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연
- 감독
- 이숭환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오상윤, 이자은, 장창명
[사진] 영화 <불멸의 밀사>(1947, 서정규)에 출연한 한림(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韓霖)은 <자유만세>의 김승호에 이어 해방 후 두 번째 배출된 영화배우이다. 1947년 4월 21일 우미관에서 상영된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가 그 발판이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의 이야기이다. 바로 이 16밀리 무성영화에 한림이 주연을 맡은 것이다. <자유만세>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의 특성상 전국적인 학생 단체 관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한림은 이에 앞서 김소동 감독의 <목단등기(牧丹燈記)>(1947)로 먼저 나올 뻔했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말해 준다. “해방 후 첫 걸음을 내는 전혀 새로운 신인이다. 작품에는 내월 공개 예정인 <목단등기>, 또 제작 중에 있는 <불멸의 밀사> 등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가서 일대 상경과를 마친 인텔리, 신장 5척7촌 어깨가 긁고 남성미의 넘버원!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에 딱 들어맞는다.(중략) 33세라면 늦은 감도 있지만 성격배우로서 등장하려는 씨의 배우생활은 아직도 장구하다. <목단등기> <불멸의 밀사> 양 작품의 주연인 씨는 조선의 획기적인 16밀리 탄생과 아울러 씨 역시 새로운 연기인으로서 탄생한 것은 16밀리 발전과 더불어 씨도 발전이 약속된 것 같다. 주로 연출자 김소동씨와 일을 하여 왔고 금후도 역시 김씨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씨와 관계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술 방면에 전적으로 지도를 받아왔고 일상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홍병삼, 「신성(新星)을 차저서(3)」 , ≪예술통신≫, 1947.12.7. - 1946년 ‘영화과학연구소’를 설립한 김소동이 벼른 끝에 첫 작품으로 선택한 <목단등기>는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 귀신(이정순)이 성불하기 위해 한 남자(한림)와 동침한다는 내용의 괴기물로, 중국소설 전등야화(前燈夜話)에서 소재를 빌려 왔다 .(김소동, 「나의 이력서(47) 영화편력 절정기」, ≪한국일보≫, 1982.5.20) 김소동이 녹음기사와 함께 직접 만든 녹음기로 도전한 이 데뷔작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세 살 아래의 신인을 기용한 배경에는 전공학과는 달라도 동경의 일본대학 후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골청년(현인)이 청운의 꿈을 펼쳐나가는 음악영화 <푸른 언덕>(1948, 유동일)의 보조 역할을 했으나 8년 가까이 영화와 멀어졌다. <백치 아다다>로 존재감 드러내다 활동을 재개한 것은 사극영화 <단종애사>(1956, 전창근)의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출연한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가 집중적으로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높아졌다. 그 첫 반응이 시사회장으로부터 나왔다. 미국공보원 영화과장 데일. E 하스 ( 「한국 최고작 ‘백치 아다다’」, ≪동아일보≫, 1956.11.22.) 는 “한국 농촌생활은 물론이려니와 극적 씬, 희비극의 교차 및 인간생활을 파고 들어간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가득 찬 영화로서 확실히 한국영화 최우수 작품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고 했고, 작가 이봉구( 「신영화, 이상심리의 표현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3)도 “오랜만에 보는 향토적인 서정과 날카로운 화면 정리와 이동에서 오는 정감이 영화를 성공케 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며 “이 가운데서도 한림, 장민호의 연기는 페이소스하면서 박력이 있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이청기 (「신경지의 발견, 영화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6) 역시 “대담한 터치로 아다다의 생태를 해부하고 내면세계에 파고들어 내면의식의 흐름을 극히 감각적인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라며 한림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수룡 역의 한림은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으나 생리적 조건 탓인지 머슴 성격으로는 지나치게 유약한 인텔리전스가 풍겼다”고 아쉬움도 곁들였다. [사진]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에 출연한 한림, 왼쪽은 나애심(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은 그 뒤에도 <마인>(1957, 한형모)을 비롯한 <아리랑>(1957), <돈>(김소동), <형제>(김성민), <길 잃은 사람들>(이상 1958, 김한일), <외로운 사람들>(박충현), <언제까지나 그대만을>(이상 1959, 권영순).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김성민)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이상 1960, 이봉래) 등 13편에 출연했으나 <백치 아다다> 경우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로운 사람들> 등 한 두 편을 빼고는 거의가 조연급이었다. 그 가운데는 <돈>의 김순경과 같은 단역급도 있었다. 역할에 대한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사진] 한형모 감독의 <마인>(1957)에 출연한 한림, 앞의 여배우는 이빈화 한림은 1914년 1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한정국(韓正國)이다.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비애, 실연이 담긴 감상적 인정극을 하고 싶어 했으나 그 희망이 얼마나 관철됐는지는 회의적이다. 간헐적으로 채운 12년의 배우생활 동안 대한영화배우협회 창립(1955년 4월16일)에 참여한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프랭크 보재이즈 감독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1937)를 본 후 그 주인공인 샤를르 보외이에를 좋아하게 됐다는 한림은 젊은 시절엔 주량이 거의 무한대, 담배는 ‘전매국 굴뚝처럼 코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의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계와 절연 상태에서 1994년 7월 28일 팔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영화 <돈>(1958, 김소동)에서 단역인 순경으로 출연한 한림 1. <불멸의 밀사>의 감독에 대해 『한국영화총서』를 비롯한 국내의 모든 저작물이 김명순 감독으로 기재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47년 1월 14일자 ≪예술통신≫ 2면 「영화 ‘불멸의 밀사’ 남한 로케 견문기」에는 분명히 서정규(徐廷奎) 감독으로 명기돼 있다. 필자가 유족으로부터 받은 당시의 앨범 사진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이 영화를 제주극장에서 단체 관람으로 봤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 월하의 맹세 >(1923)의 이월화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 (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 (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 (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 (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 낙동강 >(1952), < 최후의 유혹 >(1953), < 미망인 >(1955), < 교차로 >(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 처와 애인 >(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 윤인자 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 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 (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 약혼 >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 종소리 >(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 너와 나 >( 허영 ,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 은 광복 후 < 마음의 고향 >(1949)을 비롯해 < 춘향전 >(1955), < 장화홍련전 >(1956), < 그 여자의 일생 >(1957), < 마도의 향불 > < 자유결혼 >(1958), < 청춘극장 >(1959), < 장희빈 >(1961), < 성난 코스모스 >(1963), < 치마바위 >(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 화촉신방 >(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미인은 아니었다. 