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 감독
- 이승현
- 제작년도
- 2019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사실은 우리는 서로가 필요 없어 알면서 서로가 이유 없이 그리울 뿐 - 크리스탈 티, 「낭만파A.I.」 나는 내가 어렵다. 어느덧 알람 없이 눈을 뜰 정도로 반복적인 주5일 출퇴근과 아침 공기가 몸에 익숙히 자리 잡았음에도,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근황을 묻는 이들에게 ‘직장인’이나 ‘회사원’이라는 말을 선뜻 건네는 대신, 이력서를 이곳저곳 찌르다 보니 기회가 닿아 어찌어찌 일을 하는 중이고 천만다행으로 장기 백수 타이틀은 면했으며 입에 풀칠은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답을 하게 되는 식이다.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사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국 나의 태생적 기질에서 튀어나오고야 마는 저 대답의 자조적 뉘앙스가 듣는 이에게 작은 부담을 안겨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저 말이 치장된 겸손처럼 보여 이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한 척하는 위선자라고 판단되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간단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지 않고 무언가 해명하는 사람 마냥 주절거리는 모양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아가 나는 왜 이런 모습마저도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은 내게 중대하게 다가오고 중대하게 여긴 바로 그 탓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고, 요즘 말로 하면 찐프피(INFP 100%)다. 갑자기 류현진 투수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제목이 떠오른다. 생각이 많으면 진다…… 졌다. 이런 기질은 ‘영화평론가’로서의 나에게도 예외 없이 들러붙어 있다. 공식 지면으로 불릴 만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통해 등단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영화평론가로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청탁을 받은 뒤 오랜 시간 내적으로 씨름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곤란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다만 분명한 입장도 있는데, 먼저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영화 평론계가 등단 이후 생계를 영위할 정도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길을 생계로 정했다면, 외부 강의든 메일링 서비스든 독자적인 지면 생성이든, 치열한 부가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떤 방식의 활동이든 기초가 되는 것은 ‘자기PR’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시작도 못하고 멈춘다. 멋지게 자기 소개하는 능력이 내게는 부족하고, 부족한 능력은 부족한 욕구에서 온다. 커리어를 쌓는다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내게 뒷전이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겸손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해보라는 충고도 종종 들어왔지만, 그 사려 깊은 마음에 부응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은 언제쯤 확신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 분명한 것은, ‘1인분’의 문제가 내게 큰 동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고민이 ‘취미로서의 평론가’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취미로서의 평론가라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난다. 그런데‘-가’를 떼고 ‘취미로서의 평론’이라고 하면 조금 괜찮다고 느낀다. 내게는 행위 자체와 행위자라는 그 차이가 일단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마주한 나의 그 비언어적 체험에 다가가고자 일단 적어내리고, 좀 더 가까워지고자 이 단어가 아닌 저 단어를 고르고, 때로는 영화를 보고 한 대 맞은듯한 저릿함을 표현하고자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대신 간명한 문장으로 아등바등 매듭지어보려는, 그 치열한 감탄과 반목의 과정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좀처럼 자신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는 항상 ‘1인칭’의 문제가 다른 무엇에 앞서는 것이며 그와 씨름하다 어떤 단계에 다다르고 나면 종종 뿌듯함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더 분명해지고 싶다. 1인칭. 나만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남과 다른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나를 소개하고 개성을 뽐내는 것. 자신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1인칭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단초가 된다. 타인에게 '나'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 콘텐츠의 지배적 양식이 1인칭 시점인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여주는’ 일이란 이 사동적 표현이 담지한 대로, 무엇보다 내가 남을 의식한다는 역설을 전제로 한다. 너를 보는 나의 눈은 항상 너의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종종 ‘나의 시선’ 대신 ‘나만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우리의 습관은 그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나만의 시선. 