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아니다
- 감독
- 이강현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최지훈, 김경민, 허영진, 정재은, 이광우, 김경민
저주를 받은 사람에게 악마나 사신이 쫓아다니는 설정은 공포영화의 흔한 공식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의 < 팔로우 >는 천천히 다가오는 사신의 공포를 청춘의 불안과 두려움을 엮어 아찔한 분위기를 잡아낸다. 기이한 오프닝 장면이 없다면, <팔로우>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청춘영화다. 제이가 뒷마당의 풀장에서 수영을 할 때면 동네 아이들이 엿본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는 장면은 <식스틴 캔들스> 같은 1980년대 존 휴즈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음악도 비슷한 톤이다.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현실의 벽 안에서 어쩔 줄 모르는 청춘들이 그곳에 있다. 휴와 첫 섹스를 하고 난 제이는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어릴 때는 자유롭게 어디론가 가는 꿈을 꾸곤 했어. 데이트를 할 때에도 차를 타고 멀리 어디론가 가고 싶었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두려움을 느낀다. 채 20살도 넘지 않은 제이는 그렇게 두려움을 말한다. 어린 날의 꿈이 그저 공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좇아 어디론가 가고는 싶지만 현실의 벽이 거대하다는 것도 깨달았으니까. 제이는 말한다. “이제 클 만큼 컸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기억을 잃은 제이는 깨어나면서 의자에 묶인 자신을 발견한다. 휴가 말한다. 누군가 따라올 것이라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결코 너를 만지게 하지 말라고. 멀리 도망가라고.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와 섹스를 해서 넘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다시 따라온다. 다행히도 뛰거나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막다른 곳에만 몰리지 않으면 된다고. 그렇다. 핵심은 섹스다. 영구적이지는 못하지만 섹스를 해야만 일단 피해갈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섹스는 죽음의 지름길이었다. < 13일의 금요일 > 등 슬래셔 영화에서는 섹스를 한 캐릭터부터 죽어 나간다. 섹스를 하고 난 직후, 섹스를 할 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들은 금기를 어겼으니까. 슬래셔 영화의 원조인 존 카펜터의 < 할로윈 >에서 살인마 마이크 마이어스는 섹스를 한 누나를 살해한다.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이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일일이 패러디하면서 조롱하고 역으로 이용할 때에도 ‘섹스’는 중심에 있었다. 주인공은 하필이면 살인자와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한다. 애초에 제물이었던 그녀는 당당히 싸우고 살아남아 최후의 그녀가 된다.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다. 80년대 슬래셔 영화에서 ‘섹스’는 그야말로 원죄였다.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미국 사회를 반영하듯이. < 팔로우 >에서도 언뜻 그렇게 보인다. 휴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제이는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섹스는 죄의 시작인 동시에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섹스를 해야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섹스를 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그에게 저주를 넘겨주게 된다.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어떤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가 단지 원나잇을 원했으니까 저주를 넘겨준다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일까? 휴에서 제이로, 다시 그렉으로, 모르는 남자에게로, 폴로 섹스를 통해 저주가 넘어가는 과정은 기이하다. < 팔로우 >에서 섹스는 단지 저주를 주고받는 도구가 아니다. 그들에게 섹스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제이는 그렉과 섹스를 한다. 왜 그렉이었냐는 질문에, 제이는 답한다. 예전에 한 번 한 적이 있었고, 그렉이라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제이와 그렉이 섹스를 하고 난 다음 이어지는 장면들이 묘하다. 섹스를 한 병원의 침대에서 제이는 흐트러진, 어딘가 퇴폐적인 모습으로 누워 있다. 반면 그렉은 학교의 식당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히려 제이가 홀가분해야 할 텐데, 제이는 타락한 여인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곧 세상에 보이는 남녀의 이미지다. 섹스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떠올리는 남녀의 이미지. 그렉이 죽을 때, 사신의 모습은 그의 어머니다. 쫓아 들어간 제이는 마치 섹스를 하는 것처럼 그렉을 위에서 덮쳐누르며 움직이는 (그렉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신을 보게 된다. 정액처럼 보이는 끈적한 물질이 그들 사이에 있다. 섹스는 제이와 그렉,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존재다. 섹스는 아이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길을 떠나는 행위이고 일종의 여행이 된다. 제이와 친구들은 그렉의 차를 타고 휴의 행방을 찾아간다. 길가의 풍경은 스산하다. 문을 닫은 상점과 공장, 버려진 집들.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계속해서 폐허가 된다. 제이는 주의 깊게 그 풍경을 바라본다. 처음 휴를 만났을 때, 제이는 역할 바꾸기 게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변의 아무나 한 명을 골라서, 왜 그 사람과 바꾸고 싶은지 설명해보라고. 사춘기의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 경계를 넘어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 어린 시절 그들은 중심가에 나갈 때, 주 경계를 넘을 때 반드시 어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다. 섹스는 그들이 가장 쉽게 혹은 일상에서 벌일 수 있는 여행이고 위반이다. 청춘, 사춘기의 아이들은 경계에 있다. 금을 밟고 슬쩍 넘어가 보기는 해도 확 건너가지는 못한다. 아직은 아니다. 두렵기도 하고, 그럴만한 힘도 없다. 하지만 저주를 받은 후에도 제이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동생인 켈리에게도,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놀랄 것이고, 믿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믿지 않는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과 어른의 세계는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통할 뿐이다. 심지어 제이와 섹스를 한 후의 그렉조차도 저주를 믿지 않는다. 제이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여줬어도 믿지 않는다. 어른인 그렉은 믿지 않기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제이가 사신을 만나 처음으로 도망친 곳은 놀이터다. 어린 시절에 놀던, 나무와 모래 그리고 그네가 있는 놀이터.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비합리적이고 광기어린 초자연적 존재가 완전히 무시당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 제이와 폴이 처음으로 키스를 했던 그곳, 수영장에서 저주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 이 결말이 허술하다는 비판이 많이 있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총에도 죽지 않는 사신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하지만 < 팔로우 >의 사신은 형체가 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건드리면 분명하게 물질적인 형체가 있는 존재다. 형체가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 해도 약점은 있다. 공포영화나 판타지에 나오는 괴물의 캐릭터들이 그렇듯이. 그렉이 죽고난 후, 제이는 모르는 남자와 섹스를 한다. 충동적으로 처음 본 남자들과. 그리고 제이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잠시의 시간뿐이겠지만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 보이는 장면에서, 제이가 수영을 하던 뒷마당의 비닐 풀장이 부서져 있다. 물이 빠진 채로 널브러져 있다. 제이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풋풋함이 사라진 것이고, 더 이상 아이들이 엿보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폴이 찾아와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하지만 피한다. 제이는 이미 죽은 길 건너 그렉의 집을 바라보고, 폴은 화장대에 붙여진 수영을 하는 제이의 사진을 본다. 순수했던 그녀의 시간, 존재. 휴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 그 시간 이전의 순수했던 지점으로. < 팔로우 >는 존 휴즈와 존 카펜터의 작품들을 뒤섞은 청춘 호러영화 같다. 그들이 사는 교외의 풍경은 < 할로윈 >을 연상시킨다. 느리게 흐르는 영상과 끼걱거리는 음악도 그렇다. 우울하고 섬뜩하지만 동시에 반짝거리는 제이와 친구들의 청춘을 그려낸다. 젊기 때문에 그들이 맞닥뜨리는 죽음의 깊이, 어둠의 빛깔은 한없이 검다. 친구인 야라는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준다. ‘가장 심한 고통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시간 후에, 10분 후에, 30초 후에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를 떠나고 더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가장 끔찍한 건 그 확실성이다.’<팔로우>는 죽음의 확실성을 천천히 다가오는 사신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정말로 끔찍했을 것이다. 가장 밝아야 하는 순간에 가장 어두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순간은. 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수순이다. 휴가 말하지 않았던가. “가끔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그런 비극이 세상이고, 언제 어디에서건 우리는 사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사신을 늘 기다리며.
정리에 관한 의문. 목록을 따라가다가 < 연화 >에 이르면 이 영화는 <연화>와 < 연화(속) > 두 편으로 나뉘어 분류되어 있다. 물론 한 편의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누는 것은 신기한 일은 아니다.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 >는 전체 10시간 13분 상영시간을 각각의 토픽에 따라 네 편으로 나누었으며, 왕빙의 < 철서구 >는 9시간 11분에 각각 제목을 다시 달고 세 편으로 나누었다. 고다르는 좀 더 섬세하게 나누었다. <영화사(들)>은 4시간 24분을 네 개로 나눈 다음 다시 각 분류 안에서 장(chapitre)을 A와 B로 나누었다. 구태여 예를 떠올린다면 미조구치 겐지가 1941년에 만든 <겐로쿠 추신구라(元祿 忠信藏)>일 것이다. 4시간 1분에 이르는 이야기를 겐지는 그냥 간단하게 ‘第 一篇’과 ‘第 二篇’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 두 편은 경우가 다르다. 분류와 달리 <蓮花>라는 제목으로 1975년 3월 8일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였고, 그때 신문광고전단에 따르면 ‘邦畵史上 初有의 3時間 40分 上映!’이라고 되어있다. 그 아래 ‘第 1部 離別篇’ ‘第 2部 復讐篇’으로 친절하게 이 영화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되어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필름에는 두 편을 나누는 그 어떤 간(間)자막(inter_title)이나 별다른 표시가 없다. 또한 두 편 사이는 16년을 건너뛰고 이야기가 진행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第 2部 復讐篇’이 시작될 때 별다른 자막이나 소개가 없으며 앞의 이야기에 대한 간단하게 요약된 줄거리의 소개도 없다. 무엇보다 어디에도 <연화 (속)>이라는 제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상영시간을 고려해볼 때 그 당시 상영된 할리우드 영화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 < 벤허 >, <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서 볼 수 있었던 휴식시간(intermission)도 없다. 만일 <연화>가 신문 전단처럼 두 편으로 나누지 않고 상영회차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한 번에 전체를 상영했다면 임권택 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긴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일 것이다. 민태호 대감 선혜 옹주 정실 부인 연파 스님 이윤재 연화 이 두 편 혹은 한 편을 둘로 나눈 영화 < 연화 >는 1973년 9월 23일에 첫 방영을 한 다음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5월 3일에 종영한 동명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연화>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는 아니다. 나는 이미 방송 드라마 <불청객>을 영화로 옮긴 < 신세 좀 지자구요 >를 다루었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첫 번째 감독도 아니다. 종종 영화관객과 시청자를 사이에 놓고 영화와 텔레비전의 적대적 관계를 설명하는 미디어 경제학자들의 일반론과 달리 1970년대에 한국영화는 텔레비전과 가까이 있었다. 이 영화가 상영시간이 길긴 하지만 이야기가 복잡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 신분을 속이거나 혹은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관계 속에 놓이기 때문에 인물 사이의 관계가 다소 장황하다. 그러니 우선 다소 어수선한 줄거리를 감상할 것. 조선시대.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차례로 암살하던 민태호 대감은 선화옹주와 부마인 이윤재 가족을 몰살한다. 그러나 이윤재는 상처를 입고 빠져나오고 선혜옹주는 출산직전의 몸을 끌고 회암사로 흘러들어온다. 마침 민태호의 정실부인이 임신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이었다. 주지인 연파스님은 선혜옹주에게는 출산한 딸을 숨기며 사산했다고 말한 다음 민태호의 정실부인에게는 절로 흘러들어온 여인이 아이를 낳은 다음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니 딸로 들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정실부인은 기뻐하면서 민태호 대감에게 이르니 간절히 자식을 바라던 그도 기꺼이 승낙한다. 그런 다음 연파스님은 정실부인에게 지금 양반 댁에서 막 씨받이로 아이를 낳고 빼앗기자 실망한 나머지 절을 찾아온 여인이 있으니 그녀를 젖 물리는 유모로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다음 선혜옹주를 추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선혜옹주는 자기를 죽이려던 민태호 대감댁에 양주댁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유모로 들어가 자기 딸에게 젖을 물리면서 목숨을 구한다. 