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티풀
- 감독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하비에르 바르뎀, 마리셀 알바레즈, 펠릭스 쿠베로, 블랑카 포르틸로, 루벤 오찬디아노, 마티나 그라시아, 마놀로 솔로, 에두아르드 페르난데즈, 까라 에레잘드
한 시절이 끝나고 하나의 챕터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대나무 줄기처럼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 마디의 끝은 5년, 10년 같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갈 때 비로소 한 시대가 나뉘는 마디를 느낀다. 2022년에도 많은 영화인들이 떠났다. 국내만 돌아봐도 김보경 배우, 이춘연 대표, 강한섭 영화평론가, 신정원 감독, 강수연 배우 등 각 분야의 영화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니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세상을 떠났고 장 폴 벨몽도가 영면에 들었다. 장 마크 발레는 별이 되었고 시드니 포이티어는 역사에 새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장 뤽 고다르가 영원이 되었다. 장 뤽 고다르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영화도 막을 내렸다는 탄식은 그저 수사가 아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한 세기가, 영화의 한 챕터가 과거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현재는 과거다. 많은 이들이 현재를 산다 착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대체로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적으로 겹쳐 있다. 오늘을 살면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는 식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하자면 과거의 흔적들이 축적되어 오늘의 토대가 되고 그렇게 조성된 환경 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이건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과는 다르다.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게 집착이라면,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는 건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성찰의 시간에 가깝다. 몇 해 동안 사사로운 베스트 영화를 꼽았지만 올해만큼 유달리 ‘되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졌던 적도 없었다. 어떤 해는 내가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위주로 골랐고, 언젠가는 온전히 취향을 고백하며 영화를 고른 적도 있다. 완전히 떠나보내기 위해 이별 편지를 쓰듯 영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는 지난 1년 뿐 아니라 영화 보고 글 쓰는 일을 업을 삼은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영화를 골랐다. 그리하여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는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 아마겟돈 타임 >이다. 과거라는 이름의 오래된 미래 그러고보니 매년 습관처럼 하는 서두의 말이 있다. <아마겟돈 타임>이 제임스 그레이의 최고작은 아니다. 감독의 최고작은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에나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세상을 떠난 감독들의 지난 작품들을 살펴보니 애시당초 그런 건 불가능하다. 다르게 표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작품이야말로 나와 가장 깊숙이 접속하여 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세간의 평가, 작품의 완성도, 지난 작품과의 비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한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2022년 본 영화 중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방문을 두드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왜 굳이 이걸 지금 만들어야 했을까.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일정 부분 반영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 농도가 꽤 높은 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내밀한 드라마를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마존 정글로 떠나더니(< 잃어버린 도시 Z >) 내친 걸음 아예 우주까지 다녀왔다가(< 애드 아스트라 >) 다시 집으로 귀환했다. 아니 단지 고향인 뉴욕 퀸즈로 돌아온 것을 넘어 가장 내밀하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는 픽션이라기보다는 거의 일기에 가깝다. 제임스 그레이는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였고 아버지는 배관공이었다. 기술직인 아버지는 혹독한 환경에서 치열한 노력 끝에 중산층에 겨우 편입한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랬듯 교사였고 사친회의 회장이었다. 주말이면 조부모와 대고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고 부모님의 성화로 사립학교인 큐 포레스트로 전학을 간다. 제임스 그레이는 전학을 가기 전까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흑인 친구를 기억한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양아버지가 보내준 아폴로 미션 패치를 보물처럼 아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흑인 친구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던 걸 걸린 제임스 그레이는 학습부진아로 낙인 찍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어머니는 이 제안에 분노하며 제임스 그레이를 사립학교로 전학 시킨다. 