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동
- 감독
- 조영근
- 제작년도
- 2016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 그 기억이 공유되지 않으면 ′사건′은 없던 일로 되어버리고 만다. (…) ′사건′의 기억이 타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기억 서사』 중에서, 오카 마리 - 1990년대 이후 한국 공포 영화의 출발은 1998년 개봉한 < 여고괴담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봉 당시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흥행으로 충무로에도 본격적인 ‘젊은’ 공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 자귀모 >(1999) < 링 >(1999)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1999) < 해변으로 가다 >(2000) < 찍히면 죽는다 >(2000) < 가위 >(2000) < 세이 예스 >(2001) 등의 공포 영화들은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제작된 공포 영화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공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기를 지나 2003년에는 < 장화, 홍련 >이 역대 공포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에 공포영화 < 아카시아 >가 선정되면서 그 부흥기는 정점을 찍었다. 그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그 흐름은 다소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관객의 사랑을 받는 공포 영화들은 종종 제작되어 < 알포인트 >(2004) < 기담 >(2007) <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 등의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 공포 영화의 계보에서 이상하게 대중에게 잊힌 작품이 있다. 바로 윤종찬 감독이 2001년에 만든 < 소름 >이다. < 소름 >이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소름>으로 데뷔한 윤종찬 감독은 이후에도 (공포 영화와는 전혀 관련 없는) < 청연 >(2005)과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 파파로티 >(2012) 등의 영화를 만들어서 커리어를 이어온 대중 영화감독이며, <소름>의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 장진영 과 김명민 은 누구나 다 아는 배우들임에 틀림없다. 거기다 이 영화는 2014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에도 선정이 되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이 영화로 영화 데뷔를 한 배우 김명민이나 혹은 어떤 평론가도 이 영화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2001년에 만들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대중과 평단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소름>을 다시 본 후에 나는 이 영화가 잊힌 것이 이 영화의 불길한 느낌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영화는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묘하게 이 영화가 공포를 그려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소름>이 취하고 있는 공포의 방식은 피가 난무하는 슬래셔 방식이거나 관객의 트라우마를 자극 시키는 심리적 방식이거나 혹은 한국 영화에서 흔히 취하는 혼귀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용현( 김명민 )이 504호에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그 504호는 전 입주자인 광태가 불타 죽은 곳이다. 그런데 광태는 마치 용현과 선영( 장진영 )의 과거 사연을 알기라도 하듯, 미금아파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었고 그 소설을 완성하기 전에 죽어 용현이 그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광태가 그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자리에 용현이 찾아오게 됐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허구를 완성하기 위해 그 이야기의 실체적 기억이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가상의 허구와 실체적 기억 사이를 맴돈다. 영화에 세 번 등장하는 롱테이크는 그런 허구와 기억 사이를 더욱 몽롱하게 만드는 뛰어난 장치이다. 재밌는 것은, 이 롱테이크 장면이 나올 때 주인공들은 본인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은 허구 같은 느낌이고, 불길하고 누설하면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다. 용현과 선영의 기억은 차이가 있다. 용현은 자신의 기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용현은 차라리 기억을 덮어버리면서 그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용현은 동급생을 죽인 후 산에 파묻었고, 선영이 죽인 선영의 남편을 본인 손으로 매장하고 선영을 죽인 후 선영마저 산에다가 매장한다.(그리고 직접적으로 묘사는 안 됐지만 형사들이 용현과 전에 만난 여자의 행방을 찾는 것이나, 용현의 이야기를 미뤄보았을 때 용현의 전 애인도 매장하여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용현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기억은 본인이 고아라는 사실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용현이 가지고 있는 원(原)기억은 자신이 고아라는 것이다. 반면 선영은 그 기억을 용현처럼 묻지 못하고 잊지 못해 고통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것도, 아버지가 도망간 것도 기억하며 자신이 아들을 잃어버렸다는(죽였다는) 것도 기억하며, 남편을 죽인 것도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선영이 죽고 나서도 그녀의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어서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묻히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영화의 전환점은 바로 용현이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렸을 때다. 글의 처음에 언급한 오카 마리의 글처럼 용현은 사건의 기억을 외부와 함께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은 없던 사건이 되었지만 선영이라는 타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하나 둘 씩 공유하게 되자 그의 비밀은 이 작가(그리고 504호에서 불타 죽은 광태)에 의해 소설의 형태로 완성된다. 미금아파트를 둘러싼 용현과 선영의 비밀을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려고 한 사람은 죽거나 미쳐버린다. 영화는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받는 선영의 기억과 기억을 묻어버리는 용현의 기억 중에서 용현의 기억. 