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 감독
- 이일형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박해수, 신민아, 이희준, 김성균, 이광수, 공승연, 최홍일, 박호산, 신주환, 정예진, 권다함, 배윤규, 신도현, 최소윤, 민우석, 박상은, 송건희, 유동훈, 서지영, 박보연, 박미현, 김영아, 이서준, 신문성, 임철형, 남윤호, 김남길, 조진웅, 이태영, 조소유, 한태은, 가영, 이지우, 한유정, 이진홍, 강덕중, 경성환, 하영진, 구범준, 김병수
① 평양가부키좌(平壤歌舞伎座), 금천대좌(金千代座) 평양가부키좌는 1910년대 초반 평양 수정(壽町)에 설립된 극장이다. 가부키 공연용 극장으로 규모가 웅장한 건물이었다. 1914년 6월 이곳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演藝界>, 《每日申報》, 1914.6.9) 1923년 가부키좌는 시설이 낙후하다는 이유로 사용중지 명령을 받고 철거되었다. 1924년 평양의 양조회사인 제등주장(齊藤酒場)의 사이토(齊藤久太郞)가 주도하여 가부키좌가 철거된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하고 그 이름을 제등주장의 명주인 “금천대”라는 이름을 가져와 금천대좌라 정한다. (<平壤に大劇場新築>, 《朝鮮新聞》, 1924.09.23.) 2년에 가까운 공사 끝에 1926년 6월 완공되었다 .(<近く竣工する平壤の金千代座>, 《朝鮮新聞》, 1926.06.28) 해방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평양을 대표하는 연극극장이었다. ② 평안극장(平安劇場 ) 침동(砧洞)이라 불리던 평양 남문통 2정목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4년 12월 30일 개관했다. (<광고>, 《매일신보》, 1914.12.27) 1915년 7월 위생강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衛生講話場所>, 《每日申報》, 1915.07.23) 같은 해 10월 30일부터는 조선인 전용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상설활동>, 《매일신보》, 1915.11.02) 1919년 2월에는 종래의 5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던 것을 3일 간격으로 교체하기로 한 내용이 보도 되었다. 1922년 8월 무렵까지 운영이 확인된다. (<반도 고학생 착발>, 《동아일보》, 1922.08.27)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③ 해락관(偕樂館) 1921년 5월 1일 평양부 수정에 설립된 활동사진관이다. 설립자는 평안남도 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직을 맡고 있던 구보(久保順吉)이다. (<평양 해락관 개관식>, 《동아일보》, 1921.05.10) 평양의 대표적인 활동사진으로 인정받던 해락관은 1937년 12월 총 공사비 30만원의 비용을 들여 신시가인 앵정 8번지로 이전 신축되었다. (<평양 해락관 신축코 낙성>, 《동아일보》, 1937.12.2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보(久保兵二郞), 지배인은 오카(岡妻男)이다. 좌석수 90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제일관(第一館),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 제일관은 평양부 수옥리에 자리한 영화관으로 1923년 3월 4일에 건립되었다. 설립자는 평양상업회의소 부회두인 박경석(朴經錫)이었다. 이 극장은 평안극장이 사라진 이후 설립된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1941년 무렵에는 박경석의 일가로 보이는 박순옥(朴淳玉)이 관주를 맡았다. 이후 제일관은 이름을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순옥(창씨명 木山淳)이었으며, 지배인은 박종식(창씨명 木山宗植)이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⑤ 평양키네마(平壤キネマ), 사쿠라극장(さくら劇場) 평양키네마는 1924년 평양부 앵정 53번지에 설립된 영화관이다. 설립주체는 주식회사 평양키네마로 평양상업회의소 상무위원을 역임한 오쿠타(奧田延之助)를 대표로 한 자본금 10만원 불입금 2만 5천원의 주식회사였다. 개관 당시 평양키네마에서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유명 변사 이코마 텐라이(生駒天雷)를 고빙해 오는 등의 활약으로 일약 해락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1928년 3월 5일 극장 내에서 발화한 화재로 극장 일부가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극장운영을 쉬기도 했다. 1943년 4월 1일을 기해 ‘미영색채 일소’를 위해 평양키네마라는 명칭을 사쿠라(櫻, さくら)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森鍬市)이며 지배인은 시게마츠(重松安紀)이다. 좌석수는 367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욱좌(旭座) 1924년 10월 15일 평양부 욱정 13번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약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조합장은 부협의원인 松尾六郞이었다. 개관 직후부터 경영난에 봉착하였는데 1926년 3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대중극장(大衆劇場), 평양동보극장(平壤東寶劇場) 대중극장은 1937년 평양부 앵정 7번지에 설립되었다. 마루야마(丸山花)라는 일본인이 세웠다. 해락관과 이웃하고 있었다. 도호(東寶)영화의 개봉관으로 활용되면서 이름을 평양동보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ハナ), 지배인은 아사이(淺井正夫)였다. 