불행히도 함께 잡혔던 흑인친구에겐 대신 보호해줄 보호자가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흑인 친구는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보호시설에 들어갈 처지에 놓이고 도망치듯 가출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친구가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얼마간 몰래 숨어 있던 나날을 기억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제임스 그레이의 어린 날이다. 동시에 영화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 내용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기억에 의존”했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거의 다큐멘터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영화와 실화의 길이 갈라지는 건 6학년 폴(뱅크스 레페타)가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출을 결심하는 지점부터다. 폴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인 친구 죠니(제일린 웹)을 설득해 사립학교의 컴퓨터를 훔쳐내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범죄는 발각되고 두 사람은 함께 경찰서로 끌려간다. 여기서 또 한번, 한층 더 가혹하게 둘의 운명이 갈라진다. 다시 돌아와, 왜 하필 지금인가. 제임스 그레이가 자전적인 체험담을 굳이 지금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70년대로 돌아가 < 리코리쉬 피자 >를 찍었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6년 만의 복귀작 <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를 통해 지난 생을 통째로 반추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자전적 영화 < 더 파벨만스 >를 선보였다. 스필버그의 첫 번째 자전적 영화라니, 이미 여러 번 꾼 꿈을 다시 목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가. 중견 감독들이 왜 새삼 지금 자전적 이야기에 몰두하는가. 일련의 유행 아닌 유행이 코로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활동이 축소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건 지금이 잠시 멈춰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대나무 마디 같은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는 목적에 따라 도착지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제임스 그레이가 일기에 가까운 자전적 영화를 만든 이유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자전적 상황의 재현 자체가 <아마겟돈 타임>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영화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애상에 잠긴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낭만화 하는 필터링, 이른바 노스텔지어의 정서에 흠뻑 젖은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아마겟돈 타임>은 되돌아보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아마겟돈 타임>은 건조하고 담담하다. 최소한 그런 위치를 유지하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제임스 그레이가, 아니 소년 폴이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안소니 홉킨스)의 시절이다. 소년이 직면한 상황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아마겟돈 타임>의 ‘지금’은, 1980년은 희망도 낙관도 없는 망해버린 세상의 초입이기 때문이다.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과 위협의 시대.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 아메리칸 드림이 종말을 고한 해. 소년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어른으로서 생존의 시간. 그래서 ‘아마겟돈 타임’이다. 유령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1980년을 이야기의 무대로 택한 건 그 때 자신이 사립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망가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1980년에 도달한 쪽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두터운 유리천장과 사라진 사다리, 무엇보다 연대에의 희망이 사그라들고 분리, 차별, 혐오에 잠식당한 미국의 오늘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 것인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발견한 변화의 첫 번째 분기점이 레이건이 당선된 1980년이었게 아닐까. 다시 말해 <아마겟돈 타임>의 자전적 이야기와 회상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오늘의 폐허를 환기시키는 거울의 무대라고 해도 좋겠다. 아버지 어빙 역의 제레미 스트롱 배우는 말한다. “1980년 레이건 당선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둔것과 같아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아주 사적인 렌즈를 통해 큰 이야기를 만든 거죠.” 사실 제임스 그레이가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의 시절이다. 