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시갈의 죽음의 땅
- 감독
- 스티븐 시걸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마이클 케인, 스티븐 시걸, 조안 첸, 존 C. 맥긴리, R. 리 어미, 샤리 사턱, 빌리 밥 손튼, 리처드 해밀턴, 치프 어빈 브링크, 아팡굴럭 샬라이 케이래욱크, 엘시 피스톨헤드, 존 트루델
‘기차 영화’ < 오리엔트 특급살인 >처럼 기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간 자체가 내용을 장악한다. 출발과 도착,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는 기계, 체인으로 연결된 차량들,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화장실, 마지막 칸, 물러설 수 없음, 절대로 왔던 길(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기차 영화는 대개 불온하다. 스릴, 총싸움, 살인, 범인 잡기……. 기차 밖도 마찬가지다. 나가봤자 허허벌판이다. 좁은 공간에서 무기는 효율성이 다르다. 어떤 무기가 유리할까. 분명한 것은 기차 칸에서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은 결국 무기전”이라고 하지만, 기차 안에서는 첨단 무기가 승부를 결정짓지 않는다. 코앞의 단도나 야구 방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지품이 무기가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차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본 인프라이자 근대성을 상징한다. 기차는 물자 수송과 인간의 이동,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차 시간은 정확해야 한다. 승객은 제시간에 기차에 승차해야 한다. 10초도 늦어서는 안 된다. 숨이 차도록 기차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우리 자신도 경험했다. 비행기의 지연 출발, 착륙은 흔한 일이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다. 기차를 놓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이 아직 하늘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지상은 장악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기차 시간의 정확성은 한 사회의 발전과 기술, 질서를 의미한다. 에릭 홉스봄이 적었듯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시간에 왔다”(나중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기차로 시작된 근대 근대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절멸전(絶滅戰), 대량 학살인데, 이는 인간의 의지(will)가 인간성을 어디까지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히틀러가 자살 직전 마지막에 한 말은 “이것이 내 의지다!”이었다. 우리의 개발 독재 시대의 슬로건 역시 “하면 된다.”였다. 지금도 “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인간의 의지는 질주하는 자본주의 구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생은 해도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의지, 불굴의 의지, ‘그놈의 의지’……. 나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과 사회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는 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홀로코스트. 하나의 질서만 유일한 진리가 되는 보편성(uni/versal)의 폭력이 실제로 실현된 대량 학살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 「기차는 슬프다」는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첫째 연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적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 개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인간(백인 남성)은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여 미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진보(progress)의 개념이다(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와는 다르다). 단수(單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시간관과 단수의 주체가 시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별적 인간의 상황마다 ‘10분’의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백인 남성 비장애인의 시계를 중심으로 삼아 객관적 시간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과 지루한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고문당하는 10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같겠는가. 시간은 척도가 아니라 경험이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다. 장애인의 시간과 비장애인의 속도는 다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누군가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설정되고(시계), 사람들은 속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전, 추격, 100미터 달리기, 문명과 야만, 최연소의 성취... 물론 가장 끔찍한 ‘야만’은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the spatialization of historical time). “한국은 미국의 80년대다.”라는 식으로 각 지역의 발전 차이를 문명화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놓고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국제 사회의 위계를 만들어, 이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설국열차 근대성의 교과서, < 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이 타고난 재능과 훈련, 지성을 모두 갖춘 예술가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를 ‘마스터’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의 첫 장편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가장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무정형의 영화다. 패턴이 없다. 걸작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그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김뢰하처럼’ 생겼다. 이후 < 살인의 추억 >, < 괴물 >, < 마더 >, <설국열차>, 레오 카락스, 미셀 공드리와 함께 한 옴니버스 영화 < 도쿄!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다루었다)까지, 봉준호는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는 위 영화들에서 근대성의 주제들을 섬세하게 공들여 변주한다. 좌우를 초월한 남성 연대(그런 면에서 <살인의 추억>과 <설국열차>가 가장 비슷하다), 괴물적 모성, 오염 메타포,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조적 파국. 