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 감독
- 알리시아 셜슨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마누엘라 마텔리, 룻거 하우어, 니콜라스 바포리디스, 피노 캘라브레세, 알레산드로 잘로코스타, 루이지 시아르도
알모도바르의 1997년 작 < 라이브 플래쉬 >에서 빅토르(리베르토 라발 扮)와 엘레나(프란체스카 네리 扮)가 싸울 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범죄의 리허설>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 <라이브 플래쉬>의 내러티브와 영화 속 영화 <범죄의 리허설>의 장면이 묘하게 중첩된다. 엘레나가 떨어뜨린 총이 발사되자 <범죄의 리허설>의 여자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범죄의 리허설>에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마네킹이 나오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다비드가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범죄의 리허설>에서 마네킹이 불타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클라라(안젤라 몰리나 扮)가 빅토르로부터 결별을 통보받는 순간 불길에 갇힌다. 감독은 ‘범죄의 리허설’이 그 장면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알모도바르는 <라이프 플래쉬>처럼 영화 속에 다른 영화를 삽입하여 내러티브를 중첩시키고 강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예견하게 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이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미장아빔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문학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그의 1893년의 일기에서 가문의 문장(紋章, blason) 가운데에 문장의 축소판 혹은 비슷한 아빔(en abyme)을 새겨넣는 것과 같은 작법을 선호한다고 밝힌 것에서 착안, 60여년 뒤 비평가 매그니가 이 용어를 창안했다. 그리고 누보로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들의 논의를 거쳐 오늘날 예술 전반에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장아빔 기법은 작품 속에 다른 작품을 삽입하여 심연에 빠지는 효과를 주거나 상호텍스트성 혹은 자기반영성을 통해 작품의 형식을 확장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알모도바르는 <라이브 플레쉬>처럼, 영화 속에 텔레비전 화면을 비추는 미장아빔을 선호한다. 이는 프레임 속에 프레임이 생성되어 영화적 심연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므로 다른 감독들도 종종 사용하는 낯설지 않은 기법이다. 그러나 알모도바르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개성적인 이유는 연극을 삽입하여 미장아빔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 이질적이고 낯선 연극 장르를 삽입하면 관객 사고를 영화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는 연극 혹은 연극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의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그녀에게 >의 티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 페인 앤 글로리 >의 《중독》은 영화 속에 연극 장면이 직접적으로 삽입된 예다. 또한, <욕망의 법칙>,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은 연극적 세트에서 연극적 대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 휴먼 보이스 >는 장콕도의 《휴먼 보이스》를 각색한 작품이다. 감독의 정체성에 연극이라는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는 바, 그의 작품은 영화와 연극이라는 이질적 타 장르가 혼재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확립된다.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 장면에는 독일의 저명한 무용가 (故)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춤연극)가 미장아빔으로 삽입되었다. 오프닝에 배치된 《카페 밀러》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이 검정색 의자와 원탁, 회색 벽으로 가로막힌 무대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춤을 춘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남자는 여인이 달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의자와 원탁을 치우며 여인이 부딪치지 않게 보호하려고 애쓴다. 《카페 밀러》 공연장면의 롱테이크에 이어, 나란히 관람하고 있는 베니그노와 마르코의 미디움 쇼트가 연결된다. 눈을 감은 여인과 그녀를 보호하는 남성의 탄츠테아터는 코마상태에 빠진 알리시아(레오노르 와틀링 扮)와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 扮)를 돌보는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扮)와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扮)의 모티프적 형상인 셈이다. 그리고 앤딩의 배경은 남겨진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관람하러 간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의 공연장이다. 무대 위의 초록색 풀과 그 사이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리고 무용수들의 꽃무늬 의상은 생명력 넘치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남녀 커플로 구성된 무용수들의 춤은 오프닝과는 정반대의 경쾌한 분위기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듯한 두 남녀 무용수의 모습에서 관객은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연인으로 발전할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처럼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의 탄츠테아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압축적으로 암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카페밀러》 -눈감은 무용수의 길을 터주는 남성 《마주르카 포고》 -커플들의 경쾌한 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영화의 관통선을 갖는 중요한 연극으로 삽입되었다. 주인공 마뉴엘라(세실라 로스 扮)가 젊은 시절 이 연극을 하며 남편을 만났고, 남편이 떠나고 홀로 키워 장성한 아들과 함께 연극을 본 후 교통사고로 아들이 죽는다. 