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X102
“나는 그렇게 일찍 ‘입봉’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게 내가 먹고사는 유일한 방법인데 조감독을 하면 그냥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잖아요. 그때만 해도 내가 충무로에서는 꽤 똘똘한 조감독이어서 사람들이 권택이, 권택이 그러면서 나를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감독 한번 해서 망하면 그걸 누가 다시 연출부로 데려다 쓰냐구요. 그때도 영화 한 편 찍고 사라진 사람들을 많이 봤으니까요. 나는 정창화 감독만 모시고 했잖아요. 여기저기 다니는 게 나한테 맞지도 않고. 그런데 < 장희빈 >을 찍을 때였어요. 그걸 창경궁에서 찍고 있는데 일정이 촉박해서 심지어 연출부들이 그때 막 궁궐 안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영화를 찍었어요. 장면을 찍는데 참, 이건 내가 잘못한 건데, 거기서 나와야 할 일정이 다 되어서 이제 떠나야 할 판국인데, 창경궁 바깥으로 일단 나가면 세트를 세울 수도 없고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날 분량을 다 못 찍고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정창화 감독이 막 찍기 시작하는 거야. 동선도 안 맞고, 시선도 틀리고, 그래서 내가 이건 잘못된 겁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 거기 배우들도 있고, 스태프들도 있고, 사실 정창화 감독도 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데, 그래서 속에 불이 나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 알고 있을 법한 조감독이란 놈이 그러니까 다 있는 앞에서 나한테 갑자기 화를 내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맞는 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만두겠다, 이러고 나온 거지, 그런데 내가 다른 감독 밑에서 해본 적도 없고 머리가 컸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감독들도 나를 안 부르는 거야, 그때 조감독 하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제작자가 그러지 말고 그냥 ‘입봉’을 해라, 해서 감독이 된 거예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장희빈>(정창화), <요화 장희빈>(임권택) 정창화 의 < 장희빈 >은 1961년에 제작되었고 김지미가 사극 드라마 사상 첫 번째 장희빈으로 등극한 영화이다. 숙종으로는 김진규가 출연하였다. 이듬해 임권택 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입봉’하였다. 그런 다음 스무 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1968년 임권택은 자신의 첫 번째 칼라영화 < 요화 장희빈 >을 찍었다. 물론 그해에 이 영화만 찍은 것은 아니다. ‘입체영화’ < 몽녀 >를 찍었고, (< 7인의 사무라이 >를 리메이크한) < 황야의 7인 >를 리메이크한 < 바람 같은 사나이 >를 찍었고, 첫 번째 다찌마와리 액션활극 < 돌아온 왼손잡이 >를 찍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야지’(그때는 자신이 모시던 감독을 그렇게 불렀다)가 찍었던 영화, 그 현장에서 떠나야했던 영화, 그 영화와 같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신이 찍게 되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약간 민망하지만 어떤 승리감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대결‘하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오야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다. ‘親父’라는 말. 자기 아버지라는 뜻.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들은 자기가 모시는 감독을 다른 자리에서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 하여 ‘오야지’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대결하는 장면.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임권택은 <요화 장희빈>을 ‘연출하면서’ 정창화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그런 다음 의도치 않게 한국영화 산업 안에서 스스로 망가지면서 자기 영화를 찾아가는 과정에 나서게 되었다. 헐벗은 연출. 가진 것 없이 버려지게 된 다음 다시 시작하는 계기.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 혹은 이 스물 한 번째 영화는 임권택에게 하나의 사건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영화는 임권택의 내부에서 미처 종결되지 않았던 하나의 중단이 마침내 자기 손에 의해서 완성된 다음 끝난 것이다. 물론 과도하게 <요화 장희빈>에 대해서 (프로이드를 경유한) 아버지와의 대결이라는 드라마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두 번째. 한국영화에서 첫 번째 칼라영화는 1949년에 만든 홍성기의 16mm 필름인 <여성일기>였지만 긴 시간 동안 한국영화에서 칼라영화의 시대는 미루어졌다. 그 시대를 시작한 것은 1961년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홍성기 의 < 춘향전 >과 신상옥 의 < 성춘향 >이었다. 임권택 이 ‘입봉’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칼라영화의 시대. 그러나 임권택은 자신의 칼라영화를 한참 뒤로 미루었다. 물론 그건 그의 예술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필름 값은 영화 제작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쌌(을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비용이 부담스러울 만큼 제작 조건이 열악한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임권택은 기다려야 했다. < 요화 장희빈 >은 임권택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한 가지 더. 신기하게도 1968년에 찍은 임권택의 영화는 ‘갑자기’ 모두 칼라영화이다.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흑백영화를 찍지 않았다. 같은 말이지만 되돌아가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홍상수 는 가끔 흑백으로 영화를 찍었다. . 혹은 칼라로 작업한 다음 마지막에 흑백으로 전환한 < 북촌방향 >. (그래서 이 영화의 예고편은 칼라이다) 봉준호 는 칼라로 개봉한 다음 감독판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색 보정 작업에 참여해서) 흑백으로 전환한 다음 < 마더 >를 (다소 제한적인 방식으로) 다시 상영하였다. 