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악인전
- 감독
- 김정용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정진화, 서영란, 김기주, 장일식, 국정환, 남충일, 곽무성, 홍성룡, 황건, 문성웅, 한윤미, 김혜숙, 정희정, 윤일주, 임해림, 추석양, 황종배, 정동섭, 김성순, 정홍권, 이영하, 이화진, 오지환, 김문식, 김명일, 정학봉, 김인화, 권명임
최근 한국영화가 발명한 장르가 있다. 바로 ‘ 마동석 이라는 장르’다. 배우에게 일반적으로 ‘변신’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면, 마동석은 그 반대편에서 범죄 스릴리라는 장르 안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있다. < 악인전 >( 이원태 , 2019)는 그 정점이다. 클리셰로 구성된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마동석은 자신이 구축해왔던 나름의 영역을 완성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악인전>은 두 겹의 텍스트다. 표면적으로 <악인전>은 조폭 두목과 미친 형사와 연쇄살인마라는, 범죄 장르에서 지겹게 반복되었던 캐릭터를 한 데 모아 새롭게 재조합한 영화다. 여기서 마동석은 또 하나의 겹을 만든다. 그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면서 ‘마동석 영화’의 본색을 보여준다. 마동석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 배우다.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모두 마동석의 분신이자 배우 자체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위력은 한 명의 배우가 장르와 동의어가 되는 원동력이다. 세 악인의 팽팽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악인전>의 중심은 마동석이 맡은 캐릭터인 장동수다. 여기서 ‘마동석 영화’의 첫 번째 법칙. 마동석은 언제나 ‘룰’(rule)을 만드는 사람이다. 응징이든 복수든 정의 구현이든,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악인전>에서도 이 영화에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사람은 장동수다.(“먼저 잡는 사람이 갖는 거지”) 이 과정에서 그는 형사 정태석( 김무열 )과 상의 같은 건 하지 않으며(“우리 애들 쓰고, 진행비도 내가 내. 정보 공유하고”), 현실의 법 따위엔 관심 없다.(“법으로 못하는 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리고 최후의 응징자가 된다.(“사내 셋이 목숨 걸고 게임을 했는데 끝을 봐야지”) 여기서 장동수의 포지션은 흥미롭다. 법을 만들지만 그는 법 밖에 있는 사람(조폭)이다. < 범죄도시 >( 강윤성 , 2017)의 마석도처럼 형사일 때도 있지만(그럴 때조차도 그는 법을 따르지 않지만), 마동석의 캐릭터는 공권력을 부여 받지 않았음에도(범죄자인 경우에도) 법의 집행자가 된다. 그는 평범한 승객(부산행), 수산물 가게 주인(성난 황소), 체육 교사(동네 사람들), 유도 도장 관장(원더풀 고스트)이면서 악당과 맞선다. 그는 한국영화에선 드문 일종의 자경단원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데 그 상징적 시작은 카메오로 출연했던 < 베테랑 >( 류승완 , 2015)의 ‘아트박스 사장’이다. 화면에 그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느꼈던 기대감, 즉 ‘완력을 이용한 즉각적 응징’은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지니는 가장 큰 장르적 매력이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그 어떤 적도 제압할 것만 같은 파워의 소유자. 마동석은 그런 면에서 범죄 영화 장르의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마동석의 액션이 절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개인적 동기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악인전>에서 장동수가 강경호(김성규)를 잡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 이남 최고의 조폭인 자신에게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복수는 연쇄살인마를 감옥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진다. < 성난 황소 >( 김민호 , 2018)에서 아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납치 조직을 소탕한다. < 부산행 >( 연상호 , 2016) < 동네 사람들 >( 임진순 , 2018) < 원더풀 고스트 >( 조원희 , 2018) 등도 그런 구도다. 가정과 이웃을 위하는 소박한 행동은 집단에 위협적인 존재를 처단하는 공익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지나치게 소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마동석의 행보는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접하는 경험이다. 서민극의 김승호 , 청춘 영화의 신성일 , 액션의 박노식 과 장동휘 , 멜로의 문희 등 과거 한국영화는 스타와 장르의 반복적 결합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박중훈 (코미디), 최민수 (액션), 전도연 (멜로) 등의 배우들이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마동석이다. 