특히 숙주(宿主)와 기생충.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2019년 <패러사이트(para/site, 영어 어원으로는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 우리말은 ‘기생충’)>를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연작의 완성인 셈이다. 숙주와 기생충은 대립하는 생물이 아니라 공존 관계다. 앞서 말한 그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성의 공식에 충실하다. 원작 탓일까. <설국열차>가 가장 노골적이다.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어른’을 모시고 봤는데, 옆자리에서 나는 다음 장면을 중계했다. 한 장면만 빼고, 다 ‘맞추었다’. 그는 내가 “천재”이거나 영화를 두 번 보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백질 바(bar)의 원료가 바퀴벌레인 것도 알았다. 바퀴벌레는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하며,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몇 달 동안 생존이 가능한 강력한 생명체다. 단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염의 매개체여서 사람들이 질색할 뿐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장면은 공동체와 리더십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부정의와 연관이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자, 그는 사양한다. 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다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온몸이 멀쩡한 자신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반대다. 이곳은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상이용사’든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그들은 ‘재수 없는 피해자’이거나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다짐케 하는 반면교사이거나 ‘민주화 운동 경력을 팔아 국회의원을 노리는 이들’이다. 반민특위서부터 일상화된 한국의 부정의한 일상의 근대사다. 한국은 살아남는 것, 더 잘사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나라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생존자는 소녀, ‘흑인’ 소년, 동물(곰)이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희망을 상징한다. 지구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구를 망치는 데 앞장선 이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은, 현재를 주도하는 주체의 타자라는 얘기다. 한국의 녹색당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탈핵을!”이라는 구호에 대해 고등학생 당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른’ 당원들은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왜 자신들을 현재의 동반자가 아니라 어른의 관점에서 ‘미래’로 정의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구호는 “지금, 당장, 우리 모두를 위해 탈핵을!”이다. 자신들을 타자화하지 말라는 얘기다. <설국열차>나 녹색당의 ‘어른’들은, 타자를 정의하고 보호하는 주체는 성인 남성임을 자임한다. 그들은 재현의 주체이지, 재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대들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 마” MB 시대의 ‘조현오’가 만들어낸 좀비, < 부산행 > 스티브 연이 출연한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걸어 다니는 시체)>는 내게 난독 증을 일으킨다.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지칭하는 말 중에, ‘리빙 데드(living dead, 살아 있는 시체)’가 있는데,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나 죽지 못하는, 그래서 자살만이 치료인 이 병의 특성을 표현한 단어다. 우울증과 좀비 상태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좀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반영이다. 괴로운 상태지만 죽지는 않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태는 없다.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아름다운 좀비 영화도 많다. 나는 좀비 영화 중에서 조시 하트넷이 나오는 2007년작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30 Days of Night)>를 가장 좋아한다. 아메리카 최북단 도시인 알래스카의 배로우는 매년 겨울이면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화면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어둠과 추위 때문에 더욱 아늑해 보이는 도시, 카페들, 좀비가 나타날 때마다 흰색 눈 위에 뿌려지는 선연한 붉은 피, 눈 내리는 거리의 가로등……. 영화를 보다 보면 30일이 지나서 해가 뜰까 봐 걱정일 정도다. 그런데 대개의 좀비 영화는 신체 변형의 공포를 활용한다. 피와 근육이 질척인다. 좀비를 두 종류로 나뉜다면 무한 증식하는 좀비와 그 숫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좀비다. 감염, 오염, 흡혈 따위로 증식하는 좀비 영화에서는 극소수만 남게 된다. 최근 좀비 영화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생존 법칙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소위 ‘좀비 사회학’이 인기인데, 인간은 모두 좀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보면서 이명박 시대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되는 방식은 오염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럴 힘도 없다 - 상대방을 나랑 같은 처지로 만드는 것이다. MB 시대의 정신을 체화한 ‘MB 캐릭터’는, 이 영화의 최고 악역( 김의성 분)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생존자다. 문제는 그 이상(以上)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MB 시대의 대표적 모델은 전 서울 경찰청장 조현오 씨다. 그가 저지른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등은 MB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MB는, 아예 그런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사건들은 조현오 개인의 과잉 충성의 결과였다. MB 캐릭터의 특징은 최소한의 근대적 인간관을 갖추지 못한 데다, 실력은 없으면서 셀럽 욕망이나 권력욕에 미친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과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무식과 뻔뻔함은, 이들이 장착한 최고의 만능 아이언맨 슈트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굳이 비윤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능력주의 사회다. 