을 체감한 바가 있다. (적고 보니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예술영화 시장에는 큐레이팅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홍길동 특별전,’ ‘임꺽정 배우전,’ ‘장길산 기획전’ 같은 문구는 굳이 대안적 상영 공간을 찾지 않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딩 상품이 되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의 단편 < 알레고리 >(2024)와 레오 까락스의 단편 < 잇츠 낫 미 >(2024)가 동시대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주제의식과 레오 까락스라는 공유점으로 매끄럽게 묶여 개봉하는 상황은 시네필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자 선물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호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잇츠 낫 미> 중 그러니 이와 같은 유물의 소환을 다른 말로 ‘교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또 하나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다름 아닌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와 같은 작품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그것이다. 솔직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는 자신이 없지만, 일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의 흥행은 작품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항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대적인 요구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사회적이든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접했지만, 그 수많은 말들 속에는 왜인지 ‘나’의 시선이나 감상보다는 대체로 객관과 분석의 언어로 가득했다. 차이밍량은 “상업영화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예술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예술영화’들을 보고 나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했던 것 같다. <괴물>, <추락의 해부> 중 이제 영화관은 문자 그대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라는 무맥락적인 성격이 아니라, 지나간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혹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네마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속에서 오래된 영화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나’와 무관한 역사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나’의 그때 그 시절 향수에 젖어드는 정서적 힐링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일까? ‘재개봉’이라는 말로 너무 이르게, 혹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늦게 찾아온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비단 올해만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관에는 전통적 의미의 영화 대신 다른 영상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제목을 짚지 않더라도, 가령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스포츠 중계 등은 코로나 이후 극장 수입에 있어 효자 상품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러 가는가? 당연히 해당 작품이 다루는 대상의 팬들이 보러 간다. 그러니 팬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타겟팅 기획물 중 올해 가장 성과가 좋았던 작품은 김덕영 의 < 건국전쟁 >(2023)이다. KOBIS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11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한국에서 상영된 독립예술영화 분류 작품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이승만이라는 아이돌과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만들어낸 기념비적 성과라고 불러야 하겠다. 불현듯 “태극기 부대 속에 들어가서 <건국전쟁> 보기”라는 기획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볼 사람과 보지 않을 사람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품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이지선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내부를 그린 삽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19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를 상연하던 극장을 완전히 탈바꿈하며 바이로이트라는 이름의 극장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호화로운 장식이나 발코니석 같은 부수적 기물을 전부 떼어버리고, 바닥을 깊게 파서 오케스트라를 안쪽으로 은폐하여 관객들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관객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 미학적 파시즘의 설계는 이후 영화관의 메인 모델로 채택되었고, 그를 총애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파시즘과 짝꿍을 이루며 <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 1934)와 같은 걸작으로 당시 독일 인민들의 정신을 통합해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 플랫폼에 둘러싸인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작품을 보는 식이었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식 관람 환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얼 보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024년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영화관 모델의 역사를 떠올린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죽음, 무엇보다 우리와 각자의 문제. 혼란스러운 연말 시국 속에서 그 말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결산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일단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를 골랐다. 이 영화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 룸 넥스트 도어 >(2024) 사이에서 몇 초 망설였는데 그래도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에리세의 영화를 내 리스트에 넣을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어떤 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페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의 < 로봇 드림 >(2023)인데, 아직 쌍둥이 빌딩이 건재했던 1980년대 뉴욕을 기가 막히게 재현한 애니메이션이다. 거기에 절절한 로봇과 개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를 넣어서. 오로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 룩백 >(2024)이다. 창작과 창작자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예술가 영화다. 예술가 영화도 두 편이 더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 다른 하나는 모나 아샤쉐의 < 리틀 걸 블루 >(2023)로, 감독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러분이 프랑스어권 유성애자 여성작가의 피학적인 오토 픽션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멀리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그런다면 여러분은 마리옹 코티아르가 펼친 최고의 명연 하나를 놓치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그와 상관없이 감독은 코티아르에게 자기 어머니 역을 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모녀 이야기는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의 도입부를 여는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꼭 필요한 무언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주게 재미있는 액션물이고,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은 관객들이 뭘 모를 때가 많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긴 관객들은 개봉 당시 존 카펜터의 < 괴물 >(1982)도 대충 넘겼다. 그냥 그렇다고. 로즈 글래스의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3)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필름 누아르로, 몸과 섹스와 퀴어성에 대해 정말 신나고 뻔뻔스러운 장면들을 엮어대는 오락물이다. 