그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형사든 범죄자든, 한국영화 100년 사상 가장 두꺼운 팔뚝을 휘두르며 강렬한 ‘한 방’의 액션을 선보였고, 그것은 이미 익숙한 쾌감이 되었다. <악인전>은 엔딩의 ‘살인 미소’와 함께 그 쾌감의 끝을 보여준 영화이며, 아마도 마동석이라는 장르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물며 이어질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짜 인생이지요. 스크린 의상은 모조품이니까요. 진짜 옛날 장군복을 배우가 입으면 무거워서 움직이지도 못해요.” (의상 이해윤) 1) ‘진짜’가 아닌 ‘가짜’를 관객이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매체인 영화. 영화에서 의상은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나이, 직업, 성별을 드러내주는 이미지 기호이다. 더 나아가 영화 의상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내면을 시각화하고 장면마다의 분위기, 즉 사랑, 환희, 갈등, 절망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 의상은 이렇게 미학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경제적인 효과의 확산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산업화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영화 의상도 전문적인 부서로 독립했다. 인기 있는 배우를 만들어 내고, 스타가 된 배우를 관객이 지속적으로 보러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줄 아름다운 의상을 입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영화에서 배우 스스로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입던 영화 의상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가짜 인생’을 위한 ‘모조품’이라고 자조하지만 삼오장 저고리와 금관조복으로 스크린에 조선 시대를 그럴싸하게 펼쳐놓은 이는, 충무로에서 ‘짱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해윤(1925~ )이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사극 영화나 시대물에서 이해윤의 의상을 가져다 쓰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400여 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게 대본을 쪼개어 의상을 구상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몹신(mob scene)을 위해 삼백 명, 사백 명 의상을 준비하는 일도 도맡았다. 50여 년 동안 배우에게 옷을 해 입힌 이해윤은 남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여성영화인이었다. (사진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포스터. 이해윤은 동대문 성터에서 촬영하는 변 사또 부임행차에 기생 역할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다. (사진2) <자유전선>(김홍, 1955) 광고. 김홍의 조감독 백호빈과 알게 되어 <자유전선>에서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이때 배우 임운학을 알게 되어 이후 영화 의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해윤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는데 남달리 여기에 손재주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군 병참군 사령부에 취직해서 군복 수리하는 일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빨랫감을 받아 세탁소를 차린 적도, 편물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친구를 통해 이규환의 조감독이던 유현목, 김홍의 조감독이던 백호빈과 알게 되었다. 2) 동대문 성터에서 몹신을 촬영하던 <춘향전>(1955, 이규환) 구경을 갔다가 변 사또 행렬에 동원된 기생 역할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자유전선>(김홍, 1955)에서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배우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역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보다는 바느질에 재주와 관심이 있던 터, 그녀는 <단종애사>(1956, 전창근)부터 영화 의상을 담당하게 되면서 평생을 재봉틀 앞에서 실, 바늘과 함께 했다. (사진3)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어린 단종을 연기한 배우 황해남 (사진4)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단종비를 맡은 엄앵란. 황해남과 엄앵란은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영화에서 의상이란 배우가 자신의 출연료의 일부를 할애하여 옷감을 끊어다가 역할에 맞도록 바느질집이나 의상실에서 직접 맞추어 입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단종애사> 같은 사극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이광수 원작의 작품을 유치진이 각본화하고, 전창근 연출, 한형모 촬영의 <단종애사>는 가히 초호화 캐스트를 동원했던 당시 사극영화 상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대작이었다. 