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가의 두사람
- 감독
- 호세 지오바니
- 제작년도
- 1973
- 출연
- 알랭 들롱, 장 가뱅, 밈시 파머, 미셸 부케, 제라르 드빠르디유, 빅토르 라누, 세실 바소, 일라리아 오치니, 귀도 알베르티, 말카 리보우스카, 크리스틴 파브레가, 로버트 카스텔, 알버트 오기어, 모리스 베리어, 폴 보베, 게이브리얼 브리앙
한 번 쯤은 달리기를 해봤을 것이다. 운동회의 릴레이든, 체력장의 오래달리기든 하다못해 트레이드 밀을 달린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흡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바통을 움켜쥔 채 단박에 내달렸을 것이며, 오래달리기를 할 때는 앞으로의 거리를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정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삼켜서도 너무 빨리 내뱉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호흡이 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 성긴 듯 급박한 호흡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가지 흐름의 호흡을 통해 방콕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살인극을 그린다.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성긴 호흡과 감정적 이음새로 이뤄진 액션의 급박한 호흡이 바로 그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밀히 따져 영화는 극을 견인하는 치밀하고 뚜렷한 개연성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개연성은 부족할지언정 분명 존재하며 그가 진정 필요한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정보를 전하는 영화의 흐릿한 흐름이 전략적 호흡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을 따라가는 내내 이야기의 명확한 인과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인남(황정민)’이 왜 하필 일본으로 떠났는지, 어쩌다 암흑가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복수의 원인이 되는 ‘영주(최희서)’와 과거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남의 대사와 엘리베이터 속 단 하나의 총격 씬만이 둘의 과거를 압축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인남은 그저 시간이 흘러 영주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과 그녀의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음을 듣고 방콕으로 향한다. 인남의 대척자 ‘레이(이정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이는 인남이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남을 쫓는다. 형제의 과거가 간략히 언급되긴 하나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흘러가는 줄곧 맹목적 복수의 이유를 뒷받침할 형제의 우애나 연인의 사랑 더 나아가 조명될 법한 인남의 부성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만이 복수를 헐겁게 부여잡을 뿐 복수를 담아두는 줄거리의 개연성과 호흡은 다소 느슨하고 성겨 보인다. 이는 영화가 복수극이 아닌 살인극으로 전환되는 이유기도 하다. 더하여 이런 전개에 앞서 느슨한 개연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영화적 전환을 뒷받침한다. 치밀한 복수의 이유와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영화는 호쾌하게 질주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족한 개연성은 극을 이끄는 하나의 주요한 호흡으로 거듭난다. 이는 급작스레 시작되는 복수의 긴장감을 내뱉는 날숨의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터 몰아쳐 올 액션의 시작을 전제하는 주요한 바탕으로서 영화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개연성의 필요를 물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듬성하니 채워진 복수의 뒤를 짚어 가던 관객은 점차 희미해지는 복수 대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는다. 바로 인남과 레이의 쫓고 쫓기는 액션 활극이다. 사실 이런 영화적 변환은 복수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장소가 방콕으로 옮겨온 뒤 인남은 복수의 단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고문하며 살해하지만 결국 영주의 복수라는 근원에 닿지 못한다. 레이 역시 인남을 향한 살의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즉 이들의 파괴 행위는 곧 복수라는 행위의 파괴이다. 결국, 관객과 두 인물이 새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파괴 행위를 호쾌한 액션으로 재생하며 이전의 헐거운 개연성은 오히려 복수를 벗어던질 장점이 된다. 아이만은 살려 줄 수 없느냐 말하던 인남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쫓아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인남이 레이에게 전하는 대사이다. 이는 곧 영화의 내적 전환을 확언한다. 관객은 레이에게 향하는 인남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의 목적성이 변화하였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초반 영주의 복수와 아이의 행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인남에게 새로운 목적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자 내러티브적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연인의 복수(그 이유 역시 확실치 않고 불친절한)를 성긴 호흡으로 채워 왔다. 남은 시간 앞으로 내달리기에는 그 이유도 호흡도 부족하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기에 인남은 복수가 아닌 살인을 선언한다. 자신과 작은 아이의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힘든 곳에서 그는 인간의 살인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인남과 레이의 싸움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변화했고 헐거운 복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피 끓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호흡의 매개는 무엇일까. 