일부 극장에서 102번째 영화 < 화장 >을 흑백으로 변환하여 상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임권택 자신은 이 영화의 최종판은 칼라이며 흑백 버전의 <화장>에 대해서 “상업적인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는” 판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무심함. <요화 장희빈> 한복의 색채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공간에 물드는 의상 그걸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 요화 장희빈 >은 누구라도 보자마자 그 색채감각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여기서 세트 미술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한복의 색채만을 활용하여 영화 전체를 마치 붓으로 채색하는 것처럼 그려낸다. 이 말을 단지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의상이 회화와 다른 점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동선을 따라 화면 안을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색채의 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때 의상은 미장센의 일부이면서 종종 그로부터 독립된 어떤 존재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어떤 존재감? 그렇다. 이를테면 롤랑 바르트가 섬세하게 파리를 거니는 마담 혹은 마드모아젤을 바라보면서 의상이라는 모드에 대한 기나긴 기호학적 분석을 그려낸 예. 혹은 삐에르 부르디외가 냉정하게 펼쳐 보인 계급적 취향의 차이라는 서로 나누어진 세계. 물론 맨 위에는 프로이드가 있다. 꿈속에서 나타난 의상보다 더 분명한 흔적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형상화라는 과정. 영화가 꿈은 아니지만 욕망이 진행되는 과정, 좀 더 프로이드적인 언어로 투사되는 과정에 이르면 둘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때 의상은 2차 가공 과정의 어떤 역할을 할(수 있을)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감독들은 의상의 비밀을 처음 건드린 세대이다. 나는 지금 피터 그리너웨이의 바로크적인 의상(-미장센)을 떠올리고 있다.<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에서 요리사의 아내가 화장실에서 복도를 지나 자기 방을 지나친 다음 실외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동일한 디자인의 옷이 마치 공간의 색에 물들기라도 하듯 형형색색으로 바뀌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홍상수 는 등장인물의 옷을 그 역할을 하는 배우의 집에 가서 고른 다음 그 배우의 일상생활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서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옷에 묻어있는 삶이라는 흔적. 취향이 보여주는 내면.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 박찬욱 은 의상을 등장인물 내면의 기하학적 조형이라고 생각한다. < 친절한 금자씨 >의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 마치 총에 맞아 뚫린 것 같은 구멍들. 임권택은 의상의 체계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위계질서가 있고 차려야 할 격식이 있으며 종종 의상이 인물을 규정한다. 그것은 신분의 기호이며 금지와 배제로 이루어진 기호들의 집합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의 신호이기도 하다. 종종 임권택은 그런 다음 서로 다른 의상의 세계 사이의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을 즐긴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의 예. 일제강점하 가문의 성씨를 지키던 설씨 노인이 자살을 하자 그 장례식에 찾아간 일본인 다니는 예의를 표하기 위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찾아간다. 하지만 마당에 있는 모든 한국인은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다. 흰색의 무리 속의 단 한 점의 검은 색. (< 족보 >) 승복을 입은 두 승려가 찾아가는 사창가 여인들의 과장된 노출의 의상들. (< 만다라 >) 씨받이로 들어간 소녀는 끝내 양반들의 의상을 입어보지 못한 채 아이를 임신한 다음 비밀리에 출산하고 쫓겨난다. (< 씨받이 >) <요화 장희빈>은 17세기 조선 시대 숙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27년에 걸쳐 궁궐 안에서 넘쳐나는 여인들의 정념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로 의상을 활용하고 있다. 종종 그녀들이 입은 옷은 마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된 것처럼 투명해지기조차 한다. 임권택은 그녀들이 입은 옷을 때로 그녀들의 정념에 대한 환유처럼 입히기도 하고 혹은 그녀들의 태도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교차하는 정념의 수사들.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에서 그녀들이 입은 옷은 신분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질투와 분노, 사랑과 박해, 의심과 욕심 사이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불안을 오가면서 몸과 마음을 봉합해내는 정념의 순환 회로이기도 한다. <요화 장희빈>과 <현기증>의 녹색 여기서 장희빈은 서로 다른 수많은 여인들, 그녀를 내친 인경왕후와 그녀를 다시 받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와 (연잉군을 나은) 숙빈 최씨, 그녀들을 둘러싼 왕가의 친인척 여인들, 그녀들을 받드는 서로 다른 계층의 여인들, 그 주변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녹색의 한복을 입고 자기의 자리를 점유한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색채의 심리학에 의지할 생각은 없다. 대신 영화사에서 유명한 녹색을 환기시키고 싶다.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스카티 눈앞에 주디가 종탑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마들랜과 똑같은 머리 모양과 옷을 입고 마치 환생한 것처럼 나타났을 때 방을 가득 채운 녹색. 아니 차라리 넘쳐나는 것만 같은 녹색. 이 불안한 색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옮겨가면서 죽은 자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낼 때 히치콕은 영화에서 녹색이 갖는 새로운 의미를 거의 창조해내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임권택 이 히치콕의 영향 아래 놓여있거나 혹은 <현기증>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마도) 아니다.