그리고 마뉴엘라는 연극의 스텔라를 다시 연기하며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영화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마뉴엘라에게 만남과 이별을 주는 애증의 매개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알모도바르는 연극을 활용한 미장아빔 외에도, 연극적 형식을 차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한다. 비극적 전개 속에서 발리우드식 뮤지컬이 난데없이 난입하는 < 나쁜 버릇 >이나 < 하이힐 >을 보면 당혹스럽기도 하다. 알모도바르 초기 영화가 키치의 영역에 있다고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없다면 알모도바르 영화가 아니다. 비일상적인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묘한 흥분과 긴장감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색이기 때문이다. <하이힐> 여성 수감소에서의 뮤지컬 댄스 또한, 감독은 공연이란 형식으로써 구현되는 배우와 관객, 다시 말해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로의 이분법을 연출에 활용한 것이다. <나쁜 버릇>에서 센터에 있는 키큰 금발 수감자를 뮤지컬 댄스를 통해 주목받게 하고 구경꾼들에게 그녀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게 함으로써 갑자기 내러티브에 끼어들 수 있도록 장치했다. 또한 < 귀향 >에서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부르는 《귀향》은 라이문다의 상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응축한 노래이지만, 동시에 차에 숨어 입을 틀어막고 울면서 딸의 노래를 듣는 어머니의 모습이 강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에게>에서 카에타노 벨로조가 부르는 《쿠쿠루쿠쿠 팔로마》 역시 영화 전반을 반영하는 슬픈 사랑 노래이면서 동시에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는 마르코를 위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알모도바르는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를 모두 강조하기 위해 공연 장면을 종종 활용한다. 나아가, 감독은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 집단의 전경을 비추며 마치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페인 앤 글로리>의 극중극인 《중독》 공연장면에서 객석의 전경을 비추는가 하면, <그녀에게>의 《마주르카 포고》 공연장면에서 관람 중인 객석을 비춘다. 그밖에도 감독은 크고 작은 이벤트를 관람하는 집단의 모습을 영화에 삽입하곤 한다. <페인 앤 글로리>- 《중독》의 관객 <그녀에게>- 야외공연의 관객 감독은 관객 집단 쇼트에서 오히려 공연하고 있는 퍼포머를 측면에 위치시키고 관객의 모습을 전면에 배치한다. 영화를 관람하던 나는 관객들의 모습을 나와 동일시하며 별안간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쇼트의 주인공은 퍼포머가 아니라 관객 그리고 나다. 감독의 시선만을 쫓아야 하는 고독한 개인이었던 영화의 관객은 공연장의 관객 집단 쇼트로 인해 역동성과 시점의 자유를 제공받게 된다. 퍼포머에게 맞추어져 있던 포커스가 아웃 되고 확장된 시선을 따라 다른 관객들을 자유롭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매체적 제약은 파괴된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가 결코 실제로 만날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들이 만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연극적 현장성을 고조시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장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연극을 잘 알고 쓰는 알모도바르의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단일 장르만 사용하지 않고 연극과 연극적 형식을 활용하여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선보이는 알모도바르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혹여 그의 신작에 낯선 연극이 삽입되었다면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미장아빔으로 활용했는지 그 연극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와 연극의 레이어를 통해 스스로 의미의 퍼즐을 맞추며 영화를 200%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연극적 형식이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한다면 그저 이질적인 느낌 그대로를 새기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즐겁게 탐험하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다음 편은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마지막 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이 연재된다. 많은 관심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베킷과 베케트, 서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두 이름의 철자는 Beckett로 동일하다. 베킷은 누군가의 이름, 베케트는 누군가의 성이다. 성의 자리에 놓이든 이름의 자리에 놓이든 사람들은 그를 베킷 혹은 베케트라 부른다. 영화 <베킷>의 주인공은 베킷이다. 문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풀 네임이 궁금해졌다. 베킷이라는 이름과 어울릴만한 성은 아무래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연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도, 낯선 미국 대사관 직원도 그를 베킷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은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닉네임처럼 베킷이라는 두 음절로만 이뤄진 것 같다. Beckett은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뮈엘 베케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줄여 부를 때는 베케트라고 지칭한다. 베케트가 영미권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2021)를 보면 미루어 알 수 있다. <X 파일>의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을 연기하며 특별 출연한 에피소드에서 베케트의 이름은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유명 배우인 듀코브니는 교수직를 얻기 위해 오래전에 쓰다만 박사논문을 유물처럼 발굴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케트에 관한 논문이다. 