나는 이 앞에서 종종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적에, 듣고 싶지 않았지만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어코 듣고 말았던 한 마디를 떠올린다. “그래 알았어. 내 취향이야. (꺼져)” 각자의 취향이 넘쳐흐르는 동시대의 풍경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이는 곧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를 문제라고 느끼는 불편함은 그 자체로 ‘나’의 고된 일상을 짓누를 뿐이니, 이 자리를 채우는 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유튜브 알고리즘 서비스일 것이다. 어쩌면 뜻이 맞는 쪽으로 향한다는 취향(趣向)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하고 내 몸에 배어있는 냄새와 다름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취향(趣香)으로 고쳐읽는 편이 쇼츠와 릴스로부터 도파민을 수혈받는 이 시대에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게 평론은 감정과 욕망을 늘어놓는 취향의 잔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과 욕망에 흠뻑 취하면서도, 대체 그 만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혹시 그곳에 정반대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은 아닌지…… 비유컨대 평론은 빛과 어둠을 오간다는 점에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나를 간섭하는 외부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 기쁨이다. 이것이 분명하다. 더 분명히 하면, 이것이 나의 취미다. 아, 들려온다. 그게 무슨 취미냐, 취미란 그보다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레와 같은 성원이. 이런 취미의 자리는 하루빨리 ‘연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듯, 몇몇 이들은 내게 “대학원 안 가세요?”라고 묻거나, 처음 듣는 각종 영화 이론서와 철학서를 줄줄이 열거하기도 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응답하며 읽은 척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반대편에 있는 ‘애정’과 마주하며 그 과도함에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이 영화 봤어요? 저 영화 봤어요? 그 영화 봤어요?” 혹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봤다는 소리 하지 마라!” …… 다시 고백한다. 미안합니다. 저 그 영화 본 적 없고, 이 영화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봤어요. 하지만 당신의 즐거움을 뺏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종 뇌가 멈추거나 숨이 막혀 거짓말을 하는 나약한 관객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맨눈의 감상과 두뇌의 관찰, 사적 일기와 시네마의 역사, 시네필리아와 학자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보며 한 편의 영화를, 아니 인물을, 아니 얼굴을 떠올린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박종원, 1992) 속 한병태. 일찍이 인터넷 서핑에 익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 좌우가 잘려나간 화면비와 일본어 자막이 달린 버전으로 이 영화를 만났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화질. 다행히 한국영상자료원이 박종원 감독과 진행한 복원 작업을 통해 이제는 깨끗한 화질 로 만나볼 수 있고, 나 역시 오랜 매혹의 정체를 얼마간 더듬거릴 수 있었다. 일그러진 화질의 복원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이 복원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틈이 날 때마다 주변에 추천하고는 했는데, 그들의 첫 마디는 모두 동일했다. “어, 홍경인 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 엄석대를 만나기 전에, 영화 바깥의 명배우 홍경인부터 만나는 것이다. 그는 무표정을 통해 엄석대가 된다. 방금 학교에 첫 발을 들인 한병태에게 급장 엄석대가 명령한다. “상고 머리, 이리 와 봐.” 하지만 서울 출신의 이 당돌한 녀석은 답한다. “할 말 있으면 쟤가 이리 와도 되잖아!” 처음 맞닥뜨렸을지 모를 저항 앞에서도, 엄석대는 상고머리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엄석대의 침묵과 무표정은 고압적 언행 없이도 모두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그를 차별화하는 중심이 되고, 모르긴 몰라도 당시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은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홍경인은 메소드를 훌륭히 수행하며 엄석대가 된다. 이 세계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그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드라마적 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탓에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되지만, 나는 홍경인을 잘 모르는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꾸로 홍경인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 엄석대다!” 다른 한편, 이름 모를 수많은 아역이 화면을 채운다. 얼마나 많냐고? 유튜브에 접속해 이 영화의 설명란에 ‘5학년 2반 아이들’이라는 역할로 얼마나 많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 여전히 나는 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면을 채운 그들의 뒤통수와 앳된 얼굴에서 발생하는 힘은 느낀다. 