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을 보고 있으면 그저 귀여웠던 한 소녀가 어느 자리에서부터 사악하고 요염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 마치 그것이 그녀가 입은 기분 나쁜 초록색의 한복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복장도착과도 같은 변신. 초록색 자체가 나쁜 기운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알다시피 녹색은 평화의 상징이며 또한 생명을 지키고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그린’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에서 미신을 부추기고 불길한 신령들을 불러내는 무당들에게 자주 초록색 한복을 입히는 것은 이 색채에 대해서 한국 문화 안의 고유한 코드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나는 의도적으로 마치 떠오르는 듯이 장희빈의 녹색 한복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임권택은 장희빈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한복의 색채를 체계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건 이후에도 그렇다. 임권택은 먼저 도식을 세우지만 영화 안에서 어떤 도식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종종 부분적으로 자신의 도식을 위반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오래된 예술가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임권택은 마치 그 도식이 등장인물의 생명을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어느 순간 예외를 마련하거나 때로는 돌발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도식을 부수기도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도식을 찾아냈을 때 혹시 이것이 그 안에서 예외의 규칙이 아닌지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임권택의 예술에 관한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그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에게 되돌아가서 그 안에서의 원리를 추론하는 이 경험의 표지들 사이에 생명이 감도는 순간을 임권택은 도식 안의 예외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거기서 장희빈이 그 요염하고도 불길한 초록색 한복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삶 안에서 그 순간들이 이루는 예외의 도식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예외의 도식? 유혹의 전술이 전개되는 순간이라는 도식. 누구를 대상으로? 숙종을 대상으로. 무엇을 목표로? 오직 상감마마와의 침실에서의 여흥의 시간을 위하여. 그래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원자 아기씨. 좀 더 간단하게 임신. 그 임신이 안겨주게 될 자리. 우리는 조선시대가 유교의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문을 잇는 선이 끊어지는 것은 제사에서 죽은 조상과 대면할 때 예외 없는 불효의 세계였다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해야 한다. 이 연쇄적인 계산의 논리적인 도식.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 녹음현장 (출처: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은 시각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청각적인 해설의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마 그건 <요화 장희빈>이 고스란히 정창화 의 < 장희빈 >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장희빈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숙종의 재위 기간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1961년 1월 23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서 3월 4일에 36회로 종방(終放)한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을 영화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1960년대가 라디오의 시대였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좀 더 실감나는 설명. 1970년대 거의 마지막까지 시내버스를 타면 기사들은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예외 없이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다. 그때 승객들은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고 마치 요즘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의 우여곡절에 전 국민이 매달리듯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장희빈>의 대본을 쓴 이서구 작가는 일제 강점하인 1920년 동아일보 창사와 함께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고 그런 다음 연극 모임인 ‘토요회’를 거쳐 라디오 방송에 입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서구 작가는 1957년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전념했고 <장희빈>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장안의 길거리가 텅 비었고 특히 목욕탕 여탕은 말할 것도 없이 마찬가지로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성우들은 지금의 탤런트들에 비교할만한 인기를 모았다. <장희빈>은 미처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사가 판권을 샀고 정창화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었다. 또 다른 이서구 작가의 사극 라디오 드라마 <강화도령>은 1963년에 동명의 제목으로 신상옥 이 영화로 찍었다. <장희빈>은 단지 드라마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주제가도 1960년대 가요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서구 작가가 작사를 하고 전오승이 작곡한 <장희빈>은 그 당시 ‘꾀꼬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황금심이 불러서 “이 노래를 듣기 위하여 드라마 시간을 기다리는 애청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잠시 멈춘 다음 당신께서 YOU를 검색하셔서 음미하듯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먼저 읽어주시기 바란다. <요화 장희빈>에는 이 노래가 거의 갑자기 기습하듯이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흐른다. 조선 시대 사극에 덮어씌운 그 시절 엔카(演歌) 풍의 대중가요.