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제자들
- 감독
- 이성구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박종설, 조덕성, 임해림, 최일, 손전, 김기범, 최준, 이정애, 노강, 임운학, 박은주, 오혜숙, 이태수, 박광진, 양광남, 이순재, 박지영, 박근형, 문오장, 박암, 이일웅, 송미남, 조학자, 임생출, 윤일주, 김월성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불었던 뉴 웨이브 운동의 중심이자, 1960년대 중반을 휘감은 청춘영화 장르의 효시작을 감독하였고, 1960년대 후반 < 장군의 수염 >이라는 걸출한 모더니즘 영화를 연출한 감독 등의 수식어로 소개할 수 있을 인물이 이성구 감독이다. 1928년에 태어난 이성구 감독은 이병일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60년 김지헌 이 시나리오를 쓴 청춘 영화 <젊은 표정>으로 감독 데뷔하였다. 데뷔작인 < 젊은 표정 >은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 재일교포 출신의 프로듀서 전홍식 과 당시 조감독이던 이강원 , 이성구 등 당시의 젊은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예 프로덕션’의 창립작으로, 오시마 나기사 등으로부터 시작된 일본 누벨 바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 영화계에도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겠노라는 열정으로, 제작부터 화제가 되었고, 비록 흥행에는 실패하였으나 평단에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이끌어낸다. 같은 해 연출한 < 정열 없는 살인 > 또한 역시 김지헌이 시나리오를 쓴 추리물로, ‘한국영화에 없던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대표작으로 꼽히는 1968년의 연출작 <장군의 수염>은 영화 중반에 신동헌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끼어들고, 스토리의 시간이 뒤얽혀 있는 등 형식적 특이성을 지닌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중 한 편으로 꼽히는 영화이다. 이쯤 소개하고 보면, 실험적인 영상과 반항적인 주제의식을 특징으로 지닌 작가이며, 매우 모던한 연출 스타일을 보여주는 예술영화 감독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될 터이나, 실제 이성구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의 면면은 매우 다양해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에서 유행한 거의 모든 장르들을 두루두루 거쳐 왔다. 이성구 감독은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뉴웨이브를 표방하며 데뷔했으나, 흥행 면에서의 부진으로 이후의 연출작들은 멜로드라마, 서민가족 코미디, 청춘영화, 고부갈등을 다루는 가족드라마 등 당시 한국영화계와 TV/라디오 방송극에서 유행하던 장르들을 두루 거치며 연출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던 이상구 감독이 다시금 비평적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1960년대 후반 이른바 문예영화 제작이 붐을 이루면서부터이다. 황순원 과 이효석 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1967년작 < 일월 >과 < 메밀 꽃 필 무렵 >에 대해 언론과 평단은 “오랫동안의 슬럼프에서 벗어난 견실한 연출력”, “오랜 침묵이 있은 후의 수확” 등의 문구로 반겼고, 흥행에 있어서도 비교적 성공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68년, 이성구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 장군의 수염 >이 발표된다. 이어령의 동명소설을 김승옥 이 각색한 <장군의 수염>은 한 사진기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두 형사가 추적하며 재구성하는 내용인데, 동시대 프랑스의 누보로망 마냥 시간순서가 뒤엉켜있는 내러티브 구성, 애니메이션과 회화를 이용한 화면구성과 편집이 등장하고, 결국 엔딩에 이르면 미스터리의 범인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 사회전체라는 다소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주제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국산 최대의 문제작”이라는 평단의 흥분어린 평가를 이끌어 내었고,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무려 37만의 관객을 동원한) < 미워도 다시 한 번 >과 함께 그 해 “방화계의 두 경이”가 된다. 