바느질 솜씨만 좋았던 이해윤은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던 배우 임운학과 김일해의 지도와 도움으로 잿물에 머리카락을 삶아 직접 망건을 뜨고 수염을 만들었으며, 또 배우들을 머리 빗기고 분장하는 일까지 직접 도맡아 해냈다. 제작부장의 소개로 운현궁 나인 출신을 만나 실물 크기의 도복과 관복, 당의 등을 얻어 확실한 고중을 거쳐 궁중 의복을 재현해냈다. 이 작품을 위해 이해윤은 제작사였던 삼일영화사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이후 안정을 찾은 영화계는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한 후현대극(물론 <자유부인>(한형모, 1956)이 있었지만)보다 사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부터는 명승고적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야외 촬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정교하고 거대한 세트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스크린을 수놓아 관객을 사로잡는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기획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는 물론 상고시대까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히 사극 전성시대였다.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이 해에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마의태자>(전창근), <논개>(윤봉춘), <사도세자>(안종화)에 이르기까지 노장과 중진들이 총동원되면서, 사극 영화는 오락성과 대중성을 장착해 관객의 눈과 귀를 충족시켰다. 비록 16미리이긴 했지만, 1958년 안종화가 국내의 기술과 시설로 <춘향전>을 컬러영화로 제작하면서부터 사극 영화는 점점 더 의상과 소품에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사진5) <춘향전>(안종화, 1958) 포스터. 사극이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점점 더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이해윤이 의상을 처음 담당한 <춘향전>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사극은 기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민속, 언어, 음악은 물론 의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이었고, 여기에 의지한 작품이라야 예술성도 살릴 수 있는 법이었다. 이해윤이 그 시작부터 사극 의상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의상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영화의 예술성과 ‘역사적 고증’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익숙한 서사와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사극이 과연 한국영화예술의 어떠한 위치에서 우리들의 현실에 무엇을 제시해 주고 무슨 예술적인 감명을 줄 수 있느냐”는 비평적 문제 제기 속에서, 종종 고증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영화 의상은 해당 작품의 예술적 결점으로 치부되었다. 3) 오늘날까지도 사극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질적인 딜레마로 남아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의 고서적을 파헤치고 궁중 나인의 도움을 어렵게 받더라도, 이해윤에게 그나마 조선시대는 고증을 통해 제작하기 수월(?)했다. 별 자료 없이 벽화를 들여다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상고시대의 의상들은 특히 그녀를 힘들게 했고, 종종 각각 감독들의 까다로운 미학적/경제적 요구와 좀 더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자하는 배우들의 욕망 어딘가에서 ‘역사적 고증’과 절충해야만 하는 이해윤의 난제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해결된 적이 없었다. (사진6)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이해윤이 이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지만, 주인공 춘향의 의상은 최은희가 직접 지어 입었다. (사진7,8) <춘향전>(홍성기, 1961) 이 영화에서는 춘향 역의 김지미 의상을 비롯, 모든 등장인물의 의상을 이해윤이 담당했다. 홍성기 감독은 이후 이 영화에서 제작한 의상을 모두 이해윤에게 주었다.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의 ‘춘향전 경작’이 단연 화제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는 이 두 영화의 춘향,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최은희와 떠오르는 스타 김지미를 두고 ‘어떤 춘향이 연기를 더 잘할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관심이 쏠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의 의상을 모두 이해윤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최은희는 직접 옷을 지어 입어 신상옥의 <성춘향>에서 이해윤은 엑스트라의 옷만을 담당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에서 김지미의 의상을 비롯해 모든 출연자의 의상을 담당했다. 