이들은 실력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편으로는 극도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인생의 낭비다. 이 시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최고의 자살률은 수치심을 버린 자들이 휘두른 자상의 결과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 부끄러움 없는 사람의 활기(活氣)는, 그 자체로 흉기다. 한 마디로, 지금 이곳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정의는커녕, 의리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평범한 사람도 오염된다. 오염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 사회를 기차 안에 압축해 두고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는 과정이 이보다 현실적일 수 있을까. 다시 쓴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과정을 그린, 몸서리쳐지는 영화다. 다른 선택은 없다. 오염의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인공 공유 나 마동석 도 구원받지 못하며, 나쁜 세력의 승리에 제단에 바쳐진다. 이 영화에서도 부정의에 오염되지 않을 두 명만 남겨준다. 역시 여성( 정유미 )과 아이( 김수안 )다. 이 영화를 부성 영화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스테이션 에이전트 < 스테이션 에이전트 >의 ‘난쟁이’ 그는 타자인가, 진정한 친구인가 <스테이션 에이전트(The Station Agent>(2003)의 주인공 핀은 내가 꿈꾸는 삶을 산다. 동네에 버려진 기차 한 칸이 그의 집이다. 관리해야 할 물건이 없는 간소한 삶.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장애인(난쟁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와 폴 벤저민(Paul Benjamin), 퍼트리샤 클라크슨(Patricia Clarkson)이 나온다.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 감독의 <스테이션 에이전트(역장)>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감독이 직접 썼다)과 관객상을 받았다. 조용한 마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핀을 좋아한다. 그와 차를 함께 마시고,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가족과 싸우고 연인과 헤어지고 갈 곳 없는 이들이 간혹 그의 기차 칸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핀은 마음씨 좋은 신부님, 의지할 수 있는 마을의 상담자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왠지 나는 성별과 ‘외모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역할에 강하게 동일시했다. 나는 꼭 그였다. 나도 핀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는 마을의 살짝 외곽, 숲 근처에 살고 있다. 그의 존재는 궤도 밖에 있다. 마을 사람(여성)들은 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지, 그가 먼저 원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가 먼저 사람들을 원한다면, 관계의 법칙은 깨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무언가 결핍이 있는 존재이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동경해 본 적이 없다. 주변 지인들은 내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준다’. 그러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과 동급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 ‘장애인’이어서, 그들 인생의 경쟁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핀(역장)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사람들, 자기 기준에서 ‘차이(모자람)’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외이며, 편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타자(他者, the others)라고 부른다. 타자는 억압받기도 하지만, 유사 종교적 존재로 존중받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 속(俗)과 성(聖),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 모두 후자이되, 긴장이 덜하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타자지만, 사람들은 그를 낭만화하고 신비화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위치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관계 원리는 ‘나는 너와 다르고, 그것은 내가 결정한다’이다. 장애인으로 규정당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들의 규범에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과의 차이의 문제를 글로 쓸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니까.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균불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는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가 망하게 생겼다. 트럼프 같은 인간도 패닉 룸(반공호)을 잃을 판이다. 기존의 근대성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자국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아프리카 땅을 마구 사들이는 중국, 전쟁주식회사는 의뢰인에게 돈 대신 받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다.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 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 앞에 든 80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은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자연, 장애인들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주체의 전복과 파괴, 변형이 상상력이다. 작품마다 자신을 부수는 소설가 정찬은 그의 걸작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영화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로라 예년에 비해 사사로운 영화리스트를 선정하기가 몹시 힘들었던 한해였다. 챙겨보고 싶은 영화들을 충분히 보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마음에 크게 와닿은 영화도 드물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소 지쳐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단순히 영화를 수적으로 많이 본다는 물리적인 체험의 피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갈수록 영화를 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자극적인 소재와 긴 러닝타임, 현란한 속도의 뭇 영화들은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런 2017년의 영화로 켈리 레이차트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선정한 건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담고 있는, 영화의 힘을 체감할 수 있게 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차의 모습으로 영화의 포문을 연다. 