남성처럼 호방하고 활달했지만 달필에다 의외로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남옥 (朴南玉) 감독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내가 박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4월 20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현목 감독의 소개로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 뒤쪽에 있는 한 경양식집에서였다. 나는 그때 <일간 스포츠>의 청탁을 받고 기획 연재물 ‘인물영화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박 감독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관련 자료가 빈약해 일차 집필 대상에는 빼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그가 잠시 귀국했던 것이다. 만나고 헤어진 지 5일쯤 지났을까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엷은 미농지 넉 장에 볼펜으로 쓴 달필의 편지에는 추가 내용과 함께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표현대로 ‘일제(日帝) 교육 덕에 철자법’이 틀리긴 했지만 주요한 부분에는 삼각표시(△)를 하는 등 인상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그가 광복 전 세운 투포환 한국 신기록 수립 연도를 재확인하면서 광복 후는 백옥자지만 광복 전은 박남옥 이라고 기재하거나,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자신의 과거사 게재 잡지<신여원>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데뷔작 < 미망인 >의 스틸까지 지정하고, 이혼한 남편(방송연출가 이보라 )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리어카 이동차’를 탄 사진은 흥행 가치가 없으니 내지 마세요 하거나, 제7회(1960년) 동경 아시아영화제 때 일본배우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스냅 사진에 대해서는 “멋은 있어도 좀 건방질까?” 이렇게 타진하는 식이었다. 1955년은 6.25전쟁 복구와 함께 영화행정 업무가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고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 국산영화가 기업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해온 배우 이금룡이 별세하고 그를 기리는 최초의 민간 영화상인 금룡상(錦龍賞)이 제정돼 시상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이 탄생했다. 그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보라 원작 각본 < 미망인 >은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2월 24일 경북 경산군에서 섬유업을 하는 박씨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이미 도대회에 선발될만큼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경북여고 재학 중일때 단거리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입상했고, 1939년 제2회부터 41년까지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에 참가해 3년 연속 우승, 한국최고기록을 보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반면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다. 3학년 무렵 그는 최인규 감독의 < 집없는 천사 >(1941)를 보고 꽃 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 에게 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장차 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압력에 굴복해 미술이 아닌 가정과에 진학하게 된다. 광복 전인 1943년이었다. 정작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지거나 영화를 보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기숙사감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이 무렵 그는 성장기 여학생들의 감성을 다룬 <제복의 처녀>(레온티에 사간, 1931)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 민족의 제전 >(1936)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이 영화를 각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두 편 다 여자가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박 감독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맞서 가정과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일일신문의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영화의 길에 들어선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영화사(사장 이재명 ) 광희동 촬영소였다. 그는 거기서 뉴스 편집 일을 거들며 최인규 감독의 < 자유만세 >, 이규환 감독의 < 똘똘이의 모험 >과 < 민족의 새벽 >(이상, 1946)의 편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최은희 를 데뷔시킨 신경균 감독의 < 새로운 맹세 >(1946)의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된다. 50년 초여름 박남옥 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6.25전쟁을 겪는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 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 (李保羅)와 백년해로를 기약한 것은 1954년 서른세 살 때인 부산에서였다. 9.28수복 후 관훈동 종로학원 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딸 경주를 낳았다. 그가 언니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 미망인 >은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찍은 영화였다. 20여명의 스태프에게 밥을 해먹이고 리어카 이동차에 올라 앉아 고무신 차림으로 레디고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4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못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남편과도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6년이었다. 영화 실패와 파경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낀 박 감독은 <시네마 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스크린 대신 활자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판권을 넘기고 57년 둘째 형부 김상문(金相文)이 운영하는 동아출판사에 들어갔다. 78년 퇴사할 때까지 21년 동안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 뒤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UCLA 디자인과를 나온 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박남옥 감독은 소주 2~3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 프로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나는 박 감독과 만나기 전에 그의 남편이었던 이보라 선생을 먼저 알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사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갈채다방’과 기독교방송국이 있던 종로 2가의 ‘시온다방’ 시절이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태익 , 조남사 등 주로 방송극작가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