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강시선생
- 감독
- 류관위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오군려, 임정영, 허관영
사진: " Larks on a String ", Národní filmový archiv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실 세계 어디엔가 있을 법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소 직설적이며 담백하게 표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상에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후에 남겨진 감정들은 온전하게 이해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채 한동안 멍때림 혹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는 한다. 내게는 영화가 이러한 감정들의 번역기이자 소화제였기에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참여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많은 파트 중에서도 왜 하필 촬영이었을까를 묻는다면, 루빼에 눈을 파묻었을 때 현실의 많은 부분과 단절됨과 동시에 주시하고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담아야 할지와 같은 형식에 대한 고민보다 내용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탓에, 가끔 나의 촬영에 영향을 끼친 영화를 촬영적으로 풀어 답을 해야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내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영화와 촬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결국 오늘날의 내가 촬영에 대해 갖는 시선이나 태도에 영향을 끼친 영화가 무엇인지, 촬영을 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헤매던 시간을 지나 촬영팀 생활을 거쳐 촬영에 대해 참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배워나가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한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2006년 겨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체코 영화제가 열렸고 당시 본 여러 작품 중 < 가까이서 본 기차 >(이리 멘젤, 1966)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소시민적인 캐릭터들과 소소한 사건들을 담아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현실을 해학으로 드러내는 방식 때문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자 연애 초보자인 밀로쉬(바츨라프 네카르시)의 역무원 적응기와 연애기, 그리고 본인과 관객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신 미소를 짓게 만들다가도 일순간 당혹감과 애처로운 감정을 모두 경험하게 만드는 감독의 스타일에 푹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이리 멘젤’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의 차기작 < 줄위의 종달새 >(이리 멘젤, 1969)가 개봉을 하였고 이 영화는 내가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살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시간을 보낼 때도 항상 마음이 향하는, 가본 적 없는 고향과도 같은 영화가 되었다. (좌) 사진: " The Power of the Powerless: Five Banned Films from the Czechoslovak New Wave: Larks on a String ", Film at Lincoln Center (우) 사진: " Skrivánci na niti ", IMDb <줄위의 종달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1948년 2월 혁명 이후 공업단지에 위치한 한 폐철 처리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은 부르주아로 찍힌 자들이 과거의 만행을 보상하기 위해 사실상 강제 동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는 곳이며 전직 철학 교수, 검사, 목수, 이발사, 색소폰 연주자, 호텔 요리사가 등장한다. 또한 이곳에는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고 노역 중인 여성 수감자들도 등장하는데, 이 두 집단의 교류를 막는 자는 집시 여인과의 결혼을 앞둔 한 젊은 간수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들과 동등한 노동자임을 강조하면서 주어진 작은 권력을 최대한 휘두르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청결'을 외치는 관리자도 등장한다. 주요 사건은 요리사 파벨(바츨라프 네카르시)이 여성 죄수 중 한 명인 이트카(이트카 젤레노호르스카)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다. 죄수라는 이트카의 신분으로 인해 파벨은 그녀 없이 당 관리자 앞에서 혼인 선서를 하게 되고 이트카 또한 감옥에서 3시간 전 그와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받게 된다. 동료들이 마련한 허름한 초소에서의 합방을 불과 몇 걸음 앞두고 파벨이 ’그'라고 불리는 당 최고직 위원의 환영 행렬에 강제로 동원되며, 둘의 만남은 잠시 유예되는 듯 흘러간다. ‘그'에게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 질문을 던지는 파벨. 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인해 행사 후 이트카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듯 사라지고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는다. 수개월이 흘러 복역을 마친 이트카. 이제 그녀는 2년 형을 선고받고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는 파벨을 기다리며 함께 할 그날을 꿈꾼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충격과 감동을 준 장면들이 있었다. 하나는 청결을 이유로 전라의 한 소녀를 목욕시켜 왔던 관리자의 행적이 관객과 또 다른 동료 모두에게 발각되는 장면이었다. 동료 또한 이 만행에 동참하는 서사 상의 귀결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더욱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영화가 초반부터 유지해 온 공간 속에서, 여러 인물과 상황을 함께 담아내는 풀숏(full shot)과 니숏(knee shot) 정도의 비교적 널찍한 숏 사이즈(shot size)를 통해 가감 없이 상황을 드러냄과 동시에 유린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클로즈업으로 강조했는데, 시공간을 압축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특정 순간만큼은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촬영하는 방식이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고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 " Skrivánci na niti ", FDb.cz (원자료 출처: Filmové studio Barrandov / 저작자: Josef Janoušek) 다른 하나는 엔딩 장면이다. 