이는 예일대 영문학과 박사학위를 밟던 듀코브니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수들에게 관대한 제스처를 보이던 학과장 김지윤(산드라 오)은 듀코브니와 그의 화석과도 같은 관심사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몰차다. 초서를 향한 조앤(홀랜드 테일러)의 오랜 애정이 ‘힙한’ 것으로 재발견되었던 것과는 달리 베케트는 듀코브니와 함께 유행이 지난 이름이 되어 조용히 퇴장한다. <베킷>은 마치 고대 유적지 근처를 탐사하는 듯한 영화다. 두 연인이 누운 침대 곁에 놓인 메모에는 ‘신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도무지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글이 적혀 있다. 도망자 베킷이 몸을 숨기거나 달아나는 장면에서 그를 든든히 지켜주던 바위산은 현지 로케이션이 비현실적인 무대 혹은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봉하는 부부와 사냥꾼 등 베킷이 만난 마을 사람들은 어딘가 고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고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배경으로 장소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먼저 캐스팅한 뒤에 그 공간을 잘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누군가가 끊임없이 걸어서 이동하는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베킷은 추격전 도중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데, 이때 주로 공격당하는 부위는 손과 팔이다. 끊임없이 도망가야 하는 그의 운명을 알려주듯 어떤 상황에서도 다리만은 별다른 상처 없이 멀쩡하게 남겨진다. 주로 손 부위에 상처가 집중된 상황은 그에게서 운전대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손의 한계로 인해 그는 탈 것으로 이동하는 대신 두 발로 걷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 트렁크에 숨은 채 이동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한 번 오토바이를 빼앗으려 하지만, 매몰차게 밀린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탈 것을 빼앗는 것쯤은 절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카체이싱 혹은 공중전 같은 속도에 바탕을 둔 추격전이 대세인 상황에서 두 다리로, 그것도 때론 손이 포박된 채 어설프게 뛰는 도망자를 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베킷>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데는 추격전이라는 장르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여행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연인을 잃은 뒤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은 추격전의 전형적인 세팅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로부터 멀리 도망친다. 어쩌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락한 오락 영화를 바랐을 관객에게 영화는 어딘가 애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넷플릭스 영화라는 모종의 바운더리 안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되는 대신 이상한 실패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베킷>은 추격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장르 영화는 아닌 조금 이상한 영화다. 이상함은 첫 장면부터 감지된다. 영화 초반 드러나는 베킷과 그의 연인 에이프릴의 여행은 어딘가 스산하다. 이 드넓은 여행지에 마치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주변에는 다른 여행객이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인은 여행객들을 몰래 관찰하면서 그들의 이름과 관계를 추측하는 둘만의 게임을 벌인다. 나는 필시 여행객과 접촉해 추측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사진을 찍은 뒤 그곳을 빠져나온다. (후에 혼자 남은 베킷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습은 초반의 에이프릴과 함께 한 게임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킷은 이제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지를 혼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식당에서도 손님은 둘 뿐이다. 가게 주인이 스치듯 카메라에 포착되긴 하지만 그와 대화하거나 접촉하는 장면은 배제된다. 식당 TV에는 훗날 베킷이 연루될 유력 정치인의 조카 실종 사건과 관련한 뉴스가 보도된다. 이것은 관객을 위한 복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베킷이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에 운명과도 같은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킷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자신을 좇던 그리스 경찰에게 발각된다. 이때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끈으로 묶인 상태가 된 베킷은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에도 얼마간은 그 상태로 다닌다. 그의 손은 기도하는 손 모양을 연상시킨다. 그의 여정이 자신의 과오로 죽은 에이프릴을 향한 일종의 길고 긴 고행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작이다. 동시에 기도하는 손은 아테네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의 슬픔과 애도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곧장 연결된다. 베킷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데모하는 군중과 합류하는 장면은 <모던 타임즈>(1936)에서 찰리 채플린이 얼떨결에 시위대의 선봉에 서는 장면과 겹친다. 찰리의 우연한 시위는 그가 파업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기에 절묘하다. 베킷의 여정 역시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졌다면 지금보다 납득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베킷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처럼 유력 정치인의 납치된 조카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운명은 우연의 다른 말이다. <베킷>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며, 다른 말로는 지나치게 운명적이다. 