좌석수는 904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중극장으로 바꾸었다. ⑧ 평양영화극장(平壤映畫劇場) 평양부 수정 82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평양매일신문, 지배인은 사사키(佐々木惣次郞)이며 669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⑨ 화산좌(花山座) 평안남도 진남포부에 세워졌다. 1916년 5월 매일신보사의 순회 활동사진 상영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위례대성의(卽位禮大盛儀)의 활동사진>, 《매일신보》, 1916.05.25) 이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⑩ 항좌(港座), 항극장(港劇場) 항좌는 1919년 10월 평안남도 진남포부 용정정에 설립되었다 .(<남포 항좌 삼년 기념>, 《매일신보》, 1922.10.14) 1937년 중락관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진남포의 유일한 상설관이었다. 1938년 9월 무렵까지 항좌라는 이름으로 존속이 확인 된다. 1930년대 말기에 항극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부치(田淵哲次郞)이며 지배인은 시미즈(淸水健)이었다. 좌석수는 77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중락관(衆樂觀) 진남포부 후포정 27번지에 있었다. 1937년 진남포의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이 세웠다.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된 지상 3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총 900여평에 달하는 거대한 영화관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이근(창씨명 大利根進), 지배인은 핫포(八方勝)이다. 총 886석의 좌석을 갖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순천극장(順川劇場 ) 평안남도 순천읍에 있던 극장이다. 1935년 3월 빈민구제를 위한 자선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바 있다. (<순천 동정음악 오십여원이 수입>, 《동아일보》, 1935.03.02.) 이를 통해 볼 때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장현택(張賢澤)이며 3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다음, 평안북도의 극장은 아래와 같다. ⑬ 신극장(新劇場), 신영극장(新映劇場) 신의주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5월 경성일보 애독자 위안 활동사진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광고>, 《경성일보》, 1922.05.16)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교포학생들의 환영행사,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 활동사진 상영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관객 대상의 대표적인 극장이던 신극장은 1940년대 신영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39년 신의주 지역 국방헌금 납부 내역에 신극장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9년까지는 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것 같다. (<신의주 국방 헌금>, 《매일신보》, 1939.07.14) 1943년 현재 신영극장의 흥행주는 임경범(林京範), 지배인은 마츠바라(松原寬)이었다. 좌석수는 52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상반좌(常磐座) 신의주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한 존속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7월 경성일보 애독자위안 활동사진회 (<광고>, 《京城日報》, 1922.07.10) 와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6월 정주음악대교육활동사진반의 활동사진상영회와 (<정주악대 내신(來新)>, 《시대일보》, 1925.06.18) 같은 해 8월 열린 수해 관련 활동사진상영회의 기록이 남아 있다. (<七일 신의주에 수해영사 공개>, 《시대일보》, 1925.08.07) ⑮ 신선좌(新鮮座) 1927년 10월 1일 신의주 매지정(梅枝町)에, 일본인 히라바야시(平林正)와 조선인 이태영(李泰永), 고성건(高成建) 등이 1만원을 출자하여 설립했다. 연극과 영화를 두루 공연하던 곳이다. 1933년 12월에는 극단 신무대 공연 중 무대 막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주최 독자위안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와타나베(渡邊治太郞), 지배인은 다무라(田村直太郞)였다. 좌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세계관(世界館) 신의주부 상반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3년 12월 도청 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1927년에는 일본인 변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관주는 이시하라(石原)였다.(<변사 태업, 대우 개선 요구>, 《동아일보》, 1927.02.23) 1930년대 중반 관주 노다(野田白水)가 사망하면서 부인 기미코가 운영했는데, 그녀는 매월 26일 하루치 수입을 빈민구제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통해 큰 칭송을 받았다. (<세계관주 미거(美擧)>, 《동아일보》, 1935.05.0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노(中野キミ子), 지배인은 이케하타(池畑晉造)였다.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선천극장(宣川劇場) 1932년 12월 평북 선천읍 본정에 사사키운송점을 경영하던 사사키(佐々木光藏) 등 수 명이 세운 극장이다 .