할아버지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미국에 정착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시절이 있었고 아버지가 간신히 중산층의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시절도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폴이 바야흐로 맞이해야 하는 시대는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3루에서 태어난 이들이 3루타를 치고 노력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시대다. 2022년의 제임스 그레이는 이미 폐허가 된 세상에 서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그리움보다는 어떤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미 폴의 미래를 알고 있다. 폴이 할아버지처럼 약자를 존중하고 차별을 멀리하고 불의에 분노하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조언대로 “남자답게 맞서며” 살 수 있을까.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인생은 불공평해. 행운이 찾아오면 감사해야 해.”라고 자조하면서 자신을 지키기도 급급한 세상에서 말이다. 조금씩 비겁해진 세상은 이윽고 고개 숙이고 침묵하며 각자도생 하는 지옥이 되었다. 계급의 사다리에서 추락할까 전전긍긍하는 개인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탓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투사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침묵에 저항하는 걸 실패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세상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영화가 아니다. 망각에 맞서,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하는 영화다. 할아버지가 살았고, 믿고, 꿈꿨던 낙원은 이제 없다. 다시 온다해도 그것은 할아버지가 겪었던 낙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낙원을 부활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지옥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옥에서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내게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린 것처럼 들린다. 영화는 말한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주어진 삶을 단지 받아들이는 거야. 뒤돌지 말고.” 이것은 유령의 목소리다. 유령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옆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유령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축적된 현재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뒤돌지 말라”는 영화의 속삭임은 타협도 낙담도 포기도 아니다. 내가 나로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언젠가 다음 세대를 이어받을 너의 손을 놓지 않고, 기꺼이 유령이 되어 이 폐허 속을 함께 걷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유령과 함께 오늘까지 생존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최근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한 재주꾼 중 한 명은 알폰소 고메즈-레존이다. 두 번째 장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로 2015년 선댄스 드라마 부문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NYU(뉴욕대)와 AFI(미국영화협회)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1990년대 초부터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컨드 유니트 디렉터로, 혹은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아니면 연출부의 일원으로 그가 ‘모셨던’ 감독들의 명단은, 혹시 이 사람에게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히 쟁쟁하다. 마틴 스코시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라 에프런, 시드니 루멧, 마이클 만…. 최근엔 벤 애플렉 감독의 < 아르고 >(2012) 세컨드 유닛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였다, 시작은 TV 시리즈였고 < 글리 >(2009~15)나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011~ ) 등에 참여했다. 2014년엔 드디어 첫 장편영화 <일몰이 두려운 마을 The Town That Dreaded Sundown>을 내놓는다. 전형적인 슬래셔 호러 장르에 나름의 스타일과 플롯 비틀기를 가미했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서 그는 환골탈태한다. 제시 앤드류스의 첫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적 전형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과 비주얼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몰이 두려운 마을>과 유사한 방식의 시도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깊이와 캐릭터의 매력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틴에이저 장르 안에서 이토록 유쾌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작은 기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나’인 그렉(토머스 만)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이스쿨 졸업반이 된 그렉. 그는 8년째 투명인간처럼 학교 생활을 해온, 거의 모든 성향의 집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게 말하면 친화력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색깔 없는 ‘왕따’나 마찬가지인 십대다. 유일한 친구는 얼(알제이 사일러)이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둘의 공통점은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영화사를 아로새긴 걸작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패러디)한다. 