이 경작에서 신상옥이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얻었지만, 이해윤은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아름답고 정교했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들여 의상을 제작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이 실패하는 통에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무더기의 한복뿐이었다. (사진9,10,11) <연산군(장한사모편)>(신상옥, 1961) 이해윤이 신필름에 입사해 금관조복을 제작해 촬영한 장면들. (사진12,13,14)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 1962) 이 영화에서도 역시 수려한 의상 덕분에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평을 받았다. ‘춘향전 경작’ 이후 다시 활기를 띤 사극영화의 황금시대에 그녀는 역사적 고증이 확실히 된 의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홍성기 감독이 건네 준 의상을 손에 쥐고, 본격적으로 영화 의상에 매진하리라 다짐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춘향>이 끝난 후, 신상옥은 이해윤에게 신필름 의상부 소속으로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신필름에 들어가 처음 촬영한 작품이 <연산군>(1961)과 <폭군 연산>(1962)이었다. 두 영화는 실물에 가까운 세트에서 당시의 풍속, 기예, 생활을 고증을 통해 잘 살렸고, 특히 소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재현하고 수려한 의상으로 인해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15) <왕자호동>(한형모, 1962)에서 사열해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장면 (사진16) <인목대비>(안현철, 1962)의 한 장면. <왕자호동> 병사들의 옷에 단을 대어, 다음날 <인목대비>의 조선 병사들이 입고 찍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해윤이 의상을 담당했다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들 것만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사극의 경우 조연을 비롯한 엑스트라까지 포함하여 기본 200벌(많으면 500벌) 정도의 다양한 의상을 손수 만들어야했다. 한해에 영화 의상을 열 편 이상 담당하는 그녀에게 ‘의상 바꿔치기’(그리고 세탁)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해 머리를 써야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1962년 한해를 예로 들면, 그녀는 <왕자호동>(한형모), <인목대비>(안현철),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의 의상을 동시에 맡았다. <왕자호동>은 삼국시대, 나머지는 두 영화는 조선이 배경이었다. 수백 벌의 의상을 영화마다 각각 제작할 비용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 영화에 쓰인 의상을 조금 다듬어 다른 영화에서 촬영하고, 다시 가져와서는 고쳐서 또 다른 영화에 빌려주는 식이었다. 조선시대 의상은 바지나 저고리, 두루마기에 단을 대는 게 특징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단이 없었다. <폭군 연산>을 위해서는 손바느질로 단을 대고, 같은 의상으로 <왕자 호동>을 찍을 때는 부지런히 그 단을 떼야했다. 그리고 다시 촬영 일정에 따라 <인목대비>를 찍는 수원성에서는 단을 붙인 채로 찍고, 밤새워 단을 없애 다음날에는 남한산성의 <왕자 호동> 현장으로 의상을 날라야 했다. (사진17, 18) <칠공주>(정창화, 1962)의 포스터와 스틸 사진. 통일신라의 일곱 공주가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의상을 각각 다르게 개성을 살려 만드는 일이란, 의상 담당자 이해윤에게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 되자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사극 배우의 의상은 특히나 중요해졌다. 신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의 희비극인 정창화의 <칠공주>(1962)는 무려 일곱 공주(문정숙, 이빈화, 전계현, 방성자, 차유미, 김명희, 엄앵란)가 주인공이라 의상이 까다로울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이 시대적 배경이었다면 치마저고리 일곱 벌의 색깔만 달리해 공주 각각에게 입혔겠지만, 신라가 배경인 컬러 시네마스코프였기 때문에 색감은 물론 옷깃이나 장식 모양을 조금씩 달리해 각 공주들의 성격을 반영하면서 복식을 재현해야 내야했다. (사진19, 20)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의 군인 복장. 