다시 말해 소설의 발간이 실패하고,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영화가 용현의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은 이 영화에서 밝혀지는 기억의 실체가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길하고 끔찍한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미금아파트의 불빛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찍은 롱 샷을 마지막 쇼트로 장식한다. 용현은 그 기억을 묻어두려고 했지만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이 기억을 덮지 못한 것이다. 곧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폐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공간이고, 기억을 머금고 있지만 곧 사라지는 공간이다. 이 영화가 불길하고 음침하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영화 스스로가 잔존하게 만드는 결론으로 완성했을 때 그것은 이 저주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영화 스스로 되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소름 >은 그 저주를 덮어버리지 않고 다시 되새기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적 진실의 공포를 직면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끔찍한 기억은 결국 잊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다. 어쩌면 이 이유가 이 영화를 누구도 다시금 기억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저주받은’ 걸작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현동의 금화아파트는 201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 공간은 실제로도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1969년. 영화 < 팔도 사나이 >가 개봉된다. 장동휘 , 박노식 , 독고성 , 황해 , 허장강 , 이대엽 , 오지명 . 충무로 최고의 액션 배우들이 모두 총 출동한 것이다. 감독은 김효천 . 항해사 이력을 가진 마초. 부잣집 아들에 호남 형으로 생긴 이 사나이는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안고 충무로에 들어왔으나,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아 멜로 영화로 데뷔한 뒤 자신의 본령인 사내들의 주먹세계를 그리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편거영. 그는 영화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시나리오 작가로 충무로에 입성하여 이만희 감독의 스릴러 범죄영화 < 다이알 112를 돌려라 >를 비롯하여 1960년대 초 붐을 이룬 스릴러 범죄영화와 전쟁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충무로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 전쟁 영화 < 특전대 >로 데뷔를 한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였다. 영화 < 팔도사나이 >는 조선 사나이들의 신화의 세계, 한국판 웨스턴이었다. 장동휘가 연기한 종로의 주먹 김두한과 대결을 하여 그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고 의형제를 맺은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여덟 명의 사내들이 힘을 합하여 종로에서 일본 깡패들을 몰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김두한을 연기한 장동휘의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의리 있는 큰 형 캐릭터와 용팔이 박노식의 좌충우돌 유머러스한 캐릭터는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는데, 선이 굵고 호방하며 투박한 조선 사내들의 주먹과 의리의 세계를 그리는데 자신이 있었던 김효천과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를 잘 다루지만, 이야기 속에 유머와 서스펜스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편거영 이 만나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든 것이다. <팔도사나이>는 흥행에 성공했고, 이 공로로 편거영은 팔도사나이의 속편 < 돌아온 팔도사나이 >를 만든다. 편거영이 만든 속편에서는 김두한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김두한에게 도전 했다가 한방에 나가떨어졌던 조연, 용팔이 박노식을 주인공으로 삼아 일제 강점기의 종로 뒷골목 깡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1960년대 말 서울로 영화의 배경을 옮겨와 버린다. 그리하여 1960년대 한국 남성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아름답고 슬프게 표현한 명장면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박노식이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아현동 고개를 올라가는 신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지개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신촌의 서강대까지 배달을 가는 박노식의 얼굴과 겨드랑이에 흐르는 땀. 목에 걸친 수건은 후줄근하게 땀에 젖었고, 걸어도, 걸어도 신촌의 서강대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편거영 감독은 주먹신화 이야기로 속편을 만들지 않고, 1960년대 말 근대화가 최고의 가치인 시대의 소모되는 남성을 그리는데 주력한다. 한때 주먹세계에서 밥을 먹던 박노식은 개과천선하였다. 사랑하는 아내 사미자 와 산동네의 판잣집에서 살면서 집 앞 골목에 화로를 놓고 꽁치를 구워먹으며 가난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맛을 알아 버린 것이다. 주먹질로 사람을 패고 피를 봐야만 밥이 나오고, 잠자리가 나오며, 술이 나오는 그런 황폐한 세계와 사미자와 사는 이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박노식은 사미자와 만든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현동 고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포악했던 과거를 버리고, 굽신굽신 고개를 숙여가며 일거리를 얻어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노동을 하는 60년대 한국의 사내들. 편거영 감독은 한국의 깡패 영화에 그 시대 남성들의 비애를 담아낸 것이다. 편거영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 시대의 남성들이 단순히 깡패영화인 줄 알고 이 영화를 보았다가 감동을 받고 힘을 얻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영화로 박노식은 서민들의 애환을 표현하는 사내 용팔이로 거듭나고, 용팔이는 박노식의 가장 성공적인 캐릭터가 되었으며, 한국 남성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은 속편을 만들어낸 캐릭터가 되었다. 편거영 감독은 이후 의미 없는 자기복제의 반복인 팔도 사나이 시리즈로 자신의 영화인생을 마감하지만, <돌아온 팔도사나이>의 아현동 고개 장면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감독이다.