모더니스트, 형식실험가 등 이성구 감독에 대한 후대의 일반적 평가는 거의 이 영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구 감독에 대한 그러한 일반적인 평가에 비추어볼 때, 그의 후반기 필모그래피는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이성구 감독의 연출 경력 가운데 후반기의 필모그래피들은 반공영화를 비롯한 프로파간다 성격의 작품들과 기술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작영화들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 휴머니즘적 결말을 지향한 반공영화들은 원작소설들을 영화화한 문예영화의 연장인 경우가 많고, 그 중 < 지하실의 7인 >(1969)은 인간의 심리적 갈등과 양심, 전쟁으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제한된 공간 내에서 연출한 작품으로 이성구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영화평론가 이영일과 김종원에 의해 언급되었다. 1970년대 이후 이성구의 관심은 기술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작영화로 향한다. 1971년 순수 국내제작 장비와 기술로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70mm 영화를 목표로 하여 의욕적으로 제작에 돌입한 < 춘향전 >은 연일 제작 상황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등 화제를 모았지만, 개봉 이후 관람을 방해할 정도의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의 잡음 문제 등) 기술적인 결함들이 발견되었고, 흥행 역시 기대에 미치지는 못 한다. 이어 경제개발 선전의 일환으로 포항제철의 건설과정을 다룬 대형 국책영화 < 해벽 >(1972)은 태풍이 몰아치는 방파제에서 파도와 싸우며 해벽을 건설하는 장면을 스펙터클로 담아내고, 반공 소재의 대형 영화인 < 악마의 제자들 >(1974) 역시 인민군이 탈출해 내려오는 장면을 담은 대규모 군중 신과, 신문기사를 통해 인상적인 자동차 추격 신이 등장한다고 전해지는 < 빨간구두 >(1975) 등 이후의 연출작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바는 스펙터클과 영화 기술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경력들을 인정받아 1970년대 말, 한국, 일본, 할리우드가 함께 제작하던 인천상륙 작전 소재의 전쟁영화인 <오! 인천>(1981)의 한국측 감독을 맡는다. 이 영화는 미국측 감독으로는 007 시리즈로 유명한 테렌스 영이 기용되었으며,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으로 나섰고, 무려 4천만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투여된 초대작이었으나, 제작 과정 중 갖가지 난항을 겪은 후, 결국 테렌스 영 감독이 해고되기에 이른다. 이성구 감독은 테렌스 영을 대신하여 그 이후의 추가 촬영과 후반 작업을 맡게 되는데, 이 영화를 마무리하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게 된다. 이 영화를 마무리짓고 난 다음 해인 1982년 브라질에 이민 가 있던 누나를 방문하고서 자신의 영화 < 오인의 건달 >(1966)들에서 주인공들이 꿈꾸던 것처럼 브라질로 이민 간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 속에서 이성구 영화를 규정지을 수 있는 키워드를 꼽자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뉴웨이브적인 ‘실험’ 보다는 ‘유려함’이 될 것이다. 스타일은 세련되었지만 언제나 단정하고 주제의식은 타협적이며,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영화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괴함이나 과잉적인 측면을 발견하기 힘들다. 혹은 줄여 말하자면, 이 얼마나 김기영 스럽지 않은 단정함이란 말인가. 이성구는 첫 영화 < 젊은 표정 >을 만들고 난 뒤 한 일간지의 기고문에서 4.19 이후 고무된 어조로 “옛 것과 결별하고 이상을 향해 매진하는 의욕”을 한국영화계에 촉구한 바 있으나,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인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에서 <젊은 표정>을 두고 “젊은 세대들의 건강한 모럴을 담았다”라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보이는 그 의욕에 찬 선언과 다소 차분한 평가 사이의 간극을 살펴보면 이성구 감독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컨대 1960년대 한국의 뉴웨이브를 위해 모인 영화 청년들, 그 가운데 한명이었던 이성구 감독이 원했던 이상은 실험과 전복 보다는 유려함과 세련됨이었다. + 사족을 붙이자면, 이성구 감독은 1961년 김기영 감독의 < 하녀 >에서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이은심 과 결혼하였으며, 1982년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2005년에 타계하였다. 부인인 이은심 여사는 여전히 브라질에 생존해 있다. / 글: 전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