트럭에 실린 채 탄광으로의 노역을 앞둔 파벨에게 이트카가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진실과 결혼했어요”라는 대사를 던지고 갱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파벨. 냉혹한 현실 덕분에 진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철학자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등장하고 마치 아내를 향하는 듯 시선을 위로 올리는데, 이어지는 장면은 지상을 향하되 그로부터 더 멀어지는 일종의 엘리베이터 시점 숏(POV)이다. 어찌 보면 인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이은 POV라는 단순한 쇼트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점점 더 작아지는 지상의 빛의 사각형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암전되는 이 마지막 장면이 희망과 동시에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을 표현한다고 느꼈고,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희비의 양가감정이 끊임없이 교차로 밀려들며 입가에는 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고였던 기억이 난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이리 멘젤 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 특징이 느껴진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부조리를 고발하는 성격이 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자, 반대하는 자,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갈등하는 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어떤 가치 판단에 근거한 차별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듯 꽤나 담담하다. 이러한 시선과 일관된 태도들이 쌓이고 쌓여 특정 순간에 이르러 감독이 의도가 더욱 강렬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줄위의 종달새>는 감독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카메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 RECEDING WAVE: ON JIŘÍ MENZEL & LARKS ON A STRING ", Metrograph 시나리오를 받아 읽거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바라볼 때 촬영을 고민하는 나의 마음 속 어디엔가 이리 멘젤 감독의 영향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와 대상과의 ‘거리두기’의 정도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날 때 더욱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 GV 때 객석에 앉아있던 내게 정말 감사하게도 정성일 평론가님께서 쇼트 구성에 대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카메라가 인물의 감정을 앞서가지 않으려 했고 영화 후반부 영안실에서의 건우( 이한주 )와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기준으로 전후의 쇼트들을 자연스레 정리한 것 같다고 답을 했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생각하는 카메라’를 심어준 작품들이 있었기에 현장에서의 마법 같은 순간들을 잘 담아낼 수 있었고, 그 시작에는 <줄위의 종달새>가 있었다. 이제는 ‘올드의 올드 시네마’가 되어버린 영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한번 발견되기를 소망한다. 김보라(촬영감독) | 이야기와 인물을 화면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 아이 >(김현탁, 2021), < 퇴직금 >(전재연, 2021) 등 촬영.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1931년 《동아일보》(4.14.)와 《조선일보》(4.15.)에 조선영화제작연맹의 제작발표회 기사가 실렸다. 당해 4월 8일에 일어난 홍옥임과 김용주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에는 <명일의 여성>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출연과 제작진도 함께 발표되었다. 감독 및 각본 홍개명 , 각색 김서정, 촬영 한창섭 , 진행 홍찬 , 출연 나웅 · 윤봉춘 · 김연실 · 임운학 등이 제작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두 젊은 여성이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한두 달 내에 제작에 착수할 것이며 야심 차게 상해로 수출할 것이라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관련된 후속 보도는 이어지지 않았다. 홍옥임, 김용주 철도동반자살 사건 관련 《조선일보》 기사(1931.4.10.) 당시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를 보면 1923년 윤백남 의 < 월하의 맹서 >가 개봉된 이후 본격화된 조선의 영화제작이 점차 그 수를 늘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1926년 < 아리랑 >(나운규, 1926)의 전국적인 흥행으로 1927년에는 무려 14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MGM이나 파라마운트와의 특약 계약을 통해 영화를 수입하는 회사도 세워져 외화배급이 원활해졌다. 영화와 관련된 담론 역시 활발해져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구현한 영화를 옹호한 카프와 작품성이나 상업성에 주안을 둔 그룹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식한 광견(狂犬)’, ‘무지한 필님충(film蟲))’으로 날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면 세계 영화계는 발성영화의 시대에 진입하고 극장은 신기술을 도입할 새로운 자본과 혁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명일의 여성> 제작발표 기사가 났던 1931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검열이 체계화되고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개봉되고 제작된 조선영화는 그 수가 대폭 줄었다. 