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도 잃은 그 날 밤이 치마 그리워 치마폭에 목메는가, 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칠보단장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아마 임권택 도 이 방송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화된 영화의 조감독을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되던 1961년의 언저리가 아니라 그로부터 7년 후인 1968년에 다시 만들면서 왜 라디오 드라마를 참조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칼라영화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에서 성공한 흑백영화를 다시 칼라영화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상업적 모델이 되었다. 그때 대중들은 리메이크를 새로운 영화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성공한 영화의 반복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만족의 보증이라고 여겼다. 물론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영화가 자신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바보 같은 공식은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 대중적 신화이기는 하다. 이 모델은 거의 무차별적으로 대입되었다. 심지어 김기영 조차 흑백영화 < 하녀 >를 칼라영화 < 화녀 >로 다시 찍었다. 임권택은 단지 장희빈을 소재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 요화 장희빈 >이 라디오 드라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시켜 나간다. 여기서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장희빈이나 숙종이 아니라 영화 바깥의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이다. 물론 그때 한국영화에서 보이스 오버의 방식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종종 나태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방법이 다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후일 임권택이 영화의 시청각 기호 위에 문자를 더하면서 자막을 입히는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는 초기 이전(primitive)의 모델을 떠오르게 만든다. 여기서 그 목소리는 마치 변사처럼 영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설명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 목소리는 (다소 따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야기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는 대타자의 음성이다. 말하자면 극영화에서 집행되는 다큐멘터리에서의 (빌 니콜스의 구분에 따르면) 신의 목소리로서의 방법. 하지만 내 귀를 붙잡은 순간은 그 목소리가 종종 영화의 감정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 목소리는 영화를 설명하다 말고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음모에 떨어질 때 영화를 보는 나를 앞질러, 혹은 대신하여, 탄식하기도 하고 숙종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노를 하며 줄거리의 윤곽을 설명해야 할 순간에 스스로 감정을 대리하는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적 존재가 된다. 이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단지 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이 몸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의 몸들을 대신하는 영화라는 몸. 영화의 기호들에 부여하는 뼈와 살, 무엇보다도 감흥을 불러내는 자율적인 장치. 그 안에서 영화가 스스로 느껴보기 시작한다. <요화 장희빈>의 신기한 변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치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영화의 시청각 기호들이 불응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중하게 불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 개념적 표현을 노엘 버치에게서 빌려왔다. 버치는 영화에서 어느 순간 왜 단순한 화면에서 등장인물에게 쇼트의 방법론이 매개변수가 되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리듬을 가지려 할 때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버치는 그 대답을 오즈에게서 가져온다. 영화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사이에 영화를 바라보는 것과 영화가 바라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영화를 바라보는 과정을 관성에 내맡긴 채 영화가 바라보는 과정에 감흥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 말의 망설임.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제목과 달리 장희빈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래서 이 영화가 몹시 산만하게 느껴진다. 사료에도 장희빈의 출생 신분이 불명료하지만(그녀가 노비 출신인지, 아니면 몰락한 양반집 규수인지, 혹은 다른 자료에 따르면 중상인의 자제라고도 되어있든가 하지만) <요화 장희빈>은 조선왕조실록을 옮긴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희빈이 궁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장희빈의 모친 폐비 윤씨의 집으로 이야기가 찾아갈 때 그녀가 자란 환경을 어렴풋하게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조선 시대라는 생활조건의 외양 안에 감추어진 삶의 과정을 가늠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의 근거를 뒤로하고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접근해도 장희빈의 배경을 지운 것은 그녀가 궁궐 안에서 경쟁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하는 그녀의 욕망의 힘을 끌어낸 증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임권택 은 마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점적인 왕후의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장희빈의 유일한 임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과정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다. 