다만 옹주는 그 어린 아이가 아직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온갖 우여곡절. 그러는 중에 민태호 대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옹주를 강제로 겁탈하려 든다. 이에 거의 자포자기한 옹주가 자결을 하려들자 연파스님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준다. 그러는 동안 이윤재는 복수를 하기 위해 민태호 대감댁에 나타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훗날을 도모하며 떠난다. 이때 옹주는 남편인 이윤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 부 끝) 16년이 흘러 어느 덧 연화는 규수가 된다. 혼처가 사방에서 날아들고 그 중에 민태호 대감의 측근이자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원수중의 하나인 김초선 대감댁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알자 이윤재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이 결혼을 저지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윤재가 보낸 자객은 함지기가 함을 들고 가던 길에서 기다리다가 차례로 활로 쏘아 쓰러트리고 그 과정에서 민태호 대감은 양주댁이 선혜옹주이고 연화가 이윤재의 딸이며 이 모든 것이 연파 스님의 계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연화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위기에 몰렸다고 생각한 민태호 대감은 이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 다음 참수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윤재와 마주선 민태호 대감 앞에서 정실부인은 모두를 살리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서 이윤재에게 기회를 준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민태호 대감을 유배 보내고 부마 이윤재와 선혜옹주는 복권한 다음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연화는 원래 부모의 손으로 되돌아간다. (이 부 끝) 아마 줄거리만을 쫓아왔다면 < 연화 >가 당연히 출애굽기의 예언자 모세의 성장담의 변주라는 것을 알 것이다. 죽어야 할 아이.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적의 손에서 자라나 훌륭하게 크는 그 아이. 유모가 된 어머니. 그렇지만 그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비밀로 감추어야 한다. 아들이 딸이 되었고 기독교는 불교로 바뀌었고 이집트는 조선이 되었지만 기적을 행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거기까지이다. 그런 다음 먼저 내가 두 개의 텍스트 사이에서 할 수 없는 불가능에 대한 전제. 가능하면 원작 드라마의 배우들을 그대로 옮겨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방송과 영화의 차이는 연화 역할이 김창숙 에서 이효춘 으로 바뀌었으며, 연화의 아버지 이윤재 역할이 김동훈 에서 윤양하 로 바뀌었다. 나는 원작 방송 드라마를 보지 못했고, 또한 방송으로부터 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일부 배역의 교체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배역에 대한 연기자의 변화 사이에서 오는 차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인물의 성격에 대한 변화나 연기의 새로운 각색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게다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영화처럼 어린 연화와 선혜옹주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일 편과 시집갈 무렵이 된 성장한 연화와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편으로 구성한 영화처럼 거의 절반의 비중으로 나누어져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드라마의 균형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또한 텔레비전 연속극을 연출한 김재형에서 영화를 연출한 임권택 으로 옮겨오면서 아마도 있을(수밖에 없는) 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비교해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영화 <연화>에 의지해서만 말할 것이며 거기서 가끔 건드리는 연속극 드라마와의 비교는 추론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편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영화 <연화>는 연속극 <연화>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영화이며, 그러므로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관객으로 이행될 때 영화는 연속극의 기대의 지평 안에서만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지평. 성공의 전제가 안겨준 감옥. 겉보기에 단순하게 여겨지는 이 질문은 생각보다 기괴한 역설을 담고 있다. 이미 인물들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며, 영화는 그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연화는 매번 물어볼 것이다. 전 어떻게 하면 되나요.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한 걸 그대로 반복하렴. 그런 다음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주기 바란다. <연화>는 인물들 사이의 역할 놀이이며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술래잡기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긴장은 누가 술래인지를 알아내는 게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시작할 때 이야기 바깥에 있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핵심은 우리만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언제 이야기 속의 누군가가 함께 공유하느냐는 것이다. 선혜옹주는 언제 자기가 젖을 물리고 있는 어린 연화가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가. 그때 민태호 대감이 먼저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이에서 정실마님은 언제 그 지식을 얻게 될 것인가. 왜 매번 이윤재는 사태를 망쳐놓는가. 연화는 언제 자기를 낳은 엄마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인가. 민태호 대감이 연화가 자기 딸이 아니라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될 것인가. 그런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먼저 알게 될 것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대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 지식의 경주는 연파스님이 쳐놓은 덫이지만 동시에 그 또한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매번 결정의 순간을 정해야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시간은 동시에 그 자신의 기회를 그만큼 잃어버리는 반비례의 역학을 작동시킨다. 말 그대로 누구도 예외 없는 구조의 노예들. 무엇이 앞설 것인가. 그 뒤에 따라오던 것이 만일 앞지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여기서 영화의 곤궁.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미 모두 본 것이며 게다가 충분히 즐긴 다음이다. 취소되어버린 효과. 이미 연속극에서 했던 동작을 구조 안에서 고스란히 반복해야 할 때 시청자들이 관객이 되어 거기서 다시 한 번 보는 고통스러운 눈물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난 이미 잘 알고 있어, 지금은 저렇게 눈물을 흘리지만 곧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이렇게 잘 해결될 거야, 그러니 울지 마세요. 그때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작은 이미 해본 것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기계적인 일련의 숙련된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시청자(이자) 관객이라는 이 이상한 자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앞서 간다. 그러면서 돌아보는 자리. 항상 돌아보는 자리. 아무리 이야기가 달려가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돌아보는 자리. 서로 뒤집힌 위상 관계는 단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반복하는 단순한 관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다시 바라볼 때 모든 것은 원래의 모습에로 되돌아오는 내내 순수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위기. 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인물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사건이 나온다기보다는 사건을 위해서 인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거기 머물기 시작한다. 이때 임권택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말. 곤궁에 처한 영화. < 연화 >에서 영화가 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해낸 그 나머지가 아니라 이미 해낸 것 안에서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외형적인 차이가 있다. (그 당시의 텔레비전 모델에 따라) 모니터 4대 3 비율의 화면을 2.35 사이즈의 시네마스코프로 찍었으며, 흑백 화면을 칼라 스크린으로 옮겼다. 하지만 난처한 약점은 칠 개월에 걸쳐 매주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제 일 편은 1시간 46분, 제 이 편은 1시간 49분으로 압축시켜야 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임권택 (과 신봉승 )은 종종 영화 <연화>의 관객을 이미 드라마 <연화>를 본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단지 요령 있게 압축하거나 일부를 잘라내는 대신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든 다음 어리둥절할 정도로 건너뛴다. 그래서 주변의 인물들 중의 일부는 때로 사라지고 한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오기도 한다.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은 상태의 이야기. 임권택은 그 이야기를 영화의 경제학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이 기나긴 이야기는 고작해야 민태호 대감의 99칸 저택(으로 설정된 한옥 가옥) 안의 민태호 대감의 방과 선혜옹주가 유모로 머무는 방, 그리고 정원, 이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감댁 안의 감옥, 그런 다음 회암사의 불당과 그 곁에 자리한 작은 쪽방, 그리고 잠깐 등장하는 이윤재와 그 무리들이 머무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산채(라고 설정된 외부와 간단하게 지은 세트에서 찍은 내부)가 전부이다. 물론 중간에 오가는 길이 등장하지만 숲속 길로 설정되어 있어서 별다른 엑스트라를 오가게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 설정을 무심코 지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보라. 이 영화는 사극이며 아무리 적은 숫자의 보조 출연자도 조선시대의 의상을 입어야 한다. 게다가 일단 도읍 안으로 들어오면 수십 명의 등장인물이 동시에 움직여야 생활공간이 만들어진다. 영화는 그런 예술이다. 아직 디지털 기술은 등장하지 않았으며 거기 사람이 필요하면 하여튼 거기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설정은 무리한 축소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우리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게 항상 가옥 바깥으로 나오면 마치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시퀀스를 연결하기 위해서만(bridge shot) 그 쇼트가 필요하다는 듯이 스쳐지나가면서(insert shot) 정보 단위의 기능만을 부여한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가옥 구조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회암사 로 이동한다. 물론 여기서도 중심을 이루는 장소, 대부분의 쇼트가 진행되는 공간은 민태호 대감의 저택이다. 이야기는 이 집이 모든 인물들을 자석으로 끌어당기듯이 진행되고 그래서 마치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차례로 이 집으로 모여든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연화가 아니라 이 집이다, 라고 이야기 전체를 다시 쓰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임권택은 민태호 대감댁 안을 이리저리 오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서도 이야기만을 오가고 동선을 최소로 연결시키면서 두 개의 방 이외의 어떤 방도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감옥을 오갈 때에도 모든 쇼트는 감옥 내부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에 대감 댁의 안채에서 감옥까지 연결하는 동선의 어떤 물리적 장소의 쇼트를 더하지 않고 그냥 건너뛰어 감옥 실내로 들어온다. 물론 여기서 임권택이 한옥 가옥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고작 삼년 후에 보여주게 될 < 족보 >에서와 같은 우아한 동선은 어디에도 없다. <연화>에는 오로지 이야기 안에서 경제적인 방법으로 설계된 동선과 쇼트의 실용적인 사용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화>에서 어떤 장면들은 양반 저택 가옥 구조 안에서 마치 폐쇄공간처럼 이루어진 희박한 공기들과 그 안에서 매우 제한적인 동선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를 만들어낸 < 씨받이 >의 어떤 순간들과 공명한다. 혹은 선혜옹주와 이윤재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flash_back) 두 사람이 운우지정을 나누듯이 가을 낙엽 위를 뒹굴 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춘향뎐>에서 이몽룡과 춘향의 동일한 조건의 장소에서의 동일한 제스처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는 단지 같은 장면 혹은 같은 분위기의 반복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그 안에는 되돌아오는 같은 자리에 대해 임권택이 이미 해본 것으로부터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그런 다음 거기서 자기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재현의 요소를 (임권택의 표현을 빌리면) “의심하면서” 반복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의 사유를 확보하려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매번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이야기와 표현 사이에서 어떤 거리를 확보해나간다는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재현의 이미지들 사이에 점점 더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만들어나갔지만 동시에 때로 기괴할 정도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였다. 