때때로 저 ‘5학년 2반 아이들’ 중 몇몇은 이야기의 감초가 되기도 하지만, (김영팔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이들에게는 서사의 국면을 뒤집을 만한 개별적 플롯이 없다. 더불어 이 아이들이 비전문 배우들이었을 것이라는 심증까지 더해지는데, 그러고 나면 이들에게 ‘연기를 잘한다’라는 관습적 평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절정 부분, 새로 부임한 김 선생(“어, 최민식 이다!”)이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대목이 다소 간지럽다고 느끼는데, 사이다 같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의 노골성에 덧붙여, 아이들의 목소리가 소위 말하는 연극톤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진지한 대목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귀엽다고 느끼면서 흐뭇해지는데, 요컨대 드라마를 벗어난 리얼의 기습에 웃음이 툭툭 새어 나오고야 마는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의 말과 몸짓은 엄석대가 장악한 공기에 상쾌함을 불어넣는 매력적 실패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마주한 한병태는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시종 고개를 떨구거나 주위를 둘러본다. 음악시간. 선생님이 풍금을 켠다. 다들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한병태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엄석대를 바라본다. 선생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길은 결국 음악 교과서에 머물 뿐이다. 그의 방황하는 시선은 말꼬리를 흐리는 목소리와 짝을 이루며 한병태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청소 검사를 합격 받고자 엄석대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는 그의 얼굴이 인상 깊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저 배우를 통해 원작의 인물들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얼굴을 선연하게 포착하며 세계에 대한 직관을 심화한다. 불타버린 재와 같이,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운 표정은 무기력과 공허로 변모해 어른 한병태의 얼굴을 뒤덮고 있다. 당시의 까까머리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저마다의 직업과 풍채, 목소리를 가진 보통 어른이 되었지만, 김 선생의 매질로 추방되었던 엄석대는 단지 무성한 소문과 근조화환으로만 그 존재가 환기되며 진정한 신화가 되었다. 그 사이의 한병태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엄석대’ 이름 석 자가 적힌 화환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병태는 느지막이 자리를 뜬다. 힘없는 발걸음 위에 내레이션이 얹힌다. “… 내가 사는 오늘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 같고,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급장의 모습으로 5학년 2반을 주무르고 있을 게다.” 우수와 권태에 젖은 한국영화사의 남성이 (또) 완성되는 순간이다. 뚜렷한 자리 없이 곤혹스러움으로 세계를 지탱하고 다시 보게 하는 한병태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퍽 인상적이다. 그의 곁에는 김영팔이 그때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함께하지만, 여전히 한병태는 방금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린다. 그는 김영팔과 5학년 2반 시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김영팔은 과거에서 시간 여행을 한 듯 그때 그 얼굴로 이곳에 있는데, 용의주도한 캐스팅이 암시하듯 한병태는 30년 전 김영팔의 해맑은 얼굴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동이 틀 때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갖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항상 곁을 함께했던 김영팔과의 재회도 그에게는 고민거리였던 것일까? 물론 한병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하나의 낯섦과 충돌을, 나아가 변화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갱신하는 대신, 적당히 견딜 만한 자신의 정서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선택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우연히 엄석대를 마주치는 원작의 결말 대신 그의 존재를 간접화하는 방식으로 중년 남성 한병태의 비극적 파토스를 한 층 강화한다. 그렇게 한병태의 세계는 굳세어진다. 자기만의 정서로 침잠하는 한병태를 보면서, 이상하지만 자주 영화를 보고 가끔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는 이제 재미없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꺼내고 다녔다. “나는 시네필이 아니야”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종의 관객과 나를 구분하는 오만함을 부리기도 했다. 나아가 “영화 보다가 인생 망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뒤 “영화를 진짜 좋아한다는 것은 뭘까?” 하는 관념에 빠지면서 진짜 망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 망한 적이 있다. 언젠가 어떤 영화글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이 쓴 것 같은” 글이 좋다고 답한 적이 있다. 요즘따라 떠오르는 말이다. 과잉정보의 시대에 사전지식 없는 관객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연구자와 평론가와 시네필과 직장인 모두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벌거벗은 관객이 된다는 공상에 자주 빠진다. 이와중에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하나 둘 극장이 사라지면,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도 사라지겠지. 