이만희 감독과의 논의 끝에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만들었던 이해윤 역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군사영화에서도 오랫동안 군복을 수선하던 이력의 소유자 이해윤의 바느질 솜씨가 필요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신문지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만희의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1965)>은 감독 뿐 아니라 의상 담당이던 이해윤까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남한 출신 여자 포로들을 호송하는 인민군 장교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한 이 영화에서 이해윤이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세등등한 공산당과 인민군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망이 아닌 새 망으로 탱크 위장망을 치고, 장교 군복을 멋지게 지어 세무(suede) 반장화까지 신겼던 것이 문제였다. 중앙정보부는 이해윤의 의상 창고도 샅샅이 조사하고, 인민군과 중공군 의상에 대한 교육을 한 달이나 받게 해 향후 의상 제작에 있어 반영하도록 했다. (사진21) <하얀전쟁>(정지영, 1992)의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 장면. 급히 필요한 미군 작업복을 현지 인력을 직접 고용해 만들어 촬영을 했다. 그 후에도 <8240 K.L.O>(정진우, 1966), <증언>(임권택, 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아벤고 공수군단>(임권택, 1982)을 비롯한 수십 편의 군사영화에서 이해윤은 국군과 인민군, 미군과 중공군의 옷을 지었다. 베트남에서 촬영했던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에서는 예순이 훌쩍 넘은 이해윤은 홀로 로케이션 현장에서 의상을 챙겼다. 필요한 장면에 따라 연기자들의 의상을 모두 제작해 갔지만 막상 현지에서 미군 작업복이 필요했고, 무작정 사이공 시장으로 내달린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 여성들을 고용하여 의상을 만들어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진22,23) <난중일기>(장일호, 1977) 이해윤이 쇠미늘을 오리고 두드려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꿰매 만든 갑옷을 볼 수 있다. 장일호의 <난중일기>(1977)는 그녀로 하여금 영화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극과 군사영화를 전문으로 20여 년간 의상을 담당했다지만 이 영화에서 이순신의 갑옷을 제작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갑옷을 입고 호령하는 모습을 통해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표현하고 올곧은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연구의 연구를 거듭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우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뜯어보며 흉내는 내봤지만 어쩐지 입체감이 영 살지 않았다. 생각 끝에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 갑옷에 달 쇠미늘(鐵札)을 오리고 두드린 다음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엮어 철갑 두 벌을 만들었다. 한 커트를 찍고 나면 날카로운 쇠미늘에 무명실이 끊어져, 이순신 역의 김진규가 한 벌을 입고 찍고 있는 동안 이해윤은 촬영장 한편에 앉아 나머지 한 벌의 쇠미늘을 다시 꿰매야 했다. 이때의 연구와 노력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새겨져 관객 앞에 펼쳐진 그 순간, 그녀는 영화 의상 담당으로서 새삼 긍지를 갖게 되었다. (사진24)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정창화, 1968) 포스터 (사진25)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포스터 (사진26) <무림악인전>(김정용, 1980) 포스터 합작이 시작되고 중국, 홍콩영화가 들어오면서 ‘참바라(ちゃんばら)’ 또는 ‘으악새’로 불리던 검술영화가 많아지면서, 이해윤은 영화 의상에서 ‘고증’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토로했다. 4) 공보부에서는 사극이나 시대극영화에서 사학을 전공한 인력을 고증 담당 스태프로 참여시켜 근거 없는 언어, 의상, 풍습을 시정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상영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보기도 했지만 지켜질 리 만무했다. 5) 궁중을 배경으로 했던 이전의 정사극과 달리 시대적인 배경만을 빌린 야사나 서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이들 영화에서는 화려한 액션과 오락성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이시기 보편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옷감 나일론(nylon)은 빨아도 구겨지지도 않고 색깔도 선명했다. 면이나 비단처럼 툭하면 찢어지고 구김이 심해 관리가 힘들었던 기존의 의상과 달리 나일론으로 제작한 의상은 공중을 날아 차고 칼을 휘둘러야하는 액션 연기자들이 활동하기에는 적격인 소재였다. 