여기에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헤겔이 말하는) 불행한 의식이라고 부를만한 유령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 대신 < 연화 >는 처음부터 무언가를 포기한 것처럼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멈춰 서서 하나의 씬을 매우 긴 시간 동안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임권택 의 영화에서 마주치는 인물에 대한 탐구나 이야기 속의 삶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가끔, 아주 가끔 그 어느 순간의 디테일에서 종종 이야기 안의 이질적인 요소에로 이끌려 완전히 다른 공기의 장면이 연출되는 당혹스러운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이 디테일이 다른 전체와의 조화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연화>를 보는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모른다. 물론 임권택이 여기서 처음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이미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 갑자기 나타나 스키를 타고 달려 내려온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를 다룬 전멸의 마지막 시퀀스는 마치 영화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또한 ‘원숙한’ 임권택의 영화에서도 갑자기 그런 순간이 나타난다. 그걸 가장 미학적으로 활용한 시퀀스는 물론 < 달빛 길어올리기 >의 마지막 월곡 마을에서 한지를 제작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구원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연화>에서는 이런 장면들과는 다르다. 그저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다른 장면들의 디테일이 보여주는 위험할 정도의 확장은 종종 임권택이 그 무언가에 매혹되어 마치 그 힘에 기쁘게 굴복하듯이 거기에 이끌렸다는 흔적을 남기는 반면 여기서는 이야기로부터 영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느 순간을 잡아채듯이 붙잡은 다음 거기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머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애처롭게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표현. 영화를 방어하려는 안간힘. 임권택은 여기서 텔레비전에로 이끌리는 이야기를 어디선가에서 멈춰 세우기 위해 그 장소를 찾으려고 마치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탑골댁 이윤재 두 개의 장소 중의 첫 번째 장소. < 연화 >는 피비린내는 정적의 암살에서 영화가 시작한다. 민태호 대감이 살생부에 적힌 이름들을 붉은 색 먹으로 지우면 다음 장면은 자객들이 무자비하게 암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라는 배경 이외에는 어떤 설명도 없는 이 도입부는 거기서 더 반복되지는 않는다. 마치 선혜옹주와 이윤재 부마의 암살이 그 최종 목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더 이상 새로운 희생자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직 그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민태호 대감으로서는 아쉽게도 이 한 번의 실패가 그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미 말한 것처럼) 마치 연화는 모세처럼 민태호 대감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가 된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무자비하고 교활하며 음모와 술수에 능한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도입부가 끝나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는 마치 잠시 동안 자신의 역할을 잊은 것처럼 정실부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이런 표현이 몹시 어색하지만 그만큼 영화 안에서 어색하게 표현된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으로부터 후퇴해서 가정적인 인물로 축소된다. 이따금 그가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행방을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그 둘을 혈안이 되어 추적하지는 않는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궁궐로부터 그의 저택으로 행동반경의 중심을 옮기면서 그의 관심은 권력에 관한 정치적인 영역에서 욕망이 이끄는 성적인 대상에로 옮겨간다. 물론 좀 따분해지기는 하겠지만 푸코에 의지해서 그 둘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심지어 그 둘은 동일한 내용의 서로 다른 판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임권택 은 민태호 대감이라는 주체가 권력과 리비도 사이에서 어떻게 기호에로 옮겨가는 지를 다루지 않는다. 또한 연화가 어떻게 그 사이에서 교환관계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그것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혹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임권택은 그걸 하려고만 결심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은 정념의 예술가이다. 때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일단 정념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신체가 파괴될 때까지 막다른 골목에 간다. 그것이 그렇게 임권택의 영화에서 자주 신체훼손의 장면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혹은 원작과의 약속이 그것을 가로 막는다. 만일 정말 그 안으로 들어갔다면 영화는 무시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코드들의 활동이 몹시 음란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청자 관객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즐긴 텔레비전 드라마의 이면 앞에서 그 기쁨의 정체를 마주보며 당황했을 것이다. 여기서 민태호 대감을 이끄는 대상은 양주댁으로 분한 다음 (자신의 딸인지 아직은 알지 못하는) 연화의 유모로 별채에 들어간 선혜옹주이다. 정실부인은 아직 얻지 못한 아들을 잉태하기 위한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해 회암사에 가느라 종종 집을 비우고 그 순간은 민태호 대감의 기회이자 선혜옹주의 위기가 된다. 나는 (어쩌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당신에게 좀 더 많은 연상 작용을 끌어내고 싶다. 유모는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서 들여놓은 여인이다. 그녀는 아이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매번 자기의 옷고름을 풀고 여민 저고리를 풀어헤쳐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물리지 못한 채 차오르기 시작해서) 지금 젖으로 가득 찬 유방의 유두를 아이의 입에 물려야 할 것이다. 아이가 우는 것은 젖을 달라는 신호이다. 이때 이 소리를 안채에서 몸이 달아오른 민태호 대감도 들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신호를 받자마자 여기서 아이를 괄호 치고 양주댁의 몸을 떠올리기 시작할 것이다. 환상의 공식은 몸의 부분이 욕망의 대상이라는 자리에 등록하자마자 성적인 가장자리로부터 금방 중심을 탈환할 것이다. 이제 민태호 대감은 양주댁의 유두의 대상이 된다. 이 말을 잘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목적어를 반대로 쓴 것이 아니다. 이때 임권택은 재빨리 민태호 대감의 환상에 몰두하는 대신 그가 다가가려는 대상에 대해서 행하는 위계적 부분에 집중하면서 영화의 지위를 되찾으려고 한다. 구조는 좀 더 복잡하고 이야기는 음란해진다. 여기서 임권택은 신호의 응답을 위해 다른 장면을 더한다. 민태호 대감에게는 자식을 얻기 위한 구실로 그의 잠자리를 위한 내당마님인 둘째 부인 탑골댁이라는 젊은 여인이 있다. 그래서 잠자리가 필요할 때마다 민태호 대감은 그녀를 찾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다소 파격적인 잠자리 장면을 포함시켜 놓았다. 그런 다음 민태호 대감은 두 번 다시 그녀와의 잠자리를 찾지 않는다. 거의 모든 설정을 예상할 수 있는 드라마의 컨벤션 안에서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은 탑골댁이 정실부인 흉내를 내면서 회암사에 자식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러 왔을 때 신분을 숨기고 잠시 거기에 몸을 의탁하러 온 이윤재를 보고 한 눈에 빠져드는 설정이다. 여기서 탑골댁이 이윤재를 탐하는 태도는 민태호 대감이 선혜옹주에 이끌리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판본이다. 하지만 차이는 단지 그 둘 사이의 전도된 성별만이 아니다. 하나는 여기가 지금 조선시대라는 것이며 유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신분사회라는 조건이다. 탑골댁이 이윤재에게 욕망의 시선을 던질 때 그녀는 단지 도덕적인 금기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태호 대감의 자리에서 권력의 네트워크를 펼치는 것이다. 이때 선혜옹주와 이윤재가 동일한 고난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과 신봉승 )은 변주를 가미한다. 이윤재는 탑골댁이 민태호 대감의 내당마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복수를 위해서 그 곁으로 다가갈 기회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유혹에 응답한다. 그의 목적에 따라 이윤재의 행동이 정당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수단으로 놓인 탑골댁의 자리에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있지 않다. 임권택은 선혜옹주와 이윤재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목표는 그 둘의 사연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그건 부차적인 자리에 머문다. 어쩌면 이것은 임권택의 의도 바깥으로 벗어난 그 어떤 힘이 마치 오작동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 작용하는 것이기도 한데 선혜옹주가 고난을 겪는 동안 마치 이윤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여기서 가정을 해보고 싶어진다. 만일 선혜옹주가 이 상황을 단지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우고 민태호 대감의 유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섹스를 즐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선혜옹주는 자신이 양주댁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것이며 민태호 대감은 섹스를 했다고 할지라도 양주댁이 선혜옹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살려둘 리가 없다. 또한 선혜옹주가 침묵을 지킨다면 이윤재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엔 단지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 티켓 >에서 몸을 파는 막내가 대학생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켓을 끊고’ 손님과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낼 때 섹스를 즐기는 장면을 알고 있다. < 창, 노는 계집 >에서 영은은 사창가에서 도망치지만 그녀를 잡으러 온 ‘사냥꾼’에게 붙잡힌 다음 섹스를 할 때 그 행위를 즐긴다. 임권택 의 여자들은 순결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의 부름에 대해서 욕망이 거절하는 행위를 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녀들에게 섹스를 하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종종 별개의 행위이다. 하지만 < 연화 >에서 선혜옹주는 사실상 목숨을 걸고 거절을 한다. 이때 이 장면을 임권택은 거의 멈추듯이 세운 다음 갑자기 디테일의 주름에 집중한다. 민태호 대감은 정실부인이 집을 비우고 밤이 되자 탑골댁 자택에 가는 대신 별채에 어린 연화와 기거하는 양주댁으로 위장한 선혜옹주의 방을 찾는다. 말하자면 그는 공개적으로,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도덕적으로 허락된 간편한 잠자리를 포기하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양주댁에로 향한다. 별채에 들어서면서 민태호 대감은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딸 연화를 보기 위함이니 야심한 밤에 찾았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설명을 한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며 그는 연화에게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선혜옹주에게는 이 방문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이 집은 민태호 대감의 집이며, 이 방은 연화를 위한 방이며, 민태호 대감은 연화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룩은 민태호 대감이 아니라 선혜옹주이다. 상황은 탐정소설에서 말하는 밀실공간의 탈출에 관한 퍼즐 게임이다. 민태호 대감이 선혜옹주가 연화와 함께 머무는 별채에 들어서자 이제까지 둔하게 움직이던 이 영화의 기호들이 갑자기 예민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민태호 대감이 왜 이 방에 들어섰는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목표로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이때 선혜옹주가 그 행위의 전략을 차단하고 진행을 방해한 다음 다시 그를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지가 이 시퀀스의 구경거리이다. 구경거리? 어쩌면 이 표현이 다소 잔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임권택 이 여기서 이 작은 형태들이라고 할 디테일을 전체의 구도 안으로 가져올 방법을 찾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다.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하면 즉각적으로 관객 시청자는 예상치 않은 배신을 당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질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자신의 곤궁 안에서 최소의 디테일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민태호 대감은 방 안에 들어선 다음 먼저 시선으로 선혜옹주의 몸을 더듬거린다. 이때 하필이면 아기 연화는 한밤중에 울면서 젖을 달라고 보챈다. 그때 민태호 대감은 연화의 신호에 슬그머니 자기의 메시지를 더하면서 빨리 젖을 물리라고 재촉한다. 선혜옹주가 젖을 물리려면 저고리를 풀고 옷소매를 헤쳐야 한다. 자발적인 탈의. 이때 민태호 대감은 선혜옹주의 몸 한끝에 자신의 몸 한끝을 접촉하기 위해 그 좁은 방에서 미처 일어서지도 못한 채 앉아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접근한다. 그의 자리에서 갖추는 최소의 예절. 어쩌면 당신은 여기서 크게 웃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까지 민태호 대감이 자신의 목표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무자비하며 단호한지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선혜옹주는 지금 이 방까지 (연파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산으로” 피신해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민태호 대감이 취하는 행동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소심하며 예의바른 태도를 취한다. 