이 기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을 싣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기차가 어디론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그 여정의 일부라는 사실 뿐이다. 이는 곧 <어떤 여자들>이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의 과거와 미래는 켈리 레이차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녀에겐 중요하다. 영화는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에 살고 있는 네 여성의 현재를 조명하는데, 본인도 모르는 새 한번쯤 스쳐지나갔거나 지인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들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어쩌면 알 수도 있었을 법한 ‘어떤 여인들’로 남는다. 끝내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된 그녀들의 삶은 몬태나 특유의 황량하고 음울한 정서와 맞물려 미국 서부에 대한 낯선 풍경화로 기억될 듯하다. <어떤 여자들>은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변호사 로라(로라 던)다. 그녀는 상해배상 사건을 두고 윌이라는 이름의 의뢰인에게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승소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을 두고 8개월째 어거지를 쓰던 윌은 로라가 소개시켜준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 앞에서 순한 양이 된다. “내가 남자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가 법을 설명해주고 사람들이 듣고서 알겠다고 말하면 정말 일하기 편했을 거야.” 로라는 한탄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총기 인질극을 벌이는 윌을 설득해야 하는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지나 두번째 에피소드는 몬태나 근교에 새로운 집을 짓고자 하는 지나의(미셸 윌리엄스) 이야기다. 켈리 레이차트의 대표작 <웬디와 루시>, 서부극을 여성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믹의 지름길>에 이어 미셸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레이차트의 여성 캐릭터로 분했다. 그녀가 맡은 지나는 강한 생활력과 결연한 의지를 가진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붕괴 직전이다. 지나의 남편과 딸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지나의 행동에 불평을 일삼거나 훼방을 놓는다. 그럴수록 지나는 새로운 집에 쓰일 사암을 구하는 일에 더욱 더 집착한다. 세번째 에피소드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몬태나 도심과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말을 돌보는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턴)와 그녀가 듣는 학교법 특강의 파트타임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그들이다. 우연히 두 사람은 특강이 끝난 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게 되고, 제이미는 베스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왕복 8시간의 거리를 운전하며 낮에는 로펌 변호사로, 밤에는 파트타임 강사로 일하는 베스에겐 타인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제이미와 베스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많은 경우 기회는 길 위에 있다. <웬디와 루시>의 웬디가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 아이다호에서 알래스카로 향하고, <믹의 지름길>의 세 가족이 삶의 터전을 떠나 오레건의 산길을 걷는 이유다. 하지만 길 위에서의 모든 기회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레이차트의 관심은 길 위에서 목적과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인물들에 머물러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풍경을 조명한다. 숲과 평야, 강과 사막, 도로와 거리. 21세기 미국영화가 쉽게 간과하곤 하는 인물과 풍경의 관계망이 곧 레이차트 영화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레이차트의 영화에서는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가 중요하다. 목적지보다 경유지가 중요한 기이한 로드무비, 그것이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다. <어떤 여자들>에서는 제이미와 베스가 등장하는 세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들>의 풍경에는 전작과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올드 조이>(2006)부터 <어둠 속에서>(2013)까지, 레이차트는 대부분의 전작을 미국 서부의 오레건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미국 몬태나 출신의 작가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소설 세 편(국내에는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작인 「트래비스 B」가 수록된 단편소설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이 출간됐다)을 원작으로 하는 <어떤 여자들>의 경우 소설과 마찬가지로 북서부 몬태나주를 영화의 주요 무대로 정했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미국에서도 인구 밀도가 낮기로 유명한 몬태나의 지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어떤 여자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단절감과 고독감은 레이차트의 어떤 영화보다 깊고 통렬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 여성은 성차별과 무관심이 만연한 현실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묘하게 닮아있는 이들의 삶은 계급과 환경에 따라 여성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 중 가장 상황이 나아보이는 사람은 로라다. 남성 의뢰인이 직업여성으로서의 그녀를 깎아내리고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로라는 언제나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로라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의뢰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다. 지나는 가족과 정서적으로 단절되어있지만 가장으로서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기회를 찾아 몬태나 근교를 배회하는 그녀는 행복한 가족 대신 멋진 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암담한 인물은 제이미다. 