역사 교사 매커시(존 번탈)의 방에서 빈둥대거나 영화 찍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올리비아 쿡)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할리우드 틴에이저 무비는 겉으로는 얄팍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찰적인 장르다. 십 대들의 불안한 삶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저항으로 치닫고,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때론 힘겨운 운명의 짐을 지기도 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친구, 연인, 교사, 부모 등의 한정된 캐릭터로 이뤄지지만, 이 제약적인 토대 위에서도 틴에이저 무비는 매우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도 마찬가지다. 전반부가 제법 발랄한 톤의 루저 코미디를 통해 십 대들의 냉소적 불안감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어른스럽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가면, ‘쿨’하게 시작해 점점 온도를 올렸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런 드라마의 힘은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과 ‘나’ 그렉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하이스쿨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가는 관문인 졸업반 시기. 레이첼은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렉은 그 어떤 꿈도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불운한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첼의 백혈병이다. 그렉은 “가서 친구가 되어 주라”는 엄마(코니 브리튼)의 말에 못 이겨 레이첼의 집에 갔고, 어색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어느덧 졸업반 내내 이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렉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레이첼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욱 절박한 상황에 처한 레이첼이 그렉의 삶을 채찍질하고 이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그렉 대신 대학 입학처에 편지를 보내고 그를 격려한다. 하지만 그렉은 오히려 레이첼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그렉은 조금씩 껍질을 깨나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러한 성장 영화의 측면이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의 진지한 얼굴이라면, ‘나’ 그렉과 ‘친구’ 얼이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은 시네필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엔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된다. 그렉과 얼은 역사 선생 방에서 컴퓨터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 피츠카랄도 >(1982)에 대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인 < 버든 오브 드림스 >(1982)를 본다. 그렉의 아버지(닉 오퍼맨)도 헤어조크의 팬으로 < 아귀레 신의 분노 >(1982)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렉의 방엔 프랑소와 트뤼포의 < 400번의 구타 >(1959) 포스터가 붙어 있으며, 그는 실의에 빠졌을 때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렉이 얼과 함께 만드는 영화들의 제목들 역시 가관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에서 모티브를 얻은 <일곱 마리 물개 The Seven Seals>에선 기사와 죽음의 사자가 황당한 체스를 둔다(‘seal’엔 봉인과 물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이클 파웰의 ‘엿보기’에 대한 범죄 영화 <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1960)는 <똥싸는 톰 Pooping Tom>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은 뚫어뻥의 공격을 받는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가 <양말장치 오렌지 A Sockwork Orange>가 되고, 데이비드 린치의 <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이 <원숭이 맥주 Brew Vervet>가 되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1971)이 <테니스장에서의 죽음 Death in Tennis>이 된다. 과거 8mm 시대 영화광을 연상시키는 그렉과 얼의 이러한 ‘영화 장난’들은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전작인 <일몰이 두려운 마을>에서도 ‘영화 속 영화’의 컨셉트로 연쇄살인극을 구성했던 고메즈-레존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화 유희적 본성을 드러내며, 그 기발함과 유머는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 있는 루저 스타일 틴에이저 무비를 활기 찬 소동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는 결코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 순간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렉과 얼은 태어나 처음으로, 기존에 있는 영화를 비트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창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바로 레이첼을 위한 영화다. 그러나 ‘진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곧 난항을 겪고, 결국 얼이 그만 둔 상태에서 그렉 혼자 영화를 완성한다. 