당신은 즉각적으로 내게 맞받아칠 것이다. 아니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 이건 섹스에 관한 장면이라구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핵심은 임권택이 여기서 디테일의 긴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한 모델이 행위와 목적 사이에 놓인 불연속성의 통사적 종합을 이루는 정념의 위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선혜옹주는 이 위선을 이미 한 눈에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놓여있는 정념의 정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소 공허한 비대칭의 간극이 놓여있다. 민태호 대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선혜옹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선혜옹주는 민태호 대감의 접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섹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그녀가 지켜야하는 것은 정조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이다. 우리를 다소 따분하게 만드는 것은 이 둘 사이에 선택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정조를 포기했을 때 거기에는 단지 섹스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정체의 비밀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반면 정체의 비밀을 포기했을 때 선혜옹주는 생명을 잃을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곁에 있는, 하지만 아직은 미처 알지 못하는, 딸 연화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만일 여기서 민태호 대감이 자신의 양녀 연화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을 동원해서 만일 섹스를 요구했다면 시청자 관객이 겪게 되는 긴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때 민태호 대감의 제안은 간단하다. 당신이 나와의 섹스를 즐겨준다면 당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당신의 딸(이자 자신의 양녀) 연화의 목숨도 살려 줄 것을 약속하겠노라. 첨언. 그 약속을 지킬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시청자 관객을 괴롭히는 상황은 약속을 지키면서 반복해서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시청자 관객을 가장 괴롭히는 방법은 반복해서 약속을 지키면서 선혜옹주가 조금씩 민태호 대감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만일 이 역할을 이순재에서 최무룡, 혹은 김진규로 바꾼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임권택은 이 위험한 게임의 거의 근처까지 가본 적이 있다. 나는 이미 < 티켓 > 혹은 < 씨받이 >로 이어지는 주인공과 반대의 가해자 사이에서 성립된 실패한 관계의 이면에 맴돌고 있는 정념의 예를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임권택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까지 물러난다. 그래서 민태호 대감이 마치 자기 신분의 본본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제스처가 등장한 것이다. 두 개의 장소 중의 두 번째 장소. (편의상 나눈 것처럼 보이는) < 연화 (속) >은 광고에서 소개하는 것과 달리 ‘第 2部 復讐篇’이라기보다 차라리 ‘第 2部 受難篇’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야기는 갑자기 16년을 건너 뛴 다음 여전히 민태호 대감의 집에서 진행된다. 그 긴 세월 동안 변한 것이라곤 연화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는 것 밖에 없다. 선혜옹주는 여전히 유모로 남아 연화를 키우고 있다. 구태여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한다면 이윤재가 산채를 짓고 그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과 모여 복권의 날을 준비하고 있(지만 임권택 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세월을 건너뛰어서 연화가 세상 이치를 알 나이가 되었을 때 긴장의 중심에는 이제 그녀가 언제 어떻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스스로 이 드라마 안에서 주체로 거듭날 것인가, 라는 데 있을 것이라고 나는 어림짐작했다. 왜냐하면 전편에서 갓난아기 연화는 마치 맥거핀처럼, 혹은 알리바이처럼, 때로 메시지처럼, 비유적으로 (에드가 알랜 포우의) 떠돌아다니는 편지처럼, 그렇게 네트워크 사이를 부유하는 기표처럼 보였다. 물론 이 아기는 그때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된 연화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임권택은 시작하자마자 무언가를 서두르듯이 설명해나갔으며 응답은 앞질러 왔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 다음 고작 23분이 지났을 때 연화는 편지를 받고 모든 비밀을 다 안 다음 그 사실을 유모(이자 친모인) 양주댁(으로 위장한 선혜옹주)와 공유한다. 이제 연화가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민태호 대감과 그 아내 밖에 없다. 하지만 민태호 대감은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사실을 떠올린 다음 연화의 출생의 비밀뿐만 아니라 선혜옹주의 비밀까지도 알아낸다. 여기에 별다른 긴장이나 위기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다소 짜증스러울 정도로 이윤재는 사태를 점점 악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태를 해결해나간다. 말하자면 이윤재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의미를 아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임권택 은 그들 사이의 비밀을 사이에 둔 게임에서 머뭇거리는 대신 이야기를 민태호 대감 댁의 감옥으로 옮겨온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민태호 대감은 연화와 선혜옹주, 그리고 연파 스님을 각각 다른 옥에 가둔다. 연화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선혜옹주는 비로소 양주댁이라는 거짓된 위장을 버리고 자기의 본래 자리를 되찾은 셈이며, 연파 스님은 이제 자신이 누구의 편인지 분명하게 한다. 여기서 더 남은 게 있을까. 임권택은 갑자기 여기에 속편 이야기의 진수가 담겨있는 것처럼 감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작은 옥사로 무대를 옮기면 이제 더 이상 야외에서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때 실내는 기후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무대는 연출의 일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운영될 수 있어진다. 둘째, 감옥은 다른 공간과 달리 사람을 감금시키는 곳이기 때문에 원하는 등장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은 다음 이야기를 고정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장소의 경제학. 임권택은 여기가 단지 경제적인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감정의 충돌이라는 액션을 보여주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것 같다. 감옥 입구를 기준으로 연화를 왼쪽 윗방에 가두고 선혜옹주를 그 옆방에 가둔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옆에 있기는 하지만 볼 수가 없다. 그런 다음 연화의 맞은 편 감옥에 연파 스님을 가둔다. 이 배치가 효과적인 이유는 선혜옹주에게 다가가 창살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가로가 긴 테크니스코프에서) 항상 그 사람의 뒤편에 연파스님이 보이기 때문에 두 사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종의 후광효과와 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감옥 효과에 대해 설명을 하는 사람은 연파스님이다. 그는 갇힌 다음 민태호 대감의 호위 무사들에게 말한다. “지금 옥에 갇힌 사람이 나인가, 자네들인가” 물론 그들웰엽?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 사람을 가둔 다음 차례로 각자의 방법으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 연화 >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그건 우리 생각과 달리 선혜옹주나 이윤재, 혹은 연화가 아니다. 임권택이 처음부터 그 인물을 여러 차례 등장시켰지만 거의 마지막 자리까지 진정한 임무를 미루어 두었다가 여기서 그 결정적인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넘기는 사람은 민태호 대감의 정경부인이다. 약간의 복기. 정경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 민태호 대감의 후대를 잇지 못하자 한편으로는 첩을 두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회암사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예기치 않은 연으로 선혜옹주와 이윤재의 딸 연화를 양녀로 입양시키고 선혜옹주를 유모로 집에 들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설명되지 않지만 민태호 대감은 주변의 모든 인물들에게 포악스러우며 무자비한 암살 지시도 망설인 적이 없지만 언제나 정경부인의 뜻을 존중하고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대한다. 그는 다른 이에게 정경부인을 평하면서 “저 사람은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감옥에서 정경부인의 등장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정경부인이 감옥에 갇힌 선혜옹주를 찾아올 때이다. 그녀는 먼저 연화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선혜옹주 앞에 섰을 때 갑자기 큰 절을 드리면서 마치 민태호 대감의 잘못을 자신이 사과하기라도 하듯이 최대한 예를 갖춘다. 이 장면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경부인이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우월한 자리를 포기한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을 그녀의 아랫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정경부인은 지금 감옥 바깥에 있으며, 언제든지 남편을 움직여서 선혜옹주를 제거한 다음 연화의 유일한 모친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이제까지 자신을 속인 과정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경부인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기괴할 정도로 여기서 인간적인 모든 반응을 버리고 오로지 제도의 오작동에 대해 사과한 다음 그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선혜옹주 앞에서 미리 항복을 선언한다. 그것은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을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 자신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다. 단지 이것은 정경부인의 호의에 따른 행동이다. 이때 내가 보는 것은 이 드라마의 다소 무시무시할 정도로 흠결을 지워나가는 보수주의적인 태도이며, 그런 다음 거기서 어떤 감흥을 끌어내는 임권택 의 완전한 동의이다. 원래대로, 라는 이 무시무시한 말. 두 번째 정경부인의 방문은 임금의 행차를 위장하고 민태호 대감댁에 이윤재와 그의 동료들이 쳐들어와 감옥에서 민태호 대감과 서로 겨룰 때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이윤재가 민태호 대감을 인질로 붙잡고 그의 목에 칼을 대고 모두를 풀어주라고 외칠 때 민태호 대감의 호위 무사들은 연화와 선혜옹주, 연파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 서로 버티는 중이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자신의 안위에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을 모두 참하라고 명한다. 말하자면 파국 일보직전. 모두가 행동을 멈추어선 순간. 여기에 갑자기 정경부인이 나타난다. 그런 다음 “제가 한 가지 스님께 따질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연파스님 앞에 다가간다. 연파스님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랏줄에 묶인 채로 그녀를 맞이한다. 민태호 대감은 맞은편에서 이윤재의 칼에 목이 겨냥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자기 부인이 이 살풍경한 순간에 왜 나타났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이제까지 당당한 모습과 달리, 적어도 이 시퀀스에서는 처음으로 불안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기 동일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민태호 대감의 시선이다. 그는 자기 아내가 연파 스님에게 다가가 칼을 꺼내들 때 그를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말린다. 다른 하나는 연파 스님의 시선이다. 그는 정경부인이 칼을 꺼내들어 자신의 오랏줄을 끊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기다리다가 정말 그것을 행하자마자 곁의 무사로부터 (자신의 무기인) 죽장을 재빨리 빼앗아 든 다음 그들을 모두 물리친다. 주관적인 두 개의 시선의 교차. 이때 나는 질문의 방향을 정경부인이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인가, 라고 물어보는 대신 반대로 그 두 사람에게 돌려놓고 싶다.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인 착각. 이때 연파스님은 정경부인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이 오로지 자기를 중심에 놓고 그녀의 행동을 시스템의 신념 안에서만 판단한다. 그때 정경부인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어진다. 반대로 민태호 대감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부인의 행동을 말리려고 할 때 그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한 미끼가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아내가 자신과 달리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는 보호에서 온 호소이다. 이때 정경부인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 하나는 이미 본 것처럼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고 정의라는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선택하면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다른 하나는 민태호 대감의 호소에 따라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 중단에 대해서 누구도 정경부인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그로 인해 남편을 현재의 상황으로 몰고 갔을 뿐만 아니라 양녀인 연화를 원래의 부모에게로 다시 빼앗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연파 스님의 계획적인 속임수에 대해서 최소한 용서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계산은 그녀가 이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파스님에게 그의 마지막 계산을 좌절시킴으로써 빚을 갚는 방법이 있다. 