목장 노동자인 그녀는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존재로 묘사된다(그녀의 이름인 ’제이미’는 영화에서 단 한번도 호명되지 않는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개와 함께 눈 덮인 설원을 순찰하는 제이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되는 베스도 첫번째 에피소드의 로라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블루칼라 노동자 출신의 어머니와 언니를 둔 베스는 변호사가 됨으로써 제이미의 운명으로부터 지금 막 벗어났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눈덩이처럼 늘어난 학자금 대출금 뿐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시점이 전문직 여성(로라)과 가장 역할을 하는 어머니(지나), 블루칼라 노동자(제이미)로 이동할 수록, 영화의 배경이 몬태나주 리빙스턴의 도시에서 근교를 거쳐 시골로 이동할 수록,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한층 어둡고 잔혹해진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후반부,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는 베스를 찾아나선 제이미는 어두운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베스가 느꼈을 고독감을 체감한다. 하지만 베스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으리라던 희망이 무산된 뒤, 목장으로 가는 길의 황량한 초원 한복판에 멈춰서버린 제이미의 모습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이 장면에서 몬태나 주 출신의 신인배우, 릴리 글래드스톤의 표정은 정말 압권이다). 21세기 미국 여성들의 산산이 부서진 꿈, 그 황량한 좌절의 풍경을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는 고요하게 응시한다. 이처럼 남다른 속도와 감각을 지닌 한국 여성 감독의 출현을 2018년에는 기대해볼 수 있을까.
켈리 레이차트는 가장 소박한 형식으로 동시대 미국인의 삶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지역의 고유한 풍광 속에서 삶을 버티다가 무뎌지고 바스러지는 인물의 현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녀의 6번째 장편영화인 < 어떤 여자들 >(2016)은 전작을 관통했던 그만의 인장도 찾을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스케치한 몬태나의 풍경과 여성들의 삶은 ‘오리건 3부작’보다 쓸쓸하고 스산하며 적막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하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 굳게 입을 다문 채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거나 묵묵하게 계절을 견뎌가는 숲과 나무, 하늘과 구름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으로 남거나 곧 사라질 것처럼 고요하고 삭막하다. 레이차트의 고유함은 로컬, 독립,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그녀의 온화하고도 단호한 시선은 이러한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오리건 3부작’은 지역의 상황을 통해 미국의 동시대적 문제를 진단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독립적인 제작형태를 통해 미국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주류의 흐름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그녀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인 자유와 해방이라는 가치와 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중년 남성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이미 사라진 세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온전하게 지켜질 사람 간의 예의가 존재하는지 탐색한다(< 올드 조이 >(2006)). 젊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이동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고 그녀의 개가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된다. 낯선 공간에 남겨진 그녀는 불안과 대면해야 하며 알래스카에서 맞이하게 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웬디와 루시 >(2008)).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이동하는 개척민들이 길을 잃고 사막을 통과하게 된다. 황량하고 피폐한 노정에서 그들이 만난 인디언과 폭력적인 길잡이를 통해 서부라는 지형과 남성의 전유물이 된 서부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믹의 지름길 >(2010)). 레이차트는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거나 제한적인 관심사의 바깥에 버티고 선 삶의 풍경을 탐색하고 인물들의 노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도록 제안한다. 특히 미국인의 꿈과 이상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좌절되는가라는 질문을 짊어진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들은 미국이라는 국가로부터 비롯된 은근하고도 끈질긴 불안을 거쳐 악몽이 되어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낯선 곳에 머물러야 하고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살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인물과 마주하고 우회로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들이 당면한 삶의 조건은 영화 바깥의 우리와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점점 줄어드는 돈, 일자리를 찾는 것,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 안전하게 잠들 장소, 부당한 합의금에 대한 소송처럼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또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자본의 횡포와 실용주의적 사고에 맞서 환경을 구하는 것, 신념과 실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질문, 9.11 테러-미국이 벌인 전쟁-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부시 정권의 악행과 무능함의 폭로에 이른다. 레이차트는 미국인들을 위협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면서도 개인의 내밀한 삶을 작동시키는 동력을 꾸준히 모색한다. 