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화(漁火)
- 감독
- 안철영
- 제작년도
- 1938
- 출연
- 박노경, 윤북양, 전효봉, 계성애, 이현, 나웅, 박학, 장월호, 김노묵, 김봉익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해방 직후 남한 영화 장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다 혼돈의 국내의 영화계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의 존재가 미흡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이 시공간의 영화 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합국 소속의 미국의 점령지 영화 정책과 미군정의 영화 정책의 기조를 참조해야하는 국제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국외의 적극적인 사료 확보 노력을 통해 국내적 시각과 국제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층적인 맥락 속에서 남한 영화계를 조망하는 시도와 연구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료를 널리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한반도 분단 점령이 결정된 후, 남한에는 1945년 9월부터 미육군 24군단의 A. V.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정청 체제가 본격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미국의 대외문화 정책과 문화 기조에 따라 남한의 영화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설정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남한 내의 좌익세력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미국영화의 소비시장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이 시기 남한의 영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남한 영화계의 현실은 영화인들의 노력 여하나 영화계 고유의 논리가 아닌 정치동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초국적 냉전 구도에 돌입하면서 정부 수립은 더디게 진행되어, 미군정기 체제의 남한은 국제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 자격이 없었고, 같은 이유로 국제무역시장에서의 환율도 결정할 수가 없으므로 국내 생산이 되지 않는 생필름을 비롯한 자재와 설비가 수입될 방안이 전무했다. 게다가 이 시기 영화계의 인재들이 좌우로 나뉘었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제작 자본을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군정의 민간 대행 기관인 중앙영화배급사(Central Motion Picture Exchange, CMPE)가 들여오는 미국영화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월등했기 때문에 남한의 극장은 미국영화로 가득했다. 새로운 영화와 ‘민족영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미군정기 남한 영화인들은 군과 관에서 흘러나오는 생필름을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구해, 군과 관에서 잠시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써가며 16미리 극영화를 제작했다. 점령지 일본과는 달리, 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군정의 정책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 영화계는 이 시기 아무런 진전과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남한 영화인들의 중론이었다 1 . 이제 소개할 사료는 1949년 잡지 《상품의 세계동향(World Trade in Commodities)》에 실린 남한의 영화산업에 대한 세 편의 보고서 형식의 기사이다. 이는 영화 사진부서 부서장 골든(N. D. Golden)의 “영화와 장비(Motion Picture and Equipment)”를 특집으로 한 기획의 일부로 보인다. 1949년 1월 먼저 ‘남한의 영화산업(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이라는 4쪽 분량의 보고서가 실렸다. 이어 4월호에는 “남한”이라는 꼭지의 1쪽짜리 보고가 실렸고, 9월호에는 2쪽 분량의 “대한민국의 16미리 오락 영화(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소개되었다. 《상품의 세계동향》은 미국 워싱턴의 국내외통상부 국제무역사무소(Bureau of Foreign and Domestic Commerce, Office of International Trade)가 1947년에서 1950년까지 발행하던 정기간행물이다. 매호는 통상(Commodity exchanges)과 관련한 특별 기획을 주요하게 담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여러 형식의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다 2 . 정부에서 발행한 기관지이지만 잡지 가격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 배포를 위한 목적과 함께 국내외의 일반 판매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수집되어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 장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되는 사료는 대부분 주한 미군정청(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나 미국 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 전쟁부(혹은 육군부)가 생산한 문서가 중심이 된다. 