물론 당신은 하나가 더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은 민태호 대감의 걱정대로 정경부인이 연파스님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두 번째 선택과 별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계속될 뿐이다. 다만 정경부인과 민태호 대감을 분명하게 한 편으로 묶어낼 뿐이다. 그러나 정경부인이 민태호 대감의 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세 번째의 선택은 셈에 포함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를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순간은 정경부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에 대해서 민태호 대감은 지켜본 다음 조금도 노여워하거나 혹은 정경부인의 행동을 꾸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정경부인의 행위에 대해서 침묵으로 대답한다. 말하자면 민태호 대감은 그 행동을 추호도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심지어 민태호 대감은 연파스님이나 이윤재, 혹은 선혜옹주보다 더 정경부인의 행위를 잘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짧은 순간은 임권택 이 < 연화 >의 이야기 전체를 조롱하는 결단이다. 연파스님과 이윤재, 선혜옹주, (그리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연화는 자신들이 정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면서 원래의 시스템에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기뻐하겠지만 진정으로 이 장면에서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는 정념의 몫은 민태호 대감과 정경부인의 믿음이다. 정경부인은 그런 다음 민태호 대감 앞에 가서 큰 절을 올린다. 민태호 대감은 그 순간 정경부인의 행위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를 위한 결단이라는 것을 본다. 게다가 그것이 목숨을 건 행위라는 것을 거의 즉각적으로 안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이 설명이 어리둥절하다면 정경부인의 세 번째 방문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무리할 정도로 긴 이 영화에서 정경부인이 감옥에 갇힌 민태호 대감을 찾아오는 이 장면은 < 연화 >에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씬이다. 이윤재와 선혜옹주는 복권을 하고 연화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 별 관심이 없다. 단지 이야기가 요구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 다음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감옥은 민태호 대감이 외로이 갇혀 있으며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주변에 아무도 없다. 감옥으로 되돌아 올 때(master_shot), 그러니까 정경부인이 민태호 대감을 면회하기 위해 이 옥사에 들어설 때, 그녀의 방문을 연파 스님이 갇혔던 감옥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두 개의 프레임이 만들어지면서(frame_in_frame) 이중 삼중으로 감옥 안의 감옥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다음 정경부인과 민태호 대감을 서로 번갈아(shot_reverse shot) 보여준다. 이때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바라보면서 찍었기 때문에(over_shoulder_shot) 모든 쇼트는 어느 쪽에 있건 창살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정경부인은 민테호 대감 앞에 예의를 다해 앉으며 “대감,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평생 처음으로 대감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라고 말한다. ( S#_1) 민태호 대감은 그녀를 가엾게 바라보면서 “내 죄가 많소, 날 용서해주시오” 라고 대답한다. ( S#_2) 정경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대감에게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소인만은 대감의 뒤를 따를 것이옵니다” 라고 하자( S#_3) 민태호 대감은 “대역 죄인은 삼족을 멸하는 법이니 부인 또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소이다”라고 말한다. ( S#_4) 그런 다음 갑자기 더 가까이 들어가서 민태호 대감을 찍는다. ( S#_5) 이때 단지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이 요점이 아니다. 이 가까운 거리는 앞의 쇼트와 완전히 다른 장면을 만든다. 민태호 대감과 카메라 사이에 감옥의 철창이 사라진 것이다. 민태호 대감은 그런 다음 덧붙인다. “부디 정경부인의 체통을 잃지 말기 바라오” 이때의 맞은 편 정경부인을 보여줄 때는 여전히 감옥의 창살이 민태호 대감의 시선을 가로 막고 있다. ( S#_6) 정경부인은 크게 흐느끼며 “명심하오리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민태호 대감의 감옥 안쪽에서 좀 더 뒤로 물러나서 함께(full_two_shot) 보여준다. ( S#_7)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서 보여준 장면의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반복하면서 철창 없이 민태호 대감을 보여준다. ( S#_8) 민태호 대감은 탄식하듯이 덧붙인다. “고맙소, 부인” 그러자 정경부인은 작별을 아쉬워하듯이 철창 사이로 민태호 대감의 손을 보듬듯이 잡는다. ( S#_9) 그런 다음 떠나가는 정경부인을 바라보는 민태호 대감을 창살 너머에서 바라본다. ( S#_10) 여기서 두 개의 쇼트, 철창 안에서, 그러니까 철창 없이, 찍은 장면은 정경부인이 바라보는(point_of_view) 쇼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임권택의 방점이다. 잃지 말아야 할 체통.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행위보다도 더 소중한 한 마디, 명심에 대해서 민태호 대감은 고맙소, 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 이 두 개의 쇼트가 중요해진 것일까. 임권택 은 < 연화 >의 이야기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드라마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조선시대뿐이다. 조선이라는 기이한 공동체. 임권택은 여기서 조선 사대부 가문의 무시무시한 체통과 법도를 보려고 한다. 거기서 그가 선인지 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이라고 그것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 아니며 악이라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닌 세계의 질서. 이때 민태호 대감의 정경부인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는 그 무거운 사대부 양반 가문의 전통이 그 위에 내려앉는다. 여기에는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의 윤리가 한편으로는 그들이 마주해야하는 실재를 회피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둘러싼다. 그때 그들은 언제든지 운명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그들의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이끈다. <연화>에서 가장 수상쩍은 대목은 사실상 이윤재와 선혜옹주가 그들의 정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진정으로 작동한 것은 우리들의 시대와 절대적으로 좁혀지지 않는 조선이라는 시간과의 간극 사이에 머물고 있는 윤리의 기호들이다. 여기에 빠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으로 무엇을 승화시킬 것인가, 라는 대답이다. <연화>는 그 간극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처음 볼 때는 이 영화가 임권택 영화에서 지니고 있는 난처한 의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것이 아직은 난처했던 것일까. 임권택은 여기서 참조해야 할 틀을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참조가 잘못되면 순식간에 이 모든 기호들이 잘못된 주인의 윤리 아래서 길들여질 지도 모른다. 그것은 위험한 내기이다. 하지만 <연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임권택은 여기서 자신만의 안티고네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 자신만의 안티고네가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그 앞에 놓여있게 되었다. 이때 윤리의 기호들은 그의 주인공들을 길들이는 도구가 될 것인지, 혹은 공동체 안에서의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항복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마침내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익히는 방법이 될 것인지, 라는 자리에서 질문이 되었다. 물론 임권택은 손쉽게 종료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임권택을 곁에서 바라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임권택에게 유일한 방어의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의심의 윤리학에 관한 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내 임무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계속) 1974년 106분/109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한유림 / 신봉승 촬영 손현채 조명 박태수 편집 김희수 음악 한상기 고은아 이순재 박병호 강부자 이효춘 >> <연화> 고화질 VOD 보러가기 << >> <연화(속)> 고화질 VOD 보러가기 <<
< 만추 > ( 이만희 , 1966) 우리들이 함께 영화를 보는 공동체라면 영화의 역사가 상상의 시네마테크인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우리들에게) 1966년은 이만희 의 < 만추 >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이만희의 영화.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이고 한국영화의 대가들을 만나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 오후 수박을 사들고 가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 한참 인터뷰를 한 다음 마지막에 질문하였다. 감독님에게 한국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잠시 나를 보더니 별로 생각하지 않고 내뱉듯이 별다른 수식을 더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추>”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 동서영화그룹 친구들과 유현목 감독님을 모시고 가진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시면서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이만희의 <만추>” 라고 하신 다음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만희 그 놈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어” 임권택 감독님과 긴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같은 질문을 하였다. “나한테는 < 하녀 >와 <만추>요, 그건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요” 그런 다음 그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졌다. 임권택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유일한 예외는 펠리니의 < 길 >뿐이다. 어쩌면 다시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 하여튼 <만추>는 임권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 영향은 예술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여기에는 미학적 감흥이라는 관계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흔적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 남겨진 실패한 지연. 물론 나는 <만추>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였던 것일까. 그해, 그러니까 1966년 임권택 은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전쟁과 여교사 >, < 나는 왕이다 >, < 법창을 울린 옥이 >, 그리고 < 닐니리 > 그 중 <닐니리>는 필름이 분실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과 이만희 , 혹은 < 만추 >와 1966년의 영화를 서로 과도하게 가까이 다가오게 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투를 빌려) 다소 잔혹하게 해보고 싶다. 임권택은 그해 겨울 <만추>를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 사이에 세워진 선에 계속해서 칸막이 친 다음 거기서 전술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잠시 멈춰 세우고 그 안에서 예언되는 것에 귀 기울이면서 지금부터 전개되고 있는 것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렇다. 기회의 도래만이 사건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형상. 각자의 정당성. 그것이 내가 노리는 것이다. 그때 어떻게 칸막이를 세울 것인가. 우리들의 삶은 예기치 않게 반복적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자리를 바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순순히 이뤄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종종 자리 바꾸기라는 잘못된 환원에 이끌려 희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자유. 자유처럼 보이는 운명. 하지만 매개 없이 우리가 어떻게 도약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몹시 위험하게 말하고 싶다. <만추>는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1960년대의 남한이 겪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과 혼란은 영화를 찍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만추>는 오직 단 한 번, 거기서 나온 영화라고 나는 믿는다. 그때 거기 있었던 공통의 환경. 함께 주어진 조건. 매일 아침 바라보는 같은 풍경. 하여튼 임권택은 거기 있었다. 나는 약간 소설처럼 써보고 싶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어느 날 극장에 가서 <만추>를 보았을 것이다. 고유한 현실성. 거기서 이만희는 낯선 장면을 출현시켰다. 세상의 비참함을 함께 살아내면서 <만추>는 갑자기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호의 체계를 1966년이라는 현실 안에서 창조해냈다. 가능해진 새로운 이미지의 동작들.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극장 안의 객석에서 그걸 구경하는 임권택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거기서 결핍된 그 무엇에서 생겨난 공감의 틈. 