그녀의 영화는 지역의 풍광 속에 새겨진 당대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세밀한 삶의 순간으로 인해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선사한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소녀의 빛나는 눈동자, 사랑하는 개를 낯선 곳에 떼어놓을 수밖에 없던 웬디의 절망스런 손짓, 낯선 곳에서 만난 경비업체 직원이 건네준 꼬깃거리는 지폐, 깊은 밤 적막한 소도시를 유유히 활보하는 말의 우아하고도 힘찬 발걸음, 개척시대 학교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사암 더미, 특별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하루를 담은 편지, 목동을 따라 뛰어다니는 사냥개의 활기찬 모습은 일상 속에 감춰진 비범하고 고귀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겸허함과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관계의 풍요로움(< 올드 조이 >의 두 친구, < 웬디와 루시 >의 두 존재, < 믹의 지름길 >의 강직한 신념을 지닌 부부)도 있지만 한편으로 실패한 여정과 균열되는 관계(오랜 친구인 중년 남성들이 온천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의 삶은 잃어버린 지난날에 대한 향수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하고,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가던 중 사랑하는 루시를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웬디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마저 잃게 된다. 믹과 인디언이라는 두 길잡이를 동원해서 신앙공동체를 세울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순례자 가족에게 닥친 공포와 두려움의 확산은 서부라는 공간이 배태한 이주와 정착이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2013)는 환경을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젊은 운동가들의 회의와 좌절을 통해 머릿속에서 생산되는 신념과 육체를 통해 실천되는 행위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은 희박하기만 하다.)에서 파생된 곤경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풍경과 인물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레이차트의 완고한 태도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되거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대해 전력을 다해 거부한다. 불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을지라도 삶은 이어질 것이며, 삭막한 여정에서 친밀한 존재와 교감하거나 이별할지 모르고,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 사막의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흩어져 흔적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솔직하고 겸허하다. 오랜 시간 묵묵히 존재하는 풍경과 대면한 인간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미완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당도하고자 애쓰는 노정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레이차트의 카메라를 통해 동시대 서부의 풍광과 세밀한 삶의 기록이 조우한다. < 어떤 여자들 >은 네 여성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녀들이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서부라는 풍경이 그들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 믹의 지름길 >이 서부의 횡단기라면, 이 영화는 서부를 맴도는 인물이 그들을 에워싼 풍경을 응시하거나 회피하는 시선으로 건네받는 풍경과 역사에 대한 사색이다. 그런데 응시의 연결망이 너무 쓸쓸하고 음울해서 서부라는 풍경과 그 시대에 대한 종언처럼 느껴진다. 개척기 서부를 통과했던 이주민과 오랜 시간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이 사라진 곳에 사암 덩어리나 황야를 달리는 철길,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목장이 서부임을 드러낸다. 정착지를 향해 걷는 고된 행렬, 카우보이와 악당들이 허다하게 뿜어내던 총성, 달리는 말들의 격렬한 운동과 추격은 차갑고 어두운 겨울이라는 계절, 마을을 에워싼 산, 고립된 목장, 길게 뻗은 도로에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레이차트는 퇴적물이 되어버린 서부, 이미 죽어버려 생동하는 힘이 사라진 서부를 사색하기 위해 풍경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기입하는 자들(노인과 인디언 소녀), 풍경과 무관하게 살아가거나(리빙스턴에 거주하는 중년의 변호사와 법대생), 서부를 소유하려는 자(집을 지으려는 여성)를 등장시킨다. 그렇기에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겨울의 황량한 풍경을 관찰함으로써 경관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응시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풍경에 기입된 서부의 원초적인 기억과 사라진 존재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세밀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보다 잔뜩 흐린 하늘과 낮게 깔린 구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바싹 말라버린 목초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척박한 풍경과 고된 인물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친구라고는 말이나 개가 전부인, 삭막한 겨울을 보내는 인디언 소녀나 골칫덩어리 의뢰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중년의 변호사, 대출금을 갚기 위해 왕복 8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법대생, 고즈넉한 숲에 집을 짓기 위해 개척시대의 사암이 필요한 일 중독자의 겨울은 반복되는 노동과 고립된 생활, 소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 무기력함과 공허함,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피로에 잠식되어 있다. 변호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의뢰인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며, 잠이 부족한 법대생은 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풍경(과 사람)으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된다. 숲속에 집을 지으려는 여성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도 그녀가 자연을 응시한다기보다 사이가 틀어진 사춘기 딸과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과의 단절이 강조된다. 조깅을 하거나 숲길을 걷고 집이 지어질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조차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집의 미래를 떠올릴 뿐, 현재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겐 눈을 감고 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이웃 노인이 소유한 사암뿐이고, 본고장에서 나는 돌로 집을 짓겠다는 소원조차 소유와 과시, 약탈의 행위로 변질된다. 그녀는 노인이 애틋하게 집과 땅의 역사에 대해 회고할 때에도 그저 사암을 가져가라는 허락만 요구할 뿐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기어이 사암을 싣고 가던 날, 노인이 집 안에서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하면서도 절망적인 선언처럼 다가온다. 