둘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영화는 분명 그 원동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힘을 잃었다고 해도 단지 그렇게 둘 수 없음만은 분명하다. 벌어져 가는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는 것은 바로 인남과 레이 두 주인공이 내뿜는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점차 벌어져가는 복수를 접합시킬 아교이자 호흡이다. 이들이 가지는 맹목적 살의와 파괴성은 피를 연료로 삼아 영화를 불태운다. 하늘을 적시는 붉은 노을과 둘의 싸움으로 불타는 거리의 연기는 두 남자의 매연인 것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치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으로 달려가는 관객의 호흡을 다시 한번 정렬시킨다. 많은 대사는 필요치 않다. 둘의 눈빛과 부딪히는 육체만으로도 다소 심심했던 영화의 흐름은 활기를 띈다. 이런 영화적 흐름은 레이의 대사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는 질문에 레이는 “더 이상 이유는 중요치 않아.”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는 곧 영화적 변화를 매듭짓는 결정타이며 극의 마무리를 내정하는 한 줄이 된다. 줄곧 언급했듯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와 그 과정에서 살인과 생존으로 옮겨갔다. 두 인물은 더 이상 복수의 원인과 결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한다. 끈적한 살의를 품은 액션은 성기던 영화의 호흡을 급박하게 바꾼다. 치밀하지 못했던 복수로 비어있던 스크린의 빈틈은 이렇게 투쟁적인 들숨으로 가득 찬다. 마침내 숨은 영화의 말미 턱을 뚫고 뛰쳐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인남과 레이는 부서진 자동차 속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죽어간다. 레이의 대사가 인상 깊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인남은 레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행동도 없다. 이는 곧 인남의 긍정이자 레이의 긍정이다. 둘은 죽어가는 와중 서로의 곁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몸은 문제가 아니다. 인남도 레이도 어느새 복수의 이유를 잃은 채 그저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앉아있더라도 더는 숨을 들이마셔 달릴 힘이 없다. 달릴 수 없다면 멈춰야 한다. 성긴 호흡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이리도 빠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다. 느린 듯 성큼성큼 나아갔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거칠어져 흐트러진다. 영화가 빨라지는 만큼 거칠게 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어떤 달리기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위해 달렸든 주자는 결국 결승선에서 멈춰 선다. 복수로 시작해 살인이란 생존으로 달려갔던 인남과 레이. 둘은 단지 죽음이란 선에 멈추었을 뿐이다.
전택이 (田澤二) 선생은 영화도 다섯 편이나 연출했지만 감독보다는 배우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1958년부터 출연 짬짬이 제작을 하며 메가폰을 잡았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신파극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를 리메이크한 첫 연출작 < 애정무한 >(1958)부터 마지막 작품 < 홍도야 울지 마라 >(1965)까지 그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택이라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 망나니비사 >( 김성민 )의 참수인이나 < 춘향전 >( 이규환 , 이상 1955)의 방자 역을 기억하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뒤늦게 발굴된 광복 전의 < 집 없는 천사 >(1941), < 사랑과 맹세 >(1944)의 엿장수나 화물차 운전기사 역할을 더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전 선생으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1998년 3월 2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로부터 1년 전과 3년 전 두 차례가 된다. 처음은 그가 사는 충무로아파트(13평) 부근의 어느 다방이었고 그다음은 배우 김일해 선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자리였다. 셋이 함께였다. 장충단공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처음 본 것은 1957년 대학 2학년 때였다. 영화인들이 자주 들르던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이었다. 배우인 아내(노경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매우 깐깐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전 선생은 80대 중반에 들어선 말년에도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기억력이 또렷했다. 쇳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언어 구사도 정상이었다. 영화계에는 1935년 같은 해에 출발했으나 네 살 위인 김일해 선생에게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노령이라 몸이 불편한 데다 말이 어눌한 그가 기억이 흐려 말을 더듬을 때는 언성을 높여 바로잡아주곤 했다. 아무튼 그때 전 선생이 들려준 회고담에 따르면, 나운규의 < 아리랑 >(1926)은 7권. 45분 정도의 분량으로 1권이 900~1000자(尺)였다고 한다. 