영화창작을 향한 열망은 여전해서 <명일의 여성>처럼 제작발표를 했지만 실제로는 아예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완성되지 못한 영화 목록이 꽤 길었다. 한국 퀴어 영화의 역사 쓰기를 고려할 때 <명일의 여성>은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제작조차 들어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만들어진 적 없는 ‘허구의 영화’다. 하지만 제작되었다면 첫 번째 레즈비언 영화로 불렸을 수도 있는 영화다. <명일의 여성>은 그런 면에서 허구의 기원, 기원 없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 허구야말로 늘 퀴어 역사와 존재에게는 실재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존재하면서도 부정당하거나 가짜와 위장으로 의심받는 섹슈얼리티, 정체성 그리고 수행. 심지어 스크린 위에 가시화될 때도 마치 없는 것이나 오점처럼 지워지는 역사들. <명일의 여성>은 시간을 특정할 수 없다. 백퍼센트 제작이 안 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영화, 그래서 영원히 제작 ‘중’인 영화.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속적으로 현재일 수밖에 없으며 어딘가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된(pervert) 씨를 뿌리는 시간 속에 있는 영화. 어제의 시간 속에 있으면서 오늘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과거라는 시간(1931년)에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기이한 시간의 모양을 갖는다(“시간의 구속Time Binds”이란 용어는 엘리자베스 프리먼[2010]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희뿌옇고 부실하고 오염되어 있으며, 현재와 미래는 부재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명일의 여성>에서 허구의 세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결코 규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규정이 필요한)유토피아’를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허구’라는 방법론으로 퀴어의 역사를 쓴다면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허구’는 그저 공상이 아니라 공통세계에 공존하는 틀을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영화의 ‘허구’에 어떤 현실감, 수용가능성, 개연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먼저 두 범주로 나눠 질문들을 던져 보자. 조건의 질문들과 상상의 질문들. - 조건의 질문들 : 당시 비극적인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빠르게 동인을 모아 제작발표를 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영화가 (아마도) 제작을 할 수 없거나 완료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여성의 동성애 소재는 신선함, 대중성, 이국성을 갖는 매혹적인 영화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이질적이고 새롭지만 거부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신문칼럼이나 잡지는 여성 동성애 ‘유행’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1930년대 잡지 <별건곤>의 ‘여류명사’들의 동성연애기 투고기사) 제대로 된 남성을 만나기 이전의 소녀들의 일시적 실험이나 정사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이성애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남성 엘리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문성교를 한다고 알려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동아일보》 1932.3.17.). 더군다나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세대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여성의 시점에서 서사가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홍옥임(21세)은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이자 음악가 홍난파 의 조카였으며, 김용주(17세)는 종로 덕흥서림 사장 김동진의 딸이자 비행사 심종익의 아내였다. 스스로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동시에 조선 최고 엘리트 집안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연인관계에 있던 노동계급의 젊은 여성들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이 있었지만 해당 사건은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만큼 더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박차민정의 『조선의 퀴어』(2018) 참고). 또한 상해 수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 주제가 그만큼 해외에서도 수용될 만한 소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소재의 대중적 매력만으로 영화를 완성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본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동인들 간에 이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 중 한편 독일의 유명 레즈비언 영화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가 같은 해 독일에서 개봉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지만 조선영화가 세계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인 크리스타 윈슬로가 쓴 극본 <어제와 오늘>을 여성 감독 레티오네 사강이 연출한 <제복의 처녀>는 1933년 3월에 조선에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변사 박창원의 녹음으로 1936년 12월 영화해설 음반이 발매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34년 《키네마 준보》에서 최고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영화의 인기에 여학교 학생들을 ‘제복의 처녀’라 부르기도 했다. - 상상의 질문들 : 실제로 이 영화가 모종의 이유로 제목을 바꿔 해당 영화인지 알 수 없게 제작되었는데 개봉을 할 수 없어 프린트의 일부가 상해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 당시 <명일의 여성>의 출연 및 제작 동인(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을 포함)에 퀴어는 없었을까? 