(<선천극장 신축 낙성식 거행>, 《매일신보》, 1932.12.1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시마(武島壽吉), 지배인은 카나자와(金澤二鳳)였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정상극장(定商劇場) 1923년 무렵 평북 정주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정주수해구제연예와 국민협회순회강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기록이 있다. 1935년 정주유학생회의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기록 (<정주음악연주>, 《동아일보》, 1935.08.10) 을 마지막으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⑲ 정주극장(定州劇場)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5년 1월 31일 구기회 주최 소인극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주 구기(救饑) 연극>, 《동아일보》, 1925.02.0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케다(池田寅雄)이며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⑳ 북진극장(北鎭劇場) 평북 운산군 북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우미하라(海原正植)였다. 박노홍은 그를 창씨한 조선인이라 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㉑ 의주극장(義州劇場) 평북 의주읍 동부동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네다(金田孝兵)였다. 좌석수는 350석이었다. ㉒ 강계극장(江界劇場) 평북 강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 7월 31일 배우 왕평이 이 극장에서 공연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최후의 무대˝-왕평군 공연 중 급사>, 《매일신보》, 1940.08.02)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시쿠라(西倉高盛)이며 8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㉓ 만포극장(滿浦劇場) 평북 강계군 만포읍에 있던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수헌(창씨명 金津守憲)이며 지배인은 마츠다이라(松平哲夫)이다. 좌석수는 620석이었다. * [사진](상단) 근천대좌 낙성 당시 기사 사진(조선신문 1926.07.18) [자료] 《朝鮮新聞》, 1926.07.13. 壯麗を極むる 金千代座落成 勘彌一行を招聘して 十八日より舞臺開き 平壤壽町の中央に一昨年九月より建築工事を進め來つた劇場金千代座は此程愈愈落成を告げ來る十八日に盛大なる落成を擧ぐる事となつた同座は淸酒金千代釀造元の齊藤氏が平壤に娛樂機關としての劇場なきを憂ひ十萬圓の巨費を投じ財界不況の折柄にも拘らず犧牲を見込んで建設に着手したもので建坪二百七坪の煉瓦建ての高壯華麗なる場內の設備整頓せる慥に滿鮮一を以て誇るに足る大劇場である舞臺開きに招聘せられた守田勘彌一行は十七日に乘込み十八,十九の兩日間花花しく開演する事となり久方振に名優を迎ふる事とて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から二千餘名を收容し得る大劇場も大入滿員の盛況を見るであらうと豫想されてゐる(平壤) 寫眞は=新裝なつた平壤の劇場金千代座 [자료] 《朝鮮新聞》, 1926.07.18. 平壤金千代座 落成式に續いて 舞臺開き興行 內外の設備完成し平壤市街に一偉觀を添へた劇場金千代座は愈愈十八日午後二時より落成式を擧ぐる事となり座主齊藤久太郞氏は官民多數に案內狀を發したが招聘された帝劇俳優の守田勘彌一行の柿葺落興行は落成式擧行後引續き開演の筈で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平壤) [자료] 《朝鮮新聞》, 1924.10.18. 旭座柿葺落し 平壤旭町に建設中の劇場旭座は內外の設備全く完成したので十五日正午平壤官民有志を招待して柿葺落しの式を擧げた神官の修○終りて松尾創立委員長の挨拶長富委員の工事報告に次で宮館府尹來賓を代表して一場の挨拶を述べ夫れより開宴京阪女歌舞伎一座の餘興劇あり盛況を極めた(平壤) [자료] 《동아일보》, 1921.05.10. 평양 해락관(偕樂舘) 개관식 조선에 제이 도회라 칭하는 대도회로서 상당한 오락장소가 무(無)함은 유감(遺憾)이라 하야 평안남도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의 공직을 가진 당지 유력자 구보순길(久保順吉)씨의 경영으로 평양 구시가의 중심 되는 수정(壽町)에 일대 활동사진 상설관을 건설하고 차(此)를 해락관(偕樂館)이라 하엿는데 차는 작년 八월부터 기공하여 대판(大阪)에서 전문기사를 초빙하야 관내외를 최신식으로 건축한바 세멘트와 연와제로 하고 정원 一천명을 수용할 대건물인대 금번 준공되엿슴으로 거 七일 오후 二시부터 시내 각 관공직자와 신문기자 급(及) 유력자를 초대하야 개관피로를 하여 활동사진 시영(試映)을 하엿더라. 그런데 당일 관주 구보(久保)씨의 례사(禮辭)가 잇슨 후 楠野 평양부윤의 축사와 松井 평양상의회두와 長谷川 평남매일사장의 축사가 유(有)하얏다더라. (평양) [자료] 《동아일보》, 1937.07.02. 남포의 영화 전당 중락관(衆樂舘) 낙성, 총공비 二十만원 【진남포】 전조선을 통트러 비겨보아도 제일 첫손가락으로 꼽힐만한 대중영화극장(大衆映畵劇場) 중락관(衆樂館)이 진남포 한복판인 후포리(後浦里)에 그 위관을 나타내고저 지금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잇다. 이 극장인즉 진남포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씨의 장남 서기선(徐基善)씨가 문화사업(文化事業)을 하랴면 어떤 것이 조을 것인가 하고 다년 연구한 결과 육만 인구를 갖고 잇는 대도시 진남포에 정원 겨우 사백명밖에 못되는 극장 단 하나로서는 부 체면 상으로나 부민의 위안 처소인 오락기관으로 보아 도저히 그저 볼 수 없다고 해서 작년 五월에 인가를 얻어 각 방면으로 조사를 거듭하야 외관이며 내용이 다 가치 정묘하게 설게하여 금년 三월에 비로소 공사에 착수한 이래 그 공사를 착착 진행하는 중이다. 이제 이 중락관의 대개를 소개하면 구조는 철골 콩쿠리-트로 지하실을 합하야 四층 총평수 九百여평 정원 一千五百명의 대건물로 총공사비 二十만원을 요하며 영사기(映寫機)는 R·C·A발성기(發聲機) 중에도 최고급형(最高級型)으로 조선에는 처음 장치되는 것이라 한다. 오는 가을까지 기어코 완성케 하도록 주야 겸행으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잇는 중인데 이 극장이 준공되는 날에는 진남포 시가에 일대 위관이 될 것은 물론이오, 영화전당으로 민중을 위하야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일반은 크게 기대하고 잇다.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