나는 <만추>가 그때 임권택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영화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 영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만추>라는 경험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몹시 양보를 해서 말한다면, 수많은 영화중의 하나로서의) 증환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언제 활동을 개시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미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자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와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부름의 관계가 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 없게 서로 부르면서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벌어지는 예술적 감응의 프로그램은 끝내 겹치지 않는 평행선 사이에서의 강도가 만들어내는 공명의 이접적 종합이다. 소유하려는 유혹. 맹렬한 저항. 그 사이에서의 각자의 인정투쟁. 종종 부서지는 방어선. 이때 우리는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한 번 1966년 12월 3일. 그건 1954년 9월 7일 <이탈리아 여행> 다음날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가까스로 한국전쟁의 풍경이 지워져가고 있던 시간. 최인훈 이 <광장>을 썼고, 김수영이 시에게 침을 뱉었으며, 김승옥 이 무진에 여행을 다녀온 다음 1964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사내들과 함께 그해 겨울 어느 날을 하릴없이 보냈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며 서있었다” 1966년, 말하자면 그 언저리의 시간. 그 해 17살 소녀 황옥순은 학교도 그만 두고 어머니와 세 동생의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 공장 일에 매달리지만 반복되는 빈혈과 빚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함께 수면제를 먹은 두 동생은 죽고 살아남은 그녀는 법정에 선다. 임권택은 황옥순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 나는 다소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불러보고 싶다. 임권택은 <법창을 울린 옥이>를 <만추>를 보기 직전에 찍었다. 다시 첫 번째 길로 되돌아오자. 우리들은 영화에서 정감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비평은 항상 창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혹은 이론은 자신의 영역 바깥에 내버려두곤 했다. 하지만 정감은 감각과 함께 영화와 세계가 서로 접촉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경이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에 앞서 거기에 있는 것. 그것 그대로의 체험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우리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오류. 할리우드에서 작성된 시나리오 기계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규칙에 따라 조직한 다음 눈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가장 이상한 것은 아직 영화의 촬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정감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렇다면 촬영 ‘이후’의 영화의 ‘제작’ 과정은 정감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반대로 정감은 자율적으로 활동한다고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이때 두뇌는 어떻게 활동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여기서 실험해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면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줄거리를 먼저 읽은 사람들에게 다소 당혹스러울 만큼 슬프지 않다. 아니, 차라리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보는 사람을 거의 울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지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이러니를 동원한 희극으로 슬픔을 조롱하거나 역설적으로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그냥 하나의 세계가 있다. 1966년의 남한. 그런 다음 거기서 긴장상태를 내내 유지하면서 영화가 그것을 견딘다. 만일 슬프다면 그건 이 영화가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여튼 무시무시한 무게로 짓누르는 세계의 비참한 중력 아래서 간신히 자신의 시청각적 기호들을 동원해서 자기가 품은 생명을 유지시켜나가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실내장면을 찍은 세트 안에서의 몇 개의 씬을 제외하면 이례적일 만큼 대부분의 장면을 길거리나 공장, 이리저리 이어진 골목길, 그 주변의 가게들, 때로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명백히 알 수 있었던 장소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진행되는 <법창을 울린 옥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도 그걸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다소 멀리 놓여있는 영화이다. 때로는 그게 너무 희미해서 종종 끈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주면서 상투적인 드라마에 빠지려들다가도 현실이 부여하는 실재의 어떤 순간에로 재빨리 돌아오곤 한다. 이때 영화는 기괴한 모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더도 덜도 없이 여기서 비참한 세계의 조건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황옥순과 그녀의 가족을 그저 마주본다. 물론이다. <법창을 울린 옥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목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가족은 1966년의 남한에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있는 가족. 수 없는 자살. 그런데 거기서 단순하게 그저 하나의 사례라는 차원에로 환원될 수 없는 황옥순의 사건 앞에서 임권택은 이 이야기 안의 무언가가 잘 진행되지 않는 순간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나는 다소 바쟁같은 말투로 다시 말하고 싶다) 영화로 잘 옮겨지지 않는 현실의 표면. 그때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곡선 사이를 영화는 자기의 점근선으로 계산해야 한다. 위치의 함수. 체자레 자바티니의 경고. 여기서 영화는 세계를 은유의 방법으로 다루면 안 된다. 쳐다볼 때는 아무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이 세계는 표면 아래 있었던 종종 기괴하고 음산하며 때로는 도착적인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은 거기서 단지 가난 때문에 생겨난 자살이라는 원인을 초과하는 대상의 과잉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은 영화라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적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실패한) 자살이라는 현실 안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라는 드라마가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저편에서 나타난 정감과 감각의 위기. 이때 임권택은 이 과잉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라는 힘겨운 문제를 만난다. 사건의 개요, 혹은 재빠르게 요약된 줄거리. 옥이는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식당이 팔리면서 일을 잃었고 집세를 내지 못해 그나마 있던 판잣집에서 쫓겨난다. 직장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빈혈로 종종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게다가 매달 빌린 돈을 받으러 아줌마들이 찾아와 아귀처럼 괴롭힌다. 그녀는 남자친구 철이를 군대에 보낸 다음 날 수면제를 사서 음독자살한다. 하지만 그녀가 먹는 걸 보고 맛있는 군것질 거리라고 생각한 동생들이 함께 먹은 다음 어린 두 명의 동생이 죽고 그녀는 살아남아서 법정에 선다. 황옥순 이야기의 시작은 맨 뒤에서, 그러니까 법정에 선 옥이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구조가 단지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멈추는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아가고 싶다. 여기서 시간은 단지 이야기의 경제성 안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우리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은 어디인가요? 그런 다음 중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옥이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차례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매 단락마다 생명은 질문할 것이다. 그때마다 생명의 정감. 그리고 삶의 감각.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들. 비가시적인 선들의 매듭. 그러나 임권택 은 그것을 다루어야만 한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해보자. 신문에서 이 사건의 기사를 읽었을 때 그녀가 어떤 법정형을 언도받을 것인가 보다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런 결심을 한 다음 행동에 옮겼을까, 를 먼저 질문할 것이다. 황옥순은 어린 두 동생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법의) 판단이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 궁금해진다. 말하자면 삶과 자살 사이의 틈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때 우리들의 귀납적 호기심은 영화의 구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법정에서 사건의 개요를 알려준 다음 플래시백으로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진행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 과정의 반복이다. 이때 핵심은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그녀의 죄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가 궁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황옥순의 변론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설명하는 대신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그녀의 기억의 연대기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에서 황옥순을 지켜보던 이들은 사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물론 결론은 나쁜 효과일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동. 그때 그녀에게 무엇이 명령을 내렸을까. 여기서 임권택에게 남은 것을 별로 없다. 단 하나로 귀결되는 행동. 피하고 싶지만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청각 기호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과정의 방법을 보는 영화이다. 플래시백의 첫 장면. 법정에 선 옥이를 위해 변호사가 재판장과 검사에게 선처를 호소할 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본다. 그때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은 두 명의 동생이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름을 잔뜩 친 콘베어 벨트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이다. 다소 기괴하게도 그런 다음 영화는 옥이의 슬픈 감정을 지은 표정을 보여주는 대신 종종 소스라치는 듯한 두려움에 질린 그녀의 이 표정(close_up)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다시 한 번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짓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두 번의 자살. 혹은 자살의 반복. 임권택 은 지금 그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나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의 영화, 아니 < 잡초 > ‘이전’이라고 말해도 괜찮은데, 이상할 정도로 볼 때마다 그 세계가 어두침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이후’의 영화가 환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인상이라는 부정확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런 ‘다음’에는 점점 임권택의 영화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의 모델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침침하고 게다가 그 빛은 가냘프고 종종 거의 꺼져가는 것 같거나 희미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비로소 시간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역사가 이미지로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을 임권택이 움켜쥐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들이 두 개, 혹은 세 개, 그렇게 점점 많아질수록 임권택의 영화 안의 어둠은 점점 중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세계에 잠겨있는 밤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밤, 그런데 아직 살아있다. 이보다 더 두려운 밤이 있을까. 그때 임권택 이 이 어둠 속에서 견디는 방법은 옥이를 동정하는 대신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렇게 한다) 이 상황에서 느껴보는 옥이의 정감을 약간 기괴하게 쳐다본다. 이 참담한 상황의 수면 아래 옥이가 느껴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를 물어볼 때 현실은 이상하게 비틀려 보인다. 이야기는 진행되다 말고 플래시백 속에서 다시 플래시백이 한 번 더 나온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옥이는 화창한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서 다른 직공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벽에 기대어 서서 드럼통에 담긴 물에 작은 돌을 던진다.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면 좋은 시절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시간의 입구. 옥이가 아버지와 함께 부유한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 여기서 의미의 흐름에 주목을 해주기 바란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기억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한 배열을 보여준다. 마치 옥이의 작은 돌을 집어 던지는 행동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홍난파가 작곡한 ‘퐁당퐁당’을 부른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펴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나는 약간 좀 전의 말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옥이의 세 명의 동생들이다. 