병원에 있는 레이첼과 그렉이 그 영화를 함께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여기서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장면이 환기시키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 이상이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는 현재 할리우드 틴에이저 장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이다. 관객과 대화하듯 진행되는 내레이션, 별나면서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 묵직한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연스레 결합하는 솜씨 등 이 영화는 많은 영화적 미덕을 지녔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아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피상적으로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잖아?”라며 대충 얼버무리며 끝나는 청춘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사족 하나. 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카메라 워크가 궁금해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봤다면, 우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Cinematography by Chung-hoon Chung’. 맞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바로 한국의 정정훈이다. 박찬욱 감독과 < 올드보이 >(2003)부터 호흡을 맞추었고, < 스토커 >(2013)로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솜씨를 인정받았고,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인 < 블러바드 >(2014)에서 우울하고 정적인 촬영을 선보이더니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선 마치 날개를 단 듯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비주얼들 역시,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서부에 선 사나이 존 포드의 < 수색자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이든(존 웨인)은 왜 끝까지 가야만 했을까? 가족을 무참히 살육한 인디언에 대한 복수는 서사의 표면적인 이유만 될 뿐이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그와 함께 추적에 나섰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버리고 그는 철저히 혼자만의 여정을 지속한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서부를 횡단하고 때로는 여러 인디언 부족들과 맞닥뜨리지만 정작 이 영화가 목도하는 것은 개인에게 투영된 서부라는 거대한 공간과 19세기 중엽의 미국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붕괴하고 파괴된 한 사나이의 황폐한 내면이다. 그래서 종종 불모한 서부를 포착하는 익스트림롱쇼트들은 객관적 풍경 쇼트로서가 아니라, 그다음에 제시되는 이든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의 클로즈업을 부연하는 심리적 쇼트로 전화한다. 결국 <수색자>는 파괴된 사나이의 황폐한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적 스릴러로 다시 읽힐 수 있다. 여기서 이든이 왜 집착적이고 광적으로 복수의 추적을 계속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종종 서부 사나이 특유의 ‘명예율’로 응답된다. 자신의 법과 숙명에 충실한 사나이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저 예정된 운명으로 치닫는 단독자들. 세상의 질서와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에 충실한 소통불가의 사나이들. 현대 영화에서 이를 가장 흥미롭게 계승했던 캐릭터는 의외로 코엔의 ‘안톤 쉬거’였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그는 서사의 초반에 부과됐던 행동 명령(돈 가방을 둘러싼 청부)이 무화된 이후에도 살육을 계속한다. 때로는 그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는 숙명처럼 자신의 명예율, 자신이 내뱉은 언어에 충실하기 위해 끝까지 간다. 이는 흡사 이든과 닮아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코엔 형제의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따로 존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 가장 충실한 캐릭터로서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마을 보안관 ‘벨’이다. 은퇴를 앞둔 이 노년의 보안관은 쉬거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쉬거가 이든처럼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회피하지 않고 질주하는 단독자였다면, 벨은 그의 흔적들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 삶의 무력함을 읽어내는 존재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벨의 공포와 두려움, 주저와 회피에 대한 욕망은 단순히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삶을 지속해 온 노인의 경험과 혜안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그려진다.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하는 노년의 보안관 벨은 삶의 불모함과 우발성, 공포와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함을 아는 인간으로 형상화된다. (이는 이스트우드의 노인-현자의 캐릭터와는 대별된다) 표정의 웨스턴 토미 리 존스는 얼굴의 미장센이 가능한 배우이다. < 수색자 >에서 장엄한 모뉴멘트 벨리보다 중요한 쇼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 웨인의 근심 어린 얼굴-이미지, 클로즈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어떤 풍경이나 소품을 동원한 미장센보다도 심연의 깊이를 지닌 얼굴의 불가해 한 이미지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미장센을 형성하곤 한다. 