아, 그리고 재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션 베이커의 < 아노라 >(2024)와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 신성한 나무의 씨앗 >(2024)이 주는 재미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성노동자가 연결된 계급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인디 영화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룬 사회파 이란 영화가 이렇게 갑자기 대중적으로 (심지어 거의 고전 할리우드스럽게) 재미있어지면 관객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과는 별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의 무게나 구질구질함을 두려워하며 버릴 필요는 없다. 한국영화를 두 편 골랐다. 더 고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방에 종말론적 예언이 나팔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올해 한국영화를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그런 경험을 제공해준 영화가 주류영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올해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퀴어, 특히 여성 퀴어 영화들의 공습으로, 어떤 때는 네 편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려 다들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당사자성 넘치는 사실주의극인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부터 올해 가장 뻔뻔스러운 길티 플레저인 < 히든 페이스 >(김대우, 2024)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드라마 < 정년이 >(2024)의 비겁함이 더 짜증난다. 오정민 의 < 장손 >(2023)은 거의 임권택 과 이두용 의 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면 당연히 올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텐데, 아니다. 이 영화도 ‘재미있다.’ 거의 1세기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를 가족사에 녹여낸 재주,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만큼이나 신기한 건 이런 주제로 신선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은 호오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고른 영화가 남궁선 의 < 힘을 낼 시간 >(2024)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로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전보를 쳐라’라는 옛 할리우드의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놓고 뻔뻔스럽게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들은 많다. 전보로 전달한 텍스트의 다발과, 주제에 공감하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결합한 결과물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연히 ’공익영화’는 비하 단어가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좋은 공익영화와 나쁜 공익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쳐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힘을 낼 시간>은 여러모로 일단 효율적인 공익영화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러닝타임 안에서, 선정적인 실제 사건의 구체적인 재현 없이 한국 연예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취인데, <힘을 낼 시간>은 이 모든 정보와 메시지를 다 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익영화로서의 기능은 영화의 매력에 어떤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이 영화의 다음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초창기의 시도는 김기영 (동명이인이다)의 < 진실게임 >(2000)이다. 아마 더 이전 작품도 있을 거고 사실 여기서 정확한 경계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20년은 더 됐다. 하지만 성공작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들 주저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들은 < 내일부터 우리는 >(윤성호, 2017), < 아이돌 권한대행 >(윤성호, 박현진, 2017), <탑 매니지먼트>(2022)로 이어지는 윤성호 의 시리즈들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개성적인 유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이 아이돌 스토리텔링의 주류가 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로 기억된다. 그 중 가장 처참한 실패는 아무래도 드라마 <청춘시대 2>(2017)였던 거 같은데. 일단 이 시리즈는 왜 아이돌 이야기를 왜 굳이 거기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오타쿠적 선택이었다. <힘을 낼 시간>은 소위 ’망돌‘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청춘시대 2>와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장점이다. 일단 영화는 왜 이 영화가 ‘망돌들’의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주인공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주인공 중 망돌은 ‘파이브 갓 차일드‘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태희( 현우석 )뿐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 ‘러브앤리즈’의 멤버 수민( 최성은 )과 사랑(하서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법 히트한 노래도 한 편 이상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이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더 먼저 떠올리고 제대로 정산을 못 받고 은퇴한 건 태희와 다를 게 없다. 하여간 이 셋은 전재산 98만원을 챙겨들고 제주도 여행을 오는데, 그만 첫날에 한 명이 사고를 내 돈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이 정도면 너무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오는 가학적인 블랙 코미디를 기대해 볼 만도 한 상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 십개월의 미래 >(2020)를 만든 남궁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평화롭고 진지한 길을 간다. 세 사람은 귤 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자기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도 만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따분하게 들린다면 미안하지만, <힘을 낼 시간>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유의 과정에 대한 영화이고 여기에 진지하다. 이 영화에서 치유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힘을 낼 시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의미로’ 머글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다른 케이팝 아이돌 관련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친숙한 이미지를 따르고 그걸 페티시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부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시달리다 버려진 젊은 노동자들을 그린다. 이 영화가 정공 공익영화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무지 재미없게 들리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은 대부분 대중적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건 일단 이 진지함의 정공법이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더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오타쿠적인 선택 대부분을 피해가고 있고 일부러 아이돌 캐스팅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도 여전히 아이돌스러운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 장면 하나 나오지 않고 ‘가상의 아이돌 그룹 만들기 게임’에 집착하지 않으며 골수팬을 등장시키지 않는데도 영화는 부서진 홀로그램 조각처럼 케이팝 그룹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노력한 팬이라면 러브앤리즈 팬픽을 쓰는 게 가능할 정도다. 영화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 <힘을 낼 시간>은 최선 또는 최악의 타이밍에 개봉한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으니 개봉하는 영화에겐 타격이 크다. 하지만 뉴진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아이돌 팬들이 응원봉을 국회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영화에 맞는 시기가 있을까.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