이들 사료는 점령지의 시민들을 재정향(re-orientation)하고 재교육(re-education)하기 위해 군과 관에서 제작한 계몽성과 교육성이 강한 다큐멘터리와 문화영화를 제작, 공급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유입되는 할리우드 영화는 군과 관에 있어 점령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용도라는 면이 더 강했다. 이 사료의 생산주체는 미국 내 정부기관이지만 해방기 남한의 영화 산업의 현황을 철저히 ‘할리우드’ 즉 미국 시장과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적 관점으로 미래의 투자자들을 위해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또 ‘인력, 자본, 설비와 기자재난이 심했다’는 정도의 서술로 남아있어 국내 사료가 포괄하고 있지 못한, 남한 내 영화 산업의 상세한 수치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그 분석 방법과 제공된 수치의 정확성을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존재 가치가 크다 하겠다.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이 사료는 1949년 서울 소재의 미합중국 정치자문사무소(Office of United States Political Advisor)의 사무관 윌리엄 브라운(William B. Bruns)이 작성한 보고서 형태의 기사이다. 새롭게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이 과연 미국의 영화 및 각종 장비의 수입 시장으로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타진하기 위한 예비 조사서로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보고서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고 난 뒤 남한의 영화 산업과 장비 현황을 몇 개월간(1948년 8월부터 1948년 12월)간 수집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의 민간 영화사와 생필름이나 현상 관련 약품 회사, 영화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의 남한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 보고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미군정의 여러 기관들. 특히 남한의 영화산업을 통제하는 부서인 공보부 영화과를 통해서 얻은”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정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미군정기(1945년 9월 8일~1948년 8월 15일)간의 전체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1948년 8월 15일 이후 12월까지 4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인지 혼돈스럽다. 하지만 이후 4월 폴 스트럼이 작성한 “South Korea”에서 추가적으로 밝히는 바로 추측하면, 이 보고서의 내용은 전자, 즉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산업 현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고자는 ‘서장(Introduction)’에서, “미국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빈곤했고 현대적인 삶에 필수적인 산업적 그리고 기계적 장비에 대한 중대한 결핍이 있다 …… 철수한 일본인들의 산업화의 공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영화 산업에 있어서 물리적인 성장에 대한 희망은 거의 없다”고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동시에 그는 “영화산업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경제를 지원할 한국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전제한다. 이 보고서의 행간에는 당분간 남한 영화 산업의 성장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며, 할리우드의 완성된 영화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시장으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생필름이나 약품,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원활히 판매할 수 있는 무역대상국으로 설정하기는 다소 힘들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럼 이 사료를 개괄적으로 훑어보자. 보고서가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우선 남한의 무역 제한(Trade Restrictions), 검열(Censorship), 배급(Distribution), 저작권 규제(Copy Regulation), 제작(Production), 세금(taxation), 상영(Exhibition), 광고(Advertising)의 현황에 대해 요약하고 미국의 상품 판매의 영향(Influence on Sales of United Merchandise)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16미리 극장 영화(16mm Theatrical Motion Picture)가 남한에서 어떤 식으로 무역제한, 배급, 상영,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지와 장비(Equipment)의 보유 현황이 어떠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남한의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Visual Education and Equipment)의 현황에 대해서 기록하고, 남한 극장이 보유하고 있는 영화 시설(Theater Motion Picture Equipment)에 대해서는 영사 시설과 음향 시설(Theater Projection and Sound Equipment), 스튜디오 시설(Studio Equipment), 장비 생산과 판매(Production and Sales Equipment)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gure Industry in South Korea" 보고서 1쪽 ‘남한의 무역 제한’ 부분은 35미리 극장용 영화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948년까지 미국영화를 들여오는 데에 있어서 수입허가는 필요하지만, “사실상 미국영화의 배급을 막거나 감소시킬만한 스크린 쿼터나 대표적인 규제는 없다”고 밝힌다. 