다시 베킷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본다. 퍼스트 네임도, 라스트 네임도, 그렇다고 애칭도 아닌 하나의 이름으로 온전한 것은 신의 이름이다. 제우스, 헤라, 아테네, 헤르메스... 이 목록에 베킷을 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베킷인가.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그 자체로 오지 않는 신을 지칭한다. 고도를 기다리던 두 주인공은 고고와 디디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두 이름을 합치면 곧 신(god)이 된다. 베킷 혹은 베케트가 신의 이름이 된다면 그 이름의 의미는 아마도 ‘어떻게든 버티는 자’일 것이다.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전 세계는 물론이고 영화계도 큰 폭의 변화를 맞아왔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났고, 그동안 얼마나 적은 수의 영화가 여성의 크레딧을 달고 생산됐는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영화계가 남성들만의 친목과 우정, 그리고 지배 카르텔 안에서 굴러왔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후 변화는 극적이라 할만하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지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나서는 영화들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도 줄어드는 분위기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전기영화 붐이다. 방사능 연구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 < 마리 퀴리 >(마르잔 사트라피, 2019), 멜버른컵이라는 경마대회에 우승한 최초의 여성을 다룬 < 라라걸 >(레이첼 그리피스, 2019), 여성의 정체성을 노래로 승화했던 호주 가수 헬렌 레디의 이야기 < 아이 엠 우먼 >(문은주, 2019),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스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을 네 배우(주로 줄리안 무어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통해 들려주는 <더 글로리아스 The Glorias>(줄리 테이머, 2019), 1960년에서 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린 영화배우 진 시버그의 이야기 <시버그 Seberg>(베네딕트 앤드류, 2019), 어린 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주디 갈랜드에 관한 < 주디 >(루퍼트 굴드, 2019) 등이 실존했던 굵직한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 전기영화다.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을 그린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은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두 여성과 폭스뉴스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일체화한 가공의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며, 1970년 미스 월드 대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여성들의 < 미스비헤비이어 >(필리파 로소프, 2020)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기영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Mrs. America>(크리에이터 다비 월러, 연출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엠마 아산테,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자니크자 브라보, 2020)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걸출한 인물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옴니버스 전기영화'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기영화/ 드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을 통해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온갖 제약을 뚫고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인공을 다루거나(<마리 퀴리> <라라걸>)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담아낸다(<아이 엠 우먼> <더 글로리아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미스비헤이비어> <미세스 아메리카>). 상당수가 여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 깊다. <라라걸> 같은 경우 여성 스태프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들 여성 전기영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생산 방식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수산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 미스 마르크스 >도 여성 전기영화다. 이 전기의 주인공은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1855~1898)다. 그 옛날 마르크스주의를 익혔던 사람들조차 채 알지 못했겠지만, 엘리노어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중후반 온갖 분야에서 열렬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55년 런던에서 카를과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의 일곱째 아이(이중 넷은 사망했다)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사회주의 신동’의 면모를 드러냈다. ‘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자본론> 저술을 도왔고 16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여러 투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성인이 된 뒤로 그녀는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최초의 여성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도 올랐다. 또한 맹아 단계에 있던 여성운동에서도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었다. <미스 마르크스>는 엘리노어 생애의 후반기인 1883년부터 1898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카를의 장례식식장에서 시작된다. 