퀴어적 관계나 정체성을 가진 제작진이 포함되었다는 상상 속에서 <명일의 여성>을 갖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영화가 실종되었거나 완료되지 못한 이유를 추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의 1930년대 버전이 될 것이다. 조선의 영화현실 뿐 아니라 당시 젊은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적 억압과 다른 여러 불만들(가부장제, 교육, 계급, 식민지적 억압 등)을 교차해 서사화할 수 있다. : 조선영화가 1930년대 이미 여성 동성애 소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연결되었던 역사와 현재 식민지 조선 혹은 경성이라는 시공간이 종종 퀴어화 되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청연 >(윤종찬, 2005),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2014), < 아가씨 >(박찬욱, 2016), < 유령 >(이해영, 2022). <명일의 여성>처럼 시간의 구속을 가진 퀴어화된 영화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도, 답하려는 욕망도 없다. 단지, 시간의 구속에 얽혀 실종되고 왜곡되고 흐릿한 퀴어 영화들의 파편 더미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경성 퀴어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계속)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해영, 2014)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은 없다’. 가끔식 남의 집 가훈을 들으면 실소가 나올 때가 있다. 가훈이란 원래 성경의 한 구절 같아 실천하기 어렵고 이루지 못할 이상향 같은 것 아닌가. 그래서 영화 ‘잠’에서 둘이 함께를 강조하며 남편과의 분리를 극도로 경계하는 아내의 집착이 처음부터 매우 불안해 보였다. 급기야 남편에게 귀신이 씌였다는 무당의 한마디에 의해 불안은 공포로 급격하게 전환되는데. 그 말이 아랫집 할아버지의 말이든 혹은 남편의 속마음이든 둘이 함께라는 말은 이제 둘 이외의 것들은 모두 제거되어야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남편의 몽유병, 아내의 불면증 남편은 잠이 들고 아내는 그런 남자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어쩐지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이란 시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유한다. ‘둘이 함께라면’이라는 가훈의 전제는 영화 시작부터 어긋나있다. 한 공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밤 시간을 공유하던 부부에게 마침내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남편이 자다가 얼굴에 피가 나도록 뺨을 긁고, 잠든 상태에서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갑자기 거칠고 낯선 사람으로 돌변한다. 더없이 편안하고 안락해야 하는 둘만의 밤이 당장 해결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하지만 몽유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내가 밤새 함께 꾸었던 악몽으로 인해 그들의 신혼집은 불길하고 뒤숭숭한 꿈자리로 바뀐다. 의사의 치료, 무당의 치유 악몽과도 같은 현실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의사는 수면장애로 진단하고, 무당은 빙의라 점을 친다. 적극적인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데, 의학은 환자의 상태를 시각화된 그래프로 제시하고 무당은 부부 사이에 보이지 않은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점을 친다. 어쩐지 의학의 이성적 치료와 무속의 영적 치유라는 극단의 처방으로 인해 부부의 불면증과 몽유병 증세가 더욱 악화되는 것 같다. 이제 남편의 잠은 현실을 더 끔찍한 악몽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아내는 펄펄 끓는 솥에 토막난 아이가 들어있는 악몽에 시달린다. 이런 부부에게 의사는 잘 듣지도 않은 약을 처방하고, 무당은 집안 곳곳에 붙일 부적을 주며 굿이 최선의 방법이라 조언한다. 애초에 몽유병과 불면증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증상에 시달리는 부부에게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은 정신과 영혼을 다루는 정신의학과 무속 외에 달리 기댈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남편은 몽유병 완치 판정을 받지만, 이번엔 아내의 편집증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각해진다. 아내는 이미 무속에 깊이 심취해 남편의 빙의를 확신한다. 남편의 연기(혹은 빙의), 아내의 프레젠테이션 이제 막 아이가 태어난 젊은 부부의 집은 방문마다 자물쇠가 걸려 있고, 냉장고는 한때 그들이 키우던 애완견이 죽어 있던 곳이다. 아기와 엄마는 욕조에서 문을 잠근 채 잠들고, 아이 아빠는 잠든 채 거실을 배회하다 아이 침대에 소변을 본다. 급기야 거실에서 귀신 쫓는 굿이 벌어지고, 온 집안이 부적으로 뒤덮인다. 그리고 기어이 일이 벌어지는데. 이때 남편이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빙의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여자가 남편에게 지금 그들의 가정이 처한 상황과 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방법이 다름 아닌 프레젠테이션이다. 남편의 몽유병과 아내의 편집증으로 인해 고조된 긴장감이 이 부분에서 와르르 무너지며 당혹감을 안겨준다. 극도의 불면증과 불안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여자가 남편(에게 씌인 귀신)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PT라니. 게다다 남편과 관객은 그 PT 속 사진 자료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집에서 귀신을 쫓는 굿이 벌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그처럼 중요한 굿 장면이 하필 PT속 사진 한 장으로 제시된 걸까. 생각해보니 앞서 냉장고에서 애완견이 발견되었을 때의 충격도 아내의 비명과 몸짓으로 전달했는데, 이번에도 남편의 몸에 귀신을 봉인하는 글귀를 세기고 무당이 굿을 하는 장면을 사진 한 장으로 갈음해버린다. 공포와 미스테리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가장 끔찍하고 강렬한 공포 이미지를 굳이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있을 터. 문득 아내가 남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과도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설득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니 남편이 직장을 관두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남편의 재능을 추켜세우고 용기를 복돋는 말로 그의 중도 포기를 막는다. 