그리고 당시까지 들여온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들여온 것은 없고, “CMPE가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미국 극영화는 연합국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의 지휘권 하에서 운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법으로 모든 외화에 10%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영화는 군을 통해 들여오는 셈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다른 외화 주로 중국영화가 수입관세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적고 있다. ‘세금’ 에서 보면, 관세 외에 영화에 붙는 유일한 세금은 극장 입장세로 30%라는 점을 명시한다. ‘검열’ 에서는 남한에 수입된 외화를 관할하고 검열하는 기관인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허가된 모든 영화는 검열을 거쳐야하고 허가권 없이는 상영이 금지된다. ‘검열위원회’는 한국인 1명, 보통 영화과장과 같은 책임의 미국인 1명으로 구성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들여오는 미국영화는 이미 미육군 부서에서 한국에서 미국의 점령과 민주주의에 해로운 내용에 대해서 기본적인 검열”을 실시하여 이미 “한국인의 감수성을 해칠 것 같은 내용”이 통제되고 있으므로, 공보부의 검열위원회는 “한국인에게 낯선 생활을 묘사하는 것들”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 된다. ‘배급’ 부문은 1948년을 기준으로 한 남한 영화 배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간 중 85편의 극영화, 뉴스릴 그리고 외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적으면서, 인플레이션과 노후한 기자재로 영화 배급이 원활하지 못하며 극장은 영화상영보다 무대공연이 더 이익을 발생시키는 오락이라는 난점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이 나라에 매년 150편의 극영화가 수입된다면 각 극장은 매주 다른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 상업적으로 배급되는 극영화는 대부분 포지티브로 공급을 받으며, 극장보다는 이동영사가 더 많은 다큐멘터리는 16미리로 프린트한다고 전한다. 1948년 남한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매표수익은 연간 60,000,000에서 70,000,000원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대한영화사(Korea Motion Picture Company), 조선영화사(Chosun Yun Wha Sa) 그리고 이 프로덕션(Lee Production)”, 남한의 영화 제작 조직은 3개가 있다고 ‘제작’ 에서 적고 있다. 이필우가 이끄는 “이 프로덕션은 현상, 녹음, 프린트 복사, 축소, 특수효과 그리고 자막 등을 한다. 다른 두 회사는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한 영화인들의 필름, 기자재, 인재 부족이라는 열악한 제작환경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남한 내 극영화 제작비는 평균 2,000,000원에서 3,000,000원이 든다”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상영’ 에서는 한국인들이 뮤지컬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미국영화는 인기가 좋아 모두 단독으로 상영되었고, 한국영화와 다른 외화(주로 중국영화)는 동시상영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적고 있다. 남한은 96개의 극장에 54,120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인이 보기에 80%정도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 “주 평균 영화관객은 425,000명, 대도시 상영은 보통 1시에서 자정까지 연속으로 이어진다.” 입장료는 50원이 기본인데, 특별한 영화의 경우는 80원, 또 남한의 극장 연 수입은 300,000,000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6미리 극장영화’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의 보고는 앞부분 35미리 극장영화와 대동소이하다. “검열비용은 없지만 16미리 상영에 대한 허가비로, 3개 릴 이하에는 400원, 4~7개 릴은 700원, 7개 릴 이상은 900원이 부과”된다는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남한에서는 16미리로 된 외화는 사실상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개인 사업자나 사회단체가 사적으로 상영하는 정도가 가능하다. ‘제작’과 ‘장비’현황을 보면, 현재 남한에서 영화제작이 요원하고, 16미리 현상과 축소 기구는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영’ 부분까지 포함해서 보면 남한에 16미리 상업 영화극장이 없으며,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분포해 있음에도 극장 시설이 부재하고 극장 설치 역시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곳들에 16미리 영화를 상영하고자 미군정 민사처는 전국 지부에 16미리 프로젝터 300개를 보유하고 이동영사단(mobile unit)을 운영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군정은 점령지의 재정향과 재교육을 위해 영화를 비롯한 시각 미디어를 적극 사용했는데, 관련 내용을 바로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시각 교육을 목적으로 16미리 교육영화와 슬라이드, 교사 매뉴얼을 수입하였다. 