이 사태를 단순하게 공격하기 어려운 것은 종종 임권택이 장희빈을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제쳐놓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건 처음부터 그렇다. 이야기는 숙종이 아직 세자였던 시절에서 시작하면서 마치 그를 따라 진행할 것처럼 이어진다. 장희빈은 이야기에 삽입되는 방식으로 갑자기 등장하고 난 다음 이야기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그녀가 항상 이야기의 중심을 점거하는 것도 아니다. 장희빈은 궁궐 바깥으로 두 번 쫓겨나는데 심지어 그녀가 첫 번째 쫓겨났을 때는 마치 영화가 잠시 동안 그녀를 잊은 것처럼 진행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다시 궁궐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어진 인현왕후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자 주변의 우려를 모두 물리치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때 임권택은 다시 장희빈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사실을 숨기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부디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한다. 영문을 모르는 숙종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들은 인현왕후가 몹시 위험하게도 장희빈을 다시 궁궐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눈치챈다. 여기서 임권택은 마치 장희빈이 처음 등장하는 것처럼 진행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을 모시고 내실로 인도하고 거기서 장희빈과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든다. 인현왕후는 영화가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처음 등장했고 그녀가 한 첫 번째 역할은 숙종과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하는 시나리오 안의 기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숙종과 장희빈이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들고 인현왕후가 다시 바깥으로 나갈 때 카메라는 그녀와 함께 문 바깥으로 나간다. 두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 첫째, 그렇게 되면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둘째, 순간적으로 여기서 임권택은 주인공을 바꿔치고 있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가 <요화 장희빈>이 아니라 <인현왕후>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동선을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짠 다음 거기에 감정선을 더한다. 그런 다음 숙종과 장희빈이 포옹을 할 때 인현왕후는 여기까지 행한 그녀의 선의와 상관없이 창문 바깥에서 그걸 흘낏 바라본 다음 차마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한 채 외면을 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벽에 기대어 슬픔에 가득 차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핵심은 이 장면의 심리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장면이 어떤 전환점으로 작용하면서 이제부터 영화는 인현왕후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 자리를 둘러싸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분주하게 나타나고 퇴장한 다음 다시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혹은 새로 나타났을 때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에 옮겨간 다음 제 할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라도 당황하게 될 만한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숙종에게는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경종 이외에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연잉군이라는 아들이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숙빈 최씨의 잉태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임권택 이 숙빈 최씨를 인물들 사이의 원근법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은 단순하게 수평으로 옮겨가는 대신 마치 층위를 오르내리며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틈새 사이를 돌아다닌다. 이때 숙빈 최씨의 행위소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숙빈 최씨의 행위는 항상 수동적 상황 안에서 능동적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숙빈 최씨에 관해서만 화면 바깥의 그 목소리를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장희빈이 숙빈 최씨를 야단치는 장면 앙갚음을 하듯 숙빈 최씨가 장희빈 뺨을 때리는 장면 여기에 좀 더 디테일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좀 전에 말한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장면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숙빈 최씨는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지만 단지 눈에 띄는 무수리 중의 한 명, 아니 오히려 무수리 전부를 대신하는 환유적 기능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별달리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 은 무수리들을 집합으로 만든 다음 이동시키거나 아니면 배경에 보이는 미장센의 일부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의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등장인물 곁에 다가온 다음 다시 멀어지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숙빈 최씨는 처음에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법에서 말하는 중심을 이루는 혹성들을 배치한 다음 그 주변을 떠돌거나 오가는 위성들의 운동감. 첫 번째 등장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장희빈이 숙종과 합궁을 한 다음 지위가 올라가자 궁궐에서 과장되게 자신을 과시하면서 걸어갈 때 숙빈 최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 장희빈은 그녀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면서 지나친 숙빈 최씨를 다시 불러 세워놓고 야단을 친다. 