본인의 수면장애가 가족의 안위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남편이 잠깐 방을 따로 얻어 나가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을 때 아내는 가훈을 이유로 단칼에 거절한다. 대기업 사원인 아내에게 중도 포기는 지독한 경쟁 속에서 자멸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또한 기업 시스템의 통상적인 보고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서 PT는 그녀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인 대화마저 그녀가 공적인 장에서 습득한 방식으로 이뤄진 장면으로의 전환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하게 와닿았다. 아내에게 ‘둘이 함께’는 어떤 상황에서도 실천하고자 했던 개인적 믿음에 가까운 말인데, 이 또한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 아닐까. 남편 또한 아내의 광기에 가장 공적인 소통 방식으로 맞선다. 긴급한 순간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학교와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왔던 연기를 응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말처럼 남편은 진짜 빙의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기 정신으로 연기를 했든, 진짜 빙의된 상태였든, 그 또한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배우고 익힌 연기 혹은 타인이 일생에 걸쳐 사용해온 언어로 아내를 진정시키게 된다. 노인과 아파트 이 영화에서 부부의 아파트를 침범한 외부인은 아랫집 노인이었다. 물론 귀신일 수도 있고, 아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영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난해하게도) 부부의 불면증과 몽유병의 원인이 된 노인이 귀신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에 대해 끝내 밝히지 않는다. 다만 무당의 말 “개 짖는 소리 없이 애기 우는 소리 없이 둘이서만 살고 싶어”가 남편과 노인 중 누구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에 남편의 빙의(혹은 연기)를 통해 어쩌면 노인은 그 아파트란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부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노인의 딸은 아내를 볼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혼을 권한다. 남편에게 노인은 조금 더 먼 미래일지도 모르며, 아내에게 노인의 딸은 조금 더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 전형적인 공통의 삶은 윗집의 후추와 아랫집의 앤드류를 통해 드러난다. 마치 복제한 것 같은 두 반려견을 통해 윗집과 아랫집이 바닥과 천장을 공유한 것을 넘어 실은 더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서로에게 타인이란 당장 베란다와 창문 밖의 가파른 벽과 같은데, 그 단단하고 차가운 벽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신경 쓰게 된다.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벽을 통과해온 소음과 베란다 창을 타고 올라온 담배연기, 화장실 천장의 누수를 통해 타인을 감지하게 된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감정선과 억측 또한 그로부터 생성된다. 단단하게 굳은 철근콘크리트 벽과 바닥으로 인해 우리는 보이지 않고 대화하기 어려운 타인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오해하며 망상한다. 영화에서 아랫집 노인은 살아서는 불쾌한 이웃이었고, 죽은 뒤에는 광기와 공포의 원인으로 내쫓아야만 하는 악귀가 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인은 부부가 나눈 대화, 아내가 아랫집에서 발견한 흔적, 그리고 남편의 몸을 통해 빙의 혹은 연기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타인의 삶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과정이 어딘가 익숙하다. 지금 우리가 매끈하고 스마트한 콘크리트 박스 안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이웃을 규정하는 방식과 닮아 있어서다. 영화를 보다 몇 년 전에 한 어르신이 들려주신 태몽 이야기가 떠올랐다. 태몽이란 흔히 부모가 태어날 아이에 대해 꾸는 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노인들의 태몽은 이웃집에 살고 있던 어르신들이 꾸기도 했다. 한 아이의 탄생이 자기 부모와 가족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누군가에 의해 암시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때 한 아이에게 이웃의 노인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몽상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를 알고 있었음에도 영화 ‘잠’에서 무당의 한 마디에 남편의 몸에 빙의된 존재를 추적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아랫집 노인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생각의 흐름이 소름끼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꼈던 찝찝함과 다소 무서웠던 감정의 실체가 이와 같다. 인물들이 무심코 던진 말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내용과 결말을 유추하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영화를 보고나서 타인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혐오를(아내의 불안과 공포의 원인) 만든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초반에 부부의 가훈을 유독 강조해서 드러내는데, 이미 그 가훈의 ‘둘이 함께’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곳에 둥지를 튼 부부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까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 닥칠 숱한 문제 속에서도 오직 둘만 바라보고 살아남겠다는 다짐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미 두 사람은 함께 누워 각기 다른 잠을 자고 꿈을 꾸며 살고 있고, 이제 둘은 셋이 되었다. ‘셋이 함께’ 겪을 문제는 또 어떤 잠과 꿈을 불러올까. 아랫집 여자의 말처럼 그냥 다 놓고 헤어지면 그만인데 부부는 기어이 또 함께 살며 또 다른 악몽을 감내하게 되었다. 셋이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