이와 관련한 법도 없는 상태였다. 특히 미군을 위한 영화는 허가도 허가비도 없다. “남한에 있는 3,415개의 초등학교, 425개의 중등학교, 29개의 대학”을 대상으로 한 시각교육 보조 수단들은 면세가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교육 영화들은 공보부 영화과 검열을 거쳐, 400원의 허가비를 내고 상영되었다. 민간 조직에 25개, 정부기관인 민사처에 300개 정도 있었지만, 16미리 영사기에 대한 요구는 당시 엄청났다. “교육에 영화가 사용되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자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극장의 영화 장비’로, 영사 및 음향 시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35미리 영사기, 아크 램프, 악세서리, 모터 발전기와 정류기, 커튼 트랙과 장치 등 전반적으로 너무 노후했고, 상당히 많이 수리되어 사용되고 있어 형편없는 상태이다. 96개의 극장 중에 서울에 있는 3개만 에어컨 설비(팬 유형의 강력 송풍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남한에서 운영 중인 유일한 ‘스튜디오 설비’는 아마도 조선영화사를 의미하는 듯한데, 시설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이 65, 폭 35, 높이 40(인치)의 작은 무대가 2개 있다. 이 사료에서 살피는 바, 미군정기 및 초기 대한민국 정부 시절 남한의 영화 산업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보고자가 보기에 남한의 외국 무역은 아직 충분히 신뢰를 얻어낼 만큼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교류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외화 시장 점유에 있어서 중국영화의 유입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당시 미국과의 영화 관련 무역 교류에서 가장 큰 난점은 “통화에 대한 환율이 설정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당시 “남한으로의 수입은 물물교환(barter) 기반”인데다가, 본국으로 송금이 허가되지도 않은 상황은 “CMPE가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재정적 손실을 낳게” 했던 것이었다.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의 미국사절단(United States Mission) 폴 스트럼이 4월호에 실은 1쪽 분량의 것이다. 이전의 보고서인 “남한의 영화산업” Vol. 7, Part 4, No.1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영화 관련 남한의 정치적 변화 상황을 짚으며 글을 시작한다. “남한이 자치를 하고 있고, 그 세법이 변화하는 중이며, 미국영화에 대한 수입관세와 검열이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1월의 기사 내용과 달라진 점들을 중심으로 보충적으로 기술한다. 내용은 무역 규제, 배급과 검열, 세금, 상영, 제작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그림 2] Paul J. Strum, "South Korea" 보고서 ‘무역 규제’ 에서 보면 “CMPE는 1947년 4월 이래로 60,000,000원의 잔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환율도 정해지지 않았고 송금도 불가해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세금’ 부문에서 기술하는 것처럼 “외화에 대한 세금 역시 유보된 외환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다.” 반면 남한 정부 수립 이후 관세에 변화가 생겼는데 “수입한 오락 영화는 임의로 피트 당 50원으로 임의로 계산한 후 여기에 10%의 관세에, 30%의 물품세가 더해져 매 피트에 부과되는 비용이 21.50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군정기와 달리 “최근 미국 영화에 대한 관세와 물품세는 극영화 당 175,000원에서 245,000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수입영화에 대한 소정의 검열비가 생겼고, 극장 입장권에는 1948년 6월부터 100%의 유흥세가 붙기 시작했다. ‘배급과 검열’ 에서도 미군정기와 비교해 미국영화에 대한 검열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2편의 미국영화를 상영금지 시켰고, 다른 영화에서 200피트를 삭제했으며, 원칙적으로 폭동 장면과 탈옥 장면이 삭제”된 것이다. 그래서 1948년 동안 “66편의 미국 오락영화가 한국으로 수입되었고 41편이 배급”되었다. 이 보고서가 추론하는 바 한국영화의 수입은 “전체 수입의 15~20%” 정도이다. ‘상영’을 통해 1월의 보고서와 비교해볼 때, 55,110개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은 116개로 늘어났고, 주 평균 관객은 22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입장료는 작은 상영관 50원에서 큰 도시 상영관 150원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불 능력을 따져볼 때 퍽 높은 편이라고 언급한다. 이 보고에서는 남한의 영화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다. 