물론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 명의 동생들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옥이를 향해서 마치 그녀에게 그 노래를 바치듯이 부른다. 아버지는 그녀 곁에 서서 그 노래를 아코디온으로 반주하고 있다. 온 가족의 중심. 그때 옥이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자수를 놓으면서 그 노래를 음미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옥이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생각이 없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때 어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옥이는 마치 그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라도 한 양, 마치 곁에 선 남자의 아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에는 어떤 결핍도 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가족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나올 때 만일 동생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만 옥이가 결혼해서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부엌에서 어머니는 과일을 모두 깎은 다음 접시에 받쳐 들고 나온다. 사과는 구태여 부엌에서 깎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과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이 장면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머니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 동선이 필요해진 것일까. 영화는 두 번 다시 이 행복한 시간에로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의 해석. 물론 이 플래시백은 옥이의 주관적 기억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동시에 행복한 기억 속으로 침범한 현실을 본다. 이때 이 현실은 일종의 의무라는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약간만 앞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여기까지 보다말고 갑자기 옥이가 왜 이다지도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일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단지 가난을 넘어서서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가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일을 하다 말고 쓰러지고 의사가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도 제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생명을 건 하소연은 그녀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이었을까. 그녀에게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의무의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나는 옥이의 플래시백에서 그녀가 가족 안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은 행복한 시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황옥순에게 내리는 (유교라는 이름의) 장남(長男)의식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 플래시백 장면에 맞대응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현실의 장면이 나온다. (둘째이지만 장남인) 중학생 남동생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경찰서로 간 옥이는 남동생이 훈방 조치된 것을 보고 다시 공장에 돌아갔다가 (남자친구와 짧은 데이트를 한 다음)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남동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어쩐 일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옥이는 그날 낮의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갑자기 역정을 내면서 그녀를 꾸짖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사) “아니, 그 지경이 된 아이를 혼자 보냈단 말이냐, 네가 데리고 오면 다리가 썩는다더냐, 허리가 휜다더냐” “공장 시간에 늦는데 제가 어떻게 데리고 와요” “하루 좀 쉰다고 떼돈을 놓치겠니, 실직을 당하겠니,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그렇게 소홀히 한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꼴 못 본다, 못 봐” “소홀히 하긴 누가 소홀히 한다고 그러세요” “경찰서까지 갔다 온 아이를 홀홀히 보내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조상 제사 볼 놈은 그 놈뿐이다. 늘그막에 의탁할 놈은 그 놈 뿐이란 말이다” 사실상 이 집은 이미 거의 부서진 가족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영화에는 단 한 번도 조상 제사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어머니의 친정과 시댁 식구들, 혹은 친척들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들도 가난으로 남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옥이를 야단치는 말 속에서 지금 집안을 간신히 버티게 일을 하는 옥이는 갑자기 미래의 시간 속에서 괄호 쳐진다. 이 두 개의 장면 사이의 차이에는 명령을 수행하는 옥이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플래시백과 현실의 네트워크 안에서 호명하는 어머니의 진술 사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구태여 그 호명을 플래시백에서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 과잉의 잉여처럼 나타난 어머니가 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명령 속에서 기다리는 최후의 구원을 약속하는 시간은 결국 오지 않을 것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몇 차례를 반복해서 보아도 언제 옥이가 자살을 결심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단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만이 있다. 임권택 은 그 결심의 장면을 찍지 않았다. 물론 상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옥이는 무심결에 13일에 밀린 빚을 갚겠다고 매일처럼 집이고 공장이고 찾아와서 괴롭히는 이웃 아줌마들에게 약속을 했고 그날이 다가왔을 때 약속을 이행할 수 없자 자포자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이 빚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몫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지금 그걸 누가 갚을 수 있을까. 결국 결론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옥이가 짊어져야한다고 믿었던 책임에 대한 포기가 있다. 이제 그 자리는 빈자리에요. 텅 빈 장남의 자리.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위의 네트워크의 교차. 물론 그 장면에서도 자살의 결심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찍지 않았다 할지라도 옥이는 어느 순간에 결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의 순간이 어머니가 옥이에게서 갑자기 의무를 빼앗아가는 이 장면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희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그녀에게서 의무의 명령이 철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옥이는 그 순간 자신을 세상 안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초자아의 버팀목이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어둠 속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혹은 어둠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S#1 S#2 이제 남은 것은 옥이의 자살이라는 행위뿐이다. 이때 자살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여기서 비로소 자기에게 내려진 명령에서 벗어나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행동이 옥이의 동선을 작동시키고 있다. 모든 인연과 결별하는 행위. < 법창을 울린 옥이 >의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작은 빛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어둡지만 (몹시 기괴하게도)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구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군대로 떠나는 철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난 다음 새벽에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으로 함께 천천히 거의 멈출 듯이 걸어온다. 아, 제발 멈춰 주세요. 당신은 지금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약간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이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 (high_angle_long_shot) 그때 멀리서 난데없이 교회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자살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나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옥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명백히 이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영화는 교회 종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 옥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영화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이때 간절하게 교회는 종을 치면서 옥이의 죽음에 간섭하려고 한다. 아직 이른 길거리는 한산하고 그들이 걸어온 길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다. 두 사람의 발걸음. (close_up) 이상하게 두 사람은 약속한 것이 아닌데도 서로 발을 맞춰 걷는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마음의 쇼트. 어떤 투명성. 하지만 그들은 지금 헤어지기 위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쇼트가 나온다. 갑자기 남자들이 얼어붙은 듯이 거리에 서 있다. 그래서 옥이와 철이가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함께 설 때 마치 정지된 화면 사이로 들어서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멈춰 서버릴 것만 같은 세상.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무언가 필사적이 된다. 나는 임권택이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저 소멸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꺼져가는 빛. 사라져가는 세상. 그때 화면 안으로 침범하는 버스 때문에 서 있는 그들이 출근하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올라타지만 철이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아니 차라리 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옥이와 철이는 서로 마주본다. (shot_reverse shot) 그때 철이는 (다소 뜬금없이) 옥이에게 마지막 인사처럼 간곡하게 말한다.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건강해줘” 우리는 이제부터 옥이가 할 일을 알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철이의 작별인사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 종소리에 이어서 옥이의 자살을 말리는 두 번째 시도이다. 이때 이 말은 동시에 여기서 정반대로 기능한다.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 옥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이제 문득 그 시간이 왔음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버스가 도착하고 철이가 떠나갈 때 두 개의 쇼트를 교환한다. 하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철이가 바라보는(point_of_view) 옥이의 멀어져가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옥이가 바라보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모습이다.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의 비대칭. 하지만 이 설명에는 놓친 것이 있다. 이때 단순하게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로 교차시키지 않고 갑자기 카메라가 옥이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다음 옥이가 버스를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 버스는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이 쇼트의 교환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철이는 멀어져가는 옥이를 보았지만 옥이는 멀어져가는 철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그 둘 사이에 개입해서 다가가는 카메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이에 낀 자율적인 운동. 그녀를 본다기보다는 다가간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동작. 하지만 이때 철이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반작용처럼 다가간 카메라. 마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한 이 운동이 일깨우는 것은 정반대로 둘 사이의 텅 빈 공집합의 효과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으며 그래서 이 운동은 다가간다기보다는 차라리 밀쳐내는 듯한 반작용의 힘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부터 옥이가 자살로 향하는 짧은 발걸음을 함께 한다. 옥이는 이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매번 멀리서 지켜보거나 그 앞을 지나쳐가거나 이미 지나친 옥이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옥이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는다. 그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그녀가 약국으로 들어섰을 때이다. 이때 영화는 자기의 무능력에 대해서 앙상해진다. 교회의 종소리. 철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저 카메라는 그녀와 동행할 뿐 그녀를 막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마지막 침묵을 지킨다. 