그렇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원칙 없이 상영관과 방구석, 스크린과 모니터, 소셜미디어와 극장 로비에서 환멸과 행복을 오고 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렵다. 그래서 네가 궁금하다.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는 일이 도박에 가까운 시대라고 느끼지만, 그럴수록 네가 궁금하다. 물음표를 껍질로 두른 확신의 언어가 난무하는 탓에, 네가 궁금하다. 영화 평론은 애정과 연구만을 결과로 남기는 양자택일의 바벨탑이 된 걸까? 모르겠다. 나는 이리저리 치이는 당구공이 되어 어디론가 오갈 뿐이다. 여전히 영화가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 홍상수 )이라면, 영화를 닮은 그 몸짓을 1인칭이라 부르고 싶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 실제 사건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오전 8시 7분. 핸드폰에 긴급재난문자가 울린다. “하와이로 향하는 탄도미사일 위협 발생. 즉시 대피소를 찾으세요. 이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1.4백만 하와이 시민은 임박한 죽음의 공포를 맞닥드리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떨어져있던 가족과 친구를 찾고, 대피소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도시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와이 주정부는 13분 뒤 트위터에 미사일 위협이 없다고 발표했지만 소셜미디어를 쓰지 않는 이들에게 정정 내용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거렸고, 앞선 문자와 트위터 중 무엇이 가짜뉴스인지 분간되지 않는 순간이 흘렀다. 최초 재난문자 전송 38분 뒤 주비상관리국은 정정내용을 다시 문자로 전송했다. 이 시간동안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골프장에 있었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미본토를 겨냥한 미사일 공격 발생시 대응 계획을 지난 30년간 시험해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방장관은 트위터에 “실수로 인한 핵전쟁 위험성은 가설이 아니다. 사고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인간은 또다시 실수를 할 것이다. 단순 실수가 수백만명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도록 더욱 철저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남겼다. # VR 다큐 <당신이 깨어난 아침(세상의 끝까지)> (이하, <당신이 깨어난 아침>) < 당신이 깨어난 아침 >은 4년 전 하와이를 혼돈 속에 몰아넣은 정부의 가짜 탄도미사일 경보 사건을 다룬 VR 다큐이다. 총 3장으로 나누어진 38분 길이의 디지털 이미지 작업으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 목소리와 나레이션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1장 ‘피신하라(Take Over)’는 사건 당일 아침 유난히 아름답던 하와이 하늘부터 지옥같은 공포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을 몇 인물의 구체적인 증언으로 담았다. 일터에 가기 전 평온하게 준비를 하던 안지 앤더슨(Angie Anderson)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평소처럼 홍수주의보인줄 알고 별생각없이 화면을 보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브루스 알린(Bruce Allyn)은 이 문자가 사실일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난달 섬전체에서 실시한 대피훈련을 기억하며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서늘함을 마주한다. 하와이 출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핵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은 이날 아침 도서관에서 친구들의 겁에 질린 메시지를 연쇄적으로 받으며 마지막일지 모를 사랑의 답변을 보낸다.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된거라면 1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고, 평균 크기의 핵이 폭발한다고해도 호노룰루 전체가 시작부터 흔들리고 섬 전체가 유해물질로 뒤덮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등에 업고 피신처에 겨우 도달한 한 남자는 “여긴 자리가 없으니 다른 데로 가세요!” 라고 소리지르는 군중의 민낯을 마주하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평화로운 상황이 이상했다. 태평양의 주요 군 핵심시설로 가득한 하와이에서 피신이라는 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진 작가도 등장한다. 이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과연 무엇인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피신하라”는 말만 내놓는 것이 대안인지 의문을 가진 젊은 여성은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를 하며 바다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간다. 2장 ‘종말의 기계(The Doomsday Machine)’는 문자 발송 직후부터 긴급신고번호로 접수된 문의전화 녹음기록을 공개해 공적 권한을 지닌 이들에게도 정보가 도달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어떤 조언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을 드러냈다. 공기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던 38분간, 시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진다고 믿었던 정부기관에서는 어떤 답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셜미디어로 향한다. 