이것은 젊고 아름다운 배우들의 클로즈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년의 배우들, 영화의 역사 속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새긴 배우들의 역사, 그들 얼굴의 주름과 표정이 겹쳐질 때, 그 얼굴 이미지들은 영화의 주제를 응축하는 쇼트가 되기도 한다. < 용서받지 못한자 >(혹은 < 스페이스 카우보이 >)에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그랬고, < 웨이 백 >에서 에드 해리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혹한의 시베리아 풍경의 잔혹함보다 에드 해리스의 얼굴 이미지 한 컷이 더 많은 삶의 공포와 고난을 설명한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토미 리 존스는 삶이 두렵고 불가해 하지만, 비록 주저할지언정 회피할 수 없음을 아는 노인이다. 그래서 그는 한발 늦더라도 그 자리(서사의 자리, 사건의 자리, 숙명의 자리)에 끝까지 가야만 했던 인물이다. 그 자리들은 언제나 죽음을 둘러싼 자리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의 형상, 혹은 죽음이 벌어지는 결정의 순간, 또 혹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는 숙명의 순간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토미 리 존스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배우-캐릭터의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이는 이후 자신이 연출하게 되는 일련의 영화 속 죽음과 캐릭터와도 닮았기 때문이다. 과거로의 횡단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한 첫 번째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2005)이었다. 멕시코 국경 지역에 사는 미국 농장주 피트 퍼킨스(토미 리 존스)는 자신이 고용한 불법 이주노동자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자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멕시코 불법 이민자인 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고 묘비명도 없는 곳에 묻어버린다. 이에 피트는 홀로 범인을 잡아선 멜키아데스의 시체를 파낸 뒤, 멜키아데스가 고향이라고 말했던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와 닮았다. 시간적 배경은 현재지만,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으로 설정된 이 풍경 쇼트들은 흡사 19세기 중엽을 배경으로 하는 황폐한 웨스턴의 풍경처럼 보인다. 국경을 가르는 경계들, 인종적 갈등들, 국가의 논리와 개인의 논리가 충돌하는 이 영화적 공간은 오롯이 현재의 미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정복의 논리, 살육의 논리, 탈주의 논리를 반영한다. 범인이자 백인 국경수비대원인 남자를 불법으로 납치한 피트는 헬기와 자동차로 추격해오는 경찰 당국의 추적을 따돌리며, 서부 사나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멜키아데스의 시신을 실은 말을 타고 멕시코로 넘어간다. 그러나 흡사 과거(서부시대)로의 횡단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서부극과 달라지는 지점은 피트의 여정이 무엇에 의해 추동되는지 납득할 만큼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 수색자 >에서 이든은 자신의 명예율과 숙명에 의해 끝까지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여정과 결과(조카를 되찾아 마을 공동체에 되돌려 놓는 것)는 공동체가 수긍할만한 최소한의 명분이나마 획득한다. 그러나 피트의 기이한 여정은 다르다. 간혹 제시되는 플래시백들은 피트와 멜키아데스가 과거 단순한 고용주-고용인 관계가 아니라 우정 이상을 쌓은 친구였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의 리듬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종종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연기들, 특히 죽어버린 시체를 산 사람처럼 여행의 동반자로 삼은 뒤, 시체의 썩어가는 얼굴까지 닦아가며 애정을 쏟아 붓는 행위는 흡사 시체애호증이거나 자신만의 제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로드무비 혹은 웨스턴과 닮아 있는 이 영화는 여정의 끝에 기존 장르가 충족해주는 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 여정은 피트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치유하지도, 새로운 삶을 약속해주지도 않았다. 그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는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제의를 완수하고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매혹은 그 설명되지 않은 모호함과 끝낼 수 없는 여정의 지속에서 발생한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의 주요 작가 영화들이 드러내는 상실감, 인과론의 실패, 불안과 공포의 정서들이야말로 고전적 서사의 충족 욕구를 외면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서 등장했던 것처럼,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들은 행위와 감정의 객관적 설명을 거부한다.(가령 포스트 9.11 이후의 재난 영화, SF 영화들에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의 인과론들. 영웅의 부재, 실존 그 자체의 불안 등) 과거의 사나이 그리고 서부의 여성들 토미 리 존스의 두 번째 영화 < 더 홈스맨 >(2014)(이 영화 역시 올해 칸 영화제 경쟁에서 소개됐다)은 흡사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의 후속편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전작의 피트는 이 영화에서 ‘브릭’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정말로 서부 시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황폐한 서부를 횡단하고 있으며, 역시나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그 여정을 끝까지 완수해내고, 여정이 끝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정박할 수 없고, 삶 앞에 무력하며, 또 다시 불모의 땅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더 홈스맨 >은 ‘개척의 시대’ 혹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유럽 이민자들이 북아메리카 서부 정복을 정당화하는 용어)이라 칭했던 제국의 논리가 지배했던 시대를 횡단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초반을 지배하는 캐릭터는 힐러리 스웽크가 연기하는 ‘메리 비 커비’이다. 