이해윤 역시 ‘중국 건지, 한국 건지, 현대 건지’도 모르게 의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나일론 같은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연기자들이 연기하기 편한 의상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27,28) <토지>(김수용, 1974) 이 영화에서 이해윤은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지었다. 특정한 장르 영화 제작에서 의상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영화계 내에서 그런 수고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여러 영화제에서 공로상과 의상 부문의 수상 트로피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중 그녀가 자랑스럽게 꼽는 의상상은 <토지>(김수용, 1974)로 받은 파나마국제영화제 의상상이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경남 하동의 만석지기 가문을 지켜가는 서희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지미는 어린 서희에서 나이든 서희까지 연기해야 했다.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해야 했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공들여 지어야만 했다. (사진29,30) <어우동>(이장호, 1985) 이해윤은 이 영화에서의 의상에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를 주어 개성을 가미하려 시도했다. (사진31)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팥색 저고리 그녀에게 <어우동>(이장호, 1985)의 의상은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들을 주어 신선한 개성을 가미하려고 애썼던 것이라,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붉은 팥색 저고리는 두루마기를 뜯어 방망이로 종일 다듬어 반질반질한 비단의 느낌을 살려서 만든 것이라 소중하다. 한 겨울 장면이라 엑스트라들 안에 입는 옷들까지 모두 누벼 주어야 해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작품 <개벽>(임권택, 1991), 그리고 연일 40도를 웃도는 멕시코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했던 작품 <애니깽>(김호선, 1996) 역시 이해윤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사진32,33,34) <개벽>(임권택, 1991) 이해윤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영화라고 소회하는 <개벽>은 겨울 장면이 많고 엑스트라가 다수 등장해 특히 공들여 의상을 지었다. (사진35,36) <애니깽>(김호선, 1996)은 1900년대 초 멕시코로 이주 노동을 해온 조선인들의 생활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해윤은 현지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해 가며 촬영에 임했다. 이해윤처럼 많은 영화에서 꼭 필요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의 뒤에 또 영화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현장에서 이들은 ‘뒷 스태프’(편집, 미술, 특수효과, 소품, 녹음, 의상 등)라고 불렸는데 오랫동안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연출, 촬영, 연기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만큼 대우받지 못했고,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영화사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뒷 스태프’에 대한 문헌자료도 충분치 않은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다. 2004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은 ‘원로영화인 구술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려져있던 많은 ‘뒷 스태프’의 역사가 발굴, 기록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해윤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영상 뒤에 숨은 여성마술사들, 의상전문가 이해윤 씨’, 《경향신문》 1986년 1월 29일 7면. 2) 「이해윤 : 바늘 하나로 영화를 아름답게, 40여 년간 충무로를 지켜온 영화의상 디자이너」, 『이야기 여성사: 한국여성의 삶과 역사2』, 여성신문사, 2000, 263~264쪽. 3) ‘신영화 : 사적 고증이 결여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한국일보》 1956년 6월 14일 4면. 4) <이해윤 은막의 스타, 그 날개를 달다>(나윤희, 부동산 TV, 2001).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해윤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www.koreafilm.co.kr에서 볼 수 있다. 5) ‘[연예계스냅] 사극 고증 철저히’, 《경향신문》 1967년 12월 23일 4면.