이 장면은 방점이 숙빈 최씨에 있지 않고 장희빈에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힘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는 사례의 장면처럼 보인다. 이 신을 주변으로 그녀는 심지어 숙종 앞에서마저 안하무인격인 무례한 태도를 내보이고 함부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숙빈 최씨는 여기서 희생의 사례처럼 지나쳐간다. 하지만 장희빈이 그 방자함으로 인경왕후에게 쫓겨날 때 숙빈 최씨는 궁궐 대문 앞까지 따라와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몇 차례이고 모질게 장희빈의 뺨을 때린다. 단지 여기서는 부채를 갚는다거나 균형을 맞춘다는 구성상의 계산 이상으로 누구라도 약간 멈칫할 만큼 폭력적이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게 과잉 하는 힘 앞에서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이 순간에 황금심의 주제가까지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장희빈을 대하는 갑작스러운 동정심에 대해서조차 무언가 잘 조절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숙종과 인현황후의 생일상을 마련한 숙빈 최씨 임권택 의 계산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장희빈이 다시 궁궐로 돌아왔을 때 숙빈 최씨는 마치 그녀의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다시 되돌아오는 순간은 숙종이 장희빈의 계략에 넘어가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친 다음 신하들의 이에 관한 간절한 읍소를 물리치고 다시 더 세월이 지나 백성들의 뜻을 알고자 미복을 하고 잠행을 나갔다가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후회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종종 숙종은 야심한 밤에 궁궐 안을 산책하는데 대비마마 거처에서 우연히 만난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한밤중 창경궁의 연못 앞에서이다. 그러므로 숙종의 한밤중 산책은 이상하지 않다. 그날 밤도 숙종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궁궐을 떠도는데 우연히 숙빈 최씨의 방 앞에서 멈춘다.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조촐한 생일상을 마련하고 절을 올리고 있어 연유를 묻자 오늘이 인현왕후의 생일이라 궁 안에 계시지는 않지만 모시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고 아뢴다. 숙종은 참으로 갸륵한 마음씨로구나, 라며 어디 네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고 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숙빈 최씨는 이미 앞질러 상감마마를 뫼실 곳이 아니오니 자신이 마당에 나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몇 번이고 말하지만 숙종은 매번 그 청을 거절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중의 거절. 주고받는 거절. 두 거절 사이에 놓인 불균형한 힘의 관계. 이 신에 이를 때까지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가 여기서 이렇게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아니, 차라리 방안에 들어설 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은 영화의 경제학에서 완전히 낭비된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감독이다. 나는 이미 이 신이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순간, 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둘 사이의 음란한 충돌이 있다. 하나는 영화 바깥에서 온 것이다. 봉건 군주제에서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의 방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에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의 안에는 해서는 안 된다, 의 경계가 법이 아니라 도덕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안에서 온 것이다. 숙종은 이미 인경왕후라는 공식적인 왕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또 다른 애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공식이 통속적인 궁중 연애풍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다. 문제는 그것이 놓여있는 자리에 있다. 지금 숙종은 애정의 대상이었던 장희빈과의 관계가 역전되어 자기 자신이 애정의 대상이 된 다음 그녀의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을 받는 중이다. 우리는 계산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숙종의 고통은 착한 인현왕후를 내쫓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의 자리에 있던 숙종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그 자리로 인하여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한 다음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임권택은 고통받는 숙종을 등 떠밀어 숙빈 최씨의 방 앞까지 보낸다. 방에 들어선 숙종은 문득 생각난 듯 숙빈 최씨를 바라본다. 숙빈 최씨는 그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본다. 물론 우리들도 거의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쇼트의 위치와 배우의 연기, 그리고 프레임의 크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일부러 둘 사이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알아본다’, 와 ‘모를 수가 없다’, 의 차이. 이때 도덕적 주체였던 숙종은 갑자기 욕망의 주체에로 옮겨간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넘어갈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떠오른다. 물론 한 명은 궁궐 바깥에서 장희빈으로부터 핍박을 넘어서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인현왕후이다. 숙종은 지금 둘 사이에서 고통받으면서 이제 이 관계를 셋으로 다시 하나를 추가하는 중이다. 인현왕후는 정말 견딜 수 있을까? 다시 하나가 더해지면 그녀는 돌아올 수 있을까? 둘 더하기 하나. 이때 무언가 인현왕후의 자리가 단지 좁아진다기보다는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숨어있다. 