영화배우 이대근 (李大根)이라면 흔히 < 변강쇠 >를 연상하기 일수이다. 그만큼 그의 우람한 몸과 익살스런 연기가 어필,35년째 연기를 하면서 대명사처럼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통 연극배우로서 60년대 초 <노틀담의 곱추>로 인기를 모았던 인물이라는 것은 전문가들 아니면 잘 모르는 역사. 연극이나 영화 모두 연기자라면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지만, 영화는 배우가 흥행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관에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막을 올리면 유난히 노심 초사한다. 사실 연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가 연극을 할 때는 흔히 말하는 학사 엘리트들이 풍미할 때 였다. 해가 지면 서울 사직동에 있던 대포집 '대머리집'에 들르는게 당시 문화 예술인들의 낭만이었다. 여기서 연극에 대한 품평 등이 나오곤 했는데 그가 주연한 <노틀담의 꼽추>의 미국영화 주역을 맡았던 앤터니 퀸 못지 않았다는 연기평과 함께 그의 걸죽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앤터니 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연극을 걸쳐 TV탤런트를 경험하다가 영화에서 자리를 굳힌 이대근 은 서울 태생이다. 능안리 라고도 불리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투사로 당시 반공청년단 단장. 그가 175센티의 82킬로가 되는 거구를 자랑하는 것도 타고난 것 일게다. 연극에 미쳤던 젊은이답게 그는 서라벌예대 출신이다. 연기자가 된 것은 63년. 졸업하자마자 이듬해에 KBS7기와 동시에 MBC개국으로 옮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화에 데뷔한 것은 68년 최무룡 감독의 < 제3지대 >. 이후 지금까지 약 2백70 여 편에 출연해왔다. 그러니까 데뷔 35년째인 셈이다. 그의 출연작을 보면 대략 3∼4캐릭터로 분류할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에 제작에 만족해야 했던 '김두한'시리즈 5편의 액션물 주연및 74년부터 81년까지 무려 주연한 액션물 1백여 편이 첫째. 그런가하면 그에게 상복을 안겨준 토속물에서의 연기도 주류를 이룬다. 80년 대종상주연상을 안겨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87년 역시 대종상 조연상을 받은 < 감자 > 한국일보 백상대상의 주연상을 수상한 < 심봤다 > 영화평론가상을 따낸 < 뽕 > 등이 이들 작품. 여기에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 장마 >(1979) < 거지왕 김춘삼 >(1975, 이혁수 ) < 화려한 외출 >(1977, 김수용 ) < 연산군 >(1987,이혁수) 등이 내노라할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대근 을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은 < 변강쇠 >라고 단언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등장했을 당시인 86년. 제작자였던 고려영화사 사장 박태환 씨는 우리의 고전 중 기막힌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바로 이 작품이 판소리로 유명한 「변강쇠뎐」.이를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었으나 오랜 현장 경험으로 인정받고 있던 엄종선 감독에 맡겨져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초 엄감독은 이 영화를 작품이 지닌 특유의 해학과 섹슈얼 무브먼트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에 무척 고민했다. 이는 작품에 잘 나타난다. 주인공인 변강쇠 역의 이대근 의 몸매가 거구임을 표현하기 위해 의상인 한복 속에 솜을 잔뜩 집어넣어 과장한 것이라든가 상대역이었던 옹녀 역의 원미경 의 캐릭터를 요염의 극치로 표현한 것 등이 탈영화적이면서 풍자 짙게 만들어 관객의 호응을 얻어내는 계기가 됐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변강쇠의 섹스가 엄청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높은 절벽에서 그가 소변보는 장면을 풀커트로 표현하면서 소방차를 동원,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줌 줄기로 표현한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한 것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가 대히트 하면서 이대근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바뀌었다. 당연히 속편 제작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대근이 아연 실색,주인공이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생각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 관리에 커다란 장애를 각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다행히도 이후 방영하기 시작한 MBC TV 드라마 <설중매>의 홍윤성 역을 맡아 이미지를 다소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배역 역시 술을 독채 마시고 힘이 장사였던 것 이어서 거한의 인상을 지우기에는 쉽지 않았다. 정상급을 구가하는 엄청난 톱스타가 아니면서도 원미경 이미숙 강수연 등 숱한 미녀스타들과 공연한 그도 이제 60세.(43.7.1) 그는 젊었을 당시의 이미지와 달리 지금은 서울에서 혼자 사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 82년 부인과 3딸이 미국에 이민, 고생 끝에 안정을 찾은 교포이기도 하다. 