이탈리아 서부극을 ‘마카로니 웨스턴’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부르는 작명법을 따르자면,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김치 무협’이라 명명할만한 독특한 장르가 있었다. 한국을 중국처럼 꾸미고 복장도 중국식으로 입은 채 버젓이 소림사까지 등장시켜 ‘무림’이 어쩌고 ‘중원’이 어쩌고 했던 일련의 무술영화들이다. 만주 웨스턴의 활황에 이어 이두용 의 태권액션영화들마저 그 명맥이 끊긴 1980년대 초반, 그러니까 이소룡과 성룡의 등장 이후 모두 넋이 나간 채 명절마다 성룡 영화만 기다리며 한국액션영화의 독창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 시기에 김영일 , 왕룡 , 정진화 같은 몇몇 액션배우들이 대부분 전북 고창에서 촬영한 일련의 ‘짝퉁 무술영화’들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 소림사 주방장 >(1981)같은 영화들은 당시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당한 흥행성적을 기록했지만 언론의 평가는 가혹했다. 무국적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 소림사 주방장 >의 흥행 이후 ‘저질 무술영화들이 판친다’는 요지의 1982년 무렵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중국 전통의 고증도 무시한 채 마구 치고 박거나 엉뚱한 에피소드로 웃기는 무국적 단세포식 날림”이라며 “가끔 수입되는 중국, 홍콩영화들을 흉내 내거나 마치 그들의 영화인 것처럼 관객을 현혹시키자는 어설픈 속셈도 작용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러면서 “이따금 한국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내한하는 홍콩영화인들마저 이들 영화를 보고 ‘무대가 한국이냐 중국이냐’를 물어온다니 기가 찰 노릇”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당시 액션영화에 열광하던 젊은 관객들의 기호와 별개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익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중심에 바로 정진화 가 있었다. 1956년생인 정진화 는 < 돌아온 외다리 >(1974) 등 이두용 사단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시작해, 김선경 감독의 < 특명 >(1976)을 비롯 역시 김선경 감독이 연출하고 왕호와 황태수(본명 황정리 ) 등 선배 액션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던 < 흑룡강 >(1976), < 밀명객 >(1976) 등에 출연했다. < 복권 >(1980), < 소림사 주방장 >(1981), < 무림걸식도사 >(1982) 등에 늘 함께 출연했던, 그러니까 늘 정진화를 괴롭히는 익숙한 악당으로 출연했던 김영일 이 < 소권괴초 >(1979) 등 홍콩으로 건너가 무술영화에 출연한 거의 마지막 세대 배우였다면, 정진화는 이런 짝퉁 무술영화에 출연한 거의 유일한 토종 배우였다. 홍콩 무술영화들을 연구하고 모방은 하되 순수 국내파였다고나 할까. < 무림악인전 >(1980)으로 김정용 감독과 만난 뒤 배치기를 필살기로 하는 코믹무술영화 <복권>(1980)의 주인공을 맡으며 일약 당대 한국 무술영화의 스타로 떠오른다. 성룡에게 로웨이가 있었다면 정진화 에게 김정용 이 있었다고 할 만큼, 그는 김정용 감독의 일련의 무술영화들에서 주인공을 도맡았다. 그의 남다른 점은 왕호 , 거룡 , 왕룡 등의 선배들이 이소룡의 아우라를 좇는 사람들이었다면 < 복권 >을 필두로 장발을 한 채 성룡식 코믹 액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사실 그가 구사한 대부분의 코믹한 동작들은 성룡의 < 사형도수 >(1978)와 < 취권 >(1978)에서 유래한다. 위 두 영화에서 코주부 스승으로 출연한 원소전 캐릭터 역시 그대로 가져왔을 정도다. 아무튼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이듬해에는 성룡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장발의 정진화를 모방한 하우성 주연, 김선경 감독의 < 산동 물장수 >(1982)라는 영화도 나왔다. < 소림사 주방장 >은 이후 < 소림사 용팔이 >(1982), < 소림사 주천귀동 >(1982), < 소림사 왕서방 >(1982) 등 무려 10여 편이 넘는 아류작을 낳을 정도로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정진화 의 출연작들은 ‘아마존’같은 해외사이트에 마치 홍콩영화인 것처럼 출시돼 있다. ‘Elton Chong’이라는 영어이름으로 등록된 그를 보고 한국인 배우 정진화로 연결 짓는 해외 액션마니아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의 작품들 중 수작에 속하는 < 무림 걸식도사 >(1982)는 < Invincible Obsessed Fighter >, < 돌아온 소림사 주방장 >(1982)은 < Magnificent Natural Fist >, < 홍도경 >(1985)은 < Dragon Against Vampire >라는 제목으로 출시돼 있다. 이후 김정용 감독과의 파트너십은 계속되어 < 람보 >나 < 인디아나 존스 > 시리즈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 아라한 >(1986)은 당대 무국적적인 한국 액션영화의 황혼기라 할 수 있으며, < 팔도 쌍나팔 >(1987)은 현대물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 돌아이 >(1985)가 당시 충무로의 양지의 액션영화였다면 그 반대 지점의 영화가 바로 <팔도 쌍나팔>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1990년이 되기 이전 이른바 ‘개인기’를 지닌 액션배우들은 정진화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후 충무로를 떠난 그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으며 가장 최근에는 TV드라마 <무인시대>(2003)에 출연하기도 했다. / 글: 주성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