각자의 처지와 정보를 교환하고 개인의 결정으로 대처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인터뷰가 이어진다. 또한 지구 위에 존재하는 14,000개의 핵무기가 지구를 몇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취재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준비를 하라”던 교사의 지시에 부모의 위안이 필요했던 소녀, 이 속에서 살아남더라도 뱃 속의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걱정하던 임산부의 증언은 시스템의 실패로 인류가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사건으로 이 날을 기록하고 있다. 3장 ‘쿨레아나(Kuleana)’ 는 책임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이어로 사건이 종료된 시점부터 그 이후의 변화를 담고있다. “미사일 경고는 잘못된 문자였다” 라는 정정보도에도 사람들의 혼돈은 한동안 지속됐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 사건 이후 어떤 것도 똑같지 않았다”라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그저 앉아서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타고 나왔다. 정부는 미사일 경보 오발령의 원인으로 주정부 비상관리국 직원이 작업 교대 중 경보 시스템을 점검하다가 버튼을 잘못 누르며 생긴 개인의 실수였다고 밝혔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사건은 종료됐다. 시민들은 “잘잘못을 묻고, 적과 아군을 나누고, 누군가를 해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과, 시스템이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살기보다 다른 대안을 원했다. 그리고 그 답은 기존의 사회작동 방식이 아닌 과거 하와이 선주민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 점점 개별화되는 사회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되찾고 보편적 인간성을 회복해야 가능하다는 목소리로 퍼진다.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의 증언 장면 트레일러 보기: On The Morning You Wake (To the End of the World) | Meta Quest # VR다큐 미학의 발전 가능성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특이점은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하려는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2장에 등장한 추억의 가족 비디오를 제외하고는 실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실 이미지를 옮기기보다 디지털 이미지로 당시 일어난 상황을 묘사한다. 이는 다큐멘터리가 실제 현장의 이미지를 드러내며 힘을 발휘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미지의 힘을 포기한 것이냐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제작진은 표현방식 전략을 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핵(이미지)과 목소리(사운드)로 세웠다. 핸드폰이라는 매체 덕분에 무언가를 알리고, 남겨두기 위한 현실 기록으로서 이미지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새로운 이미지는 일상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기록 영상과는 반대로 현실을 전제로 하되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야기를 해설하는 이미지도 모두 움직임에 반응하는 입자처럼 최소화해서 그 외 공간을 비우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와이 미사일 오보의 주요 쟁점인 ‘핵'과 그 여파를 이미지화한 그래픽, 모래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날아가는 세계, 하와이 섬의 모습 등을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했다. 명백히 인위적인 것임을 선언하는 이 작품의 시각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거짓말 같은 실제에 대한 현실 인식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허구) 사람들에게는 실제 일어난 일(현실)이었고, 삶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단어가 적합해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작진은 미사일로 인해 핵폭발이 일어났다면 산산히 부서졌을 세계를 묘사의 한 방법으로 취했다. ‘만약’ 위험 경고가 사실이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증언과 사람들의 공간을 조각내 무너지게 하고 다시 구축하는 방식으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관객에게 가상 현실을 경험하게 해서 ‘정부'의 메시지라는 권위가 우리가 보는 이미지보다 더 허구적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고, 영상이 끝나도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헤드셋 밖에 남아있다고 알리는 장치로 이 디지털 이미지는 작동한다. 이러한 재현 이미지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은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음질에 관계없이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 상황을 제시하고, 이들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세상의 끝을 마주한 당일의 감정이 불안하거나, 화를 내거나, 다급하게 온전히 전달되고 있다. 