부인이 억척스럽게 워싱턴 시내의 공공기관의 구내매점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그곳 정문에 커다랗고 멋진 스토어를 경영하고 있다. 3딸 역시 효녀 중 효녀. 두 딸은 이미 박사가 되어 정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막내딸은 대학 졸업반. 3딸 모두 중·고교는 물론 대학도 장학생이었다. 이대근 역시 워싱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부지런쟁이. 교포들의 희노애락은 물론 각종 문화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그의 집은 워싱턴에서 조금 떨어진 버지니아 주택가. 숲 속에 가려진 3층집으로 얼마 전 타계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을 왕래한 것도 몇 번만 합치면 5백 번이 된다고 한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경유해서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그에게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하도 자주 드나드니까 툭 하면 꼬치꼬치 캐묻는 게 당연한 일. 궁여지책 끝에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가 시비를 거는 공항 관리들에게 선사하며 자신이 한국의 톱스타라고 으시대곤 했는데 이게 먹혀들어 이제는 무사 통과라고 껄껄 웃어 제키기도 한다. 지난 1월말인가. 그를 만나러 간 세종문화회관 커피숍에서 있었던 일. 베이지색 반코트에 아무 치장 없이 나타난 그를 보자마자 여기저기 앉았던 여인들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지를 않는가. 아직도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더니 역시 껄껄 웃고 만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85년부터 배우협회이사. 영화인 협회 부회장을 맡아 뒷바라지도 해온 이대근 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하다. 얼마 전 히트한 송강호 주연의 < 반칙왕 >이 충무로에서 입에 오르내릴 때 그를 잘 아는 영화인들은 10여년전이라면 송강호 역할은 이대근이 적역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근은 본격적으로 레슬링을 한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우리배우들 중 레슬링을 한 인물을 꼽는다면 국회의원이기도한 신영균 과 이대근일 것 같다. 우락부락한 이미지답지 않게 그는 성경을 주제로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고 슬며시 말하곤 한다. 이대근 은 세상에서 연기만큼 좋은게 없단다. 일단 작품이 이뤄지면 돈도 가난도 미움도 아픔도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 최근 작품은 < 해적, 디스코왕 되다 >. 비록 주연작은 아니지만 아직도 영화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자체가 만족스럽다고. 이제까지 출연한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는 <김두한> 5편 모두와 <연산군>. TV에서 시작했으나 신상옥감독에 의해서 영화에 매력을 느껴 이제까지 사명감을 갖고 임해왔다는 그는 군생활에서 국립묘지 초대나팔수로 지냈던 만큼 자신을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지금까지는 훈련과정에 불과하다는 것. 앞으로는 < 벤허 > < 나사렛 예수 >와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기자가 ,그것도 35년씩이나 연극 TV ,영화를 넘나들며 수백편씩 출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보통 인생들도 외길로 인생을 초지일관한다는 것은 산을 깍는것보다 어렵다는게 통례. 이대근의 면모를 보면 아직도 젊음이 펄펄 살아 넘치는 30-40 대의 느낌이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수 없는것인지 그의 자태에서도 언뜻언뜻 연륜을 읽을 수 있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그의 이 같은 느낌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세태속에서 자기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아닐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너무도 쉽게 스타가 되거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 오랜 연륜과 인고의 자기 연마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 인가를 알 수 있겠다. 김량삼(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3년 7월 1일 서울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1968년 최무룡 감독 < 제3지대 >로 데뷔 <주요 경력> 연극 : <성웅 이순신>, <노틀담의 꼽추>, <고려인 떡쇠> 등 약20편 방송 : <갈대>, <거상 임상옥>, <조선총독부>, < 수사반장 > 등 500여 편 영화 : <김두한>, < 거지왕 김춘삼 >, < 장마 >, < 심봤다 >,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뽕 >, < 변강쇠 >, < 만날 때까지 > 등 300여 편 <수상 경력> TV연기상, 인기상, 한국일보상, 영화평론가상, 대종상주연,조연상, 영화인협회표창장, 국제영화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