제작자와 제작사를 통틀어 25개가 있는데, 이중 7개 정도가 실제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이며 합리적이고 능숙한 영화기술자는 6명 정도라고 적는다. 35미리로 극영화 5편, 2~3개의 단편이 제작되고 10~11편의 16미리 영화가 제작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팔리는 생필름 가격이 피트 당 30~40원 정도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보고서는 필자가 어떤 경로로 해당 부문들의 정보를 취합하고 조사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글의 말미에서 폴 스트럼은 스튜디오나 극장의 설비 대부분은 거의 폐기해야할 정도이고, 이런 상황에서 남한 영화산업에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는 자체가 극도로 힘들 것이라 마무리한다.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의 프란더가스트(O. M. Prandergast)가 작성한 것으로, 이제 활발하게 제작활동이 가속화되고 있던 남한의 극장용 16미리 오락영화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보고서와 다르다. 이 시기 16미리 영화제작이 증가한 이유는 미공보원의 활발한 활동 때문이었다. 현재 확보된 사료의 분량은 1쪽인데 이전의 보고서들의 형식과 내용을 참조하면 전체 2쪽에서 1쪽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무역 제한, 배급, 상영, 제작 등 기술 항목과 형식은 4월의 보고서와 유사하다. 1949년 7월 드디어 환율이 책정되어 미국통화 1달러가 900원으로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영화제작자와 상영업자들은 열악한 장비와 생필름 부족으로 여전히 애를 먹고 있고, 이 부족을 해결해 줄 외화 교환 방안도 없”는 상태였다. [그림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보고서 ‘무역 제한’ 에서 보면 수입 허가는 여전히 필수이고, “관세는 10%의 종가세, 30%의 국내소비세가 필름과 세금 가치의 합으로 부과되어 세금과 국내소비세는 총 43% 종가세”로 되었다. ‘배급’ 에서 남한 공보부 영화과의 검열을 문제 삼는다. “미국영화에서의 폭력과 열정의 장면들이 삭제당”하고 있는 반면 “한국이나 중국영화는 폭력을 그들 나름대로 그려내”고 있다면서 검열을 빠져나간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 범죄자들을 교수형 시키는 실제 처벌 장면을 보여주는 미국공보원의 뉴스릴은 한국 관객들에게 광범위하게 매우 인기가 있”어 검열을 피한다고 원칙 없는 검열에 대해 불만을 피력하고 있다. 검열비는 없지만 검열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상영허가비용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영화 1-3릴 4,500원, 4-7릴 7,800원, 8-13릴은 10,200원. 외화의 경우는 1-3릴 6,500원, 4-7릴 11,400원, 그리고 8-13릴은 14,700원.” 1948년 1월 이후 미공보원에서는 “매달 15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각 영화는 12개에서 15개의 프린트를 뽑는다. 전후 미공보원의 생산량은 현재 총합으로 대략 330편정도”이다. 매달 생산하는 영화는 6개의 뉴스릴, 4,5편의 극영화, 나머지는 다큐멘터리이다. 미공보원의 영화는 무료로 배급되지만, 16미리 다른 오락영화의 대여료는 다양하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영화 이외에 수입된 외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1948년 11월 15일에서 1949년 7월 3일까지 공보부 영화과의 기록에는 일본영화 4편, 영국영화 1편, 독일영화 6편, 프랑스영화 2편, 이탈리아 영화 3편 그리고 스웨덴의 16미리 영화 1편의 극장용 영화가 상영허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중국의 16미리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한국에서 해방 후 제작된 16미리 극장용 영화는 13편인데, 이중 8편이 1949년 1월 이후 조선영화사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16미리 장편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은 5,000,000원”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상영’ 에서는 남한에 115개의 극장이 있고 모두 35미리 영사기를 가지고 있다고 적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16미리 영화가 상영가능하다면 모두 16미리 장비를 빌리려고” 한다. 입장료는 지방 최고가 120원, 서울 최고가 200원이며, 마찬가지로 입장료의 100%가 흥행료라 기술한다. 이 자료의 작성자가 16미리 극장 영화 설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사회의 기초시설로서 영화관 설립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농촌 인구 분포가 높은 남한은 미공보원의 이동영사대가 아니면 많은 이들이 1년에 영화 한 편을 볼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한국 마을에 16미리 극장 장비가 부족하므로 영화관 설립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래서 미공보원의 “사륜구동과 윈치(winch: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작은 크랭크)가 장착된 자동차는 일 년 내내 한국도로를 달리며 여행”한다. 1.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민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14~20쪽. 2. 이 간행물의 서지는 호주국립도서관의 정보를 참조했다.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https://trove.nla.gov.au/work/31968523?q&versionId=38809543