삼십 대에 접어든 그녀는 홀로 자신의 땅과 가축, 집을 지키는 강인한 여성, 노동하는 여성, 무엇보다도 ‘결혼하지 못한’ 여성이다. 그러던 중 자신이 속한 마을 공동체 여성 세 명이 고단한 삶에 지쳐 광기로 치달아 버린다. 남편의 학대와 강간 속에서 미쳐버린 여성, 황폐한 서부에서 극도의 빈곤으로 내몰린 여성, 출산한 아이들 모두를 질병으로 한꺼번에 잃어버린 여성. 공동체와 남자들은 이 여자들을 처분(!)하기 위해 치료라는 명목으로 그녀들을 모두 동부의 한 마을로 보낼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무려 5주나 소요될 그 횡단의 여정을 책임지겠다고 선뜻 나서는 마을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메리 비 커비가 그 여정의 책임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여성을 불신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곱지 않지만, 아무도 그것을 대신하고 싶지 않기에 그 모든 고난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고 만다. 이 영화 < 더 홈스맨 >은 명백히 여성들에 관한 영화이다. 올해 칸 영화에 인터뷰에서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에 페미니즘의 프레임을 적용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를 많은 기자들이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장르’적 틀로 한정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제국주의에 관한 영화, 페미니즘에 관한 영화, 미국 역사에 관한 영화”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길 원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철저히 외면한다. 대신 그는 서부극을 우회하며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고전적 서부극의 공간과 시간, 사건과 인물들을 거부하고 그 결을 거스르며 새로운 19세기 미국의 풍속화를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서부극을 탈신화하고 19세기 미 제국주의가 자행했던 그 내부의 민낯을 배치한다. 영화는 고전적 서부극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부에서 서부로 나아가는 것(팽창과 정복의 논리)이 아니라, 서부에서 동부로 거슬러 횡단한다. 극 중 네브래스카의 황폐한 자연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동부 아이오와의 도시로 향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사의 생존을 위한 역주행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서부극에서 배제된 여성의 위치를 재정립한다. 엄마와 창녀라는 이분법으로 재단됐던 고전적 서부극의 존재감 없던 여성들은 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남성 지배와 착취의 논리, 혹은 위선적인 종교의 논리 속에서 사멸해 갔는가에 집중한다. 이 영화의 초반 미니멀하게 촬영된 영화적 쇼트들은 혹독한 자연과 남성들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학대당하는지를 몹시 처연하면서도 섬뜩하게 그려낸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이 크리스 멩게스(켄 로치의 오랜 촬영 감독)의 카메라에 의해 멕시코 접경 미국의 풍경을 황폐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그려냈다면, 이 영화 < 더 홈스맨 >은 오히려 사건의 처연함과 공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듯 아름다운 이미지 수사학으로 배치한다. 로드리고 프리에토(주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를 촬영했던 감독)의 프레임은 토미 리 존스와의 협의하에 조셉 알버스(Josef Albers), 도달드 주드(Donald Judd)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영화로 재현했다. 가혹한 현실의 풍경들, 현실과 환영의 기이한 공존 속에 속박당한 여성들. 잔혹하지만 처연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들의 존재. 그 속에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개척자들의 빈곤한 집 혹은 인간 군상. 광포한 폭력과 비참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기이한 몽타주를 형성한다.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 조지 브릭은 이때 등장한다. 무단으로 한 집을 점유하다가 마을 남자들에 의해 처형당할 뻔 한 그를 커비가 우연히 발견해선 구해주는 대가로 이 여정의 수행원이 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얼핏 야비하고 희극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는 충분히 탈주할 수 있는 무수한 순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험난한 여정 동안 커비의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여성들을 보살핀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에서 시체를 목적지에 끝까지 가져가야만 했던 피트처럼 이 영화 속 브릭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의지로 역시나 끝까지 간다.