다시말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청각이 제공하는 강렬한 사실과 감정을 기초로 당시 상황을 디지털 이미지라는 가시적 형태로 표상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디지털 이미지 대신 실제 장면이 들어갔다면, 2D 영화였다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이 지금의 결과물과 같은 영향력을 주었을까? # 재난을 재현하는 매체와 이미지 사실을 증명하는 것보다, 리얼리즘 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작품은 관객이 받아들일 작품의 영향력을 답으로 고려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운동에 동참하세요" 문구가 드러내듯 평화와 비핵화 캠페인에 대한 선명한 의도를 지닌 작업이다. 그러나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전쟁이나 재난의 참혹함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충격효과를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게하는 방식을 택했다. 제작진이 선택한 디지털 이미지 활용이라는 전략은 촬영할 수 없었던 지점을 시각화해주는 수단이자, 거짓말 같은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인위성이라는 한계를 오히려 현실 자각의 도구로(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당신에게도 이 허구가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미학의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사용한 사례였다. 이 작업은 다른 층위의 질문을 연결한다. (하와이 원주민의 지혜가 답이 될 수 있는가하는 순진한 결말은 내용에 대한 것이고, 매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기에 여기서는 제외하겠다.) VR 매체 자체가 지닌 기술이 재난과 같은 사건을 다룰때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D 영화처럼 타인의 이야기로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VR이 강조해온 몰입을 통한 “현재성"과 “경험”이 내 이야기로 느끼게 해준다면 윤리적 문제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누군가의 절망과 재난을 가상 체험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걸까? 또한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디지털 이미지가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경우는 VR로 그 가능성을 선보였다. 왜냐하면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느낀 공포는 실제였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매체를 통과하는 이야기를 제작진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리하게도 참혹함을 전시하지 않고 들려주는 방식으로 재난의 공포를 관객에게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된 논쟁인 재난의 이야기가 아름다워도 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 마무리하며 영화사의 주요한 변화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었다. 때론 예술가들의 미학적 측면이 기질을 발휘한 순간들이 있지만 진보의 동반자로서 영화를 이끈 데에는 기술을 사업으로 활용한 이들이 있었다. 관객의 지지와 거부가 영화사의 진행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고 상업적 생존 능력에 따라 영화는 발달되어 왔다. VR이 배급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3D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VR이 꼭 영화가 되어야 하는가? 재간의 산물로 남지 않더라도, 특정한 이야기에 맞는 매체로 ‘새로운 시각화 수단’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남는다. 어떤 이야기는 영화에, 어떤 이야기는 시리즈로 나누어 가는 것이 더 어울리듯 어떤 이야기는 VR에 맞는 것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것이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 모두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특정' 이야기에는 적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리스트가 완벽한 영화를 뽑는 것이 아니듯 내게는 이 작품이 다큐 미학의 새로운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이미지 매체의 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첫 장면에 달려있다. 버스 정류장에 근처에 예닐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고정숏으로 보여준다. 어안렌즈로 찍은 것처럼 곡선으로 구부러진 버스가 정차 후 지나가면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남는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 사이 보호색을 띠었던 양 이제야 눈에 띄는데, 행색을 보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는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린 한 쌍처럼 보인다. 이들은 뒤로 보이는 연방 우체국의 우편물을 노린 3인조 가족 사기단이다. 이 장면의 압권은 딸 올드 돌리오(에반 레이첼 우드)가 선보이는 특별한 준비 동작이다. 굼떠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날랜 동작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낮은 난간을 뜀뛰기 하듯 넘나드는 모습이 놀라움을 안긴다. 그렇게 해서 과연 CCTV를 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동작은 눈길을 끈다. 이는 임무 완수를 위한 제의 혹은 스트리트댄스 같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다시 등장한다. 버블 공장에 딸린 사무실을 집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몇 달째 집세를 밀린 상황이다. 주인의 시선을 피해 낮은 담 아래로 몸을 굽히고 걸어가는데, 유독 돌리오만은 림보를 하듯 허리를 거의 180도로 뒤로 꺾은 채 성큼성큼 걷는다. 