이 문서는 국무부에서 전쟁부(War Department)로 영화 정책 관련 업무를 이관한 이후 민사처(Civil Affairs Division) 산하 재정향 부서(Reorientation Branch)에서 작성한 1947년 점령지 사업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이다. 재정향(Reorientation)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교육 시스템의 탈나치화와 탈군사화 그리고 민주주의화를 위하여 마련한 재교육(Reeducation)에서 유래한다. 재교육을 재정향으로 순화된 표현으로 사용하면서 민사처의 사업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알리고 물질적인 원조에 중점을 두는 사업으로 변하였다. 1 1946년 9월 16일 작성된 이 문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기록되지 않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정향 부서의 1947년 회계연도(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6월 30일)의 사업 내용과 예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목된다. 이 문서는 모두 11장에 달하며 개괄적인 설명 없이 ‘미디어국’과 ‘교육 및 종교 정책국’ 그리고 ‘특별 기획국’으로 구분하여 기술한다. 원문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살펴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참고로 이 문서에서 쓰이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즉, Department는 부(部), Branch는 부서(部署), Division은 과(課), Section은 국(局), 그리고 Unit은 반(班) 등이다). 미디어국(Media Section)은 신문, 정기 간행물 그리고 영화 및 극장 등 세 개의 반(Unites)으로 구성된다. 미디어국은 DANA(독일어), KYODO(일본어), 뉴스 대행사 그리고 미국에서 발행한 독일 잡지의 편집과 관련된 서비스를 포함한 점령지의 미국 라이센스 도서 및 정기 간행물에 대한 소식과 관련된 자료를 준비하고 조달한다. 또한, 교육적인 이용과 대중 상영을 위하여 극영화를 제작하고 공급한다. 미디어국은 국무부가 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 ‘미국의 소리 Voice of America’ - 을 점령지에서 이용하는 정책과 관련하여 국무부와 공조한다. 미디어국 각 반의 사업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문반(Press Unit) 담당자는 점령지에 다음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첫째, ‘주요 사건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picture)’을 제공하기 위하여 매일 6위까지 선정한 세계 뉴스를 평균 500 단어 이내로 제공한다. 이들 이야기는 독일의 DANA와 일본어 KYODO 통신사에게 제공한다. 둘째, 독일과 일본에 특히 관련된 분야의 미국식 생활과 사건을 묘사한 뉴스 특집 기사(news feature stories)를 제공한다. 강조할 내용은 음식, 세계 평화 기구, 과학, 경제, 점령지에 대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국제 문제이다. 셋째, 사설(editorials), 칼럼, 라디오 단평 그리고 외국 특파원의 분석 기사(analytical stories)을 제공한다. 또한, 일주일에 두 차례 편집 코멘트를 준비하여 전보로 발송한다. 국무부의 언론 및 출판과(Press and Publication Division)는 미디어국에서 다큐멘터리 작품(articles)과 극영화 그리고 사진(pictures)을 정기적으로 제작하도록 만든다. (2) 정기 간행물반(Periodical Unit)은 세 개의 하부 단위(Sub-Unit) 즉, 독일 공개 출판(German Overt Publications Sub-Unit), 비공개 잡지 서비스(Non-Overt Magazine Servicing Sub-Unit) 그리고 저작권 허가(Copyright Clearance Sub-Unit)로 구성된다. 이들은 각각 독일 미군정의 공식 출판물 편집과 제공, 미군정 허가 정기 간행물 이용과 관련하여 점령지에 보급할 출판 자료의 선택, 그리고 점령지에 필요한 모든 자료에 대한 저작권 취득과 면허 통관 업무를 담당한다. [그림1] 재정향부 사업보고서 첫 페이지, 신문반과 정기간행물반 사업 관련 (3) 영화와 극장반(Film and Theaters Unit)은 독일과 일본의 교육을 목적으로 기획한 120릴(reels) 분량의 특별 다큐멘터리 조달을 주요 업무로 한다. 이 반은 새로운 영화 제작과 점령지에서 각색 가능한 기존 필름(footage)을 조달하기 위하여 영화 산업 및 기타 에이전시와 사업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큐멘터리와 단편(Documentaries and Shorts) 영화 제작 담당자는 52주 동안 매주 2~3개 릴의 다큐멘터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점령지에서 사용할 120릴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계약한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하여 보여준다. 영화 주제는 점령국 국민의 심리적인 태도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선정한다. 영화는 점령지 국민의 재교육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아 기획하고 제작한다. 전쟁부 담당자는 테스트용 영어판(pilot English version)을 계획 및 제작하여 한 세트의 영화가 4개 점령국의 요구를 모두 충족하도록 한다. 한편,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 가운데 점령지에서 ‘입수한 영화의 각색(Adapting Acquired Film)’의 경우, 계약을 맺은 영화는 여타 미국 정부 기관과 민간 영역(private source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를 입수하여 보완한다. 