이 첫 시퀀스에는 이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모든 인물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카를부터 그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미 사망한 큰 언니 예니첸의 남편 샤를 롱게와 아들 조니, 또 다른 언니 라우라의 남편 폴 라파르그,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엘리노어의 사랑이자 원수가 되는 에드워드 에이블링까지. 이들 인물을 담은 영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는 운동가 엘리노어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속히 퍼져감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적 계승자는 절친 엥겔스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유산 관리권을 물려받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됐던 엘리노어 또한 이 '운동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엘리노어가 여러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습을 직접 화법으로 보여준다. 엘리노어가 <자본론>의 자본 축적 법칙에 관한 구절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읊는다든지 당대로선 매우 급진적이었던 여성 평등에 관한 연설 장면을 꽤 길게 편집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바가 19세기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두 번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카를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했던 데무트에게는 프레데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무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엘리노어는 여자 관계에선 방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엥겔스가 프레데릭의 친부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엥겔스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엘리노어는 혼란에 빠진다. 또한 언니 예니첸이 사망한 뒤 자신이 돌보고 있던 조카 조니가 아버지 롱게에게로 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축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질적 남편 에드워드 에이블링과의 이야기다. 엘리노어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당대의 틀을 깨는 파격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마르크스 가문이나 엘리노어 마르크스에 관한 대다수의 전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에게 아킬레스의 건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곳곳에 설파한 운동가로 기록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낭비벽과 쉴 줄 모르는 성편력으로 엘리노어의 삶을 자글자글 갉아먹었다. 이 영화에는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에이블링은 미국 유세여행에서 고급 와인과 꽃을 마음껏 질러대며 비용을 낭비해 이들을 초청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노어가 물려받은 유산 또한 펑펑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노어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링을 신뢰하려 애썼고 그것이 그녀 삶 최대의 불운이었다. 영화는 가뜩이나 힘겨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나날을 살아가던 엘리노어가 아버지의 과거사에 배신당하고 에이블링에게 연달아 결정타를 맞으면서도 분투하지만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사실, <미스 마르크스>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을 그려서인지 영화는 순간순간 에피소드를 단순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운동가로서의 엘리노어 보다는 한 남성과 가족 관계에 휘둘리는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며, 워낙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풍부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감독은 나름의 '필살기'를 보여준다. 한때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던 전설적 가수 니코가 1980년대를 맞아 독자적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린 여성 전기영화 < 니코, 1988 >(2017)로 데뷔한 수산나 니키아렐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전기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기영화의 한계라 하면 실재했던 인물의 삶이라는 굴레에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니키아렐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영화적 삶'을 부여하려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후반부 엘리노어가 펑크록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과 버젓이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성과 결혼한 에이블링을 보는 괴로움에 둘러싸여있던 엘리노어는 이 장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도록 몸을 마구 내던진다. 어쩌면 진혼 의식이나 살풀이와도 같은 이 장면을 통해 니키아렐리 감독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순간의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 한 장면은 앞서 언급한 여성 전기영화보다 이 영화가 한 발 앞선 지점이며, 어쩌면 이 지점이 앞으로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P.S. 영화 속 ‘살풀이 의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국 밴드 다운타운 보이즈 Downtown Boys의 음악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서 사용된 'Waves of History'부터 엥겔스가 사망하는 장면 직후에 흘러나오는 '인터내셔널가 L'Internationale'까지 여러 장면에서 곁들여지는, 좌빨 성향 농후한 이 미국 밴드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어릴 적부터 "Go Ahead"라는 인생의 모토를 갖고 살아온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