그 모양은 우스운 것을 넘어 그를 도시 공간과 소통하는 거리의 무용수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한 몸개그로, 이것이 몸의 영화임을 다소 난해한 방식으로 예고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천장 벽 틈새로 분홍색 비누 거품이 새어드는 곳이다. 그럴 때마다 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에 가까워지며 무생물과 같은 거주자들과 반대 방향에서 접점을 만든다. 가짜 가족처럼 보이던 이들은 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데, 애초에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한 것 같다. 여기에서 가족은 비즈니스적 공동체이며 감정적 유대가 아닌 공평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수익과 손해는 3분의 1로 정확히 나눈다. 동시에 울리는 손목 알람에 따라 정해진 일을 수행하고 몫을 나누어 갖는다. 딸 올드 돌리오는 < 산책하는 침략자 >(2017)의 개념을 잃어버린 신조(마츠다 류헤이)처럼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습득해야 하는 부적응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26살에 뒤늦게 시작된 돌리오의 성장기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는 성장기가 아니라 ‘출생기’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접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환불 불가능한 마사지 쿠폰을 포기하는 대신 생애 처음 마사지를 받은 돌리오는 작은 터치에도 몸을 떨고 눈물을 보인다. 한 임산부의 부탁으로 예비 부모를 위한 강연에 참석한 돌리오는 아기가 어머니와 감정적 유대를 맺는 최초의 행위인 ‘브레스트 크롤’(태아가 엄마의 젖가슴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행위)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태어난 직후 엄마 테레사(데브라 윙거)와 접촉했는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비행기에서 부모와 떨어져 앉게 된 돌리오는 우연히 부모님과 나란히 앉은 멜라니(지나 로드리게즈)가 자신보다 더 그들의 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테레사의 애정에 더욱 집착한다. 돌리오가 대리 참석한 강연장에서 출산 영상이 등장하는 대목은 다소 급작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 속의 모든 상황은 ‘태어남’을 은유하기 위한 치밀한 우연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돌리오의 우체국 진입 장면 이후에는 우편함을 뒤지는 돌리오의 손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다. 우체국 내부는 사방이 작은 우편함으로 구획된 어딘가 비현실적인 공간이며, 돌리오는 그중 한 곳을 열고는 좁은 구멍 속에서 손을 좌우로 더듬으며 우편물을 찾는다. 그러다 옆 칸에 놓인 긴 직사각형 형태의 우편물을 조심스럽게 빼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좁은 구멍으로 분만을 유도하는 출산 장면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멍을 통과한 뒤에는 진동처럼 지진이 찾아온다. 가족이 약진에 유난스럽게 반응하며 길가에 얼어붙을 때, 옆에서 행인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지진을 통해 세상은 개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그럴수록 이 가족은 무생물처럼 고정된다. 진동하는 비행기는 이들이 세상을 체감하는 방식을 요약한 공포 체험의 장소다. 갑작스러운 난기류로 차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을 은유하던 비행기는 작은 우편함 구멍과 출산 비디오 영상과 어우러져 출산 체험을 위한 기구가 된다. 비행기는 누구나 망각했을 태어남의 순간을 내부에서 단체로 경험하는 물질로 도약한다. 내부의 시점에서 출산을 체험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은 후술하는 장면을 통해 마침내 성공적으로 충족된다. 테레사가 무심결에 멜라니를 ‘아가’(hon(ey))라고 부르자, 돌리오는 수하물 분실을 조작해 얻은 여행보험금을 걸고 자신에게 ‘아가야’라고 말해보라고 테레사를 채근한다. 그러나 테레사는 끝내 돌리오를 ‘아가야’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 집단에서 막내딸 정도의 역할일 줄 알았던 멜라니는 자신의 진짜 역할이 어머니임을 자각하고는 돌리오의 손을 잡고 집단을 벗어난다. 멜라니는 자신의 집을 새로운 활동 기지로 삼아 ‘아가야’라고 불러주기를 비롯해 테레사가 거절한 것의 목록을 만든 뒤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리스트의 핵심 항목은 단연 브레스트 크롤이다. 멜라니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며 실감나는 재현을 위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로 돌리오를 데려가 문을 잠근다. 어둠 속에서 지진이 찾아오자 겁에 질린 돌리오는 이것이 자신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진동이 멈춘 뒤 문이 열리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돌리오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기쁨에 젖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생의 축복을 만끽한다. 아직 가장 중요한 동작이 남았다. 화장실에 갇힌 패닉 상황에서 실언을 내뱉어 멜라니에게 상처 입힌 돌리오는 그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 멜라니에게로 다가간다. 돌리오의 첫 브레스트 크롤은 엄마의 품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그보다 넓은 세상의 맨몸을 더듬는 행위이다. 덧붙여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는 최초의 시도다. 그렇게 돌리오는 태어난다. 그리고 비로소 산다. <카조니어>에서 미란다 줄라이가 보여준 것은 아직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던 방식으로 시도된 사랑스럽고 무모한 퇴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