집의 형태를 갖춘 가족의 텐트/노인 홀로 사는 미완성의 집, 오랜 시간 녹지 않았을 눈이 더께로 앉은 산을 배경 삼아 서부의 무덤처럼 놓인 사암더미/여인의 텐트 근처에 차곡차곡 정리된 사암, 필요에 따른 거래/증여의 행위 끝에 마치 무덤에 갇힌 왕의 미라처럼 보이는 노인의 끈덕진 응시가 놓여 있다. 개척기의 서부, 마을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교회보다 먼저 지어진 학교의 흔적만 남은 돌무더기가 치워진 곳은 노인이 거주한 지 50년 넘게 지켜온 터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노인의 집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마치 개척기의 역사가 스며든 대지와 몬태나의 스산한 풍경이 노인의 응시와 더불어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예언자 같다. 비록 기억하고 응시하는 행위자가 사라질지언정 레이차트는 인물보다 먼저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사라짐까지 목도하는 것이 서부와 그곳에서 살았던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죽음과 서부의 소멸을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 어떤 여자들 >에서 가장 서부와 닮아 있는 사람은 목장 소녀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보다 더 오랫동안 서부와 함께 살아온 존재이자 삶의 터전으로써의 서부와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목장, 말,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서부를 공유하고 있으며 원주민인 선조들의 삶을 기억함으로 인해 온전히 풍경에 속해 있는 존재가 된다. 소녀는 우연히 학교법 강의에 참석하게 되고 법대생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마구간과 목장 숙소를 규칙적으로 오가면서 일하는 그녀의 단조로운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하지만, 피로에 찌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운 법대생은 인사도 없이 강의를 그만둔다. 소녀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으로 향하고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카우보이모자가 진열된 상점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결국 법대생을 찾게 되지만, 정작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자신을 기다리는 유일한 존재인 동물들에게로, 자신이 속한 서부로 돌아가던 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소녀의 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다가 마른 목초지에 멈춰 선다. 이 움직임은 중년의 변호사가 쇼핑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디언들의 전통춤 공연과 대비를 이룬다.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삶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면서 도시의 상품으로 전락했고, 그렇게라도 연명해야 하는 삶의 스산함은 쇼윈도에 진열된 모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념품이나 상징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소녀는 야생의 삶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게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아직 지니고 있기에 존귀하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도시를 찾았을지 모를 소녀의 방문은 실패한 여정이었어도 깊은 감동을 남긴다. 백인 가족의 단란한 식사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로 말을 타고 활보하는 모습은 정성껏 말의 갈기를 매만지는 손길과 말과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발,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생생함과 더불어 그녀의 존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오랜 시간 거주했던 선조들의 땅을 떠났다가 씁쓸한 감정을 지닌 채 돌아오는 소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녀의 자동차가 갓길로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만 다시 소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은 여행 이후 소녀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는 아직도 단단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목장에는 그녀와 겨울을 함께 보내는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그녀의 의지로 말을 길들이거나 돌보는 행위가 그녀를 지탱할 것이며, 그녀를 품고 있는 서부 또한 소녀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고심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것 같지만,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거나 노동하는 매 순간 첨예하게 개입된 정치적 사안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과정에 놓인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 불온한 시대에 잠시나마 온기를 더하는 숨결, 인물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미국의 풍경들 속에 깊이 스며든다. 나아가 < 어떤 여자들 >은 서부의 지형과 지리적인 풍경에서 서부라는 역사와 영화적 기억을 덧대어놓는다. 그것은 서부와 이별했던 남자들, 사막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 사막을 달려 멀리 사라지는 기차와 같은 회고의 대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위대한 풍경이 된 서부는 적막할지언정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서부를 되살리거나 망각한다. 하지만 사라짐에 대해 무심한 응시가 되었건, 끈질기게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시선이건 서부를 떠돌던 그녀들의 고단하고 피로한 삶을 향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과 삶의 감각이 지닌 힘을 믿으며,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가치를 탐색하는 것이 영화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실천하는 그녀의 영화가 아름답고도 위대한 것은 미완의 시간을 견디면서 목적지에 도달조차 하지 못한 인물들에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이 살아내고 응시한 것은 정직하고 윤리적이며 풍경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한 레이차트를 향하고 있으며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에 깃든 과거와 현재를 대면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이 사라진 존재들과 생성되는 것들에게 통감할 때 정치, 사회적 표명과 내밀한 감정이 일체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