인현왕후는 단 한 번도 숙종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역사적인 사료를 뒤로하고 오로지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장희빈이다. 숙빈 최씨와의 새로운 관계는 정확하게 장희빈과의 관계의 반복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궁궐 바깥으로 쫓겨나갈 때 숙빈 최씨가 쫓아 나와 그녀의 뺨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몇 번이고 때리는 장면을 보았다. 숙빈 최씨가 다시 추가로 셈에 더해질 때 문득 장희빈이 둘이 되는 상황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숙종은 그걸 계산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왕의 자리는 그 계산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숙종이 숙빈 최씨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 때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다음 그녀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내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임권택 은 그런 선택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일까. 상투적인 대답. 숙빈 최씨는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장희빈은 그녀를 문초하던 중 갑자기 방문한 숙종의 면전 앞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게 되고 결국 인현왕후를 다시 궁궐로 부르고 장희빈을 궐 바깥으로 쫓아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즉각적인 반문. 숙종의 결정이 ‘못된’ 장희빈을 목격하고 ‘착한’ 인현왕후가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그 어떤 순간도 이 장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숙종이 본 것은 자신이 새롭게 총애한 숙빈 최씨의 웃저고리가 벗겨진 채 매질을 당하고 있는 광경뿐이다. 그건 인현왕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이다. 임권택의 계산. 여기서 숙종은 비로소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신과 도덕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일치시킨다. 그것이 마치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명령을 내리고 모든 사태를 원상복귀 시키려 든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숙종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여기서 임권택은 단지 숙종을 도덕적 주체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 어떤 도덕?) 욕망의 주체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장면 전체를 음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음란하게? 그렇다. 장희빈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노와 질투의 감정은 오로지 그 두 사람이 숙종의 애정을,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숙종의 성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몸을 사이에 둔 이 무서운 경쟁. 이때 숙종은 여기서 도덕적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의 편에 서서(타자? 도대체 누구?) 타자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나는 여기서 짓궂은 가정을 하고 싶어진다. 만일 장희빈이 인현왕후만 돌아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정치적 계산을 한 다음 숙종에게 자신과 숙빈 최씨가 숙종의 몸을 공유하기를 허락한 다음 그저 둘 사이에서만 오가기를 제안한다면 숙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 인현왕후의 자리는 어디인가?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임권택의 계산은 왕의 사랑이란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숙종은 욕망의 주체로서 자기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리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다소 음산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되찾은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임권택 이 주인공 없는 이야기, 아니 차라리 중심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분명히 정의가 회복되고 모든 일은 사필귀정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이 정의의 몫을 숙종에게 안겨줄 생각이 없다. 거의 이야기의 오점처럼 작동하는 숙빈 최씨의 임신. 임권택은 역사의 사료를 끌어들이는 척하면서 숙종이 권력을 통하여 자신의 주체를 되찾는 과정을 마치 오작동처럼 취급하고 있다. <요화 장희빈>은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권력의 사필귀정에 대한 부정이 있다. 임권택은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제 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만들면서 이야기의 주체를 텅 빈 상태로 내버려 둔다. 아니, 정확하게 그 자리에는 몸이 없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몸이 없기 때문에 영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그저 바깥에서 떠돌 뿐이다. 대타자라는 그 무기력한 시선. 임권택에게 그 자리는 언제나 수수방관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 목소리의 주인보다 더 이 영화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이는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말의 반복. 없는 것과 마찬가지. 역사에서 알고 있는 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권택에게 역사의 주인이란 없다. 아마도 그것이 <요화 장희빈>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진행시킨 진정한 이유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는 영화가 없다. 하지만... (계속) 1968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주식회사 각본 장천호 촬영 안윤혁 조명 정덕규 편집 김희수 음악 김용환 남정임 신성일 태현실
정성일
201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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