영사기는 수동으로 1초당 1자반 정도 돌아갔는데, <아리랑>의 경우는 18~20코마로 돌려 속도에 따라 5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주제가 가운데 ‘풍년이 왔네’라는 대목이 ‘좋은 세상’ 곧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돼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폐병으로 기력이 떨어져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연출한 나운규 의 < 강 건너 마을 >(1935)로 데뷔하여 < 아리랑 3편 >에 출연하고 <불가사리>의 주인공으로 내정됐으나 < 오몽녀 >(1936)로 기획이 바뀌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 아리랑 >과 < 풍운아 >(1926), < 들쥐 > < 금붕어 >(1927)를 제작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사주 요도 도라조(淀虎藏)에 대해서는 경성촬영소를 운영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조차 무시하지 못한 존재였다고 언급했다. 그가 조선키네마에 앞서 본정(충무로)에 개업한 모자점 ‘요도야(淀屋)’는 아내가 경영했는데, 요도는 아라시 조즈로(嵐寬之郞, 본명 아라시 조사브로) 주연의 연극을 유치하여 황금좌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하기 2년 전이었다.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운규 에게 발탁되어 < 칠번통 소사건 > < 무화과 > < 강 건너 마을 >(이상 1935), < 아리랑 3편 >(1936) 등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여배우 현방란 (玄芳蘭)의 그 뒤 행방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나운규가 임종할 때까지 병상을 지킨 현방란은 장례식 때 참석한 전라도 출신인 애인 전씨(全氏)와 두 달 만에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말년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들과 수양딸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일흔 살이었다. 1995년의 일이다. 전 선생은 나운규의 여성관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1925년 극단 취성좌와 조선악극단을 거쳐 뒷날 한형모 감독의 < 청춘쌍곡선 >(1956)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방열 (池芳烈)의 부인 강보금 과 관련된 얘기다. 이 여자가 배우가 되고 싶어 나운규가 묵는 개성여관까지 찾아왔는데 어느새 서로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열이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와 각목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 있었던 전 선생이 일본도로 위협하여 나운규를 보호한 덕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일화였다. 전 선생은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다혈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뒷날 아내 노경희 가 < 인생역마차 >(1956)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영화에서 신문기자와 암흑가 보스로 1인 2역을 한 이향과 입술을 포개는 키스신을 연기했는데, 그는 자신이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양해 없이 키스신을 연기했다며 이향 을 찾아 충무로의 다방과 단골술집, 영화사를 찾아 나섰다. 어쨌거나 전택이 선생은 나운규 감독이 연출한 17편 가운데 열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말년의 작품 < 강 건너 마을 >로 영화계에 이름을 얹게 된다. 술장사를 하는 여자에게 빠져 남의 돈을 훔쳐 도망가는 농촌 청년 용수 역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일선 , 이금룡 , 윤봉춘 , 전옥 , 김연실 , 유신방 등을 배출한 나운규 문하의 막내 격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 청춘부대 >(1938)를 비롯한 < 성황당 >( 방한준 ), < 국경 >( 최인규 , 1939), < 망루의 결사대 >(이마이 다다시, 1943), < 출격명령 >( 홍성기 , 1954), < 실락원의 별 >(홍성기, 1957), < 돈 >( 김소동 , 1958) 등 114편에 출연하고 1966년 이봉래 감독의 < 무정가 1번지 >를 끝으로 촬영 현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돌아온 배역들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았으나 대부분 활달하고 경쾌한 것이었다.
이번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ChungmCHIMFF 2015)의 폐막작은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었던 ‘< 만추 >를 읽다’였다. 혹시 보셨는지? 나는 영상자료원에서 했던 공연을 먼저 보았다. <만추>는 네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지만 이만희 의 원본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녹음대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런 공연뿐이다. < 만추 >를 읽다, 공연 현장 이 칼럼에서 내가 맡은 역할도 필름이 사라진 영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니, ‘< 만추 >를 읽다’의 작업은 내 작업과 여러모로 겹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내 식으로 시나리오 리딩 공연의 작품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몇몇 ‘거장’의 작품들을 놓고 고민한 끝에 김기영 의 64년 작 < 아스팔트 >를 골랐다. < 하녀 >와 같은 걸작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결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낭송에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기영의 그 독특한 대사 톤을 따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후반부의 몇몇 액션은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대사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제목의 의미는 뭐냐고? 도입부의 내레이션을 보라. 여기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나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검은 거미줄과 같은 아스팔트 길위로 서로 노리고, 서로 겨누고, 아는것은 단 한사람 자기뿐일거다. 김진규 가 연기하는 김 형사가 석원근이라는 강도를 체포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이런 대사들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온다. 노파: 석원근의 어머닙니다. 형사 머리 깐 죄는 얼마나 더 받아야죠? 김형사: 공짭니다. 