이들 영화는 농업, 과학, 산업 그리고 기술적인 주제를 다루며 교육 프로그램의 이용을 위하여 〔더빙, 편집 그리고 기타 작업 등과 같이〕 개작한다. [그림2] 영화와극장반 사업 중 오리지날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 페이지 둘째, 대중 상영을 위한 할리우드 영화와 단편 영화의 주제(Hollywood Feature Films and Short Subjects for Public Showing)는 점령지의 요청에 따라 정한다. 담당 직원은 점령지에 적합한 극영화와 단편에 대하여 영화업계에 추천을 요청한다. 〔상영〕 적합성(suitability) 여부는 영화업계의 승인 기준에 따라서 결정하며, 영화업계로부터 제목 리스트를 받아 점령지로 보낸다. 영화 리스트를 발송할 때 점령지 책임자가 기존 계약 조건과 정책 그리고 공공의 의견을 바탕으로 선정할 수 있도록 신문사 비평과 해설을 동봉한다. 점령지에서 영화를 선정하면 영화업계로 보내서 네거티브 필름(negative film)과 프린트를 복사하여 조달하도록 한다. 셋째, 뉴스릴 자료(Newsreel Material) 담당자는 점령지에서 준비된 뉴스릴에 대하여 ‘날짜가 없는 자료(non-dated material)’을 선택하고, 뉴스릴 회사가 제공한 자료를 매주 조달 및 전달한다. 마지막으로, 무대 연극(Stage Plays) 담당자 역시 점령지 무대 연극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진다. 위의 계획에 따라서 영화 프로그램 예산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영화 제작의 경우, 할리우드에 준하여 테스트용 영어판 다큐멘터리 제작비는 52주 동안 매주 2~3개의 릴을 만들어 총 120 릴을 제작한다면 1,700,000달러가 필요하다. 이들 다큐멘터리 단편 영화의 주제는 학교와 대학 그리고 성인 교육에 적합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점령지 언어로 전환할 때 소요되는 생필름 비용은 독일 221,440달러, 오스트리아 21,600달러, 일본 167,940달러 그리고 한국 76,800달러가 든다. 4개 국가 모두 35mm보다 16mm 필름을 더 많이 제작한다. 둘째, 민간영역에서 구입한 영화의 경우, 여타 미국 정부 기관과 민간 영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네거티브 필름 총 구매 비용과 필름의 각색과 재작업(rescoring)에 필요한 생필름 비용은 다음과 같다. 즉, 독일이 72,300달러로 1위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일본 48,300달러와 한국 20,000달러 그리고 오스트리아 8,000달러이다. 한국이 오스트리아보다 앞선 이유는 16mm 프린트를 더욱 많이 구매할 계획을 세운 결과에 따른 것이다. 셋째, 점령지의 뉴스릴 또는 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 생필름 예산은 독일과 일본에만 책정한다. 넷째, 학교와 대학에서 16mm 영화 상영에 필요한 영사기 비용을 보면, 독일과 일본 모두 영사기 관련 부품을 1,000개 구매할 계획이다. 이와 달리 오스트리아는 50개 그리고 한국은 300개를 구매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한국에 상설극장이 부재한 지역이 다수 존재함을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점령지 연극 공연과 관련하여 저자에게 지급할 저작권 사용료 비율은 일괄적으로 균등하게 책정한다. [그림3] 오리지날 다큐멘터리와 구입 영화의 복사에 소요되는 생필름 및 예산 배정 내역 다음으로, 재정향 부서는 교육과 종교 정책국(Education and Religion Policy Section) 사업을 다음과 같이 수립한다. 그것은 교육, 종교, 사회 조직, 청년 운동을 포함한 국가 간 인적 교류 정책과 관련된다. 해당 사업의 책임자는 시청각 도서와 교과서 그리고 음악 및 자료 조달과 관련된 부서 활동을 감독한다. 이를 위하여 교육과 ‘문화 자료반’은 세 개의 하부 반 - 도서관과 교과서, 음악, 그리고 예술과 사진 전시 – 을 구성한다. 도서관과 교과서 담당자는 정보 센터(information center: 정보 센터는 점령지에 따라서 공보원 또는 문화원으로 불림)를 설립하여 도서관과 교과서 자료를 선정하고 조달한다. 음악 부서 담당자는 점령지의 음악 도서관과 관현악단에 공급할 자료를 대여하고, 소규모 비관현악단과 대중음악 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료 선정과 조달 그리고 배송을 책임진다. 예상 비용은 새로운 오케스트라 작품, 악보 그리고 관현악단 자료의 대여까지 포괄하여 정한다. 음악반의 주요 작품은 민속악(folk music), 밴드 음악과 학교 실내악(chamber music), 성악, 독주 기악 그리고 관현악 작품(orchestral score) 등을 다룬다. 대중음악을 포함한 리코딩 도서관 역시 점령지 정보 센터별로 예산을 편성한다. 예술과 사진 전시 분야는 유채화 및 수채화 복사를 포함한 예술 쇼(art shows)와 미국 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미디어를 점령지에 조달하고 발송한다. 또한, 점령지 대중이 미국식 풍경에 익숙해지도록 사진 벽화(photo-murals)와 같은 시청각 자료를 해당 사업에 포함한다. [그림4] 교육과종교정책국의 사업 내역이 담긴 페이지 마지막으로, 1947년 재정향 부서 사업은 특별 기획국(Special Projects Section) 사업으로, 재교육과 재정향에 관련된 법률과 저작권에 대한 조언과 자료 조달을 설정한다. 더불어 일반인부터 명사(名士)까지 국제 간 인적 교류에 관한 운영상 문제를 다룬다. 이와 관련된 비용 산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즉, “미국 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점령지로 보내어 교육과 종교 그리고 정보 관련 담당자들에게 조언하기를 권한다. 