영화는 옥이가 수면제를 사는 장면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국 앞에서 서성거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 시간에 집에 어린 두 남매를 남겨놓고 무언가 저녁 찬거리를 위해 채소라도 얻으려 시부모 댁으로 나서는 어머니에로 옮겨간다. 어머니가 막 집 문을 나설 때 옥이는 반대편에서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으로 들어온다. 그때 옥이는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구태여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를 부른다. 여기서 예기치 않게 어머니를 향해서 다시 한 번 가볍게 카메라가 다가간다. 아니 차라리 옥이의 목소리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치 그 순간 어머니가 무언가 낌새를 알아채고 옥이를 말렸다면, 아니 최소한의 위로를 했다면, 혹시나 완전히 버렸을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일깨워주기만 했더라면 지금 하려는 행위를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무심하게 오늘 공장에는 왜 나가지 않았냐고 물어본 다음, 하루 쉬어야겠다고 대답하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래, 라고만 말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혹은 자살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 여기서 걸어가는 어머니를 보는 옥이를 보는 카메라는 두 여자의 등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등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덧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옥이 쪽을 돌아본다. 그게 어떤 제스처인지는 분명치 않다. 옥이가 한 대답에서 어떤 낌새를 느낀 때문인지, 아니면 공장도 쉬겠다고 말한 딸이 가엽고 미안한 마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멀리서 자기를 지켜보는 딸을 문득 쳐다본 것인지를 달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멈칫 거리는 동작은 이상할 정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골목을 돌아서서 사라지자 옥이는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하세요, 라는 마지막 작별인사를(voice-over_narration) 한다. 이때 이 인사는 몹시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어머니는 골목으로 사라진 다음이다. 그러므로 이 인사는 텅 빈 골목을 향해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직도 남아있을 어머니의 발걸음의 흔적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자 마치 어머니가 돌아보기라도 하듯이 골목에서 옥이를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마치 골목이 옥이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상한 비인칭의 시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인칭으로 느껴보는 정감, 그리고 비인칭으로 건드릴 듯이 다가가는 운동의 감각. 우리는 이미 철이를 태운 버스가 떠나버린 텅 빈 거리가 옥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았다. 옥이는 누군가를 보는데 그녀가 보는 상대방은 그녀를 보지 않은 대신 길거리, 혹은 골목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황. 그때 영화는 옥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시작, 혹은 중단된 동선. 여기서 쇼트가 바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옥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대신 다음 장면은 두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놀고 있는 두 어린 남매를 보여준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병아리를 보여준다. 옥이에서 병아리로 그냥 넘어온 두 개의 연속된 쇼트는(S# 1_S# 2) 옥이를 가여운 병아리처럼 보이게 한다. 어린 남동생은 병아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죽여 버리고 만다. 어이없는 죽음. 그때 옥이는 죽은 병아리를 보면서 마치 자기의 시체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옥이는 자기 시신을 거두듯이 그 병아리를 집 앞 멀리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묻어준다. 그때 오늘 새벽에 떠나간 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voice_over) 이 병아리를 키워서 닭이 되면 다시 병아리를 낳게 될 것이며 금방 오백 마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 병아리는 옥이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줄 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옥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그 병아리를 모래 무덤에 덮어주는 것이다. 혹은 지금 꿈을 모래 무덤에 묻고 있는 중이다. 그런 다음 방에 앉아 옥이는 어머니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여기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유서를 쓰는 옥이를 바라보는 대신 재빨리 그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나간 어린 남매를 따라간다. 이때 우리는 매우 잔인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남매는 군것질을 하라고 준 동전으로 무엇을 사먹어야 할 지 망설이는 중이다. 이 아이들은 지금 거의 먹은 것이 없어서 몹시 허기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거의 군것질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빠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하마터면 그 귀한 동전을 하수도 맨홀에 빠트릴 뻔 한다. 깜짝 놀란 오빠는 동전을 집어 들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여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은지 묻자 번데기라고 대답한다. 오빠는 그러면 번데기를 산 다음 남은 돈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만나를 사겠다고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묍영오活?떨어트려 이번에는 하수구를 덮어 놓은 맨홀의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거의 잃어버릴 뻔한 것을 되돌려준 다음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갈 때 어린 남매는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을 되찾은 기쁨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제 어린 남매는 집에 돌아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 손에 쥐어주었던 동전은 맨홀이 집어삼켰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어쩌면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옥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막 옥이는 수면제를 먹는 중이었다. 어린 두 동생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왜 그 어린 두 동생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아니면 차라리 (끔찍하게도 자살한 옥이의 모습을 보아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살아서 볼 수 있는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게) 늦게 도착하지 않은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질문, 어떻게 주인공 옥이의 죽음을 가로 막고 그들은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비극적 상황 속에서의 비극적 도착. 그런 다음 두 개의 자리를 바꿔치운다. 죽음과 삶. 이때 이 신비로운 도착은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질문해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두 동생의 도착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옥이는 병아리의 죽음을 본 다음 그 시체를 매장하면서 이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죽음의 과정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얼룩은 그녀의 어린 두 동생들뿐이다. 순결한 얼룩.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어린 두 동생만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차이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이 비참한 조화를 어지럽히는 순결한 존재의 소멸을 목표로 했다면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의도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의 메시지를 과도하게 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예기치 않은 외설적 지식의 이면과 힘겹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원래의 광경. 그 모습을 본 막내 여동생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언니 뭐 먹어”라고 묻는다. 이미 약을 먹은 옥이는 수면제에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비몽사몽간에 “아무 것도 안 먹어”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은 배고픈데다가 이미 군것질 할 동전을 잃어버린 어린 두 남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맛있는 거 있으니까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라며 두 남매는 옥이의 손에 한 움큼 쥔 수면제를 빼앗기 위해서 함께 달려들어 손아귀를 벌린다. 이미 약에 취한 옥이는 허기진 두 남매로부터 수면제를 지킬 만한 힘을 빼앗긴 다음이다. 이때 거의 잠들어가는 옥이는 정반대로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녀가 바라보는 두 명의 어린 동생들은 마치 아귀처럼 달려들어서 그녀의 손에서 수면제를 뺏으려고 한다. 죽어가는 옥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은 이미지 전체가 기형적으로 휘어서(mirror_focus) 마치 영화 전체의 얼룩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걸 바라보는 옥이는 두 동생을 가련하게 보는 대신 우리가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 그 커다랗게 떠진 눈, 두려움에 가득차서 바라보는 얼굴이 된다. 그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침입. 그런 다음 똑같은 기형적인 이미지로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두들 옥이에 대한 원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는 환각이라기보다는, 환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이미지 뒤에 차라리 어떤 각성의 시선이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갑자기 현실이라고 불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진실이라는 외설. 가여운 옥이에게 자살은 거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산산조각 나고 난 다음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그녀는 의무의 네트워크와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대신 두 명의 동생을 죽인 다음 죄의식을 안겨주고 다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므로 옥이는 두 번째 삶을 의무보다 더 무거운 죄의식으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한다. (의무의) 감옥에서 출소하는 옥이는 지금 (죄의식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현실은 저 바깥에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옥이는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옥이의 삶을 다루는 대신 자살이라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서 말하여지는 네트워크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때 무언가 완강하게 그걸 거절하는 것과 마주치고 있다. 그건 직접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 불려나온 황옥순의 자리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언가 절반만을 본 것만 같은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똑같은 무게로 임권택은 이 이야기가 주는 과잉과 마주쳐서 시달린다. 네오리얼리즘이 부여한 현실과 영화 사이의 부등가 교환의 법칙. 그때 중심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대답은 황옥순이라는 간편한 대답을 취하는 대신 그 중심의 안이 사실은 텅 빈 공집합이며 단지 그것이 부서지지 않게 가까스로 유지시키는 힘들의 상태 속에서 정감과 감각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사실만을 영화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균형. 아니, 어쩌면 이건 균형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심이 검은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중심인 줄 알았던 얼룩을 지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임권택에게 정감이라는 구멍과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 얼룩을 둘러싸는 감각의 활동은 점점 까다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 그 사이의 공백 속에서 임권택은 느닷없이 맹렬하게 주체를 세워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어렴풋이 어느 순간,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그 마지막 장면 전체에서, 사건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가 도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임권택은 느껴본다. 나는 거의 지워질 듯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이 장면 안에서만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보았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적인 감흥을 느끼면서 영화의 기호들은 황옥순의 행위에서 분명하게 주체가 자기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화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힘을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분명히 임권택도 몇 차례이고 이 순간에로 되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아성영화사 각본 이종택 각색 이연진 촬영 김연욱 조명 이한찬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