허나, 그 버릇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읍니까? 노파: 모두가 내 죄지요. 그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짐승보다 다 가난해서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못 먹이고 깨끗한 옷도 못 입혀 애미 구실을 못했어요. 그래, 나쁜짓을 해도 염치가 없는것 같아 채찍을 못들었어요. 김형사: 언젠가 절도로 잡힌 젊은 사람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살려달라기에 놔줬더니, 얼마 못가 살인을 저질렀읍니다. 말하자면, 내가 살인을 한 셈이죠. 그날부터 난 용서없이 죄인을 형무소로 보냅니다. 그리 사실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화지만 압축률과 속도가 엄청나다. 대화가 두 번씩 오갔을 뿐인데 벌써 김 형사가 어떤 인물인지 보인다. 김 형사( 김진규 ) 하여간 그는 20년 경력의 민완 형사이다. 범죄자를 잡은 상으로 받은 ‘양옥집’에서 아내, 애 둘과 함께 사는데 (잠깐, < 하녀 >와 공간과 설정이 은근히 비슷하지 않나?) 미국에서 과학수사를 공부하고 왔다는 인텔리 후배들에게 벌써 치이고 있다. 위의 대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체포되었던 석원근이 병원을 탈출해, 그 엘리트 후배 신 형사와 다시 잡으러 가야 한다. 석원근의 집으로 간 두 형사는 그의 누이동생인 현숙을 만나는데 김기영은 이 캐릭터에게 오좀싸개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신 형사가 현숙에게 수작거는 대사를 들어보라. 신형사: 아가씨, 별명이 오좀싸기라면서요? 현숙: 처녀 쌍통 깨는군요! 신형사: 절도를 저즐렀다면서? 현숙: 향수가 탐이 났어요. 신형사: 아--. 애인 때문에? 현숙: 몸에서 냄새가 나서요. 이동리엔 목욕탕두 없거든요. 신형사: 으-- 오좀 냄새 때문이군! 분명 신 형사는 현숙에게 호감이 있는데 이런 여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 휴, 오좀냄새 나는구나! 하하하...”라니 참 김기영 스럽게 원초적이라고 할 수밖에. 척 봐도 석원근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그의 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김기영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젊은 시절에 보았던 암흑가 배경의 30년대 프랑스 멜로드라마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 중간엔 <케이프 피어> 비슷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는 범죄자와 형사 가족의 일상 묘사가 기대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신 형사와 현숙은 데이트를 하고 김 형사의 가족 묘사도 상당히 길게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 탈출한 석원근이 현숙의 밀고로 잡히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석원근은 형무소에서 최태원이라는 미치광이를 만났다. 그는 체포 과정 중 일어난 총격전으로 아내를 잃었는데 그는 곧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그가 과연 자기 아내를 죽이고 그 사건의 상금으로 ‘양옥집’을 산 형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가 아니랄까 봐, 이 영화에서도 부동산 재산은 엄청 큰 무게를 가진다. 김형사: 양옥집이 원수다. 내가 상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처럼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때 나는 지휘자였고 내가 상금을 타고 내가 계급이 올라간것이 최태원 뿐만 아니라 세상이 내가 그의 처를 죽인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출옥한 최태원의 복수 목표가 그가 아닌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셰익스피어스러운 독백이 하나 더 이어진다.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 현실화된다면 이 대사도 한번 듣고 싶다. 김형사: 어쩌면 좋으냐! 어제까지 무서운 것이 없든 형사가 여편네를 죽인다는 바람에 고양이 머리처럼 아물아물하게 생각되고 열병을 앓고난것 처럼 내 팔의 힘을 뺏어갔다. 최태원이는 내 처를 죽이러 온다. 도망 보낼까? 안돼? 내 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순 없다. 김기영 은 김 형사 역의 김진규 이미지가 지나치게 우유부단해서 미스캐스팅이었다고 불평했던 모양인데, 이런 독백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도 그렇게 생각한 건 좀 너무했던 거 같다. 이 영화의 김 형사는 더티 해리보다 햄릿에 더 가깝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 김 형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경찰은 그를 미끼로 최태원을 잡기로 결정한다. 사방에 경찰이 깔리고 마침내 최태원은 그에게 협박 전화를 건다. 그와 아내가 ‘양옥집’ 테라스에 앉아 그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면 살인이 일어날 것이다. 정말 총격이 일어나지만 셜록 홈스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한 트릭으로 김 형사의 부인은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부인은 가출하고... 그렇다. 또 독백이다. 김형사: 처는 갔다. 처가 없는 생활, 그건 죽엄의 생활이었고나! 오늘 절실히 느꼈다. 세상에 의지했던 것이 싫거나 좋거나 내 처였다는걸 이제 생각하니 내 처에게 너무 무관심했고 너무 고생시켰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의 처는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 뒤에 벌어지는 최태원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렇게 재미있거나 설득력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 리딩에서 굳이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김 형사의 가족 묘사(“난 이제 더 못먹겠어. 배가 부르니 대통령두 부럽지 않어!” 같은 대사를 하는 형사 아들 연기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나 석원근 가족의 묘사는 건질 게 많을 것이며 여러 의미로 빵빵 터질 대사들도 많다. 그리고 김 형사 역의 배우에겐 앞으로 정복해야 할 수많은 독백들이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대사도 독백이다. “내버려 두자, 울어본 사람이...” 하지만 이것까지 다 읽어줄 필요는 없겠지. 시나리오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