점령지 지도자들은 그들의 문제에 관하여 미국인들과 논의하기를 갈구하고 있으며, 미국의 전문가들과 어디에서든 1개월에서 3개월 또는 그 이상 그들의 문제를 생각할 기회를 환영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전 세계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었거나 편향된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면대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점령지 사람들은 민주주의에서 그들의 특정한 작업과 기능이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적합한 미국식 실천 방법과 범위에 관하여 미국의 전문가들과 토론함으로써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서 설정된 점령지 파견 사업을 위한 예상 비용은 다음과 같다. 즉, 60일 동안 매달 1인당 500불의 여행비를 산정하여 독일과 일본에 파견할 전문가 200명과 오스트리아 및 한국에 파견할 전문가 50명에게 제공한다. 예상 비용은 독일과 일본은 각각 200,000달러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한국은 각각 50,000달러에 이른다. 위의 문서에서 기획한 바와 같이, 재정향 부서의 프로그램이 점령지 각국에서 실행되었는지 여부와 그것의 효과에 대해서 점령지 국가별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유럽의 경우, 재정향 부서가 언급한 ‘정보 센터’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의 “Amerika Häuser” 사례는 재정향 사업이 적극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미국 문화를 전파한 Amerika Häuser는 도서관과 갤러리 등으로 이용되는 한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ISB (Information Services Branch)가 제작한 선전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도록 조치한 기관이었다. ISB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전 연합군 사령부가 설립하여 미국식 태도에 대한 경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물질적 · 정신적 수단을 동원하는 데 주력하였다. 2 다시 말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의 점령지 재정향 프로그램은 전쟁 종료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재정향 부서의 한국에서의 사업은 영화 제작과 ‘정보 센터’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1947년 8월 미공보원은 서울역 앞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영화 제작과 문화 사업을 시행하였다. 영화의 경우,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를 포함한 농림부와 내무부와 같은 기타 정부 기관 그리고 미공보원이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3 또한, 미국문화연구소(Office of Civil Information)에서 출발한 미공보원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미공보원 사업은 ‘정보 센터’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미공보원이 직접 나서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우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현지 지역민을 주체로 세운 문화원(Culture Center)이 문을 열고 사업을 수행하였다. 1947년 10월 9일 한국 최초로 개원한 ‘강화문화관’은 박물부와 도서부 그리고 대중 사업부를 두었는데, 이는 재정향 부서가 기획한 사업 내용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4 강화문화관의 부서는 향후 전국적으로 증가한 문화원 프로그램의 원형을 제시한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재정향 부서의 ‘교육과 문화 자료반’ 가운데 음악 관련 프로그램 역시 1949년 강원도 춘천 미국 공보원의 오케스트라 설명과 연주회 개최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재정향 부서의 사업 수행은 한국전쟁 이후 지역 문화원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반 충남 대전의 대전문화원이 참여 대상자의 특성을 세분화하여 고전음악 감상부터 영화 관람까지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수행한 것은 재정향 부서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5 1. James F. Tent, Mission on the Rhine: Reeducation and Denazification in American-Occupied Germany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254. 2. Reinhold Wagnleitner, “The Irony of American Culture Abroad: Austria and the Cold War”, (Ed.) Lary May, Recasting America: Culture and Politics in the Age of Cold War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 286-288. 3.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미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 <무궁화동산>과 『성림기행』을 중심으로 -」,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5~46쪽, 각주 89 참고. 4. 위경혜, 「문화냉전의 지역성 - 대전문화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49집, 2018, 124~126쪽. 5. 대전문화원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다음을 참고. 위경혜, 앞의 논문, 134~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