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무덤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은 제목에서부터 세 번의 장례, 즉 매장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멜키아데스는 단 한 번 죽었지만, 제의는 진정한 애도가 종결될 때까지 피트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비록 여정의 마지막 순간, 피트는 진심이라 믿었던 멜키아데스의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상의 고향을 설정한 뒤 장례를 올린다. 그를 움직이는 것 혹은 그의 욕망은 현실적인 질서와 명령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만이 종결지을 수 있는 애도의 이상적(비현실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정, 애도의 제의는 동시에 대단히 정치적인 풍속화이기도 하였다. 국경과 인종, 탈주와 추적, 제국과 식민의 논리 속에서 무수한 폭력과 죽음들이 발생하고 방치된다. < 더 홈스맨 > 역시 그러한 역사적 알레고리를 형상화하는 여정으로 향한다. 제목의 역설, ‘집으로 데려다 주는 남자’가 아니라, 애시당초 이 영화 속 모두는 멜키아데스처럼 집도 고향도 불분명한 존재들이었다. 여성들은 동부로 추방당하는 것이었고, 기병대 탈영병이었던 브릭 역시 그 어디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든과 피트처럼 미션이 완료된 후 또다시 공동체를 떠나야만 하는 숙명의 방랑자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 더 홈스맨 >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의 역사적 정치학, 서부의 탈신화, 페미니즘의 역사가 아니라 ‘죽음’의 표식과 그것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토미 리 존스의 제의에 관한 부분이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처럼 이 영화에도 무수한 죽음과 무덤들이 등장한다. 우선 첫 번째 죽음은 영화의 초반부에 무수하고 일상적인 것으로서 제시된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린 자식의 죽음, 혹은 광기에 의해 행해진 자식 살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끝내 사라지지 않고 그들 곁을 배회하는 죽은 자들의 유령들이 등장한다. <더 홈스맨>은 죽은 자 혹은 죽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시작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죽음이 커비와 브릭의 여행을 야기한다. 두 번째 죽음은 여정 중 발견한 인디언의 무덤에서 브릭이 시체를 감싼 모피를 훔쳐내는 장면과 그 사건 이후 바로 이어지는 백인 소녀의 무덤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브릭이 인디언 시체의 옷을 벗겨 가졌던 것처럼 소녀의 무덤 역시 인디언들이 옷을 얻기 위해 파헤친 것이었다. 커비는 여기서 여정을 잠시 중단한다. 곧고 신실한 마음을 가진 그녀는 소녀의 무덤을 제대로 수습해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브릭은 기다릴 수 없다며 여자들과 함께 먼저 떠나버린다. 무덤을 수습하고 브릭 일행을 쫓아갈 작정이었지만 사방이 황폐한 지평선에 불과한 그곳에서 커비는 길을 잃는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그녀를 태운 말은 브릭 일행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소녀의 무덤과 묘비명 앞으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반복강박증.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녀가 간신히 브릭 일행을 만나게 됐을 때, 브릭은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인디언을 대량 학살한 기병대원으로서의 과거, 추악한 과거로부터 그는 탈출하는 중이다. 세 번째 죽음은 돌연한 커비의 죽음이다. 강인하지만 결국 심리적으로 붕괴하고만 그녀는 새벽녘 낯선 숲 속 나뭇가지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브릭은 처음으로 죽음에 예의를 바쳐 그녀를 매장한다. 세 번째 죽음 즉 커비의 죽음은 그가 이제 미쳐버린 여자들과의 여행을 지속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들과 함께 동부로의 여행을 지속하는 것을 택한다. 결국 토미 리 존스는 계속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둘러싼 불모한 환경과 거역 불가능한 삶의 숙명들, 원초적인 고독과 불안들, 삶의 불가해 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 벨로부터 < 더 홈스맨 >의 브릭까지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치거나 탈주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의 길을 두려움과 회한 속에서 받아들일 뿐이다. 그들이 탈주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들이 오랜 삶을 살아왔기에 어떤 운명의 길이 펼쳐질지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벨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읊조리는 꿈 장면의 어둠 속 행렬과 불안처럼). 다만 토미 리 존스는 여기서, 죽음이 거역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 역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존재에 대한 필사의 제의이며, < 더 홈스맨 >에서 브릭이 마지막 순간에 가슴에 안고 있었던 커비의 묘비 역시, 흔적 없이 사라질 존재에 대한 기억의 의지이자 애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과 의지조차도 어떻게 세상에 의해 쉽게 붕괴되는지 혹은 지워지는지 또한 토미 리 존스는 잘 알고 있다. 만취한 브릭이 커비의 묘비를 가슴에 앉고 새로운 여정을 위해 배에 올랐을 때, 한켠에 내려놓았던 묘비는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질에 의해 물속으로 빠져버린다.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브릭의 마지막 노래와 춤사위는 그 자신의 고통조차도 감춰버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더 홈스맨>은 그렇게 사위어간 무수한 개인들, 여성들, 이제는 삶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된 가련한 노인에 대한 기억과 회한의 영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